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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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진가를 알아주는 이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놀라울 뿐. 식민주의, 파시즘, 전체주의, 냉전, 이 모든 부의 유산에 날카로운 비판의 메스를 들이대면서도 유머와 위트를 잃지 않는 필력에 찬사를 금할 수 없다. 그가 예언한 디스토피아의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노라니 그가 더욱 절실히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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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관리정치의 탄생 -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8~79년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옮김 / 난장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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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푸코는 애초의 기획에서 다소 벗어난 <신자유주의>로 연구를 옮겨갔을까. 근대의 비정상, 괴물에 천착했던 푸코가 보기에 신자유주의의 교부들이야말로 자유/자연이라는 감옥에 사람들을 가둬버린 이 시대를 예비했던 괴물들이었을까. 푸코의 매혹은 무자비할 정도로 섬뜩한 괴물을 만들어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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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시 신드롬 - 1944년부터 현재까지 프랑스는 과거를 어떻게 다루어왔는가
앙리 루소 지음, 이학수 옮김 / 휴머니스트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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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루소의 <비시 신드롬>은 프랑스 현대사의 가장 아픈 고리의 하나인 <비시 체제>의 기억이 전후 프랑스 사회에 끼친 영향을 <신드롬>이라는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통해 분석한 저작이다..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도입했다는 것은 저자의 말로, 실제로 전후 프랑스의 정치사를 네 단계로 구분해 각각 미완의 애도(1944-54), <레지스탕스주의>라는 지배신화의 구축, 혹은 기억의 대상화 구축작업을 통한 억압의 시기(1954-62), 신화의 붕괴, 억압으로의 회괴, 소위 "깨어진 거울"(1971-1974), 강박의 시기(1974- 이후)로 이름붙여 기술하는 방식에서는 <정신분석학적> 냄새가 나기도 하지만, <억압>이나 <강박>과 같은 개념 자체가 이미 분과학문의 틀을 넘어 너무나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이 되어버려서, '색다르다'는 느낌을 받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기념제나 영화, 역사서술 등 비시 신드롬의 벡터를 새롭게 다룬 2판은 사실 분석 수준에서는 1판에 비해 너무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다만 보수파 내부의 패탱파와 드골파 사이의 알력, 패탱의 유산과 레지스탕스의 유산을 교묘히 저울질 하면서, 레지스탕스의 유산을 독식하는 드골의 전략, 비시체제/과거에 대한 전쟁세대와 전후세대의 미묘한 입장 차이 등에 대한 기술은 꽤 흥미로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워낙 프랑스 현대 사회사에 무지한 지라, 이런 앙리 루소의 작업이 프랑스 사회에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켰을 지, 궁금하기도 했다.. 1차대전의 영웅이자 비시체제의 수반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던 '패탱 원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드골과 레지스탕스와의 복잡미묘한 관계, 반유대주의, (나치체제에 대한) 협력을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의 문제 등등은 사실 전후 프랑스의 기억의 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쟁점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루소의 작업은 <다소 정태적으로 보이는> 피에르 노라의 방대한 <기억의 장> 작업보다는(물론, 노라 역시 자신의 작업에 대해 쏟아지는 비판들--앙리 루소와 더불어 도미니크 라카프라도 유사한 비판을 하고 있다--을 상당히 의식한 듯, 작업의 후반부로 갈수록 기억들의 갈등/경합이라는 측면을 더 부각시키는 듯 보인다.. 또 누구나 읽는 일반론적 성격의 글인 <기억과 역사 사이에서>가 아닌 구체적인 사례논문인, 예를 들어 <드골주의자와 공산주의자>에서 노라의 기술은 훨씬 다이나믹한 게 사실이다)  기억을 둘러싼 투쟁의 양상을 훨씬 잘 포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듯 기억을 둘러싼 경합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도, 여러 당파들 간의 적대감이 적어도 <공적 영역>을 중심으로 표출되고 또 논쟁되어온  프랑스 사회는, 그 적대가 상대 당파에 대한 <학살>로 귀결되었던 한국 사회와 비교한다면 묘한 여운을 주는 것이다.. 물론 프랑스도 냉전체제의 영향을 받았고, 그 결과 패탱파가 부활하는 계기가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국내 문제>였다.. <친일>과 <반일>의 대립구도에서 처음 주도권을 쥐었던 <반일>의 가장 핵심적인 당파가 냉전체제 아래 점차 <친공>으로 몰리면서 배제되고, 결국 내전을 거치면서 완전히 몰락해버리면서 <과거 청산>이라는 기획 자체가 날아가버린 남한 사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거기에는 남한 사회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미군정>의 검은 안개도 드리워져 있을 터이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집단 기억을 재구성하는 작업은 가능할까.. 과연 그 출발점은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오히려 우리에게는 길었던 36년간의 식민지체제에 대한 기억보다, 해방 3년사(혹은 8년사)의 기억이 이후 한국사회에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식으로 물음을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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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냉전 - 인류학으로 본 냉전의 역사
권헌익 지음, 이한중 옮김 / 민음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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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론서. 항간에 유행하는 단순한 영화비평이나 문학비평을 넘어서면서, 냉전에 대한 구미학계의 시각과 베트남에서의 자신의 필드 경험을 날줄과 씨줄로 잘 엮어내고 있다. 다만 이러한 이론화 작업이 정말 중요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독자들의 호오가 갈리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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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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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힐베르크-아렌트-레비-아메리-아감벤으로 이어지는 사유의 궤적에 대해 글을 쓰기로 한다..

