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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마쓰를 만나러 갑니다 - 나를 위로하는 일본 소도시 ㅣ 일본에서 한 달 살기 시리즈 1
이예은 지음 / 세나북스 / 2024년 6월
평점 :
한달 살기, 생활인의 삶인가 여행객의 관광인가
‘한달 살기’라는 키워드는 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 이후 천편일률적인 여행에 지친 이들에게 하나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다만 ‘한달 살기’는 비교적 기간이 짧은 패키지 여행이나 자유 여행과는 달리, 현지를 ‘관광’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에서 ‘생활’하는 것이기에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다. 게다가 물가도 고려해야 하기에 ‘동남아시아’를 해외에서 한달 살기의 대상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물론 기왕 해외로 나가는 김에 유럽이나 미국, 캐나다의 비교적 잘 알려진 뉴욕, 런던, 파리, 밴쿠버 등 대도시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출장이나 파견이 아니고서야 보통 사람이 이런 대도시의 물가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래서 뭔가 고즈넉한 정취 가득할 것 같고, 어느 정도 편의시설도 갖춘 소도시에 눈이 가게 된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귀농을 선택했다가 실망하고 도시로 돌아가는 것처럼, 외국의 소도시에서 한달 사는 것조차도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실물을 보는 것처럼 ‘속았다’라는 느낌을 받고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도시에서의 한달 간의 삶을 그리는, 이런 글을 읽는 것은 삶이란 또 다른 형태의 여행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정된 기간 동안 낯선 곳에서 살아 보는 여행은 늘 탐스럽게 반짝이는 인생의 리미티드 에디션과도 같다. 어차피 번외 편이니 평소와는 다른 일에 도전해 보거나, 어떤 역할에도 얽매이지 않은 온전한 나를 여과 없이 드러낼 수도 있다. 아무리 찰나에 불과해도 그런 순간에 대한 기대감이 있다면,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지루한 본 편 같은 일상도 조금은 버텨 볼 힘이 나지 않을까. [pp. 213~214]
다카마쓰[高松]라는 도시는 사실 우리에게는 낯선 도시다. 일본의 수도 ‘도쿄[東京]’, 1859년 개항한 이후 일본 최대의 무역항으로 성장한 ‘요코하마[橫浜]’, ‘눈의 도시’로 유명한 ‘삿포르[札幌]’, 지금은 사슴으로 유명한 옛 수도 헤이조쿄[平城京]였던 ‘나라[奈良]’, ‘천하의 부엌’이라는 별명을 가진 ‘오사카[大阪]’, 도시의 상공업자인 조닌[町人]들의 조직인 에고슈[會合衆]에 의한 자치가 이루어져 ‘동양의 베니치아’라고 불리던 ‘사카이[堺]’, ‘동양의 스위스’라고 불리는 ‘스와[諏訪]’, 천년고도(千年古都)인 ‘교토[京都]’, 외국인 거류지에 건설된 이진칸[異人館]으로 대표되는 이국적 낭만이 깃든 국제도시 ‘고베[神戶]’, 원폭투하로 기억되는 ‘히로시마[廣島]’, 한반도 및 대륙과 가까워 1세기 무렵부터 교역의 창구가 되었던 ‘후쿠오카[福岡]’, 서양문화 수입의 창구가 된 ‘나가사키[長崎]’ 등 일본에는 다양한 매력을 뽐내고 있는 크고 작은 도시들이 많다.
그런데 저자는 굳이 가가와[香川]현의 현청(縣廳) 소재지인 다카마쓰를 골랐다.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기에 그런 것일까?
산과 바다 사이에 자리한 지리적 조건과 일 년 내내 화창한 날씨 덕분에 해산물은 물론 과일과 채소도 풍부하고, 다른 지역에 비해 개발이 늦어진 탓에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다. ‘우동현’이라고 불릴 만큼 수두룩한 우동집과 기업가 후쿠타케 소이치로를 필두로 한 아트 프로젝트도 가가와현만의 독특한 매력이다. 그러니까 천혜의 자연과 특색 있는 미식, 예술이 조화롭게 생동하는 작지만 옹골진 지역인 셈이다.
나는 다카마쓰에 작은 원룸을 구하고, 오랫동안 꿈꾸던 소도시의 로망을 실천에 옮겼다. 낮에는 바닷가와 산골 마을을 유유자적 산책하며 그림 같은 풍경과 그 속에 있는 예술 작품을 실컷 감상했다. 오후에는 커피 향 진하게 풍기는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배가 고프면 어디에나 있는 셀프 우동집에서 우동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저녁에는 여유로운 해변 공원에서 하염없이 노을을 보고, 해가 지면 왁자지껄한 선술집 혹은 숙소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돌아보니 그곳에서 먹고, 보고, 걸었던 행위 하나하나가 내게는 최고의 치유였다. [p. 8]
몸과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다카마쓰의 ‘푸드 테라피’
저자는 이 책, <다카마쓰를 만나러 갑니다>를 통해 소도시 여행의 매력과 함께 다카마쓰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가가와현의 특별함을 얘기하고 있다.
