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실살인게임 - 왕수비차잡기 밀실살인게임 1
우타노 쇼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8


스포일러 있음


 정말 오랜만에 읽은 <밀실살인게임>이지만 처음 읽을 때처럼 재밌게 읽었다. 사실 설정 못지않게 5명의 캐릭터가 선보인 트릭이 모두 인상적이라 10년이 지나 다시 읽음에도 어제 읽은 것처럼 선명히 기억났지만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았다. 설정의 신선함과 충격엔 내성이 생겼지만 대신 캐릭터들이 개성적이고 캐미도 상당해 꼭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를 보는 기분도 들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작중 시점이 2010년도 되지 않았음에도 전혀 옛스럽게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상 채팅 같은 기술적인 차원이 아닌 마치 오늘날에도 이와 같이 익명성에 기댄 반윤리적인 놀이, 아니 행위를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인간들이 있음을 예견하는 것 같아 작가를 다시 보게 됐다. 데뷔작은 전형적인 본격 미스터리였지만 이후 굵직한 사회파 추리소설도 몇 편 집필해온 작가답게 본격의 끝판왕인 요번 소설에서도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 미쳐 돌아가는 사회를 꼬집고 파헤치는 사고의 편린도 느껴져 마냥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라고만 여겨지지 않았다.


 작가가 작중 인물들에 빙의해 인명을 장난감처럼 여기는 언동을 실감나게 구사하다가도, 몇 걸음 물러나 얘네 꼬라지를 관조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드는 등 전반적으로 선을 넘지 않고자 작가가 노력하는 느낌이 들었다.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설정이기에 오히려 꼭 필요한 자세였을 텐데, 만약 그렇지 않고 정말 흥미위주로 살인게임과 트릭을 다뤘더라면 진즉에 19금 조치를 당하거나 정말 최악의 경우엔 이 작품을 읽고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져 모방범이 탄생하는 결과마저 유발됐을지 모른다.

 물론 잔인한 추리소설이라고 해서 그걸 접한 독자들이 다 모방범이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살인게임의 다섯 멤버가 모두 추리소설을 탐닉하다 못해 직접 탐정과 범인이 되는 게임을 주최한 자들이므로 작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이 탄생시킨 캐릭터들로 인해 작품이 일말의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경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때문에 뭐든 쉽게 싫증내고 돌발행위의 가능성이 가장 다분한 두광인을 이야기의 주역으로 설정해 막판에 그 난리를 치도록 결말을 지었던 것일 터다. 선을 넘은 스릴에 중독된 자, 타인뿐 아니라 결국 자기자신도 좀먹는다. 어떻게 보면 허무하면서도 어울리는 결말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말이 나와서 말인데 두광인이 러시아룰렛을 한 데엔 단순히 스릴만을 위해서였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aXe가 비슷한 의문을 갖고 두광인을 말리려 하자 그녀는 딱 잘라 코웃음을 치지만, 초조하게 수다를 떨던 그 태도는 어떻게 봐도 정상적이지 않아 내심 자신의 오빠인 044APD를 죽인 것이 원인이었나 하는 추측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두광인은 친오빠를 죽여서가 아니라 그 친오빠가 정말 우연찮게도 자신과 같이 게임을 하는 동지인 044APD인 것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일 수 있다. 언젠가 크게 한 방 먹여주고 싶던 경쟁자이자 게임을 같이 할 정도로 비슷한 수준으로 정신나간 동지를 자기 손으로 죽인 것에 대해 두광인 나름대로의 뒤틀린 상실감을 느꼈고 러시아룰렛에도 그 상실감이 알게 모르게 작용했던 게 아닐까. 사실 이 부분은 독자가 해석할 여지로 작가가 남겨둔 부분이라 뭘 얘기해도 정답이라고 할 수 있을 테지만, 이런 두광인의 미친 짓이 불러일으킬 <밀실살인게임 2.0>, <밀실살인게임 마니악스>에서의 후폭풍을 생각한다면 나는 작가가 이와 같이 결말을 낸 데엔 도덕성이 함몰된 인터넷 세계의 범죄자들은 결국 자멸에 이르게 된다고 조소하기 위함이 크지 않았나 싶다.


