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콜하스 창비세계문학 14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황종민 옮김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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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낭만파 작가들에 조예가 깊은 이가 아니라면..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라는 작가의 이 작품을 무심코 지나쳤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 작가를 알게 된 것 역시 오에 겐자부로의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읽은 후였다.. 오에의 작품 속에 삽입되어 있던 <미하엘 콜하스>는 굉장히 매력적이었고, 그래서 비록 허구이지만 오에가 상상했던 M프로젝트, 즉 <미하엘 콜하스>라는 작품을 일본과 한국이 동시에 영화화하는 기획이 실제로 성사되었다면 하는 뜬금없는 공상을 해보기도 했다.. 미하엘 콜하스의 봉기와 근세 일본 사회의 잇키, 그리고 19세기 한국사회의 민란과 농민전쟁을 아래로부터의 시각에서 그려낼 수 있다면, 매우 야심찬 국제적 <봉기와 유토피아> 프로젝트를 꾸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오에 정도라면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쪽 카운터 파트는 누가 좋을까.. 아쉽게도 떠오르지 않는다.. 오에가 기대했던 김지하는 예전의 김지하가 아니다.. 황석영 역시 믿음이 가지 않는다.. 홍명희 선생 정도라면 기대해봄직 하지만.. 임꺽정에서 장길산으로의 궤적이 상상력의 측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후퇴라는 사실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다..

 

16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 작품은 클라이스트가 살았던 18세기 말~19세기 초 유럽 대륙의 <혁명적 분위기> 아래 구상되었다.. 국가란 무엇인가를 둘러싼 루터와 콜하스의 긴장감 넘치는 논쟁은 사회계약론의 세례를 받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콜하스의 행위를 <불의>라고 꾸짖는 루터의 방문이나 콜하스와의 논박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종교개혁의 선구자이면서도, 아래로부터의 농민들의 요구에는 지극히 냉담했던 보수적 성직자의 전형으로서의 루터의 성격은 잘 표현하고 있지만, 자신의 행위를 <정의>로서 정당화하는 콜하스의 논변 밑에 깔려 있는 망탈리테는 무엇이었을지 여전히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진즈부르크 등의 미시사가들이 시도했던 것처럼, 16세기 유럽의 민란에 대한 정확한 고증이 뒤따랐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클라이스트는 역사가가 아니다.. 또 아마 그랬다면, 미하엘 콜하스와는 전혀 다른 개성의 인물이 나타났을 것이다.. 콜하스와 같이 16세기를 살면서, 지배층의 횡포에 대해 분노하던  사람들은  어떠한 논리로 생각하고, 행동했을까 하는 공상을 해보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최근에 읽은 텍스트의 등장인물과 겹쳐 보더라도 메노키오나 뮌처 정도이다.. 16세기의 인간과 21세기의 인간 사이에는 공통점만큼이나 많은 차이점들이 놓여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궁금한 점은 오에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왜 클라이스트는 예언을 하는 집시여인이라는 소설 전체의 플롯에서 본다면 다소 위태로운 인물에 집착했던 것일까.. 집시여인이 점술로 작센의 멸망을 예언하는 대목은 클라이스트의 역사적인 정치사상의 발현으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낭만주의적 이야기의 일반적 장치인 것일까.. 그럼에도 처형장으로 향하면서, 작센 선제후가 보는 앞에서 그를 몇번이고 혼절시켰던 그 문제의 쪽지를 꿀꺽 삼켜버리는 장면은 이 작품에서 <신의 한 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거나 18세기 문학이라고 하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흡인력과 시의성을 갖춘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원자력 마피아, 해피아, 철피아 등 권력의 부조리한 야합은 만연하고 여전히 무책임의 체계가 지배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는..

