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술트릭의 모든 것
니타도리 케이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7.4







 스포일러 : 이 책의 스포일러는 물론이거니와 우타노 쇼고의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이누이 구루미의 <이니시에이션 러브>, 츠츠이 야스타카의 <로트레크 저택 살인사건>에 관한 언급까지 나온다. 서술트릭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까 부득이하게 다른 작품과도 비교하게 됐다.



 서술트릭은 '이 작품은 서술트릭을 다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스포일러라 할 만큼 보안 유지가 관건인 트릭이다.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좋아하는 트릭이지만 이놈의 보안 유지 때문에 남들에게 그 매력을 어필하기가 쉽지 않아 두루뭉술하게 '읽어보면 안다'라는 말만 해야 하는 게 단점 아닌 단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서술트릭을 사용했다는 걸 전면으로 내세우고 있다. 작가가 서두에서 밝히길 서술트릭은 늦게 내는 가위바위보처럼 치사한 구석이 있어 자신은 최대한 공정한 게임이 이뤄지게끔 서술트릭을 사용했다는 걸 밝혔다고 한다. 발상도 참신하고 패기도 있고 무엇보다 공정한 게임이 가능하게끔 노력했다는 말이 사실여부를 떠나 호감으로 비쳐져 트릭의 완성도가 의심되면서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뻥 뚫어주는 신'


 남몰래 막힌 변기를 뚫어준 의인을 찾는다는 다소 사사로운 사건을 다룬 작품. 사건의 규모는 시시하지만 나름대로 미스터리한 분위기는 잘 살렸는데 후반에 밝혀지는 의인의 정체나 사건의 진상이 너무 무리수인 나머지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반전은 황당했는데, 반전의 내용도 황당하지만 그 반전의 내용으로 하여금 메시지를 부여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추하게 느껴졌다. 그냥 놀라움으로 승부를 봤으면 좋았을 텐데, 괜히 우타노 쇼고의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흉내를 내려니까 아귀가 안 맞는 느낌이 강했다. 트릭의 발상이 괜찮으면 뭐하는가, 스토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하는데. 이건 명백히 수준 미달이었다.

 솔직히 말해 도입부에 화자가 푸는 잡다한 썰(?)이 제일 재밌었다. 이 부분에서도 약간 우타노 쇼고가 연상됐는데... 우타노 쇼고가 엉성한 필력을 갖고 있으면 이런 느낌인 걸까 싶었다. 나 원 참.



 '등을 맞댄 연인'


 일본은 우리나라처럼 사람을 성과 이름까지 한 번에 부르는 게 아니라 주로 성을 부른다. 어지간히 친한 사이가 아니고선 사람을 성으로 부르는 게 자연스러운데, 이런 문화적 배경에 착안하여 서술트릭을 구사하는 추리소설이 은근히 많다. 이 단편의 경우엔 이누이 구루미의 <이니시에이션 러브>가 떠올랐는데, 심플하지만 교묘한 착각을 유도한 게 괜찮았다. 오히려 사건의 해결보다 훨씬 눈길이 갔다.

 그렇지만 가장 눈길이 간 것은 단연 작중 두 남녀가 맞이하는 결말이다. 간만에 이상적이기 짝이 없는 연애담을 보니 신선하기까지 했는데, 이 결말도 첫 번째 수록작처럼 작중 트릭의 내용과 어울리는 느낌은 없었지만 스토리 자체가 재밌어 큰 불만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갇힌 세 사람과 두 사람'


 설마 싶었는데 정말로 그 트릭이었던 게 신기했다. 아마 기억하기론 이런 종류의 서술트릭은 처음 접한 것 같은데, 그도 그럴 것이 영화에 몰입하는 상황은 너무나 일상적인 상황인 터라 되려 의표를 찔렸던 것 같다. 그래서 맥빠지기도 했지만... 이건 비꼬는 말이 아니라 정말 이렇게 쓴 작가가 존경스럽기도 했다. 아니,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고서야...