 마지막으로 작중에 나온 트릭에 대한 감상을 풀고 이 글을 끝마치려 한다. 그래도 명색이 게임을 하는 개념으로 집필된 작품인데 너무 진지한 얘기만 한 것 같아서...


 aXe의 십이지 미싱 링크는 작중에서 첫 번째로 소개된 트릭인데, 도쿄 지리를 모르면, 또 나라마다 다른 십이지 동물을 알지 못하면 공정한 추리가 성립하지 않아서 약간 시큰둥한 자세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기발한 건 인정하는데, 게임 참가자들도 입을 삐죽거릴 만큼 질질 끌어서 그 점은 아쉽다. 하지만 이 문제를 위해 피해자를 대략 서른 명 정도 선정했다는 출제자와 그런 말에 감탄 일색인 게임 참가자들의 모습을 통해 작품이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정신나간 행보를 보이리란 불안과 기대를 선사한다는 점에서 미싱링크는 나쁘지 않은 출발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잔갸군의 트릭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 여담이지만 2.0에서도 엄청난 트릭을 선보인다... - 044APD 다음으로 뛰어난 추리력을 갖고 있는 인물인 만큼 문제에도 기발한 발상, 그리고 잔학하단 뜻의 닉네임답게 잔학성이 담긴 알리바이 트릭이 개성적이라 순수한 의미에서 감탄했다. 이런 미친 놈을 봤나.


 반도젠 교수는 5명 중 최약체로 추리력도 문제를 만드는 발상도 가장 떨어진다. 뭐, 문제를 만드는 발상은 아무래도 학교에 다니는 미성년자니 제약이 많다고 치더라도 추리력은... 아무튼 여행 미스터리, 알리바이 트릭이란 컨셉을 집중적으로 선보이는 출제자인데, 내가 최근에 여행간 호찌민을 등장시킨 문제를 출제한 것, 그리고 은근히 허당이란 것과 말투까지 이래저래 트릭의 완성도와 별개로 개인적으론 호감이 가는 캐릭터였다. 그럼에도, 살인게임에 능동적으로 참가하고 문제도 출제하는 등 묘한 서늘함을 주기도 해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겉으론 호감이 가는 인물이라 하더라도 실상은 인면수심의 살인마일 수도 있다...

 044APD는 가장 사교성 떨어지고 쉽게 말해 개념이 없으며 그 점은 트릭에도 여지없이 반영된다. 간단하지만 실현 불가한 트릭이라 잔갸군 못지않게 큰 인상을 남겼는데, 개인적으론 트릭보다 이 인간이 천장에 숨어서 엿들은 가족의 대화를 소설처럼 써내 힌트로 제공한 게 더 소름 끼쳤다. 게임의 다른 참가자들이 살인마라면 이놈은 진짜 악마라는 느낌이 들었달까. 그리고 여담이지만 044APD가 쥐를 죽여서 가족을 놀라게 했다는 대목에서 몇몇 참가자들이 거부감을 보인 것엔 정말 헛웃음이 나왔다. 게임을 위해 사람은 죽이면서 쥐를 죽이는 건 거부감이 있다? 실소가 다 나왔다.


 하지만 자기 가족을 죽이는 두광인에 비하면 다른 놈들은 약과다. 원한이 있어서도 아니고 가장 죽이기 쉬운 가족이 오빠여서 죽인 것도 그렇고, 자기 사생활을 걸고서 쓸 만한 트릭이란 생각에 망설임 없이 저지른 것도 머릴 지끈거리게 만드는 부분이다. 하지만 익명성에 기대 살인을 저지른 살인마에게도 내심 자기 정체를 밝혀 자랑하고 싶은 욕구가 있음을 통찰한 작가에 의해 두광인은 이 게임 자체를 파멸시켜버리는 미친 행보를 보이게 되는데...

 머지않아 2편을 읽을 거라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는 거기서 마저 풀도록 하겠다. 그런데 내 기억에 2편과 3편은 이야기나 트릭이나 1편에 못 미쳤던 것 같은데... 그래도 읽을 수밖에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염소자리 친구
오츠이치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7년 6월
평점 :
품절


9.5 






 이 작품은 오츠이치의 작품집 <메리 수를 죽이고>에 수록된 동명의 중단편을 원작으로 둔 만화이자 내가 오랜만에 접한 작가의 작품이다. 작화를 맡은 미요카와 마사루의 아주 유려한 그림체가 깔끔하게 떨어지는 서사와 굉장히 잘 어울렸다. 사실상 미래를 예언하는 신문을 제외하면 현실적인 전개가 일품이었던 이 작품에 참 잘 어울리는 그림체가 아니었나 싶다. 이지메를 소재로 다룬 이야기가 불쾌한 독자라도 그림체에 딴지를 걸 순 없을 듯하다. 

