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의 캔버스
하라다 마하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7.8 





 


 직전에 <널 위한 문화예술>을 읽고 떠올라서 다시 읽게 된 작품이다. 다시 읽으니 이전과 달리 의외로 루소의 이야기가 평면적으로 느껴졌고 그 루소의 이야기를 읽는 팀과 오리에의 이야기에 더 애착이 갔다. 3년 전과 달리 지금은 미술에 관심이 지대해졌는데, 그런 나에게 이 작품에서의 루소 이야기는 퍽 기대에 못 미쳤다. 내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루소에 얽힌 사소한 미스터리를 파고드는 아트 미스터리를 표방함에도 흐지부지한 결말 탓에 추리소설다운 쾌감 역시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럼 루소를 향한 작가의 애정과 미술사과를 졸업하고 다수의 미술관에서 근무했던 작가의 전공이 유감없이 발휘돼 아쉬움이 무마됐느냐면, 그것도 그저 그랬다. 

 각각의 사명감을 안고서 반드시 루소의 미발표 작품 <꿈을 꾸었다>를 차지해야 하는 두 명의 루소 전문가 팀과 오리에는 <꿈을 꾸었다>가 과연 진작인지 위작인지를 놓고 대결을 펼치게 된다. 특이하게도 진작인가 위작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오직 그 그림을 가진 대부호가 제시하는 이야기, 루소가 주인공인 일곱 편의 이야기의 내용이라는데 팀과 오리에는 당황하면서도 자신들이 가장 흠모하는 '친구'인 루소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이미 루소가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았고 그 결말을 앎에도 둘은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결말에 이르러선 여러 복잡한 상황이 맞물린 탓에 누군가 승부의 향방을 흐리는 돌발 행동을 하게 되는데... 


 늦은 나이에 그림을 그린 탓에 기본기가 부족해 흔히 '그림 못 그리는 화가'라고, 또 세관원이기에 일요일에만 그림을 그려서 '일요화가'라는 멸칭으로 불린 루소는 작품의 주요 시간대인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사후 70년이 넘도록 인정을 받지 못했던 비운의 화가였다. 어떻게 보면 사후에 비교적 금세 유명세를 얻은 고흐보다 비참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놈의 기본기 부족을 트집 잡는 평단과 동료 화가들 때문에 강렬한 개성이 쉽게 인정받지 못했다. 지금이야 뉴욕의 모마MoMA에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와 함께 전시관 4층의 입구에 걸려있는 <꿈>을 그린 화가라며 꽤 인정을 받는 편이지만 불과 40년 전만 해도 세간의 평은 지금만 못했던 모양이다. 

 <낙원의 캔버스>는 루소의 작품이 어떻게 빛을 보게 됐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가상의 그림 <꿈을 꾸었다>로 하여금 루소의 삶을 살펴보는 이야기라 본질적으로 팬픽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말인즉슨 미술사적 지식이나 사실보다 루소에 대한 작가의 애정, 일종의 헌사에 초점이 맞춰져서 추리소설뿐 아니라 역사 소설적인 매력도 느끼기 힘들다. 작품 서두의 흡입력과 실제로 루소라는 화가가 뿜어내는 존재감을 떠올리면 전반적으로 중후반부는 기대에 보답하지 못했는데, 특히 루소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어쩐지 이야기의 흐름에 별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있고 실제로도 정말 그렇게 됐기에 허무하기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작가는 실존했던 화가인 루소와 피카소, 그리고 유명한 미술관들을 대거 등장시키는 만큼 나름대로 실제 역사를 과감히 등지는 시도를 하지 않은 듯한데, 오히려 작가가 미술 업계에 실제로 종사했었기에 집필이 소극적으로 이뤄진 것 같아 아쉽기 그지없다. 중반부부턴 여러 변수가 등장해 팀과 오리에가 <꿈을 꾸었다>의 미스터리를 풀어야 하는 동기가 변질된 것, 오리에가 조연으로 밀리면서 프롤로그에서의 존재감이 거의 사라진 것 등도 아쉬운 부분이었다. 주인공은 둘인데 왜 팀의 시선에서만 전개를 풀어나간 걸까? 프롤로그에서 들여다봤던 오리에의 내면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정작 소설 본편에서 별 활약다운 활약이나 존재감을 내비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이렇게 홀대하기엔 너무 아까운 캐릭터임을 에필로그에서 제대로 확신할 수 있었다. 물론 팀도 좋은 캐릭터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분량을 할애하기엔 오리에가 안쓰러웠다. 안 그래도 경력이 단절된 것도 서러운데... 

