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9.4







 김영하 작가를 주로 소설이나 방송으로 접했던 나로서 작가의 산문을 읽는 것은 생각보다 신선한 경험이었다. 이 책의 출간 시기에 맞춰 작가가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현한 걸 기억하는데, 이 책의 첫 번째 산문의 내용 중 방송에서 언급했던 에피소드도 제법 있던 것처럼 김영하 작가의 산문은 소설을 읽을 때완 달리 방송에서의 박학다식한 모습이 자주 연상됐다. 물론 본업이 작가인 사람답게 말솜씨보다 역시 글솜씨가 압도적이었는데, 작가 지망생 동기 중에 김영하 작가가 요즘 방송에 나와 걱정된다고 말한 동기한테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었다. 아직까진 김영하 작가는 작가로서 건재하다고 말하면서.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 작가는 방송이란 외세에 끄떡없이 자기 길을 잃지 않을 사람인 듯하다.

 작가에 대한 팬심으로 일단 사놨지만 원래 산문을 잘 안 읽어서 사놓고도 방치했던 책인데  최근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김영하가 나오는 방송을 보기도 했고, 또 최근 신인상에 작품을 제출해 일단락을 냈으며 곧바로 연휴 기간을 보내게 된 터라 여행에 대한 욕구가 강렬해진 차에 이 책을 집어들었다. 3월에 코로나 때문에 무산된 핀란드 스웨덴 스탑오버 여행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반년 가까이 허덕거렸는데 이 책을 읽으니 이제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읽을 걸 그랬다. 내심 이런 시국에 여행을 가지 못하는 걸 아쉬워한다는 게 너무 철없는 게 아닌가 하고 자책했었는데 그런 마음을 쏙 들어가게 해줬기 때문이다.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이 책이 1년만 더 늦게 출간됐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언젠가 김영하 작가가 이 시국에 대한 글을 써줬음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말 그대로 '여행의 이유'에 대해 썼던 작가인 만큼 무슨 이유에서건 해외 여행은 단념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여행은 거의 해외 여행을 가리키는데, 국내를 두고 굳이 돈과 시간을 들여 해외로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 작가가 워낙에 잘 통찰한 지라 읽는 내내 공감의 끄덕거림이 멈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외에도 외국을 길게 여행하는 것과 아예 몇 년씩 사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지, 여행 가기 전에 품었던 로망이 깨졌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되는지, 애당초 우리는 왜 낯선 나라에 관심을 기울이고 굳이 그곳을 직접 발로 밟고 싶어 하는지, 한편으론 직접 여행지에 가봤음에도 일부밖에 모르고 왜 아이러니하게도 방송 같은 매체를 통해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지, 여행지에서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았던 경험이 떠올라 우리나라를 여행하는 외국인들에게 호의를 배푸는 심리 등 김영하 작가는 방송에서보다 훨씬 박학다식하고 자유롭고 분량에 얽매이지 않으며 사유를 풀어냈다. 때론 인용하는 에피소드가 너무 어렵거나 옛스러워서 - 그래도 작가답게 확실히 읽는 책도 범상치 않더라. - 집중이 잘 안 된 적도 있지만 '이 책을 쓰기 위해 내 모든 여행의 기억이 필요했다'는 말처럼 자신이 겪은 순간순간의 에피소드에서 얻은 통찰을 유기적으로 묶어낸 덕에 곱씹으며 읽는 맛이 있었던 글들이었다. 저번에 소설집 <오직 두 사람>의 작가 후기가 소설 못지않게 좋았는데 산문도 그에 뒤지지 않아 이 작가를 더욱 존경하게 됐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며 내 지난 여행 경험들이 떠올랐다. 난 여행 경험을 블로그에 따로 포스팅까지 하고 몇몇 에피소드를 두고서 '절대 잊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것과 달리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잊고 지낸 에피소드가 제법 있었는데 그게 창피했다. 기억이란 게 원래 잘 잊혀지는 법이라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언젠가 나도 여행에 대한 글을 제대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김영하 작가처럼 박학다식하게 잘 쓸 자신은 없다. 작가마다 스타일이 다르고 어쩌고 이전에 애당초 누구보다 잘 써야지 생각하게 되면 아예 시작도 못할 것 같다. 그러니 때가 되면 그냥 써야겠다.

