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명을 팔았다. 1년에 1만 엔으로 1~3 박스 세트 - 전3권 - 노엔 코믹스
미아키 스가루 지음, 타구치 쇼이치 그림, JYH 옮김 / 데이즈엔터(주)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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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9






 <수명을 팔았다. 1년에 1만엔으로>는 미아키 스가루의 소설 <3일간의 행복>을 만화화한 작품으로 저 제목은 원작 소설이 인터넷에 연재될 때 붙은 제목이라고 한다. 이래나 저래나 바뀐 제목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원래 제목은 작품의 시니컬함을 강조하고 바뀐 제목은 작품의 희망적인 부분을 보다 강조하기 때문이다. 다시 초창기 제목으로 바뀐 이 만화는 전에 읽은 소설과 내용면에서 큰 차이는 없는데 - 기대 이상으로 원작의 내용을 잘 재현됐거니와 오히려 더 잘 살린 부분도 있다. 심지어 문어체 말투까지 살렸다. - 그런 만큼 시니컬한 뉘앙스를 강조하는 저 제목은 뭔가 아쉽다. 너무 길기도 하고. 뭐, 강렬하다는 측면에서 저만한 제목도 없는 것 같지만 말이다.

 이 작품의 내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나라에서 꽤 유명했던 책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와 같은 듯 전혀 다른 결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방금 말한 책에선 결국엔 주인공이 다시 살기로 결심하지만 이 작품에선 주인공인 쿠스노키가 죽는 건 변함이 없다. 돈을 받는 대가로 수명을 팔았다는 설정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는 문제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끝이 정해졌기 때문에 쿠스노키는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거머쥐게 된다. 실제로 죽음에 이르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쿠스노키의 여정을 따라간 독자라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가 행복했으리라 상상하는 건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닐 것이다.


 수명에 대한 파격적인 가격 책정을 시작으로 이 작품은 시종 시니컬한 태도의 인생관을 설파한다. 삶에 아무런 미련이 없던 고독한 쿠스노키는 수명을 팔고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자마자 과거의 인연들을 떠올린다. 첫사랑과 고등학교 시절의 유일한 절친,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호감을 보였던 여성을 떠올리지만 쿠스노키의 과거와 미래까지 모든 걸 파악한 감시자 미야기는 그의 낙관적인 기대를 산산조각 낸다. 호감을 보였던 여성을 외면한 쿠스노키는 누구와도 친해질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으며 고등학교 때 절친은 단지 그의 말을 잘 들어줘서 친하다고 생각했을 뿐 진심으로 친구다운 관계를 쌓았던 것도 아니며 첫사랑은 쿠스노키를 증오하기까지 한다. 쿠스노키가 소중하다고 여겼던 과거의 인연들은 결국 그에게 지나간 인연에 불과하며 남은 3개월의 삶을 정리하기에 하등 도움도 안 되고 되려 비참함만 안긴다.

 미래의 삶은 더욱 비관적이다. 수명을 팔아버림으로써 그 미래는 '올 수도 있었지만 이젠 영영 오지 않을 미래'가 돼버렸지만 그 내용이 어찌나 암울한지 쿠스노키는 미래의 삶이 어떤지 듣고나서 수명을 팔길 잘했다는 반응을 보인다. 무언가를 이룩하지도 못하고 행복해지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해 1년당 1만엔 밖에 못 받는다는 미래는 쿠스노키가 걸어왔던 나날들과 무관할 리 없다. 인생은 과거와 미래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네트워크다. 과거가 엉망인데 미래에 갑자기 보란 듯이 밝아질 리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소설도 그렇게 썼다간 개연성이 없다고 비판을 받을 것이다.


 씁쓸하게도 자신이 헐값에 팔아버린 미래의 내용을 듣고 그나마 희색이 만면해진 쿠스노키는 남은 3개월을 알차게 보내 세상에 뭔가 한 방을 먹이고자 한다. 하지만 평생 시한부 인생을 관찰한 감시자 미야기는 그의 허황된 계획을 듣고서 뭔가 착각하는 게 아니냐며 정곡을 찌른다. 과거의 실책을 깨달았다고 단번에 행복을 거머쥘 사람이었다면 미래의 수명이 그렇게 헐값에 책정됐겠냐고. 그리고 행복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나 막연하게 희망을 품게 되는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자신이 숨쉬고 있는 현재에서 거머쥘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인생관 때문인지 이 작품은 행복한 인생이란 어떤 것인지 묻고 있음에도 거창한 목표가 아닌 작지만 확실한 행복과 성취감이란 어떤 것인지 발견하고 실천해가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특기할 만한 부분은 미야기의 조언을 무시하고 과거의 인연을 찾아간 쿠스노키가 결국 깨달음을 얻고 현재에 집중하게 되는 과정과 뜻밖에도 자신과 비슷한 상처와 공감대가 있는 미야기와 가까워지고 결국엔 서로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진중하고 개연성 있게 그려낸 것이다. 원작 소설에선 둘이 가까워지는 전개가 약간 수월하면서 판타지적인 측면이 없잖다고 여겼는데 만화에선 이 부분을 보다 디테일하게 잘 표현한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쿠스노키와 달리 수명이 아닌 시간을 잃어버린 미야기가 세상과 격리된 채 타인의 인생을 관찰하기만 하는 서러움에 대해서 잘 조명했는데 이 부분이 바로 원작 소설가가 언급한 '간지러웠던 부분을 긁어주는' 요소가 아니었나 싶다.