 내가 루소의 열렬한 팬이 아니라 그랬던 걸까? 루소의 이야기도 지루한 편이었는데 특히 루소가 이 작품에선 기구한 운명의 화가라는 것말곤 특별히 인상적인 내면이나 행동을 보이지 못하고 그저 예정된 수순대로 비참한 말년을 보내다 퇴장해버려서 팀과 오리에가 이 이야기를 읽고 동요를 보이는 것에 크게 공감이 가지 않았다. 단,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른 이러이러한 뒷이야기가 있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바람이 담긴 듯한 후반부의 전개는 미술에 관심이 좀 있는 사람으로서 눈길이 갔는데, 어디까지나 작가의 상상에 지나지 않음에도 어딘지 내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는 황당무계함과 별개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법이지만 이 작품의 경우엔 현실과 픽션 사이를 교묘히 파고들어 은근히 그럴싸한 리얼리티를 제공했다. 그리고 아마 실제로도 이런 식의 뒷이야기가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 그런대로 독특한 여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작가의 책 중에 <암막의 게르니카>라고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소재로 한 소설이 나왔다는데, 이 책이 아트 미스터리나 역사 소설적인 요소에 있어서는 미묘하고 실망스런 완성도를 보인 탓에 그 작품도 특별히 기대되지 않는다. 하지만 피카소라고 하니 읽지 않을 수가 없는데... 기대하지 않고 읽었다가 오히려 감동하게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모든 걸작은 상당한 추악함을 지니고 태어나는 법이다.

이 추악함은 창조자가 새로운 것을 새로운 방법으로 표현하기 위해 싸웠다는 증표다.

미를 거부하는 추악함이야말로 새로운 예술에게 허락된 ‘새로운 미‘다. - 183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널 위한 문화예술 - 미술관에서 길을 잃는 사람들을 위한 가장 친절한 예술 가이드
널 위한 문화예술 편집부 지음 / 웨일북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3 







 유튜브 채널 '널 위한 문화예술'의 구독자가 40만 명이라고 한다. 40만 명의 구독자 중 한 사람으로서 이 책의 출간이 반가웠는데, 책에는 과연 유튜브에서 다루지 않았던 내용을 다뤘을지 궁금해 예상보다 빨리 구입해 읽게 됐다. 다행히 유튜브에서와는 다른 이야기를 펼치긴 했지만 아쉽게도 영상이 아닌 활자로 하는 예술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밋밋하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감각적인 영상의 힘을 빌리지 못하니 아쉽게도 내용의 전문성이라든가 주제의식, 주제의식을 끌어내는 필력은 여러모로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글의 깊이에 대해 단적으로 말하자면 입문용 수준이라 정말로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추천하기 애매하다. 

 가령 좋아하는 화가가 나오는 파트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작가들이 다루는 이야기나 정보의 디테일은 '수박 겉 핥기'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내 기대에 턱없이 못 미쳐서 실망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내가 인상 깊게 읽은 파트는 그 화가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실망스러울 수도 있으리란 얘기다. 각 화가에게 할당된 분량은 매우 적은데 저자들이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거나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 싶은 내용 위주로 채워져서 오히려 너무 구색만 갖춘 건 아니냐며 별 감흥이 남지 않은 적도 있었다. 파트를 줄이고 분량을 더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여담으로 내가 실망한 파트는 뭉크와 클림트, 호쿠사이, 달리이고 인상 깊었던 파트는 얀 반 에이크, 젠틸레스키, 마티스, 쿠르베, 그리고 클로델이다. 


 기대가 큰 탓에 실망도 적잖았지만 그럼에도 소장 가치는 있는 책이었다. 그림이 많이 실렸기 때문도 있지만 중간에 스페셜 파트인 '색의 비밀' 코너가 제법 유익했기 때문이다. 파란색, 분홍색, 흰색, 보라색,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의 역사, 일화 등을 상세히 적은 게 흥미로웠는데 내용에 따라선 참고할 만한 그림이나 사진이 있었다면 더없이 유익한 글이 됐으리라 본다. 책에 컬러로 된 그림이 실릴수록 값이 올라가 최대한 아낀다고 아낀 듯한데, 색깔에 대한 이야기야말로 이 책이 아니면 쉽게 접할 수 없는 내용인 만큼 좀 더 정성을 다하지 않은 게 은근히 아쉬웠다. 

