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물쇠 잠긴 남자 - 하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5







 개인적으로 읽길 고대했던 작품이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상/하로 분권된 작품들이 좋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쌍두의 악마>, <여왕국의 성>은 작가의 대표작이거나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하는 등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작품들이었는데 이 작품 <자물쇠 잠긴 남자>도 요시카와 에이지 문고상을 수상했다고 하니 더욱 기대가 됐다. 엄밀히 말해 요시카와 에이지 문고상은 특정 작품에 수여하는 상은 아니고 - 비슷한 예로 노벨 문학상을 들 수 있겠다. - 시리즈 자체에 수여하는 상이라는데, 작가의 '작가 아리스' 시리즈가 어느 정도 인정을 받게끔 이 작품이 도와준 걸까 싶어 기대를 안 할 수 없었다.

 기대가 되는 한편으로 나처럼 기대하고 읽었다가 실망한 사람들의 평을 간간이 접해왔던 지라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다 읽고 나니 왜 그렇게 실망했다고 하는지 이해가 갔다. 사실 나는 오래 전부터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추리소설의 껍질을 쓴 다른 종류의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인식했던 터라 딱히 새삼스럽진 않았는데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번 작품은 확실히 밋밋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밋밋한 걸 넘어서 너무 길고 밀도도 떨어져서 작가나 시리즈의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완독하기 힘들 작품이란 것도 인정한다.


 추리소설이란 선입견을 아예 지운다면, 특유의 인간애와 작가의 사유 덕에 흔히 '추리소설하면 그저 잔인하기만 하고 깊이가 떨어지는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추천해줄 만한 소설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추리소설의 매력을 알릴 만한 작품이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라는 것이다. 피만 안 튀기지 추리하는 재미를 살린 일상 추리물 계열의 작품이라면 모르겠는데 그렇게 보기엔 추리 부분이 너무 약하긴 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도 불명확한 나시다라는 인물의 생애를 쫓는 과정은 그래도 읽는 맛이 났는데 정작 사건의 진상이라든가 범인의 동기가 너무 느닷없고 복선도 너무 적었고 설득력도 잘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이보다 더 어이 없는 범인이나 살인 동기를 많이 다뤄서 차라리 이 작품 정도면 양반이긴 했다. 하지만 그 작품들은 단편이거나 길어봤자 400쪽을 못 넘었는데 <자물쇠 잠긴 남자>는 800쪽에 육박하는 장편이라 허무함이 유독 컸던 것 같다. 두 권 이상 분량의 장편 추리소설이 의외로 결말이 허무한 경우는 적지 않지만 이 작품처럼 가뜩이나 시작부터 밋밋한데 끝에 가서도 밋밋하니까 다 읽은지 일주일이 넘어가는 지금도 아쉬움이 가시질 않는다. 초반이 하도 밋밋해서 이 밋밋함이 없어지긴 할까 걱정이 됐는데 설마 그 걱정이 그대로 맞아들어갈 줄이야...


 추리소설 안에도 종류가 다양해서 개중엔 밋밋한 것도 있고 관점이 다른 작품도 많은데 이 작품은 작가의 고집 때문에 그 경계가 애매해진 경우에 속한다. 굳이 트릭이나 범인 찾기를 강조한 본격 미스터리가 아니어도 되는데 작가 스스로 본격 미스터리를 써야 한다고 여겼던 걸까? 지금껏 나시다의 인생을 살펴보며 잔잔하게 흐른 전개가 호불호는 갈릴지언정 개연성 있고 나쁘지도 않았는데 히무라가 등장하고 타살 의혹을 제기하고 진범을 수색하는 과정이 급작스러워 작품 밸런스가 무너졌다. 이렇게 말하긴 좀 그렇지만 분량 배분이나 트릭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면 작가가 사전에 공을 들여서 집필했다기 보다 그때 그때마다 발길 닿는 대로 스토리를 이어간 느낌이 확 들었다. 그래서 아까 다른 건 몰라도 추리소설의 매력을 알릴 만한 작품은 아니라고 했던 것이다. 발길 닿는 대로 이어나가는 스토리에도 물론 매력이 있지만 그 매력은 우리가 추리소설을 읽을 때 기대하는 매력과는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저자가 추리소설가란 것, 이 작품이 엄연히 탐정을 주인공으로 한 추리소설 시리즈에 속한 작품이란 걸 의식하지 않는다면 순수하게 작품 자체의 만듦새는 나쁘지 않았다. 다소 고전적인 스타일이었지만 나시다의 일대기를 훑는 전개도 느낌 있었고 이 사람에 닥친 비극이나 시련을 통해 인생이 얼마나 뜻대로 풀리지 않는지 엿볼 수 있던 것도 괜찮은 경험이었다. 이보다 더 주제의식이 압도적인 사회파 추리소설이 한두 편이 아니거니와 차라리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트릭이나 범인 찾기에 연연하는 대신 작정하고 사회파 추리소설을 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들지만 그렇다고 이 소설만의 고유한 매력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라 이 정도 결과물이라도 어느 정도 납득하고 넘어갈 수 있다.


