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에 붙이는 주석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안인희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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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너무나 찬사 일변도의 리뷰만 실려 있어서, 짧은 주석을 덧붙이기로 한다..

 

제바스티안 하프너.. 1907년 독일 베를린 출생, 1938년 영국으로 이민.. 영국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1954년 서독으로 귀환.. 이후 서독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간단한 이력을 보더라도, 그는 <33년세대>에 해당한다.. 그가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한 기록인 <어느 독일인 이야기: 회상 1914-1933>에서 회고하듯, 이 세대는 유년 시절 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체험하고, 청소년기 바이마르 공화국의 위기와 이후 이어진 국가사회주의의 <청소년 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던 세대이다.. 하프너는 이들 세대보다 4-5년 빨랐고, 또 보수주의적인 독일 교양시민 계층에 속했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의 광풍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었다.. 그가 나치 독일을 떠나게 된 <개인사>는 <어느 독일인 이야기>에 잘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의 견해는 보수주의적 독일 교양시민 계층의 그것에 가깝다..

 

2차 세계대전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가 종종 빠지게 되는 오류 중 하나는 히틀러에 반대하는 입장을 무작정 <진보적>인 것으로 간주해버린다는 것이다..왜냐하면 지극히 보수적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이들 역시 히틀러에 반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2차대전 시기 히틀러 정권에 대한 유일한 반란을 주도했던 슈베렌 폰 슈바넨페트 역시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자였다.. 그리고 이 때 히틀러에 반대하는 이유 역시 다양할 것이다.. 문제는 이 책에서 하프너가 그 한 이유로서 지극히 유럽중심주의적인 견해를 아주 솔직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1938년 가을 혹은 1940년 여름의 유럽을 되돌려서 잠깐 정지 화면을 만들어 관찰하고, 이어서 히틀러 이후 유럽의 어두운 상태와 히틀러 이전의 상황을 비교해보면, 분명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히틀러 이전 세계의 상황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유럽은 정말로 통합해야만 했던 게 아닌가? 이런 통합은 폭력의 도움 없이 이룰 수 있었는가? 또한 적어도 처음 단계에서는 가장 강한 세력의 지배가 필요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가장 강한 세력은 당시 독일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두 세대 동안은 그렇다고 답할 사람들이 독일 국민뿐만은 아니었다. 1938년과 1940년의 사정은, 독일뿐 아니라, 유럽 사람들도 망설이기는 하겠지만 유보 조항을 둔 채로 "그렇다"라고 대답할 상황이었다. 그리고 1945년 이후의 상황을 보면 그 대답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아니면 적어도 그들이 생각한 독일이 히틀러의 독일만 아니었다면 틀린 것이 아니었다.

 

이 대목을 읽고 있노라면 정말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하프너는 히틀러의 독일만 아니었다면, 유럽은 통합을 이루어 2차대전 이전, 그러니까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식민지를 영유한 전 세계의 패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을텐데라는 위험한 가정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험은 20세기의 유럽이 오로지 독일의 주도권 또는 미국-소련의 주도권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주었다>고 쓰고 있다. 히틀러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예를 들어, (저자가 속내를 밝히듯이) 비스마르크 같은 이가 주도를 했다면, 유럽은 독일 중심으로 통합되었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히틀러가 1938년 동유럽에서, 그리고 1940년 프랑스에 승리를 거둔 다음 유럽 대륙에서 나타났던 어느 정도의 합의와 복종의 각오에서 보듯, 독일 중심의 통합에 유럽 국가들 역시 어느 정도 동의했을 것이라는 것.. 좀 더 나아가, 1945년 2월 보어만 구술에서 히틀러가 했던 <나는 유럽의 마지막 기회였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하프너의 시각에서 본다면 문제는 히틀러가 중대한 <잘못들/실수들>을 저지름으로써 <그 기회를 망쳤고>, 결과적으로 18세기 유럽의 팽창과 제국주의 이후 확립된 유럽의 우위를 결정적으로 실추시켰다는 것이다.. 그 잘못들/실수들이 바로 반유대주의이자, 1930-40년기에 그가 범했던 정책적 오류들이다..