 개인적으로 저자들이 서두에서 '예술의 쓸모'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는 부분이 이 책에서 가장 얘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들이 너무 엉뚱한 부분에 에너지를 쏟는 것 같아 그들의 고민이 크게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예술의 쓸모'에 대한 고민인데... 물론 예술이 우리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는 것 자체는 매우 바람직하나 저런 고민을 한 계기인 '예술이 무슨 쓸모가 있냐'는 어떤 네티즌의 질문은 가볍게 넘겨도 무방하지 않은가 싶었다. 아니, 예술을 즐길 때 쓸모를 왜 따지는지? 예술과 쓸모는 본질적으로 공존할 수 없다고, 동전의 양면 같다고 생각하는 나로선 저런 어불성설의 질문은 질문이 아닌 트집으로만 여겨졌다. 


 예술은 경우에 따라선 시간 낭비일 수 있고 공허한 행위일 수 있고 심지어 무의미할 수 있지만 관점만 바꾸면 그것을 즐기게 되면 언젠가 자연스럽게 삶에 긍정적이든 때론 부정적이든 간접적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예술의 존재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쓸모 있는 예술이란 것을 의도한다면 만드는 사람은 완성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고 설령 완성한들 관객은 즐기고 싶어도 즐길 수 없을 것이다. 예술은 백 번 양보해서 말하자면 쓸모 있는 행위로 착각될 수 있을지언정 쓸모 있는 행위와는 거리가 있기에 그런 의도로 접근하면 만인에게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굳이 쓸모가 있다면 작품 활동으로 돈을 버는 예술가들에겐 예술의 쓸모란 것을 논할 수 있을 텐데 그 경우는 '예술의 쓸모'에 대한 답은 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요구하는 '예술의 쓸모'에 대한 답은 감상자 입장에서의 예술이니까. 

 우리는 예술이 우리 삶에 대단히 쓸모가 있길 바라며 즐기지 않는다. 내 경험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런 의도로 접근했다가 제대로 감상이 이뤄진 적이 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했다가 감동을 먹거나 깨달음을 얻거나 지식이 풍부해지는 경우는 훨씬 많아도 말이다. 순수하게 즐거움을 위한 접근이야말로 아이러니하게도 삶을 풍부하게 해주고 지혜를 더해준다고 보는데, 쓸모를 요구하는 순간부터 자세가 공격적으로 변해 결국 즐길 수 있는 예술이라곤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이란 게 내 지론이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고, 책에서 소개되는 예술의 창작 배경을 보면 대단히 혁명적인 의지에서 탄생된 경우도 적잖아 단순히 즐기기 위해서란 내 지론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감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위대한 작품은 '예술의 쓸모'를 요구하는 질문에 대한 훌륭한 답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예술의 종류나 의도나 사람들의 인식은 실로 다양해서 각각의 지론에는 그에 해당하는 적절한 답변이 있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아니 조금의 생각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명한 일이다. 그렇기에 내게 '예술의 쓸모' 운운하는 것이 질문이 아닌 단순한 트집에 불과하다 여겨진 것이다. 정말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질문하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빠져들 만한 예술을 찾았을 것이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예술에 선입견 때문에 접근을 꺼리는 것 같다. 하지만 예술엔 명확한 기준 같은 건 없고 실제로 예술이란 그 기준의 명확함을 흐린 괴짜 내지는 천재들 덕분에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즐겨져 왔다. 이 책의 제목이 그렇듯 이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을 위한 다양한 예술이 있다. 우린 그중 자신에게 맞는 예술을 찾아 나서야 할 텐데 그럴 생각은 않고 예술을 이렇다 저렇다 규정을 지으며 수동적으로 자세를 취하는 것은 참 답답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예술의 쓸모' 운운하며 트집을 잡는 것이야말로 정말 쓸모없는 행위가 아닌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모든 역주행의 아이콘이 그렇지 않을까요. 예술의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변할 뿐이지요. -74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9 