 

제가 인간 사회에서 추방당한 게 아니라면, 제가 인간 사회와 벌이고 있는 전쟁은 악행입니다. ... 제가 말하는 추방당한 자란, 콜하스는 종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했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자를 뜻합니다! 저는 그 보호를 받아야만 평화롭게 사업을 번창시킬 수 있습니다. 그 보호를 믿었기에 모은 재산을 다 들고 이 사회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런 보호를 해주지 않는 것은 저를 황야의 야수들에게 쫓아내는 것입니다. 저 자신을 지키라고 제 손에 몽둥이를 쥐여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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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섬들
마셜 살린스 지음, 최대희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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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셜 살린스라는 이름은 인류학을 전공하지 않는 국내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그나마, 1990년대 중후반 미시사, 문화사 붐이 일었던 시기, 개론서에서 클리포드 기어츠의 <발리 닭싸움> 사례와 함께 살린스의 쿡 선장의 사례가 잠시 다루어졌던 것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있다면, 그 기억력에 경의를 표해야 하리라.. 또 혹시 오래 전에 <문화와 실용논리>라는  이름으로 번역된 책의 저자가 바로 그라는 사실을 눈치챈 이가 있다면- 그에게는 보르헤스가 푸네스에게 붙여주었던 호칭을 부여해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기억의 천재!!> 천하의 로자님께서도 이 책은 빠트리셨을 정도니까..

물론 전작인 <문화와 실용논리>는 흐릿한 번역만큼이나 국내에 미친 파장은 흐릿했던 것 같다.. 참고로 역시 절판이다..

 

이 책은 사례의 흥미로움과 이론적 치열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한, 보기 드문 연구서이다.. -이 정도면 최상의 찬사이다. 물론 이 때 이론적 논의의 수준은 80-90년대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지만,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다-. 물론 그 컴팩트함에 있어서는 1981년에 출간된 전작, Historical Metaphors and Mythical Realities(역사적 은유와 신화적 현실)이 훨씬 훌륭하지만, 이 책은 아쉽게도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다. 만약, 이론적 논의를 가능한 패스하고 싶은 일반 독자라면, <제 1장 쿡 항해기 보유, 또는 야생의 산술>과  <제 4장 제임스 쿡 선장, 또는 죽어가는 신>을 먼저 읽어도 내용 이해에 커다란 무리는 없다.. 저자는 여기서 쿡 선장의 살해가 하와이섬의 신화구조 속에서 연출된 것임을 굉장히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그의 이야기가 정말 사실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입증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커다란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여기서 거기까지 다룰 이유는 없을 것 같고, 다만 그 입증불가능성, 하지만 이해가능성을 둘러싼 끝없는 대화의 시도가 인문사회과학의 매력이 아닐까 하는 소견 정도만 덧붙인다..

 

 이 책이 제시하는 이론적 메시지는 생각보다 훨씬 단순명쾌하다.. 아주 거칠게 요약한다면,

우리가 흔히 이항으로 생각하는 역사와 구조, 현재와 과거, 체계와 사건, 혹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등 다양한 물화된 대립들을 탐구하여 그 상호구조, 즉 진실에 더 가까운 합명제를 찾는 것.. 이를 저자는 브로델의 개념을 자의적으로 빌려오면서, 국면의 구조라고 개념화한다.. 조금 더 <가오를 잡는다면> 특수한 행위자와 그의 경험적 문맥의 환원불가능성을 직시하는<상징적 삶의 현상학>적 탐구, <문화적 범주의 상황적 사회학> 뭐 다 같은 말이다..

 

이미 번역자가 후기에서 충분히 자세히 요약을 해주셨으니, 여기서 중언부언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역사학 전공자가 왜 이 책을 번역했을까 하는 점이었다.. 살린스는 서문에서 현대의 과제는 문화에 대한 인류학적 경험으로써 역사 개념을 깨뜨리는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이는 오만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족을 덧붙이고 있기 때문에. 물론 여기서도 다시 결과는 일방적이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 경험이 인류학의 문화 개념을 깨뜨릴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번역으로, 역사학과 인류학이 다시 한 번 그 재현을 둘러싸고 생산적인 논의들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과연 한국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지.. 그럼에도 번역의 질은 차치하고라도, 역사학 연구자가 쉽게 옮기기 어려운 이 책을 번역해주었다는 사실에 한국의 인류학계는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하와이인들에게 쿡은 인간을 위해 대지가 열매 맺도록 하는 신이었다. 평화와 농경의 기술을 수호하는 생산의 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럽 쪽에서 볼 때도, 그는 ‘애덤 스미스의 이상을 세계 차원에서 실현하는 대리인’으로서, 마찬가지로 시장의 평화적인 ‘침투’의, 즉 무지몽매한 사람들에게 문명을 전해주고 전 세계에 부를 가져올 전도양양한 상업적 팽창의 영혼의 화신이다. 쿡은 그 길을 개척하여 경로와 자원과 시장을 결정할 터였다. 따라서 팍스 브리타니카의 선구자였던 쿡은 동시에 부르주아 로노이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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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섬들
마셜 살린스 지음, 최대희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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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번역이 되었다고 말할수 밖에 없다. 역사인류학의 고전. 그리고 이 책이 불러일으킨 논쟁은 그대로 구조와 역사, 타자의 재현에 대한 교과서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전작인 <문화와 실용논리>, 치데스터의 <새비지 시스템>과 함께 읽으면, 그 진가가 더욱 뚜렷이 드러날텐데. 모두들 절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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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됭의 마귀들림 - 근대 초 악마 사건과 타자의 형상들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6
미셸 드 세르토 지음, 이충민 옮김, 이성재 감수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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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 읽어야 할 책은 카를로 긴즈부르크의 <치즈와 구더기>이다..

