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과 망각의 책 밀란 쿤데라 전집 5
밀란 쿤데라 지음, 백선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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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맞는 오랜만의 주말 오후..
한동안 미뤄두었던 책정리를 다시 하다가, 낯익은 표지의 소설 한 권을 꺼내들었다..
밀란 쿤데라, <웃음과 망각의 책>, 정민용 역, 문학사상사(4판, 1995)
천사들이 원을 지어 춤을 추면서 하늘 위로 떠오르는데, 그 아래 그림자로 악마가 웃고 있는 꽤 유니크한 표지가 인상적이었던 소설이다..

사실 이 책에는 약간의 사연이 있다.. 95년 대학교에 막 들어와서 <서양문명의 역사>라는 수업의 첫 과제물로 보고서를 쓰기 위해 쿤데라의 <농담>을 하품을 참아가며 읽던 한 봄날의 주말 오후.. 기숙사에 있던 한 친구가 방으로 찾아왔다.. 지방의 같은 고등학교에 함께 재수를 하고, 서울로 올라온 친구였다. 잠깐 그 기숙사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그 곳은 지방 출신 아이들이 서울의 악에 물들지 않도록, 지방 유지들이 돈을 모아(아마 거기에는 지방세도 들어갔겠지만) 만든 기숙사였다.. 태극기와 '새마을 깃발'이 나란히 걸려 있던 그 곳은 아침 6시 기상/아침운동, 저녁 11시 귀사, 그리고 화요일마다 정체불명의 '귀빈'들이 와서 수감생 전체를 대상으로 '정신교육'을 실시했던 소위 '학숙'이었다.. 90년대 중반의 신입생 시절에 11시 귀가가 가당키나 한 일인가.. 덕분에 기숙사 옆에 있던 한 공원에는 새벽 5시 기숙사가 문을 열 때쯤 은근슬쩍 들어가기 위해 술취한 사생들이 벤치에 앉아 잠을 청하기도 했다.. 1개월 기숙사비 10만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 그리고 부모님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자는 어줍짢은 '효심' 때분에 어쩔 수 없이 살았던 곳이었다.. 뭐 어쨌거나의 이야기지만.. 어찌됐건 그 때 녀석은 졸린 눈으로 <농담>을 읽고 있던 나에게, 쿤데라의 소설을 그렇게 재미없게 읽다니.. 하면서 자기 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들고 왔다.. 그 책이 바로 <웃음과 망각의 책>이다..

두 책의 편집/제본의 영향도 있었겠지만(내가 가진 책은 예전 지호출판사 판의 <농담>이다), 작가의 자전적 체험을 풀어서 쓴 <농담>에 비해,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인 <웃음과 망각의 책>은 훨씬 재미있었고, 또 유쾌했고, 또 에로틱했다.. 물론 여기에는 책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면서, 녀석이 지어내는 특유의 <킬킬>거리는 웃음이 왠지 소설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등학교때부터 녀석은 소위 <왠만큼 공부하는 축에 속하는> 모범생 부류와는 조금 달랐다.. 수능/본고사 1세대이기도 한 덕분에, 고 3이 되서도 <한국근대소설>이나 <수필, 평론집>을 다이제스트본으로 읽는 것이 고작이었던 시절(그래도 그나마 학력고사세대에 비하면 행복한 것일까)에도, 녀석은 <카오스이론>이니 <악마어사전>이니 심지어 <프린키피아>를 꺼내 읽으면서 종종 특유의 <킬킬>거리는 웃음을 짓곤 했다(물론 새로운 수능/본고사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지방의 일선 교사들로서는 학생들이 읽는 책에 대해서 그다지 '자신있게' 제재를 가할 수 없었던 그런 시절이었기 때문에, 고 3 교실에서 이런 책들이 돌아다니는 것도 가능한 이야기였겠지만). 그 이후 당시 꽤 번역되어 있던 쿤데라의 소설들도 빠짐없이 읽게 되었다.. 그러고보면 90년대 초중반은 하루키의 해이자 쿤데라의 해이기도 한 듯 싶다.. 90년대 후반이 넘어가면서 그들의 소설들은 왠지 거품이 빠진 듯 예전에 가졌던 생명력을 상실해버렸다..