 여러모로 추리소설이라 여기고 책장을 펼칠 수밖에 없던 것에 비해 결과물이 영 쌩뚱맞기 그지없었지만 그래도 재독할 가치는 충분한 작품이었다. 다시 읽을 때는 아예 추리소설이란 기대 자체를 안 할 테니 지금 안 보였던 부분들까지 볼 수 있을 테지. 지금 이렇게 위에 쓴 글을 읽으니 너무 형식에 대해서만 애기했던데, 형식에 대해 얘기하지 않기엔 읽는 내내 느낀 불만이 너무 많아서 부득이하고 과감하게 형식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다시 읽고 포스팅을 할 때는 내가 이 작품의 스토리에 대해서만 얘기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냉소적인 작가보다 독설적인 작가가 그나마 나을지도 모른다. 씁쓸하고 냉소적인 결말로 끝나는 소설은 눈물을 뽑는 소설에 필적할 만큼 쓰기 쉬우면서도 어지간해서는 작가가 멍청해 보이지 않는다는 이점을 갖고 있다. 빈정거리며 편한 길을 가기보다 독기 있는 소설에 도전하는 게 차라리 낫다. - 상 288p




죽은 이는 돌아오지 않지만 그들을 위해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저 기도만 하는 게 아니라 죽음을 가져온 대상을 분석하고, 같은 재난을 입었을 때 얼마나 피해를 줄일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도 우리의 역할이다. 해야 할 일은 많다. - 하 124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킬링필드, 어느 캄보디아 딸의 기억
로웅 웅 지음, 이승숙 외 옮김 / 평화를품은책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3







 크메르 루주가 장악한 캄보디아의 정세 속에서 기적적으로 생존한 작가 로웅 웅이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유년기 시절의 기억을 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킬링필드는 책이나 방송에서 몇 번 접해봤지만 이렇게 실제로 경험해본 사람이 얘기하니까 무게감이 차원이 달랐다. 어느 정도 소설적으로 접근했겠지만 엄연히 실화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철저히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킬링필드를 다각적으로 들여다보고자 하는 독자에겐 약간 미흡한 책일 수 있다. 가령 크메르 루주가 어쩌다 그렇게 정권을 잡게 됐고 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목표, 당시 동남아의 정치적 상황 등은 다뤄지지 않았는데 그 점을 기대했던 나로선 약간 아쉬운 부분이었다. 개인적으로 캄보디아에 관심이 있는 지라 이 책을 통해 좀 더 폭넓은 지식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그보단 사실감 넘치는 경험담에 주목한다면 좋을 듯했다. 사실 작가의 경험담도 이야기의 수위에 비해 전개가 다소 반복적이고 늘어져서 가독성이 떨어지는 편이었는데, 순전히 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작가가 어떻게 미국으로 갔는지 과정이 궁금해서 계속 읽게 됐다. 내가 캄보디아나 킬링필드에 관심이 없거나 결말에 이르는 과정이 궁금하지 않았다면 완독하기 힘들었을지 모르겠다.