 원작을 5년 전에 군대에서 읽었기 때문인지 내용이 가물가물했지만 소설의 내용을 무척 잘 살린 만화라고 느꼈다. 몇몇 부분은 생략한 것 같지만 만화 작가가 추가한 부분들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는데 그 부분들이 모두 좋았다. 만화를 담당한 작가도 원작을 열심히 분석하고 내면화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원작의 팬으로서 참으로 반가운 만화가 아닐 수 없었다. 오랜만에 군대 동기들한테 연락하고 싶어졌다. 그때 너희들이 빌려 읽고 감동을 받았다는 그 책이 만화로도 나왔다고.

 아마 추측하기로 원작 소설가가 지금의 나와 비슷한 연령대에 이 작품을 집필한 것 같다. 5년 전에도 울림을 주고 지금도 마찬가지고 나중에 또 읽어도 여전히 묵직하리라고 예상된다. 젊은 나이에 암울하지만 과장 없이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잘 풀어낸 작가에게 질투가 나면서도 경이로웠다. 행복은 현재에 있다는 것을 이렇게 극단적인 설정으로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품에서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과거에 대한 미련과 미래에 대한 집착을 필요악처럼 묘사했다. 나는 이런 묘사가 먼길을 돌아 현재에 충실하게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최근 1년 간은 크든 작든 뜻한 바가 계획대로 이뤄지지 않는 걸 여러 번 경험했는데 그 과정에서 과거에 이랬으면 하고 자책하거나 그럼에도 미래는 더 나아질 것이라 낙관하며 지낸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그런 날들이 모두 부질없다고 생각할 수 없지만 이뤄질 수 없는 망상을 품느라 정작 현재에 소홀히 했던 건 부정할 수 없다. 비록 나는 이 작품에서 쿠스노키가 했듯 자포자기하며 수명을 팔거나 팔 고민도 하지 않겠지만 만약 판다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싼값이 책정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 점을 부끄러워하며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어지간한 자기계발서보다 훨씬 묵직하지 않나 싶다. 여담이지만 자기계발서를 쓰거나 써봤던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인생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면서.

 예상은 했지만 인생 그 자체에 관해 이야기하는 작품인 만큼 후기를 남기기가 난감한 작품이었다. 난감했던 이유는 내가 내 인생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게 아직 어색하고 쑥스럽고 덤덤하게 해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 클 것이다. 읽을 때는 몰랐지만 이 포스팅을 쓰면서 아직 스스로가 내공이 부족함을 체감하게 됐다. 더도 덜도 말고 이 책을 다시 읽게 될 때는 지금보다 덜 난감하길 기대해본다. 최소 5년 뒤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3개월이란 시간은 뭔가 바꾸기엔 너무 짧습니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내기엔 너무 길죠. 그렇다면 작더라도 확실한 행복을 쌓아가는 게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요? 이기려고 하니까 지는 거예요. - 1권 제4화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그 사람이 불행해지길 바랐던 것 같아요. 절망하면서 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게... 그 사람이 혼자 꿋꿋하게 살 수 있다는 걸 알고 싶지 않았어요. - 2권 제11화




실패를 고친다고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어. 그때는 어디까지나 성공과 실패 사이의 출발점에 있지. 실패한 인간들은 그런 걸 몰라. - 3권 제13화




보편성이란 주위의 눈에 맞춘 그림에 깃드는 게 아니다. 자신의 우물 빝바닥에 내려가 고생해서 끌어올린 얼핏 지극히 개인적인 성과로 보이는 것에 깃드는 법이다.

