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을 잘 모르면서도 글짓기는 집짓기와 유사한 것이라 믿고 있다. 지면(紙面)이 곧 지면(地面)이어서, 나는 거기에 글을 짓는다. 건축을 위한 공정 혹은 준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식을 생산해낼 것. 있을 만하고 또 있어야만 하는 건물이 지어져야 한다. 한 편의 글에 그런 자격을 부여해주는 것은 (취향이나 입장이 아니라) 인식이다. 둘째,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 건축에 적합한 자재를 찾듯이, 문장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다. 특정한 인식을 가감 없이 실어 나르는 단 하나의 문장이 있다는 플로베르적인 가정을 나는 믿는다. 그런 문장은 한번 쓰이면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다. 셋째, 공학적으로 배치할 것. 필요한 단락의 개수를 계산하고 각 단락에 들어가야 할 내용을 배분한다. 가급적 각 단락의 길이를 똑같이 맞추고 이를 쌓아 올린다. 이 시각적 균형은 사유의 구조적 균형을 반영한다. 이제 넘치는 것도 부족한 것도 없다. 한 단락도 더하거나 빼면 이 건축물은 무너진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 '이제는 지겹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혹한 짓이다. 그러니 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슬픔에 대한 공부일 것이다. - <눈먼 자들의 국가>


"우리가 스스로 야기한 상처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야기하지 않은 고통 앞에서는 울 수 있어도 자신이 야기한 상처 앞에서는 목석같이 굴 것이다."(<사랑의 탄생>사이먼 메이)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슬픔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한다. 이 경우 타인의 슬픔은 내가 어떤 도덕적 자기만족을 느끼며 공감을 시도할 만한 그런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추궁하고 심문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 슬픔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나를 불편하게 할 것이다.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최근 어느 글에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문학이 위로가 아니라 고문이라는 말도 옳은 말이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문학이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고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의 말만이 진실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정확히 인식한 책만 정확히 위로할 수 있다. ... <슬픔의 위안> ... (론 마라스코와 브라이언 셔프)저자들은 "슬픔이 원기를 고갈시키는 것처럼, 감정 역시 에너지를 무척이나 소진시킨다는 점"을 지적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그것은 고마운 일이므로 나는 좋은 감정으로 응대한다. 그러나 그 응대는 그 자체로 나의 감정적 자원을 크게 소모시키는 일이다. 그런 일들이 피곤하다고 느껴지면 고마워할 줄 모르는 나 자신에게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것이 또 나를 갉아 먹는다. ... 저자들은 이렇게 말을 잇는다. 슬픔에 빠져 있지만 말고 외출도 하고 사람도 만나라고 말하는 이들의 헛소리에 신경 쓰지 말라고. 당신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저 아무 일도 안 하고 쉬는 것일 뿐이라고. 집안일도 남에게 맡겨버리고 필요하면 수면제도 먹으라고. ...


"이제 그는 한번 알게 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한 가지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가장 완벽한 사랑의 경우에서 조차 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덜 깊게 사랑한다는 사실이었다. 똑같이 착한, 똑같이 재능을 타고난, 똑같이 아름다운 두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만, 상대를 똑같이 사랑하는 두 사람은 있을 수 없다."<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손턴 와일더


"이것은 아무리 힘껏 껴안아도 돌아다봐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뭘 물어도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논리 철학 논고>의 후반부다. 


<슬픈 짐승>모니카 마론 ... 어딘가에도 썼지만, '자신에게 전부인 하나를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나는 당해내질 못한다. 


욕망의 본질(금기가 있는 곳에 위반이 있다)


"나는 늘 내가 쓴 글이 출간될 때쯤이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글을 쓰고 싶어 했다."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 아니 에르노의 <집착>은 '고통'이라는 단어의 출현 빈도가 분량 대비 가장 높은 작품일 것이다.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은 근래 읽은 고통의 기록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젊었을 때는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문장)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 예컨대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이 사고이고 사람이 개를 무는 것이 사건이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고는 '처리'하는 것이고 사건은 '해석'하는 것이다. 


