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 여운, 도쿄 - 일본의 감성을 선물하는 에세이&사진집
이송이 지음 / 하모니북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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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여운, 도쿄]

 

이 책은 ‘1 In Korea’, ‘2 In Tokyo’, ‘3 Tokyo pictures’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도쿄[東京]에 취직하러 가기 전까지의 과정을 기술하고 있는데, 마치 자기소개서를 보는 듯해서 재미있었다. 2장은 도쿄에서의 에피소드를 간략히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3장은 저자의 인스타그램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사진들로 가득 차 있다.

 

 

일본과의 인연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문득 영어가 아닌 다른 외국어 하나쯤은 할 수 있어야지 좀 더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말 갑자기였다. 그렇게 마음먹은 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바로 뛰어갔다.

엄마! 나 일본어 할래!”

? 갑자기 무슨 바람이 나서 일본어래?”

그냥!”

엄마는 왜 많고 많은 외국어 중에, 중국어도 아닌 일본어인지 의아해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냥!’

무언가에 끌리게 되고 좋아하는 데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내 머릿속에서 좋다라는 생각이 생긴 것이고 그 생각 자체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나와 일본이란 나라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p. 10]

 

걸그룹 여자친구의 <시간을 달려서>

다가서지 못하고 헤매이고 있어

좋아하지만 다른 곳을 보고 있어

가까워 지려고 하면 할수록

멀어져 가는 우리 둘의 마음처럼

만나지 못해 맴돌고 있어

우린 마치 평행선처럼

라는 가사처럼, 인연은 바란다고 해서 맺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연이란 그냥이라는 말처럼 우연의 작용일 수도 있고, 수만 번의 생을 윤회(輪廻)하면서 쌓은 업()의 결과일 수도 있다. 저자가 일본어를 공부하고, 도쿄에서의 삶을 그리워하게 된 것은 어느 쪽의 작용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인연 때문이 아닐까?

일본에서의 추억

일본 회사에 다니면서 가장 좋았던 순간이 있나요?”

한국에 귀국 후, 주위 사람에게 종종 들었던 질문이다.

좋은 직원들과 가족 같은 회사 분위기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제일 좋았던 순간은 도쿄 타워를 보면서 회사에 출퇴근할 때입니다.”

도쿄 최고 관광지이자 어쩌면 동경하기까지 했던 도쿄 타워를 보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쌓였던 피로감이 없어졌었고 어떻게 보면 회사원에게 가장 힘든 출퇴근 시간을 가장 기분 좋은 순간으로 만들어 까지 했다. 퇴근 후,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도쿄 타워가 잘 보이는 공원에 앉아 한국에서 찍었던 사진이나 동영상들을 보다 집에 돌아가곤 했다. 한국에서의 나는 항상 친구들과 놀기 바빴고, 집에 있는 시간도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타지에서의 지독한 외로움을 안겨준 도쿄가 있었기에 이제는 한국에서 외로움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하면 이겨 낼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코로나가 종식되어 다시 일본에 갈 수 있다면, 도쿄 타워가 가장 잘 보이는 그때 그 자리에 앉아 외로운 일본생활을 했던 나와 다시 한번 제대로 마주해보고 싶다. [p. 26]

 

사람들은 외로움에 지쳐 애완동물을 키운다는데, 저자는 도쿄 타워라는 애완 건축물을 가졌나 보다. ‘향수병(鄕愁病)’이라는 말은 낯선 곳에서 혼자 살다 보면 외롭고 쓸쓸함을 느끼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닐까?  ,

 

그렇다면 일본 생활 중, 가장 그리웠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두 번째로 많이 듣는 단골 질문이다.

너무나도 평범한 퇴근 후에 제 아지트 단골 술집에서 안주를 친구 삼아 술 한잔 기울이던 순간이요. [p. 33]

어쩌다 한두 번이면 몰라도 계속해서 혼밥, 혼술을 하는 것은 왠지 처량해 보인다. 그렇기에 혼술하는 순간이 가장 그리운 순간이라는 것은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든다.

 

딸랑딸랑

이랏샤이마세! (*어서 오세요!)”

큰 종들이 가득 달린 미닫이문을 열자마자, 엄청난 경력이 있어 보이는 주방장님께서 인사를 크게 외쳤고 나머지 직원분들이 주방장님을 따라 다시 한번 인사를 해 주셨다. 외국인이 거의 없는 작은 동네 술집이었기에 누가 봐도 일본인처럼 보이지 않는 나에게 시선 집중이 되는 게 피부로 느껴질 만큼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여러 눈동자들과 눈 마주침이 있고 난 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메뉴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실은 너무나도 오고 싶었던 곳이라 예전부터 인터넷으로 메뉴 조사를 다 끝냈지만 신중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충분히 보여준 후 주문을 이어 나갔다. 테이블에 있는 1인석 자리에 앉아 안주를 저녁 삼아 먹으며 한국에서 찍었던 동영상을 보며, 회사에서 못 했던 업무를 하며, 주말에는 어떤 하루를 보낼지 계획하며 그렇게 그날 하루도 얼큰하게 마무리하였다.

 

늘 처음이 어렵다.