 '별생각 없이 산 책의 결말'


 이 작품은 내용이나 반전엔 큰 감흥이 없었지만 반대로 반전으로 하여금 작가가 도출해낸 메시지는 인상적이었다. 그런 점에서 첫 번째 수록작과 정반대격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자의 선입견을 이용해 시대를 혼동시키는 트릭은 의외로 흔한 것 같은데 그 혼동을 근거로 고전을 읽는 묘한 재미에 대해 서술한 것이 흥미로웠다. 어떻게 보면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영양가 있게 읽힌 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빈궁장의 괴사건'


 다양한 국적의 유학생이 모여 사는 기숙사에서 펼쳐지는 대환장 파티. 이 작품도 사건의 정체나 반전은 그다지 재미가 없었지만 작가의 대담한 트릭 구사엔 정말 기가 막혔다. 작가는 대놓고 별개의 인물임을 명시했으나 독자들이 게을러서 그 부분을 간과했다는 점에서 츠츠이 야스타카의 <로트레크 저택 살인사건>이 생각났다. 한 명인 줄 알았더니 둘이었더라는 반전의 내용 자체는 단순한데 그 내용을 숨기지도 않았단 게 지금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온다. 이 연출만큼은 정말 인정한다.

 여담이지만 <로트레크 저택 살인사건>은 츠츠이 야스타카의 위안부 관련 망언 때문에 현재 작가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어느 서점, 도서관에서도 구할 수 없다. 망언의 수준이 너무 저열했던 만큼 납득은 가는 현상이지만 작품 자체의 퀄리티는 높았기 때문에 씁쓸하기 그지없다.



 '일본을 짊어진 고케시 인형', '작가 후기'


 마지막 두 작품의 내용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이라곤 벳시라는 희성을 가진 인물이 모두 별개의 인물이었다는 것과 후기를 빙자해 작가가 사족을 거하게 썼다는 것 정도다. 작품 내용이 난이도가 있어서라기 보단 내 컨디션 때문에 안 읽혔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결말이 썩 재밌다는 느낌을 못 받아서 그냥 과감하게 읽히지 않았다는 것으로 독서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서술트릭은 쓰는 입장이나 읽는 입장이나 큰 어려움이 따르는 까다로운 트릭이다. 트릭을 잘 다루면 독자의 편견을 뒤집으면서 엄청난 깨달음과 감동을 안겨주지만 잘 다루지 못하면 그냥 무리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서술트릭의 모든 것>의 수록작 중에는 무리수에 지나지 않는 작품이 몇 있어서 아쉬움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름대로 다양한 종류의 서술트릭과 때론 틈새시장도 패기있게 개척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대다수의 수록작들이 스토리와 트릭의 균향감이 별로였고 무엇보다 어정쩡하게 메시지를 넣으려다 역효과만 낳은 경우까지 있어 패기만 좋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잘 쓴 서술트릭을 좋아하는 것이지 서술트릭 그 자체, 모든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이번 기회에 그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한테 참 고오마움을 느꼈다. 물론 이건 비꼬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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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아이 1
YU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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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늑대아이>를 처음 접했을 때 엄청 감동했고 Yu가 그린 만화도 마찬가지로 감동적이었지만, 두 번째로 읽으니까 그 감동이 예전만큼 강렬하지 않았다. 직전에 <과테말라의 염소들>을 읽어서 그랬나? 그 소설이 화기애애한 부모 자식 관계를 그리지 않으면서도 따뜻함을 유지한 것과 달리 <늑대 아이>는 대놓고 감성을 건드리는 육아 이야기라서 두 작품의 온도 차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과테말라의 염소들>처럼 리얼리티 있는 이야기를 선호하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와 정반대격인 <늑대 아이>의 내용에 불쾌감을 느꼈다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하나가 자신을 떠나려는 아메의 뒷모습을 향해 '자신은 아직 아무것도 해준 게 없다'고 외치는 말은 뭉클했고 인간의 정체성을 택한 유키와 늑대의 정체성을 택한 아메의 선택을 존중하는 작품의 태도는 여지없이 근사했다. 최소한의 판타지스런 설정으로 모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한 작품의 설정과 스토리에 이의를 제기하긴 힘들었다. 너무 이상적인 가족 관계에 의구심이 들더라도 그건 취향의 문제일 뿐이라고 못을 박고 싶다.