 영화로 한 번, 책으로만 두 번째 접하는 <침묵>이 이제 지겨울 법도 하지만, 워낙에 단순하면서도 울림이 큰 내용인 터라 쉽게 질리지 않는 것 같다. 여전히 주인공의 번민과 후반부에서의 마음가짐은 완전히 와 닿지 않지만... 아니 어쩌면 와 닿지 않기에 반복적으로 읽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배교를 했음에도 자신은 아직 진정으로 신을 배신하지 않았으며 자신만의 사랑을 실천한다는 결론은 속된 말로 '정신 승리'로 보일 수도 있으나, 절망에서 시작해 더 절망으로 끝나는 이 이야기를 끝없는 패배의 서사로 기억되지 않게끔 작가가 노력을 한 것 같아서... 내가 종교인이 아니라서 그런지 이런 작가의 모습이 참 끈질기구나 싶다가도 존경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종교인이기에 쓸 수 있는 한편으로 종교인이기에 쓰기 힘들었을 이 소설이 사람들에게 걸작으로 불리는 데엔 바로 이와 같은 논란의 결말 덕분이지 않을까 싶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전과 인상이 달라진 부분이 크게 두 가지 있었는데, 로드리고에게 전에 없이 인간적으로 느껴진 것과 그에게 배교를 이끌어내기 위해 갖은 수를 쓰는 일본인들이 유난히 가증스러웠던 것이다. 전에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지금도 여전히 종교인이 아니고 앞으로도 될 예정이 없기에 배교하는 심정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추측하지 모르겠지만, 종교를 말 그대로 종교가 아닌 단순히 '믿음'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니까 비로소 그 절망감이 얼마나 깊은지 한결 수월하게 이해됐다. 간단히 말해 나의 가치관을 부정하지 않으면 어마어마한 불이익을 안겨주겠다 으름장을 놓는 외부의 압박이 가해졌을 때 나라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겉으로 수긍한 척하겠는가 아니면 끝까지 버티겠는가. 전자의 자세야말로 현명할 테지만 사람은 비겁한 존재인 동시에 반발심 역시 지대한 터라 후자의 미련한 방식을 고집하기 마련이다. 설령 자신의 가치관이 객관적으로도 잘못됐다는 걸 스스로 인식하고 난 다음에도 그놈의 반발심 때문에 자기 입으로 '잘못했다'는 말을 내뱉는 걸 스스로 허락하지 못하는 듯하다. 실제로 그런 사람을 많이 봐왔고 나도 그랬기에 작중에서 로드리고가 배교를 미루는 모습이 특별히 독하게 여겨지지 않았고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인데 싶어 그가 전에 없이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스승이 극동의 땅 일본에서 배교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또 선교라는 찬란한 목표를 위해 로드리고는 일본으로 출항했다. 그는 일본에 도착한 직후까지도 자신에게 순교가 아닌 오직 스승처럼 배교하는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일본 막부는 기독교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박해할 수 있는지 노하우가 쌓인 터라 신부를 죽이는 것이 아닌 배교하는 전략을 취했는데 그러한 전략은 로드리고를 내부에서부터 뒤흔든다. 그리고 별다른 반전 없이 막부는 로드리고를 그의 스승과 마찬가지로 배교의 길을 걷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로드리고는 이미 일본에 온 직후부터 자신이 믿는 기독교와 일본인들의 기독교가 다르다는 것, 어쩌면 신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차가운 현실을 외면해왔다. 지금 자신이 순교를 고집하는 것은 똥고집에 불과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로드리고는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틴다. 자신이 배교하게 되면 정말로 자신의 노력과 신도들의 희생이 개죽음으로 전락해버리니까. 하지만, 자신이 배교하지 않으면 이미 배교를 한 일본인들마저 죽이겠다는 막부의 엄포와 스승 페레이라의 회유에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이미 그 전에 일본인들로부터 '너 같은 놈은 신부로 불릴 자격이 없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로드리고는 자포자기했던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일본인을 상대로 신부란 직함은 완전히 무의미하다는 걸 뼛속 깊이 깨달은 것인지도 모른다. 


 위의 감상은 단순히 로드리고를 변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만큼 당시 일본의 종교 박해가 너무나 가증스러운 탓에 나온 감상이다. 온갖 상식을 벗어난 방식으로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하고 신부에겐 배교 혹은 신자들의 죽음이라는 양자택일의 시련을 - 말이 시련이지 살아있는 지옥 - 선사하고 있으면서 자신들이 원치 않는 선택을 하는 신부에게 신부로 불릴 자격이 없다고 욕한다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지 않은가? 그러는 본인들은 인간으로 불릴 자격이 없다는 건 자각해본 적은 있는지? 이교도를 박해하는 것이 상식인 야만적인 시대니까 그러려니 하는 거지, 지금처럼 여러 종교가 혼재해도 특별히 문제다운 문제가 생기지 않는 걸 아는 현대의 사람으로서 기독교 박해에 이렇게 열심인 일본의 모습은 적어도 배교에 망설이는 로드리고보다 이해 불가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 딴에는 신부의 배교라는 최소한의 희생으로 기독교 박해라는 임무를 달성하려는 것인데 로드리고가 당최 비협조적이니 그들로선 그게 그렇게 못마땅했나 보다. 