 물론 소설을 원작으로 둔 작품답게 그림체 못지않게 문체도 훌륭하다. 그렇기에 원작 소설도 읽어보려고 한다. 유려한 그림체를 뚫고 어필되는 날카롭고 진정성 있는 주인공의 독백과 죄의식이 원작에서 어떻게 표현됐을지, 내지는 만화가 얼마나 잘 살렸는지 비교하고 싶어졌다. 이지메를 당하는 급우를 방관하던 주인공이 느닷없이 그 친구를 도와주게 되는 전개를 비롯해 어색하면서 의심스러우면서 긴장감 넘치는 두 소년의 로드무비가 깔끔하고 개연성 있게 전개됐기에 만화나 소설로나 여러 번 접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이야기에 내제된 환상성은 메타포로 기능하고 있을 뿐이지만 엄연히 추리 서스펜스의 장르를 띄고 있는 작품인 만큼 논리적인 추리와 반전도 제법인 편이다. 단편이란 한계 때문에 반전이 다소 뻔하고 작위적인 편이지만 그 결론에 도달하는 주인공의 추리가 합리적이고 그 추리가 인도한 결말은 살짝 예상 밖이어서 '방심은 금물'이란 말은 이 작품을 두고 하는 건가 싶었다. 그리고 오츠이치는 단편에 일가견이 있다는 세간의 평에 걸맞게 매력적인 소재와 주인공들과 미련없이 결말을 내준 덕분에 다 읽고 나서 오히려 여운에 젖었던 것도 좋았다. 간혹 후속작을 암시한다든가 세계관 확장을 노리거나 아니면 에필로그를 지지부진하게 추가하는 식으로 기어코 조개처럼 꾹 닫힌 결말을 선보이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이렇게 뒷일을 상상하게끔 유도하는 열린 결말을 선보이는 작가도 있다. 당연히 나는 후자에 더 마음이 가는데 후자의 작품이 적은 경우는 작가로서 자신의 작품에 미련을 버리기 쉽지 않아서 라고 생각됐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미련없이 결말낼 수 있는 비결이라고 한다면 나는 이 작가가 다음에 쓰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라서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하고 짐작했다. 실제로 이 작가는 단편을 정말 많이 썼고 내가 작가의 작품을 읽지 않았을 때도 많은 작품집이 국내에 출간됐다고 한다. 한때 히트친 작가가 아니라 지금도 왕성히 활동 중인 작가라는 사실도 무척 반가웠다. 일단 이 작품의 원작이 수록된 작품집 <메리 수를 죽이고>부터 찾아 읽어야겠다. 오랜만에 읽은 작가의 이야기라 그런지 더욱 매료됐던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옥상 미사일
야마시타 타카미츠 지음, 김수현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8.2 





 10년 전에 내가 이 소설에 대해 10점 만점을 주며 극찬 일색의 포스팅을 썼던데, 내가 과거에 그랬다는 것이 지금 내 입장에선 믿기지 않는다. 지금은 아무리 재밌어도 10점은 거의 주지 않는데 그 당시에 나는... 뭐랄까, 좋게 말하면 관대하고 나쁘게 얘기하면 헤펐다. 

 물론 다시 읽어도 실망스럽다거나 수준 떨어지는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당장 세계 대전이 터질 만한 상황임에도 어쩐지 이역만리에서 펼쳐지는 이슈인 터라 주인공 일행은 고등학생이나 그 주변 사람들이 남의 일처럼 여기며 일상을 살아간다는 묘사는 지금 시점에선 대단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와 재밌게 읽었다. 인간은 엄청 큰 규모의 사건보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법이다. 그 골때리면서도 당연한 상황을 작가는 유쾌한 문체와 캐릭터로 하여금 매력적으로 전개시킨다. 