그걸 깨달으려면 한차례 순수한 즐거움으로 ‘자신을 위해‘ 그릴 필요가 있었다. - 3권 제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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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쉴레, 클림트 - 표현주의의 대가들 아티스트 커플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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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뭉크와 클림트와 관련된 책은 몇 권 읽었지만 에곤 쉴레는 또 처음 접해보기에 의미가 있는 독서였다. 22,000원이라는 가격이 아깝지 않은 종이의 질과 더불어 걸작에서 습작까지 골고루 살펴본 저자의 디테일한 탐구가 인상적인 책으로 책에 수록된 그림이 엄청나게 많아 눈이 즐거웠던 책이다. '사물을 보이는 것이 아닌 자신이 보는 대로 그린다'는 표현주의의 원칙은 오늘날에 있어서 아주 기본적인 태도인 것 같지만 이런 스타일을 처음 고안하고 선보이고 세상에 정착시킨 세 거장의 작품을 여러 공통된 주제 안에서 살펴보니 신선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금방 말했듯 뭉크와 클림트와 관련된 책은 여러 권 읽어서 그 화가들의 삶이나 작품 세계는 딱히 새롭진 않았지만 쉴레까지 다루는 건 처음 읽어봤기에 당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중반에 이르는 유럽 회화의 변천사가 보다 입체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같은 나라 출신인 클림트와 쉴레라면 몰라도 뭉크까지 한 카테고리에 묶는 게 약간 생소할 법도 한데, 실제로 뭉크는 프랑스나 독일에서 유학은 했어도 오스트리아 화가와 크게 교류가 있었던 적은 없다. 다만 세 화가 모두 비슷한 시기에 이름을 떨쳤으니 서로의 작품과 명성을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짐작만 하고 있는데 이는 충분히 나올 만한 가정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근본적으로 다른 스타일을 구사하지만 다들 굉장히 도전적인 화풍과 신념을 갖고 있었고, 특히 쉴레는 예술과 외설의 논란을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화가인 만큼 오늘날과 그 당시의 미적 기준의 차이를 살펴볼 수 있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지금이라면 세 화가의 스타일은 외설은커녕 논란거리도 될 수 없겠지만 - 그런데 쉴레의 그림은 분명 낯뜨거운 요소가 많긴 하다. 직접 보면 안다. 나는 이 책을 지하철에서 읽고 있는데 눈치가 좀 보이더라;; - 100년 전엔 사정이 달랐다. 쉴레는 특유의 나르시시즘과 과감한 포즈의 자화상 때문에 여러 번 곤욕을 치뤄야 했는데 심미안이 있는 판사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감옥에 몇 십 년을 썩을 뻔했다고 하니 그냥 해프닝으로 넘길 만한 일은 아니었다. 정말이지, 지금으로선 이런 논란으로 예술가가 감옥에 간다는 게 상상이 안 가는데... 예술가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 분위기는 위험천만하게 들리지만 한편으론 한 예술가의 작품 활동이 도시나 나라 전체를 들썩이게 했다는 게 조금 부럽기도 했다. 시대 분위기를 떠나서 그냥 쉴레가 시대를 앞서가는 뛰어난 예술성의 소유자였기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다행히 쉴레는 예술가로서의 기질이 다분하고 자신감도 높았던 사람이라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활동했다고 하는데 이런 사람이 스페인 독감 때문에 단명했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클림트도 그 병으로 죽었고 뭉크도 하마터면 명을 달리할 뻔했는데 -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뭉크는 엄청 장수했다. 평생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던 사람이 여든을 넘겼다는 게 아이러니한 일이다. - 이 대목에서 요즘 유럽에서 코로나가 재확산됐다는 얘기가 떠올라 뭔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뜬금없지만 책을 읽고 나서 병에 대한 경각심이 더 생기게 됐다. 병이란 정말로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뭉크와 쉴레, 클림트의 작품 세계를 둘러보며 표현주의의 의의, 지금에 와선 아주 당연한 회화의 법칙이 예전엔 대단히 파격적으로 여겨졌단 걸 이 책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회화가 사진과 구분되는 가장 뚜렷한 특징은 모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겠는데 막 사진기가 나왔을 뿐인 100년 전엔 아직 그런 인식이 없었다는 것, 오히려 사물을 미화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리거나 어두운 부분을 강조하는 화풍은 이해받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표현주의'라는 사상이 따로 명명됐다는 것 등이 명확하게 이해가 됐다.

 그런데 위에서 두 번째 부분, 사물의 어두운 부분을 강조하는 작품 세계가 이해받지 못한다는 건 지금까지도 현지진행형인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개인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선 나도 소설가 지망생으로서 학교에서나 주변 동기들과 자주 얘기했던 부분이었던 터라 남일 같지 않게 읽혔다. 이 얘길 시작하면 글이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질 것 같아 간략히 말하자면 -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더 자세히 얘기해보겠다. - 나 역시 사물의 밝은 부분을 자주 얘기하는 것과는 달리 어두운 부분에 대해서는 쉬쉬하는 걸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들 세 화가의 경향이 공감이 많이 갔다. 아마 그래서 내가 이들 작품에 그렇게 끌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뭉크와 클림트의 작품 세계는 언제 접해도 흥미롭고 요번에 본격적으론 처음 접하다시피 한 쉴레의 작품 세계도 흥미롭기 그지없었다. 나중에 쉴레만 다룬 책을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책도 재밌을 것 같으니 한 번 찾아봐야겠다. 물론 그 책에서도 클림트 얘기가 많이 나오겠지만 그래도 보다 디테일한 얘기가 담겨있을 테니 기대가 된다.

화가라면 대상의 외관을 변형시킬 때 추하게 나타내기보다는 이상화시키는 것이 일반이지만 뭉크와 쉴레는 그런 태도를 대상의 진실에서 멀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두 사람은 사물의 밝은 면 못지않게 어두운 면도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 26p




‘회화는 표현이다‘라고 말할 때 ‘예술은 모방이다‘라는 오래된 예술의 정의가 부정될 수 있다. 표현이 하나의 사조ism가 된 것이 좀 이상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특별히 ‘표현‘을 예술의 본질로 탐구하게 된 것은 예술을 단지 모방으로 본 서양미술의 편협한 사고를 부정한 혁명적 성과라 하겠다. - 3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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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설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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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스포일러 : 있음