 

하지만 이것을 히틀러의 정책적 오류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히틀러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지 못했다면 오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체코/폴란드 점령, 프랑스 점령과 같은 일련의 움직임은 결코 유럽의 통합이라는 목표 아래 진행된 것이 아니다.. 히틀러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상세한 연구들이 이미 출간되었기 때문에 이를 참고하면 되겠지만, 여하튼 유럽 통합이 히틀러의 의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유럽의 모든 사람들이 예견하지 못했던 히틀러식의 전격적인 작전에 의해 성립된 1930-40년의 정치상황을 앞에 두고, 히틀러가 실수를 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자의적인 평가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는 좋았던 과거 유럽에 대한 불온한 노스탤지어가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어쨌거나 그 문제는 유럽인들끼리 해결하라고 두더라도, 이 뼛속까지 유럽중심적인 사유에서 과연 식민지로 전락한 아시아/아프리카의 운명같은 것이 들어올 여지는 없어 보인다.. 2차대전의 종결과 함께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하프너의 사유에 무턱대고 박수를 쳐줄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프너의 논리를 조금만 비튼다면, 한국을 비롯한 제 3세계는 히틀러 덕분에 독립 국가를 수립할 수 있었다는 논리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히틀러의 실수/잘못을 박수를 치고 환영해야 한다는 것인가..

 

물론 산문가/작가로서 하프너의 재능 자체를 폄하할 수는 없다.. 그리고 20세기 초 독일 교양시민사회의 지적 자양분을 흡수하며 성장한 그가 유럽 이외의 대륙에 철저하리만큼 무관심하다는 사실 자체를 탓하고 싶지도 않다.. 그것은 당대 유럽 부르주아적 세계관이 갖는 한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세계관이 너무나 선명히 드러나는 이 조그만 책자에 무턱대고 찬사를 보낼 수만은 없다.. 그것은 (유럽이 아닌, 하지만 그렇다고 커다란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닌 제국 일본의) 식민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이 땅에서 책 읽는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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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전 - 문학의 프로이트, 슈니츨러의 삶을 통해 본 부르주아 계급의 전기 서해역사책방 14
피터 게이 지음, 고유경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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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부르주아의 정신에 대해 지극히 부르주아적 관점으로 씌어진 역사서. 저자의 박학다식함과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은 이미 검증이 된 듯 한데, 뭔가 좁혀지지 않는다. 19세기 bg 정신이 내포하는 극도의 다양성에 대한 규명? 이 책의 집필의도를 묻는 작업 역시 정신분석학적 탐구주제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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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노바의 귀향.꿈의 노벨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7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모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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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고 매혹적이다. 동시대의 프로이트가 부러워할만하다. 그가 평생을 공들여 쌓아올린 정신분석의 정수를 슈니츨러는 자유자재로 문학장에 담아낸다.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면서(있었기에) 그들은 1922년에야 처음으로 만나 긴 시간을 보낸다. 다음은 피터 게이의 <부르주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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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세기의 여름
플로리안 일리스 지음, 한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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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 직전의 섬광을 그려낸 매혹적인 책이다. 물론 아는 만큼 보인다. 츠바이크의 자서전과 <19세기 빈>, <봄의 제전> 정도를 끼고 본다면 훨씬 흥미로울 듯. 나올만한 대가들은 이 때 다 나왔다. 그에 비하면 오늘의 지성사는 얼마나 초라한가. 하지만 빛나던 유럽을 기다리는 것은 전쟁의 수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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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 버린 사람들 -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사건의 기록
김효순 지음 / 서해문집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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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침묵의 시선>을 보았다..

사람들이 오지 않은 한적한 오후 시간대, 하루에 단 한 번, 그것도 단 일주일만 상영하는 영화.. 오늘이 그 마지막날이었다..

역시 바삐 일하며 살아가는 성실한 사람들은 볼 수 없는 시간대라서인지, 극장 안은 한산했다..

그리고 1시간 43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말 그대로 지옥을 보았다..