이 책이 처음 번역되던 시절만 해도 아직은 미시사에 대한 소개글 정도만 나왔을 정도라 국내의 참고문헌들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근 10여년이 지나니 이제는 만만치 않게 축적되었다..

긴즈부르크의 책만 해도, <마녀 베난단티와 밤의 전투>(아쉽게도 절판된 상태다)와 <실과 흔적>이 번역 출간되었다.. 

여기에 뤼시앙 페브르의 <16세기의 무신앙문제>(이 책 역시 절판이구나)나 미하일 바흐찐의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이 책도..), 그리고 그 원저인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리엘>을 함께 읽어둘 필요가 있다.. 그리도 종교적이던 중세 사회가 왜 100년도 채 안 되어 <무신앙>이 일반적인 사회가 되어버렸을까.. <루됭의 마귀들림> 사건은 이 무신앙 문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결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이런 책들을 한권씩 한권씩 꺼내읽는다면 6월 한 달을 녹녹히 보낼 수 있을텐데..

아쉽게도 전공자가 아닌 나로서 이런 책들은 양로원에서나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본격적으로 긴즈부르크에 들어가기 전에, 뭔가 다른 책을 읽어두고 싶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서가에 꽂혀 있던 미셀 드 세르토의 <루됭의 마귀들림>을 꺼내든다..

 

세르토는 푸코와 부르디외를 열심히 읽었던 이라면 낯설지 않은 저자이다.. 부르디외의 주저인 outline of theory of practice가 아직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에(그 무수한 부르디외 번역본 중 이 책이 목록에 없다는 점도 참 기괴한 일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왠지 메타포로 사용되는 듯한 감이 있는 practice에 대한 또 다른 깊은 사유와 천착을 보여준 이가 바로 세르토이다.. 그의 주저는 이 출판사의 인문 라이브러리 기획으로 번역된다 하니 그 때를 기다리기로 하고..(물론 언제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찌됐건 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

<루됭의 마귀들림>이라는, 우리에게는 친숙치 않은,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너무나 유명한 (것처럼 보이는) 한 사건에 대한 다성적(multi-vocal) 목소리들을 너무나 매혹적으로 복원해 놓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복원 작업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이 사건에 대해 켜켜이 쌓인 <문서고>(archive)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자료만 있다고 복원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그 자료들을 꼼꼼이 읽어내고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복원해낼 수 있는 프랑스 역사학계의 두터운 내공이 깔려 있다..

사실 이 책들을 읽어야 하는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밤의 전투(2)를 쓸 때 밝히기로 한다..

 

일단, 이 책을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결정은 삽화와 해설로 이루어진 짧은 프로이트적 서론을 보고나서 판단하면 된다..

거짓말과 진실 사이의 전투, '이다'와 '아니다' 사이의 전투는 강박적이 되고 바로크적이 된다. 열린 무덤이나 파괴된 제국을 중심으로 끝없는 싸움이 벌어진다. 속담이 말하기를, '다들 틀렸으면서 다들 자기가 옳다고 여긴다.'

가히 이 책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문장이다..

 

이 책에서 한 수 배운 점이 있다면..

