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내는 정혜신이다. 그녀와 나는 일년 353일(이틀 뺀 거 맞다)24시간 함께 있다. 무엇보다 연인이고 같은 일을 하는 도반이었으며 서로에게 스승이었고 특별하게는 전우였다. 심리적 참전의 현장에서 그녀는 치유자로 나는 심리 기획자로 서로를 보호하는 전우로 함께 했다.


아이가 울면서 말했다. "엄마는 그러면 안 되지. 내가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지. 선생님도 혼내서 얼마나 속상했는데 엄마는 나를 위로해 줘야지. 그 애가 먼저 나에게 시비를 걸었고 내가 얼마나 참다가 때렸는데. 엄마도 나보고 잘못했다고 하면 안 되지."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 해도 24시간 건강하게 살지 못하듯 노이로제가 있는 사람이라도 24시간 노이로제 환자로 살지 않는다.


공황발작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심장이 멈추는 것 같은 느낌이 망치처럼 날아오는 증상이다. 그 순간 당사자는 죽을 것 같은 공포를 생생하게 감각한다. 그런 현상이 몇 분간 지속된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극단의 공포다. 그런 경험을 한 두번 하면 일상 전체가 두려움에 휩싸인다.


스타란 너(대중)의 취향에 나를 온전히 맞추는 사람만이 살아남는 생태계에서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다. 나를 너에게 맞추는 촉이 고도로 발달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다르게 표현하면 스타가 누리는 지위와 힘은 빼어난 재능과 고도의 촉을 바탕으로 자기 소멸의 경지에 다다른 이가 누리는 화려한 보상이다. 


사람은 나를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에게 끌린다. 사람이 가장 매력적인 순간은 거침없이 나를 표현할 때다. 


자기성이 소거된 채 부모의 기대나 사회적 역할, 가치 등에 전적으로 기대어 살아가던 사람은 절대적 의존 대상이던 그 부모나 배우자와 이별하거나 절대적인 내 역학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일이 없어지거나 그 가치가 빛을 잃을 때 공황발작을 경험할 수 있다. 


그랜드 피아노를 혼자서 들어올리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 철옹성 같기도 하고 안개 같기도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정확한 한 지점도 그랜드 피아노처럼 분명히 존재한다. 그걸 알면 사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그 지점이 바로 한 개별적 존재로서 그 사람의 고유한 '자기'다.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어야 사람은 그 다음 발길을 어디로 옮길지 생각할 수 있다. 자기에 대해 안심해야 그 다음에 대해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 ... 가장 절박하고 힘이 부치는 순간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네가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너는 옳다'는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이다. ... "당신이 옳다" 온 체중을 실은 그 짧은 문장만큼 누군가를 강력하게 변화시키는 말은 세상에 또 없다.


고급 정장에 계급장이나 보석을 주렁주렁 달고 있을 때 나를 주목하고 인정해 준 사람보다 내가 맨몸이었을 때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극진히 보살펴 준 사람은 뼛속에 각인된다. 


지금 우리의 일상에서 나타나는 죽음이나 죽음 충동은 우울증 환자라는 특수한 질병군에서만 나타나는 특별하고 예외적인 현상인가. ... 이 땅에서 사는 일은 죽음 충동을 특별한 질병의 징후라고 여길 수 없을 만큼 일상적이지도 평화롭지도 않다.


슬픔이나 무기력, 외로움 같은 감정도 날씨와 비슷하다. 감정은 병의 증상이 아니라 내 삶이나 존재의 내면을 알려주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 무기력은 은퇴 후 우울증이라는 병인가. 해결하고 극복해야 할 과제인가. 아니다.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순하게 수용해야 할 삶의 중요한 감정이다.