 물론 신부에게 배교를 강요할 때 동원한 논리가 마냥 터무니없진 않았다. 결국 이런 극동의 땅에 선교를 하려는 것은 기독교도의 욕심에 불과한데 한낱 욕심에 눈이 멀어 죄없는 일본의 신자들에게 순교를 강요하느냐고 아픈 지점을 찌른다. 로드리고의 양심과 함께 오늘날에도 비판 받는 기독교의 약점을 거론한 것인데, 미지의 땅에서까지 선교를 하려는 것이나 순교야말로 사랑이며 목숨이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서의 배교도 배교라고 일축하는 기독교의 논리엔 고압적인 구석이 있어 내심 이들의 비판이 통쾌했다. 나는 종교가 없음에도 종교를 자기 수양의 일환으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 천국에 가기 위해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갈 만큼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믿는 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 선교나 순교나 배교에 대한 기독교의 개념은 너무 권위주의와 선민사상에 찌든 감이 있다고 보는 터라 퍽 공감이 갔다. 그런데 이는 정말로 종교인이 아니니까 할 수 있는 망측한 발언에 불과한 것일까? 


 <침묵>이 종교소설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열광한 이유는 기독교의 약점이나 모순을 작가가 종교인의 입장에서 열거한다는 것에 있다. 신자들의 개죽음을 순교로 미화시키는 것, 신의 가르침을 퍼뜨리기 위해 다른 나라 땅을 헤집는다는 것, 어떤 순간에도 배교는 배교일 뿐이라며 종교라는 절대적 권위의 실추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관점만 바꾸면 쉽게 인식할 수 있는 모순일 터다. 이런 모순을 엔도 슈사쿠는 종교인으로서 외면하지 않고 정말 이대로 둬도 될 만큼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인가 질문하는 게 종교인이 아닌 독자의 눈에도 경이롭게 비쳐졌다. 여러 면에서 대단한 소설이지만 독자들에게 질문과 대화를 이끌어낸다는 점만으로 걸작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라 생각됐다. 

 결말에서 로드리고가 배교를 했음에도, 새로운 사랑 운운하며 일본인들이 정신 승리하지 말라고 비웃는 장면이 절망적이기 이를 데 없으나 비참하게 읽히지 않았다. 기존의 딱딱한 기독교의 교리만으론 이 세상의 복잡한 이치를 다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음을 너무나 잘 풀어낸 작품의 내용의 덕이 크다고 본다. 한마디로 기독교가 얼마나 믿음직한 종교고 반대로 기독교의 교리가 얼마나 모순됐는가 유무와는 가장 무관한 결말인 것 같다는 게 지금의 나로서 내릴 수 있는 제일 진심 어린 감상이다. 아니, 다른 걸 떠나서 종교인이 아님에도 계속 이 소설을 찾아 읽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이 소설이 진정 걸작이란 증거는 아닌지... 요번에 책을 읽는 내내 한 생각이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이렇게 말하겠지요. 그들의 죽음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그들의 죽음은 결국 교회의 기초가 되는 돌이 된 거라고.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시련은 결코 주시지 않는다고.

(중략) 저도 물론 그런 것은 백 번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도 왜 이런 비애의 감정이 가슴 밑바닥에 남는 것일까요? 어째서 기둥에 묶인 모키치가 숨이 끊어질 듯이 불렀다는 노래가 이렇게 고통스러움으로 머리에 되살아오는 것일까요? - 94p



가령 아내에게 배신당한 남편을 상상하면 알 수 있지. 그는 아직 아내를 계속 사랑하고 있어. 그러나 아내가 자신을 배반한 것 자체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야.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그 배신행위에 혐오를 느끼는 남편의 기분, 그것이 그리스도가 유다에게 가진 마음이었을 거야. - 118p



죄란, 인간이 또 한 인간의 인생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거기에 남긴 흔적을 망각하는 데 있었다. - 136p



그렇지만 제게도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밟은 자에게도 밟은 자로서의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제가 즐거워서 밟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밟은 이 발은 아픕니다, 아파요. 나를 약한 자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강한 자 흉내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건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건 억지이고말고요. - 177p



