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코트를 입은 남자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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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으로 그리는 모든 초상화는

모델이 아니라 화가의 초상화다.

모델은 그저 우연, 계기일 뿐이다.

화가가 드러내는 것은 모델이 아니다.

색깔이 칠해진 캔버스에 드러나는 것은

화가다.

본문 중

초상화 한 점에서 시작된 책. <집에 있는 닥터 포치>

<빨간 코트를 입은 남자> 역시 그런 류의 책이다. 때문에 많은 이들의 기억에 강력히 남아있을 만한 책, <진주 귀고리 소녀>와 같은 류의 소설일 것이라 착각, 아니 오해하였다. 포치를 모델로 한 그림에서부터 충실히 시작된 소설가적 상상력과 심미적 섬세함이 가득한 한 편의 드라마적 전개, 내지는 모델소설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혹스럽게도, 책장을 넘길 수록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의 상상력이 철저히 배제된 포치의 傳記, 또는 그 시대의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방대한 양의 역사적 서술이었다.

나는 사전트가 그린 엄청난 이미지의 형태로 포치를 처음 만났다. 벽에 붙은 설명은 그가 부인과 의사라고 말해주었다. 그전에 19세기 프랑스 독서에서는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미술잡지에서 그가 '프랑스 부인과학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여성 환자를 유혹하려 한 확인된 성 중독자'임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실존인물인 포치의 전기였다면, 좀 더 편하게 글을 읽어 내려갔을 수도 있다. <빨간 코트를 입은 남자>는 다시금 그 기대를 져버린다. 단순히 포치의 전기라고 보기에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 단순히 느낌에만 의지해서 보자면, 절반이 채 되지 않는 것 같다. 책의 나머지 부분은 그를 둘러싼 온갖 프랑스 예술가와 문필가, 의료계, 정계인사, 그리고 연예계 인사들까지. 듣기만해도 혀를 내두를 만한 당해 유명인사들과의 풍성한 사사로운 얽힘에 관한 내용 전반을 다루고 있다. 얼마나 많은 실존인물이 등장하는지, 그 중 대강이라도 들어본 인사-오스카 와일드, 기 드 모파상, 레옹 도데, 알렉상드르 뒤마, 에드몽 드 공쿠르, 말라르메, 베를렌느 등-에 관한 이야기를 만나게 되면 가슴을 쓸어내리고 ‘긴장하며 읽기’를 잠시 멈추는 지경에 이른다. 혹여, 글의 한 토막이라도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거나 잘 모르는 이야기가 나오면 용납하기 어려운 책읽기를 하는 사람이 이 책을 읽게 되다면, 마지막 장을 넘기기 전에 대략 백여년 동안의 프랑스나 영국의 역사와 예술, 문학계 외에도 정계, 연예계, 의료계까지 모두 아우르는 인물들까지 모조리 면밀히 검토한 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이 책은 그와 같은 전투적 읽기를 하면 안된다. 단순히 한 시대를, 그것도 가장 아름답던 시절, '벨 에포크' 시대를, 가장 굵고 풍성하게, 가장 자유롭고 열정적으로 살아간 한 위인의 일대기를 멀찍이서 지켜보는 관망자적 읽기를 해도 좋다. 이탈리야계 성을 가진 평민 닥터 사뮈엘 장 포치. 백작 로베르 드 몽테스키우-페젠사크(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솔직히 말하면 어떤 면에서는 포치보다도 부각되어 있고, 더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상한 3인조’ 중 왕족 출신인 에드몽 드 폴리냐크(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극히 적다. 그는 잠깐 자유분방한 관망자의 자세로 잠시 등장하였다가, 런던 방문 후 16년 뒤에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서나 제대로 된 재회를 하게 된다). 이 3인조의 1885년 여름 런던 방문에서부터 시작된 책쓰기는, 작가의 신바람난 펜 끝에서 겉잡을 수 없는 자유로운 글쓰기로 번져나가 그들의 생을, 아니 그들의 시대를 통째로 옮겨놓는 대과업을 이루어낸다.

 

줄리언 반스가 2015년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서 <집에 있는 닥터 포치>의 그림 앞에 서지 않았다면, 이 위대한 인간의 한 생애에 관한 기록이, 이토록 치밀하고 완성도 높게 재현되는 일은 앞으로도 수세기 동안 없었을지 모른다. 그가 과연 '시대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을 온전히 지켜낸 한 인간인가'는 줄리언 반스의 표현대로,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인간의 生은 언제나 그렇듯 깊은 울림을 준다. 더구나 포치처럼 인류의 발전을 위해 한 발자국을 내딛는 데에 보란듯이 성공하고-그는 프랑스 최초의 부인학과 교수이자 세계적으로 가장 저명한 부인과학 논문의 저자이며, 사교계 최고의 名醫로, 그의 죽음은 당시 타임스에서도 기사화되었을 정도다-, 포치처럼 당대의 명성 높은 수 많은 名士들에 둘러싸여 있었던 생이라면 더욱이. 닥터 사뮈엘 장 포치. 그의 생을 가감없이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감탄해 마지않는다. 다만, 그의 무려 30년간 지속된 결혼생활이 단지 처의 종교적 신념에 의해 지속된 거짓 울타리에 불과했고, 남은 세명의 자녀가 모두 그를 피하는 삶을 살았으며, 셀 수도 없는 情婦들 사이를 걷지만 결코 만족할 수는 없었던 그가 살아간 삶의 한 장면은, 그 日常은 과연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자신의 환자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향해 날린 세 발의 총성을 온몸으로 맞았어야 했던 비참한 죽음은 차치하더라도, 그의 일상이 과연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낄만한 것이었을까는, 줄리언 반스의 표현대로 '이 모든 문제는 소설에서나 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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