 김영하 작가는 작가답게 글에서 여행을 떠나는 걸 소설을 읽는 것에 비유한 적이 많았는데, 그 비유를 곱씹어보자니 내 독서 취향 못지않게 여행 취향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됐다. 다소 편식을 했던 것 같은 내 여행 취향이 말이다. 김영하 작가는 주변에서 여행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살면서 그렇게 여행을 그렇게 많이 떠났음에도 선뜻 좋아한다고 대답하기 힘들다고 하던데 이 말이 특히 공감됐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여행의 낯섦은 좋아하지만 막상 여행지에서 도전을 꺼리고 맨날 했던 거 보던 것만 고집하는 경향이 있어 - 먹는 것도 먹던 것만 먹는 것 같다. - 과연 내가 여행이 선사하는 낯선 경험을 즐기는 사람인지 의구심이 들 때가 많았다. 그래서 여행은 좋아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어딘지 석연찮은 느낌을 받곤 했다.


 이 책은 어떤 여행이 더 의미 있고 보람찬 것인지에 관해 얘기하는 책은 아니다. 나의 배부를 수도 있는 위의 석연찮은 느낌은 <여행의 이유>라는 책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넋두리에 가깝다. 다만 자신의 모든 여행 경험을 녹여내 이만한 산문집을 펴낸 작가의 결과물을 읽으니 어떤 식으로든 내 지난 여행들을 반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블로그의 여행 포스팅은 여행을 다녀왔으니까 의무적으로 쓴 감도 있고 그렇다 보니 대충 사진 올리고 코멘트만 달고 흐지부지하게 끝난 경우가 많았는데... 이거 아무래도 여행에 대한 내 지난 태도를 돌이켜볼 좋은 계기가 된 것 같다. 내가 너무 이 책을 공감하며 무겁게 읽은 걸까 싶은데... 뭐 어때. 그렇게 읽을 수도 있는 거지.

 여담으로 꼭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은 아니지만 갑자기 여행 욕구가 차올라 당장 다음주에 3박 4일로 부산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아직 불안한 시국이지만  작년 10월에 방콕을 다녀온 뒤로 여행다운 여행을 못 가본 터라 슬슬 어딘가로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책에서 부산이 언급돼서 삘이 꽂힌 김에 가보기로 했다. 내 여행 태도가 지난 방콕 여행과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저쨌거나 근 1년 만에 하는 여행이 무척 기대가 된다.



인상 깊은 구절


그러나 우리 내면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강력한 바람이 있다.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그런 마법적 순간을 경험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그야말로 '뜻밖'이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그걸 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22p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편안한 믿음 속에서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난 이상, 여행자는 눈앞에 나타나는 현실에 맞춰 믿음을 바꿔가게 된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정신이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의 믿음에 집착한다면 여행은 재난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 35p


인류가 한 배에 탄 승객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우주선을 타고 달의 뒤편까지 갈 필요는 없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인생의 축소판인 여행을 통해, 환대와 신뢰의 순환을 거듭하여 경험함으로써, 우리 인류가 적대와 경쟁을 통해서만 성장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 148p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가와 비슷할 것이다. 여행은 고되고, 위험하며, 비용도 든다. 가만히 자기 집 소파에 드러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게 돈도 안 들고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 - 205~206p


인간이든 동물이든 그렇게 모두 여행자라고 생각하면 떠나보내는 마음이 덜 괴롭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환대했다면, 그리고 그들로부터 신뢰를 받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 2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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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의 규칙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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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추리소설은 항상 반전을 마련해놓는 장르의 소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의외로 정형화된 스타일 때문에 반전을 추구하기 힘들다는 약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추리소설은 홈즈나 코난, 김전일 시리즈로 인식되는 본격 추리소설을 가리킨다. 요새는 이처럼 명탐정과 범인이 트릭을 사이에 두고 두뇌 대결을 펼치는 소설만이 추리소설의 전부는 아니지만, 아직도 추리소설의 원형을 제시한 대표적인 추리소설들, 고전 작품들이 추리소설 전체의 이미지를 대변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추리소설의 불모지이며 아직 해외 추리소설을 선호하는 우리나라의 경우엔 고전 추리소설들의 클리셰에 따른 부정적인 선입견과 그 영향력은 지대하다.