나에게는 내심 큰 용기가 필요했던 혼밥 혼술이란 도전을 해보고 나니 두 번째, 세 번째, 수십 번째 할 땐 너무나도 익숙하게 행동하게 된다. 첫 시도만 용기 내서 하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이란 나와의 믿음도 생기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단골집이 된 이자카야에서는 처음처럼 큰 인사는 아니었지만, 사장님의 보이지 않는 마음의 인사를 알 수가 있었다. ‘왔어? 오늘 일 수고했어! 배고프지? 뭐 먹을래?’

이제는 익숙해진 큰 종들이 울리는 가게에 들어갈 때, 말하지 않아도 정이 가득 담긴 사장님의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pp.31~33]

 

아마도 저자는 혼밥이나 혼술 그 자체보다 새로운 도전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게 해주었기에 혼술의 순간을 그리워했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저자에게 있어서 도쿄는 그저 일본의 도시가 아니라 바쁜 일상을 영위하면서 잠시 숨을 쉬는, 아니 숨을 쉴 수 있는 여유를 상징하는 것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저자는 이 책의 마지막을

한국에서는 하늘을 볼일도, 그런 잠시의 여유조차 없었다. 학교 다닐 때는 학교, 과제, 아르바이트의 반복이었고 하늘을 볼 생각조차 못했던 것 같다. 항상 핸드폰을 달고 다녔기에 고개가 아래로 향한 적은 대다수였지만 내 시선이 위를 향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퇴근 후 집에 가는 길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퇴근길에 보이는 도쿄 타워와 인사를 하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려던 순간, 도쿄 타워 뒤로 보이는 빨간 노을이 나의 발걸음을 자석으로 이끌기라도 하는 듯 노을 쪽으로 끌어당겼다. 정신 차려보니, 마치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 중략 ~

난 행복하고 즐겁게 지낸다.’

나 자신이 좋다.’

후회 없는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생각들을 수없이 하면 뭐하나. 잠시의 여유조차 즐기는 방법을 모르는데. 고장 난 생각을 가진, 모순덩어리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었다. 그날 이후로 결심하게 되었다. 아무리 바쁜 일상을 지내게 되더라도 시선을 빼앗길 만한 하늘과 노을이 있다면 잠깐이라도 좋으니 즐기고 감상할 시간을 나에게도 주자. 그때의 빨간 노을이 아니더라도 좀 더 넓고 다양한 풍경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하나 하나 카메라와 눈동자에 가득 담는 연습을 시작했다. [pp. 94~95]

라고 맺은 것이 아닐까?

 

 

옥의 티

 

Epilogue의 페이지가 206인데 목차에는 098로 되어 있다.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저자(https://www.instagram.com/__songyi___/)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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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와 나오키 : 아를르캥과 어릿광대 한자와 나오키
이케이도 준 지음, 이선희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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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와 나오키: 아를르캥과 어릿광대]는

 

<한자와 나오키: 아를르캥과 어릿광대>는 주인공 한자와 나오키[半澤直樹, 이하 ‘한자와’]의 심사부 조사역 시절 악연(惡緣)이었던 도쿄 본부 영업총괄부장 다카라다 신스케[寶田信介, 이하 ‘다카라다’]의 M&A 지시로부터 실질적인 이야기가 시작한다.

거래처의 요청에 의해 주거래은행이 M&A를 지원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성장의 한계를 느낀 신흥 IT 기업이 전통 기업을 인수하여 영역을 확대하는 것도 문제가 없다. 그렇기에 인터넷쇼핑몰로 성장한 신흥 IT기업인 자칼이 노포(老鋪)라고 할 수 있는 전통의 미술출판사인 센바[仙波] 공예사를 M&A하고자 하는 것 자체는 이상할 것 없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자칼이 양 회사의 주거래 은행인 도쿄중앙은행에 M&A중개를 요청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피인수회사인 센바 공예사에서 M&A를 거부하자 자칼에서 회사의 가치를 뛰어넘는 지나치게 과다한 금액인 15억 엔을 제시하면서까지 M&A에 매달리는 것은 뭔가 수상하다.

여기에 거래처의 대출을 막으면서까지 M&A를 강요하는 본부 영업총괄부의 막무가내(莫無可奈)식 밀어붙이기와 낡은 사고 방식과 직업윤리를 가진, 오사카 서부지점의 지점장 아사노 다다스[淺匡, 이하 ‘아사노’]의 협조가 결합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은행원은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한자와 오사카 서부지점 융자과 과장은

중소기업의 경영은 항상 선택의 연속이지. 그걸 옆에서 지원해주는 것이 우리 일이고.[p. 145]

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은행원이다.

그 결과 주요 거래처 가운데 하나인 이타치보리[立賣堀] 제철의 모토오리 다케키요[本居竹淸] 회장으로부터

실적을 위해 일하는 건 당연하지만, 실적도 되지 않고 윗사람의 눈총을 받으면서까지 고객을 위해서 일하는 것……. 말로는 간단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중략 ~

요즘 은행원은 고객은 나 몰라라 하고 출세만 생각하는 자들뿐이지. 은행의 방침이나 윗사람의 지시라면, 그게 잘못이란 걸 알면서도 무조건 추종하는 걸세. 하지만 자네는 달라. 은행원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믿을 수 있네. [pp. 351~352]

 

이렇게 한자와 과장이 거래처와 은행원의 직업윤리를 위해 일한다면, 이와 반대로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일하는 이도 존재한다.

