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5 (무선) 해리 포터 시리즈
조앤 K. 롤링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수첩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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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9.6







 '불사조기사단'은 시리즈에서 가장 길고 가장 몰입도 높은 작품으로 꼽힌다. 5권으로 분권된 두툼한 분량은 읽기 전엔 부담스럽지만 막상 책장을 펼치면 몰입도 측면에서 전작과 큰 차이가 없다고 느껴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을 원작으로 둔 영화는 역대 해리포터 영화 중 가장 러닝타임이 짧아 팬들이 불만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전편보다 훨씬 어두워진 분위기며 마법부의 뻘짓에 신음하는 해리의 심리나 음지에서 해리를 위협하는 볼트모트와 죽음을 먹는 자들의 존재감을 치밀하게 그린 원작에 비해 영화는 내가 기억하기에도 세계관의 방대함을 담아내기 벅차 보였으니까 말이다. 영화가 좋았던 점은 엄브릿지란 캐릭터를 완벽하게 구현했다는 것일 텐데, 그걸 천만다행으로 여겨야겠지?

 '해리포터' 시리즈 자체가 기본적으로 동화를 표방하는 만큼 인물의 외형이나 성격을 묘사하는 방식이 다소 유치한 감은 있지만, 반대로 보면 유치하기 때문에 오히려 상황의 심각함이 희석되는 효과가 있지 않았는지 생각해보게 됐다. 역대급 악역이라 일컬어지는 엄브릿지를 비롯한 마법부 인간들의 태만이 이번 작품에서 굉장히 중요한 소재로 다뤄지는데, 예전에 읽었을 때 황당무계하다고 여겼지만 지금 다시 읽으니 굉장히 현실적인 묘사란 생각에 쓴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무사안일주의에 젖은 나머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일리가 있는 소릴 하는 사람은 모함하거나 필요하다면 누명을 씌워서라도 배척하려는 그릇된 심리를 작가가 정말 지독히도 잘 묘사했구나 싶던 것이다.


 작중 전개가 그렇게나 씁쓸했던 데엔 마법부가 엄연히 볼드모트 일당과 대적해야 하는 조직임에도 그 역할을 온 힘을 다해 방관하려 들기 때문이 클 것이다. 이는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이 '해리포터' 시리즈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상상력은 물론이고 통찰력과 리얼리티도 뛰어나기 때문일 텐데, 특히 마법부의 무능함에 대한 묘사는 발군이었다. 사람이 무리를 지어 조직을 만든 뒤에 파벌을 이뤄 자신과 반대되는 입장의 사람을 배척하는 심리를 작가는 자신이 만든 마법 세계 안에다가 아무 어색함 없이 집어넣어 독자들과 공감대를 형성시켰다. 판타지 장르가 상상력과 더불어 현실적인 요소가 가미돼야 독자를 만족시킬 수 있다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싶다.

 게다가 성장 문학의 정체성도 갖고 있는 시리즈답게 작가가 '불사조기사단'에서 해리에게 선과 악은 칼로 무 자르듯 이분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준 것도 인상적이었다. 단순히 호그와트와 마법부는 착하고 볼드모트와 죽음을 먹는 자들 측은 나쁘다는 일차원적인 묘사가 아닌, 때론 일반적으로 선하게 여겨지는 무리에서 악한이 존재함을 시사한 게 - 그 반대의 경우도 물론 있지만 이 이야기는 후속작에서 하겠다. - 의미심장했다. 작가도 인정하는 최악의 악역 엄브릿지는 표면적으론 상당한 요직에 있는 마법부 직원이지만 근본은 인간적인 감정이 결여된 저능아다. 엄브릿지가 잘하는 것이라곤 자신과 코드가 맞는 라인을 잘 잡은 것밖에 없을 정도로 작중에서 최악의 행보를 지치지도 않고 선보인다.


 안타깝게도 현실에는 엄브릿지보다 더 교활하고 악랄한 인간이 많을 것이다. 문제는 얼핏 봐선 누가 엄브릿지인지 간파하기 쉽지 않다는 것인데, 간파하기 어려울지언정 이렇게 의심하고 고민하게 만든다는 측면에서 '해리포터' 시리즈는 지금보다 더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전작 '불의 잔'의 크라우치처럼 사람의 지위와 인성은 반비례할 수 있음을 역설한 것처럼 '해리포터' 시리즈는 마법 세계를 통해 현실 세계를 돌아보게끔 만든다. 잘 만든 판타지는 현실을 반영하며 그 판타지로 하여금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는 점은 소설을 읽는 입장은 물론 쓰는 입장에서도 퍽 고무적인 일이다. 소설은, 특히 판타지 소설은 애들이나 읽는 황당무계한 소설이란 편견을 생각하면 이 시리즈의 위상은 더욱 소중하다.