 단, 개인적으로 스토리의 뒷마무리가 살짝 아쉬운 감이 있었다. 아메와 유키가 엄연히 남매지간임에도 아메가 늑대로서 숲으로 떠나는 장면이 너무 정없게 묘사되지 않았냐며 일말의 아쉬움이 남았는데, 아무리 늑대로 살겠다고 해도 그렇지 자신의 누나와 홀어머니의 몸으로 자신을 돌봐준 어머니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떠나는 모습은 너무 무정하지 않은가 하는 불만이 남았다. 모성에 대한 호소다 마모루의 생각이나 감성은 취향의 문제이니 왈가왈부하지 않겠지만, 아메가 자신이 늑대의 정체성을 택한 뒤부터 자기 누나와 어머니한테 대하는 태도가 이기적인 구석이 있어 비호감으로 비쳐졌다. 적어도 반은 인간인 만큼 늑대보다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더라면 어땠을까 싶은데... 작품 완성도에 비하면 사사로운 트집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영화를 원작으로 둔 이 만화의 내용은 영화와 완전히 판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작화를 담당한 Yu 작가의 재해석이 거의 없다는 건 좀 아쉽게 다가왔다. 원작이 워낙에 내용이 좋으니까 거기서 뭘 더 어떻게 재해석을 가미하기 힘들었겠지만 최근에 읽은 <수명을 팔았다. 1년에 1만 엔으로>가 원작 소설의 내용을 잘 옮겼으면서도 몇몇 장면과 외전을 넣어 만화로 다시 읽는 재미를 안겨준 걸 생각하면 <늑대 아이>의 영화와 만화의 내용에 거의 차이가 없다는 건 단점으로 느껴졌다. 심지어 영화도 애니메이션이다 보니 내용을 그대로 옮겼다는 게 조금 성의없게 여겨지기도 했다. 원작을 훼손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하긴 했지만 다시 읽으니 이 점이 가장 눈에 밟혔다.


 저번에 만화에 대한 포스팅을 쓸 때 영화도 빠른 시일 안에 찾아보겠다고 했는데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영화를 보지 못했다. 영화의 경우 영상미나 음악까지 있어 몇 번을 봐도 시간이 아깝지 않은 작품인데... 내 귀찮음이 그저 한스러울 뿐이다. 이렇게 말해놓고 영화를 보기까지 또 몇 년이란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언젠가 다시 보긴 볼 테다. 본의 아니게 만화만 두 번 접했더니 이제 영화가 그리워졌다. 과연 몇 년이 걸리려나.

이제 어른이니까.

자신의 세계를 발견한 거야. - 3권 제15막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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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의 염소들
김애현 지음 / 은행나무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8.3







 부모 자식 관계란 생각만큼 순탄하고 알기 쉬운 관계가 아닌 애증의 관계라는 말에 과연 몇 사람이 고개를 끄덕일까. 남들은 부모가 있는 것만으로 복에 겨운 줄 알라고 하겠지만 한 발작 다가가서 들여다보면 가족이고 뭐고 자시고 간에 서로 한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할 수도 있는 법이다. 나는 대개의 가정이 그런 위태로운 관계 속에 처했는데, 방송이나 여타 매체에선 그런 날선 모습은 최대한 순화시킨 채 내보낼 뿐이라고 생각한다. 동화처럼 바람직한 가족상으로 세상 모든 가족을 바라보기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고 의외로 상식따윈 가볍게 상회하는 이상한 사람이 참 많아서 말이다.

