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는 스페인 이야기 37 - 천의 얼굴을 가진 이베리아 반도의 뜨거운 심장
이강혁 지음 / 지식프레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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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제목에서 명시된 것처럼 스페인을 처음 만나는 독자를 대상으로 집필된 책인 만큼 아무래도 수박 겉 핥기 느낌이 없잖았다. 하지만 37개로 세분화돈 키워드로 스페인을 소개하다 보니 다양성 면에선 아쉬움이 없는 독서였다. 굳이 아쉬운 게 있다면 사진이 좀 적은 감이 있다는 것과 정작 기대했던 내용이 불만족스러웠던 것이겠지. 

 사실 제대로 소개를 하려면 37개보다 더 많은 가짓수가 있어야겠지만 이 정도면 알짜배기들은 거진 다뤘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관심이 가는 키워드만 따로 체크한 다음에 더 전문적인 책을 - 책 말미에 참고문헌이 소개됐는데 관심 가는 제목의 책들을 메모해놨다. - 찾아 읽음 되겠지. 일단은 스페인의 다종다양한 면모를 엿본 것으로 만족하련다. 


 개인적으로 스페인 내전에 대한 이야기와 스페인 독감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했었는데 전자는 2회에 걸쳐 소개됐지만 약간 요약본을 읽는 느낌이었고 후자는 내 기억으론 언급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스페인 독감은 스페인에서 유행한 독감이 아니라 한창 세계 대전 중에 중립국인 스페인이 유일하게 그 전염병을 조명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자 오해의 소지도 충분한 병명인데... 요즘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이런 부분 또한 접할 수 있었다면 참 좋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그래도 나름 최근에 출간되긴 했지만 코시국인 지금에 와서 읽으니까 시의성 면에서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가령 마드리드가 코로나 때문에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든가 하는 내용이 씁쓸하긴 해도 정확히 무슨 과정을 거쳐 그 사단이 났는지 읽고 싶었는데 당연히 그런 내용은 암시조차 있을 리 없다. 요새 해외 여행을 못 가니까 여행 에세이가 많이 출간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과거의 여행 내용을 추억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 지구촌 각 장소의 요지경을 살펴보는 것 역시 중요하지 않은가 싶다. 언젠간 떠날 스페인 여행을 미리 대비하는 기분으로 집어든 책이지만 상황이 갈수록 비관적이다 보니 현실과 책 내용을 따로 분리해서 읽지 못했다. 읽을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시간이 흘러 이렇게 포스팅을 남기다 보니까 그 씁쓸함이 더욱 부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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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름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1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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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작가가 후기에도 스스로 어느 정도 시인한 것처럼 <목마름>은 결과적으로 해리 홀레라는 캐릭터의 인기에 기댔을 뿐인 다소 소모적인 내용의 후속작에 불과했다. 애써 거머쥔 행복에 낯설어 하는 해리의 모습, 그럼에도 내심 자신의 활약이 절실한 사건을 기대하는 모습이나 약간의 잡음 끝에 소수 정예 수사 집단을 꾸리는 전개, 중간에 절망한 나머지 술에 손대는 전개와 골때리는 연쇄살인마의 등장, 복잡한 플롯, 흑막의 정체 등 모두 전편에서 마르고 닳도록 다룬 것들이다. 엄밀히 말하면 지난 10편의 작품에서 역대급으로 소화해냈기에 <목마름>은 이전의 성공 공식을 적절하게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피해자의 피를 마시는 흡혈귀 병에 걸린 살인마라는 설정과 더불어 사건을 목말라하는 해리의 모습을 연관 지어서 풀어낸 것은 개인적으로 식상함을 넘어 구태의연하게 느껴진 것, 해리를 제외한 이야기의 주역들의 빈자리를 꿰찬 새로운 캐릭터들의 매력이나 그들 사이의 케미도 눈길을 확 잡아끄는 구석이 없었던 것 모두 아쉽기만 했다. 이런 말을 하긴 싫지만 사실상 노르웨이를 배경으로 한 것을 제외하면 여느 서양 스릴러와 뭐가 다른지 참으로 짚어내기 어려웠다. 이 시리즈도 이젠 끗발이 다한 건가 싶었다. 특히 진범의 정체가 밝혀지는 연출이나 그의 동기 등이 이전의 범인들에 비해 너무 포스가 떨어져보이는 게 한숨이 다 나왔다. 내가 이 꼴을 보려고 700페이지를 읽은 건 아닌데 하면서. 