어딘가에 단편소설은 삶을 가로지르는 미세한 파열의 선 하나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썼었다.


"만일 내가 우연히 그들 중 누군가가 얼마 전에 지독한 실연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자. 나는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같은 하늘을 이고 살기조차 싫었던 그 인간을 내 집에 데려와 술을 대접하고 같은 천장 아래 재울 수도 있다. 심지어 술 냄새를 풍기는 그 인간의 입술에 부디 슬픈 꿈일랑 꾸지 말라고 굿나잇 키스까지 해줄 용의가 있다. ... 내가 별난 인간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실연의 유대만큼 대책 없이 축축하고 뒤끝 없이 아리따운 유대를 상상할 수 없다. 


"휴전이 되고 집에서 결혼을 재촉했다. 나는 선을 보고 조건도 보고 마땅한 남자를 만나 약혼을 하고 청첩장을 찍었다. 마치 학교를 졸업하고 상급 학교로 진학을 하는 것처럼 나에게 그건 당연한 순서였다. 그 남자에게는 청첩장을 건네면서 그 사실을 처음으로 알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나서 별안간 격렬하게 흐느껴 울었다." 단편 '그 남자네 집'의 한 대목이다. 그리고 선생은 정확히 네 문장을 더 적는다.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그리움을 위하여>박완서


세 가지를 따로 '구성의 3요소'라 부르는데 흔히 '인물 사건 배경'이라 외운다. 사실 정확한 순서는 '인물 배경 사건'이라야 한다. 특정 타입의 인물이 특정 배경 속에 던져질 때 특정 사건이 발생하는 게 소설이라는 세계다. 


사전의 '아포리즘(aphorism)'항목에는 "간결하고 기억하기 쉬운 형태로 말해지거나 쓰인 어떤 독창적인 생각"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보통 '잠언'이라고 옮긴다. 히포크라테스의 <잠언집>이 최초의 용례라고 한다. 그 책의 첫 문장인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가 아포리즘의 전형을 만들었다.(많이 알려진 대로 이 번역은 오역이다. '인생은 짧고 의술은 길다'가 맞다.) 우리는 아포리즘의 대가들을 몇몇 알고 있다. 니체는 아포리즘을 철학적 사유의 한 무기로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다. ...절망의 대가 에밀 시오랑 역시 실랄한 아포리스트다. 그의 책 <절망 끝에서>를 펼쳐보니 이런 구절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지나치게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신을 터무니없이 사랑하거나 미워하게 된다." 여기에 한 사람을 더 추가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오스카 와일드여야 할 것이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여자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단, 영원히 사랑하는 것만 빼고." 이런 문장은 일단 한번 듣고 나면 결코 잊을 수 없게 된다. 


시와 소설 두 부문에서 모두 퓰리처상을 받은 유일한 저자이기도 한 로버트 펜 워런은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라는 글에서 이런 대답을 했다. "소설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소설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줄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보낸 순간>의 말미에 소설가 김연수가 적어놓은 문장이다. 먼저 '쓰기'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매일 쓴다고 해서 반드시 글을 잘 쓰게 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사실만은 장담할 수 있다. ...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우리의 모습은 달라진다." 인간은 긍정적인 신호보다 부정적인 신호를 다섯 배 더 강하게 받아들인다는 것, 그러므로 한 번 비난을 받으면 다섯 번 칭찬을 받아야 마음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 글을 쓰는 행위는 자신을 긍정하는 일인 것이어서 그 덕분에 우리 존재가 실제로 바뀔 수 있다는 것 등이 그의 체험적 결론이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은 진부해지기는커녕 날마다 새롭다.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선택 앞에서 대다수는 자신에게 편안한 길을 택하며 그것을 비난받을 일이 못 된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주 드물게도 고통이 더 많은 쪽으로 가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 물론 다른 이들도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살아서 입신출세한 사람을 선망은 할 수 있어도 존경까지 할 필요는 없다. 나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그 고통을 함께하기로 결심한 사람,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자신의 안락을 포기한 사람들만 존경한다.나는 우리의 대통령이 부디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 환상을 품고 있지는 않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고 구세주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삶이 오늘의 그를 믿게 한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능력과 그것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능력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치명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귀 기울일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말을, 반값 임금에 혹사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말을, 차별당하는 소수자의 말을. 그 고통을 알겠어서, 차마 도망칠 수 없어서,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다.