인간들을 위해 유익하게 소용된다는 것은 성직자들의 단 한 가지 염원이며 꿈이다. 신부들의 고독이란 자신이 타인을 위해 무익할 때다. - 224p



강한 자도 약한 자도 없는 거요. 강한 자보다 약한 자가 고통스럽지 않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소. - 294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수저 Silver Spoon 15 - 완결
아라카와 히로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20년 9월
평점 :
품절


9.9 






 제목에 '은'이 들어가서 작가의 데뷔작인 <강철의 연금술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 여긴 사람이라면, 이 작품이 농업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성장물이란 것에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데뷔작에서 보인 아라카와 히로무의 스토리텔링과 또 그 작가가 농고를 졸업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이 작품 역시 <강철~> 못지않은 역작이리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배틀물이 인기를 끄는 국내 만화 독자들의 성향상, 또 '그래봤자 전문고'란 인식이 강한 우리나라의 통념 때문인지 대단히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나는 <은수저>가 호불호는 갈릴지언정 <강철의 연금술사>와 함께 아라카와 히로무의 대표작이라 꼽을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후반부의 연재가 급격히 느려진 탓에 관심이 시들해져 이 작품이 완결이 났는지도 모른 채 지냈었다. 작가가 태만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족들이 병을 심각하게 앓아서 도저히 연재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는데, 전작 때는 출산을 하고서도 연재를 했을 정도의 프로 의식을 가진 작가이니 가족들의 병세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다행히 가족분들의 병세가 호전됐다고 하고 작품도 다소 급작스러긴 해도 괜찮게 매듭이 지어져 긴 시간, 거의 10년 가까이 읽은 보람과 감동을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작품은 크게 농고에서 농업의 즐거움과 현실적인 어려움을 알아가는 평범한 중학생 하치켄의 컬쳐 쇼크와 입시에 좌절해 자존감을 잃은 하치켄이 농고에서의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 이렇게 두 갈래로 나눠서 볼 수 있다. 전자에선 어딘지 하찮은 일로도 인식되는 농업의 숭고함과 농업 종사자들에 대한 경외감, 아울러 '경제동물'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인간에게 철저히 착취당하는 가축들에 대한 겸허함을 배울 수 있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육식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것엔 모두 농업 종사자분들의 노고 덕분임을 나는 은연중에 간과하며 살아온 것 같다. 이건 정말이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라는 소설을 통해 육식이 매우 잔인한 행위임을 실감할 수 있었는데 <은수저>에선 인간의 육식 욕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잔인한 '시스템'을 갖추게 만들었으며 그 시스템은 단순히 '동물들이 불쌍해서 채식주의자가 되겠다'는 마음가짐으로는 타파할 수 없음을 진지하게 살펴본다. 육식을 향한 인간의 욕구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서 가축을 마구잡이로 착취해도 문제가 없는지, 과연 가축들이나 파는 사람이나 먹는 사람 모두에게 괜찮은 대안이 있긴 한 것인지... 그 답을 이 작품이라고 시원하게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인상적인 점이 있다면, 어차피 가축을 잡아먹을 거면서 감정 이입하고 의미 부여하는 것은 무의미할 수 있음을 전제로 깔되 끈질기게 고민을 멈추지 않는 주인공 하치켄의 모습이었다. 학교에서 유일하게 비농가 출신인 하치켄이기에 자신이 기른 가축을 잡아먹는 비정한 시스템에 이토록 진지하게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일 터다. 


 하치켄은 지나치게 엄격한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하치켄의 아버지가 후반부부터 알게 모르게 미화된 것 같아 읽으면서 기분이 언짢았다. 좋은 어른이란 건 부정하지 않겠다만 결코 좋은 부모는 아니니까. 하치켄이 더 유약했으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 자존감을 상실할 대로 상실한 채 농고에 입학했다. 자신은 입시에 실패해 도망쳤다며 자포자기한 하치켄은 그 이질적인 출신 때문에 농고의 분위기, 농가 자녀들과 전혀 다른 가치관을 선보인다. 그 가치관은 농고에 낯선 일반 독자들의 입장을 대변해주는데, 겨우 고등학생 주제에 인생 끝났다는 듯 무기력한 하치켄은 처음엔 농고에서 적응하지 못했지만 차츰 그간의 일상에서 겪지 못한 자극 덕분에 생각 이상으로 본래의 성격, 자신감 등을 되찾는다. 누군가 하치켄에게 한 말처럼 하치켄은 '가축과 달리 살기 위한 도망을 친' 보람을 얻은 것이었다. 