 추리소설의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추리소설들을 원망하는 것은 조금 부당한 일인지 모르겠다. 추리소설의 스타일엔 우열이 있을 수 없으며 고유한 매력의 스타일을 처음 고안한 대가들은 지금보다 훨씬 존경해 마땅하다. 다만 후대의 작가들이 추리소설의 클리셰에 안주하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 추리소설 애독자가 아닌 문예창작 전공자이자 작가 지망생으로 말하자면 이런 타성에 젖은 태도는 소설을 집필함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하는 태도다.


 사실 현대의 추리소설가들 사이에서 '시적 허용'인 양 작위적이고 도식적인 서사나 트릭을 구사하는 것에 대한 경계는 그렇게 새삼스런 일도 아니다. <명탐정의 규칙>은 본격 추리소설에 대한 해학과 블랙 유머로 정평이 난 작품이다. 요즘엔 흔히 영화화하기 좋은 대중적인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로만 인식되는 경향이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소싯적에 발표한 상당히 패기 있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데뷔작 <방과후> 이후로 생각보다 고전을 면치 못했던 작가의 사실상 두 번째 출세작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이제는 익숙해진 추리소설 블랙 유머 메타 소설 중에 선구적인 작품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앞서 언급한 모든 미사여구를 통틀어 이렇게 말하고 싶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런 소설도 쓸 줄 안다.'


 왠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게 예전만 같지 않은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이 소설을 다시 읽는 게 무척이나 반가우면서 씁쓸했다. 꼭 지금의 작가가 타성에 젖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 <명탐정의 규칙>이 추리소설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는 작품인 만큼 이 당시의 작가와 지금의 작가의 모습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요즘 작가의 소설을 통 읽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말하기 힘들지만, 앞서 말했듯 추리소설의 정체성에 고심했던 작가의 모습이 워낙에 강렬해 10년 전에 읽을 때완 사뭇 다른 느낌을 받았다. 작가가 나중에라도 이와 비슷한 고민을 다룬 소설을 다시 한 번 발표하길 기대해본다.

 <명탐정의 규칙>은 흔히 본격 추리소설에서 클리셰로 다루는 트릭을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종류별로 까는 블랙 유머 단편집이다. 구태의연한 묘사나 추리 없이 신나게 비웃는 - 누가 오사카 사람 아니랄까봐... 히가시노 게이고의 유머가 발군이었다. - 에피소드도 있고, 때론 허접하고 작위적이라고 자조하기엔 꽤 괜찮은 수준의 트릭과 반전을 구사하는 에피소드도 있어 전체적으로 풍성한 구성의 작품이었다. 작가처럼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추리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공감하며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개인적으로 작가의 작품 Best 10위 안에 들지 않나 싶다. 대놓고 심플한 메타 소설이면서 추리소설답게 의외성도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러러볼 요소가 많은 작품이었다.



 'Who done it - 의외의 범인'


 프롤로그와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느낀 허무함과 유치함을 '공감'이란 키워드로 희석시킨 에피소드. 범인을 추리하지 않고 직감으로 찍으며 탐정의 동선을 따라가기만 하는 추리소설 독자들을 돌려서 깐 게 인상적이었다. 참으로 공감이 되면서도 뜨끔했는데, 밀실 에피소드에서 똑같은 트릭을 몇 번이고 쓰는 추리소설가를 깐 것과 대비돼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작품을 기획한 의중을 알 것도 같았다. 추리소설이 구태의연해지고 타성에 젖게 된 건 불성실한 독자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던 게 아닐까. 하도 정곡을 찔려 되려 책임 전가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게 좋았다.