전작 <액트 오브 킬링>이 가해자의 자기부정, 합리화를 다룬 영화라면(하지만 그 합리화는 결코 완전할 수 없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피해자 역을 맡은 살인자가 그 공포를 참아내지 못하고 구역질 하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이 다큐는 피해자의 시선으로 과거의 아픈 역사를 재조명해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당시의 가해자들이 여전히 권좌에 앉아 있는 현실, 그리고 여전히 보이지 않는 억압과 공포가 드리워져 있는 사회에서 피해자들은 침묵을 강요당한 채 살아간다.. 용기를 내어 자신의 형 람디의 죽음을 추적하며 관련자들을 찾아가는 동생 아디에게 그들은 "왜 평화로운 이 세상에서 과거의 아픈 상처를 들쑤시느냐",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잊어라"라고 말한다.. 아니, 때로는 "너같은 놈들이 숨어있는 빨갱이라며" 대놓고 위협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결코 자신의 살인행위를 뉘우치려 하지 않으며,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지려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웃으며 자신이 했던 살인을 무용담처럼 지껄여댄다.. 처음에는 그들 역시 자신이 한 일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며 그들의 행동을 어떻게든 이해하려 하는 아디는 가해자들을 만날 때마다 절대로 넘어갈 수 없는 거대한, 굳건한 장벽과 같은 것을 실감한다..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며, 오히려 과거의 상처를 들쑤시고 있다며 위협하는 가해자들 앞에서 아디는 점점 말을 잃어간다.. 눈물이 고인 채 멍하게 상대방을 바라보는 그의 슬픈 눈이 잊혀지지 않는다..

 

가해자/학살자는 여전히 승리를 멈추지 않고 있고 피해자는 여전히 패자로, 두 눈을 내리깔고 입을 닫은 채 살 수밖에 없는 사회.. 아니 이것도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리고 이게 비단 머나먼 저 동남아시아의 이야기일까..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라는 역사적 사기극의 피해자들이었던 이들의 질곡의 삶을 그려낸 이 책(<조국이 버린 사람들>)을 읽노라면, 그것은 결코 과거의 이야기도, 그리고 머나먼 남의 나라 이야기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이미 서승, 서경식 선생의 글들을 통해 서씨 형제의 사건은 한국사회에도 조금이나마 알려졌지만, 우리는 그 외 수십 명의 자이니치 청년들이 과거 70년대 군부 독재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았다.. 아니 아예 관심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왜 일본에서 살수밖에 없었는지, 왜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를 모국어로 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들이 70년대 풍요로운 일본 사회를 뒤로 한 채 독재의 서슬퍼런 한국사회로 유학을 왔는지, 우리 사회는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비교적 자유롭게 남과 북의 사회를 바라보던 그들은 공안당국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예전 <제 5공화국>이라는 드라마에서 이학봉 역을 맡은 탤런트가 실감나게 말했던 명대사, <엮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들은 정말 그렇게 말도 안 되게 엮여서 줄줄이 감옥에 들어갔다.. 국내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이 별로 없었던 그들은 형무소에서 자행되는 온갖 폭력을 몸소 받아낼 수 밖에 없었다..

 

<민주화>가 되었다고 세상이 정말 좋아졌을까.. 과거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에 만들어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 각종 위원회들의 활동으로 그나마 우리는 과거 군부 독재시절의 폭력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적어도 법적으로 많은 이들이 다시 무죄판결을 받고 복권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의 잃어버린 청춘의 세월을, 또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몸을 다시 되돌릴 수 있을까.. 그리고 당시의 가해자들이 진정 제대로 된 사과 한 번 한 적 있었던가.. 그들은 여전히 승리자로, 권력의 상층부에 앉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침묵의 시선>을 보면서 내내 느꼈던 불편함, 역겨움, 그리고 비참함은 그 현실이 바로 우리네 삶의 어떤 부분과 너무나 닮아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느낌이었다.. 우리네 현실이 그나마 영화 속의 그 지옥보다 나은 것이라면, 그것은 그 소름끼치는 폭력에 맞서 계속해서 말하고 또 싸워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계속 과거의 상처를 응시하고 말하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의 상처를 왜 들쑤시느냐>, <가만히 있어라>라고 말하는 <양식 있는> 사람들에 맞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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