 이 작품에는 일견 불효녀로 보이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홀어머니인 자신의 친모가 사고를 당해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졌는데 응급실에 들어가 상태가 어떤지, 치료 가능성이 어떤지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일종의 현실 도피긴 한데 주인공의 모습은 그보다도 의문스러운 구석이 몇 가지 더 있다. 주인공 친구들이 어머니의 생사를 자기 일처럼 걱정하고 넌 어머니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핀잔을 주지만 정작 당사자는 희로애락이 마비된 듯 떨떠름하게 반응한다. 그보다 주인공은 어머니가 코마 상태인 것보다 자신의 떨떠름한 반응에 더 충격을 받은 모양새다. 나름대로 어머니에게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왔음에도 정작 기억나는 것은 어머니가 자신을 서운하게 했던 일들, 가령 일때문에 늦게 퇴근하는 것에 의례적으로도 미안해하지 않고 얄미울 정도로 당당하게 구는 태도라든가 함몰 유두 때문에 젖을 먹이지 못했다든가 하는 이유 등 정말 자질구레한 이유들을 열거하며 자신이 지금 엄마로부터 도피하려는 정당한 이유를 찾으려고 애쓴다.


 이게 뭔 돼먹지 못한 경우인가 싶지만 난 은근히 공감이 갔다. 물론 주인공의 방황하는 전개나 명확하지 않은 결말은 답답했지만 방황의 내용 자체는 작가가 소신껏 솔직하게 잘 적어냈다고 생각했다. 한 집에서 얼굴 마주보고 사는 사람들끼리 큰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합의점을 찾지만 작은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물러서지 않아 괜히 감정만 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집안일이 대표적일 테고 생활 방식이나 가치관의 차이는 오히려 사소하기에 더 눈에 밟힌다는 게 꼭 내 이야기처럼 들렸다. 나도 비슷한 문제로 부모님과 언성을 높인 적이 있는데 한 번 기분이 상하면 속으로 극단적인 저주도 퍼붓는 경우가 적잖았다. 만약 그렇게 사이가 소원해진 직후에 부모님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더라면 50%의 확률로 언성을 높였던 것을 뉘우치겠지만 나머지 50%의 확률로는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끔찍한 얘기지만 선한 본성 못지않게 악한 본성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바라봤을 때 이 작품의 본편이나 과테말라의 호세 이야기는 부모 자식이라는 애증의 관계를 진솔하면서도 선을 넘지 않고도 잘 그려냈다고 본다. 간혹 너무 진솔한 얘기들은 공감이 가는 한편으로 불편한 경우가 허다한데 이 작품은 공감이 갈 정도로 진솔하면서도 마지막 선인 자식의 도리라는 걸 긍정해 다 읽고서 따뜻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이를 통해 부모 자식 관계란 붙어 사는 이상 크고 작은 잡음이 끊이지 않지만 그 과정들로부터 도피하지 않는다면 서로의 소중함 내지는 자신의 모자람을 깨닫고서 사이가 돈독해지며 거기서 뜻밖에 자아성찰도 하게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명확하게 결말이 나지 않아 작가가 이야기를 하다 만 느낌이 들었지만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결판난 것 없이 모호하게 처리된 결말 덕에 더 나은 결말, 이를테면 기적을 상상하게 돼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았다.


 서두를 장식하는 과테말라의 호세 이야기는 이국적인 분위기가 있어 읽는 맛이 남달랐고 남을 웃기는 재능이 딱히 없는 코미디언 지망생이라는 주인공의 설정도 특이하고 주인공의 친구나 이번 사건으로 인해 만나게 되는 '초코'와 '딸기'라는 특이한 별칭의 캐릭터들, 엄마의 동료 전 선생도 은근 개성적인 캐릭터였는데 그렇다 보니 전체적으로 좀 밋밋한 이야기일지언정 캐릭터들이 주는 흡입력은 상당한 작품이라 느껴졌다. 특히 오묘한 과거사를 가진 초코의 등장은 다소 우울한 분위기가 팽배했던 작품에 활력을 불어넣었는데, 주변 사람의 도움이 있다면 안 좋은 결말에도 끄떡없으리란 작가의 철학이 있기에 초코를 비롯한 다종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한 것 같다.