 참고로 탐정을 설명할 때 '명탐정'이라고 쓰는 걸 대놓고 비웃는 게 진짜 웃겼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었구나.



 '폐쇄된 산장의 비밀 - 무대를 고립시키는 이유'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클로즈드 써클을 다룬 에피소드. 초반에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무대를 고립시키되 좀 더 창의적이고 의미 있는 전개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 강조했던 대로 꽤 재밌는 트릭이 나왔는데, 직후에 그 트릭의 작위성을 까는 게 재밌었다. 우리가 추리소설적 재미를 위해 얼마나 부자연스런 전개를 용인했는지 뒤돌아보게 됐다.



 '알리바이 선언 - 시간표의 트릭'


 트릭을 밝혀주길 바라는 범인과 그 범인의 바람을 무시하는 탐정의 구도가 신박했던 에피소드. 똑같이 트릭을 쓰더라도 추리소설이 마술과 다른 점은 트릭이 반드시 밝혀진다는 것일 텐데, 그 점을 비틀어 아예 트릭을 밝혀주길 바라는 범인을 등장시켜 골때리는 웃음을 선사했다. 작중 인물들 스스로 자신이 추리소설 등장인물임을 알기에 가능한 초월적인 장면이었다. 알리바이 트릭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 에피소드에서 나를 비롯해 왜 독자들이 알리바이를 선호하지 않는지 짚어줘 동질감을 많이 느꼈다. 이 세상 모든 추리소설 독자들한테 말이다.



 '여사원 온천 살인사건 - 두 시간 드라마의 미학'


 일본 추리소설을 좋아해 그 작품들을 원작으로 둔 드라마도 많이 봤기에 이번 에피소드는 유별나게 공감하며 읽었다. 현실적인 이유로 심오한 설정과 전개가 통속적으로 뒤바뀌거나 주 시청자층을 위한답시고 필요도 없는 조연 캐릭터를 넣거나 탐정의 성별도 바꾸거나 종래엔 트릭과 결말까지 바꾸는 부조리를 가감없이 까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속이 다 시원하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나라라고 크게 다르지 않아서 그저 한숨만 나왔다. 원작에서와 달리 존재감이 훼손당하는 범인의 절규가 내 한숨을 대변한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여담이지만 <명탐정의 규칙>도 드라마로 나왔는데, 탐정과 형사가 투덜거리면서 추리소설을 비판하는 특유의 소재가 너무 유치하게 묘사돼 그리 추천하질 않는다. 가급적 원작만 읽거나 못해도 원작을 먼저 읽길 추천한다.



 '사라진 범인 - 트릭의 정체'


 이 작품의 트릭은 내가 고전 추리소설을 읽을 때마다 항상 납득이 가지 않던 부분인데, 그 점을 오가와라가 속시원히 지적해 그것만으로 마음에 들었던 에피소드다. 어지간히 중성적인 사람이 아닌 이상 성별을 위장하는 트릭은 늘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다.



 '죽이려면 지금이 기회 - 동요 살인'


 무엇보다 결말이 인상적인 작품. 한 번쯤은 떠올릴 만한 아이디어지만 너무 막장이고 무거워서 쓰기 주저됐을 텐데, 이 작품은 워낙 초월적인 메타 소설이라 이런 정신 나간 결말을 그리는 게 용이했던 듯하다. 개인적으로 제목도 마음에 든다. 죽이려면 지금이 기회.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내가 그를 죽였다 - 불공정 트릭', '흉기 이야기 - 살인의 도구', '명탐정의 최후 - 마지막 선택'


 세 에피소드는 이 작품 후반부의 어두운 분위기를 대표하므로 묶어서 얘기해보겠다. 작가가 반전을 신경쓰다 보니 억지를 부리거나, 논리적이기만 하다면 생사람도 잡을 수 있다는 맹점이나, 명탐정인 주인공은 무슨 일이 있어도 화를 면한다는 절대불변의 법칙은 추리소설을 읽을 때 외면하고픈 요소들이다. 이 비관적이기 짝이 없는 요소들을 작가는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가감없이 까지만 그 느낌이 전에 없이 무거웠다.

