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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 개정증보판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어령의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읽을 때 책 속에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라는 시 이야기가 나와서
또 다른 그의 시를 읽고 싶었었는데 마침 읽게 되었다. 지성인의 시는 어떤 것일까? 궁금하기도 했고
그가 무신론자였을 때 썼던 시와 주님을 영접한 후에 쓴 시가 함께 실려 있어서 그가 개심한 후와 전의
시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 흐름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자신을 시인이라 부르지 말라고 말하는 그, 그러나 그런 말과는 상반되게 평론가, 소설가, 교수를
넘나 들면서 그동안 쌓아온 축적된 글솜씨는 훌륭한 시로서 빛을 발하고 있다.
50년의 문단 생활을 해 오면서 처음으로 시집을 내서 부끄럽다고 말하는데
시는 자신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것이어서 지성인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저자가
약간은 거부감이 들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그럴까? 사람이 홀로 있을 때면 얼마나 철저하게
자신이 연약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인지? 그가 일본 토쿄에서 적은 글을 보면 그 외로움과 쓸쓸함이
절절이 배어 나온다.
세븐일레븐의 저녁시간.
'비닐 봉지 안에서 식어가는 식빵의 식욕
체온계처럼 옆구리에 끼고 가다가
내일 아침에도 혼자 앉을 식탁을 생각한다.
세븐 일레븐을 나오면 가랑비가 온다.
지폐보다 가벼운 쇼핑백의 무게
비에 젖어도 가벼운 하루의 무게.
아무리 지성인이어도 홀로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혼자 앉을 내일 아침 식탁을 걱정하는 그의 눈빛이
아른 거린다. 딸의 아픈 몸을 위해 기도하면서 딸이 병이 나으면 하나님을 믿겠다고 서원기도를
했던 그가 그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고 미루고 있을 때 도쿄에서의 홀로 외롭고 적적했던 비 내리는
밤의 이 시간을, 좀 더 일찍 기억했더라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시간도 더 빨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수면제 스무 알 속의 밤'에서는 '황진이의 동짓달 밤과도 같이 아무 의미도 없는 차가운 눈물이 고인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겉으로는 자신만만한 척 하면서, 얼마나 단단한 지성의 껍질이 그를 두르고 있었으면 딸
민아의 간곡한 부탁에도 하용조 목사님의 권면에도 그토록 오랜시간을 사람들의 마음을 졸이게 했던지.
그런 사람의 눈에서도 이렇게 아무 의미도 없는 차가운 눈물이 고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배려와
사랑임이 틀림없다.
여러 사람의 이목이 두려워 온누리 교회의 일본 행사 때 일본에서 세례를 받았던 이어령. '지성에서
영성으로'에서 그 글을 읽으면서 그런 영적 상태가 조금은 미심쩍기도 했고 의심스럽기도 했었다.
본인도 지성과 영성의 사이 문턱에 걸쳐있는 '경계인'이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러나 영적으로 단단한 것을 먹는 사람도 있고 그것을 소화시키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상기
시키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했던 바울의 말이 생각이 났다.
아직은 단단한 것을 먹을 신앙의 상태가 아니어서 그렇겠지라고. 넘어간다.
5부로 된 시에서는 어머니들에게, 나에게,시인에게,한국인에게,하나님에게. 향하는 시들이 골고루 배열되어
있다. '한국인에게'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시들이고 '나에게' 는 일본에 체류하면서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이
고스란히 흘러 나온다. 수록된 시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시들은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개인적인 시심을 담은 4부의 '나에게'와 마지막에 실린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두 편이다.
특이한 것은 이 무신론자의 기도 두 편이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무신론자였을 때 쓴 시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모든 사람이 잠든 깊은 밤에는 당신의 낮은 숨소리를 듣는다고' 그리고 '가끔
너무 적적할 때 아주 가끔은 당신 앞에 무릎을 끓고 기도를 드립니다. 라고 적고 있다.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았어도 그의 마음 빈 구석에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계속 소리치며
그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아무도 모르게 시로 표현하고 있었다.
아주 단단한 껍질로 둘러 쳐진 지성인 한사람을 개심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의 딸 민아를 통해서 역사
하셨고 그외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그를 하나님께로 이끄셨는데, 그가 아무리 겉으로는 강한 척하고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는 척 했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끊임없는 갈구를 외치고 있었음을
그의 시를 통해서 반사되는 프리즘을 통해서 보게 된다.
이 책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시집을 통해서, 지성인들이 자신을 보호해 줄 것으로 믿고 있는 단단한
이성의 껍질을 깨고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모두 나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문학박사,문학 평론가,이화여대 명예석좌 교수 이어령님.
저자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