 작가의 후기를 읽어보니 이 작품이 제법 자전적으로 집필된 모양이던데 그런 만큼 작중의 캐릭터들이 뜬금없이 등장했더라도 작가 본인에겐 정말 잊히지 않는 중요한 사람들이라 작품 속에 녹여낸 게 아닐까 생각된다. 하여간 그놈의 인간애 덕에 이래저래 호감이 가는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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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성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3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5.5







 <기암성>은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서 <813>과 함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알고 있다. 스케일도 무지막지하게 크고 등장하는 캐릭터도 상당히 많으며 각자 개성이 있다. 전지전능한 괴도 신사 뤼팽이야 말할 것도 없고 말만 뤼팽의 적수일 뿐 실상은 뤼팽의 먹잇감에 지나지 않는 가니마르와 가니마르 못지않게 뤼팽에게 휘둘리는 홈스, 그리고 요번에 새로 등장하는 소년 탐정 이지도르 보트를레 등 흥미를 끄는 요소가 많은 작품이다. 하지만 몇몇 무리수 때문에, 그리고 평소에 프랑스 역사에 흥미가 있다거나 사전지식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이 작품은 황당하고 지루한 작품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전에 읽을 때도 그랬지만 다시 읽을 때도 마찬가지로 뤼팽이 너무 전지전능하고 위기다운 위기에 처하지 않는 게 긴장감을 떨어뜨리지 않나 하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탐정이 노력해서 밝혀낸 줄 알았던 진실과 반전들이 사실 모두 다 뤼팽이 짜놓은 판에 장기말처럼 움직인 것일 뿐, 결국에 승리하는 건 뤼팽이라는 식의 전개는 너무 뻔하고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뤼팽이란 캐릭터가 100년 뒤 독자에게도 유효한 매력이 없었더라면 실로 비호감인 전개가 아닐 수 없었는데, 이야기의 주역인 이지도르 보트를레마저 별 매력이 없었다면 완독을 중도에 포기했을지 모르겠다. 비록 뤼팽이 짜놓은 판의 장기말에 불과했을지언정 그 순진무구하고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인 소년 탐정의 존재감은 이번 작품에 있어 정말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가히 신의 한 수라 불러도 모자랄 정도였다.