(그런 점에서 하루키가 세계명작화되고, 쿤데라의 전집이 만들어지는 현상에 대해서는 생각해볼만한 일이다..)

녀석의 독서편벽은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았다. 1학년 여름, 학회 세미나때문에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이니 <프랑스혁명사>를 끙끙대며 읽을 때도, 녀석의 책장에는 로트레아몽이나 정체를 알 수 없는 과학 관련 서적, 그리고 각종 판타지 서적들이 꽂혀 있었다.. 로트레아몽이라니 뭐 이건 <졌다>라고 말할수밖에 없는 것이다.. 학교가 달라 서로서로 만나기가 쉽진 않았지만, 가끔 녀석이 다니는 학교 주변(신촌)의 왠지 모를 포스가 느껴지는 바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서울에서는 <녹두거리>밖에 모르던 나로서는 <문화적 충격>을 받기도 했고, 또 덕분에 지금 내 책장에도 녀석이 추천해준, 평소의 나라면 절대 손이 가지 않을 장르의 책들이 몇 권 꽂혀  있기도 하다.. 하긴 김용의 <소오강호>를 보면서도 문자를 쓰는 녀석이었으니 "끕'이 조금 달라도 달랐다..

군대, 복학.. 나름 바쁜 시간들을 보내다보니 녀석이랑 만나는 횟수도 점차 뜸해졌다.. 그러던 중 녀석은 다니던 학교를 때려치우고 몇년 방황하더니 다시 시험을 보고 지방의 <한의대>에 들어갔다.. 이런 소식을 알게 된 것도, 소위 <자모모임>, 즉 고등학교 시절 맺어진 어머니들의 네트워크에 의해서였다.. 고향에 내려가면 어머니는 종종 누구네 집 아이는 어떻게 됐더라 라면서 소식을 전해주곤 했던 것이다.. 그런 '끈끈한' 네트워크 덕분에 녀석과 다시 연락을 하게 됐고, 1년에 두세번 고향에 내려가면 그때마다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리고 2007년 가을 한국을 떠나면서 간헐적이던 연락은 다시 끊어졌다..

얼마 전 집에 내려갔더니 어머니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녀석이 행방불명되었다.. 학교들 다니던 중에도 1-2달 정도 잠적을 했던 경력이 있던 터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벌써 1년 반이 넘었다는 것이다.. 어느 지방에서 그를 본 사람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죽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30이 한참 넘은 아들을 어디 가서 어떻게 데려오겠는가 하는 것이 친구의 어머니의 이야기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도대체 어떤  무엇이 30대 중반의 <삶의 무게>를 내팽겨치고 , 이렇게 자취를 감춰버리게 한 것일까..

녀석은 지금도 실종중이다..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웃음과 망각의 책>을 보면서, 녀석의 그 <킬킬>거리는 웃음이 불현듯 몹시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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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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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아렌트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다. 사실 대중적인 책이기도 하고, 내용이나 분석 수준이 평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진도가 나가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번역의 문제’였다. 물론 장남인 아이히만에게 형이 있다는 식의 번역은 애교로 봐준다 하더라도, 국가이성(raison d'état)을 ‘국가적 이유’로 번역하는 건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또 문장 자체의 주술구조가 얽히는 문제는 한 번 정도 윤문을 해줌으로써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그래도 번역자에게 감사하며 책을 읽을 수밖에는 없지만..