 언제 볼드모트가 마법 세계를 장악해도 이상하지 않을 폭풍전야의 상황 속에서 해리는 그전까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내몰리지만 그 와중에 해리의 학창 생활은 학창 생활대로 알차게 한다. 썸녀 초와 관계가 진전되다가 흐지부지되고 무능한 어둠의 마법 방어술 교수 때문에 해리는 자체적으로 어둠의 마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퀴디치 경기는 물론이고 스네이프와의 특별 보충 수업까지 소화해야 했다. 몸이 열 개라도 감당하기 힘든 스케줄인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해리는 덤블도어와 해그리드, 시리우스의 안위를 걱정하고 볼드모트의 위협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해리의 마음을 모르는 듯 불사조기사단을 비롯한 어른들은 해리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설명도 없이 자신들의 지시를 따를 것을 부탁하기만 한다. 꼭 덤블도어 교수님한텐 다 뜻이 있을 거란 말을 - 심지어 이 말은 헤르미온느도 한다. - 덧붙이면서.

 이 책을 처음 읽을 당시에는 내가 해리와 비슷한 연배여서 그랬는지 해리의 심정이 거의 100% 공감이 갔는데, 시간이 흘러 다시 읽으니 새삼 내가 나이를 먹긴 먹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시종 어른들의 말에 불복하고 기어코 하지 말란 짓을 했다가 위험에 처하는 모습이 전과 달리 마냥 좋게 보이진 않았던 것이다.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어른을 불신하는 듯한 태도 때문에 한 번 큰코다쳐야 정신을 차리려나 하고 생각했던 걸 부정하지 않겠다. 충분히 합리적인 반항심이었던 것 같지만 그럼에도 해리가 어려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읽는 내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막판에 덤블도어가 해리와 마주앉아 해리를 충분히 믿지 않은 것과 해리에게 설명을 충분히 하지 않고 닥치고 따라주길 바란 것에 죄의식을 느낀다는 대목에서 뒤통수를 맞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른 건 몰라도 똑같이 어린 시절을 거친 어른이 지금 아이들에게 공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죄라는 말에 내 생각에 대해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옛날엔 해리에게 공감했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는 생각에 이르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꼰대가 되고 말았나 하는 불안감에 식은땀이 났다. 꼰대를 그렇게 싫어했는데 조금 나이 먹었다고 나도 꼰대가 됐을지 모른다는 의심은 불쾌함을 안겨줬다. 똑같은 작품이더라도 시간차를 많이 두고 읽을수록 감상에 차이가 난다는 걸 자주 경험해서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지만, 이번엔 제법 충격적이었다.

 앞으로 시리즈의 작품이 2편 남았다. 벌써 이렇게 됐나 싶어 아쉽다가도 앞으로 무슨 시련이 닥칠까 기대되고 두렵기까지 하다. 이미 읽은 내용임에도 이런 기분이 드는 건 너무 오래 전에 읽어서 그런 것도 있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감상이 나올까 가늠이 안 가기 때문이 크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다시 읽는 이유는 해리의 이야기가 다시 읽을 만큼 재밌었기 때문이지 내가 해리에 대해 전과는 다른 인상을 품는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면 당연한 변화인데, 시리즈를 워낙에 어릴 때 접해서 그런 건지 유독 내 심상의 변화를 체감한 게 불쾌하면서도 감내해야 하는 일종의 통과 의례로 여겨졌다. 대부를 눈앞에서 잃은 해리에 비한다면 겨우 이런 일을 두고 통과 의례 운운하는 게 웃길 수 있겠지만, 내심 나 자신에 대해 변하지 않은 사람이라 믿었던 터라 그 믿음이 깨진 게 못내 창피한 나머지 생각보다 후유증이 컸다.