요령이 필요하다. 한 작가에 대해 신속 정확하게 알고 싶으면 일단 세 권의 책을 읽으면 된다. 데뷔작, 대표작, 히트작, 데뷔작에는 한 작가의 문학적 유전자가 고스란히 들어 있기 때문에, 대표작에서는 그 작가의 역량의 최대치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히트작은 그가 독자들과 형성한 공감대의 종류를 알려주기 때문에 읽을 가치가 있다. 


잘 쓴 것과 매혹적인 것은 확실히 같지가 않다.


자기 자신을 폭로하는 시 쓰기가 읽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율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을 입증한 사람이 바로 김수영입니다.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러니를 실천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소. ... 그대 자신을 위조하는 것도 할 만한 일이오. ... 포즈가 부동자세에까지 고도화할 때 감정은 딱 공급을 정지합디다." <날개> 이상


당신이 한번 포기한 적 있는 대상은, 절대로 포기 못 할 대상이 다시는 될 수 없다. 그것을 포기할 때, 절대로 포기 못 하겠다는 그 마음까지 함께 포기한 것이므로. 그러므로 한번 포기한 대상을 다시 포기하는 일은 처음보다 훨씬 쉬워진다. 


휴대폰 덕분에 당신은 마침내 '글자'가 되었다. ... 그러면서 당신이 쉬워졌다.


타인의 생각이나 감정은 특별히 노력하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반면 나 자신의 생각과 감정은 언제나 생생하고 절박하며 현실적이다. 그래서 대체로 우리는 나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해석한다.


모험을 앞두고 두려워하는 텔레마코스에게 멘토르(로 변장한 아테나)는 말한다. "걱정마라. 꼭 해야 할 말의 대부분은 네 스스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처 못다 말한 나머지는 신들께서 도와주실 것이다. 가자. 내가 너와 함께 가겠다."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한 것이며 타인의 진실이란 얼마나 섬세한 것인지를 편리하게 망각한 채로 행하는 모든 일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뛰어난 작가는 모국어를 외국어처럼 사용한다."-프루스트


선택한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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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풀 - 류시화


들풀처럼 살라

마음 가득 바람이 부는

무한 허공의 세상

맨 몸으로 눕고

맨 몸으로 일어서라

함께 있되 홀로 존재하라

과거를 기억하지 말고

미래를 갈망하지 말고

오직 현재에 머물라

언제나 빈 마음으로 남으라

슬픔은 슬픔대로 오게 하고

기쁨은 기쁨대로 가게 하라

그리고 침묵하라

다만 무언의 언어로

노래부르라

언제나 들풀처럼

무소유한 영혼으로 남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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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아무도 내가 말하는 것을 알 수가 없고

아무도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할 수 없다.

사랑은 침묵이다

...


나무는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


여기 죽은 나무가 있다

누군가 소리쳐서 뒤돌아보니

그곳에 내가 쓰러져 있었다

물을 주면 살아날지도 몰라

누군가 다가가서 흔들어 본다

죽은 나무는 기척이 없다

나무는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

그냥 잎을 버리고

죽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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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류시화