이를 보여주는 것인 다카라다 도쿄본부 영업총괄부장이다. 과거 한자와 과장으로부터 한방 먹은 것을 되새기며 언제가 보복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심지어 실수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누명을 씌워서까지.

뿐만 아니라, 조직의 이익보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고, 사적(私的) 감정으로 행동하며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이가 아사노 오사카 서부지점장이다.

그는

오랫동안 인사부에서 일한 ‘본부 관료’출신으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엘리트 의식이 배어 있는 사람이다. 아사노에게 지점에서 근무하는 은행원은 무사가 권력을 가졌던 시대의 농부처럼 무시해도 되는 존재에 불과하다. [p. 10]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오사카 서부지점장이라는 자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그 지역의 유력한 거래처들도 무시할 수 밖에.

재미있는 것은 소설에 그려진 그의 행적을 보면, 소위 ‘월급 루팡’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여기에 직장생활을 해본 이라면 조금씩 경험해봤을, ‘잘되면 내 덕분, 잘못되면 네 탓’이라는 마인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어떻게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가 직장에서 흔히 보는 유형의 사람인 셈이다.

 

자, 당신이라면 어떤 삶을 택할 것인가?

 

참고로 한 마디 더 하자면, 미나미다 츠토무[南田努] 대리는 지점장과의 이야기를 비밀로 한 한자와 과장에게 섭섭하다는 말을 한 행원에게

은행원이란 건, 사실을 알고 나면 책임이 생기는 직업이야. 그래서 모르는 편이 좋은 일도 있어. [p. 338]

라고 말했다. 아마도 은행원 출신의 작가가 생각하는 은행원의 이미지가 아닐까.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인플루엔셜’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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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동남아 이야기 : 제2권 탐욕과 정복의 시대 - 믿고 보는 신일용의 인문교양 만화 우리가 몰랐던 동남아 이야기 2
신일용 지음 / 밥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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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독립의 아버지, 호세 리잘

 

호세 리잘(Jose Rizal, 1861~1896)은 중국계 메스티조1) 집안에서 태어났다. 의사가 되기 위해 유학 갔던 스페인에서 식민지 지배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한 <놀리 메 탕헤레(Noli Me Tangere, ‘Touch Me Not’의 라틴어)>라는 소설을 발표하여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이 소설 때문에 그는 퇴학당하고 필리핀으로 추방되었다. 귀국한 후 그는 필리핀 동맹(La Liga Filipina)를 조직, 인도의 간디처럼 비폭력과 스페인 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자치 운동을 주장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1896년 스페인 식민지 군에 의해, ‘KKK’ 혹은 ‘카티푸난(Katipunan)’이라는 무장혁명을 위한 비밀조직의 배후로 몰려 공개 총살되었다. 그의 죽음으로 필리핀인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남긴 절명시(絶命詩)는 ‘나의 마지막 인사’로 알려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19세기 스페인 시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고 한다.

 

나의 마지막 인사

 

안녕, 나의 사랑하는 조국, 태양이 쓰다듬는 땅,

(Adios, Patria adorada, region del sol querida,)

동방의 바다의 진주, 우리의 잃어버린 낙원이여!

(Perla del mar de oriente, nuestro perdido Eden!)

기꺼이 너에게 나의 슬프고 억눌린 삶을 바치노라, …

( A darte voy alegre la triste mustia vida, …)2) [p. 57]

 

 

최강의 군사강국, 식민지가 되다[미얀마]

 

19세기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강국은 버마였다. 라이벌인 시암(태국)은 버마를 상대로 패권 싸움을 벌였지만 열 번의 전쟁이 일어나면 아홉 번은 버마의 승리였다. [p. 64]

 

9세기 중반 운남(雲南)의 남조(南詔)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 지역에 살던 버마족과 타이족이 동남아시아로 이주했다. 당시 버마 남부에는 몬(Mon)족이, 중북부에는 퓨[Pyu, 驃]족이 살고 있었는데, 버마족이 퓨족을 대체하여 중북부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들 버마족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왕조가 바간(Pagan) 왕조다. 오늘날 미얀마의 원형인 바간 왕조는 11세기 아노라타(Anawratha Minsaw, 1014~1077)가 세웠다고 한다. 아노라타는 전통신앙인 ‘낫(Nat)’ 신앙을 정리하고 소승불교를 적극적으로 도입했으며, 남쪽으로는 말레이 반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14세기 초 몽골에 의해 바간 왕조가 멸망한 후, 북부의 버마족 중심의 아바[Ava, 상부 버마]와 남부의 몬족의 바고[Pegu, 한타와디(Hanthawaddy) 왕조, 하부 버마]가 각축을 벌였다. 한때 바고가 아바를 격퇴하고 융성했으나 따옹우(Toungoo)의 버마족이 타빈쉐티(Tabinshweti, 1516~1550)를 중심으로 반격을 가했다. 이때 세워진 것이 두 번째 통일왕조인 따옹우 왕조이다. 타빈쉐티의 처남 바이나웅(Baynnaung, 1516~1581)에 의해 따옹우 왕조는 인도의 마니푸르, 버마 서남부의 아라칸(Arakan) 왕국, 라오스의 란쌍 왕국, 태국 북부 치앙마이의 란나(Lan Na) 왕국 등을 연이어 정복하여 당대 동남아에서 가장 영토가 넓고 강력한 제국이 되었다.

