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것은-문정희


사랑하는 것은

창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오래오래 홀로 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슬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합니다."

풀꽃처럼 작은 이 한마디에

녹슬고 사나운 철문도 삐걱 열리고

길고 긴 장벽도 눈 녹듯 스러지고

온 대지에 따스한 봄이 옵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한 것입니다.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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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을 닦으며-문정희


누군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는다


창에는 하늘 아래

가장 눈부신 유리가 끼워 있어


천 도의 불로 꿈을 태우고

만 도의 뜨거움으로 영혼을 살라 만든

유리가 끼워 있어


솔바람보다도 창창하고

종소리보다도 은은한

노래가 떠오른다


온몸으로 받아들이되

자신은 그림자조차 드러내지 않는

오래도록 못 잊을

사랑 하나 살고 있다. 


누군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아서


맑고 투명한 햇살에

그리움을 말린다.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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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보-문정희


나는 너에게 

전보가 되고 싶다.


어느 일몰의 시간이거나

창백한 달이 떠 있는

신새벽이어도 좋으리라


눈부신 화살처럼 날아가

지극히 짧은 일격으로


네 모든 생애를 바꾸어 버리는

축전이 되고 싶다


가만히 바라보면

아이들의 놀이처럼

싱거운 화면, 그 위에 꽂히는

한 장의 햇살이고 싶다


사랑이라든가

심지어 깊은 슬픔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전보가 되고 싶다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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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 저녁-문정희


나는 이제 늙은 나무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다 버리고 정갈해진 노인같이

부드럽고 편안한 그늘을 드리우고 앉아

바람이 불어도

좀체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성한 꽃들과 이파리들에 휩쓸려 한 계절

온통 머리 풀고 울었던 옛날의 일들

까마득한 추억으로 나이테 속에 감추고

흰눈이 내리거나

새가 앉거나 이제는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저 대지의 노래를 조금씩

가지에다 휘감는

나는 이제 늙은 나무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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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유리병 속에 담아 둘까-문정희


사랑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서는

고독이라는

유리병 속에 담아 둘까.


사랑은 너무나도 순간적이어서

마치 미세한 향기 같아서

그대와 잠시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연기처럼 피어 올랐다가

이내 사라지기도 한다.


정략이 조금 개입된 결혼이

좋은 결혼이듯이

인생은 투명한 순도만으로는

오히려 부서지기 쉽듯이

사랑에도 약간의 허영과 가식이 섞여야

더욱 설레고 뜨거운 것일까.


아낌없이 훌훌 태우되

보두 다 들여다보진 말 것.


거기엔 뜻하지 않게도 화상 같은

애증이 끼어들고

권태와 변질의 낭떠러지가

눈앞에 당도하느니


아름다운 사랑의 등성이에

한나절 외줄을 타고 오르다 보면

거기엔 바람만 쓸쓸히 불고

바위 틈엔 에델바이스 대신

이런 난해한 악마가 기다리고 있느니.


사랑을 유리병 속에 담아 둘까.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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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3 11: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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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3 12: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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