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

물방울로 만나 물방울의 말을 주고받는

우리의 노래가 세상의 강을 더욱 깊어지게 하고

세상의 여행에 지치면 쉽게 

한 몸으로 합쳐질 수 있었다

사막을 만나거든

함께 구름이 되어 사막을 건널 수 있었다


그리고 한때 우리는 

강가에 어깨를 기대고 서 있던 느티나무였다

함께 저녁강에 발을 담근 채

강 아래쪽에서 깊어져 가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며

우리가 오랜 시간 하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함께 기울고 함께 일어섰다

번개도 우리를 갈라 놓지 못했다


우리는 그렇게 영원히 느티나무일 수 없었다

별들이 약속했듯이

우리는 몸을 바꿔 늑대로 태어나

늑대부부가 되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늑대의 춤을 추었고

달빛에 드리워진 우리 그림자는 하나였다

사냥꾼의 총에 당신이 죽으면

나는 생각만으로도 늑대의 몸을 버릴 수 있었다


별들이 약속했듯이

이제 우리가 다시 몸을 바꿔 사람으로 태어나

약속했던 대로 사랑을 하고

전생의 내가 당신이었으며

당신의 전생은 또 나였음을

별들이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당신은 왜 나를 버렸는가

어떤 번개가 당신의 눈을 멀게 했는가


이제 우리는 다시 물방울로 만날 수 없다

물가의 느티나무일 수 없고

늑대의 춤을 출 수 없다

별들의 약속을 당신이 저버렸기에

그리하여 별들이 당신을 저버렸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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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먼저 자신을 존경하는 것부터 시작하라.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신을, 아직 아무런 실적도 이루지 못한 자신을 인간으로서 존경하는 것이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여겨지고 사람에 대한 증오심이 느껴질 때에는 자신이 지쳐 있다는 신호라 여기고 그저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 그것이 스스로를 위한 최선의 배려다. 


주변이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마다 고개를 들이밀면 결국에는 공허해질 뿐이다. ... 우리의 인생은 세상의 모든 일들을 보고 들을 수 있을 만큼 오래도록 이어지지 않는다. 젊은 시절, 자신이 관계할 방향을 착실히 파악하고 그것에 전념하면 훨씬 현명하고 충실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더 기뻐하라. 사소한 일이라도 한껏 기뻐하라. 기뻐하면 기분이 좋아질 뿐 아니라, 몸의 면역력도 강화된다. ... 마음이 이끄는 대로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라. ... 인생을 기뻐하라. 즐겁게 살아가라.


함께 침묵하는 것은 멋진 일이다. 더 멋진 일은 함께 웃는 것이다. 두 사람 이상이 함께 동일한 체험을 하고, 함께 감동하고 울고 웃으며 같은 시간을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도 멋진 일이다.


즐거움이라는 것은 언제나 어설픈 지식을 가진 자의 손아귀에 있다. ...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취미는 언제나 변함없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굉장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배울 수 있다. 다 자란 어른일지라도 '배움'의 즐거움을 통하여 그 무언가의 달인이 될 수 있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무언가를 하는 이상, 불필요한 것들을 벗어나 말끔히 털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무엇을 버릴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할 필요는 없다. 마치 노랗게 변한 잎이 나무에서 떨어져 사라지듯이, 당신이 열심히 행동하는 동안 불필요한 것은 저절로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의 몸음 더욱 가벼워지고 목표한 높은 곳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지금 이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라.


자신의 의견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렇다 저렇다 논하지도 말라. 그것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불신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고 싶다면 일단은 단언하라.


그것이 사물이든 인간이든 마찬가지다. 이미 손에 넣어 익숙해졌기에 싫증이 난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싫증나 있는 것이다. 손에 넣은 것이 자기 안에서 변하지 않기에 질린다. ... 인간으로서 끊임없이 성장하는 사람은 계속적으로 변화하기에 똑같은 사물을 가지고 있어도 조금도 싫증을 느끼지 않는다. 


지루함을 느끼는 자는 높은 감성으로 활발한 활동을 추구하려는 정신을 가지고 있기에, 뜻밖에 주어진 시간에 지루함을 느낀다. 


친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눠라. 여러 가지에 대하여 이야기하라. ... 자신이 이야기한 것은 자신이 믿길 원하는 구체적인 어떤 것이다. 가슴을 열고 허심탄회하게 친구와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명확히 보인다. 또한 누군가를 친구로 삼는다는 것은 자신이 그 친구 안에 존경할 만한 그 무엇, 인간으로서 어떤 동경을 품고 있음을 뜻한다. 


자신과 친구에 대해서는 늘 성실하라. 적에 대해서는 용기를 가져라. 패자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어라. 그 밖의 모든 경우에 대해서는 언제나 예의를 지켜라.