하지만 버마의 광개토대왕이라고 할 만큼 강력한 정복군주였던 바이나웅의 사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한때 속국이었던 태국의 아유타야 왕조의 흑태자 나레쑤언의 활약 등으로 타격을 입어 쇠약해졌다. 이후 프랑스의 후원을 받은 몬족이 독립하여 1740년 후(後)바고[= 부흥 한타와디] 왕조를 세웠다.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무기를 제공받은 후(後)바고 왕조에 의해 몬족의 통일 왕조가 생길 뻔 했지만, 목소보(Moksobo)의 아웅제야(Aung Zeya, 1714~1760)가 이끄는 버마족에 의해 후(後)바고 왕조가 멸망했다. 이후 몬족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아웅제야는 후(後)바고 왕조에 무기를 제공했던 프랑스와 영국을 몰아내고 버마 최후의 왕조인 곤바웅(Konbaung) 왕조를 세운 후, ‘미륵불’이라는 뜻을 가진 알라웅파야(Alaungpaya, 1714~1760)으로 개명했다. 그의 아들인 신뷰신(Hsinbyushin, 1736~1776)은 중국 청(淸)나라의 건륭제(乾隆帝)의 침략을 4차례 물리치고, 태국 북부 치앙마이의 란나왕국과 라오스의 비엔티안(Vietiane)왕국을 점령[1764]했으며,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도 멸망[1767]시키는 등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였다.

그의 후계자들도 버마-시암 전쟁(1785~1786) 이후 인도와 인접한 아라칸 지방(1785), 마니푸르(1814), 아삼 지역(1817)까지 정복하여 넓은 영토를 자랑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인도의 안보가 위협받는다고 여긴 영국과 전쟁[1차 영국-버마 전쟁(1826), 2차 영국-버마 전쟁(1852)]이 벌어졌다. 여기서 잇달아 영국에게 패배한 후 점차 영국의 동인도회사에 국권을 침탈당해 마침내 버마는 식민지로 전락했다.

물론 버마가 무기력하게 무너지지는 않았다.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 버마 최후의 불꽃이라고 할 수 있는 민돈(Mindon, 1808~1868)와 그의 이복동생 카나웅(Kanaung Mintha, 1820~1866)에 의해 개혁이 진행되었다. 카나웅은 민돈 왕의 후계자 자격으로 행정과 군사를 맡아 버마를 민돈 왕과 사실상 공동통치하면서 근대적 상비군의 창설, 전신선 설치 등의 혁신을 이루었다. 하지만, 왕위 계승에 눈이 어두운 민돈의 두 아들, 밍군(Myingun)과 밍곤다잉(Myingundaing)에 의해 국무회의 도중에 카나웅와 그의 아들들이 살해당하면서 마지막 불꽃은 허무하게 꺼졌다.

 

 

동남아 유일의 내륙국가, 라오스

 

5~8세기경 타이족의 일파인 라오족이 라오스 중북부로 이주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1353년 파응움(Fa Ngum)에 의해 ‘백만 마리의 코끼리’라는 뜻을 가진 란상(Lanxang) 왕국이 세워졌다.

라오스 지역은 내륙인데다 산악지형이 대부분이라 경제적으로 풍요할 수가 없었다. 외적의 침입으로 루앙프라방과 비엔티앤을 옮겨 다녔다. 그나마 ‘란상’이 라오스 역사에서 가장 빛난 왕국이었다. [p. 79]

오늘날 라오스의 정체성을 형성한 이 국가는 당초에 느슨한 봉건적 연맹체인데다가 해외세력과의 접점이 없는 내륙국가였기에 국가발전에 한계가 있었다. 결국, 18세기 초에 이르면 왕위 계승 분쟁으로 북부의 루랑프라방(Luang Phrabang) 왕국, 중부의 비엔티앤(Vientiane) 왕국, 남부의 참파삭(Champasak) 왕국으로 갈라지면서 동네북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다가 비엔티앤 왕국의 마지막 왕인 차오 아누윙(Chao Anouvong, 세타티랏 5세, 1767~1829)은 태국과 베트남의 이중 속령(屬領) 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란상 왕국의 재통합을 추진했다. 그는 참파삭 왕국 지역을 재통합한 후 태국과 전면전을 펼쳐 한때 방콕에서 108km떨어진 사라부리(Saraburi)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전열을 재정비한 태국의 반격으로 끝내 포로가 되어 비참하게 죽었다. 라오스 국민영웅이 보여준 마지막 저항은 이렇게 끝났다.

 

 

개혁군주 촐라롱꼰 [태국]

 

태국의 아유타야 왕조가 멸망한 후 세워진 왕조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짜그리(Chakri) 왕조다. 영화 <왕과 나>의 주인공인 몽쿳(Mongkut, 라마 4세, 1804~1868) 시대부터 개혁이 시도되었고, 그의 뒤를 이은 촐라롱꼰(Chulalongkorn, 라마 5세, 1853~1910)이 그 개혁을 이어받아 근대적 국가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촐라롱꼰은 귀족연합의 대표 정도였던 짜끄리의 왕권을 중앙집권적 왕권으로 격상시키고, 노예제도와 평민이 지역의 귀족들에게 동원되어 공짜 노역(corvee)을 제공하는 제도를 폐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근대식 지도를 작성해서 영토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하는 등 근대화에 몰두했고,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태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개혁군주로 꼽히고 있다.

