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일간의 남미 일주
최민석 지음 / 해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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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제목 그대로 소설가 최민석의 40일간의 남미 일주를 그린 이 여행 에세이는 지금 같은 시국엔 부러움을 넘어 질투를 유발할 뿐이었다. 글감을 위해 여행을 떠날 수도 있던 지난날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한껏 풍겨 잠깐이나마 지금 시국의 분위기를 잊을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게 있다면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코로나 한참 이전에 작성됐지만, 책 자체는 한창 코로나가 터지고 난 뒤란 것인데, 이 두 시기의 극명한 차이를 작가가 강조하며 지난날을 그리워하거나 추억하는 어조가 들어갔으면 어땠을까 싶다. 보아하니 여행을 꽤 좋아하는 작가인 것 같은데,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읽었을 때도 느낀 거지만 이런 여행을 좋아하는 작가들이 코로나로 인해 여행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시국을 어떻게 여길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작가가 후기에서 밝히듯 사실 이 책은 '일주'라고 부르기엔 남미를 수박 겉 핥기 수준으로 다녀온 감이 없잖다. 40일이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지만 가는 데만 이틀 가까이 걸리는 남미인 데다 거리가 거리인 지라 두 번 가기 힘든 만큼 40일은 고작 40일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겠다. 작가는 위트 있게 사전에 있는 여러 해석을 뒤지고 뒤져서 비록 자신이 40일밖에 다녀오지 않았지만 이동한 동선이나 비행기로 그 위를 날아간 동선을 합치면 일단 일주는 했다면서 여행의 마무리로 인한 아쉬움을 달래는 듯했다. 특히 여행 막바지에 이렇게나 일이 꼬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대환장 파티가 펼쳐졌는데 이를 유쾌하게 받아들이며 정신 승리하는 작가의 마음가짐이 참으로 부러웠다. 


 보통 해외 여행은 돈이 많이 들어가는 만큼 기껏 멀리 갔는데 일정이 잘 풀리지 않거나 막상 갔는데 기대에 못 미치면 소위 말하는 가성비가 떨어진단 생각에 내가 괜히 시간과 돈을 들여 이 고생을 하면서 왔나 하고 한껏 비관주의에 빠져들기 마련이다. 여행지에 대한 기대가 크면 클수록, 이 여행을 위해 잠시 거리를 둔 현실의 고달픔이 더욱 고달플수록 여행의 힘듦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어진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부러웠던 건 작가 스스로 말하길 본인이 안 풀리는 작가라지만 어쨌든 등단하고 일거리가 끊이지 않는 작가라는 것, 무려 40일간 남미의 여섯 나라를 방문한 것보다 여행지에서 작가가 보인 대범한 모습인지 모르겠다. 내가 사는 동안 남미 중 어느 곳이라도 방문해볼 수 있을까 싶지만, 만약 간다면 이 작가처럼 설렁설렁 다닐 수 있을까? 나라면 배탈이 난 시점에서 여행 중에 이 무슨 추태냐며 자괴감에 빠졌을 것이다. 

 멕시코, 콜롬비아,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총 여섯 나라 중 개인적으로 나도 언젠가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곳은 페루의 리마와 쿠스코,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였다. 작가의 묘사에 따르면 리마는 해안 절벽 끄트머리에 세워진 기이한 도시고, 쿠스코는 남미의 스페인 식민지였던 국가 중 유일하게 스페인이 정복하지 못한 최후의 요새라 원주민이 많이 사는 이색적인 도시고,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스페인어로 '좋은 분위기'인 것처럼 탱고와 낭만이 넘치는 도시인 것 같아 직접 방문해보고 싶어졌다. 누가 소설가 아니랄까봐 여행기치고 사진이 많지 않았는데,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유명 관광지가 아닌 숙소와 일반적인 카페나 바, 심지어 거리나 택시에서 보고 들은 에피소드를 주로 썼기에 여행지로서의 피상적인 모습이 아닌 실제로 사람이 사는 공간임을 엿볼 수 있어 어딘지 새롭게 읽혔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너무 전형적이지 않은 전개로 여행기가 진행되다 보니 눈길을 확 잡아끄는 맛이 없고, 대부분 숙소에서의 황당한 에피소드나 배탈이 나 약국을 들락거린 에피소드인 지라 실질적인 여행 정보를 얻기엔 부족함이 있는 여행기였다. 간간이 그 나라의 역사나 상식, 그 나라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대해 설명하지만 그것도 체계적이고 주기적으로 나오는 게 아닌 터라 전반적으로 가독성이 뒤로 갈수록 떨어지는 편이었다. 대체로 글에 설명이 너무 많으면 가독성이 떨어지는 법이지만 설명이 너무 적어도 가독성이 떨어지긴 마찬가지란 건 간만에 느꼈다. 작가의 다른 여행기 <베를린 일기>는 어떠려나? 