친해지면 상대의 개인적인 영역에까지 성큼 발을 들여놓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종류의 인간과는 결코 교제하지 마라. 그런 사람은 가족처럼 사귄다는 것을 빌미로 결국 상대를 자신의 지배 아래, 영향력 아래 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교우관계에서도 서로를 혼동하지 않는 주의와 배려는 중요하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친구로 지낼 수 없다. 


늘 민감하고 날카로울 필요는 없다. 특히 사람과의 교제에서는 상대의 어떤 행위나 사고의 동기를 이미 파악했을지라도 모르는 척 행동하는 일종의 거짓 둔감이 필요하다. 


자신에 대하여 생리적 혐오를 가진 상대에게 아무리 정중하게 대해도, 그 자리에서 자신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결국에는 도리어 무례한 놈이라 여겨질 뿐이다. 반드시 모든 이로부터 사랑받아야 한다고 생각지 말라. 이러한 때에는 무리하게 애쓰지 말고, 평소의 자세로 담담히 지내는 것이 최선이다.


살아 있는 물고기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 스스로 낚아 올려야 한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견을 가지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깊이 파고들어 언어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악인에게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들의 공통점이란 자신을 증오한다는 것이다. ... 그들이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악은 급속도로 세상에 만연하게 될 것이다.


너무 과한 선물을 하면 상대는 고마워하지 않는다. 부담스러운 짐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물은 마음이라고 하지만, 적당하지 않으면 상대를 난처하게 만들 뿐이다. 


타인을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지 말 것. 타인을 평가하지도 말 것. 타인에 대한 소문도 입에 담지 말 것. 그 사람을 이렇다 저렇다 하는 생각도 애당초 하지 말 것.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문장을 쓰기 위해 문장의 기술을 아무리 배웠다고 해도 논리적인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표현이나 문장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기술을 배우기 이전에 자신의 머릿속을 개선하는 일이 우선이다. 


악과 독이 존재하기에 사람은 극복할 기회와 힘을 얻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만큼 강하게 단련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과 비슷한 자를 찾거나 슬픔을 나누는 것도 아니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삶을 사는 사람을 그 상태 그대로, 자신과는 반대의 감성을 가진 사람을 그 감성 그대로 기뻐하는 것이다. ... 두 사람 모두 그대로 기뻐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영원한 꽃다발을 들고 우매할 만큼 아낌없이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 상대가 누구든 사랑할 가치가 없는 자일지라도, 불공정한 인간일지라도, 사랑을 주어도 절대 감사 따윈 하지 않을 사람일지라도. 비는 선인의 위에도 악인의 위에도 차별하지 않고 내린다. 사랑도 그와 같아서 상대를 선택하지 않고 온몸을 적시고 만다. 


행위는 약속할 수 있다. 그러나 감각은 약속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감각은 의지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원히 사랑한다는 약속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랑은 감각만이 아니다. 사랑의 본질은 사랑한다는 행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연인을 원하는가. 좋은 사람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가. 자신을 깊이 사랑해 줄 사람을 원하고 있는가. 이것은 실로 잘난 척의 최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혼에 발을 들여놓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망설이고 있다면 차분히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라. 자신은 상대와 여든이 되어도, 아흔이 되어도 여전히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오랜 결혼생활 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순간적인 것이며 어느 사이엔가 세월 뒤로 흘러간다. 그러나 둘이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일은 결혼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노년이 될수록 대화 시간은 길어진다. 


우리가 읽어야 할 책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읽기 전과 읽은 후 세상이 완전히 달리 보이는 책. 우리들을 이 세상의 저편으로 데려다 주는 책.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이 맑게 정화되는 듯 느껴지는 책. 새로운 지혜와 용기를 선사하는 책. 사랑과 미에 대한 새로운 인식. 새로운 관점을 안겨주는 책. 


어떤 일이 불합리하다는 것이 그것을 폐지해 버리는 최우선적인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불합리하기에 오히려 그 같은 일을 필요로 하는 첫 번째 조건이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좋은 것은 멀리 돌아가는 길을 통해 목적에 다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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