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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젠더 수업 ㅣ 창비청소년문고 27
김고연주 지음 / 창비 / 2017년 11월
평점 :
9.1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쓴 책이긴 한데 다루는 내용만 보면 어른 독자도 좀 읽어야 할 내용이었다. 작가는 의식적으로 '요새와는 달리 과거엔 이랬었죠' 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실제로 우리의 젠더 인식이라든가 성평등 의식은 그렇게 진일보한 건 아니라서 작가가 고도의 돌려까기를 하는 느낌을 받았다. 단호하게 비판 일색이었으면 옳은 말을 해도 반감이 생기는 법인데 차근차근 은근하게 돌려서 말하니까 오히려 효과적으로 메시지가 와 닿았던 것 같다. 우리는 이미 진보했어야 했는데 왜 그러질 못하는가? 그렇게 스스로를 돌아보기에 적절한 책이었다.
혹시 젠더 수업이라고 제목이 지어져서 오해할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 단순히 성소수자에 대한 얘기만 하는 책은 아니다. 요새는 좀 덜할 것 같은데 당장 내가 청소년일 때만 해도 섹스sex 젠더gender의 차이를 바로 설명하지 못했었다. 전자는 생물학적 성, 후자는 사회학적 성이란 걸 명확하게 구분시켜주는 방송이나 책을 일찍이 접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만약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나한테 이 책을 추천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물론 10여년 전만 해도 이 책과 비슷한 목적의 책이 많았을 테고 단지 내가 견문이 좁아 알지 못했을 뿐이겠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같은 내용이라도 미래의 책이 조금이라도 더 최신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더 유익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당장 이 책의 첫 장에서부터 시대에 따라 기준이 판이해지는 가치관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만큼 가급적 더 최신의 이야기를 접하는 게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적어도 2년 전엔 읽었어야 하지 않나 싶다. 물론 책의 내용 중에서 유달리 지금 기준에서 뒤떨어졌다거나 하는 내용은 - 지금 시점보다 진보하면 진보했지... - 없었다. 내가 이런 책에 관심이 어느 정도 있는 편이라 아예 새로 배웠다는 느낌을 준 내용은 없었지만 각 이슈에 따라 알기 쉽게 잘 설명하고 있어서 내가 이런 책을 조금이라도 일찍 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읽기엔 늦은 감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워낙에 작가가 내용을 잘 정리하고 있기도 하고, 사실 젠더 수업은 가급적 정기적으로 받아야 하는 거라 생각해서 자못 유익하게 읽혔다.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이 책은 사회적 성역할에 대한 고정 관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작가는 성별에 따라 어울리는 복장의 차이부터 시작해서 이성에 대한 인식, 연애관, 모성, 외모지상주의, 가부장제, 혐오주의 등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풍부하고 적절한 예시와 자료를 근거로 들며 설명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기억나는 내용 중에 호주제 폐지가 있는데, 어렸을 때 호주제가 폐지되는 것의 의의가 무엇인지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 책을 통해 새삼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작가의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부모 양쪽의 성을 쓰고 있다. 이전엔 이런 식으로 개명을 하는 게 너무 보여주기식 페미니즘이라 생각했는데, 책을 읽다보니 아버지의 성만 이어나가는 게 당연해진 사회가 어떻게 보면 굉장히 무서울 정도로 이상한 게 아닌가 싶었다. 부모 양쪽의 성을 쓰는 사람을 더 이상 아니꼽게 바라봐선 안 되겠다고 처음으로 실감했다. 많이 늦은 감이 있는데 지금이라도 생각이 바꿀 수 있게 도와준 작가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약간 빚을 진 느낌이기도 했다.
작년에 읽은 <설거지 누가 할래> 라는 책에서 일본인 저자가 결혼할 때 성을 남편 성으로 바꾸는 과정에 대해 쓰는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그때도 느꼈지만 남성중심적인 사고, 가부장적 사고는 교묘하고도 짙게 남아있는 것 같다. 저자는 이처럼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가치관들에 대해 '과연 그럴까?' 하며 질문한다. 그야말로 페미니즘의 미학일 질문하기를 온전히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하면 그저 반감부터 갖는 사람이 있을 텐데, 페미니즘에서 재기하는 모든 질문의 내용이 모두 옳아 마땅하느냐 하면 꼭 그렇진 않으니 그 반감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질문하는 과정에서 한 번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을 생각하면 페미니즘이 결코 무의미하진 않은 것 같다.
질문하는 것의 미학에 대해 쉽고 날카롭게 어필하는 점에서 이 책도 정말 유익하기 이를 데 없는 책이었다. 나같은 성인이 아닌 정말로 이 책의 예상 독자인 어린 독자들이 이 책을 많이 읽었으면 한다. 책의 내용이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해보기에 매우 적합하기 때문이다. 요즘 학교에서 도서관이나 독서 교육이 얼마나 탄력적으로 운영되는지 모르지만 이 책이 학교 교재로라도 자주 다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과한 바람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