 그 후유증이 아니었으면 '혼혈왕자'와 '죽음의 성물'에서 펼쳐질 해리의 모험담보다 그의 성장이 이 정도로 기대되지 않았을 것이다. 해리가 성장하는 과정을 따라가니 나도 함께, 혹은 다시 성장하는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최근 들어 성장 문학은 읽을 시기를 놓치면 읽으나 마나 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던 차에 이 작품이 아주 타이밍 좋게 내 편견을 지적해줬다. 하긴, 사람이 영원히 성장을 하는 존재인 이상 성장 소설에 유효 기간이 존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일 것이다. 대상 독자가 아동이나 청소년이라면 경우가 다르지 않나 싶었지만 '불사조기사단'을 읽으니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같은 소설이라도 언제 읽느냐에 따라 감상이 달라진다는 걸 통해 성장 문학은 두고 두고 읽을수록 더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예전에 읽은 성장 문학들을 다시 보게 됐다.



인상 깊은 구절


언제나 너희는 스스로의 생각, 혹은 용기 같은 것 없이 죽음에 맞서고 있다고 확신했지. 마치 너희가 살해당하거나, 고문당하거나 아니면 친구가 죽는 것을 보기 직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생각을 똑바로 할 수 있다는 듯 말이야. 수업 시간에는 아무도 우리에게 그런 걸 가르쳐 주지 않았어. 그런 일들을 직접 겪는 게 어떤 건지 말이야. - 2권 264~265p


피렌체는 해리가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인간 선생님들과도 달랐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여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이 세상 어떤 것도, 켄타우로스의 지식조차도 절대 완벽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심어 주기 위해 애를 썼다. - 4권 153~154p


이 세상엔 죽음보다 더 괴로운 것이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자네의 최대 약점이지. - 5권 207p


젊은이들은 노인들이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느끼는지 이해 못하는 게 당연해. 그러나 젊은이들이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느끼는지 노인들이 이해 못한다면 그건 죄가 아닐 수 없지...... - 227~2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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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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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페미니즘 희곡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인형의 집>을 드디어 읽어봤다. 노르웨이에서 문학하면 입센이 손꼽힌다고 하던데 그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 의미있는 독서였다. 내 주변 사람들은 눈치챘을 테지만, 나의 노르웨이에 대한 선망이 보통이 아니다 보니 노르웨이제製라고 하면 괜히 콩깍지가 씌어 한 번 더 살펴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내 말에 공신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싶지만, <인형의 집>은 흥미롭게도 노르웨이에 대한 나의 애정을 차치하고 객관적으로 봐도 좋은 작품이었다.

 입센의 <인형의 집>은 뭉크가 그린 <절규>처럼 노르웨이란 나라의 이름보다 유명한 작품이라 볼 수 있는데 완독하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후반부에 노라가 자신의 남편 헬메르에게 자유를 선언하고 집을 나가는 장면은 지금 봐도 명장면이었고 여성은 물론 비슷한 처지의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 될 만했다. 특히 노라가 후반부의 선택을 결심한 계기에 대한 입센의 통찰력은 탄복스런 수준이었다. 노라의 억울함을 설득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노라를 향한 헬메르의 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게 인상적이었다.


 분량도 짧고 등장인물도 적은 편인 것에 비해 각 인물의 이해관계나 전사前事도 단순하지 않고 하나의 선택으로 인한 나비효과가 꽤 큰 등 상당히 치밀하게 집필된 작품이라 느껴졌다. 인물들의 심리 묘사나 캐릭터성도 입체적이라서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도 재밌었는데, 노라가 헬메르를 위해 아버지의 서명을 날조한 것이나 개과천선 중이던 크로그스타드가 한번 수틀려지자 노라를 협박하는 장면 등 현실적인 상황이 많이 그려져서 몰입도가 높았다. 노라를 비롯한 작중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장단점이 있고 한계도 명확하며 누구 하나 압도적으로 억울한 입장이라거나 악인도 없었는데 이게 정말 현실적이고 공정한 설정이지 않았나 싶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성 서사나 페미니즘 서사에 몰입하기 어려웠을 법한 나같은 남성 독자도 노라의 처지에 공감하기 용이했다고 본다. 무지의 결과든 가족을 위한 것이었든 노라가 서명 날조를 저지른 건 엄연한 죄라는 것과 노라에 대한 법의 단죄 여부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 논란이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살펴봄에 있어선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아닐 것이다. 노라나 주변 인물의 잘잘못의 여부나 누가 선인이고 악인이냐 따지는 것보다 노라에 대한 헬메르의 한결 같던 태도, 남편이 아내를 대하는 방식이 마치 사람이 애완동물 다루듯 한다는 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사실 헬메르란 인물은 남자가 보기에도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다. 아내를 애완동물 취급하는 것도 문제지만 기본적으로 비열한 주제에 남의 눈은 되게 의식하는 밥맛 떨어지는 인간이잖은가. 어떻게 보면 성차별적 태도조차 빙산의 일각이라 여겨질 정도로 파면 팔수록 일그러진 심리로 똘똘 뭉쳐진 캐릭터라 좋게 보려야 좋게 볼 수 없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지만 작품의 주제의식을 위해 이렇게 각색하는 게 어떨까 싶었다. 헬메르가 인간으로서 한없이 괜찮지만, 유독 성차별적 가치관이 거슬리는 캐릭터로 설정됐다면 노라의 심리가 더욱 극명하게 강조됐을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작품 결말에 대한 논란이 더욱 가중됐을 테지만, 좋은 사람임에도 당대 사회적으로 만연한 성차별적인 분위기 때문에 아무런 비판도 없이 같은 태도를 취할 뿐이란 설정이 대놓고 밥맛 떨어지는 인간인 것보다 깊이가 있었을 것 같다.

