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의 생각-류시화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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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어디서나-이해인


18

사랑은 파도 타기. 일어섰다 가라앉고 의심했다 확신하고 죽었다가 살아나는 파도 파도 파도.




<시간의 얼굴>-이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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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나무처럼 - 이해인


사랑도 나무처럼 

사계절을 타는 것일까


물오른 설레임이

연두빛 새싹으로 

가슴에 돋아나는

희망의 봄이 있고


태양을 머리에 인 잎새들이 

마음껏 쏟아내는 언어들로

누구나 초록의 시인이 되는 

눈부신 여름이 있고


열매 하나 얻기 위해

모두를 버리는 아픔으로

눈물겹게 아름다운

충만의 가을이 있고


눈 속에 발을 묻고

홀로 서서 침묵하여 기다리는

인고의 겨울이 있네


사랑도 나무처럼

그런 것일까


다른 이에겐 들키고 싶지 않은

그리움의 무게를

바람에 실어 보내며

오늘도 태연한 척 눈을 감는

나무여 사랑이여



<시간의 얼굴>-이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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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번만-정채봉


철옹성 인간이 있었다.

폭력의 악마가, 금력의 악마가, 권력의 악마가

차례로 찾아가서 유혹도 해보고, 회유도 해보았지만

번번히 퇴짜만 맞고 돌아왔다.


악마들이 특별 대책 회의를 열었다.

갑론을박 끝에 지금은 현직에서 은퇴한 늙은 악마를

특사로 임명했다.


늙은 악마는 다른 악마들이 원정할 때와는 달리

준비물 하나 없이, 그리고 수행원도 없이

홀몸으로 비실비실 떠났다.


그런데 놀라운지고?

그 인가의 철옹성이 허물어졌다는 속보가 날아오지 않는가?


돌아온 특사, 늙은 악마에게 악마네 신문 방송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쓰셔서 그 철옹성을 함락하셨습니까?"

"별다른 것이 아녜요. '딱 한 번만'이라고 졸랐지요."

"그러면 이번 한 번뿐이겠네요?"

"순진하기는... 자네도 그 인간 못지않구먼."

아, 한 번 맛보았는데 그것으로 그치는 인간들 보았어?

그렇게 망하는 길이 나는 거야."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정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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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동 2019-10-05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정채봉을 접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두장을 읽기도 전에 난 젇채봉에 반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사람도 있었구나 하는 감동....
좋은 글, 많이 올려 주세요 ^^
 

세상에서 가장 짧은 동화-정채봉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한테

헌 옷걸이가 한마디하였다.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길 바란다."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는지요?"

"잠깐씩 입히는 옷이 자기의 신분인 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정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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