 

전근대적 만달라의 말단을 희생하여 근대적 영토의 주권국가를 확립한 것, 이것이 출라롱꼰의 업적이다. 이런 기3이 있었기에 운7을 활용하여 동남아 유일의 독립국이 될 수 있었다. [p. 180]

 

 

남비엣[南越], 남진(南進)하다 [베트남]

 

오늘날 베트남이라고 부르는 지역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북부의 남비엣[南越]이 중부의 참파 왕국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끝내 남진하여 참파의 흔적을 지워간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처음부터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중국의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남비엣과 상업에 치중한 인도의 힌두문명권에 속하는 참파, 두 나라는 서로를 용납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장기 집권 왕조인 리(Ly) 왕조는 베트남에서 과거 제도를 처음으로 실시한 왕조다. 훗날 8대 혜종(惠宗)의 외척 짠투도[陳守度]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자, 혜종의 숙부 건평왕(建平王) 리롱뚜엉[李龍祥, 1174~?]이 일가를 이끌고 고려로 망명, 귀화하여 화산(花山)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한편 짠투도에 의해 시작된 짠[陳] 왕조는 ‘정송가도(征宋假道)’를 요구한 몽골의 침공을 베트남의 국민 영웅 짠홍다오[陳興道, 1228~1300]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펼쳐 격퇴했다.

 

광남국(廣南國)이라고 불리던 응웬[阮] 정권의 후예인 응웬폭안[阮福暎, 1762~1820]은 삐뇨 드 베엔(Pignead de Behaine, 1741~1799) 신부의 지원 등을 받아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응웬[阮] 왕조를 열었다. 지아롱 황제[嘉隆帝]로 즉위한 그의 장남 응웬푹깐[阮福景, 1780~1801]은 어릴 때부터 삐뇨 신부를 따라 유럽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가 요절하는 바람에, 동생이 민망 황제[明命帝, 1791~1841]로 등극했다. 민망 황제는 철저한 유교 보수주의자였기에 지방 자치를 허용한 총독 제도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적 정책을 펼쳤으며, 수백 년에 걸친 남진(南進) 정책을 완성하여 오늘날의 베트남 영토를 확정했다. 또한 서양과의 교류를 차단했으며, 가톨릭을 박해하여 대규모 순교자를 양산했다. 그의 영향인지 쇄국주의 강경파 대신들에 의해 5대 황제 뒥둑[育德, 1852~1883]이 사흘 만에, 6대 황제 히엡후아[協和, 1847~1883]는 4개월 만에, 7대 황제 키엔푹[建福, 1869~1884]은 7개월 만에 각각 죽음을 당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사실상 마지막 황제인 함니[咸宜, 1871~1944]로 깐부엉[勤王] 운동의 리더이며 가장 과격한 쇄국주의자인 똔땃뚜옛[尊寶說, 1839~1913]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래서 함니는 똔땃뚜옛을 따라 3년간 게릴라전을 치렀지만, 끝내 프랑스의 포로가 되어 알제리에서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프랑스는 1887년 베트남 지역(남부의 코친차이나, 중부의 안남, 북부의 통킨)에 캄보디아 왕국을 포함시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발족시켰다. 이어 주(駐) 라오스 프랑스 부공사였던 오귀스뜨 빠비(Auguste Pavie, 1847~1925)의 활약으로 1893년 태국의 지배를 받던 라오스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합류시켰다.

프랑스는 코친차이나만 직접 통치하고 안남, 통킨, 캄보디아, 라오스는 보호국으로서 왕실을 유지하여 부분적인 자치를 허용하는 형식을 취했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보호통치를 반겼을지 모르지만 베트남은 입장이 달랐다.

껄끄러웠길래 베트남만 코친차이나, 안남, 통킨으로 분리했겠지. [p. 266]

 

다만, 베트남의 분리에는 베트남 스스로가 박끼[北區] 혹은 통킨[北圻, Tonkin], 쭝끼[中], 남끼[南]으로 구분했던 것도 반영되어 있다. 중국 남부에서 이주한 킨[京]족 혹은 비엣[越]족의 폐쇄적인 농업중심의 북부, 말레이계 참파 왕국의 영향으로 개방적인 상업 중심의 중부, 크메르 제국에 속해 있던 남부의 차이는 오늘날에도 언어, 풍속, 문화 등에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옥의 티

 

p. 234

베트남군의 칼에 죽은 전사자보다 급히 철수는 바람에 홍강의 다리가 무너져 죽은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단다. ⇒ 베트남군의 칼에 죽은 전사자보다 급히 철수하는 바람에 홍강의 다리가 무너져 죽은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단다.