 뭐, 이것도 2세기가 지난 뒤에 읽은 독자기에 잡을 수 있는 트집일 것이다. 헬메르가 자기 명예가 더럽혀진 것에 이성을 잃어 아내한테 폭언을 하다가 몇 분 지나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꾼 것에 대해 이만큼 논리정연하게 비판할 수 있다는 건 당시 기준으로 무지하게 혁명적이지 않았을까? 시대를 앞서가도 굉장히 많이 앞서간 것일 텐데, 헬메르처럼 아내를 애완동물이나 노예쯤으로만 여기던 남성이 절대다수인 시대에선 입센은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 시대에도 충분히 초월했다고 생각한다.


 헬메르 같은 남자가 과거엔 절대다수였지만 오늘날엔 과연 절대 없으리라 단언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만 한정하더라도 결코 적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20대 후반인 내 또래 남자에 한정해도 단언할 수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여자를 인형처럼 다루고 싶은 남자가 많겠지만 입센이 살던 시대와 차이가 있다면 그런 마음을 내비쳤다간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리란 걸 알고는 있다는 것이다. 근데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도 이해했을까?

 나는 그런 남자들하고 다르다고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그보다 나는 다른 얘기를 하고 싶다. 아까 서두에 노라가 집을 나가는 장면이 여성은 물론 비슷한 처지의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고 했다. 한국 사회에서 남자인 나는 일반적으로 소수자에 해당하지 않지만 다수와 소수의 개념은 상대적인 것이라 이러한 내 정체성이 언제까지나 영원하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나한테는 남자라는 정체성만 있는 게 아니란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상황과 장소에 따라선 나 역시도 얼마든지 소수에 해당할 수 있으며 중요한 건 나는 변검을 하듯 평소에 여러 정체성 중 하나만 내세우지 않고 언제나 동시다발적으로 혼합된 채 산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가 누구 보고 소수자다 아니다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선을 그어 편을 가를 정도로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남성임에도 페미니즘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잊을 만하면 그 가치를 되새기고 그와 관련된 작품을 찾아 읽는 이유다. <인형의 집>은 여성이라는 약자가 가정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지 선명히 묘사한 작품이다. 페미니즘을 얘기할 때 거론하기에 딱 걸맞은 작품이고 실제로 그 주제의식도 결코 과하지 않은 작품이었다. 고전이란 말만 듣고 고리타분하거나 지금 기준으론 초점이 엇나간 얘기를 하진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정말 괜한 기우였다. 나는 노르웨이 문학이라고 하면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나 <이갈리아의 딸들>만 떠올렸는데, 과연 입센이 이 두 작품을 가뿐히 제치고 사람들한테 명성을 떨친 이유가 있었다. 이제라도 읽었으니 다행이었다.

내게는 다른, 그만큼이나 거룩한 의무도 있어요.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이에요.

(중략)하지만 나는 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말로 만족할 수 없고 책에 쓰여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어요. 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설명을 찾아야 해요. - 118~1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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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맛 여행
나가라 료코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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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8.0







 누가 이 책을 읽는 나를 보고 아직도 유럽 여행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느냐고 하던데,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향후 5년 안엔 유럽을 방문할 수 있을 것 같아 꼭 그 미련을 버려야 할까 싶다. 뭐, 앞으로의 여행은 이전의 여행과는 달리 절차가 복잡해지겠지만 내가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떠나겠다면 누구도 왈가왈부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원래 여행을 좋아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돈과 시간이 있어도 여행을 못 가는 처지가 되니 새삼 여행이 나한테 있어 정말 중요했음을 깨닫고 있다. 내게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책임감 있게 다녀와야지. 암, 그렇고 말고.