 기대가 큰 탓이었는지 생각보다 남미의 이모저모보단 작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더 잘 기억에 남았던, 나름대로 독특하다면 독특했던 여행기였다. 어쨌든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여행기나 소설도 궁금해졌다. 작가는 스스로 잘 안 풀리는 작가라고 했지만 이렇게 긴 여행을 갈 수 있을 정도면 벌이가 그렇게 시원찮은 건 아닌 것 같다. 글을 써서 여행 경비를 마련하고, 게다가 다음 글감을 얻으라면서 본의 아니게 여행을 권할 만한 편집자가 붙을 정도니 자조하듯 말한 것에 비해 번듯하고 능력이 출중한 작가가 아닐까 싶다. 뭐, 다른 책도 직접 읽어봐야 알 일일 테지만 말이다. 

왜 이런 작가들이 변기를 전시했던 마르셀 뒤샹 이름의 ‘ㅁ‘자만큼도 안 알려졌을까.

슬프지만, 뉴욕 태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런던 출신이 아니고, 파리 출신이 아니고, 미국인이 아니고, 유럽인이 아니고, 멕시코인으로 태어나 여전히 멕시코인으로서 멕시코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한국에서 소설가로 살아가는 나로서는 제1세계로만 편중된 예술 시장의 관심을 한탄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 미술관에서의 경험은 오히려 더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을 내게 때리듯 알려줬다. 이처럼 훌륭한 예술가들도 알려지지 않았는데, 나는 이들에 훨씬 못 미치지 않는가. - 49~50p



선생님. 오늘도 정신 승리 하신 거예요?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오늘은 진심입니다. 이런 자세로 지내면 어디에서도 지낼 만할 것 같아서요.

정신 승리 맞네요. - 298p



실은, 이게 지난 10년간 내가 작가로서 해온 것이다. 항상 수평선을 향해 간다고 여기고 한 발씩 내디뎠는데, 언제나 제자리였다. 수평선 부근에는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햇빛을 즐기며 여유롭게 ‘물 위에 떠 있는 삶‘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관념에서 헤어나와 주변을 보니, 정작 파도에 맞서서 앞으로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녀노소 모두가 파도의 힘 탓에 제 몸이 백사장까지 떠밀려 오는 걸 즐기고 있었다. - 390~39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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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하는 지성, 고야
박홍규 지음 / 푸른들녘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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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고야를 수식하는 말은 많다. 대표적으로 괴물을 그린 화가, 시대의 어둠을 그린 화가이며 몇몇 사람들에겐 시대의 어둠을 그리긴 했으나 자신의 안위를 생각해 불이익을 받지 않을 시점, 그러니까 사건이 다 끝난 다음에 뒷북치는 비겁하면서 평범하디 평범한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내가 봤을 땐 고야는 인맥 관리가 매우 출중한 사람이다. 그가 당대 사람 중에서 유난히 천수를 누렸던 것도 - 청각도 잃고 말년은 쓸쓸했지만 - 자기 관리가 철저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종교 재판에 회부돼 몇 번이고 처형당할 뻔했으나 자신을 지지해주는 후원자 덕분에 비극을 면한 걸 보면 이 사람의 인망까진 아니더라도 인맥의 중요함을 엿볼 수 있다. 애당초 이 사람은 궁정 화가다. 제아무리 반항적인 심상의 소유자였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정치력이 없었다면 진즉에 낙오돼 훗날 역사의 한 획을 긋는 그림들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클림트와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처음 사람들에게 인정 받을 땐 주류에 통할 만한 가장 대중적인 화풍을 가졌으나 정작 그들의 대표작은 그렇게 명성을 얻고 나름대로 자신의 의지를 자유롭게 관철할 수 있게 된 다음에 탄생하게 됐다는 점이 특히 말이다. 예술가에게 있어 자신의 스타일이 처음부터 대중에게 사랑받으며 작품 활동을 승승장구 이어나가는 것처럼 바라 마지않는 일은 없겠으나 냉정하게 말하면 꿈 속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원인과 결과를 다르게 해석한 것이지만... - 고야나 클림트나 철저히 계획해서 대중적인 그림으로 커리어를 쌓은 게 아니라 새로움을 추구하다 오늘날에 알려진 대표작을 그리게 된 것이니까. - 아무튼 고야는 대기만성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대표작들을 말년에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걸까, 이 책 <저항하는 지성, 고야>는 초반보다 단연 후반부가 더욱 흥미롭게 읽혔다. 


