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전집 5
프란츠 카프카 지음, 오용록 옮김 / 솔출판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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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16년의 마지막 날부터 2017년의 첫날에 걸쳐 카프카의 <성>을 읽다..

95년 여름, 기숙사에서 지금도 선명한 빨간 색 표지의 범우사 판, <성>을 읽은지 꼬박 22년만에 이루어진 성으로의 재도정이다..

새마을운동 깃발이 아직 휘날리던, 아침마다 6시가 되면 기상음악과 함께 근린공원에서 아침체조를 해야 했던 기숙사에서, 꽤나 성실했던 까마득한 학번의 룸메 형님의 성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끌려나가 기지개를 켜고 돌아와 하루에 서너 페이지씩 읽던 시절이 있었다..

기상음악으로 김광석의 <일어나>가 울려퍼지던,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 곳이었다..

-광석 형님이 이 사실을 알았으면 얼마나 비통해 했을 것인가..-

 

범우사판의 다소 고답적인 번역투 탓도 있었겠지만.. 성은 그닥 진도가 나가지 않는 소설이었다.. 하루에 서너 페이지로 읽기를 제한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2016년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으면서, 작품이 주는 흡입력에 새삼 놀라웠다.. 그건 내가 나이가 든 탓일까.. 아니면 세상이 그만큼 망가졌다는 탓일까.. <응사>의 장밋빛에 동조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90년대 중반은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이건 결코 기억의 습작의 영향만은 아닌 것 같다..

 

새해 아침에 일어나, 홀로 소파에서 카프카의 성의 마지막 장들을 읽었다.. 처음의 강렬함에 비해 후반부로 갈수록 조금씩 독해가 버거워진다.. 도저히 파악조차 불가능한,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포 위에서 군림하는 위압적인 성=관료제와의 싸움/투쟁 속에서 지쳐가는 K의 모습을 보며, 나 역시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면장집을 찾아가고, 또 프리다를 얻기 위해 여주인과 어찌 보면 무의미해보이는 대화를 이어가고, 무모하게 클람과의 만남을 기획하다가 계속 좌절하는 K는 결국 프라다를 잃고, 자신의 직업/임무와 관련해서도 의미있는 성과를 얻지 못한 채 계속 빙글빙글 그 주변만을 배회하고 있었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그를 엄습하는 <졸음>은 아마 그의 피로감의 한계가 절정에 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그는 졸음 탓에, 우연히 찾아온 성의 관리/비서와의 만남 역시 자신의 의도대로 이어가지 못한 채, 다시 무기력하게 패퇴한다..

 

물론 이 소설은 미완이다.. 카프카는 과연 어떤 결말을 예비하고 있었던 것일까. <소송>에서와 같은 개같은 죽음을? 아니면 한걸음이라도 성에 다가설 수 있다는 희망을 남기려 했을까.. 아직까지는 전혀 다음을 예측할 수 없다.. 아니 조금 무의미하기까지 보이는 보이는 행동들과 대화들이 만들어낸 짙은 안개 속에서 독자인 내가 그 끈을 놓쳐버렸는지도 모른다.. <무의미>에서 어떤 의미를, 혹은 무의미를 찾는 것이 이 소설의 문제의식이라면, 나는 그것을 찾다가 하루가 저물어버린 법 앞의 그인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카프카의 작품이 푸코가 탁월하게 그려낸 규율권력의 압도적인 외관 속에 숨어 있는 관료제 자체의 우스꽝스러움을 폭로하는 블랙유머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이번에 <성>을 다시 읽으면서 어쩌면 이 작은 인간들의 우스꽝스러운 행위들의 총체야말로 관료제가 갖는 힘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다시 머릿속에 또아리를 틀었다.. 마치 상대방을 쓰러뜨리기 위해 강한 펀치를 날렸는데도, 뭔가 주먹이 쑥 들어가버릴 뿐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 느껴지는 찝찝함, 공허함같은 그런 느낌.. 관료제는 바로 그런 좌절감을 불러일으키는 성과 같은 곳인지도 모른다.. 2016년 연말을 우울하게 만들었던 청문회의 풍경-나는 아무 것도 모르오!!-을 보면서 그런 느낌이 더욱 짙어졌다..

 

그렇다면 그런 사회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어떤 싸움을 해야 하는 것일까.. 성의 마지막 결말은 왠지 승산 없는 싸움에서 몰릴 대로 몰린 K의 무력함을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다.. 심지어 때로는 대등한, 아니 우위에서 대화를 나눴던 여관집 여주인과의 관계도 25장에서는 완전히 그 관계가 반대로 뒤집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말 그런 것일까.. 혹시 이 역시 정면으로 부딪쳐서는 절대로 승산이 없는 이 싸움에서 K가 선택한 새로운 투쟁 전략인 것은 아닐가..

