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호승


슬픔의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

하늘의 별로서 슬픔을 노래하며

어디에서나 간절히 슬퍼할 수 있고

어디에서나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슬픔의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

슬픔처럼 가난한 것 없을지라도

가장 먼저 미래의 귀를 세우고

별을 보며 밤새도록 떠돌며 가소서.

떠돌면서 슬픔을 노래하며 가소서.

별 속에서 별을 보는 나그네 되어

꿈속에서 꿈을 보는 나그네 되어

오늘밤 어느 집 담벼락에 홀로 기대보소서.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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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많은 이 세상도 -정호승


슬픔 많은 이 세상도 걸어보아라.

첫눈 내리는 새벽 눈길 걸을 것이니

지난가을 낙엽 줍던 소년과 함께

눈길마다 눈사람을 세울 것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걸어보아라.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던 사람들이

눈사람을 만나러 돌아올 것이니

살아갈수록 잠마저 오지 않는 그대에게

평등의 눈물들을 보여주면서

슬픔으로 슬픔을 잊게 할 것이니

새벽의 절망을 두려워 말고

부질없는 봄밤의 기쁨을 서두르지 말고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살아보아라.

슬픔 많은 사람끼리 살아가면은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아름다워라.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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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기쁨에게-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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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으로 가는 길-정호승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슬픔이 기쁨에게-정호승>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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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밤에 시인들은-문정희


가을 밤에 시인들은

깊은 잠을 자도 좋다.


머리맡에

하얀 원고지

기도처럼 펼쳐 놓고

깊이 잠들면


밤새

누군가 조용히 찾아와

낙엽 같은

시구 하나

떨구어 놓고 가리니.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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