 마지막엔 자신이 사랑하는 추리소설을 계속 쓰기 위해선 클리셰에 절대 안주할 수 없다는 파격적인 자가진단이 나와 독자로서 숙연해졌는데, 이 부분 때문에라도 이 작품은 정말 읽을 가치가 충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를 그저 대중적인 작품만 쓰는 소설가란 여기는 사람이 많은데, 그가 이런 의식 있는 소설도 쓸 줄 안다는 걸 꼭 알려주고 싶다.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지금부턴 주변에 의식적으로 이 작품의 제목을 자주 언급해야겠다.



인상 깊은 구절


트릭 따위로 독자의 관심을 끌겠다는 생각 자체가 시대착오적이에요. 밀실의 비밀? 흥, 너무 진부해서 웃음도 안 나오네.- 35p


하지만 알리바이 허점 찾기의 경우 탐정이 범인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으면 수수께끼 자체가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다.

물론 현실 세계에서는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허구의 세계에서는 그런 식으로 얘기가 전개되면 범인들이 설 땅이 없어지고 만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해 낸 알리바이 트릭이 풀리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훌륭히 구축된 시간과 공간의 마술이 독자 앞에 공개되는 순간을 내심 두근거리며 기다리는 것이다. -134~135p


이런 의외성에 푹 빠지는 팬들도 있어.

그건 진정한 팬이 아닙니다. - 270p


목 없는 시체가 나오면 그 시체는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추리 소설의 기본이죠. 범인과 피해자가 뒤바뀌는 소설은 하늘의 별보다 많아요. 그렇게 뻔한 걸 정답이랍시고 소설의 끝에 가서 거드름 피우며 밝히는 짓만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아요. - 28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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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순정만화 4
나카무라 아스미코 지음 / 시리얼(학산문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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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9.5







 철도와 순정만화의 조합이라니, 상당히 취향탈 것 같지만 가독성이나 완급 조절, 매력적인 캐릭터까지 뭐 하나 빠지는 구석 없는 작품이었다. 나카무라 아스미코가 순정만화, 그것도 BL로 유명한 작가던데 다행히(?) 이 작품은 BL이거나 BL을 암시하는 장면은 없었다. 그렇지만 작품을 다 읽고 나니 이 작가가 그리는 BL이라면 거부감 없이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순정만화로 일가견이 있는 작가답게 캐릭터들의 연애 감정이나 천천히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다가가는 과정이 알콩달콩하니 재밌었다. 후기에서 밝히길 작가는 철도를 타고 덜컹덜컹거리며 가까워지는 사람들의 모습이란 컨셉으로 만화를 그렸다고 한다.

 후기의 말이 끼워맞추기인 감이 없잖지만;; 저 정도면 뻔뻔한 축에도 들지 않는다. 아무튼 1권은 철도를 소재로 한 순정만화 단편집이고 2권부터 4권까지는 1권에서 단편으로만 등장했던 아코와 코다이라의 연애를 그린다. 개인적으로 1권의 다양한 캐릭터들의 향연이나 작가의 다채로운 스토리텔링이 더 좋았기에 2권부터 장편으로 전환된 게 아쉬웠지만 그래봤자 종이 한 장 정도의 아쉬움에 불과하다. 단편이든 장편이든 작가가 잘 그려서 도대체가 아쉬울 새가 없이 책장이 바삐 넘어갔다.


