뺏벌 -상
안일순 지음 / 공간미디어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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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촌 여성들의 문제는 우리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제 3세계 여성, 즉 아시아 여성들의 삶의 모습과도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단지 그들의 모습을 보고, 듣고 한 것에만 분노를 느낄 것이 아니라 그 본질적인 면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 본질적인 것 중 하나가 우리 안에 있는 여러 종류의‘식민지 문화’이다. 세계 2차 대전, 베트남 전쟁, 한국 전쟁 후에 아시아는 세계의 사창가가 되었다.

“총독부에서 간판만 바꾼 것이다. 미군이여, 해방? 이 넋 떨어진 것들아, 우린 여직꺼정 식민지 백성이여. 우리나라가 온전치 못하면 여자들도 성하지 못하지. (중략) 양갈보 정년퇴직하는 날이 해방인겨. (중략) 만주, 장춘, 하얼빈, 상해, 안가본 곳이 없고 성조기 따라 문산, 송탄, 부산, 의정부, 안가본 곳이 없어” 백순실의 말이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문단, 미군 주둔 등 현대사의 갈등이 한 개인에게 정신대와 양공주라는 지울 수 없는 생채기를 남겨 놓은 것이다.

<뺏벌>이란 지명에서도 이들의 삶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뺏벌은 의정부에서 퇴계로 쪽으로 10여㎞떨어진 스탠리 미군 부대 옆의 동네다. 행정구역은 고산동이지만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뺄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바뀌었다고 한다. 한국인의 초상을 얘기하면서 기지촌은 빠질 수 없을 정도로‘한국의 아메리카’라는 명칭처럼 깊이 뿌리박혀 있다고 하겠다. 이태원, 동두천, 의정부, 송탄, 평택, 군산 등 현재 27개 기지촌의 보건당국에 등록된 미군 상대 윤락 여성은 8천명 정도라고 한다.

안타깝고 시린 가슴으로 소설을 읽어가면서도 텅빈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기지촌의 행정관리들이 윤락여성들을 강당에 모아 놓고 “당신들은 한국을 지켜주러 온 미군을 위안하고 달러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라고 칭송하는 해프닝이 그것이다. 또 미군을 성병에서 보호하기 위해 우리 국민이 낸 세금으로 기지촌 여성들 성병 예방을 하는 것 또한 그러한 것이다.

“진짜 미친 것은 여자들이 아니라 美親 사회였다는 것, 그녀들을 기지촌으로 등 떠밀고 몰아낸 것은 美親 정권이었다는 것을.” 작가의 말이다. 기지촌 여성을 비롯한 현재 우리 사회의 매매춘 여성의 인구수조차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정부는 이들에게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물론 제도적인 차원에서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소설의 첫 장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차미옥의 죽음은 93년 윤금이씨 사건을 생각나게 한다. 작가 또한 병조각이 온몸에 박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고통스럽게 신음했었다고 한다. 그처럼 그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고있는 모든 이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 사건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한미행정협정이었다. 1966년 7월 한국의 월남 파병과 한·일협정체결로 반미 의식이 고조되자 이를 무마하기 의해 맺은 불평등 조약이다. 특히 미군범죄 형사 재판권 제 22조는 사실상 한국 정부의 재판권 포기를 나타낸 것이다. 재판권 3항 역시 미군 당국의 요청이 있으면 한국 정부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재판권 포기 해야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 이 나라는‘주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중략)“기지촌을 배태시킨 구조적인 문제에 앞서 미국 병사 케네스 마클에게 돌을 던지기에 앞서 우리가 먼저 눈을 떠야 한다. 그리고 그 각성은 기지촌 여자와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작가의 말처럼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왜 그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들의 위치는 어떤 것인지, 어떻게 접근하면 되는지를 우선 우리 자신부터 신중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 내가 다시 세상을 바라볼 때는 할퀴어진 역사 속에서 숨죽일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아픔과 고통, 분노를 주인 되고 올바른 의식으로, 사랑으로 받아들여 진정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뚜렷이 자리매김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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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의 세계 (합본)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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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철학이란 것을 어렵게만 생각하고 삶에서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에 당치도 않는 확신에 사로잡혀 있거나 아니면 무관심한 것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일 것이다. 특히 지금까지 대부분의 철학사는 남성이 결정해 왔으며 여성은 소외되는 존재로 인류 역사에서 늘 억압당해 왔다.

그런 점에서 ‘(…)어른들은 세계를 당연하게 여기지. 확실히 어른들은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일상 생활이라는 깊은 잠을 자고 있는게 틀림없어.'라고 생각하는 소녀 철학자 소피의 모습에 놀라우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꼭 들어맞는 표현이기 때문이었다. 어른들 뿐만 아니라 학문의 전당이며 자유의 성역이라고 하는 대학에서조차 끊임없는 사유와 의심은 사라져 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에게 정말 이것이 위기가 아닐런지.

소피는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들에서부터 20세기의 실존주의 철학, 유물론, 생태 철학에 이르기까지의 기나긴 철학적 탐구를 하면서도 결코 현실 생활과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다. ‘삶이란 임신과 출산으로 시작되는데 지금까지는 그들의 철학 세계 속에는 아기 귀저기나 빽빽거리는 울음 소리가 없었어요. 또 어쩌면 사랑과 우정이 적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이 대답에 이르러서는 어린 아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을 만큼 소피가 기특하고 대단해 보이기 조차 했다.