 하치켄의 농고 입학이 그의 인생에 아주 긍정적인 전환점이 됐음을 강조하는 그 말은 비록 가축에겐 큰 실례일 순 있으나 그 말 그대로 가축과 함께 하는 고등학교 생활을 보내고 있는 하치켄에게 있어서는 최고로 실감할 수 있는 격려였을 것이다. 우리들 인간에게 도망이란 무조건 나쁜 것이라 여기지만 결코 그렇지 않거니와 오히려 도망을 쳤기에 배울 수 있는 것도 있다. 단적으로 말해 하치켄이 농고에 입학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테니까. 필요로 해서 대학을 가는 것이 아닌 그냥 가야 하니까 기계처럼 공부했을 테고 그랬으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멘탈 붕괴에 직면하게 됐겠지. 


 농업 이야기나 하치켄의 성장담 말고도 개성적인 친구들과의 케미, 지속적이고도 군침 나는 먹방, 승마부 에피소드에서 펼쳐지는 학원 스포츠물의 쾌감, 홋카이도라는 매력적인 배경, 그리고 미카게와의 연애 이야기가 가슴 설레게 읽혔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제목인 '은수저'의 의미를 중점적으로 얘기하고 싶다. 은수저의 의미는 간단히 말해 자기 자식을 굶기지 않게 하기 위한 마음에서 주는 부모의 선물이라는데, 그걸 선물하기 위한 부모의 마음이나 그 부모의 마음을 받드는 은장인의 솜씨가 결실을 맺은 결과물이라는 은수저엔 단순한 장식물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을 터다. 과거에서부터 나를 위해 이어져 온 마음을 소중히 여기며 써나가는 이미지가 은수저라는 물건에 녹아들었는데, 성장물이 자칫 주제의식이 추상적이거나 식상하게 강조된다는 걸 생각하면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이야기의 내용이 구체적이면서 여운 있게 다가와서 마음에 들었다. 

 <강철~> 때도 느꼈지만 아라카와 히로무는 정말 만화를 그릴 줄 아는 작가다. 완벽한 동선과 완급을 자랑하는 전개나 개성 만점 캐릭터들, 농업 학교라는 전문성을 제대로 살린 - 농업의 음과 양을 함께 조명한 것은 특히 좋았다. - 것이나 요번에 새로 도전했을 스포츠물, 러브 코미디도 능숙하게 소화해 감격하고 또 감격하며 읽었다. 전작과의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악인이 없다는 것인데, 유일하게 비판할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을 하치켄의 아버지도 그 나름대로 본받을 만한 부성애가 있음이 비쳐져서 - 그놈의 엄격함만 내려놓았더라면 참 좋았겠지만. - 전반적으로 현실적이되 따뜻함이 넘쳐났다. 여러모로 힐링물의 성격을 띄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힐링물의 약점인 감정 과잉 같은 무리수가 없어서 그야말로 완벽한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세상에, 얘기하면 얘기할수록 이 작가를 계속 찬양하게 되는 것 같다. 

어떤 일이든, 그걸 이루든 못 이루든... 꿈을 갖는다는 건 동시에 현실과 싸울 것을 각오하는 거라고 생각한단다. - 1권 6화 봄 이야기 6



도망칠 곳이 없는 경제동물들과 자네들은 다르니까, 살기 위한 도망은 있을 수 있지. - 4권 34화 가을 이야기 3



꿈이 있는 사람에게나 없는 사람에게나 평등하게. 은수저의 마음은 여러분을 위해 있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것을 마음껏 사용하세요. 다만, 은은 닦지 않으면 금세 변색한답니다! - 11권 96화 겨울 이야기 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귀여우니까 괜찮아 이타카
김이환 지음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9.1 






 서울에서 귀여운 걸 다섯 가지를 찾아오라고 천사에게 명령하는 조물주, 만약 다섯 가지가 없으면 어떡하느냐는 천사의 질문에 조물주는 그럼 서울은 가치가 없는 곳이라고 딱 잘라 말한다. 설마 서울도 없애버리는 걸까 반신반의하는 천사는 어찌 됐든 간에 명령을 수행하러 떠난다. 때는 2010년대의 서울로 귀여움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던 서울이었다. 물론 지금 서울이라고 그때보다 귀여운 것이 많다는 건 아니지만... 