 그럼에도 후속작이 나오면 또 읽을 듯한데 그건 전적으로 작가의 후기의 덕이 크다. 소설을 쓰고 완성하는 것을 비행기 이륙과 착륙에 비유한 것과 이야기를 착륙시킨 동시에 새로운 이야기를 다시 이륙시키고 싶다고 말한 작가의 패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래도 그간 써온 게 있으니 후속작에선 다시 제대로 활약해주지 않을까 기대하게 되는데... 후속작이 출간되기까지 <맥베스>를 읽으면서 기다림을 달래야겠다. 과연 후속작은 그 기다림을 충족시킬 만한 작품이려나. 다음에도 실망스러우면 더 험한 말이 나올 것 같은데 제발 그런 일이 없길 바란다. 노르웨이에 직접 성지순례를 갔던 독자랍시고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걸까? 

당신의 소명이 여전히 당신 삶을 망치고 있습니까? 그게 곧 당신의 삶일지라도? - 37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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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건축으로 걷다, 스페인 - Spain Art Road
길정현 지음 / 제이앤제이제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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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스페인에 방문하고 싶은 이유가 한둘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미술과 건축 등 스페인의 예술을 직접 눈으로 경험하고 싶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이 책은 비교적 가벼운 문체로 이뤄졌으나 진솔하고 잡학다식한 면모가 다분한 작가의 여행기였는데 읽는 내내 충분한 사진과 특히 종교에 대한 제법 해박한 지식이 돋보였다. 간혹 단어로 끝을 맺는 번역투의 문장은 약간 거슬렸으나 전체적으로 부담 없이 읽혀 내려가 오히려 정보 습득이 잘 된 편인데 이는 가끔 각 잡고 쓴 전공서는 다 읽었는데도 내용의 반도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 문체를 다시 접하기 위해서라도 저자의 다른 책도 읽어볼 듯하다. 

 작가 본인은 예술 전공은 아니라고 미리 밝혀두지만 경험이 풍부해서 그런지 그래도 하나의 작품이나 어떤 작가에 대해 얘기할 때 꽤 많은 이야기를 쏟아낸다. 뭐, 여기까지야 그렇다 하더라도 작가가 또 종교인이라 그런지 내가 무심코 지나칠 법한 성당이나 벽화에 대해선 생각보다 자세히 서술하고 사유한다. 글을 써내려가기 전, 과연 이곳이 종교인이 아닌 분들에게 자신만큼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자문해보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줏대 없는 것만 아니라면 독자를 의식하는 글은 언제나 환영이다. 게다가 이런 솔직함은 작가의 글이 조금은 덜 전문적이더라도 왠지 더 신뢰하게 된다. 


 책에는 크게 바르셀로나로 대표되는 카탈루냐 지방, 마드리드와 그 근교를 다룬 카스티야 지방, 그라나다와 세비야를 아우르는 안달루시아 지방, 그리고 마지막의 스페인 식문화를 다뤘다. 식문화는 엄연히 미술과 건축은 아니므로 좀 튀는 감이 있으나 애당초 이 책을 여행기로 상정하고 읽은 만큼 유익한 정보로만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바르셀로나보다 마드리드가 더 궁금했는데, 마드리드는 수도치고 볼거리가 적다지만 내 관심사는 프라도 미술관,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 있으니 도시로서의 매력 어쩌구 저쩌구 하는 건 내겐 아무래도 좋을 일이다. 그리고 막상 가면 마드리드도 바르셀로나에 비해 임팩트가 좀 떨어져 보인다 뿐이지 엄청나게 매력적인 동네일 것이다. 

 아무튼 고야, 벨라스케스, 엘 그레코로 대표되는 스페인 중세 화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프라도 미술관,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감상할 수 있는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말고도 호아킨 소로야라는 스페인에서 흔치 않은 인상파 화가를 소개받은 것도 좋았는데, 이 책의 표지가 바로 그 소로야의 작품인 것 같다. 그의 작품이 소장된 소로야 미술관은 작은 미술관이라는데 그렇다니 더 궁금하다. 언젠가 찾아가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스페인에 카탈루냐, 카스티야, 안달루시아 지방만 있는 건 아닌데 미술, 건축으로 키워드를 한정 짓다 보니 발렌시아나 바스크 지방은 아예 다뤄지지 않았다. 키워드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일 테지만 아무튼 혹시 스페인의 모든 지방을 다루리라 생각한 분들이라면 이 점 참고하시길. 명심할 것은 이 책은 스페인의 이모저모가 아닌 어디까지나 작가가 직접 방문한 여행지에 관련해서 쓴 글들이 수록됐다는 것이다. 때문에 완벽한 글은 아닐지언정 현장감 넘치는 글로 탄생됐다. 