 작가 입장에선 이렇게 세상에 꺼내기 힘든 고통스런 기억일 텐데 거기다 대고 가독성이 떨어졌다느니 전개가 늘어졌다느니 얘기하는 게 좀 머뭇거려진다.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애둘러서 표현할지 포스팅하기 전에 고심했지만, 비극은 비극대로 존중하되 내가 느낀 감상엔 솔직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킬링필드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저런 우매하고 폭력적이기 이를 데 없는 무리들에 정권을 잡게끔 허락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엿이랑 바꿔먹은 크메르 루주의 극단적인 사회주의 정권은 소련을 비롯한 여타 사회주의 국가가 귀엽게 느껴질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이 책은 그 공포의 무게를 전달하는 것엔 탁월했지만 애당초 이런 공포를 낳은 비극의 원인에 대해선 이 책만 읽고선 쉽게 파악이 되지 않는다. 작가가 당시 나이가 5살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일 텐데, 이야기의 화자가 어린아이인 만큼 비극이 더욱 처참하게 묘사돼 - 크메르 루주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비극의 광기에 물들게 했다. - 읽는 내내 눈을 돌리고 싶게 만든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실적인 묘사에 공을 들여 인류애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엔 충분했지만 이런 비극 자체가 벌어지지 않도록 고민해볼 것을 역설하지 않아서 막상 다 읽고 나면 생각보다 남는 게 없다. 이 실화를 단지 실제로 벌어난 일 그 자체에만 몰두하기엔 좀 아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킬링필드의 생존자가 직접 전하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매우 귀중하지만 킬링필드에 대한 선행 학습 없이는 궁금한 점 투성이일 이야기라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비슷한 아쉬움을 남긴 이야기에 대해 내가 늘 이 말을 남기곤 하는데 이번에도 여지없이 남겨야 하겠다. 얀 마텔의 <20세기의 셔츠> 서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역사의 법칙이 아니라 예술의 법칙에 따라 묘사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물론 픽션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픽션의 느낌을 추구하고 있으므로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 조금 더 탄력적이고 전방위적인 접근을 통해 보다 예술적인 이야기로 승화시켰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안젤리나 졸리가 연출한 <그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라는 영화가 나왔다는데 그 영화는 과연 어떨지 궁금하다. 아니, 그 전에 아예 <킬링필드>부터 먼저 접해야 하려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친구가 되기 5분 전 마음이 자라는 나무 20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양억관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8.9







 원래 이 작품을 시게마츠 기요시의 최고의 작품이라 생각했는데, <십자가>를 읽고 나니 상대적으로 깊이에 있어서 이 작품이 떨어진다고 느꼈다. 10년 전에 느낀 감동이 예전만 같지 않았고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 비해서도 거의 비슷하거나 약간 미흡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 작품을 처음 읽을 당시인 고등학생 때는 등장인물들과 같은 연령대라 내 얘기 같이 읽혔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그 시절이 가물가물해 상대적으로 몰입이 덜 된 감도 있는 것 같다.

 금방 언급했다시피 이 작품은 <유어 프렌즈>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됐다. 영화는 9편의 연작으로 이뤄진 원작에서 5~6편 정도로 축약해서 스크린에 옮겨놨는데 그때 보면서도 느낀 거지만 참 적절한 각색이 아닐 수 없었다. 학교 안 다양한 인간 관계를 섬세한 관찰력으로 들여다보는 작품의 특성상 등장하는 캐릭터가 많은데 영화에선 분량상 너무 자잘하다 싶은 캐릭터는 아예 등장을 시키지 않고 주목할 캐릭터의 경우엔 확실히 주목해주니까 훨씬 집중력 있는 전개가 이뤄졌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에선 캐릭터에 따라 굉장히 섬세한 감정선이 묘사되기도 하는데 영화에선 그 묘미를 살리기 힘든 걸 생각하면 더욱 적절한 선택과 집중이었다.


 이 작품의 원제는 '너의 친구'다. 영화 제목 '유어 프렌즈'는 원제의 영어 버전이다. 밋밋한 제목이라 생각되겠지만 다 읽고 보면 이 제목이 훨씬 느낌이 사는 것 같다. 이 작품은 드물게 2인칭 관찰자 시점의 소설인데 형식상의 2인칭이 아닌 엄연히 실체가 있는 인물이 여러 명의 '너'를 들여다보는 터라 다 읽은 뒤엔 화자의 따뜻한 감성이 물씬 느껴졌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에 출간되면서 바뀐 <친구가 되기 5분 전>이란 제목은 개성적이긴 하지만 묘하게 내용과는 따로 노는 느낌을 준다. 실제로 '친구가 되기 5분 전'이란 표현이 작중에서 언급되긴 하지만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제목이라 보기엔 약간 애매하다. 누가 보면 그 둘이 친구인가 싶을 정도로 미묘한 우정에 대해서 다루긴 하지만 한편으로 '친구인 듯 친구 아닌 친구 같은' 표현이 절로 나올 만큼 위태로운 관계가 또 우정이라 시사하기도 해 단순히 친구 관계 형성 이전을 가리키는 국내 제목이 잘 와 닿지 않았다. 그러자니 원제를 그대로 쓰자니 너무 밋밋하고... 제목을 짓는 건 늘 어려운 문제 같다.