 초반엔 뜬금없이 스페인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다가 고야의 생애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 부분은 너무나 지루했다. 이전에 <두 개의 스페인>을 읽어서 새롭게 읽히는 내용이 없었다. 하지만 지루할지언정 중요한 부분이었다. 고야만큼 스페인의 역사와 따로 놓고 볼 수 있는 화가는 또 없으니까. 격변의 시기의 스페인을 고스란히 겪은 고야는 그야말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몰락을 온몸으로 체험했으니 시간을 들여 스페인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짚어볼 필요가 있었다. 고야가 대단히 대중과 소통하며 사회 비판적인 그림이나 삽화를 그렸는지는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완벽히 와 닿지 않았지만, 적어도 고야가 스페인 왕실의 이중성과 무능함을 가까이서 봐온 인물인 만큼 그처럼 신랄한 비판을 그림 속에 녹여내는 게 가능했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고야가 살아온 당대 스페인의 역사가 흥미진진한 것에 비해 고야의 생애 자체는 큰 고락 없이 심심하게 비쳐졌다. 고흐나 내가 좋아하는 뭉크, 아니면 외설적인 그림을 그린 혐의로 철창 신세를 질 뻔한 후배 화가 쉴레에 비하면 생애 전반적으로 부와 명예를 골고루 얻은 풍족한 삶을 산 화가라고 생각한다. 스페인을 비롯해 이베리아 반도 전체가 프랑스에 의해 초토화됐을 때 보인 행보가 이른바 친프랑스적인 인물이라 해석될 여지도 있기에 마냥 긍정적인 면모만 있는 인물도 아닌 것 같다. 서두에서 말했듯 기회주의자 내지는 인간적인 인물인 것 같아 괴물보다 평범하디 평범한 인간에 가깝지 않나 싶다. 이런 평범함이야말로 후대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측면도 있지만, 그래도 평범한 면모 때문에 작가가 '저항하는 지성'이라 치켜세우는 것이 그렇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저항하는 지성'이란 것도 후대의 해석일 뿐 정말 고야가 당시에 그림으로써 대단한 변혁을 추구했던 건 아닌 것 같으니까. 


 저자의 이름은 익히 들어왔고 꽤 다방면에서 저술 활동을 펼치는 사람인 것도 알고 있지만, 이 책의 경우 저자가 고야의 생애를 되짚어 가기 보단 저자가 결론을 마음 속에 정한 뒤 자문자답하듯 확신하는 문체 때문에 - 그렇다 보니 고야를 다룬 홋타 요시에의 책의 내용을 수시로 비판하던데, 비판의 내용은 몰라도 비판의 양은 좀 과한 감이 있었다. 어쩐지 그 책도 읽고 싶어졌다. - 글의 내용이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 화가의 생을 다룬 책이 대개 그런 법이지만 작가도 책에서 고야의 생애 순간 순간을 너무 과대 해석하며 오늘날 우리가 고야의 생애를 봐야 할 이유를 계속 강조한다. 

 하지만 정작 강조한 것만 기억이 나지 왜 강조를 했는지는 별로 기억에 남지 않았다.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특정 구절에선 이 작가가 깨시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독자들을 내려다보는 뉘앙스도 어렴풋이 받아 다루는 내용에 비해 호감이 가지 않았는데... 이런 경우가 전에도 있었던가? 흔치 않은 경우라 어떤 의미에선 신선하기까지 했다. 참으로 달갑지 않은 신선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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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안의 작은 새
가노 도모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노블마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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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8.5 