 작가가 전작인 <뤼팽 대 홈스의 대결>에서 홈스를 지나치게 우스꽝스럽게 그린것 때문에 독자들한테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이번 작품은 저번 작품마저 차라리 낫다고 여겨질 정도로 홈스가 치졸하게 그려져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셜로키언이 아닌 나도 이건 좀 아닌데 싶었는데, 전작에서도 홈스가 뤼팽에게 휘둘리긴 했어도 이야기 자체에 결함은 없어서 그냥 이름만 같은 영국 탐정이겠거니 하고 넘아갈 수 있던 반면 이번 작품은 홈스의 등장 때문에 오히려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져서 괜한 등장이란 생각밖엔 안 들었다. 모리스 르블랑이 홈스를 너무 의식해서 뤼팽이란 정반대격인 캐릭터를 만든 것도 좋고 둘을 대결시키는 것까지는 나쁘지 않았는데 이번 작품처럼 홈스가 등장함으로 인해 완성도에 영향이 가니 이쯤 되면 홈스에 대한 작가의 견제가 너무 지나쳤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홈스의 개입 여부와는 상관없이 씁쓸하게 맺어진 결말은 나름대로 여운이 남아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왜냐하면 뤼팽이 세상만사 자신의 뜻대로 풀리는 일이 없음을 절감하게 되는 장면이었기 때문에 좀 짓궂긴 해도 인과응보라는 감상이 나왔다. 뤼팽이 의적이긴 하지만 조직 단위로 움직이고 때론 납치와 협박도 서슴지 않는 요번 작품의 행보를 통해 뤼팽 역시 지금보다 더욱 타락할 여지가 있는 흔하디 흔한 범죄자란 인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유머와 낭만, 다재다능한 솜씨는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이젠 더 이상, 적어도 이 작품에 한해선 그가 의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지금의 내게 있어 뤼팽의 이야기는 한 편의 길티 플레져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여성이라도 인과의 한계를 뛰어넘어서라도 자신에게 반하게 만드는 마성의 매력의 소유자, 자신이 훔치고 싶은 모든 것을 반드시 쟁취해내려는 행동력과 전지전능함 등 뤼팽은 황당무계하면서도 읽는 이로 하여금 선망을 유도하는 캐릭터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선 유독 비호감으로 다가왔다. 특히 자기 마음대로 은퇴를 결심하고 자신을 추적하는 사람들을 약올리며 장난감 취급하다 최후에 크게 한 방 먹는 장면에선 별다른 동정심도 들지 않았는데, 뤼팽이 아무리 애써도 말만 번지르르하게 할 뿐 결국엔 범죄자라고 작가가 선을 긋는 것 같아서 뜻밖의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예전엔 뤼팽이 독특한 정의관을 갖고 있다고 여겼는데 지금 와선 기상천외한 활극을 일삼는 범죄자로 여겨지는 게 신기했다. 내가 이제는 뤼팽 같은 작자에게 공감을 못할 정도로 변했다는 깨달음이 묘한 느낌을 줬다. 예전엔 참 좋아한 캐릭터였는데... 내 동심이 이미 손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가버린 것 같아 참 시원섭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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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자 - 귀남이부터 군무새까지 그 곤란함의 사회사
최태섭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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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가급적 선입견 없이 읽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평점이 낮은 페미니즘 도서는 읽기 전부터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법이다. 차라리 평점이 아에 2~3점대로 확 낮으면 또 모르겠는데 애매하게 6점대에 있어서 굉장히 편향적인 논리력으로 중무장한 책이 아닐까 지레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책의 서문이 너무나 술술 읽히고 또 독특한 맛이 있어 뒷내용도 궁금해서 마저 읽어내려갔다.

 이 책의 주된 논지 두 가지를 살펴보자면 남자들끼리도 의견을 합치시키지 못하는 개판 5분 전의 팀워크, 남자들의 가부장적 사고는 기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장려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자에 대해 얘기할 때 상당히 비웃는 기색이 역력했고 후자에 대해선 사뭇 동정적인 어투로 논리를 풀어냈는데 어느 쪽으로든 남성 입장에서 썩 달갑게 들릴 어투는 아니다. 하지만 이 말이 정말로 달갑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단지 어투 때문만이 아니라 내용이 대부분 정곡을 찌르는 것들이기 때문이리라 본다. 아마 애매한 평점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치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곡을 찔렸다고 점수로 보복하다니.

 

 저자가 전개는 논리의 밀도며 사전 조사, 인용의 출처 등은 상당히 묵직했다. 조선시대부터 살펴본 한국 남자들의 우울한 자화상, 출처를 알 수 없는 억울함의 근원을 이렇게까지 역사적으로 훑어보리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저자 스스로 인식한 문제에 대해 제법 전문적인 자세로 임하고 있어 그 노력이 가상했다. 일부 작위적인 해석도 없지않았던 것 같지만 이만하면 인정할 만한 성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의 근원을 살펴보는 것도 좋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정확히는 2010년대를 배경으로 둔 작가의 통찰에는 날카로운 구석이 부족했다. 메갈리아에 왜 그렇게 많은 남자들이 분노했는지에 관해선 제법 정곡을 찌르는 해석을 내놓았지만 저자는 해석만 했을 뿐 결정적으로 본인의 생각은 명확히 털어놓지 않고 두루뭉술 넘어가려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가 책에서 그토록 강조했던, 의견 합치를 보이지 못하는 남자들 못지않게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현재의 다양한 젠더 이슈에 관해 의견 합치를 하지 못하고 판도라의 상자인 양 경원시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명확하게 이건 좋고 나쁘다고 말해버리면 후폭풍이 상당할 테니 저자는 최대한 세련되고 안전하게 남성 독자들에게 인식의 변화를 촉구하며 결말을 맺었는데, 개인적으로 끝에 가서 소극적인 태도는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한편으로 페미니스트들이 말만 그럴싸하지 그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평행선을 달리는 듯한 분위기는 2년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 내 시점에선 비웃음거리라기 보단 지극히 당연한 모습으로 여겨졌다. 결국 페미니스트란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정답에 가까운 사람이 아닌 그저 끊임없이 논의를 거쳐 합의점을 찾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 불과하단 것을 지금의 나에겐 그다지 새삼스럽게 다가오지 않았다.