 요번에 부산에 여행갔을 때 서면 YES24에서 산 책. 그 여행이 이른바 '소설을 제시간에 완성시켜 출품한 자신한테 보상'해주기 위한 여행이었던 만큼 이 책을 구매했다는 게 개인적으로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작가 지망생으로서 자세를 바로잡게 됐달까? 이 얘기는 블로그의 부산 여행기에서 마저 풀어내게 될 것 같다. 기대해주시길.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작가라는 직업을 소재로 한 이 단편집은 암울하고 광기 어린 직업세계와 고충을 그리고 있는데 작가의 '학생 아리스' 시리즈나 '작가 아리스' 시리즈와 색다른 매력이 있어 흥미롭게 읽혔다. 생각해보니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 중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등장하지 않는 책은 이번에 처음 접한 것 같은데 - 슬슬 혀가 쥐가 날 것 같다... - 역시나 '예상대로'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굳이 본격 추리소설만이 아닌 그냥 소설을 잘 쓰는 작가란 걸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항상 이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왜 굳이 밀실의 이유나 범인의 의외의 정체 등을 다루는 본격 추리소설만 쓰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격 추리소설을 비하하는 건 아니지만 매 작품마다 카뮈의 <이방인>에 필적하는 살인 동기를 다루는 터라 트릭과 반전에 치중하는 작가의 스타일이 내용과 약간 따로 노는 구석이 있다는 의문이 늘 떠나지 않았다. 꼭 살인 동기가 아니더라도 인간에 대한 진지한 통찰 또한 일품인데 이러한 작가의 특징은 본격 추리소설이란 장르의 외견을 넓혔다기 보다 오히려 본격 추리소설이 작가의 특징을 모두 담아낼 만한 그릇으론 약간 비좁다는 인상을 줬다. 그래서 내심 작가와 동명의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소설도 한 번 접해보고 싶었는데 <작가 소설>의 수록작들은 그런 점에서 내 궁금증과 기대를 모두 충족시켜줘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사실 소설가가 주요하게 등장하는 소설을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작가 입장에선 작가나 출판계가 가장 익숙할 테니 은근히 많이 다루기도 했던 만큼 새로움을 느끼기 힘들단 생각에 그렇게 흥미가 동하지 않았는데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가 소설>은 이런 내 선입견을 깼다. 난 이 작가가 호러 소설을 이렇게 잘 소화할 줄 몰랐다. 더군다나 최근 나름대로 소설을 완성시킨답시고 새벽에 머리 좀 쥐어뜯어봤기 때문일까, 작중 작가들의 다양한 고충이 십분 공감이 갔다.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추리소설가답게 작가들의 세계에 범죄를 가미해 기묘하고 섬뜩하게 비틀어낸 것도 색다른 느낌을 자아냈다. 작가가 평소 자신의 직업에 대해 고민한다는 게 느껴졌는데 이런 걸 보면 누가 뭐라 해도 참 천상 작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위키에서 보면 덕업일치를 이룬 작가라는 구절이 있던데 그 말이 맞는 말 같다. 작가로서 쓴맛을 이래저래 경험했을 텐데 그래도 노력하며 작품을 끊임없이 써낸다는 건 어렸을 때 자신이 품었던 로망을 배신하지 않는 것처럼 비춰졌다. 작가 지망생으로 본받을 만한 자세가 아닐 수 없었다.



 '글 쓰는 기계'


 강렬했던 첫 수록작. 잠재력은 있지만 팬이 느린 작가를 위해 출판사가 마련한 특단의 기계가 등장하는데, 그 기계의 정체는 작가를 구속시켜 소설을 완성시키지 않으면 뒤에 있는 구덩이에 떨어뜨리는 극한의 장치가 설치된 최첨단 고문 기계다. 소설을 쓰는 건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는 것과 엄연히 다르지만 이 기계를 이용한 작가들은 효율성이 극대화돼 단기간에 어마어마한 작품을 써내려가게 된다. 하지만 이 기계에 마약처럼 빠져든 작가의 미래는 상당히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우는데, 한 작가가 종국에는 자신의 집에 똑같은 기계를 설치해 기계의 힘을 빌리고도 편집자와의 미팅 시간 안에 분량을 못 채우는 걸 봐서 정말 머지않아 구덩이에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모종의 죄책감을 느끼는 담당 편집자의 모습에서 나 역시 형언할 수 없는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꼭 경험에서 우러나와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지만, 소설을 쓰는 것에 효율이란 잣대를 들이미는 순간 제아무리 결과물이 좋아도 마냥 좋기만 한 일은 아니라고 본다. 작중 작가의 경우 그 기계의 덕을 꽤 봤지만 작작 한다면 모를까, 결국 마약처럼 빠져들어서 스스로를 서서히 좀먹는다는 식의 묘사를 보면 애당초 기계의 힘을 빌린다는 것 자체가 욕심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하는 회의적인 생각까지 들었다. 누군가에게는 꿈이겠지만... 사실 작가라면 한 번쯤 해볼 생각인데 이런 식으로 구현한 작가한테 소름이 좀 돋았다. 단순하지만 꽤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였다.



 '죽이러 오는 자'


 마지막까지도 예측할 수 없는 전개가 인상적이었다. 범인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독자가 상상해야 하는 것도 오싹하니 괜찮은 연출이었다. 일본만의 아날로그적인 문화인지 모르겠는데, 소설가한테 팬레터를 보낸다는 설정을 본격 추리소설의 단골 소재인 미싱 링크와 엮어서 풀어낸 게 신박했다. 이쯤 되니 작중 소설가의 작품들이 궁금해졌다. 얼마나 별로였으면 사람들이 팬레터로 욕을 써서 보낼 정도인 건지...



 '마감 이틀 전'


 마감에 쫓겨 다급해진 나머지 별 시덥잖은 트릭까지 떠올리는 대책 없는 추리소설가의 좌충우돌 집필기. 처음엔 제법 그럴싸한 아이디어가 나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산으로 가는 트릭과 가망이 없는 집필 속도는 극히 공감이 가서 읽는 내내 킥킥거렸지만, 그에 반해 뻔히 예상이 가면서도 뜬금없는 반전은 다소 아쉬웠다.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는 작가의 모습이 식상하다는 것 이전에 이런 반전이 꼭 필요한 반전이었는지 아리송했기 때문이다. 결말보다 과정을 즐기기엔 안성맞춤인 작품이었다.



