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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나무 왼쪽 길로 4
박흥용 지음 / 황매(푸른바람)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어느 날 식당에서 밥 먹다 펼쳐 본 신문, 오늘의 운세편.
'구름이 흩어지며 햇살이 비치는 운세. 그대만 힘든 짐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가슴을 친 말은 '햇살' 보다는 '힘든 짐' 쪽이었다. 자기 밖에 해결하지 못할 자기만의 짐. 나는 호두나무 한 그루에서 시작된 상복이의 여행을 따라가며, 이 말을 계속 반복했다. '그대만 힘든 짐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
부여에서 만난 50대 퇴직자는 빚만 남긴 채 낙화암에서 몸을 던지고 ("엘피LP판이 다 돌아 노래가 끝나면 바늘이 그 끄트머리에서 지직거리며 판이 계속 돌잖아. 지직 지직 지직. 퇴직한 이후부터 내 꼴이 꼭 그런 느낌이라니께."),
칠갑산에서 만난 딸기의 친구는 털복숭이 산 사람으로 살아가고 ('그렇군. 나는 지금 밥이 아니라 정말을 먹고 있는 거야. 밥 씹는 소리가 절망, 절망, 절망 하고 들리는 것 같네'),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려고 봉고차 신혼여행을 즐기는 부부를 천안에서 만나고 (외롭게 자란 부부에게 초대된 외로운 사람 김음성 씨... 삼형제 저수지에서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술잔만 홀짝였는데요... 아... 술판 벌이고 있는 내내 세 명이 말 없이 울기만 한 거 아십니까... 삼형제 저수지에서 말이죠...),
천안 오토바이 상회 아저씨 ("오토바이 타고 세상을 한바퀴 휘 돌아 다시 집에 왔지만 집 떠날 때 그대로 여전히 답답한 거야. 누가 인생과 여행은 닮았다구 했나..."),
증평서 보조금으로 사는 할머니와 손자 ("학교에서 냄새난다고 새끼들이 따를 놔요. 옷이 없어서 빨면 갈아입을 것이 없거든요. 그게 제일 엿 같다니까. 아씨"- 거친 말투는 자기를 우습게 아는 학교 친구들을 견제하기 위해 입에 붙이고 다니는거 난 알지...),
단양에서 뇌졸증으로 쓰러진 아버지와 중증 장애인 몇 명과 함께 사는 이혜옥 씨 (중선암에 와서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은 ...쉴 때가 된 거야. 난... 소리가 들려요. 어떻게? ...끝내주게... 잘도 끝내주겠다... 사귀던 남자친구가 결혼했다는데 물소리 따위가 들릴 리 없지. ),
카드 빚으로 자살한 부모로 고아가 된 아이 ("카드빚 때문에 부모랑 생이별하는 애들이 있어요. '카드 고아'라는 신조어가 생겼다니까.")...
이 책 속의 아름다운 풍경을 따라가다 보면 소박하고 아름답지만 가슴 먹먹함을 하나씩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고, 그네들과 고단한 짐을 나누다 보면 내 마음도 치료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 딸기'에 대한 암시가 나오면서 이제 상복의 여정도 맺음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