 제목에서 철도가 들어가긴 하지만 엄밀히 말해 철도는 그렇게 중요한 소재는 아니다. 대체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이 철도란 소재는 작가가 좋아해서 작품에 녹여낸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녹여낸 부분들이 어색하지 않다. 꼭 <에키벤>처럼 대놓고 철도를 컨셉으로 잡지 않아도 철도는 충분히 매력적인 소재란 걸 느끼게도 해줬다. 특히 철도에 빠삭한 작가의 디테일 넘치는 묘사들은 현장감을 느끼게 해줬는데 작가와 비슷한 취향의 일본 독자였다면 - 특히 도쿄 사람이라면 - 이 부분만으로 충분히 먹혀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이나 완성도에 대해선 조금도 왈가왈부할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뽑혀서 더 덧붙일 말이 없다. 캐릭터들이 다 사랑스럽고 그림체도 개성적이며 호감형인데다 결말도 여운이 있는 등 이 정도면 완벽하다고 느꼈다. 다만, 지금부터 말할 부분은 1권부터 4권까지 한 번에 읽은 나한텐 해당되지 않는데, 작품의 규모나 전개 속도에 비해 연재와 단행본 출간 시기가 너무 길어서 만약 내가 1화가 연재되던 때부터 읽은 독자였으면 기다리다 지치지 않았을까 싶다. 뭐, 결말까지 한 번에 읽은 나한테 해당되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심정이 어떤 마음인지 알아 어쩐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궁금해졌다. 위에서는 이 작가라면 BL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했지만... 굳이 BL을 먼저 골라 읽을 필요는 없으니 다른 장르의 작품부터 먼저 읽을 것 같다. 아직 BL에 대한 내성이 없어서 이 점은 어쩔 수가 없다;; <브로크백 마운틴> 같은 작품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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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 The Gorgon's Look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0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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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는 제목이 상당히 자극적인 것과 달리 담백하면서 현학적인 추리소설이다. 고뇌하는 추리소설가라 불리는 노리즈키 린타로의 몇 안 되는 장편소설이며 출간 당시 여러 문학상과 랭킹에서 상당히 선전하거나 대체로 1위를 석권했던 대표작이다. 우리나라에는 분량이 두꺼워서 그런지,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라서 그런지 화제가 덜 됐고 작가의 다른 작품 <요리코를 위해>가 더 유명하다. 나는 작가의 작품을 이 작품으로 처음 접해서 그런가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야말로 노리즈키 린타로의 정수가 잘 담겨있다고 특별시하고 싶다. 다시 읽어보니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이 작품은 정확히 절반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리는 상당히 느릿느릿한 전개가 일품인 작품이다. 오랫동안 은거했던 유명 조각가의 복귀작은 공개 전부터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대중에 공개되기 전에 조각상의 머리가 잘려나가는 불길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조각은 조각가의 딸을 모델로 만든 것이므로... 이야기는 사건 관계자와 우연히 접점이 있던 주인공 노리즈키 린타로가 조각상 머리의 행방을 찾으며 전개되는데 이 탐정역에 해당하는 주인공의 탐문 방식이며 활약이 기존 추리소설 속 탐정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노리즈키 린타로는 상술했듯 고뇌하는 작가로 알려졌는데, 추리소설의 철학적 의미나 현실성에 대한 평론을 많이 저술했고 실제 자신이 쓴 소설에도 이러한 고민을 많이 반영시키다 보니 붙은 별명이다. 그래서 그런지 작가 본인과 똑같은 이름과 직업을 가진 주인공 노리즈키 린타로는 홈즈나 코난, 김전일처럼 비정상적일 정도로 천재적인 추리력의 소유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가 엘러리 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던데, 엘러리 퀸이 만든 엘러리 퀸이 그렇듯 노리즈키 린타로의 노리즈키 린타로도 - 슬슬 혀에 쥐가 날 것 같다... - 여러 가능성 있는 추리를 늘어놓다가 소거법을 동원하며 사건의 윤곽을 가다듬는다. 그런데 가끔 추리의 대전제가 잘못된 경우도 있어 완전히 헛다리를 짚는 경우도 허다한데 이와 같은 탐정의 실수는 단번에 백발백중으로 사건을 해결하던 탐정들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라 뭔가 어설프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선사한다.