 

1) 필리핀에서는 페닌슐라레(스페인에서 파견된 스페인 사람), 인슐라레(필리핀 군도에서 태어난 스페인 사람), 스페인계 메스티조(스페인인과 원주민의 혼혈), 프린키팔리아(원주민 지배계급), 중국계 메스티조(중국인과 원주민의 혼혈), 중국인, 인디오(가톨릭을 믿는 원주민), 모로(이슬람을 믿는 원주민) 순서의 계급제가 존재했다.

2) <돈키호테>를 완역한 민용태 교수의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잘있거라 내 사랑하는 조국이여

태양이 감싸주는 동방의 진주여

잃어버린 에덴이여

나의 슬프고 눈물진 이 생명을

너를 위해 바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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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동남아 이야기 : 제1권 바다와 교류의 시대 - 믿고 보는 신일용의 인문교양 만화 우리가 몰랐던 동남아 이야기 1
신일용 지음 / 밥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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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는

 

동남아’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라는 현수막 광고로 상징되는, 무능력한 남자도 쉽게 결혼할 수 있는 가난한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이미지 혹은 외국인 노동자나 불법체류자의 국가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도

우리도 동남아를 싼 음식이 널린 관광지, 밤거리 문화로만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닌가? 과연 동남아는 그렇게만 알고 있어도 되는 곳인가? [p. 26]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자, 그럼 동남아는 어디를 가리키고 무엇을 의미하는가?

동남아는 아시아 대륙 남단의 ‘대륙지역’[인도차이나 반도]과 해상의 ‘도서지역’[말레이 제도]로 나눌 수 있다. 대륙지역에는 베트남, 미얀마,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가, 도서지역에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동티모르가 속한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보면, 이질적인 존재가 있다. 한자(漢字) 문화권에 속하며, 과거제(科擧制)를 실시하고, 중국의 한자를 개량한 추놈[字? 혹은 ???]을 사용한 베트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한데 묶어 ‘동남아’로 칭하게 된 것은 왜 그런 것일까?

저자에 따르면

동남아시아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이곳을 점령했던 일본군을 무장해체하기 위하여 들어온 마운트 배튼 경의 연합군 사령부를 동남아사령부(South East Asia Command)로 부르면서부터이다. [p. 34]

라고 한다.

너무 성의 없고 편의적인 이름 붙임[命名]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민의 역사

 

동남아의 역사는 이민의 역사라고 한다. 이 지역의 선주민(先住民)은 한때 갈인(褐人)으로 분류되었던, 곱슬머리에 매우 짙은 갈색 피부를 가진 작은 신장의 오스트랄로이드(Australoids) 계열의 네그리토(Negrito)라고 한다. 하지만, 동서양교류의 길목이다 보니 계속해서 새로운 이민자들이 나타났다.

먼저 대륙지역의 오스트로아시아 어족[베트남어, 몬어, 크메르어]과 도서지역의 오스트로네시아 어족[말레이-인도네시아어, 필리핀어, 태툼어, 자바어, 순다어, 세부아노어, 발리어, 아체어]의 1세대 이민자들이 들어왔다. 이후 중국 남부지역[운남(雲南), 광서(廣西)]에서 한족(漢族)에게 밀려난 타이(Tai)족, 버마족이 2세대 이민자에 해당한다. 대체로 이 2세대 이민자까지를 원주민(原住民)으로 간주한다.

 

이 지역에 중국풍이 짙게 묻어나기 시작한 것은 쩡허[鄭和, 1371~1433]의 원정부터 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한 곳이 말레이시아의 믈라카(Melaka)와 인도네시아의 팔렘방(Palembang)이다. 1405년부터 1430년까지 7차례의 대원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들 지역에 중국인 마을, 부킷찌나(Bukit Cina)가 생겨났다. 여기에 눌러앉은 중국인들이 현지 여인들과 가정을 이루면서 중국과 동남아 요소가 혼합된 프라나칸(Peranakan) 문화를 이루었다.

한편 1926년 영국은 말레이 지역의 4개 식민지[페낭(Penang), 싱가포르, 말라카, 딘딩(Dinding)]을 합쳐 ‘해협식민지’를 형성했다. 그리고 나서, 영어도 좀 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잡은 중국인들을 ‘해협 중국인’으로 분류하여 세금징수하청업 등을 맡기며 식민정부와 중국인 사회의 중개 역할을 부여했다. 이들 이외에 19세기~20세기 초 중국인의 대규모 이민기에 막 동남아로 흘러 들어와서 신커[新客]라 불리는 ‘이주 중국인’도 있다. 최하층 생활을 하면서 ‘쿨리[苦力]’로 불리던 이들 저임금 노동자들의 후예가 오늘날 동남아 중국인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인이 타밀(Tamil)족을 중심으로 하는 인도인들을 말레이시아의 고무 플랜테이션에서 저임금 노동자로 데려왔다.

 

 

복잡 다양한 동남아

 

동남아는 생선을 발효한 액젓[Fish sauce]을 주로 사용하는 문화권인데, 태국에서는 남쁠라, 베트남에서는 느억맘, 라오스에서는 빠덱, 캄보디아에서는 쁘라혹이라고 한다. 웬만한 동남아 음식에 빠지지 않는 향신료인 고수[=샹차이[香菜], 코리앤더(coriander)], 대표적인 과일인 망고스틴과 두리안 등에 대해 소개한다. 말레이시아의 아이스 까짱(Ais Kacang), 인도네시아의 첸돌(Cendol), 필리핀의 할로할로(Halohalo) 등 얼음 디저트 등에 대한 안내도 빠지지 않는다.

