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술가이며 정신의학자인 프랭클 박사는 크고 작은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 자기의 환자들에게 가끔, "어째서 자살을 하지 않았습니까?"하고 묻는다. ... 프랭클 박사는 이러한 대답에서 심리요법에 관한 지침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와 같이 조각난 삶의 가느다란 실오라기를 의미와 책임의 확고한 유형으로 짜 만드는 것이 프랭클 박사가 스스로 창안한 현대의 '실존적 분석'과 '로고데라피'의 목적이요 추구하는 바다. ... 프랭클은 즐겨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살아야 할 이유를 아는 사람은 거의 어떠한 상태에서도 견뎌낼 수 있다." -서문, 고든 W. 앨포트


만약 지금 그 누가 있어서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인간에 대한 평범한 정의의 진실성을 우리에게 물어 온다면 우리는 기꺼이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적응했는가는 묻지 말아 달라."


절망이 자살을 보류시킨다. 


레싱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이 세상에는 이성을 반드시 잃게 하는 일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잃을 게 없는 일들도 있다."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해 비정상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정상적인 행위이다. 심지어 우리 정신과 의사들도 비정상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의 반응을 기대한다. 


죄수는 참담한 광경에도 이제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이제 그의 감정은 무디어졌고, 그래서 냉담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나는 그를 깨우려고 했다. 그리고 그의 몸을 흔들어 깨우려고 손을 뻗쳤으나 내가 하려던 짓에 오히려 내가 놀라 갑자기 손을 거두고 말았다. 그 순간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절실하게 의식했다. 그 사실은 아무리 무서운 꿈이라도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수용소의 현실보다 더 고약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나는 뻗쳤던 손을 거두지 않을 수 없었다. 


로고데라피는 보다 미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시 말하면 환자가 장래에 실천(혹은 충족)되어야 할 임무와 의미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로고스(logos)'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긴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사람이 이미 성취한 것과 앞으로 달성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 혹은 현재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과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의 사이에서 차이에서 오는 긴장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긴장은 인간이 타고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정신적 안정에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과잉된 의욕, 또는 내가 부르고자 하는 '과다한 의욕'은 특히 성적 신경증에서 관찰될 수 있다. 남자가 자기의 성적 능력을 과시하려고 하면 할수록, 또 여자가 오르가슴을 체험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들의 성공률은 반대로 적어지게 마련이다. 쾌락은 그저 부수적인 결과나 부산물이어야 하며, 또 반드시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쾌락 그 자체에 목적을 두게 되면 그 정도에 따라 망쳐지게 되고 결단나게 될 것이다.


그는 땀을 많이 흘리는 데 대한 공포때문에 나와 상담하러 온 것이었다. 그가 발한증이 터지리라고 예상하기만 하면 어김없이 발한작용을 촉진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순환형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나는 다음과 같이 환자에게 충고했다. 땀이 다시 나려고 할 경우에 그가 얼마나 흘릴 수 있는가를 사람들에게 여유있게 보여주기 위해 작정하라고. 한 주일이 지난 후 그는 보고하러 다시 나를 찾아왔다. ... "지난 번 나는 한 쿼터밖에 땀을 흘리지 못했는데 이제는 적어도 열 쿼터는 흘려야지." 그 결과 그는 이미 땀 공포증으로 4년이나 고통을 겪었는데 지금은 단 한번의 치료로 일주일도 안되어 영원히 그 공포에서 벗어났다. 


역설적인 의도는 불면증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데 대한 공포는 잠을 자야겠다는 과잉된 의도와는 반대로 환자가 잠을 잘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러한 특별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잠을 자려고 노력하지 말라고 나는 종종 환자에게 충고한다. 다시 말하면 잠을 자야겠다는 과잉 의도는 잠을 이룰수 없을 것이라는 예측 불안에서 생겨난 것이므로 잠들지 않으려는 역설적인 의도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과 희망, 그리고 사랑은 '의지(will)'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지휘로서 성립될 수 없다. 나는 믿으려고 '의지'할 수 없고, 희망하려고 '의지'할 수 없으며, 사랑하려고 '의지'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절대로 의지하려고 '의지'할 수 없는 것이다.


라 로슈푸코는 이별이 사랑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언급한 적이 있다. 그 말을 의역한다면, 큰 불꽃이 강풍에 더욱 거세어지는 반면 조그만 불꽃은 그로 인해 꺼져버리는 것처럼 강한 신앙은 곤경과 재난에 의해 더욱 굳건해지는 반면 연약한 믿음은 그로 인해 약화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빈이란 땅에서 부각된 심리요법 학파에 각기 한 가지씩의 미덕을 할당해 주고 싶은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용기라는 미덕은 아들러 학파에게 적합하다. ... 또 하나의 미덕은 프로이트 학파의 정신분석, 즉 그 객관성에 맞는다고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