가장 먼저 내세우는 것은 미식(美食), 그 중에서도 이 지역을 대표하는 ‘우동’이다.
우동의 본고장인 가가와현에는 약 500개의 우동 집이 있는데, 이 숫자는 가가와현에 있는 편의점 수보다 많다. 그뿐이 아니다. 면 반죽하는 법을 가르치는 우동 학교와 우동집을 탐방하는 우동 버스는 기본이고, 우동 국물이 나오는 수도꼭지, 애완견도 먹을 수 있는 우동, 뇌가 우동으로 된 캐릭터 등 때로는 기발하고 때로는 기괴한 우동에 대한 모든 것이 있다. ‘우동현’이라는 애칭이 무색하지 않다.
~ 중략 ~
이곳 사람은 국물 있는 우동, 비빔 우동, 고기 우동, 튀김 우동, 미역 우동, 카레 우동 등 그때그때 원하는 방식으로 면을 소비하고 있었다. [pp. 22~23]
물론 옛 ‘사누키국[讚岐國]’인 가가와현에는 우동만 있는 것이 아니다. 화과자 와산본[和三盆], 찹쌀떡 된장국 안모치조니[あんもち雑煮], 뼈가 붙은 닭다리 구이 호네츠키도리[骨付鳥] 등 독특한 먹거리들이 각자의 이야기와 함께 방문객들을 반긴다.
와산본은 죽당이라는 품종의 사탕수수를 사용하며, 당분 외에도 사탕수수의 여러 영양소를 함유하여 맛이 풍부하고, 입자는 마치 밀가루처럼 곱고 부드럽다. 이 설탕을 예쁜 틀에 넣어 사탕처럼 굳힌 것도 똑같이 와산본이라고 부르는데, 우동과 함께 가가와현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다. 작고 앙증맞은 모양새를 자랑하는 와산본은 입에서 톡 깨트리면 눈처럼 녹으며 오묘한 풍미를 선사한다. 씁쓰름한 커피나 차와 함께라면 더욱 환상적이다. [p. 36]
안모치조니[あんもち雑煮]
출처: <다카마쓰를 만나러 갑니다>, p. 47
모르고 보면 그저 낯설고 기이한 음식일 수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옛사람들의 마음을 알고 나면 정감이 간다. 힘겨운 노동의 굴레 속에서도 특별한 요리 한 그릇에 살아갈 힘을 얻었던 모습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분 제도가 남아 있던 시대에 거창한 인생 역전보다는 그저 새로운 한 해도 별 탈 없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귀한 재료로 끓였을 안모치조니는 그 시절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었을 것이다. [p. 48]
일본에서는 치킨하면 ‘가라아케[唐揚け]’가 가장 일반적이다. 뼈를 발라낸 살코기를 한 입 크기로 잘라 간장으로 양념한 뒤, 반죽을 얇게 입혀 튀겨 낸다.
~ 중략 ~
일본인도 가가와현에 오면 ‘호네츠키도리[骨付鳥]’를 꼭 먹는다. ‘뼈가 붙어 있는 닭’이라는 이름 뜻 그대로 두툼한 닭 넓적다리를 오븐에 통째로 구워 손으로 들고 먹는다. [pp. 51~52]
자유로운 예술혼이 담긴 작품을 만나며 감성을 채우는 ‘아트 테라피’
여행을 가면, 남는 거는 ‘사진’뿐이라고 하던가. 아무래도 평소에 보기 어려운 것들을 찍고 SNS에 올리고 싶은 욕망은 참기 힘들다. 물론 그게 가능했다면 SNS가 다 망했겠지만…….
다카마쓰[高松]시가 소속된 가가와[香川]현에도 예술작품을 볼 수 있는 다양한 장소들이 있다.
먼저 다카마쓰[高松] 시에서는 일본계 미국인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野口 勇, 1904~1988]의 유지(遺志)를 구현화했다는 ‘이사무 노구치 정원 미술관’과 ‘다카마쓰 출신의 문호’이자 ‘문단의 오고쇼[大御所]’1)라고 할 수 있는 기쿠치 간[菊池 寬, 1888~1948]의 희극 <아버지 돌아오다>(1917)의 한 장면을 표현한 조형물과 ‘기쿠치 간 기념관’을 얘기한다.
