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으로 가는 길-정호승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슬픔이 기쁨에게-정호승>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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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인 결혼


추억을 많이 갖고 사는 것은

재산을 많이 갖고 사는 것보다

부자라고 한다면


우리의 곳간에는

일생을 퍼내고도 남을 보석이 있어요. 

...



북녘의 여류 시인에게

...

인생은 대충 살기에는 너무 길고

촘촘히 살기에는 너무 짧다는데

...



감옥 문을 열며

...

누구나 마음속에 감옥을 지니고 있다는데

오늘은 내 감옥 문부터 활짝 열어 버릴까 보다

위험한 나를 놓아 줄까 보다




그리움의 신발


어느 날이었지.

내게는 신호도 없이

불 같은 그리움 하나

새로 생겨나

그를 사랑하는 일말고는

이 세상 모든 일이 무의미했지.

...



어머니의 편지-문정희


딸아, 나에게 세상은 바다였었다.

그 어떤 슬픔도

날 모르는 그리움도

세상의 바다에 씻기우고 나면

매끄럽고 단단한 돌이 되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 돌로 반지를 만들어 끼었다.

외로울 때마다 이마를 짚으며

까아만 반지를 반짝이며 살았다.

알았느냐, 딸아


이제 나 멀리 가 있으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딸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뜨겁게 살다 오너라.

생명은 참으로 눈부신 것.

너를 잉태하기 위해

내가 어떻게 했던가를 잘 알리라.

마음에 타는 불, 몸에 타는 불

모두 태우거라

무엇을 주저하고 아까워하리

딸아, 네 목숨은 네 것이로다.

행여, 땅속의 나를 위해서라도

잠시라도 목젖을 떨며 울지 말아라

다만, 언 땅에서 푸른 잎 돋거든

거기 내 사랑이 푸르게 살아 있는 신호로 알아라

딸아, 하늘 아래 오직 하나뿐인

귀한 내 딸아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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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밤에 시인들은-문정희


가을 밤에 시인들은

깊은 잠을 자도 좋다.


머리맡에

하얀 원고지

기도처럼 펼쳐 놓고

깊이 잠들면


밤새

누군가 조용히 찾아와

낙엽 같은

시구 하나

떨구어 놓고 가리니.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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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 두서없이 이어져나가면서 서로의 성격을 흘끔거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어떤 사람을 두고 자신의 필생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살아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따라서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클로이를 만난 직후, 그녀를 필생의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렇게 무리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매일 서로에게 전화를 했다. 때로는 하루에 다섯 번씩. 특별히 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우리 둘 다 전에는 누구에게도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 이제야 비로소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고 상대에게도 이해시킬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 나는 그녀에게서 내가 평생 서툴게 찾아다녔던 바로 그 여자를 발견했다.


우리는 사건들에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서사적 논리를 부여했다. 클로이와 나는 우리가 비행기에서 만나 것을 아프로디테의 계획으로 신화화했다. 


우리는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운명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인생에 있는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의미도 우리가 만들어낸 것일 뿐이며, ... 우리가 비행기에서 누구를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에는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 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생기는 불안


일이 다르게 풀려나갔다면 클로이와 나는 서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 낭만적 운명론은 클로이와 내가 그런 생각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클로이가 내 삶에서 하게 된 역할을 다른 사람도 똑같이 해낼 수 있다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실수는 사랑하게 될 운명을 어떤 주어진 사람을 사랑할 운명과 혼동한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 클로이가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였다. ... 그녀와 함께하는 삶의 필연성을 느끼지 않게 되는 순간, 즉 그녀에 대한 사랑이 끝나는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정말 무서운 것은 나 자신을 용납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워하면서-어쩌면 그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다른 사람은 끝도 없이 이상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화기를 전화를 하지 않는 연인의 악마 같은 손에 들어가면 고문 도구가 된다. 