 <유럽 맛 여행>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유럽 나라들의 음식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베를린에 거주하는 만화가겸 일러스트레이터인 일본인 저자가 남편과 함께 파리, 암스테르담, 북유럽(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런던, 그리고 베를린에서 어떤 먹방을 즐겼는지 그려냈다. 프랑스하면 역시 빵이고 네덜란드는 감자튀김, 영국은 피쉬 앤 칩스 등 우리가 익히 알 만한 요리들은 물론이고 음식이 별로 유명하지 않은 영국과 독일의 여러 길거리 음식처럼 현지에서밖에 경험할 수 없는 음식들도 제법 폭넓게 소개해준다.


 개인적으로 북유럽 파트를 기대했는데 너무 짤막한 일러스트로 대체해서 김샜다. 안 그래도 작가의 그림체가 가독성이 떨어지고 흑백이라 음식 그림치고 식욕을 자극하지 못하는 게 불만이었는데 내가 가장 관심 있던 부분을 통일성 없게 일러스트로만 그려서 불만을 감추기 힘들었다. 그나마 그 일러스트는 컬러라서 기분이 환기됐는데, 이럴 거면 다른 나라도 전부 컬러로 그리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니 아쉬움이 더욱 배가됐다. 통일성이 없는 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흠이었다.

 소개하는 음식 종류나 맛 표현은 기대 이상이었는데 특히 작가가 실제로 거주하는 베를린은 음식뿐 아니라 도시까지 애정을 담아 소개해줘서 차라리 베를린만 만화로 그리는 게 어떨까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실제로 작가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편집부에서 베를린만 그리는 건 아무래도 화제성이 떨어지니까;; 다른 유럽 나라까지 포함한 미식 탐방기로 확장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해서 베를린은 다른 기회가 있다면 그때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싶다고 후기에서 밝혔다.


 찾아보니까 베를린을 무대로 한 작가의 다른 만화가 일본에서 출간되긴 했던데 그 책이 우리나라에 소개될는지 잘 모르겠다. 소개되면 좋으련만. 내가 봤을 때 편집자의 조언은 독이 된 듯하다. 차라리 베를린에 집중했으면 보다 밀도 높은 만화가 탄생됐을 것 같다. 뭐, 나중에라도 작가가 그리고 싶은 만화를 그렸다니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암, 그렇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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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요나라 사요나라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8






 스포일러 100%


 제목만 봐선 그저 그런 일본 로맨스물이라고 생각했다. 이 작품의 캐치 프레이즈는 '있을 수 없는 사랑이기에 더욱 아름다운 사랑'이다. 작가 요시다 슈이치는 이 작품을 통해 '서로 안심할 수 있는 상대인데도 불행한 첫 만남 때문에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궁극적인 사랑의 형태'를 그리고자 했다고 한다.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작가가 범상치 않은 내용의 소설을 썼으리란 예상을 안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비록 작가의 모든 작품을 접하지 않았지만 이 작품이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이다. 처음 읽을 때나 다시 읽은 지금도 그 마음엔 변함이 없고, 개인적으로 <퍼레이드>, <요노스케 이야기>, <악인>을 뛰어넘은 요시다 슈이치 최고의 작품이라 생각한다.

