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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 - 정현종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날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모든 귀가 막혀 있어

우리의 행성은 캄캄하고

기가 막혀

죽어가고 있는 듯.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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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달 - 천양희


가시나무 울타리에 달빛 한 채 걸려 있습니다

마음이 또 생각 끝에 저뭅니다

망초꽃까지 다 피어나

들판 한 쪽이 기울 것 같은 보름밤입니다

달빛이 너무 환해서

나는 그만 어둠을 내려놓았습니다

둥글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

달보고 자꾸 절을 합니다

바라보는 것이 바라는 만큼이나 간절합니다

무엇엔가 찔려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달도 때로 빛이 꺾인다는 것을

한달도 반 꺾이면 보름이듯이

꺾어지는 것은 무릎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을 들고 달빛 아래 섰습니다

들숨 속으로 들어온 달이

마음속에 떴습니다

달빛이 가시나무 울타리를 넘어설 무렵

마음은 벌써 보름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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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을 보라 - 이원규


앞만 보지 말고 옆을 보시라.

버스를 타더라도 맨 앞자리에 앉아서

앞만 보며 추월과 속도의 불안에 떨지 말고

창 밖 풍경을 바라보시라. 


기차가 아름다운 것은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이지요. 

창 밖은 어디나 고향 같고

어둠이 내리면

지워지는 풍경 위로 선명하게 떠오르는 얼굴들. 


언제나 가파른 죽음은 바로 앞에 있고

평화로운 삶은 바로 옆에 있지요.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를 밟고 가는 이에게 돌을 던지지는 말아야지요.

누군가 등 뒤에서 꼭같이 뒤통수를 후려칠지도 모르니

앞서는 이에게 미혹되지도 말고

뒤에 오는 이를 무시하지도 말아야겠지요.


일로매진의 길에는 자주 코피가 쏟아지고

휘휘 둘러보며 가는 길엔 들꽃들이 피어납니다.


평화의 걸음걸이는 느리더라도 함께 가는 것.


오로지 앞만 보다가 화를 내고 싸움을 하고

오로지 앞만 보다가 마침내 전쟁이 터집니다.

더불어 손잡고 발밑의 개미 한 마리,

풀꽃 한 송이 살펴보며 가는 생명평화의 길.


한 사람의 천 걸음보다

더불어 손을 잡고 가는 모두의 한 걸음이 더 소중하니

앞만 보지 말고 바로 옆을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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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느낌 - 김혜순


그럴 때가 있다 갑자기

느닷없이 내 몸속을 물로 된 사람이 스윽 지나갈 때가

들어가선 못 빠져나와 안간힘 쓸 때가

핏줄기에 빗줄기가 섞여들어 졸졸졸 흘러내릴 때가


그러면 또 내가 그걸 못 견뎌서

내 몸속에서 춤추는 사람 천 명이 쏟아져 나온다


여름비가 오열하는 북처럼

춤추는 사람 천 명을 때린다

격정적으로 때린다

숲의 천 그루 나무들이 

전신으로 물방울을 튀기며

쏴아쏴아 군무에 빠져 있다


그럴 때가 있다 갑자기

느닷없이 내가 내 몸속으로 깊이깊이 숨어들 때가


그러면 또 내가 그걸 못 견뎌서

몸속에서 북 치는 사람 천 명이 쏟아져 나온다


그래도 아직 내 몸통 속에 갇힌

미친 멜로디가 다 풀리지 않았는지


눈물이 한 방울 간신히 몸 밖으로 떨어지고

세상의 모든 우물이 넘쳐흐른다


광릉수목원 앞길 자동차들이 배처럼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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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망록 - 문정희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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