"두 사람은 똑같은 기대를 안고 사귀어야 해요. 서로 똑같이 줄 준비가 된 상태에서 말이에요. 한쪽은 그저 한번 즐기고 싶어하고 다른 쪽은 진정한 사랑을 원하면 안 된다는 거죠. 거기서 모든 괴로움이 생기는 것 같아요."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것은 상대가 따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매력적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따분한 사람은 나 자신이 되고 만다.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에 빠져 어떤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과 함께 천국에서 누리를 기쁨을 상상할 때,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위험을 잊기 쉽다. 정작 상대가 나를 사랑해줄 경우에 그 사람의 매력이 순식간에 빛이 바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데에 더 무게를 두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일에 집중했던 것은 아마도 사랑을 받는 것보다는 사랑을 하는 것이 언제나 덜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며, 큐피드의 화살을 맞기보다는 쏘는 것이,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쉽기 때문일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사람이 밖에서 보기에 매우 온전해 보이고-육체적으로 온전하고 감정적으로 "통합되어" 보이고-주관적으로 자신을 보면 몹시 분산되어 있고 혼란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익숙해지기 오래 전부터 이미 그 사람을 알고 있었다는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하는 사람이 원래 우리와 하나였다가 떨어져나간 우리의 "반쪽"이기 때문에 이런 익숙한 느낌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클로이를 알지 못하고 사랑하는 것이 훨씬 쉽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 가장 사랑하기 쉬운 사람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위협적인 차이는 중요한 점[국적, 성, 계급, 직업]에서 쌓여가는 것이 아니라, 취향과 의견이라는 사소한 점에서 쌓여갔다.


우리는 친밀함을 일종의 소유권이나 허가장으로 여겼다.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했을지는 모르지만, 이제 예의는 차리지 않았다. 


사랑이 오래 전에 사라져버리고 껍질만 남은 결혼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각방을 쓰면서 출근하기 전에 부엌에서 만나 몇 마디 건네는 관계. 상호 이해에 대한 희망은 오래 전에 포기하고 대신 통제된 오해에 기초하여 미지근한 우정을 지속하기로 합의한 관계. 저녁에 셰퍼즈 파이를 함께 먹을 때는 정중하게 예의를 지키지만, 새벽 3시에는 잠을 못 이루고 감정적 좌절에 가슴 아파하는 관계.


차이를 농담으로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적어도 사랑의 90퍼센트를 이루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라 로슈푸코


사람이란 절대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이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나 미워하는 바탕에는 주관적이고, 또 어쩌면 환상적인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생존의 문제가 아닐 때에는 의심도 쉽다. 우리는 여유가 있는 만큼만 회의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우리를 지탱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회의를 품는 것이 무척 쉽다. 탁자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사랑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되면 그것은 지옥이다. 


파스칼은 설사 신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라도, 그 작은 가능성이 주는 기쁨이 더 큰 가능성을 주는 혐오를 압도하기 때문에 신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쩌면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와 함께 있음으로 해서 내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클로이는 ... "나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함께 살 수는 없어. 나는 혼자 살지 않으면 녹아버리는 사람이야. 너만을 원한다는 것, 나한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려운 거야. ..." 그러나 그녀의 독립에 대한 크나큰 열망에도 불구하고, 물건을 떨어뜨리고 가는 일은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칫솔이나 구두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조각들이었다. ... 클로이는 나에게 그녀의 독특한 말투를 남겨두었다. 


우리는 이제 편집증적인 수다쟁이들, 고요가 배신처럼 보일까봐 대화를 중단하기를 꺼리는 수다쟁이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상대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런 믿음이 없을 때 생기는 두려움에서 발생하는] 지속적인 유혹은 이제 낡은 것이 되었다. 


우리는 종종 뒷공론에 탐닉했다. 함께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몰라도, 함께 싫어하는 것을 욕하는 친밀함에 비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공동의 경험이 있었다. ... 이것은 우리가 공동의 유산을 창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혼자서는 절대로 성격이 형성되지 않는다." 스탕달의 말이다. 성격의 기원은 우리의 말과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자아는 유동체이기때문에 이웃들이 윤곽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온전하다는 느낌을 얻으려면, 근처에 나 자신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 때로는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정체성을 소유할 능력을 상실한다. 사랑 안에서 자아가 지속적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많은 종교에서 우리를 볼 수 있는 신이라는 개념이 중심을 차지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누가 나를 본다는 것은 내가 존재한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나를 보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신이나 짝이라면 더욱 좋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며, 그 관심으로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 더 풍부하게 느끼게 해 준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만 또는 편견 때문에 우리를 잘못 안다. 심지어 사랑을 받는 것에도 엄청난 편견이 개입되어 있다-기분 좋은 왜곡이지만, 어쨌든 왜곡은 왜곡이다. ... 어떤 눈도 우리의 "나"를 완전히 담을 수는 없다. 