 '기코쓰 선생'


 이 책에서 유일하게 훈훈하게 마무리된 작품. 앞선 세 작품이 너무 암울해서 이 작품도 읽는 내내 불길했는데 - 다른 의미에선 암울하기 짝이 없는 출판계의 미래를 낯낯이 드러내서 제일 암울하게 읽혔다. 작가의 고민이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 나중에 생각지도 못한 귀여운 내막이 드러나서 나까지도 피식 웃고 말았다. 작가 특유의 캐릭터 설정이 돋보였고 개인적으로 이 캐릭터들이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 스쳐 지나가는 식으로라도 언급이 됐음 좋겠단 생각도 들었다. 유일하게 후일담이 궁금했던 작품이다. 과연 주인공은 소설가로 데뷔할 수 있을 것인가. 남일 같지 않아서 응원하게 됐다.

 여담이지만 주인공의 아버지가 출판계에서 악명 높은 독설가 편집자라는 설정인데, 비유를 하자면 영화 <위플래쉬>의 플레쳐에 버금갈 만한 위인일까 싶었다. 현직 소설가가 정색하고 소설가 지망생이라는 독설가의 아들을 겁주는 걸 보면 아버지란 작자가 참 괴팍한 인물일 것 같다. 아, 그래도 플레쳐와 비교하는 건 실례이려나.



 '사인회의 우울'


 작가란 직업은 예체능 계열에 속하지만 분명 연예인들과는 다른 직업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사인회 한 번에 쑥스러워 하는 작가의 모습은 내가 다 민망했는데 나중엔 쑥스러워서 사인회를 고사하려 했던 게 아니란 게 밝혀져 그건 그것대로 충격이었다. 약간 뜬금없는 반전이긴 했지만... 아무튼 사인회에 임하는 작가의 고충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어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일본어가, 정확히는 일본 글자가 참 비효율적인 글자란 것도 엿볼 수 있었다. 그 나라는 괜히 한자를 병용해서 쓸데없는 해프닝이 많이 발생하는 것 같다. 사인회라는 설정 때문에 그 부분이 많이 부각됐다.



 '작가 만담'


 가볍게 웃기고 씁쓸한 자학이 녹아든 소설. 특별한 반전은 없고 한 번 더 짚고 넘어갈 만한 내용도 딱히 없었다. 다만 시시껄렁해도 어쨌든 대화만으로 이어가는 전개는 흡입력 있고 재밌었다. 소설이 아니라 진짜 만담을 보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만담이었을지 모르지.



 '쓰지 말아주시겠습니까?'


 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소설가에게 작품의 소재나 에피소드, 하물며 등장인물 성격이나 이름 같은 것을 어떻게 떠올린 거냐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거의 다 주변의 것들을 작품 속에 녹여낸 것이란 답이 돌아온다. 작가로서 어디부터 어디까지 글로 쓸 것인지에 대한 기준은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은데, 특별히 민감한 사안이 아니면 작가의 집필에 제동을 걸지 않는 편인 것 같다. 애당초 소설이란 게 사회적으로 대단히 파급력이 있는 책이 아니라서 소설 속에 무단으로 에피소드나 어떤 사람의 성격을 차용했던들 당사자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작가로서의 자존심이 있으면 작품 속에 당사자들도 자기 얘기인지 모르게끔 변화를 가미하려고 해 '완전 범죄'는 더욱 그리 어렵지 않은 실정이다.

 하지만 예외도 존재하는 법. 자신의 얘기를 쓰지 말아달라고 약속을 받아냈음에도 상대가 어겼을 때 법적으로 대응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도 모르게 복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이 작품에선 과민 반응인 줄 알았던 작가의 걱정을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리는 결말 때문에 분위기를 급격하게 오싹하게 만들었다. 작중 내용만으로 따지면 아무리 약속이라고 해도 복수하는 사람이 선을 한참 넘겼다고 할 수 있지만 소설의 내용을 떠나서 실제로 비슷한 사례를 접한다면 과연 제3자 입장에서 작가의 편을 들 것인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됐다. 문학 작품에 있어 현실 세계의 에피소드에 관한 저작권이나 프라이버시는 함부로 접근하기 참 민감한 문제인 것 같다.



 '꿈 이야기'


 개인적으로 꿈을 꿀 때면 내가 접한 만화, 영화, 소설의 등장인물은 물론 내 실제 친구들이나 말로만 듣던 사람들까지도 한 데 모이는 등 <어벤져스>급의 캐스팅이 펼쳐지는데 이 풍경은 장관이라기 보다 개판에 훨씬 가깝다. 각기 다른 이야기와 세계관의 인물들이 모였으니 전개가 개판일 수밖에 없지. 뭐, 그래도 꿈이니까 말 그대로 꿈에 가까운 상상도 풀어낼 수 있는 것일 터다.

 작가가 내 꿈과 비슷한 설정의 소설로 단편집의 마지막을 장식한다는 게 약간 충격을 받았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구나. 작중에선 모종의 기계의 힘을 빌린다고 나오지만 어쨌든 이야기가 없는 가상의 세계에서 이야기꾼으로 살아간다는 게 한 번쯤 꿈꿔왔으면서 뒤가 구린 일이란 생각이 여실히 들었다. 작년에 개봉한 <예스터데이>란 영화에선 모두가 비틀즈를 기억하지 못하자 가수 지망생인 주인공이 비틀즈의 노래를 자신의 노래로 둔갑시켜 가수로 데뷔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꿈 이야기'의 내용이 딱 그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두 작품의 주인공들이 자신의 오리지널 작품이 아닌 남의 작품으로 사람들로부터 각광을 받는 것에 대해 굴욕을 느끼고 자괴감에 빠져 번민한다는 전개가 특히 비슷했다.