 

덧붙여서 그들이 자랑스러워할, 캄보디아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크메르 제국[진람(眞臘), 802~1431], 해상왕국 스리위자야 왕국[Sriwijaya, 650~1275], 인도네시아의 최강국이었던 마자파히트 제국[Majapahit Empire, 1293~1527] 등의 역사를 소개한다. 그리고 이어서 1511년 포르투갈의 알부퀘르크(Alfonso de Albuquerque, 1453~1515)에 의해 동남아에서 가장 풍요롭던 무역도시 믈라카가 함락된 이후, 유럽인에 의한 동남아 식민지화가 시작되는 과정도 그리고 있다.

 

동남아에서는 다소 이질적인 존재라서 그런 것일까? <우리가 몰랐던 동남아 이야기> 1권에서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을 베트남에 대해 상대적으로 간략하게 스쳐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전체 4권으로 된 시리즈이다 보니 다른 권에서 다루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만화’라는 형식을 선택했기에 좀더 넓은 연령층에서 접근하기 쉽다. 다른 권들도 비슷한 수준을 유지한다면, 동남아의 전반적인 문화와 이야기에 대해 입문하려는 자에게 좋은 가이드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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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 - 도시와 건축을 성찰하다
승효상 지음 / 돌베개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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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도시와 나쁜 도시


오래 산 부부는 닮는다고 한다. 서로 달리 살던 사람들이 결혼하여 한 공간에 같이 살면서 그 공간의 규칙에 따르다 보면, 습관과 생각도 바뀌어서 결국 얼굴까지 닮게 된다는 것이다. 수도사들이 산간벽지의 암자나 수도원을 굳이 찾는 이유가 그 작고 검박한 공간이 자신을 번뇌에서 구제하리라 기대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 오래 걸리고 더디지만 건축은 우리를 바꾼다. 즉 이런 이야기가 가능해진다. 좋은 건축 속에서 살면 좋은 삶이 되고, 나쁜 건축에서는 나쁘게 된다는 것. 이게 맞는다면, 건축을 통해 인간을 조작하는 일도 가능할 게다. 그래서 옛날부터 절대권력을 가진 자가 건축을 통해 대중의 심리와 행동을 조작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고대에는 신전과 피라미드 등을 지어 민심을 장악했고, 이후 궁전이나 기념탑 같은 건축물도 절대권력의 영광을 칭송하게 하는 도구로 지어졌다. [p. 121]

이런 말들을 보면, ‘건축 만능주의라는 평가해도 할 말이 없다. 만약 저자의 말이 맞는다면, 나쁜 건축으로 이루어진 도시(이하 나쁜 도시’)에 사는 시민은 나쁜 삶을 살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도시가 나쁜 도시일까? 여기에는 가치판단이 작용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민주공화정을 지향한다면, 나쁜 도시가 어떤 형태인지 짐작할 수 있다. 나쁜 도시는 거주지를 계층별로 분류하고, 명령을 전하고 통제하기 쉬운 거리를 구성하고, 권력자의 구미에 맞는 거대 건축과 상징물을 랜드마크로 삼은 도시가 아닐까?


반대로 좋은 도시는 어떤 모습일까?

건축가들이지만 도시에서 정작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건축이 아니라 그곳의 생생한 삶이다. 그들은 현대의 첨단 건축이 즐비한 강남을 피해 강북의 골목길 풍경에 탐닉한다. 통행 기능만 있는 직선이 아니라 지형과 경사를 따라 불규칙하게 조직된 서울의 골목길에서 그들은 건축의 지혜와 영감을 얻는 것이다.

많은 길들이 지난날 재개발의 광풍으로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서울에는 여전히 많은 골목길이 있다. 미로의 도시라면 모로코의 페스가 단연 앞선다. 1,2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이 도시를 안내자 없이 갔다가는 길을 잃기 마련인데, 길이 이 도시를 지탱하는 실핏줄처럼 퍼져 있다. 어떤 길은 몸을 비틀어야 지나갈 수 있는 60~70센티미터 정도의 좁은 폭이어서, 심리적으로 압박을 느끼는 보행자는 그 길에서 그저 속히 벗어나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서울의 골목길은 대략 2~3미터 폭 우리 신체 크기에 딱 적합하여 페스의 답답한 길보다 훨씬 편안하고 밝다. 더구나 경사지인 까닭에 공간 변화가 무쌍할 수밖에 없어, 서울의 골목길을 걷는 것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다. [pp. 44~45]

규격화된 공산품 같은 아파트나 화려한 네온사인을 뽐내는 고층 빌딩이 즐비한 강남보다 오래된 건물, 낡은 창살, 정형화되지 않은 골목길, 시민이 자유롭게 오가는 빈터와 마당이 있는 강북이 더 좋은 도시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 도시를 소개하는 책자에는 그 도시의 상징적 시설물이 등장하게 마련이지만, 사실 이것들은 그 도시에 거주하는 이들의 일상과 괴리가 있다. 실제로 나는 서울의 남산타워에 올라간 적이 없으며 서울숲에도 간 적 없고, 고궁을 찾는 일은 몇 년에 한 번쯤일 뿐이고, 시내에 즐비한 고층빌딩에서도 살아본 적이 없다. 서울을 안내하는 책자마다 그려져 있는 이런 풍경은,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 1923~1985)의 말을 빌리면 허무한 환영일 뿐이다.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사용하는 건축물이 아니라 도시민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빈터나 길가에 도시의 본질이 있다는 것, 그는 이를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라고 했다. [pp. 54~55]