 개인적으로 작가가 학창 시절을 다시 보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학교 생활에 대한 묘사가 사실감 넘쳤다. 어찌나 사실감 넘치는지 비슷한 연령대가 아니면 자칫 유치하다 느낄 정도였다. 그 정도로 상처 받기 쉬운 감수성의 소유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독자에 따라선 자기 학창 시절이 연상된다거나, 혹은 지금 현재의 사회 생활과 겹쳐 보이는 경우도 있을 테니 공감대 형성에 있어서 압도적인 힘을 가진 작품이라 생각한다. 내 경우엔 무리 생활에 쉽게 적응을 못하는 편이라 비슷한 처지의 캐릭터에 감정 이입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겠는데, 이 작품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와 비슷한 점이 없는 다른 처지의 등장인물에게도 감정 이입하게 만들어 놀라움을 선사했다.


 학교 안 같은 학급에서도 개개인의 기질이나 성향에 따라 파벌이 생기고 왕따가 있고 독자적인 무리도 존재하는데 이 작품은 학교 스타에서 불량 학생까지 각기 다른 위치와 시선을 가진 학생들이 저마다의 심각한 고민거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전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건 작가가 모든 캐릭터에 똑같은 애정과 관심을 두고 이야기를 썼겠구나 싶을 정도로 묘사의 퀄리티에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주역은 이야기의 주역대로, 조연에게는 또 조연대로 분량과 비중을 다르게 부여하는 게 아니라 모두 똑같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집필했다는 게 느껴졌는데 그렇다 보니 독자인 나 역시 캐릭터마다 감정 이입을 선별적으로 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캐릭터마다 감정 이입이 되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작품의 메시지를 이해함에 있어 문제가 없는 걸 보면서 시게마츠 기요시의 필력이 보통이 아닌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엔 이 작품을 진정한 우정에 관한 이야기로만 여겼는데 다시 읽은 지금은 저마다의 가치관에 따라 인간 관계도 다르고 친구 관계도 다르게 정의될 수 있다고 얘기하는 작품으로 인상이 변했다. 우정엔 정답이 있지 않고 모든 형태의 우정이 다 소중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 가지 유형의 우정만 시사하는 작품의 제목이 역시 아쉽게 느껴진다. 아무튼 다시 읽으니 이래저래 인상이 확 바뀐 작품이라 할 수 있겠는데 작품도 작품이지만 <십자가> 때 못지않게 시게마츠 기요시에 대한 인상도 많이 달라져 이후에 읽을 작가의 작품을 이전과는 다른 기분으로 읽게 될 것 같다. 학교가 배경이라고 해서 이 작가의 작품을 단순히 청소년 소설로만 여기긴 힘들게 됐다.

내 곁을 떠나도 평생 기억되는 친구 한 명이면 충분해. - 265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울 따뷔랭 - 작은책
장자끄 상뻬 지음,최영선 옮김 / 열린책들 / 199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9.6







 기억하기론 <꼬마 니꼴라> 다음에 접했던 장 자끄 상뻬의 작품이다. 아마 교과서에 실려서 접하지 않았나 싶은데 이렇게 시간이 흘러 이야기의 전문을 읽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교과서에는 분량상 하이라이트 부분만 실렸었는데, 그 부분만 따로 놓고 읽어도 괜찮았지만 역시 기승전결을 모두 접하니 이야기가 풍성하게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자전거 위에서 균형을 못 잡던 라울 따뷔랭은 아이러니하게도 동네 최고의 자전거 수리 기사가 됐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자전거를 못 탄다는 비밀은 견고해진다. 그런 비밀을 갖고 있던 라울이 어느날 한 사진사의 '자전거 타는 모습을 찍고 싶다'는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일생일대의 사진을 찍는다는 게 교과서에 실린 내용이다. 100쪽이 채 안 되는 이 소설은 삽화를 제외한다면 실제 분량은 30쪽도 겨우 채우는 단편일 텐데 교과서에는 거기서 더 축약한 내용을 실었던 것이다. 그런 것치고 핵심은 잘 담아냈지만 그래도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에 대한 남모를 고충이란 주제의식은 사진 에피소드만으론 부족했다고 본다.


