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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 2009.11.12 - 통권 28
에세이스트사 편집부 엮음 / 에세이스트사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이번 호는 유난히 슬픈 사연이 많은것 같다.
잃어버림, 떠나보냄등의 단어가 어울리는 가을이라 그런가 보다.
글을 쓴다는 것, 특히 시나 소설이나 다른 장르 보다도 수필을 쓴다는 것은 삶을 과감없이 그대로 투영하는
것이기에 더 슬프고, 애잔하고, 마음이 아리다. 마음 한 구석에 꼭꼭 숨겨 두었던 자신만의 한을 한 점
남김없이 쏟아 붓는 작업이기에 그렇다. 시는 어느 정도의 은유도 있고 비유도 있고 소설도 허구를 바탕으로
쓰는 글이지만 수필만은 삶이 그대로 쏟아 부어진다. 아프면 아픈대로 슬프면 슬픈대로 ....마음 가는대로
아니 한을 풀어 내기로 작정하고 쓰는 글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매운탕 한 그릇을 놓고 부부가 먼 이국 땅에서 쏟아내는 오열이 그렇고 미장원에서 자른 짧은 머리를
보며 느끼는 삶의 외로움,자신의 삶에 대한 통찰이 그렇고, 한 여름 대형마트의 온도가 너무 낮아서 추위를
견디며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아르바이트 엄마의 한이 그렇다.
어느 신인 작가의 말처럼 수필이란,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장, 아픔을 달래는 치유의 장, 그리고 사람과 자연과
우주와의 관계를 독자와 언어로 소통하고 공감하는 장이 되는 것이다.
유독 여성들의 글이 이런 감정을 더 깊게 표현하고 글 고랑 고랑마다 삶의 굴곡들이 많이 패여있다.
다른 사람의 글이 바로 나의 삶이 되는 이유는 그들의 글에서 나도 같은 아픔을
느끼며 눈물을 훔치며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겪었던 감정을 나도 느꼈고 삶이란 결코 녹록치 않다는
것도 알게 되기에 결코 남의 삶이 아니었다.
빛바랜 항아리에서 퍼 올린 오래묵은 시간의 잔을 비우고 밑바닥에 엉겨 붙은 시간의 찌꺼기까지
남김없이 핥으며 밤새도록 누군가에게 가슴의 향수를 달래는 일이 바로 수필이 아닌가 한다.
부부간에도 친구간에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마음의 비밀들을 오롯이 풀어내는 일이 수필이기에
누구는 밥벌이로 시작한 수필이 이제는 삶이 원천이 되는것이리라.
마음이 건조하건 물이 넘쳐 흐르건 수필이 그것을 치유하는 역할을 한다. 건조하면 메마른 글이 될수도 있겠지만
그것 또한 그 사람의 감정 표현이고 삶의 일부분이기에 그것조차도 우리는 공감할 수 있게 된다.
메마른 댐에 물을 대고, 넘쳐 흐르는 물의 수위를 조절해 주는 역할 이것이 바로 글쓰기의 역할이 된다.
나 또한 그런 이유로 내 안에 고여있는 것들을 흘려 보내기도 하고 새로운 물을 다시 대 주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글을 공감하며 서로 교류하다 보면 내 안에 있는 것들이 서로 자리 바꿈을 하면서
제자리를 잡아가기도 하고 정화되기도 한다. 신비한 정화작용이다.
이번호에서는 '짧아지는 머리'를 읽으며 내가 느꼈던 감정과 이리도 닮았을까? 하는 마음에 쓴웃음이 나왔다.
점점 짧아지는 머리가 뭐 그리 대수겠냐고 하겠지만 머리 하나로 인해서 내 삶의 패턴이 많이도 바뀐것을
실감하고 수긍하고 받아 들여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머리 스타일을 고수할 수 없고 오직 남의 시선 때문에 또는 어쩔 수 없이 마음에도 없는
머리스타일을 할 때 삶의 비애를 느끼게 된다.
짧아졌다고 불평할 수도, 한탄할 수도 없는 것이 삶과 꼭 닮은 꼴이다.
'불평은 삶의 흐름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혹은 '자신이 어느 위치에 와 있는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이기에'...
'서두름 없이 이제 느긋하게 가자. 이어지는 것과 흐름에 순응해야지. '라며 서늘해진 뒷덜미를 감싸 안으며 중얼거리는
말 조차도 이젠 불평이 아닌 긍정으로 받아 들여야 함을 생각한다.
야생화에게 적당한 찬 바람을 맞는 것이 그들만의 겨울나기 생존방법이라는 것을 안다면 사람 또한 고통을
대하는 자세를 다음시간을 잘 살아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생각하면 편하지 않을까? 그 하나의 방법속에
글을 쓰는 것도 포함되고, 어느 약사의 글처럼 '터질 것 같은 심정을 토해 내 버릴 작은 돌파구라도 있어야
이 풍진 세상을 살아 갈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수필을 읽는 이유이고 글을 쓰는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