 어딘지 나사 빠진 제목과 설정을 내세운 것과 달리 그 당시 정권에 대한 비판의식이 그득한 작품임에도 여러모로 판타지한 색채 덕에 무겁게 읽히지 않는다. 대놓고 작위적이면서 일도 수월하게 풀리는 작가와 만화가 콤비라든가 코미디 전문 방송국이라든가 조류가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을 꿈꾸는 비둘기라든가 슈퍼맨 활동을 비밀리에 하고 있는 슈퍼맨 협회라든가 엄연히 무생물임에도 의지를 갖고 지구 절반 가까이를 헤엄쳤던 오리 인형 등 환상적이고 귀여운 존재들이 끊임없이 등장해 일단 지루하지 않았다. 썰렁한 개그나 언뜻 의미가 와 닿지 않는 난잡한 전개나 은유가 발목을 붙잡았지만 전반적으로 가독성과 결말이 좋은 작품이었다. 가독성은 워낙에 장면 전환을 많이 해서 무난하게 확보했고 결말의 경우엔 뻔하지만 연출이 좋아 마음이 갔다. 


 이 작품을 다시 읽으니 오리 인형 에피소드가 특히 마음에 들었는데, 마치 동화처럼 몇 년 간 바다를 떠돌아다닌 오리 인형의 여정이 실로 파란만장해 작품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대관절 이 오리 인형의 에피소드가 이야기 속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지도 모르겠으나 홍콩으로 가던 배가 침몰해 다 같이 바다를 조류하게 된 오리 인형들이 바다가 이끄는 대로 흘러가다 다시 영국에 도착했더라는 얘기는 신비롭고 감동적이고 귀여웠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오리 인형 이야기는 실화라던데, 정확히 무슨 연유인지 드러나지 않지만 작가는 이 오리 인형에게 서울이 조물주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게 되는 결정적 역할을 부여했다. 

 작가의 의도를 미뤄 짐작해봤을 때 한낱 귀여운 오리 인형에도 불구하고 바다에 가라앉지 않고 고향(?)을 찾아간 불굴의 의지와 놀라운 운명이 신을 감탄케 했다는 맥락에서 그러한 결말을 택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난 오리 인형을 귀여워 하는 작가의 시선이야말로 귀엽게 느껴졌는데, 어쩌면 조물주도 서울에 다시 기회를 준 이유가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까놓고 말해 오리 인형이 무슨 일을 겪었든 그건 그냥 오리 인형이 파란만장하게 바다를 떠돈 일에 불과한데, 그 일화에 의미를 부여하고 상상을 불어넣는 인간의 모습은 모든 것을 알고 세상을 관장하는 조물주의 입장에서 퍽 귀여워 보였을 것도 같다. 


 최근에 읽은 <사신 치바>라는 소설에서 사신인 치바는 인간은 모든 일에 자기 인생을 대입하며 저 혼자 깨달음을 얻고 침울해 한다는 식의 문장이 나왔었는데, 객관적으로 자신과 무관한 일이더라도 그 안에 의미를 찾아보려 하고 이야기하려 한다는 건 인간 외의 존재가 봤을 때 정말 이상하고 독특한 인간만의 특성인 듯했다. 물론 그렇게 부여하거나 발견해낸 의미, 깨달음은 즉흥적이었던 만큼 금방 잊혀지지만 우리가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마음을 되새긴다는 게 한편으론 몹시 바람직한 일이지 않은가 싶었다. 

 그런 인간의 특성은 조물주로 하여금 그래도 기특하고 발전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는지 기회를 준 것인지 모른다. 설마 작가가 이런 마인드로 결말을 짜진 않았겠으나, '귀여운 것이 세상을 구한다!'는 책의 소개 문구를 직역해보면 세상만사에 의미를 발견해내는 인간의 모습이 세상을 구할 수 있지 않은가 싶어 자꾸만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그나저나, 작가 입장에선 자신이 쓴 글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독자가 귀여워 보이려나? 마치 조물주가 인간을 바라볼 때처럼? 

모두가 놀리고 싶어하는 사람을 놀리는 건 코미디가 아니야. 그건 풍자가 아니라 아첨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그런 코미디에는 고통이 있을 뿐이지. - 19p



나라를 망치는 건 사람들이죠. 나라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지 예언이 모인 것이 아니니까요. - 147p



사람은 조물주와 달라서 모든 일을 다 알진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지 못할 일이 일어나더라도 기뻐하고 행복해할 줄은 알았다. - 295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