 나도 라울처럼 자전거를 못 타는 사람이지만 그걸 유달리 비밀이라거나 치부라 여기진 않는다. 내가 자전거를 못 탄다고 말해도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사람도 있는 법이지.' 라고 이해하는 편이다. 그런데 라울이나 사진 기사 피구뉴가 남들에게 쉽사리 비밀을 털어놓기 힘든 이유는 그들의 직업과 너무 어울리지도 않을 뿐더러 그들의 경력에 치명적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전거를 못 타는 자전거 수리 기사, 결정적인 순간은 포착하지 못하는 사진사라고 남한테 밝혀봤자 재미없는 농담, 심하면 사기꾼으로 취급될지 모를 일이다. 실제로 피구뉴가 자기 비밀을 고백하자 라울은 '박제 동물이나 찍어야 될 사기꾼 때문에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며 성을 내지 않던가. 라울이 자기와 썸을 타던 여자에게 비밀을 고백하자 자길 놀린다며 외면을 당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있어 비밀은 너무나도 치명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라울이나 피구뉴의 명성이 과연 그들이 비밀을 잘 숨겼기에 쌓을 수 있던 것일까? 이 부분에서 장 자끄 상뻬의 스토리 텔링이 그의 간결하고 예술적인 화풍만큼이나 빛을 발휘한다. 라울의 비밀의 무게며 아이러니한 처지 같은 것들을 알기 쉽고 공감이 가게 묘사함과 동시에 그의 비밀이 계속 비밀로 남을 수밖에 없던 이유는 단지 라울이 남모를 자격지심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이 소설은 질문하고 있다. 자전거를 못 타는 이유를 분석하다가 최고의 자전거 수리 기술을 체득한 라울은 '자전거 수리 기사니까 당연히 자전거를 탈 줄 알 것'이라고 주변 사람들이 믿어의심치 않는 모습을 차마 뒤집을 수가 없어 점점 속이 타들어간다. 비밀의 내용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은 그 자체로 병이 된다.


 그래서 막판에 피구뉴에게라도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한 라울의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다. 라울로선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지만 의외로 충동적이고 쉽게 결정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그가 자전거를 못 타더라도 그의 수리 기술이 어디 가버리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사실 비밀의 내용 자체는 대수로운 일도 아니니까. 결국 주변 사람들의 편견이 굳건하다는 건 핑계고, 비밀의 무게를 무겁게 했던 건 비밀을 간직한 당사자의 몫이 가장 크다는 걸 소설은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피구뉴는 아무래도 전문 사진사인 만큼 그의 비밀은 라울보다 치명적일 수 있으나 결국 그도 라울에겐 용기를 내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는가. 그럼 라울이라고 하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소설은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고 있다.

 <라울 따뷔랭>은 단순히 자전거를 탈 수 있느냐 아니냐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자기 비밀을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관해 질문하는 작품이었다. 혹시 장 자끄 상뻬를 삽화가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꼭 추천하고 싶은 작품인데, 다소 난해하고 지루했던 <뉴욕 스케치>에 비해 너무나 매력적으로 읽혀서 이 작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길 권한다. 어떻게 보면 <꼬마 니꼴라>를 넘어선 대표작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첫 젠더 수업 창비청소년문고 27
김고연주 지음 / 창비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1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쓴 책이긴 한데 다루는 내용만 보면 어른 독자도 좀 읽어야 할 내용이었다. 작가는 의식적으로 '요새와는 달리 과거엔 이랬었죠' 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실제로 우리의 젠더 인식이라든가 성평등 의식은 그렇게 진일보한 건 아니라서 작가가 고도의 돌려까기를 하는 느낌을 받았다. 단호하게 비판 일색이었으면 옳은 말을 해도 반감이 생기는 법인데 차근차근 은근하게 돌려서 말하니까 오히려 효과적으로 메시지가 와 닿았던 것 같다. 우리는 이미 진보했어야 했는데 왜 그러질 못하는가? 그렇게 스스로를 돌아보기에 적절한 책이었다.