 적당히 오글거리고 적당히 통쾌하고 개성적인 캐릭터와 대사들의 향연, 묘하게 쉴 틈 없는 사건들의 연속 등 작품은 5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 내내 호흡을 끊지 않으면서 밀도 높게 이야길 진행시킨다. 세계 정세가 불안정해지면서, 당장 미사일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맥이 탁 풀려버리는 결말과 그와중에도 아랑곳 않고 자기들 내키는 대로 옥상의 평화를 지켜낸 주인공 일행은 어쩐지 장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일 세상이 멸망해도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더니, 이 소설이야말로 그 말을 길게 풀어낸 아주 구체적인 예시로 들 만하지 않은가 싶다. 

 옥상의 평화를 지키는 옥상부라는 것도 그 나이대 학생들이나 입에 담을 만한 참 오글거리는 설정이지만 작중에서 우연한 기회로 모인 옥상부원들은 사뭇 진지하게 옥상의 평화를 지킨다. 뭐, 말이 옥상의 평화지, 실상은 개인적인 문제로 시무룩한 옥상부원의 문제를 다 같이 다방면에서 접근해 하나씩 계속 해결해나간다는 게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이다. 10년 전에 나는 이들의 여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꽤나 몰입하며 읽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 10점 만점을 줬을 리는 없겠지. 


 현지에선 포스트 이사카 코타로로도 불린다는 작가의 대표작인 만큼 실제로 작중에선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처럼 귀엽고 엉뚱한 언동을 보이는 캐릭터가 꽤 많이 등장한다. 킬러나 백수들이 좋은 예시겠는데, 이러한 코믹한 요소가 덜했다면 오히려 세계의 위험 속에서도 일상을 영위하는, 혹은 영위하려고 노력하는 주인공 일행의 모습이 되려 우습게 보여서 작품의 매력이 퇴색됐을 것 같다. 그랬다면 정말 이도 저도 아닌 작품이 됐을 것이다. 

 결말도 나쁘지 않았고 나사가 조금 풀린 것 같은 주제의식도 괜찮았지만 아직까지도 내가 왜 10년 전에 10점 만점을 줬는지 잘 모르겠다. 그 당시엔 막 스무 살이 됐을 무렵이라 정해진 틀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옥상부의 모습에 선망을 느꼈던 걸까? 그러한 선망이라면 지금도 갖고 있는데... 그냥 10년 사이에 다양한 소설을 읽어서 눈이 높아진 것이라 생각하련다. 그게 아니라면 납득이 가지 않으니까. 

신이 아니라도 용서는 할 수 있어. - 111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림으로 화해하기 - 관계가 내 마음 같지 않을 때, 그림이 건네는 말
김지연 지음 / 미술문화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0 





 명화를 소재로 한 에세이나 서적을 보면 알게 모르게 저자들의 주제의식이나 말하는 바가 대동소이한 경우가 많다. 레퍼토리도 비슷하고 명화의 비하인드 스토리도 거의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전달하는 경우도 많고 심지어 다루는 명화들의 구성도 흡사하기까지 하다. 이는 독자 입장에서 알아서 걸러 읽었더라면 마주치지 않았을 아쉬움이긴 한데,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대개 책이라는 물건은 저자의 문장력이 아주 형편없지 않은 이상 적어도 50페이지까지는 신선하게 읽히기 마련이다. 그렇게 독자들을 낚은 책들은 뒷심과 신선함이 부족한 중후반부에 도달하게 만들어 괜찮았던 첫인상을 뒤집는 일도 종종 벌어진다. 

 <그림으로 화해하기>는 비록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으나 명화를 통해 저자가 개인적인 아픔을 위로받았거나 막막한 세상살이를 이겨낼 수 있을 만한 일종의 실마리를 얻었음을 약간 장황하긴 해도 진정성 있게 풀어낸다. 각 장마다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식도 다양하고 무엇보다 다루고 있는 명화가 정말 유명한 작품이 아닌 것들도 많이 선정했고 심지어 이름을 처음 접해본 화가가 많아 그것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충분했다. 거기다 내가 제일 마음에 들고 저자를 신뢰할 수 있던 부분은 바로 저자가 현대 예술에 대해 갖는 시선이었다. 자기가 봐도 이게 왜 유명한지 바로 와 닿지 않는다거나 어쩌면 내가 범인이라 이해를 못하는 것이지 훗날 엄청난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는 등의 문장은 겸손하면서 솔직해 호감이 갔다. 그리고 다행이게도 그 호감은 끝까지 유지됐다. 