 

또 하나의 문제는 제 3제국의 역사, 그리고 제 3제국의 유대인정책에 대한 내 지식의 빈곤도 하나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렌트는 처음부터 이 책의 대중적인 성격을 염두에 두었던 듯(원래 이 책은 미국의 <뉴요커>라는 잡지에 실린 저자의 연재 칼럼을 재편집한 것이다) 상당히 평이한 문장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그 때문인지 전문적인 역사서술이나 사회과학적 서술이 갖는 논리성과 엄격함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능하다면 아렌트도 책 속에서 언급하고 있는 라울 힐베르크의 <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이 엄청난 볼륨의 거작은 다행스럽게도 최근 아주 훌륭한 한국어 번역본이 나왔다고 한다. 언제쯤 읽을 수 있을까)를 책을 옆에 끼고, 아렌트의 책을 읽는다면 훨씬 윤곽이 잘 잡히지 않을까.. 물론 레비의 책도 참고가 될 것이다.. 물론 이렇게 참고 도서가 늘어난다면 당연히 시점의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2차 대전 발발 직전에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계 유대인 지식인, 즉 홀로코스트를 체험하지 않은, 시오니즘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자 한 사회과학자가 홀로코스트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고 한다. 벤야민의 친구이자 시오니즘의 대표적 권위자기도 한 게오르그 숄렘과의 공개 왕복서한은 잘 알려져 있다. 거기서 숄렘은 ‘사랑스러운’ 한나에게, “같은 민족인 유대인에 대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한나의 응수는 “이런 사랑은 나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 나는 그런 공동체에 대한 사랑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으며, 둘째 내 자신이 유대인인 한 유대인을 사랑하는 것은 괴이하다는 것,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뭐, 식민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우리네 지식계에서도 그런 논쟁 자체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조금 더 지저분해지고 감정적으로 화하겠지만... 어쨌든 여기서는 그 논란의 문제를 아렌트가 제기하는 1)악의 평범함이라는 문제와, 2)예루살렘 재판의 문제라는 지점으로 간단히 정리해보도록 한다.

 

 

1. 악의 평범함(banality of evil):

악의 평범성은, 예루살렘의 재판정에 섰던 아이히만의 행위와 증언을 계속 접하는 과정에서 아렌트가 추상화해낸 표현으로, 사실 이 책은 아이히만 재판이라는 세기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바로 이 개념 때문에 전세계적인 논란이 되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사실 이 표현은 책의 마지막에 단 한 번 나온다(물론 논쟁 이후에 씌어진 「후기」에서는 조금 더 자세히 고찰되지만). 그것도 마치 신탁과 같이.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349). 과연 악의 평범함, 혹은 진부함이라는 말을 아렌트는 어떤 의미로 쓰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평범한’이라는 형용사를 이렇게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무수히 많은 유대인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낸 유대인문제 전문가(이주의 달인) 아이히만은 결코 ‘괴물’(푸른 수염의 사나이)이 아닌 평범한 인간이었다」라고. 그렇다면 아이히만이 이런 ‘엄청난’ 비극을 초래할 행위를 그렇게 일상적으로 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렌트는 이를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의 결여, 나아가 사고능력의 결여에서 찾고 있다. 사고능력의 결여는 결코 그의 지능이 낮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사는 체제나 환경에 대해 인식할(비판할) 수 있는 능력의 결여, 즉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fulness)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의 결여를 아렌트는 증언 도중 끊임없이 ‘공허한’ 관청용어에 집착하는(“저는 관청용어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아이히만의 모습에서 찾아내고 있다. 그의 이런 행위는 그 이면에 다른 끔찍한 생각들을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그렇게밖에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하는 능력의 부족(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능력의 부족(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의 부족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106). 악의 평범함은 바로 이러한 무사유를 일컫는 말이다.