무엇보다도 소피는, 내가 섣불리 결론내리고 싫증냈던 바로 그 삶을 찾기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용기를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내 삶을 단단히 움켜지면서 나를 둘러싼 사회와 세계에 꾸준히 의심 가지고 항상 열린 마음과 더운 기운이 흐르는 가슴을 가지도록. 소피와의 만남이 늦었지만 소피는 예전부터 나의 마음 속에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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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뿔소는 죽지 않는다
최승호 지음 / 도요새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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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돼지

새끼 여덟 마리를 낳아 젖을 물리던 어미돼지가 하루는 돌
연 미친 듯이 새끼들을 다 물어 죽여버렸다. 이 이해할 수 없
는 돼지우리 안의 대사건에 주인은 처음엔 슬퍼하다가 나중
에는 화가 났다. 돼지 여덟 마리면 돈이 얼만데. 그 돈을 다
거름으로 만들어버렸으니 화가 날 수밖에. 그렇다고 해서 또
어미돼지를 잡을 것까지는 없는 일이었는데, 주인은 손수 돼지
목을 땄다. 화가 크게 난 사람은 거의 미치광이와 다름없다.
그 광기를 조심해야 한다. 나중에야 발견되었지만 어미돼지
의 어금니엔 굵은 대못이 박혀 있었다고 한다. 말 못하는 짐
승이었으니 고통과 안타까움이 더 심했을 것이다. 그뒤로 동
네 사람들은 음식물 쓰레기통에 망가진 못이나 바늘 같은 쇠
붙이를 넣지 않기로 반상회에서 약속했다고 하는데, 주인은
불쌍한 돼지머리를 안고 슬피울다가, 이번엔 목을 딸 수도
없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제가 책에서 이 詩를 처음 만났을 때 마지막 부분을 읽고 온몸에 소름 같은 게 돋는 듯 했습니다. 드러난 그대로 이 詩에서 생태 문제를 읽어 낼 수도 있겠고요. 제게 그런 느낌이 들었던 건 '어리석음'이라는 낱말 때문입니다. '어리석음'이란 말이 '상처'라는 말로 다가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말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에게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이 우주에서 인연 맺고 관계하는 것들에 나도 모르게 저질러왔던 '어리석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 시선집을 만나면 '사람'이라 불리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부끄러워지고 낮아져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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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암탉 (양장)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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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싹, 결국에 네가 이루고야 말았던 그 희망은 어땠니?

생명이 위험한 상황까지 기꺼이 감내한 것이었지만 놓아버리지 않고 이루었으니, 쓰고 시면서도 달콤한 맛이 아니었을까? 너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향기로운 꽃을 피워내는 잎사귀라는 네 이름 ‘잎싹’에서 정말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단다. 그런데 내 희망은 싹을 내기는커녕 제대로 물을 줘 볼 생각을 마지막 해 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는 것 같구나. 그렇다고 내 희망이 없었냐고, 없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거든. 왜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초라한 꿈이 되어 버렸을까…….

사실 네가 아니, 너 같은 닭이 양계장을, 마당을 나오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로 이렇게 어른을 위한 동화로까지 쓰여졌는지 시시하기도 하고 따분할 것 같기도 했단다. 나도 동화를 좋아하는 어른이라고 하면서도, 이런 동화가 이런저런 세상 일 다 겪어 본 어른들에게 무엇을 느끼게 해 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했었지.

너는 알을 얻기 위해 기르는 수많은 난용종 암탉들 중 한 마리에 불과했지만, 감히 그 어떤 암탉도 생각지 못한, 알을 품어서 병아리의 탄생을 보겠다는 소망을 품고 양계장의 철망우리를 벗어나겠다는 ‘반란’을 꿈꾸면서부터 이 세상에 하나 뿐인 ‘잎싹’이 되었지.

난 이 세상에 하나 뿐인 ‘나’라는 걸 무엇으로 증명해 보일까? 겨우 모습이 다르다는 것으로? 남들과 비슷하게 살아가고, 비슷한 것으로 고민하고, 아웅다웅거리고……, 그럴 뿐인데. 정말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은 이것이 책을 읽는 순간에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강하게 느껴졌단다.

바람과 햇빛을 한껏 받아들이고, 떨어진 뒤에는 썩어서 거름이 되는 잎사귀, 너는 그 잎사귀의 삶을 온몸으로 보여 주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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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내게로 왔다 1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시가 내게로 왔다 1
김용택 지음 / 마음산책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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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든 음반이든 엮음집이라든지 컴필레이션과 같은 것들을 썩 달겨하지 않지만 믿을만한 시인이 사랑, 감동, 희구, 전율한 시들이라는데...시인의 임실 고향집 앞 느티나무 그늘에서 들었던 그의 시에 대한 사랑이 이 시집 속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 같다. 순간순간 느낌에 따라 안겨오는 시가 다르다. 지니고 다니면서 어디든 펴서 몇장 뒤적이다 보면 푹 젖어드는 시를 만나게 된다.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어드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미더운 북간도 술막 (이용악,'전라도 가시내'중에서).

한국학자인 김열규 선생이 학창시절에 듣고 젊은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는, 그 감동과 설레임이 일흔이 넘는 나이까지 자신을 가다듬은 마음의 거울이 되었다는 시이다. 김용택 시인도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철커덩 철커덩 압록강 다리를 건너는 기찻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시가 점점 덜 읽힌다고는 하나 시 한 편을 두고 시간, 공간 이동을 할 수 있음은 물론, 내 안팎을 들여다 보는 거울도 된다.

'한가하게 시나 읽고 있다'는 말은 잘못되었다. 시인의 치열한 영혼과 마주하는데는 마음 단단히 용기를 내야 하고, 순수한 열정과 삶에 대한 지독하리만큼의 애정이 있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가 그러한 님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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