 로트레크나 젠틸레스키, 쿠르베, 피카소, 세잔, 밀레처럼 익히 알려진 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은 그리 새롭게 읽히지 않은 반면 제일 첫 장에서부터 소개된 에밀리 메리 오즈번처럼 생소한 화가에 대한 소개나 아니면 고흐와 벨라스케스처럼 유명 화가가 그린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작품에 대한 저자의 감상은 인상적이었다. 케테 콜비츠와 무리요가 그토록 따뜻한 화풍의 화가임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것도 값진 경험이었고 무엇보다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세계에 대한 저자의 감상이 평소 내가 느꼈던 것과 비슷해 반갑기도 했다. 오늘날 봐도 굉장히 현대적인 감성이 충만한 호퍼의 그림에서 쓸쓸함보다 편안함이 느껴진다는 말은 정말 공감했다. 때론 독립되고 적막할 수도 있는 분위기여야 느껴지는 안도감도 있는 법이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란 점에서 이 책을 읽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글인 것 같다가도 꽤 전문적인 미술 지식이나 역사가 튀어나와 지식을 습득하는 맛이 있었고 평소 잘 모르는 화가도 많이 소개받아 전반적으로 만족도 높은 책이었다. 책에 수록된 모든 글의 퀄리티가 고르지 않고 약간 기복이 있는 편이었지만 적어도 '그림을 통해 세상과 화해했다'는 추상적인 개념만큼은 제대로 전달해 약간 과할지언정 불필요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저자가 출간한 책이 딱 이 책 한 권밖에 없던데 나중에 새로운 책이 출간된다면 찾아 읽을 의향이 있다. 새로운 책의 출간이 머지않았길 바란다. 

고통으로 가득한 삶의 시간을 버텨 내는 것에 어떠한 가치가 있을까? 나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무의미한 바람을 떨치기 어렵다. 그때의 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씩씩하게 그 시간을 극복해 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극복이라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그것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는 과정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 58~59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블랙 미니 드레스 1 - 개정판 휴먼앤북스 뉴에이지 문학선 5
김민서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8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은 스무살 당시엔 주인공의 초조함을 짐작만 할 뿐이었다. 스무살에게 스물네살의 고민거리는 먼 미래의 일이었다. 하물며 클럽과 명품에 환장한 연영과 졸업생인 여자의 고민은 내겐 먼 이야기였다. 그래도 주인공의 진지한 고민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작가의 묘사력과 통찰력 덕분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지금은 내가 서른살이고 주인공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하지만 이젠 주인공의 고뇌가 뼈에 사무치게 공감이 간다. 일단 칙릿 소설의 정체성을 띄고 있는 소설답게 명품과 클럽이 즐비한 밤거리 묘사는 여전히 읽기 버거웠지만 장래에 대한 고민, 자꾸 수동적으로 살게 되는 것에 참담해 하는 주인공의 자책이 전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주인공이 작가처럼 80년대생이라서 군데군데 세대 차이가 느껴졌지만, 가령 '여자는 부모 기대대로 돈 많고 배경 탄탄한 남자 잘 만나 결혼하면 장땡이다' 라는 가치관이 더 만연했던 2000년대 중후반의 분위기는 이제 와선 노골적으로 읽혔지만, 그래도 지금 우리 세대에도 통할 만한 통찰이 있기에 공감하며 읽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도 이삼 년 전부터 진지하게 장래를 고민했지만 고민한 것에 비해 주체적으로 뭔갈 시도하지 않아서 주인공처럼 주변에 휩쓸리는 모습이 꼭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군대를 가고 복학을 해서 시간이 걸렸지만 주인공의 경우 그 흔한 휴학 한 번 안 하고 턱걸이로 학점만 채워 스물넷에 덜컥 졸업을 해버렸으니 불안감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나도 그렇고 남들이 보기에 스물넷은 정말 창창한 나이인데 당사자는 정작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적성에 전혀 맞지 않는 일을 한다. 그러면서 주변에 어떻게든 저마다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부럽게 바라본다. 설령 우여곡절이 많건 별 노력 없이 쟁취한 것처럼 보여도 적어도 이도 저도 아닌 자기자신보다는 낫지 않으냐면서. 