특히 아이히만의 언어구사능력(무능력)을 설명함에 있어 제 3제국의 언어규칙을 언급하는 대목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학살’을 ‘최종해결책’, ‘소개’, ‘특별취급’으로 표기하거나, 죽음의 수용소로의 ‘이송’을 ‘재정착’으로 표기하는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인데, 이러한 언어규칙이 고안된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이 규칙은 이 문제 처리에 본질적이었던 아주 다양한 많은 협조체제가 이루어짐에 있어 질서와 제정신을 유지하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거짓말 체계의 통상적 효과는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사람들이 모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살상과 거짓말에 대한 그들의 오랜 ‘정상적인’ 지식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150). →**전전 제국 일본의 경우를 떠올린다면 침략의 이데올로기로 동원된 아시아주의의 미사여구들을 이러한 언어규칙의 예로 볼 수 있을까. 이런 각종 미사여구들을 되풀이함으로써, 자신의 행위가 아시아에 대한 침략인지 해방인지 애매해져버리는 상황이 전전 일본에서도 자주 나타났던 것이다. 이는 ‘침략’이라는 단어 대신 ‘진출’이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현대 일본사회에도 강고히 남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심, 이상주의는 우리가 그 말을 떠올리게 되는 일반적인 양상과는 다른 식으로 작동하게 된다. 실제로 아이히만은 이상주의자였다. 하지만 이 때 이상주의자란 자신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한 사람이고,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 특히 어떤 사람이라도(아이히만의 말대로라면 자신의 아버지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97)을 의미한다. 또 그는 양심에 대해서도 자신이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그런데 그 일이란 수백 만 명의 남녀와 아이들을 상당한 열정과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죽음으로 보내는 것이었다(78-79). 다시 말하면 아이히만으로 하여금 종전 무렵 유대인 처리 문제에 대해 결코 타협하지 않는 태도를 갖도록 만든 것은 그의 광신이 아니라 바로 그의 양심이라는 점이다(223). 이는 비단 아이히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제 3제국이라는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니, 악의 평범함이라는 문구를 극단적으로 사유한다면, 이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문명화된 나라들의 법에서는 비록 인간의 자연적 욕구와 성향이 때로 살인의 충동이라 하더라도 양심의 소리는 모든 사람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추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땅의 법은 비록 살인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정상적인 욕구와 성향에 반한다는 것을 대량 학살 조직자가 아주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양심의 소리가 모든 사람에게 “너는 살인할 지어다”라고 말하기를 요구한다. 제 3제국의 악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악을 인식하게 되는 특질(유혹이라는 특질)을 빼앗아버렸다. … 그들은 그러한 유혹에 어떻게 저항하는지를 배워버렸던 것이다(226-227).

 

2. 재판의 문제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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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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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면서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 <애너벨 리>, <롤리타>, 그리고 그의 장편, <만연원년의 풋볼>을 서가에서 모두 꺼냈다. 오에적인, 아니 오에만이 쓸 수 있는 소설. 김지하가 너무나 아쉬워진다. 아니, 오에가 변하지 않은 것은 일본 사회의 전후 민주주의가 오히려 후퇴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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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로서의 인류학자 - 레비스트로스, 에번스프리처드, 말리노프스키, 베네딕트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7
클리퍼드 기어츠 지음, 김병화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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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문화의 번역>이라는 가장 어렵고도 논쟁적인 작업을 수행하면서도 정작 핵심인 <글쓰기>의 문제에는 놀라울 정도로 관심이 없는 인류학계,나아가 여전히 무비판적 <작가론> <작품론>을 양산하고 있는 문학계의 종사자들에게 권한다. 단, 문제의식은 이미 바르트와 푸코로 거슬러올라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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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체 - 자본과 국가 너머의 세상 제국 3부작 3
안토니오 네그리 외 지음, 정남영 외 옮김 / 사월의책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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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그리가 변한 것일까, 내가 변한 것일까. <제국>을 읽었던 때가 2003년이니 벌써 1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제국> 시절의 긴장감은 결여된 좌편향적 교과서를 읽는 듯한 느낌이다. 구성적 힘을 그려내려는 시도의 무모함. 하지만 그 열정만큼은 <세련된?> 우리 지식인 사회에는 없는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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