 거의 10년 만에 다시 읽은 가노 도모코의 일상 추리소설이다. 개인적으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이자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유리기린>보다 더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 아마 10년 전에 읽었을 적엔 '내 마음대로 뽑는 최고로 재밌게 읽은 일본 추리소설 best 20' 중에 한 작품으로 꼽은 것으로 기억한다. 시간이 흘러 다시 읽으니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일상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겐 숨은 보석 같은 작품일 것이라 생각한다. 일단 여자 주인공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이야기의 전반적인 분위기, 수록작들 모두가 이야기에 깊이가 있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추리의 질과 반전의 놀라움이 매우 뛰어나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일상 추리소설의 미스터리의 농도나 질을 얕잡아 보는 것 같은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늘 느끼지만 일상을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처럼 핏빛 범죄가 동원되지 않는 사건을 다루는 내용일수록 순수한 추리의 힘이 더욱 빛나는 것 같다. 분석해보자면 일상 추리소설은 아마 대개 앉은 자리에서 이야길 듣는 것만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안락의자 탐정물이며, 피비린내 나는 사건을 다루지 않는 장르의 특성상 경찰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래서 탐정역을 맡은 주인공은 경찰의 도움 없이 혼자서 두뇌의 힘을 발휘해 사건의 내막을 밝혀낸다는 점에서 더 경이롭지 않나 싶다. 


 수록작 중에 가장 재밌었던 건 세 번째 수록작 '자전거 도둑'이고 나머지 수록작은 각기 다른 이유로 조금씩 아쉬웠다. '사랑스럽고도 강인한 여성에게' 라는 서두에서처럼 페미니즘적으로 의미가 있는 수록작도 있었고 장래의 진로를 걱정하거나 꿈이 좌절됐거나 하는 어둡고 탄식을 자아내는 사정을 다루면서 보다 문학성에 치중된 느낌이 없잖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경향이 나쁘단 뜻은 전혀 아니지만, 정작 이야기의 골자가 되는 사건의 양상이나 동기가 너무 싱겁거나 그 풀이가 난해하거나 그 사건을 풀어낸 주인공의 추리가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로 우월하거나 혹은 운이 작용해서 어딘지 불만족스러웠다. 뭐, 이만하면 괜찮은 일상 추리소설들이지만 '자전거 도둑'의 짜임새나 여운이 워낙 좋아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였다. 

 캐릭터의 매력이나 주제의식도 너무나 중요하지만 추리소설이란 모름지기 추리소설적 사건의 대두와 명쾌한 해결이 있어야만 비로소 좋은 소설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자전거 도둑'은 정말 괜찮은 추리소설이었다. 내가 봤을 땐 이 작품이 <유리기린>의 표제작 '유리기린'보다 더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할 만했다. 자전거를 훔친 도둑의 사정, 어딘지 석연찮은 도둑의 태도, 나중에 밝혀지는 사건의 내막 등이 예측불허하면서 논리정연해 아주 인상적이었다. 특히 이 자전거 도둑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 동원된 우산 도둑 이야기도 꽤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인 동시에 공감도 자아내 단숨에 몰입감을 끌어냈다. 


 돈을 때려박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반드시 흥행하는 것은 아니며 결국 아이디어와 연출력이 돋보이는 시나리오가 호평을 받듯 추리소설도 소재와 사건의 선정성, 빽빽한 분량이 꼭 독자를 매료시키는 건 아니다. '자전거 도둑'이 아이디어와 연출력이 매우 돋보이는 일상 추리소설계의 걸작까진 아니긴 하지만, 지극히 일상적인 소재라도 작가가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훌륭한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다는 걸 충분히 엿볼 수 있는 수작이었다고 본다. 아이러니하게도 작가가 이 책을 통해 강조해 온 주제의식의 측면에선 살짝 동떨어진 작품이란 게 아쉽다면 아쉬운 부분이겠지만 말이다. 

 요즘 심적으로 여유가 부족한 탓인지 10년 전에 읽을 때와 달리 이 작품만의 인생 예찬에 전보다 몰입하지 못했는데, 주인공과 비슷한 연령대임에도 불구하고 내 시선을 사로잡은 구절이 적은 게 다소 안타깝다. 원래는 두 번 읽었으니 중고 서점에 팔 생각이었는데 이 글을 쓰고 나니까 한 번 더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 읽을 땐 인물의 감정선이나 이야기에 더 몰입하며 읽을 생각이다. 희한한 일이군, 보통 시간을 두고 나중에 읽은 추리소설은 트릭보다 이야기에 집중하기 마련인데 정작 이 소설은 반대로 작용됐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이야기가 시작되려면 일종의 환상이 필요한 거야. - 102p



꿈이라는 건 칵테일에 들어가는 달걀흰자와 마찬가지라서 말이죠.