 

우선 레비에 대한 책들을 계속 번역 출판하고 있는 <돌베개>에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레비의 사색의 여정을 가장 충실하게 보여주는 이 책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가 가뜩이나 불황인 한국 출판시장에 번역되어 나왔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 책이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있는 현실은 현재 우리네 삶의 각박함을 반영하는 것 같아 그닥 마음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왜 인간은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는가..

왜 아우슈비츠와 같은 악-오류는 계속 되풀이되는가..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주 사소한 것이다..

그건 아마 너무나 절실하게 번역되어 나온 이 책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번역으로도 레비의 고뇌가 충분히 전달될 만큼 매끄럽게 번역해준 역자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책에도 나오듯이 레비에게 자신의 언어를 번역하는 것은 몹시도 중요한 것이었다..

 

문제는 한자어이다..

아주 사소한 한자 병음의 오류가 이 책의 가치를 떨어뜨려서는 안 될 것 같다..

예를 들어..

106페이지의 이식은 아무리 봐도 利殖이 아니라 移殖, 혹은 이주(移住)이고..

183페이지의 역은 易이 아니라 逆인 것 같다..

 

이런 것들은 혹 번역과정에서 오타에 의해 발생하더라도, 편집부가 충분히 잡아줄 수 있는 오류이다..

그나마 몇 안 되는 한자어 병기에서 생기는 이러한 오류들이 이 책을 훼손시키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2쇄에서는 꼭 반영이 되길 바란다..

 

 

 

 

공포, 이데올로기적 유혹, 승자를 곧이곧대로 모방하는 것, 어떤 권력이건 간에-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시간과 장소에 제한된 권력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향한 근시안적 욕망, 비겁, 명령이나 규율 자체를 교묘하게 피하려는 철저한 계산에 이르기까지 그 동기는 다양하다. 이 모든 동기들은 각개로든 서로 결합되어서든 이러한 회색지대를 만들어내는 데 작용했고, 이 회색지대의 구성원들은 특권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고 강화하려는 의지로 서로 결합했다.

반복하지만 진짜 증인들은 우리 생존자가 아니다. 이것은 불편한 개념인데, 다른 사람들의 회고록을 읽고 여러 해가 지난 뒤 내 글들을 다시 읽으면서 차츰차츰 인식하게 된 것이다. 우리 생존자들은 근소함을 넘어서 이례적인 소수이고, 권력 남용이나 수완이나 행운 덕분에 바닥을 치지 않은 사람들이다. 바닥을 친 사람들, 고르곤을 본 사람들은 증언하러 돌아오지 못했고, 아니면 벙어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무슬림들", 가라앉은 자들, 완전한 증인들이고, 자신들의 증언이 일반적인 의미를 지녔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원칙이고 우리는 예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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