 한때는 페미니즘이 하나의 철학이 아닌 우리의 미래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요즘 들어선 페미니즘이 미래로 이끄는 계단일지언정 미래 그 자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결국 아무리 정당한 이유를 열거하고 그 이유들이 매우 그럴싸하더라도 어느 순간부터 선을 넘었는데 그 행위마저 대의로 정당화하려고 들면 페미니즘이든 뭐든그 철학엔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부분을 간과했다는 점에서 <한국, 남자> 역시 요즘의 내게 있어 은근히 편향된 구석이 없잖은 책이었다. 2년 전에 출간된 남성 저자의 페미니즘 도서마저 편향적으로 읽히다니 유감스럽다. 역시 공동 저자가 참여한 책만이 답인가. 정말로 가능하다면 서로 반대되는 성향의 저자끼리 대담을 하는 책도 나왔으면 좋겠다. 그럼 책이 엄청 두꺼워지겠지만 그만큼 독자로서 유익한 내용을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번 도전해보고 싶다.

 끝에 가선 아쉬웠지만, 작가가 본인의 계획과 포부에 맞게 한국 남성의 기원을 훑어 자신의 논리, 한국 남성의 편향된 가치관은 상당 부분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된 것이란 주장을 제법 자세하게 전개시킨 점 때문에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던 책이다. 현대에 이르러선 인터넷 문화와 접목돼 더욱 지능적이고 적나라해진 여성 혐오의 양상을 세밀하게 분석한 것도 인상적이었고 대부분 팩트에 근거했으리란 신뢰감을 들게 한 것도 괄목할 만한 부분이다. 젠더 이슈에 관해 정보량과 공부한 시간으로 따지면 이 작가하고 견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은 짧은 분량에도 글이 밀도 있으며 가독성도 좋았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읽은 페미니즘 도서들 중엔 논리는 뛰어나지만 막판엔 감성에 호소하는 등 저자의 필력이 불안한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 책의 경우 후반에 급발진한 감이 있어서 그렇지 기본적인 필력이 출중해 이 작가가 쓴 다른 책도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어떤 페미니즘 도서도 나로 하여금 이런 생각까지 들게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약간의 아쉬운 점은 차치할 만큼 흡입력 있는 필력을 선보인 만큼 저자가 쓴 다른 책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특권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고, 내 손에 쥐어지지 않는 모든 것은 나에 대한 (역)차별로 인식하곤 한다. 오로지 내 눈앞의 풍경만이 진실이다. 그 속에서 남자들은 자기 연민과 정당성을 주조해낸다. 이 남자들은 기만자들이 아니라, 자기가 믿고자 하는 것을 믿고 있는 이들이다. - 16p




동등한 주체이자 인간이자 동료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성별화되고, 육화되고, 이념화되고, 비하의 대상이 되는 무언가를 남자들에게 가르쳐왔다. 남자들은 진짜 남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의존해줄 여자를 찾아야 한다는 이상한 성인식을 치러왔고, 스스로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서는 것을 배우지 못한 것은 여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남자들이다. - 2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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