새롭게 활력을 찾겠다고 헬스클럽과 학원을 전전할 게 아니라 조금은 더 주저앉아 있을 때라고, 마음은 우울과 무력감을 통해 그걸 알려주고 있다. ... 아무런 계획도 떠오르지 않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가 있구나. 나도 그렇구나 하는 것을 느끼면서 삶에 대한 현실 감각이 조금씩 돌아온다. 처음으로 가족들이 실감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실력이나 재능이 뛰어나지 않고 비상한 머리, 출중한 외모가 없어도 그것과 상관없이 존재 자체만으로 자신에게 주목해 주는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사람은 살 수 있다. 생존의 최소 조건이다. 이해관계 없이도 무조건 나를 사랑하고 지지해 주는 가족 같은 관계, 최소한 나를 의식이라도 하는 사람이 세상에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공감은 힘이 세다. 강한 위력을 지녔다. ... 공감은 누가 이야기할 때 중간에 끊지 않고 토달지 않고 한결같이 끄덕이며 긍정해 주는 것, 잘 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전혀 잘못 짚었다. 그건 공감이 아니라 감정 노동이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들어주다 보며 지친다. 참다 참다 인내심을 잃고 폭발하거나 폭발하지 않더라도 지치고 짜증이 나서 다시는 그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게 된다. 일방적으로 쏟아낸 사람도 집에 돌아가면 찜찜한 마음이 생긴다. 너무 내 얘기만 길게 늘어놓은 건 아닌가. 내 말만 너무 많이 한 건 아닌가. 두 사람 모두에게 유쾌하지 않는 경험으로 남을 수 있다. ... 공감은 내 등골을 빼가며 누군가를 부축하는 일이 아니다. 그 방식으론 상대를 끝까지 부축해 낼 수 없다. 둘 다 늪에 빠진다. 공감은 너를 공감하기 위해 나를 소홀히 하거나 억압하지 않아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누군가를 공감한다는 건 자신까지 무겁고 복잡해지다가 마침내 둘 다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너를 공감하다 보면 내 상처가 드러나서 아프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나도 공감받고 나도 치유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공감하는 사람이 받게 되는 특별한 선물이다.


"그렇게 생각할 만한 어떤 경험이 있으셨나봐요" ... 어떤 뜻인가. 그의 경험을 묻는 그 말은 공감이라는 주제 자체에 관한 언급이 아니다. ... '당신'에 주목한 말이다.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더라도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수용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의미다. 자기 존재에 대해 이런 시선과 터치를 받으면 사람은 멈칫한다. ... 성찰하게 한다. 마음을 열게 만든다. 과녁에 정확하게 닿은 공감적 대화의 힘이다.


누군가의 행동과 생각이 그의 마음과 별개라는 사실만 알아도 마음껏 공감할 수 있다. 


사람의 감정은 항상 옳다. 사람을 죽이거나 부수고 싶어도 그 마음은 옳다. 그 마음이 옳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주기만 하면 부술 마음도, 죽이고 싶은 마음도 없어진다. 비로소 분노의 지옥에서 빠져나온다. ... 사람의 감정은 늘 옳지만 그에 따른 행동까지 옳은 건 아니다. 별개다.


공감자는 모든 사람과 원만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니다. 너도 마음이 있지만 나도 마음이 있다는 점, 너와 나는 동시에 존중받고 공감받아야 마땅한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면 관계를 끊을 수 있는 힘도 공감적 관계의 중요한 한 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관계를 끊는 것이 너와 나를 동시에 보호하는 불가피한 선택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힘든 이야기를 듣다가 힘들어지는 건 상대의 고통이 내게 전이돼서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건 내 상처와 연결된 어떤 감정이 자극될 때다. 


내 상처가 공감받고 치유받지 못했던 시간 동안 내 직업은 발을 빼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큰 고통이었다. 선배 의사에게 정신상담을 받았던 몇 년의 시간이 도움이 됐지만 더 결정적인 건 상담실 카우치 위가 아닌 내 일상에서 그 시간의 백 배도 넘는 시간 동안 나의 스승이자 연인, 도반이고 반려인 남편에게 남김없이 공감받은 경험이었다.


바른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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