 200쪽 조금 넘는 이 소설은 얼핏 보면 분량이 너무 짧게 설명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불가사의한 형태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여자를 집단 강간한 남자와 그 남자에게 강간을 당했던 여자와의 사랑이 상식적으론 결코 와 닿지 않으니까 말이다. 읽을 때도 느낀 거지만 이렇게 소설의 내용을 옮기고 있자니 소설의 설정이 실로 엽기적이다. 작가가 이 사랑을 그릴 때 독자에게 설득시키려는 것이 아닌 독자에게 공감을 유도하고 있으니 난처하기 그지없다. 최근에 <가위남>을 소개할 때도 비슷한 고충이 따랐는데, 작품에 따라선 스포일러 없이 그 묘미를 남들에게 전달하기가 정말 힘들구나 싶었다. 그래서 이번엔 어쩔 수 없이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을 배제할 수밖에 없는 스포일러 100%의 감상을 남기고자 한다. 그래야 그나마 감상다운 감상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작가조차도 두 남녀 주인공 슌스케와 가오리의 사랑의 형태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 게 아닐까 하고 가장 가능성 있는 해석을 제시할 뿐, 가오리가 배신했다가(=복수에 성공했다가) 그 태도를 철회한 이유와 슌스케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거나 누명을 받아들이는 과정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내가 이 작품을 9년 전에 처음 읽었을 땐 '이상하긴 해도 이만하면 설득력 있게 그렸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은 지금은 인물들의 관계가 뭘 어떻게 포장하기가 버거운 만큼 자꾸 말을 아끼게 된다. 이런 형태의 사랑이 있을 수도 있다고 넘기기엔 성폭력 피해자의 아픔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 같고, 반대로 이 작품을 두고 성폭력 가해자를 그럴싸하게 미화한 폭력적인 스토리라 매도하기엔 결코 내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유일하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건, 다른 작품을 쓸 때도 그랬듯 요시다 슈이치가 이번에도 어느 한쪽으로 예단하기 어려운 지점을 잘 건드렸다는 것뿐이다.

 참 골때리는 설정이지만 이 작품을 두고 미화라느니 폭력적이라느니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는 작가의 현실성 있는 통찰이 크게 작용했을 터다. 성폭력 가해자임에도 남성이라는 이유로 연줄을 통해 제대로 된 직장도 구하는 등 - 암묵적으로 '법을 위반했지만 한편으론 남자로선 이해할 만한 실수'라고 동정까지 받는다... - 사회적 대우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던 반면, 성폭력 피해자인 여성은 전학을 간 뒤나 기껏 구한 직장에서나 남편과 친정한테 과거가 드러나는 순간 파멸로 치닫는다는 걸 씁쓸할 정도로 섬세하고 현실적으로 묘사했다.


 가령 TV에서 노출 개그를 하고 있는 남자 코미디언의 모습에 웃자 친부라는 작자가 '남자 알몸을 보고 왜 웃느냐'며 딸을 나무라는 모습부터 나중에 집단 강간 피해자란 사실을 빌미로 가정 폭력을 일삼는 남편을 고소하려고 하자 친정 쪽에서 결혼 직전까지 자기 과거를 숨긴 대가라고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것까지 제3자 입장에서도 피가 솟구치는 장면이 짧은 분량 안에 강렬하게 그려졌다. 난 이런 장면을 상상하고 묘사할 줄 아는 작가가 성폭력 가해자를 미화한다고 의심조차 할 수 없었다. 작품의 내용도 민감하긴 해도 내겐 마찬가지인 관점에서 폭력적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훗날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가 만나 처음 사건이 벌어지기 전의 감정이 살아났지만, 당사자들도 쉽게 납득하기 힘든 감정이기에 애써 거릴 두거나 심지어 성폭력 피해자인 가나코는 복수하려는 척이라도 해야만 했던 전개도 마냥 엽기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단지 성폭력 피해자는 가해자를 절대 용서하면 안 된다는 사회적인 시선, 세상 사람들의 고정 관념에 얽매였다는 게 내가 슌스케와 가나코의 모습에서 받은 인상이다. 상대방을 향한 둘의 감정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인 만큼 사회적인 시선과 무관해야 마땅하지만, 한 번 사건으로 기록에 남은 두 사람의 관계엔 타인의 잣대가 어떤 식으로든 개입하게 된다는 게 어떻게 보면 이 작품에서 가장 씁쓸한 부분이었다. 공소시효를 들먹일 생각은 없지만, 과거의 사건은 과거인 거고 기이하긴 하지만 어쨌든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려 하거나 이미 맺는 중인 두 남녀의 모습에 이렇게 저렇게 토를 달 수밖에 없다니... 이것이야말로 사생활 침해의 진정한 폐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요나라 사요나라>는 작가의 발군의 통찰력과 상상력이 집약된 궁극의 연애소설이다. 가끔 사랑의 시작과 끝을 성의없이 묘사하는 무늬만 연애소설인 작품도 있는 걸 생각하면 이 작품은 어느 등장인물의 심리 하나 허투루 묘사하지 않은 밀도 높은 연애소설이었다. 비단 슌스케나 가오리만이 아니라 둘의 과거를 추적하는 역할을 맡은 와타나베도 - 이 캐릭터 덕에 이 작품이 추리소설인 것 같은 느낌도 풍겨졌다. -인상적인 캐릭터였다. 독자와 똑같은 제3자로서 느낄 수밖에 없는 당혹스러움을 대변함과 동시에 섣불리 두 사람의 관계를 단정짓지 않는 신중함과 객관성을 유지하는 등 이래저래 이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만약 와타나베가 전형적인 기레기였다면 이 작품의 색깔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아마 자극적이기만 하고 여운 따윈 쓰레기통에나 던진 작품에 그쳤을 것이다. 그랬다면 처음 한 번은 몰라도 이렇게 두 번 읽지도 않았을 거고 세 번, 네 번 읽을 생각도 안 들었을 것이다. 연애소설을 잘 찾아 읽지 않지만, 아마 이 작품이 나한테 있어 오래도록 손에 꼽히는 연애소설이지 않을까 싶다. 굳이 연애소설에 한정하지 않아도 어떤 카테고리에든 손에 꼽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하면 과찬인 걸까? 판단은 앞으로 여러 좋은 작품을 읽으면서 내려야겠다.


