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쁜 시인-문정희


나는 아무래도 나쁜 시인인가 봐.

민중 시인 K는 유럽을 돌며

분수와 조각과 성벽 앞에서

귀족에게 착취당한 노동을 생각하며

피 끊는 분노를 느꼈다고 하는데


고백컨대

나는 유럽을 돌며

내내 사랑만을 생각했어

목숨의 아름다움과 허무

시간 속의 모든 사랑의 가변에

목이 메었어.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며

눈물을 흘렸지

아름다운 조각과 분수와 성벽을 바라보며

오래 그 속에 빠지고만 싶었지.


나는 아무래도 나쁜 시인인가 봐.

곤도라를 젓는 사내에게 홀딱 빠져

밤새도록 그를 조각 속에 가두려고

몸을 떨었어.


중세의 부패한 귀족이 남긴

유적에 숨이 막혔어.

그 아름다움 속에

죽고 싶었어.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문정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겨울 저녁의 시-문정희


뼈가 시리게

슬픈 때는

세수를 했지.


수돗물을 폭포수처럼 틀어 놓고

두 손으로 찬물 받아

아무도 몰래

슬픔을 씻었지.


깜박이던 별들이

뿌우연 물안개 속으로 떨어질 때

그리움처럼 부드러운 비누를 칠해

머리를 감았지.


슬픔의 차거움과

슬픔의 향기로움이

전류처럼 머릿속으로 흐르면


갑자기 영롱해진 기억의 창가에

세상은 흔들리는 

가랑앞 하나


뼈가 시리게 

슬픈 때는

푸푸거리며 세수를 했지.


하얀 수건으로 

물안개를 닦았지.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문정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경로석에 앉은 노부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할머니 옆에서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고 있었는데 제법 시끄러웠다. 게다가 어르신은 뉴스 한 꼭지가 끝날 때마다 "어허" "이런" 등의 추임새를 꽤 격렬하게 넣었다.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앵커 멘트와 어르신의 목소리가 객차를 점령하다시피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할머니가 할아버지 손등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말했다. "여보, 사람들이 많으니까 이어폰 끼고 보세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아, 맞다. 알았어요. 당신 말 들을게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이어폰을 꺼내더니 보일 듯 말 듯 한 엷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귀에 꽂았다. ...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당신 말 들을게요"라는 어르신의 한마디가 내 귀에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오"하는 문장으로 들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딧불 - 윤동주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그므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조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편지-윤동주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