 그 자괴감을 참다 못해 가까운 사람에게 사실을 고백해도 돌아오는 답이 압권이었다. 하긴 애당초 이야기가 없는 세계라고 본인이 설정했는데 누가 자신의 말을 믿어주겠는가. 그냥 또 하나의 잘 만든 이야기라 생각하겠지. 그런 점에서 주인공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얼떨결에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점이 <예스터데이>의 주인공과 달랐달까? 하지만 이 사실을 깨달았는지 깨닫지 못했는지 독자들은 알 길이 없다. 작가는 상상의 영역으로 넘겼는데 이런 여운 있는 결말이 아주 좋았다.

 작가가 후기에 이 책의 수록작들을 가급적 순서대로 읽어달라고 말했던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 작가로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을 마지막에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게 무척 당연하게 느껴졌다. 하긴, 이야기를 사랑하면서도 기존 작품들과는 또 새로운 종류의 이야기를 창조하고자 하는 작가로서의 지조가 담긴 작품이기에 내가 작가라도 애착이 갈 작품이었다.

장편이 못 되는 트릭이라도 단편이라면 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구질구질하지. - 91p




소설가가 되기에 걸맞은 적령기는 없어. 그래서 고약한 거야. 야구 선수나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소년 소녀는 어느 시기가 오면 꿈에 손이 닿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하지만 소설가라는 꿈은 늙어 지칠 때까지 계속 가질 수도 있어. 그건 더이상 꿈이 아니야. 악몽이지. - 14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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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시민 - 2013년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김서진 지음 / 나무옆의자 / 201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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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8.7






 스포일러 : 1장의 반전만 써놨음. 그런데 이 반전은 그야말로 시작에 불과함.


 저번주에 부산으로 여행갔을 때 작가가 부산 출생이란 이유로 가져간 소설이다. 4년 전에 읽을 때와 크게 느낌이 다르지 않았는데, 이번엔 우발적으로 살인을 범한 은주보다 은주의 범행을 목격한 창수에 집중하며 읽으니 또 새로운 맛이 있었다. 작가가 은주보다 공을 들였을 창수라는 캐릭터의 무시무시한 과거사와 그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허술한 뒷처리는 여러모로 흥미롭게 읽혔다. 추리소설 속에서 작가 지망생은 어딘지 굴절된 인격의 소유자로 등장하는 것 같은데, 그 전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인물이지만 작가는 나름대로 개성 있게 창수라는 캐릭터를 구현해냈다.

 아무리 작가 지망생이라지만 살인의 이유에 관심을 품으며 그토록 은주에게 접근하려는 창수의 모습이 예전엔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이 부분은 창수가 과거에 비슷한 종류의 경험을 갖고 있다는 설정을 흘려 읽지 않으면서 많이 해소된 편인데 이처럼 '선량한 시민'이라는 작품의 제목과 완전히 따로 노는 캐릭터 설정들이 제법 흥미롭게 다가왔다. 사실 제목 자체는 평범한 느낌이 없잖은데, 시민들의 모습이 선량하게 보였지만 실상은 개차반이라는 투의 작가의 집요한 설정은 꽤 마음에 들었다. 재밌는 건 일반적으로 이야기 속에서 악독한 인물로 묘사되는 시아버지가 오히려 가장 정상인처럼 비춰진 것에 비해 은주나 창수를 비롯해 은주의 자녀, 남편과 살해당하는 사람들, 심지어 경찰까지도 사리사욕에 눈이 멀거나 본능에 충실하게 사는 주제에 겉으로만 티를 안 내고 있는 등 다들 어딘가 비정상처럼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은주의 살의에 시아버지의 독선적인 태도가 전혀 무관하다고 보긴 어려우나 실질적으론 시아버지의 됨됨이가 예상과는 다르게 그리 나쁘지 않게 묘사된 건 어떤 의미에선 반전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뭐, 그래봤자 별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인물인 건 마찬가지지만.


 작가가 후기에서도 인정하듯 후반부의 급전개와 연쇄 살인범의 등장에 패닉에 빠지거나 열광하기도 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이번에도 아쉽게 읽혔다. 애당초 작중 배경이 서울인지 부산인지 지방의 소도시인지 명확히 그려지질 않아 소동의 규모가 잘 파악이 안 됐고, 그를 차치하더라도 연쇄 살인범이 동네에 살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작중 시민들이 보이는 반응은 다소 과민하고 어색한 데가 있었다. 이 점은 요번에 비교적 덜 작위적으로 읽혔다는 창수의 모습으로도 해소되지 않는데, 살인에 대한 저자의 통찰이 처음에 비해 후반부에 힘이 빠졌던 게 크게 작용했던 듯하다. 무엇보다 창수가 그토록 궁금해 했던 살인의 이유가 정말로 별로 대단치 않아 남는 게 없다는 것도 호불호 갈리는 부분이었다. 진짜 별로 대단치도 않은 이유라서 인상적이긴 했지만... 만약 작가가 허무함을 의도한 거라면 대성공이라 할 수 있겠다.