 이 작품을 9년 전에 읽을 당시엔 영화가 나오지 않았는데, 2013년에 이 작품을 원작으로 둔 영화 <안녕 계곡>이 - 참고로 '안녕 계곡'이 원제다. - 개봉됐다고 한다. 감독은 생소하지만 캐스팅된 배우를 보니 기대를 안 할 수가 없던데, 괜한 기대는 금물이지만 그래도 궁금하긴 하다. 과연 원작의 묘미를 잘 살렸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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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남
슈노 마사유키 지음, 정경진 옮김 / 스핑크스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9.8







 이 작품을 처음 읽을 당시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서평을 훑어보다가 얼떨결에 이 작품의 스포일러까지 읽고 말았던 것이다. 그냥 지나치고 읽기엔 너무 눈길을 끄는 내용이었던 만큼 이 작품의 첫 페이지를 넘길 즈음까지도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하지만 웃기게도 난 반전의 내용을 알면서도 속고 말았다. 작가가 워낙에 그럴싸하게 숨긴 나머지 내가 인터넷 서점에서 읽은 서평이 사실은 헛것이 아니었는지 의심해버렸다. 결과적으로 스포일러를 당한 게 무색하게 나는 이 작품을 즐기는데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참...

 처음 읽을 땐 반전의 놀라움에 감탄했다면 요번에 다시 읽을 때는 이런 반전을 구사한 작가의 주제의식에 눈길이 더 많이 갔다. 예전엔 놀라운 반전이라고만 여겼는데 최근에 작가의 다른 작품 <거울 속은 일요일>을 의식하며 읽으니 이 작가가 굉장히 노력하는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반전의 놀라움으로 승부하려는 작가가 아니라 그 반전을 통해 그 이상의 것을 말하고자 하는 작가라는 게 내가 <가위남>을 다시 읽으면서 받은 인상이다.


 동서고금의 추리소설가들은 제각각의 작품 세계를 갖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이런 뉘앙스의 말을 꼭 작품 속에 넣는 것 같다. '선입견 따위, 쓰레기통에나 던지라지.' 그 말 그대로다. 추리소설에선 가장 의외의 사람이 범인이고 가장 알리바이가 확실한 사람이 범인이다. 이런 경우는 오히려 클리셰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선입견을 파고들거나 이용하는 건 추리소설에선 절대불변의 규칙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가위남>만큼 '선입견'이란 개념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파고드는 작품도 없는 것 같다.

