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산문집 - 짧은 여행의 기록
기형도 지음 / 살림 / 199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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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생각하면 나는 언제나 1994년...스물 한 살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한 때 둘도 없이 친했지만 이제는 그만 아는 척 해주면 좋을 그런 친구를 대하는 기분이다. 그러면서도 역시나 그 시절이 채 끝나지 않은 것을 느끼면서 인상을 찌뿌리곤 한다.

살다 보니 어느덧 나도 기형도가 세상을 뜬 스물 아홉살이 되었다. 1961년에 태어나 1989년에 세상을 뜬 젊은 시인 기형도. 스물 아홉 아직 화창한 날에 그는 어찌보면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종로통의 어느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다가 심장마비로 급서한 것이다. 그가 보던 영화가 한국산 에로 영화였다는 말도 들려왔지만 그 영화가 무엇이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않다.

생전의 시인은 연세대학교 정외과를 다녔고 졸업 후에는 중앙일보사에서 기자로 일했다. 대학 시절에는 연세문학이라는 동아리활동을 했다. 또한 시인 원재길 그리고 소설가 성석제 등 요즘 주목받기 시작하는 문인들이 대학 시절의 친구였으며 역시 이름 높은 시인의 하나인 정현종 시인이 연세 문학의 지도교수였다. 그는 대학 시절에도 이미 몇 편의 시를 발표해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촉망받는 시인이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시인 기형도는 그의 시로서가 아니라 그가 남기고 짧은 여행의 기록 하나로 더 가슴 깊이 다가온다. 스물아홉 해라는 짧은 삶을 산 시인으로서는 '입속의 검은 잎'이라는 시집 하나 말고는 남긴 것이 없었으나 그의 사후에 가족들과 친구들이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짧은 여행의 기록'이라는 유고산문집을 냈다. 1994년의 일로 추정한다.

1994년의 나는 대학 3학년을 맞이했으며 스물 한 살이었다. 무엇을 해도 집중하기 어렵고 어느 한 곳 마음 두기가 어려웠던 시절....연애에도 실패하고 상처를 받아 고통스러웠던 그 시절에 기형도의 책은 나를 무던히도 위로해주었다. 여기서 착각하지 말것은 그의 책 어느 한 곳에서도 상처받고 고통스러운 사람을 위로하는 글귀라고는 단 한 줄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심약해 사소한 일에도 고통스러워했고 작은 일에도 무척이나 민감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삶을 후회한다거나 자신이 끼어들지 못한 세계에 대한 동경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의 시는 행복하지 못했던 유년시절의 기억을 하나 둘씩 담아 처연함을 안겨주었으며 즐거움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어둡고 비관적이었냐 하면 그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의 시 '빈 집'을 읽는다면야 약간은 그의 어두운 일면을 알아볼 수도 있겠으나 어찌 그걸 단지 어둡다..라는 말 한 마디로 다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이 다 그러했다.

아니 어쩌면 그의 시보다는 일기와 편지, 휴가를 이용해 떠난 여행의 기록 등등이 더 구구절절 마음에 더 잘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랬다. 당시 입대를 앞두고 있던 나는 비록 방위로 복무한 기형도였지만 여느 군인 못지 않은 감상과 떨림을 전해주는 그의 일기와 편지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잘 정리된 공부방에서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글을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어두침침하고 작고 더러운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엎드려서 대학 노트에 몇 자 끄적이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후로 두 번 다시 그런 느낌을 받는 작가는 접하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기형도의 시가 다시 조명을 받거나 화려해진 것은 아니지만.....그의 감각적인 시 제목 몇 개가 영화의 제목으로 쓰여지면서 다시 이름을 흘려듣게 되었다. '질투는 나의 힘' 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으나 이 영화는 기형도의 동명제목의 시와는 아무 상관 없다. 이렇듯 단정짓듯 이름 짓는 그에게서 영감을 받아 '복수는 나의 것'이란 영화도 이름지어졌음을 나는 눈치채고 있다. 아마도 언젠가 다시 그가 화제가 될 날이 오리라고 믿는다.결코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풀어지지 않은 말들을 남기는 그의 시, 적어도 그처럼 심약하고 삶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한 그런 맛을 가진 시인이 나타나는 세월이 오지 않는다면 그는 다시 한번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끄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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