 난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싶었다. 오히려 직접 발로 밟지 않아서 알 수 있는 정보도 있다지만 여행기는 역시 현장감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여행이 고픈 나 같은 독자는 기대한 만큼의 대리 만족을 할 수 있었다. 미술관 내 촬영이 불가해서 작가가 사진으로 싣지 못한 몇몇 그림들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 그림들이야말로 직접 방문해서 봐야 할 일이지만 과연 그 날이 언제 올는지... 요번에 마드리드가 코로나로 아주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고 하니 향후 10년 안에 방문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거참 비관적이구만;; 

수많은 예술가들은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 또 영감을 받으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 많이 보고 많이 경험하는 것은 창작에, 더 나아가 삶에 좋은 자양분이 된다는 것, 이 또한 우리가 여행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142p



고야의 작품이 대단한 것은 맞으나 고야라는 인물 자체가 존경스러운 인물은 아닐 수도 있으며, 위대한 화가가 꼭 위대한 인간일 필요는 없다는 점을 알고는 있지만 우리는 은연중에 두 말이 동의어이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다. 유명한 연예인에게 바람직한 사생활을 기대하고 능력 있는 기업인은 인간성도 좋길 바라는 것처럼. 우리는 그들이 그들의 전문 분야에서뿐 아니라 그 외의 방면에서도 본받을 만한 인물이길 바라지만 사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며 그렇기에 고야도 그저 혼돈의 시대를 살아간 나약한 한 명의 인간이었을 뿐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보았다. - 147~1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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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리스본 안그라픽스의 ‘A’ 시리즈
알렉산드라 클로보우크 지음, 김진아 옮김 / 안그라픽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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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독일의 일러스트레이터 알렉산드라 클로보우크가 포르투갈 리스본에 1년 정도 살면서 그린 여행 에세이다. 아쉽게도 에세이치고 텍스트도 적고 내용도 이어지지 않아 리스본이란 도시의 매력은 희미하게 다가왔지만 그 빈틈을 그림으로 어느 정도 메꾼 듯하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의 낮은 평점이 나 역시 이해가 됐는데, 분량도 너무 짧고 실질적으로 내용이랄 만한 게 없어서 일러스트집을 보는 느낌도 들었다. 물론 그림은 감상할 가치가 충분했지만 전반적으로 전문 여행 에세이나 일러스트로는 밀도가 부족한 느낌도 없잖아 사서 읽기보단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것을 추천한다. 아니, 선 자리에서 후루룩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얇고 금방 금방 넘어간다. 

 코로나 이전에 포르투갈에 방문하는 연간 관광객이 2천 만 명이 넘었고 이는 그 나라 국민의 두 배에 달하는 숫자라는데, 지금은 다 옛말이 된 게 속상하다. 그 나라에 가고 싶은 내 입장에서나 그 나라 사람들 입장에서나 서로 왕래가 뚝 끊기는 것은 빈말로도 좋은 일이라 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책이 약간 염장 지르는 것처럼 느껴질 법도 하지만 작가의 그림이나 멘트에 담긴 행복함이 물씬 느껴져 잠시나마 이 시국을 잊을 수 있었던 것은 좋았다. 시국이 길어질수록 이런 책이 점점 더 소중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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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 (리커버 에디션, 양장)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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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3 






 스포일러 있음 


 한 경찰의 삶을 통해 바라본 홍콩의 다사다난한 역사, 범죄와의 전쟁사를 역순으로 되짚는 특이한 형식의 이 소설은 중화권 추리소설의 기수로서 국내 독자들에게 단단히 눈도장을 찍은 바 있다. 이 작품이 출간되고 5년이 넘은 지금 이 시점에서 찬호께이의 <13.67>만큼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중화권 추리소설은 못 들어본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만듦새나 깊이 면에서 작가의 작품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읽은 <망내인>도 만만찮게 인상적이었지만 그래도 이 작품과의 첫만남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13.67>에 더 정이 가는 것 같다. 

