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감각 - 아트 디렉터가 큐레이팅한 도시의 공간과 문화, 라이프 스타일
박주희 지음 / 다산북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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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브랜드가 되다


건축가 서현은


“건축이 사람을 담는 그릇이라고 표현되는 것처럼 공간은 단지 바라 보기 위한 대상이 아니다.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과 생활 그리고 그 사회의 부대낌, 사회가 바라보는 미래의 모습을 담는 그릇이 된다. 이리하여 건축은 건축가가 공간으로 표현하는 시대정신이 되는 것1)


이라고 했다. 이를 도시 단위로 확장해보면, 그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 같은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장소와 건축의 분리를 통해 이루어진, ‘상품으로서의 건축’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라면 그 도시만의 고유한 감각을 얘기하기 어렵겠지만.


사람이 모여 ‘도시’라는 장소를 만들면, 그 도시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노래하게 된다. 사람으로 치면, ‘개성’을 갖게 된 셈이다. 이렇게 개성을 가진 도시는 ‘뉴요커’처럼 그 도시의 거주하는 사람들의 이미지도 만들어낸다. 즉, 도시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는 것이다.



뉴욕이라는 도시


이 책은 수 많은 도시 가운데 ‘뉴욕’이라는 도시를 선택했다. 그것은 아마 저자가 여행객이 아닌, 뉴욕에서 10년간을 보낸 ‘뉴요커’였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뉴욕의 감각>이라는 책은 공간, 예술, 문화, 맛을 테마로 뉴욕이라는 도시의 분위기를 소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장 공간, 사람을 끌어당기는 중력’에서는 ‘뉴욕’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를 만드는 장소들과 브랜드를 소개한다.


가장 먼저 소개된 하이라인 파크[2009]는 도시재생의 대표적인 사례로 유명하다.


하이라인 파크는 오래된 기찻길 위에 자연적으로 자라난 풀과 꽃을 인공적으로 덮지 않고 남겨둬 길과 어우러지게 설계했다. 그래서 보도가 반듯하지 않고 좁거나 길거나 넓은 자유로운 형태로 이어지며 풀이 무성한 곳도 있다. 그래서 하이라인 파크는 직선으로 걸을 수 없다. 곳곳에서 나타나는 풀과 꽃이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보도와 높이가 비슷하기 때문에 시야를 방해하지 도 않는다. 자연스럽게 녹이 슨 갈색의 철길에 뿌리를 내린 꽃과 풀, 양쪽에 늘어선 개성 있는 건축물, 달리는 차를 바라보며 내 속도로 걸어갈 뿐이다. [p. 23]


‘뉴욕’하면 떠올리는 화려함을 만끽하고 싶다면, 2주에 한 번씩 바뀌는 쇼윈도를 통해 뉴욕 거리의 표정을 바꾼다는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1901]을 방문하면 된다.


이곳은 마치 잘 차려진 편집숍 같다. 품목별로 나눠진 공간에서는 브랜드에 상관 없이 맘에 드는 제품을 집어 비교해 볼 수 있다. 다른 백화점에서 이브닝 드레스를 사기 위해 온갖 브랜드 매장을 다 들어가 봐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면, 이곳에서는 이브닝 드레스가 큐레이팅된 공간에서 오직 이브닝 드레스만 여러 브랜드별로 비교해서 보고 구입할 수 있다.

쇼핑은 즐거운 일이지만, 물건 하나를 구입하기 위해 취향에 맞지 않는 곳까지 일일이 둘러보는 것은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버그도프 굿맨은 고객에게 합리적인 동선으로 편리함을 주고, 섬세한 큐레이팅으로 취향을 찾을 수 있게 돕는다.

~ 중략 ~

편집숍이라는 방식은 고객이 좀 더 주체적으로 제품을 찾고 구매하는 기쁨을 준다. 그것은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고 욕망을 실현하는 것과도 직결된다. 소비하는 인간의 본질적 욕구를 건드린 버그도프 굿맨의 전략은 결국 뉴요커를 매료시키는 데 완벽하게 맞아 들었다. 시간이 흘러도 누군가 계속 찾는 곳이 되기 위해서는 정체되기보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발전하며 자신만의 색깔을 찾는 것이 중요하단 사실을 이곳을 보며 다시 한번 깨닫는다. [pp. 29~32]


미국의 전설적인 금융 황제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 1837~1913)이 모은 수집품을 전시한 모건 라이브러리 앤 뮤지엄[1906]은 어떤 의미에서는 돈 냄새가 물씬 풍기는 뉴욕을 보여준다


어쩌면 모건의 부와 명예는 미국이라서 지켜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과오는 티끌이 되고, 그의 돈으로 수집한 물건이 업적으로 기억되는 건 미국이 자본주의의 첨단을 걷는 나라여서 가능한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p. 43]


뮤지컬의 성지(聖地) 브로드웨이도 유명하지만, 최초의 흑인 수석 무용수 지명(2015)으로 다문화국가인 미국을 상징하는 듯한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1939]의 존재감도 뚜렷하다.