살짝 서쪽으로 가면, 호네츠키도리[骨付鳥]가 특산인, 가가와현 제2의 도시 마루가메[丸龜]시가 있다. 이곳에서는 전후(戰後) 일본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인 이노쿠마 겐이치로[猪熊 弦一郞, 1902~1993]의 작품이 건축가 타니구치 요시오[谷口吉生, 1937~ ]가 설계한 ‘마루가메시 이노쿠마 겐이치로 현대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노쿠마 겐이치로는 노년에 모든 소장작품을 기부함으로써 동네 놀이터에 가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찾을 수 있는 역 앞 미술관을 탄생시켰다. 스승이었던 앙리 마티스나 동시대를 산 파블로 피카소의 유명세에는 미치지 못했을지 몰라도, 마루가메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이들에게는 한 단계 높은 문화를 선물하며 누구보다 고귀한 유산을 남겼다. 성공은 ‘세상을 조금은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이라고 정의 내린 랄프 월도 에머슨의 시는 화백을 위한 말이 아닐까. 그가 바란 대로 가가와현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잠재력이 현대 미술을 만나 저마다의 색으로 꽃 피리라 믿는다. [p. 104]
다카마스항에서 고속 패리(Ferry)로 30분 거리에 있는, ‘예술의 섬’ 나오시마[直島]에 가면,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세 개의 미술관이 반겨준다. 호텔이자 미술관인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과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 중 일부를 감상할 수 있는 ‘지추[地中] 미술관’ 그리고 ‘여백의 화가’라고 불리는 이우환(李禹煥, 1936~)의 작품이 전시된 ‘이우환 미술관’이다.
정말 삶이 한 폭의 그림이라면, 한 군데도 빠짐없이 골고루 채움만이 정답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관심 있는 부분에 조금은 치우치기 마련이고, 어떤 곳은 끝내 공백으로 남기기도 한다. 나는 인생의 모든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쉼 없이 달려가는 사람보다 조금 더뎌도 여유 있게 걸으며 주변 이들에게 곁을 주는 사람이 좋다.
~ 중략 ~
원형적인 점과 선을 단순하게 배열한 이우환 화백의 그림은 내 쪽에서 말을 걸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캔버스 밖으로 끝없이 생각을 팽창하다 보면 결국 그림보다 내 안의 세계를 탐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둡고 고요한 미술관을 나왔을 때 긴 명상에서 깬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pp. 123~125]
다카마쓰에서의 힐링, 내면의 행복을 찾는 길
한국에 사는 많은 이들이 학창시절부터 떠밀리듯 경쟁하다가 어느 순간 ‘이걸 왜 하고 있지?’, ‘뭘 위해 하는 거지?’, ‘이러려고 입사했나?’라는 생각이 드는 소위 ‘현실자각타임’을 경험한다고 한다. 이는 사회생활에서뿐 아니라 여행을 떠나서도 마찬가지다. 게임에서 포인트를 적립하거나 아이템을 획득하기 위해 마우스를 클릭하듯이, 여행지에 가서 사진을 찍고 빨리 다음 여행지로 가느라 바쁘다.
저자의 경우, 바다의 안전을 수호한다는 ‘오모노누시노미코토[大物主命]’을 섬기는 신사(神社)인 고토히라궁[金刀比羅宮]의 1,368개의 계단을 오르다가 그런 느낌을 받았다.
얼마나 높이 가느냐보다 어떤 마음으로 걷느냐가 더 중요한 길이 있다. 고토히라궁의 1,368개 계단이 그런 곳이다. 등산로로 내버려 두지 않고 일일이 돌계단을 놓은 것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나아가란 뜻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음에는 목표를 이루는 데에만 급급한 도시인의 습성을 버리고, 계단의 개수에 상관없이 누군가의 안전과 행복을 바라며 걸으리라 다짐했다. 어쩌면 혼자만의 편익이 아닌 다른 이의 치유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의 여유야말로 나와 내가 사는 도시에 꼭 필요한 ‘힐링’이 아닐까. [p. 183]
그런 느낌이 얼마나 오래 갈 지는 모르겠지만, 잠시라도 그런 느낌을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 여행은 행복하고 의미 있는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학생 시절에는 경쟁하듯 점수 올리기에 집착했고, 졸업 후에 남부럽지 않는 직장에 들어갔지만, 무력감을 이기지 못하고 퇴사했다. 도망치듯 떠난 일본에서 후회 없이 대학원 생활도 하고 관심 있는 분야에서 일도 해 보았지만, 다시 그만둔 상태였다. 적어도 박사 학위를 받았거나 이름 있는 기업에서 과장쯤 되어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서른 살, 나는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다. 그러다 돈과 시간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연과 호흡하며 사는 미요코 씨의 모습을 보니 무엇을 위해 그토록 조급하게 살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삶의 방식에는 정답이 없다. 학위도 직장도 결국 나를 과시하고자 하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정작 중요한 내면의 행복은 아무에게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p. 74]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저자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1) 오고쇼[大御所]는 섭정(攝政)이나 관백(關白)의 아버지로 실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현대에는 어떤 분야에서 노련함, 권위 또는 과거에 큰 공로를 한 사람이나 그 분야를 처음으로 개척한 사람을 칭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