너무 많으면 비릿해져요. 질투라든지, 욕망이라든지, 그런 요소가 끼어드니까요. - 28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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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 하 - 수트케이스의 철새
구로다 이오우 지음, 송치민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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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제목의 '가지'는 말 그대로 먹는 채소인 그 가지를 뜻한다. 가지를 둘러싼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가 담긴 단편만화집인 <가지>는 호불호가 갈리는 맛의 가지와 달리 고른 완성도와 재미를 담아낸 작품들이 수록됐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는데, 우리나라가 가지를 유독 호불호가 갈리는 식재료라 여기고 홀대하는 것과 달리 중국과 일본은 굉장히 좋아하거나 평범한 식재료 정도지 질색하며 싫어하는 사람은 적다는 것이다. 아마 우리나라였으면 가지를 소재로 삼은 단편만화집은 나올 일이 없었으리라. 

 그렇다고 오해해선 안 될 게 <가지>가 무슨 가지를 예찬하는 작품이란 것은 아니다. 작가인 구로다 이오우의 경우엔 오히려 가지에 별로 관심이 없었으나 연재를 하며 가지를 공부하게 됐다고 하는데 - 계기가 있다면 마이클 프랭스의 <Eggplant>란 곡을 듣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 이처럼 가지를 딱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작가였기에 이렇게나 흥미진진한 작품들이 수록된 게 아닐까 싶다. 사극부터 SF, 스포츠물과 소소한 웃음이 담긴 일상물 중에 가지가 완전히 핵심 소재로 등장하는 수록작은 몇 편 되지 않는다. 그마저도 가지 말고 다른 채소로 대체가 가능할 정도다. 일례로 가지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가 주인공이 가지 반찬이 담긴 도시락을 먹으며 끝나는 등 구색만 갖추는 경우도 있었다. 


 수록작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론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안달루시아의 여름'과 '수트케이스의 철새'일 것이다. 이전에 그 영화에 대한 포스팅에서도 한 얘긴데 영화에 비해 원작은 단순하고 담백한 편이다. 하지만 정지된 그림에서도 전해지는 로드레이스의 격렬함과 플롯이 주는 울림은 영화에 뒤지지 않는다. 영화가 워낙 잘 뽑혀서 원작이 초라한 감이 없지 않으니 만약 접한다면 원작을 먼저 접하길 바란다. 굳이 이 두 작품이 아니더라도 다른 작품도 재밌으니 결코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로드레이서 페페말고도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있다. 가지 농사하는 하드보일드한 아저씨의 소소한 농촌 이야기, 프리터족 여자의 빈둥거리는 인생 이야기, 하루아침에 부모를 여의고 동생들과 시골에 있는 친척집에 맡겨져 가지 농사하는 하드보일드한 아저씨와 같이 뭔가를 도모하는 생활력 강한 이야기는 상하 권에 걸쳐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의 이야기엔 특별한 연결고리나 교훈은 없지만 - 어떤 의미에서 가장 '가지'란 소재를 덜 살렸다. - 특유의 나른하고 편안한 분위기와 캐릭터들 덕에 분명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음에도 정이 많이 갔다. 이런 캐릭터들과 비슷한 사람이 주변에 몇 명쯤은 있을 텐데 이런 캐릭터를 맛깔나게 만화 속에 등장시킨 작가의 솜씨가 희한하면서도 감탄스러웠다. 


 반대로 가지의 비중이 꽤나 높은 사극과 SF 작품도 인상적이긴 마찬가지였다. 특히 사극인 '에도 이른 수확물 먹기'는 화풍도 마치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그림체로 그려져 더욱 느낌이 살았다. 에도 시대엔 가지가 상당히 대우받는 식재료라 가지를 둘러싼 암투나 경우에 따라선 사무라이들끼리 피가 튀기는 칼싸움을 벌이기도 한다는 게 어딘지 웃기면서 기이하고 서늘하기까지 했다. 