나의 연인이 될 수도 있었지만 운이 닿지 않아 우리가 제대로 알 기회도 얻지 못했던 사람과 마주치면 우리는 낭만적인 노스탤지어에 젖는다. 다른 사랑의 이야기의 가능성과 마주치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은 가능한 수많은 삶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상상 속에서만 클로이를 배반했던 것이 아디다. 종종 따분하기도 했다. 호화로운 호텔이나 궁전에 사는 사람들이 증언하듯이, 사람은 어떤 것에든 익숙해질 수 있다. 한동안 나는 클로이가 나를 사랑한다는 기적을 심드렁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녀는 내 삶의 일상적인,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 특징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우리 사랑 이야기의 초기처럼 클로이를 볼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는 순간들이 찾아오곤 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비슷한 순환 패턴을 따르기 때문에, 감정의 강도와 성격에 규칙적인 회전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리는 인간 감정의 고정성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사랑하기와 사랑하지 않기 사이에 존재하는 분리선은 딱 두 번, 즉 관계를 시작할 때와 끝낼 때에만 넘게 된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상대방에게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묻지 않는 것은 예의에 속한다. 개인적인 바람을 이야기하자면, 어떤 면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 때문에 사랑받은 것이다. 속성이나 특질을 넘어선 존재론적 지위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재치나 재능이나 아름다움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네가 너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눈 색깔이나 다리의 길이나 수표책의 두께때문이 아니라 네 영혼의 깊은 곳의 너 자신 때문이다. 


사랑은 첫눈에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빠른 속도로 죽지는 않는다. ... 감정의 석조 장식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몸체로부터 느릿느릿 떨어져나가는 과정이었다. 한때 귀중하게 여겼던 대상에게 책임감만 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 ... 완전히 사라라지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의사소통 체계 자체가 붕괴되었다는 사실은 논의하기조차 힘들다. 그것은 양쪽 모두 그것을 복원하고 싶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 정직한 대화는 짜증만 일으키고, 그것을 소생시키려다가 사랑만 질식시킬 뿐이다. ... 어떤 일이 쓸모없다고 해서 반드시 그 일을 안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꼭 누가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말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하는 말도 있는 법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야 한다. 너한테 삐치거나 질투심을 일으켜서 나를 살아하도록 만들겠다. ... 내 강요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나는 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사랑은 자발적으로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내켜하지 않는 수용자에게 사랑을 강요할 의지를 잃었다.


나는 클로이의 신의 없는 짓에, 그녀의 이단에, 그녀가 다른 남자와 밤을 보낸 것에 상처를 입었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도덕적으로 가능한가?


어떤 사람이 사랑을 한다거나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사람의 선택, 따라서 책임을 넘어선 일이기 때문이다. 


대책이 서지 않는 사랑의 고통 때문에 비관적이 된 나는 사랑으로부터 완전히 떠나버리기로 결심했다. 낭만적 실증주의가 도움이 될 수 없다면, 유일하게 유효한 지혜는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말라는 금욕주의적 충고였다. ... 그러다가 어느 날 디너 파티에서 레이철이라는 여자를 만났다. ... 나는 그녀의 눈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순간 나는 금욕주의적 철학을 내팽개치고 클로이에게 저질렀던 실수를 모조리 되풀이하는 일이 얼마나 쉬운지를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 레이철이 다음 주에 저녁 식사를 하자는 내 초대를 받아들였고, 그 후로 그녀를 생각만 해도 시인들이 마음이라고 부르는 영역이 떨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 떨림은 한가지를 의미할 수밖에 없었다-내가 다시 한 번 빠지기 시작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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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것은-문정희


사랑하는 것은

창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오래오래 홀로 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슬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합니다."

풀꽃처럼 작은 이 한마디에

녹슬고 사나운 철문도 삐걱 열리고

길고 긴 장벽도 눈 녹듯 스러지고

온 대지에 따스한 봄이 옵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한 것입니다.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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