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 류시화


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지구에 달맞이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이제 막 동그라미를 그려낸

어린 해바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은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내가 삶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하 그리움 때문

지구가 나비 한 마리를 감추고 있듯이

세상이 내게서 

너를 감추고 있기 때문


파도가 바다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그 속에서 장난치는 어린 물고기 때문이다

바다가 육지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모래에 고개를 묻고 한 치 앞의 생을 꿈꾸는 

늙은 해오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너는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나비의 그 날개짓 때문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한 내 그리움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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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 장승리


정확하게 말하고 싶었어

했던 말을 또 했어

채찍질

채찍질

꿈쩍 않는 말

말의 목에 팔을 두르고

니체는 울었어

혓바닥에서 혓바닥이 벗겨졌어

두 개의 혓바닥

하나는 울며

하나는 내리치며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부족한 알몸이 부끄러웠어

안을까봐

안길까봐

했던 말을 또 했어

꿈쩍 않는 말발굽 소리

정확한 죽음은

불가능한 선물 같았어

혓바닥에서 혓바닥이 벗겨졌어

잘못했어

잘못했어

두 개의 혓바닥을 비벼가며

누구에게 잘못을 빌어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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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풀 - 류시화


들풀처럼 살라

마음 가득 바람이 부는

무한 허공의 세상

맨 몸으로 눕고

맨 몸으로 일어서라

함께 있되 홀로 존재하라

과거를 기억하지 말고

미래를 갈망하지 말고

오직 현재에 머물라

언제나 빈 마음으로 남으라

슬픔은 슬픔대로 오게 하고

기쁨은 기쁨대로 가게 하라

그리고 침묵하라

다만 무언의 언어로

노래부르라

언제나 들풀처럼

무소유한 영혼으로 남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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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류시화


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

물방울로 만나 물방울의 말을 주고받는

우리의 노래가 세상의 강을 더욱 깊어지게 하고

세상의 여행에 지치면 쉽게 

한 몸으로 합쳐질 수 있었다

사막을 만나거든

함께 구름이 되어 사막을 건널 수 있었다


그리고 한때 우리는 

강가에 어깨를 기대고 서 있던 느티나무였다

함께 저녁강에 발을 담근 채

강 아래쪽에서 깊어져 가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며

우리가 오랜 시간 하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함께 기울고 함께 일어섰다

번개도 우리를 갈라 놓지 못했다


우리는 그렇게 영원히 느티나무일 수 없었다

별들이 약속했듯이

우리는 몸을 바꿔 늑대로 태어나

늑대부부가 되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늑대의 춤을 추었고

달빛에 드리워진 우리 그림자는 하나였다

사냥꾼의 총에 당신이 죽으면

나는 생각만으로도 늑대의 몸을 버릴 수 있었다


별들이 약속했듯이

이제 우리가 다시 몸을 바꿔 사람으로 태어나

약속했던 대로 사랑을 하고

전생의 내가 당신이었으며

당신의 전생은 또 나였음을

별들이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당신은 왜 나를 버렸는가

어떤 번개가 당신의 눈을 멀게 했는가


이제 우리는 다시 물방울로 만날 수 없다

물가의 느티나무일 수 없고

늑대의 춤을 출 수 없다

별들의 약속을 당신이 저버렸기에

그리하여 별들이 당신을 저버렸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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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나무 - 류시화


여기 바람 한 점 없는 산속에 서면

나무들은 움직임 없이 고요한데

어떤 나뭇가지 하나만 흔들린다

그것은 새가

그 위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별일없이 살아가는 뭇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새는 그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나무는 더이상 흔들리지 않지만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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