 최근 홍콩에 대해 공부할 일이 있었는데 문득 이 소설이 떠올라 다시 읽게 됐다. 이번엔 역순이 아닌 시간 순대로, 그러니까 6장부터 시작해 1장까지 읽기로 했다. 내 아이디의 출처인 <내 남자>도 역순으로 구성된 소설이라 다시 읽을 때 그렇게 읽어봤는데, 역순인 소설을 시간 순대로 다시 읽는 것도 은근히 재밌는 일이다. 한 번 시도해볼 것을 추천한다. 



 '빌려온 시간' 


 관전둬인 줄 알았던 화자가 알고 보니 1장의 범인인 왕관탕이고 아칠이란 별칭으로 불리는 경찰이 사실은 관전둬였다고 하는 서술 트릭이 가미된 에피소드. 개인적으로 폭탄 테러를 막는 이 둘의 고군분투보다 화자 왕관탕의 내면 묘사에 더 눈길이 갔다. 소시민이지만 나름대로 정의감도 있고 관전둬 못지않은 두뇌를 자랑하는 그였기에 먼 훗날에 배신할 예정인 형을 무시하고 관전둬를 따라 경찰이 됐더라면 어땠을까... 마치 데스노트를 줍지 않은 라이토가 키라 같은 건 꿈도 꾸지 않고 L과 호각을 이루는 탐정으로 거듭났으리란 <데스노트>의 오바 츠구미 작가의 말을 접했을 때와 비슷한 아쉬움이 들었다.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뒤틀릴 대로 뒤틀린 왕관탕의 미래가 다소 심란하게 다가왔다. 

 아칠, 그러니까 관전둬는 왕관탕에 밀려 날카로운 추리력을 선보이지 않지만 특유의 청렴함을 드러내는 장면, 그리고 왕관탕의 일갈에 의해 유연한 태도로 사건을 해결하리라 다짐했을 법한 일종의 계기가 드러난 게 인상적이었다.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지만 이후 에피소드에서의 가치관을 보면 그 사건이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보통의 인간이라면 자기 탓이 아니라고 넘길 법한데 관전둬라서 그 사건을 계기로 각성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뭐로 보나 딱히 관전둬에게 잘못은 없지만, 그럼에도 반성한 끝에 역사에 남을 경찰이 된 관전둬의 모습이 경이롭고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빌려온 공간' 


 개인적으로 가장 이질적이고 재밌던 에피소드였다. 과격 좌파 운동은 시들었지만 이번엔 경찰들의 부정부패로 골머리를 앓는 홍콩을 배경으로 한 흥미진진한 납치극을 그리고 있다. 납치극 자체만으로도 긴박감 넘쳤지만 납치극 이면의 반전이 어마어마했고 관전둬의 속내를 모르겠는 행동도 독자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어 이래저래 책장 넘기는 속도를 늦출 수 없는 에피소드였다. 비록 같은 경찰이지만 부정부패에 찌든 조직원을 척결하기 위해 책략을 펼친 관전둬의 심리 플레이가 빛을 발했다. 그나저나 이 에피소드의 화자인 그레이엄이 다른 에피소드에서 언급이 됐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일한 영국인 캐릭터인 만큼 그냥 단발성으로 등장하고 끝인 게 조금 서운했다. 그의 입을 통해 알게 된 홍콩이란 도시의 특수성이 무척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테미스의 천칭' 


 제목이나 주제의식이 너무 적나라해 오글거리는 면이 없잖았지만 관전둬의 호적수라 할 만한 부패 경찰 TT 덕에 제법 눈요깃거리가 됐다. 그가 마지막에 자살을 한 것이나 그에 대한 관전둬의 해석은 별로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관전둬가 TT의 계략을 간파하고 진노하는 부분이나 관전둬가 증거가 없어 상대의 코앞에서 패배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게 만든 TT의 활약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스씨 형제와 뤄샤오밍의 등장도 빼놓을 수 없겠다. 스토리의 외적인 부분에서 말하자면, 이 셋이 하마터면 TT의 손에 전원 몰살당할 수도 있었다는 게 가장 소름 끼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가장 긴 하루' 


 전편에서 관전둬가 공언한 대로 체포했던 스번톈의 탈주극을 다룬 이야기. 그와 맞물려 퇴직까지 하루도 남지 않은 관전둬가 아직 녹슬지 않은 천재 형사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이야기기도 했다. 제법 용의주도하고 육체의 고통도 기꺼이 감수하는 범죄자 스번텐을 자기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듯 손쉽게 갖고 노는 관전둬의 추리력이 가히 환상적이었다. 솔직히 말해 논리적인 추리긴 했으나 이 정도면 신의 경지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뤄샤오밍과 독자를 완전히 바보로 만드는 그의 두뇌 회전엔 정말이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풀이가 불가능한 문제를 만드는 것과 푸는 것 중에서 나는 당연히 만드는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에피소드를 보면 푸는 것이 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작가가 쓴 가공의 이야기니까 관전둬가 사건을 해결할 수 있던 것이지만 말이다. 