 살인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한 반응이란 측면에선 꼬마비 작가의 웹툰 <살인자ㅇ난감>이 연상됐는데, 그 작품에 비하면 <선량한 시민>은 깊이 면에서 한참 못 미치는 편이었다. 한 소설가는 이 작품에 대해 추리소설의 관점을 깬 것과 예상을 뛰어넘는 결말을 높이 평가했지만 이보다 기존 관점을 파격적으로 깬 작품을 많이 읽은 나로선 우선 그 소설가의 추리소설 독서량이 의심스러웠고, 또 예상을 뛰어넘는 결말이란 말도 그렇게 와 닿지 않았다. 창수가 그 정도로 허술한 건 물론 예상 밖이었지만 이건 달리 말하면 예정된 결말을 위해 작가가 무리수를 던졌다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이라 솔직히 실소가 나왔다.


 이러나 저러나 몰입도는 높으니 여행지에서 가볍게 읽기엔 - 분량이 길지 않아 가벼워서 에코백 속에 넣어다니기 편했다. - 좋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무게감 있는 통찰이 담긴 추리소설로 기대하고 읽으면 실망할 확률이 높은 작품이다. 드라마 작가 출신다운 사건이 끊이지 않는 역동적이고 속도감 높은 전개는 기대해도 좋지만 그와 어울리지 않는 허무한 결말은 미리 각오해야 좋지 않을까 싶다. 뭐, 말은 이렇게 해도 허무한 한편으로 깔끔한 맛도 있는 결말이라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른 독자들한테 대놓고 추천을 하지 못하겠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라.

우리 인생에는 복선도 플롯도 없다. 성격은 충동에 의해 무너지고, 기억은 소망에 의해 왜곡된다. 인생은 무질서한데 왜 소설 속 이야기는 그토록 질서 정연해야만 하는가. - 76p




나는 연쇄 살인범이나 귀신, 악마, 유혈 낭자한 죽음 등이 왜 무서운지 이해를 못 하겠다. 진짜 공포, 진짜 지옥은 따로 있다. 그곳은 뜨겁지 않고 차갑다. 모든 고통은 디지털로 변환되어 나와는 무관한, 그래서 귀찮고 언짢은 이야기 혹은 짜릿한 소일거리로 정보 처리되고, 급기야 고통은 비명도 없이 하나씩 사라지고 숨어버리는 지점. 침묵과 인내를 내면화한 개인들이 오직 생활의 무게만을 유일한 고통으로 안고 살아가는 곳. 뜨거움이 사라진, 조용하고 질서 정연하고, 지극히 평화로워 보이는 차가운 지옥. 나는 내가 가진 이 공포를 쓰고 싶었다. - 286~28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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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와 혼혈왕자 세트 - 전4권 (무선) 해리 포터 시리즈
조앤 K. 롤링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수첩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9.3






 스포일러 : 6편은 물론 7편의 스포일러도 있음


 압도적인 분량과 극도의 스트레스를 안겨준 전편과 달리 이번 '혼혈왕자'는 약간 쉬어가는 느낌의 에피소드였다. 물론 결말에선 비교도 할 수 없이 충격적인 장면이 나오고 그전까지 떡밥만 던진 볼드모트의 과거를 본격적으로 살펴가는 만큼 음산한 분위기가 물씬 났지만 그래도 '불사조기사단'에 비하면 훨씬 편하게 읽혔다. 새로운 캐릭터 슬러그혼은 속물적이면서 매력적인 소시민 캐릭터로 깨알같은 재미를 선사했고 이제야 이야기의 주역으로 급부상한 말포이는 연출의 실수인지 별로 긴장감을 주지 못해 해리의 집착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나 역시 공감이 됐다. 왜 저런 놈한테 신경을 쓰지? 그만큼 말포이는 혈통말고 내세울 게 없는 초라한 인물이니까.

 어쩌면 작가는 깐죽거리기만 할 줄 알았던 말포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예상치 못한 짜증을 선사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초반에 해리가 말포이에게 두들겨 맞는 장면이나 기대 이상으로 호그와트를 위기로 몰아넣은 말포이의 활약은 놀랍다기 보단 그저 짜증이 날 뿐이었는데 지금은 7권의 내용도 알고, 또 덤블도어가 얼마나 치밀한 사람인지 다 알고 있으니까 망정이었지 옛날엔 이런 짜증나는 전개를 어떻게 읽어내려갔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때는 꼭 이랬어야만 했냐고 울부짖지 않았을까 싶다.


 이제는 성인에 가까운 호그와트 6학년생인 해리와 동급생들의 이야기는 1편에 비해 분명 수위가 높아졌다. 이젠 어엿한 한 사람의 마법사로서 제몫을 다할 수 있게 된 해리가 덤블도어를 비롯한 호그와트 교수들과 거의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정신력을 선보인다. 기분 울적한 교수(해그리드)를 위로하고 멍청한 교수(트릴로니)를 적당히 무시하고 미워해마지않는 교수(스네이프)는 대놓고 적대하는 등 1편과는 비교도 안 되게 성장한 모습이 눈에 띈다. 1권부터 차례대로 읽어서 간과하기 쉽지만,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이모부 가족들한테 시달린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은 어른이라고 무조건 고개 숙이지 않고 소신껏 행동하며 때론 어른일지라도 자기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등 이래저래 어른이 다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새로운 마법부 장관인 스크림저에겐 자기 의견을 딱 잘라 말하는 등 이전과 달리 기세등등한 모습은 보는 내가 다 속이 시원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번 6편에선 무리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경향도 있었다. 원래부터 어림짐작으로 독단적인 행동도 하고 주변에서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이번엔 유독 집착이란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주변에 아랑곳 않고 막나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행히 해리의 추측이 거의 대부분 맞긴 했지만, 결정적인 부분은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터라 7권의 내용을 다 아는 입장에선 해리가 답답하게 느껴졌던 적도 있었다. 덤블도어가 한 말이 정확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말이 주변 사람의 조언보다 훨씬 중요하게 생각한다.