1. 마귀가 들러붙는 것obsession과 마귀에 들리는possession 것은 다르다는 것.. 17세기(1643년)의 문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들러붙음obsession과 마귀들림possession의 기본적 차이는 다음과 같다. 들러붙음에서 악마는 들러붙은 사람에게 외적으로만 작용한다. 즉 그 사람이 좋든 싫든 그 사람의 눈 앞에 빈번히 나타나고 그 사람을 때리고, 그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며, 본래 성격, 기질, 능력의 폭을 현저히 넘어서는 기이한 감정과 동작을 자극한다. 반면 마귀들림에서 악마는 마귀들린 사람의 정신능력과 신체기관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 그래서 악마는 그 사람이 적어도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스스로 할 수 없는 행동을 그 사람 내부에 일으킬 뿐 아니라 그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든다.

왜 이 시기 들러붙음이 아니라 <마귀들림>이 중요한 현상이 되었는가를 생각할 때 그 차이는 중요해진다.. 이제 현장에서 발견된 모든 재료가 형태를 얻어 하나의 담론이 되는 것이다.. 푸코에게 경의를 표하며 세르토는 이 절에 <말과 사물>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있다.

 

2. 또 하나는 공간이 사람들의 정신을 진정으로 '홀리는'posession 것은 오직 냄새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 냄새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2차원의 물체들을 우리가 들어가 있는 3차원의 공간으로 바꿔놓는다.. 이러한 냄새의 마법은 17세기까지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후각은 시각에 그 우위를 내주게 되는 것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여기서 할 수는 없지만, 푸코의 <광기의 역사>, 그리고 무엇보다 <향수>의 그르누이가 그렇게 냄새에 집착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이에 대해서는 쥐스킨트의 <향수>에 간략한 리뷰를 단 적이 있다..)

냄새는 어떤 탈시간적 시간, 후각, 상상력, 즉각성이라는 준엄하고 억눌린 법칙을 따르는 시간을 위한 영토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점유possession하며, 배석자들과 배우들을 ‘점령’occupation한다. 냄새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2차원의 물체들을 우리가 들어가 있는 3차원의 공간으로 바꿔놓는다는 것이다. 하나의 공간이 언어나 몸짓으로 묘사되기 이전에, 일련의 스펙터클이 최초의 ‘마법’을 보여주거나 확장시키기 이전에 후각적 인상들이 그 공간을 공간으로 인준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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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Ⅰ - 정신의 지도를 그리다 1856~1915 문제적 인간 8
피터 게이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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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하 1400페이지가 넘는 피터 게이P. Gay의 <프로이트>는 분량만이 아니라 그 구성으로 보더라도 실로 대작이다.. 원작자뿐만 아니라, 번역자, 그리고 <문제적 인간> 시리즈를 계속해서 내고 있는 문제적 출판사 <교양인>에게도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평전>이라는 장르를 그다지 즐겨 보지는 않지만,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 프로이트라는 한 개인의 전기적 측면과, 평생에 걸친 그의 정신분석작업의 개요가 균형을 이루어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히스테리 연구>에서 <꿈의 해석>, 그리고 마지막 저작인 <정신분석 개요>에 이르는 그의 전 저작이 실로 <정신분석 정치>로 점철된 그의 삶에 대한 기술과 맞물려 매우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내용을 소개하는 것은 <무리>이다 못해 <무의미한> 짓일테고.. 다만, 한 가지, 논문 최종수정 과정에서 여러 심사위원들의 심사평들을 다시 환기하면서 느꼈던 여러 감정들을 되새김질하는데 프로이트의 삶이 꽤 위안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정력적이면서 야심에 가득찬 젊은 탐험가로서의 젊은 프로이트의 삶이.. 기존의 세계관, 혹은 상식으로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이유로, <교수임용 심사>에서 혹은 새 책을 낼 때마다--심지어 <꿈의 해석>마저도-- <부정적>인 대답을 들어야 했던 프로이트의 <절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는 <오만함>은 꽤 인상적인 것이었다..

사실 우리는 끔찍할 정도로 멀리 앞서 가고 있네.. 이제는 이론 작업을 할 힘이 전혀  남지 않았네. 그래서 저녁이면 몹시 따분해. .. 학문이 점점 어려워지네. 저녁이면 기분을 좀 밝게 해주고, 상쾌하게 해주고, 깨끗하게 해줄 만한 것을 원하지만, 늘 혼자야..

물론, 이런 세기의 천재와, 자신이 만들어놓은 구멍에서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나를 동일시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가끔씩 그런 착각이라도 하면서 살지 않으면, 내가, 그리고 우리가 처한 이 현실이 얼마나 비참하게 느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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