 SF 작품인 '후지산의 싸움'은 가지와 비슷한 모양과 능력으로 후지산을 침공한 외계 종족이 인간의 기지로 인해 맥없이 당하는 소동을 그리고 있다. 가지가 외양만 따지면 다른 채소에 비해 무시무시해 보일 때도 있는데 그 느낌을 잘 살린 내용이었다고 본다. 여담이지만, 한편으론 동아시아와 달리 가지의 원산지인 인도에 가면 1년 내내 기른 가지들이 어마어마한 높이로 자라난다는 내용의 다른 수록작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아는 가지에 대한 이미지란 극히 제한적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가지 외계 종족이 더욱 무시무시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이 두 권의 단편집으로 작가의 역량이 제대로 느껴져 다른 작품도 접하고 싶은데 처음 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편도 출간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가능성이 요원해 보이는데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꼭 접하고 싶다. 가령 원서를 읽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일본도 못 가는 마당에 그건 좀 어려우려나? 아무튼, 비록 아주 진지하게 한 말은 아니지만 빈 말로라도 그런 말을 하게끔 할 정도로 참 매력적인 단편집이었다. 가지를 매우 좋아해서 재밌게 읽은 게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가지는 덤일 뿐이다. 하지만 덤에 불과한 소재로 이토록 다양하게 이야길 뽑아낸 작가의 솜씨가 대박이라 반하지 않고는 못 베길 정도였다. 

감독, 댁한테 가르쳐 주고 싶구먼. 프로라는 건 임무 이상의 것을 해치우는 녀석이라고.

그렇지 않음, 그렇지 않으면 태어난 곳을 떠날 수 없잖아? 나는 먼 곳에 가고 싶어. - 상 5화



구운 가지와 맥주의 만남은 이 두 가지가 밤중에 만나기 힘드니까 귀중한 것이 아니라 귀중함을 알기 힘드니까 귀중한 것이겠지. - 하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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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플란트 전쟁 - 본격치과담합리얼스릴러
고광욱 지음 / 지식너머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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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치과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란 점 때문에 흥미가 생기기도 했고 1년 전에 임플란트 치료를 받아서 한국 치과계의 부조리함을 고발했다는 이 소설의 내용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임플란트 전쟁>은 치과 의사들끼리 담합해서 임플란트 비용을 300만 원으로 정하고 그 가격을 지키지 않고 더 저렴하게 가격을 책정한 치과 의사를 블랙 리스트에 올려 왕따시키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심기를 건드리는 환자들까지 블랙 리스트에 올려 자신들의 권위를 공고히 다지려는 치과 의사들의 찌질한 모습을 묘사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분노를 유발하는 사회 고발 소설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우리 동네 치과에서 임플란트를 할 때 130만 원의 진료비만 내고 끝낸 내가 참으로 운이 좋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의 내용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난 평생 한 치과밖에 이용하지 않아서 소설에서 얘기하는 '너무 비싼 치과 진료비'에 실질적으로 공감이 가지 않았다. 다른 치과가 정말로 세 배 이상의 가격으로 임플란트를 해준다면 병원마다 가격 차이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임플란트의 적절한 가격은 무엇이며 그 적절한 기준이란 또 무엇인가. 이 소설은 현직 치과 의사가 실제로 목격하거나 경험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구성된 일종의 논픽션이자 작가의 직업이 직업인 만큼 내용이 아무리 소설적이어도 마냥 소설 속 이야기로만 치부하기가 쉽지 않았다. 속된 말로 배운 놈들이라고 더 나을 게 없다는 얘기다. 게다가 정말로 가관인 것은 그들의 선민의식이 너무도 견고한 나머지 비상식적이고 찌질한 조직 문화에 쉽게 물들고 오히려 자신들이 실로 합당하고 정의로운 일을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 뻔뻔스러운 자기합리화는 업계 사정을 모르고 읽으면 논리적인 것 같아 읽으면서도 종종 헷갈렸다. 사실은 주인공이 혼자 고집을 부려가며 그래도 자신은 양심 있는 의사라고 일종의 자기만족에 취한 것은 아닌지 말이다. 


 작가의 분신일 작품의 주인공은 임플란트의 재료비며 수술 과정의 수고로움이 300만 원은 너무 과하다 생각해 더도 덜도 말고 합리적 가격인 100만 원으로 치료비를 책정한다. 그러자 바로 치과협회로부터 압박이 들어오는데 자신의 양심을 끝내 외면할 수 없던 주인공은 조직의 룰을 따르지 않는다. 가격을 올리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조직의 으름장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서 동료 의사들로부터 '자기 혼자만 치료비를 낮춰 환자들을 독식하려는 파렴치한 의사', '낮은 치료비의 단가를 맞추기 위해 저질 재료를 쓰는 의사 자격 없는 자', '동료 의사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는 이기적인 불순분자라 척결 대상에 불과하다.'면서 온갖 악의적인 소문과 임플란트 재료 공급 업체에 압박 및 간호사나 치위생사도 주인공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드는 등 주인공을 고뇌와 인내의 시간을 걷게 만든다. 