 얼핏 들었을 때 시행착오가 끊이지 않는 탐정이란 설정이 신선할 순 있어도 매력적이진 않게 보일 것이다. 개인적으론 탐정이 사건을 해결하긴 하지만 불완전한 인간이란 한계 때문에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다는 점이 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이번 작품 같은 경우엔 이미 누군가가 죽은 뒤에 탐정이 개입한 것이 아닌 아직 사건이 현재진행형일 때 개입한 것이라 이 비극이 더욱 두드러졌다. 아마 이 부분 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듯한데, 그림으로 그린 듯한 천재 탐정이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가 시원스러운 한편으로 동화 같은 측면도 있다고 생각하는 나로선 현실과 맞닿은 노리즈키 린타로의 세계관이 아무래도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 작품에선 추리소설과 탐정의 존재에 대한 작가의 고뇌만큼이나 돋보이는 것이 있다. 작품의 중요 소재인 조각에 대한 작가의 어마어마한 공부량과 작품에 절묘하게 녹여낸 부분이다. 비단 조각만 아니라 사진, 산부인과학 등 작가가 작품의 디테일에 필요한 모든 설정을 상당히 연구하며 녹여낸 흔적이 보였는데 이 부분이 흡사 기시 유스케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아무튼 조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진행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분량의 설명이 가미되다 보니 자연스레 작품의 분량이 길어졌는데 이 부분에서 난색을 표하는 독자가 많다. 이 작품을 재밌게 읽은 독자들도 설명 때문에 사건의 시동이 늦게 걸리는 점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는데 나 역시 마찬가지다. 10년 전에 이 작품으로 작가를 처음 접하는 과거의 나도 그렇고 지금의 나 역시도 미술에 관심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래도 나중에 곱씹어보면 버릴 만한 부분이 없다는 게 어딘가 싶다.

 조각상으로 예고했던 것처럼 참수된 목이 발견되면서부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하게 되는데 몇몇 등장인물의 돌발 행동 때문에 사건이 필요이상으로 꼬여 주인공이랑 경찰이 속수무책으로 휘둘린다. 게다가 이번 사건의 경우엔 내막이나 발단에 여러 인물의 오해나 선입견이 크게 작용해 누구 한 명한테 책임을 물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진 것도 크게 한몫했다. 간단히 예로 들면 출생의 비밀이나 중상모략이 여러 인물을 거쳐 심각하게 와전되거나 오해를 불러일으켜 탐정이 추리를 함에 있어 크게 애를 먹었다.


 그래도 결국 범인을 잡고 사건도 해결하지만 어찌 보면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사건이라 씁쓸하기 그지없다. 금방 얘기했듯 누구 한 명한테 책임을 물을 수 없을 정도로 사건이 꼬였지만 사람인 이상 그만한 사건을 겪고 책임감을 떨쳐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고 결말을 내는 방식이 참 잔혹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래도 작가 나름대로 소신껏 집필한 터라 불만으로 번지진 않는다. 오히려 이 정도의 비극을 그려낸 게 존경스럽다고 해야겠다. 작가의 공부량이나 인과가 복잡한 사건을 논리적으로 풀어낸 스토리텔링도 충분히 존경스럽지만 이만한 비극을 의식적으로 소신 있게 그려낸다는 점이야말로 다른 추리소설가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아닌가 싶다.

 한때 노리즈키 린타로의 작품이 잘 번연되더니 요새는 통 소식이 없다. 가급적 이 작가의 책은 다 소장하고 두고두고 읽으려고 하는데... 데뷔작인 <밀폐교실>부터 읽고 싶은 작품이 수두룩하던데 언젠간 이 작품이 다 소개되리라 바라마지않는다. 만약 전부 소개된다면 다시 한 번 시간 순서대로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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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콰이어 Esquire C형 2020.10 (표지 : 카이) - 주요기사 : 카이 에스콰이어 2020년 10월호
에스콰이어 편집부 지음 / 허스트중앙(Hearst-Joongang)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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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포엠 기사가 있다고 해서 처음 구매합니다~
오래 기다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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