 혹시 젠더 수업이라고 제목이 지어져서 오해할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 단순히 성소수자에 대한 얘기만 하는 책은 아니다. 요새는 좀 덜할 것 같은데 당장 내가 청소년일 때만 해도 섹스sex 젠더gender의 차이를 바로 설명하지 못했었다. 전자는 생물학적 성, 후자는 사회학적 성이란 걸 명확하게 구분시켜주는 방송이나 책을 일찍이 접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만약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나한테 이 책을 추천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물론 10여년 전만 해도 이 책과 비슷한 목적의 책이 많았을 테고 단지 내가 견문이 좁아 알지 못했을 뿐이겠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같은 내용이라도 미래의 책이 조금이라도 더 최신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더 유익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당장 이 책의 첫 장에서부터 시대에 따라 기준이 판이해지는 가치관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만큼 가급적 더 최신의 이야기를 접하는 게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적어도 2년 전엔 읽었어야 하지 않나 싶다. 물론 책의 내용 중에서 유달리 지금 기준에서 뒤떨어졌다거나 하는 내용은 - 지금 시점보다 진보하면 진보했지... - 없었다. 내가 이런 책에 관심이 어느 정도 있는 편이라 아예 새로 배웠다는 느낌을 준 내용은 없었지만 각 이슈에 따라 알기 쉽게 잘 설명하고 있어서 내가 이런 책을 조금이라도 일찍 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읽기엔 늦은 감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워낙에 작가가 내용을 잘 정리하고 있기도 하고, 사실 젠더 수업은 가급적 정기적으로 받아야 하는 거라 생각해서 자못 유익하게 읽혔다.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이 책은 사회적 성역할에 대한 고정 관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작가는 성별에 따라 어울리는 복장의 차이부터 시작해서 이성에 대한 인식, 연애관, 모성, 외모지상주의, 가부장제, 혐오주의 등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풍부하고 적절한 예시와 자료를 근거로 들며 설명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기억나는 내용 중에 호주제 폐지가 있는데, 어렸을 때 호주제가 폐지되는 것의 의의가 무엇인지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 책을 통해 새삼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작가의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부모 양쪽의 성을 쓰고 있다. 이전엔 이런 식으로 개명을 하는 게 너무 보여주기식 페미니즘이라 생각했는데, 책을 읽다보니 아버지의 성만 이어나가는 게 당연해진 사회가 어떻게 보면 굉장히 무서울 정도로 이상한 게 아닌가 싶었다. 부모 양쪽의 성을 쓰는 사람을 더 이상 아니꼽게 바라봐선 안 되겠다고 처음으로 실감했다. 많이 늦은 감이 있는데 지금이라도 생각이 바꿀 수 있게 도와준 작가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약간 빚을 진 느낌이기도 했다.

 작년에 읽은 <설거지 누가 할래> 라는 책에서 일본인 저자가 결혼할 때 성을 남편 성으로 바꾸는 과정에 대해 쓰는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그때도 느꼈지만 남성중심적인 사고, 가부장적 사고는 교묘하고도 짙게 남아있는 것 같다. 저자는 이처럼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가치관들에 대해 '과연 그럴까?' 하며 질문한다. 그야말로 페미니즘의 미학일 질문하기를 온전히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하면 그저 반감부터 갖는 사람이 있을 텐데, 페미니즘에서 재기하는 모든 질문의 내용이 모두 옳아 마땅하느냐 하면 꼭 그렇진 않으니 그 반감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질문하는 과정에서 한 번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을 생각하면 페미니즘이 결코 무의미하진 않은 것 같다.


 질문하는 것의 미학에 대해 쉽고 날카롭게 어필하는 점에서 이 책도 정말 유익하기 이를 데 없는 책이었다. 나같은 성인이 아닌 정말로 이 책의 예상 독자인 어린 독자들이 이 책을 많이 읽었으면 한다. 책의 내용이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해보기에 매우 적합하기 때문이다. 요즘 학교에서 도서관이나 독서 교육이 얼마나 탄력적으로 운영되는지 모르지만 이 책이 학교 교재로라도 자주 다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과한 바람이려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