 

바틀비가 문득 떠올랐지만, 아직은 스쳐 지나가는 느낌 뿐.. 나 역시 그의 싸움의 의미를 지금 당장 정의해내지는 못할 것 같다.. <성>의 미완의 장은 결국 K의 싸움이자, 독자인 우리들의 싸움인 것이다.. 

 

 

 

관의 결정은 수줍은 소녀같다..

관청과 직접 접촉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K는 눈에 선히 가까이 있는 것, 자기 자신을 위해, 게다가 맨 처음만은 자진해서 싸우는 데 반해 관청은 비록 조직은 잘 되어 있을진 모르나 항상 멀리 떨어져 보이지 않는 분들의 권위를 빌려 방어해야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공격자이며, 그리고 그 혼자만 싸우는 게 아니라 분명 다른 세력도 싸웠으며 그는 이들을 모르지만 이들이 있다는 것은 관청의 조치로 미루어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관청에서는 처음부터 사소한 일을 갖고-지금까진 그 이상 되는 문제는 없었다- 그를 방해하진 않았으며 그럼으로써 그에게서 하찮고 손쉬운 승리 가능성, 그리고 이 가능성과 아울러 그에 따른 만족감과 거기서 생긴, 장차 벌어질 큰 싸움에 대한 자신감을 앗아갔던 것이다. 그 대신 그들은 K를, 물론 마을 안에서만, 어디든지 가고 싶은 데를 마음대로 나다니며 제멋대로 굴고 약해지게 만들어, 아예 여기선 싸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대신 그의 삶을 사적인, 전혀 종잡을 수 없고 불투명한, 생소한 것으로 바뀌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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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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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히지 않는다. 전형적인 독학자의 책.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는 분명 흥미롭지만, 그 에피소드들로 성좌를 만들어내는 내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 저자의 텍스트에 쏟아진 과도할 정도의 찬미가 오히려 분석하고 싶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물론 <야전과 영원>을 아직 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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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4
제인 오스틴 지음, 원영선.전신화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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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빅토리아 사회에서 빨간 약을 먹고 현실이 매트릭스임을 깨달아버린 여성의 삶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겨운 것이었을까. 자신을 에워싼 높고 두터운 벽에 막혀버린 말년의 오스틴의 쓸쓸함과 비애가 잘 묻어나는 작품. 어쩌면 가장 최소한의 설득을 통해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꾸고 싶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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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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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간에 걸쳐 꼬박 읽다.. 놀라운 흡입력이다.. 19세기 초 미국 남부사회의 숨막히는 암흑과 같은 현실을 타임슬립이라는 장치를 통해 재현해낸 것은 천부적인 이야기꾼의 자질.. 그 밀도는 가히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에 견줄만하다.. 그리고 나무랄데 없는 번역도 몰입도를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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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 - 황현이 본 동학농민전쟁
황현 지음, 김종익 옮김 / 역사비평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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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본업인데도 불구하고.. 

요새 책을 읽을 때마다 어딘가 뜨끔뜨끔한 느낌이 들어 책을 놓는 경우가 많아졌다..

 

얼마 전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금 한국사회의 풍경이 흡사 신소설의 풍경과 유사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매천의 <오하기문: 오동나무 아래서 역사를 기록하다>을 읽노라니 19세기 구한말의 풍경과 지금의 시국이 겹쳐지면서 자꾸 한숨이 나오게 된다..

 

몸과 마음이 내려앉아서 더 이상 글쓰기가 쉽지 않다.. 다만 글을 읽다가 또 뜨끔한 대목이 나와 잠시 적어둔다.. 예나 지금이나 궁궐에 계신 분들은 우주의 기운을 받기를 좋아하나보다.. 안타까운 일이다..

 

지난 임오년(1882, 고종 19년) 변란 당시에 왕비는 충주에 머물면서 요사스러운 한 무당과 자주 왕래했다. 그 무당은 길흉화복을 기막히게 알아맞혔다. 왕비가 몇 월 며칟날 복위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그대로 들어맞았다. 왕비는 그 무당에게 홀딱 반해, 마침내 서울로 불러들여 북묘에 살면서 기도를 주관하게 했다. 무당은 왕비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머리를 쓰다듬고 배가 아프다고 하면 배를 쓰다듬었는데, 그 손길을 따라 통증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잠시도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왕비는 그 무당을 '언니'라고 불렀으며, 때에 따라서는 '진령군' 또는 '북관부인'으로 부르기도 했다. 무당은 궁중을 출입한 지 겨우 1년밖에 안 되었지만, 날이 갈수록 더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윤영신, 조병식, 이용직 등이 그 무당과 의형제를 맺고 누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모두 그녀의 도움으로 관찰사 자리를 꿰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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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컴맹 2018-04-27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기시감이라니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