건축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가


건축가는 자기 집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집을 지어주는 일을 고유 직능으로 한다. 그 직능은 다른 이들의 삶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사색과 성찰을 수반해야 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타자화하고 객관화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pp. 9~10]

다시 말해, 저자가 생각하는 건축가는 킹 비더(King Vidor, 1894~1982) 감독의 영화 <마천루(The Fountainhead)>(1949)에 나오는 신념에 찬 건축가 하워드 로크 같은 이다. 따라서 승효상에 있어

건축가는 건축주를 위해 일하는 동시에 사회와 시민을 위해서도 일해야 바른 직능을 지닌 이다. 왜냐하면, 건축주가 자기 재산으로 개인의 집을 짓는다 해도 길 가는 행인이나 옆집 사람도 그 집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건축은 집주인뿐 아니라 일반 시민의 이익도 지켜줄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건축주는 그 건축의 사용권만 가질 뿐, 소유권은 사회가 갖는 게 맞다. 건축이 목표하는 바는 단순한 부동산의 뛰어넘는 공공성의 가치라는 것인데, 이는 바로 건축이 지녀야 할 윤리를 뜻한다. [pp. 204~206]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건축에 시간의 때가 묻어 윤기가 날 때, 그때의 건축이 가장 아름답다고 나는 즐겨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남루했어도, 거주인의 삶을 덧대어 인문의 향기가 배어나는 건축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경이롭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건축은 건축가가 완성하는 게 아니라 거주인이 시간과 더불어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물론, 건축이 거주인에 의해 완성된다고 해서 건축가의 책임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건축가는 모름지기 그 건축이 담아야 하는 시간을 재는 지혜를, 그 풍경의 변화를 짐작하는 통찰력을 지녀야 한다. 그런 건축가가 만드는 건축이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나기 마련이며, 그렇지 못하면 시간을 견디지 못해 소멸되거나 우리 환경의 일부가 되기 위한 비용이 만만찮게 든다. 그래서 애초에 건강한 건축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p. 203]



공공성을 지닌 건축, 공유도시


만약 내가 사는 도시가 나쁜 도시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 부수고 새로 만들어야 할까? 아니다. 그런 식이라면 또 다른 나쁜 도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는 나폴레옹 3세 당시 오스만 남작이 추진한 파리 개조 사업(1853~1870)처럼 마스터플랜에 의한 상의하달(上意下達) 방식의 개조밖에 이루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아름다운 파리를 만든 파리 개조 사업도 시민들의 폭동과 시위의 장소를 제거하겠다는 목적에서 진행되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 지 뻔하다.


심지어 마스터플랜에 의한 도시개조는 그 자체로 이미 시대에 뒤처졌다.

마스터플랜의 허망함을 아는 해외 선진도시는 이미 다른 방법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도시 전체를 한꺼번에 바꾸는 게 아니라 주민과 함께 필요한 작은 부분을 개선하고 기다리며 변화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형식, 시간이 걸리지만 시행착오 없는 이 지혜로운 방식을 침술적 방법이라고 이름했다. 도시는 완성되는 게 아니라 생물체처럼 늘 변하고 진화한다는 이치를 터득한 이 도시침술은 예산도 많이 들지 않지만, 무엇보다 과정이 민주적이고 흥미진진하다. 특히 개발이 아니라 재생이라는 지금 시대의 가치와 부합한다. [pp. 40~42]


재생은 건축가 김면이 <파리, 에스파스(PARIS, ESPACE)>에서 말한 것처럼 과거를, 오래된 것을 부정하고 지워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포용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유휴(遊休) 공간’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쓰임새가 다한 건물이나 장소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프랑스에서는 이미 오래도록 고민해 온 문제이다. 질문을 던지고 타인과 생각을 나누며 그 결과물을 공유하려는 국민성이 있는 그들은, 쓰임이 다한 공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 다 함께 고민하면서 그 방안으로 예술품이나 문화재의 전시를 계획하곤 한다.

예를 들면 프랑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파리의 낡은 옛 병원들을 박물관으로 바꾸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또 도시 안에 남아 있는 커다란 창고 및 교역장, 다리의 하부 공간, 옛 주택과 궁전 등을 사들인 뒤 박물관으로 바꾸어, 교육의 장으로서 사회에 환원한다. 역사성이 있는 공간들을 없애지 않고 전시 공간으로 만들어 ‘도시의 기억’을 이어 가는 것이다.1)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하나하나의 개인은 힘이 없으니 서로 연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연대가 이루어지는 사회가 공유도시이며, 이러한 도시는 공공성을 지닌 건축을 통해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이 책,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건축에 대한 지식을 넓혀주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인문학적 시각으로 건축을 보는 법을 알려주는 책인 셈이다.



1) 김면, <파리, 에스파스(PARIS, ESPACE)>, (허밍버드, 2014), p.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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