 물론 전편에서처럼 해리가 감정적으로 행동한 게 아니라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리를 전개했기에 그를 두고 무모했다느니 막나갔다느니 하는 게 좀 부당한 평가일 순 있다. 스네이프에 관한 선입견을 떨칠 수 없는 것과 그가 이중 스파이로 활동한 내막을 해리로선 알 수가 없는 것 등 해리 입장에선 최선을 다했다고 봐야 한다. 솔직히 해리가 답답하다고 느낀 것도 7권까지 다 봤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 예전에 읽었을 땐 해리 못지않게 나도 분노하고 한편으론 실망했던 것 같다. 정말로 덤블도어가 틀렸고 스네이프가 죽음을 먹는 자였다니... 롤링이 이렇게 해리가 결국 옳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킬 리가 없을 텐데 하면서.

 직감이긴 했지만 롤링이 반전을 꾀하는 스타일을 파악했던 예전의 나는 어렴풋이 스네이프의 정체에 대해 눈치를 챘던 것 같다. 어디까지나 눈치를 챘다 뿐이지 논리적으로 추리를 한 게 아니기 때문에 어디 가서 자랑할 만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7권이 아직 집필되지 않은 6권까지의 시점만 놓고 보면 작가가 마지막 에피소드를 남겨두고 긴장을 한껏 끌어올린 연출은 지금 봐도 인상적이었다. 전편에선 시리우스를, 이번엔 덤블도어까지, 해리에게 도움이 되고 의지가 될 수 있는 캐릭터들을 퇴장시켜버려서 7권에서 볼드모트와 치를 싸움의 전망이 상당히 암울하기 그지없었는데 그런 만큼 마지막 에피소드가 더욱 궁금해지지 않았나 싶다. 너무나 가혹한 전개지만 작가가 말하기론 다 전개상 필요하니까 취한 조치였고 그만큼 성과도 컸다고 생각한다.


 스네이프의 정체에 대한 반전을 6권이 끝날 때까지 밝히지 않은 작가의 인내심도 정말 대단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1권부터 담금질한 반전을 숨긴 채 작가는 6권에서 덤블도어가 스네이프의 손에 죽게 만듦으로써 독자들의 스트레스를 최고조에 찍게 만든 뒤 바로 다음권에선 기어코 그간 참아왔던 반전을 터뜨려버리니까 말이다. 작가로서 정말 쾌감 넘치는 순간이지 않을까 싶은데 굳이 반전이 아니라 이번 6권만 하더라도 지금까지 쌓아온 설정과 전편의 에피소드를 집대성하고 해리와 볼드모트의 대결 구도를 강조하여 말 그대로 폭풍전야와도 같은 분위기를 형성한 것도 쾌감이 있었으리라 본다. 7권으로 가는 전초전으로써 이보다 압도적인 연출은 없을 것 같다.

 요번 '혼혈왕자'가 해리와 덤블도어의 유대감, 볼드모트의 과거사, 볼드모트를 쓰러뜨려야 하는 해리의 숙명의 의미에 집중하느라 상대적으로 이전 에피소드들에 비해 내용이 지엽적이게 느껴졌다. 전편의 캐릭터들, 가령 해리와 썸을 탔던 초라든가 전편에서 눈부신 성장을 보인 네빌 등 여러 캐릭터들의 존재감이 이전만 못했는데 - 루나는 그나마 한몫했지만. - 작가가 창조한 세계관이나 캐릭터의 수가 방대한 만큼 지나가는 정도라도 언급한 게 어딘가 싶어 별로 단점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다만 다음 권에선 호그와트가 배경으로 등장하지 않으므로 안 그래도 등장이 적은 캐릭터들이 막판의 대규모 전투를 제외하곤 거의 등장하지 않다시피 할 텐데 6권에서라도 많이 등장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못내 아쉬움이 들었다.


 7권은 상당히 암울한 내용으로 전개될 것이다. 적어도 위즐리 부부의 닭살 돋는 암구호 장면 같은 개그는 7권에선 더더욱 보기 힘들 것이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빠질 수 없는 재미인 호그와트에서의 학창 생활도 다뤄지지 않을 테니 학생인 해리의 모습은 이번 6권을 끝으로 못 보는 것이다. 해리와 볼드모트 만큼은 아니더라도 시리즈의 팬이라면 호그와트라는 장소 자체에 애착이 가지 않을 수 없는데, 그 호그와트에서의 마지막 생활이 덤블도어의 죽음으로 비극적으로 마무리돼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완결이 머지않아서 그런지 아쉬운 게 한둘이 아닌데... 이래서야 7권을 다 읽은 다음엔 어떤 기분일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왠지 겁나는데.

해리, 심지어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에서조차 이런 일들이 얼마나 빈번하게 일어나는지 모른단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하는 말이 다른 사람의 조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 - 3권 28p




그것은 목숨을 건 싸움을 앞두고 경기장에 억지로 끌려 들어가느냐, 아니면 고개를 높이 쳐들고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느냐 하는 것의 차이였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든 그게 그거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덤블도어는 알고 있었다. 나도 알고 있어. 해리는 맹렬하게 끓어오르는 자부심을 느끼며 생각했다. 우리 부모님들도 알고 계셨어. 그것이 하늘과 땅만큼이나 전혀 다르다는 것을. - 3권 2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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