 비단 치과만의 문제가 아닌 의료계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심리, 자기는 남들보다 배로 공부하고 노력했으니 돈도 그만큼 많이 벌어야 한다, 그 정신에 위배하는 행동을 보인 동료는 동료도 아니고 바로 배척해야 한다는 심리는 이 작품에서만 묘사되는 것이 아니다. 각종 드라마, 영화에서 무수히 다뤘는데 이걸 단순한 설정이라 여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법조계와 의료계 종사자는 직업 윤리나 사명감을 위해서가 아닌 부와 명예를 거머쥐기 가장 좋은 직업으로 인식되고,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적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오직 사회적 성공을 위해 해당 업계에 들어가려고 공부하는 사람이 우리나라엔 절대다수가 아닌가 싶다. 직업을 택한 목적이 목적이다 보니 도저히 도덕적 해이가 아니고선 저지를 수 없는 짓을 터무니 없이 손쉽게 저질러 많은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경우가 허다해 이 작품이라고 특별히 충격적이진 않았다. 치과라고 별반 다르지 않구나 하고 느꼈을 뿐이지. 


 작년에 갔던 동네 치과는 양심적인 치과인 것인지 아니면 이 소설 속 내용이 과장인지 몰라도 자기 양심을 지키는 의사가 생각보다 소수라는 건 우리나라에선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 아닐까 싶다. 물론 법조계든 의료계든 종사자들이 열심히 공부한 만큼 보상을 받는 것 자체는 틀렸다고 생각지 않지만 그 목적이 그릇된 수단을 낳는 것 같아 이 극단적인 현상을 어떻게 타계해야 할는지 모르겠어 답답하기 그지없다. 북유럽의 경우엔 버스 기사나 의사나 월급에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의사의 수가 적긴 하나 그래도 낮은 보상에도 불구하고 의사 자격증을 딴 참된 의사만 있어 의료의 질이 꽤 좋다고 한다. 제법 고무적인 사례지만 이런 모습을 긍정적으로 여기고 우리나라에 적용하기엔 선민의식에 젖은 기득권이 그 꼴을 가만 두고 보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모든 직업이 평등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위와 같은 북유럽의 풍경은 어떤 의미에서 극단적이라고 생각하니까. 

 이 소설이 내놓는 구체적인 대안은 사실상 없다. 일부 책임자, 불건전한 조직 문화를 선동한 우두머리와 그 일파 정도가 고발당했을 뿐 주인공은 여러 페이크 뉴스가 낳은 후폭풍을 다 해결하지 못한 채로 소설은 끝났다. 변호사와 기자인 친구들의 도움으로 인해 치과계의 어두운 부분이 만천하에 공개됐고 주인공도 이 책과 동명의 소설을 써 낱낱이 퍼뜨릴 것이라 다짐할 뿐, 이 작가가 사회 고발 소설이자 권선징악의 이야기 구조를 시원하고 일사천리로 따르는 일종의 판타지를 썼다는 게 나의 감상이다. 현실이 이처럼 순순히 풀리리라 기대하긴 쉽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느껴진다. 


 대신 이 책의 진정한 교훈은, 세상은 그래도 힘이 없는 소수의 양심적인 사람이 희생을 감수하고 버티기에 조금씩이라도 좋아진다는 걸 간과하면 안 된다가 아닐까? 아주 고통스럽고 막연하지만 그들의 희생의 가치는 결코 가볍게 여겨져선 안 될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이 판타지적으로 느껴질 만큼 현실이 개판이긴 하지만, 때론 그런 비현실적인 사람들이 현실을 더 좋게 만든다. 세상은 튀어나온 못을 다시 망치로 박지만 여기서 정말로 문제인 건 튀어나온 못인지, 아니면 튀어나온 못을 향해 망치를 드는 세상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됐다. 

벤츠 타고 출근하면 잘되던 진료가 그랜저 타고 출근하면 잘 안 됩니까? - 2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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