 이 작품은 가급적 스포일러를 최소화하고 소개해보고 싶다. 어떤 종류의 반전을 구사하는지도 함구하겠다. 내 경우엔 반전의 핵심까지 알고도 속았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아예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읽었으면 좋겠다. 게다가 다른 이유도 있다. <가위남>은 선입견을 파고드는 아주 좋은 작품이긴 하나 그놈의 선입견 때문에 소개하는 입장에선 곤란한 작품이기도 하다. 가령 주인공이 연쇄살인범이고, 연쇄살인범이 세 번째 희생자를 물색하는 도입부나, 또 주인공이 연쇄살인범임에도 불구하고 누가 주인공 아니랄까봐 그 심상 세계가 묘하게 매력적인 것 등 이 작품의 기본 설정 자체를 좋게 표현했다간 속된 말로 미친 놈 소리 듣기 딱 좋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난 연쇄살인범이 등장하는 추리소설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물며 잔인한 작품이 취향도 아니며 그런 측면에서 이 작품은 여러모로 내가 인상 깊게 읽을 만한 작품은 아니었다. 주인공의 심상 세계가 매력적이지만 딱히 공감도 안 가고 경찰의 시점과 병행되는 전개도 생각보다 눈길을 끌지 못했다. 작가가 캐릭터 만드는 솜씨가 형편없었으면 이 작품은 답이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작중에서 그럴 듯하게 설명되지만, 사건 전개에 있어 우연이 너무 남발되는 것도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개중엔 너무 허술한 부분도 있어 역시 데뷔작은 어쩔 수 없구나 싶었다. 후반 100페이지를 읽기 전까지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엔 반전이 전부인 소설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그 반전이 없었으면 지지부진하기만 했던 앞의 서사들은 통째로 되살아날 일 없이 그대로 지지부진한 채로 묻혔을 테니까. 다시 읽으니 그 점이 더욱 극명하게 느껴졌다. 이 작품은 반전을 빼면 시체라고. 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반전 없이는 애초에 구상되지도 않았을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쓰던 도중에 급하게 떠올린 반전일 가능성은 절대 없다. 단순히 복선과 치밀한 구성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잊을 만하면 강조된 선입견의 위험성은 모두 반전의 놀라움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장치였다.


 <가위남>은 선입견 따위, 쓰레기통에나 던지라고 온몸으로 주장하는 작품이다. 선입견이 무가치할 뿐더러 위험할 수 있다는 걸 작중 내내 강조하는데, 선입견을 가져선 안 된다는 걸 누군들 모를까 싶겠지만 정작 왜 그래야 하는지 설명하려는 사람은 적다는 걸 우리는 생각해봐야 한다. 선입견이 생긴 것엔 어느 정도 근거도 있고 필요하단 의견도 있지만 솔직히 말해 대다수의 사람은 뭐가 선입견인지 일일이 따지며 살지도 않는다. 누군가 나서서 언급하지 않는 이상 선입견은 선입견으로 인식되지도 않는다.

 이 작품을 쓴 슈노 마사유키는 그 '누군가'에 해당할 사람이다. 자신이 떠올린 반전을 위해, 그에 걸맞은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 충격을 배가시키기 위해 다각도로 공부한 슈노 마사유키는 이 작품으로 하여금 성공적으로 데뷔했고 독자들 사이에서 반전하면 생각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에도 성공했다. 지금 읽어도 혁신적인 작품이고, 중요한 건 이 작가가 원 히트 원더에 속하는 작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거울 속은 일요일>을 읽었을 땐 <가위남>으로만 평가하기엔 아까운 작가라고 여겨졌다. 그가 지금은 고인이고 그의 다른 작품이 좀처럼 국내에 소개되지 않는 게 아까울 따름이다. 천재가 이렇게 잊혀져선 안 되는데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가위남>이 영화로도 나왔다는 것인데, 이 작품을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영화의 완성도가 심히 의심스러울 것이다. 영화로 구현되면 어떤 부분 때문에 작품의 묘미가 확 떨어질 텐데, 아니나 다를까 캐스팅 목록을 보니 아예 그 묘미를 포기한 것 같다. 영화는 영화대로 재밌을 것 같지만, 만약 둘 다 본다면 무조건 소설 먼저 봐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난 이미 소설부터 읽었으니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만약 반대로 접했다면... 상상도 하기 싫다.

왜, 산에서 곰을 만나면 죽은 척하라는 이야기가 있잖아. 옛날부터 그렇게 전해 내려왔고, 실제로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사람도 많다고 말이지. 그건 당연한 거야. 죽은 척했다가 실패하면 곰한테 잡아먹히는 거잖아? 나는 곰 앞에서 죽은 척했습니다만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하고 증언하는 사람은 없어. 당연히 성공 사례밖에 보고되지 않아. 자살도 마찬가지야. 자살에 성공한 인간은 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하고 말하지 못해. 이미 죽은 몸이니까. - 56p




그리고 오히려 나와 경사 나리와 마쓰모토 형사님의 직감이 일치했을 때가 위험한 거야. 모두가 이 사람이 범인이라고 믿어버리면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게 될 수 있어. 누명은 그렇게 해서 씌워지는 거야.

네가 해야 할 건 이런 직감을 몸에 익히는 게 아니야. 너 자신의 견해를 관철하는 거야. - 19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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