 '죄수의 도의' 


 본격적으로 법과 위법 사이를 넘나들며 범죄자들의 숨통을 조이는 관전둬의 수 싸움이 드러났던 에피소드다. 알고 보니 탕링은 죽지 않았다는 반전은 다소 작위적인 해피엔딩이 아닌가 싶었지만 앞서 에피소드에서 나름대로 시행착오를 겪은 관전둬였기에 오히려 이렇게 노련하게 범죄자들을 낚는다는 게 더 그럴싸한 전개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나저나 오히려 일선에서 물러났기에 더 물이 올랐고 더 정력적으로 경찰로서 움직이는 관전둬의 모습은 뤄샤오밍을 비롯한 후배 경찰들을 완전히 바보로 만드는 동시에 천재에게 퇴직은 있어선 안 된다는 걸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도 결국 한 사람의 인간이기에 합병증으로 인해 숨이 다한다는 게 가공의 인물임에도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흑과 백 사이의 진실' 


 안락의자 탐정이란 고전 추리소설의 클리셰를 비튼 반전과 전성기 때 관전둬에는 못 미치지만 그 못지않게 대담한 전략을 구사해 범인을, 즉 왕관탕을 체포하는 뤄샤오밍의 수 싸움 등 얘깃거리가 한둘이 아니지만, 이전에 말했듯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혹은 자신의 목숨을 유용하게 사용해 경찰의 본분을 다하는 관전둬의 마음가짐이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였다. 왕관탕과 처음 만났을 때 이상으로 청렴하며 왕관탕과 대비되게 올곧게 정의를 수호하는 관전둬의 자세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이 에피소드는 다른 에피소드에 비해 사회파적인 면모가 옅지만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정확히는 시간 순대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에피소드답게 가장 큰 울림을 안겨줬다. 

 원래 연출대로 역순으로 읽었을 땐 '빌려온 시간'이, 시간 순대로 읽으니 '흑과 백 사이의 진실'이 제일 묵직하게 다가온다. 중요한 건 어느 작품을 읽건 반드시 반대쪽으로 돌아와 다시 읽고 싶게 만든다는 것이다. 60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극과 극의 모습으로 변한 관전둬와 왕관탕 두 인물의 과거와 현재, 혹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다 보면 인생의 선택의 중요성과 그 선택에 개입하는 도시라는 공간의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왕관탕이 특별히 홍콩에서 나고 자랐기에 더 잔인무도한 인물이 된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아마 이 작품을 한 번 더 읽을 것 같은데 그때는 다시 원래 순서대로, 그리고 홍콩 여행 중에 읽으려고 한다. 이 작품 속의 홍콩과 실제 홍콩이란 도시를 실시간으로 비교하는 것이 제법 의미 있는 일일 것 같다. 그렇게 홍콩에 갈 수 있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5년 뒤엔 갈 수 있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홍콩 정세가 예전 같지 않은데 설령 코로나가 종식됐다 한들 이전에 사람들이 열광했던 그 홍콩만의 분위기가 여전할지 잘 모르겠다. 진작에 갈 걸 그랬구나... 

권력이란 원래 이런 것이다. 높은 사람은 이상과 신념, 재물로 유혹해 아랫사람이 목숨도 바치게 만든다. 인간은 위대한 목표를 위해서 사는 것보다 평온한 생활을 추구한다. 충분한 이유만 주어지면 기꺼이 노예나 종이 된다. 만약 내가 쑤쑹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그는 나에게 파시스트의 독에 물들었다고 열변을 토할 것이다. 위대한 당과 조국은 절대 그들과 같은 애국동포를 버리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기를 해도 좋다. 그들과 같은 보잘것없는 역할의 사람들은 그저 잊힐 뿐이다. 토사구팽, 토끼사냥이 끝나면 개를 삶아먹는 것은 천고불변의 이치다. - 587p



조직의 기강을 세우려면 상급자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게 철칙이지만, 이것만은 기억해야 해. 경찰의 진정한 임무는 시민을 보호하는 일이라는 것. 제도가 무고한 시민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정의를 표방하지 못한다면,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분명한 근거를 내세워서 경직된 제도에 대항해야 하네. - 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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