 <나의 블랙 미니 드레스>는 여성들의 허영을 그리곤 하는 칙릿 소설로 분류되는 소설이라는 이유로, 또 분량도 적잖아서 은근히 진입장벽이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소설이다. 실제로 나도 다시 읽을 때 주인공과 친구들의 한심한 모습들과 그와 무척이나 대비되는 주인공의 우울한 독백 때문에 남은 페이지를 다 소화할 수 있을까 읽으면서 걱정이 됐지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몰입하게 됐다. 불필요한 이야기와 캐릭터라곤 단 한 가지도 없었고 개연성에도 문제가 없다는 반증일 텐데 후반부의 충격적인 전개와 얼핏 교훈적인 주제의식이 사람에 따라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내가 봤을 땐 완벽한 성장 소설이지 않았나 싶다. 주인공과 친구들, 그리고 여러 등장인물의 고민의 내용이 우리 시대에 시사하는 점이 각양각색이면서 '위태로운 청춘'이라는 공통된 테두리 안에서 논할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우린 저마다 모두 다르면서 비슷하기에 고민한 바를 털어놓고 산다면 삶의 활로가 뚫리기도 하겠는데 하고 희망을 가지게 됐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 축복임을 여실히 느꼈다. 혼자 힘으로 해결하거나 떨쳐낼 수 있는 고민은 좀처럼 없으니 말이다. 


 이만한 장편소설을 집필할 수 있는 필력의 소유자가 왜 신작을 내지 않는지 궁금하다. 김민서 작가의 작품 중에 이 작품말고 <쇼콜라 쇼콜라>와 <에어포트 피크닉>도 읽었는데 <에어포트~> 이후로 십 년이 넘게 신간 소식이라곤 없다. 십 몇 년 전 소설치고 지금도 공감이 가는 내용인 걸 생각하면 이 작가에겐 시대와 유행을 뛰어넘는 시선이 있는 것 같아서 무소식이 더욱 아쉽다. 김영하 작가가 말하길 모든 소설가는 은퇴하지 않으며 여전히 신작을 구상하며 쓴다는 말을 어디 강연에서 말한 적 있는데, 그 말대로 김민서 작가도 남모르게 열심히 신작을 집필하고 있는 중이라면 참 좋겠다. 그리고 그 소설이 꼭 출간되길 바란다. 오랜 시간이 농축된 신작은 어떨는지 꼭 읽어보고 싶다. 

어쩌면 블랙 미니드레스는, 나처럼 남드로가 다르게 보이고 싶어 하지만 정작 커다란 모험은 두려워하는 여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옷일지도 모른다. - 1권 79p



체육 시간에 편을 가를 때마다 맨 마지막에 남는 애들은, 자신이 그런 위치의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편이 훨씬 행복하다. 자신이 인구조사에 포함되는 국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아는 그 순간부터, 사회를 이루는 데 필요한 측은한 구성원 역할을 떠안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의 인생은 절망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인생의 절반을 넘어섰을 때에야 차츰 자각하게 되는 그 슬픈 사실을 너무 어린 나이에 깨닫게 되는 순간, 남은 삶은 두려움과 고통의 반복이다. - 2권 16~17p



조금이라도 쉽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주변은 언제나 나 같은 사람이 둘러싸고 있어. 저 사람이 언제 추락하는지 기다리면서, 그 추락을 정당화시킬 온갖 이유로 무장한 사람들이. - 2권 32p



가장 힘든 사람은 위로받아 마땅하지만 가장 힘들지 않은 사람은 개인의고민이 어쨌든 간에 힘든 티조차 내지 말아야 한다. 고통에도 크기가 있고 무게가 있다. 가벼운 사람은 자신의 차례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더 크고 더 무거운 고통으로 어깨가 짓눌릴 때까지. - 2권 71p



타인에게 하는 구걸보다, 나 스스로에게 하는 구걸이 나를 몇 배는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 2권 202p



그런데 꼭 보면, 그 배고픈 사람들일수록 급한 대로 아무거나 먹었다가 체해서 괴로워해. 결국 자기가 비난했던 사람들이랑 똑같은 얼굴로 다시 먹었던 거 토해내고 입맛에 맞는 거 찾아다녀. 요즘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것 같더라고. 난 나쁜 일이라고 생각 안 해. 입맛에 맞는 음식이 결국 비싼 음식이라는 건 좀 탈이지만. - 2권 255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