아메리칸 걸[1986]이라는 인형 가게는 찰스 슐츠(Charles Schulz, 1922~2000)의 만화  <피너츠(Peanuts)>을 떠올리게 한다. 평범한 흑인 아이 프랭클린 암스트롱(Franklin Armstrong)을 만화에 등장시켜 자연스럽게 편견을 깼던 것처럼, 다양한 인형을 통해 자연스럽게 다름을 존중하는 문화를 경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걸에는 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인형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형이 있다. 휠체어를 탄 인형, 목발을 든 인형, 안내견과 함께 있는 인형도 있다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나와 다른 것에 어떠한 편견도 가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데 한몫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아메리칸’ 걸이라는 이름을 쓸 만한 자격이 있는 곳이다. 그러고 보면 미국은 이렇게 인형 가게에서도 ‘다름을 존중’하는 문화를 경험할 수 있다. 이런 사소하지만 자연스럽게 스며 있는 평등의 문화가 다양성의 나라 미국을 만든 게 아닐까. [p. 92]



‘2장 예술, 시간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는 아름다움’에서는 뉴욕이라는 도시가 단순히 졸부(猝富)처럼 돈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뉴욕을 대표하는 근현대미술의 메카인 ‘뉴욕 현대미술관’, 200만 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소장품을 가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중세 건축물 잔해를 조합해 만든 ‘클로이스터스 박물관’, 분리파(Secession)2)의 미술에 집중한 미술관인 ‘노이에 갤러리’, 오직 미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만 취급하는 ‘휘트니 미술관’, 타이타닉의 비극이 낳은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의 3대 갤러리라는 가고시안, 페이스, 데이비드 즈위너 등 곳곳에 예술 공간이 가득한 이 도시는 뉴요커들이 그림을 쉽게 접하고 감각과 안목을 키우는 데 도움을 주며, 파리만 예술의 도시가 아님을 상기시켜 준다.



‘3장 ‘문화, 다채로운 이야기 가득한 뉴요커의 일상’에서는 뉴욕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뉴요커의, 아니 뉴요커가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준다.


‘미국’하면 떠올리는 록펠러(Rockefeller) 가문은 뉴욕시의 수도세를 부담하는 등 사회 환원 사업으로 더 각광받고 있다. 석유왕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 1839~1937)의 며느리 애비 록펠러(Abby Rockefeller, 1874~1948)와 그녀의 두 친구에 의해 뉴욕 현대미술관이, 그의 손자 넬슨 록펠러(Nelson Rockefeller, 1908~1979)가 기증한 3,000여 점의 작품을 토대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각각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존 D. 록펠러 본인도 시카고 대학(1890)과 록펠러 대학(1901)을 세우고, 세계 최대 규모의 자선 단체인 록펠러 재단(1913)을 설립했다.


부자만 기부하는 것은 아니다. ‘뉴욕의 허파’라는 센트럴 파크는 공공 공원이지만 개인의 기부와 기업의 후원을 통해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개인의 기부를 장려하기 위해 1만 달러를 기부하면 기부자가 원하는 문구를 동판에 새겨 벤치에 붙여주는 ‘어답트 벤치(Adopt A Bench)’라는 제도다. 이런 방식을 사용하기에 센트럴 파크는 산소를 공급하는 물리적인 ‘뉴욕의 허파’일 뿐 아니라, 다름이 차별로 변질되지 않고 ‘우리는 모두 뉴요커’라는 인식을 공유하게 만드는 정신적인 ‘뉴욕의 허파’가 된 것이 아닐까?


록펠러가 싹 틔운 기부 문화는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어느 정도 부를 쌓으면 사회에 기부하는 것을 고소득자의 의무이자 명예라고 생각한다.

~ 중략 ~

일반 시민에게도 소액이나마 동네 체육관이나 학교에 기부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혀 있다. 모든 이들에게 생활화된 미국의 기부 문화는 그 자체가 나라의 가치를 높이는 브랜딩 전략이란 생각이 든다. 뉴욕에 사는 동안 도시 곳곳에 보이는 기부의 흔적들, 이를테면 시민들이 세운 미술관이나 박물관 같은 곳을 보면서 높은 시민 의식이 어떻게 도시의 문화를 꽃피우는지 볼 수 있었다.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도, 현대미술관도 다 미국 시민들의 기부로 인해 만들어진 문화 공간이다. 어쩌면 기부와 나눔 문화는 세계적 찬사를 받는 글로벌 메가시티의 필수 요건이 아닐까. [p. 211]


뉴욕의 또 다른 특징은 보행자를 배려하는, 걷기 좋은 도시라는 점이다. 이런 특징은 심지어 범죄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로스앤젤레스 같은 경우, 은행 강도들이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고속도로 출구 또는 입구 가까이에 위치한 은행을 털고 바로 고속도로로 진입해서 경찰 헬기가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사라진다고 한다. 반면, 뉴욕의 은행 강도들은 자동차를 타고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코튼 요원은 교통 체계가 다르고, 보행자 친화적인 뉴욕의 도로에서는 다른 종류의 은행털이가 벌어진다고 지적했다. 뉴욕의 범죄자는 뛰거나 지하철을 타고 도망간다는 것이다.3)


뉴요커의 또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이 특정 요일에만 형성되는, 농산물 직거래 장터인 유니언스퀘어 파크의 ‘파머스 마켓(Farmer’s Market)’이다.


뉴욕시는 뉴욕으로부터 321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곳에서 생산된 농산물만 거래하도록 규정을 만들어놓았다. 반하는 과정에서 농작물들이 스트레스 받지 않고 올 수 있는 최대 거리가 321킬로미터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농산물들은 주로 뉴저지나 롱아일랜드, 메인 등 뉴욕 근교의 주에서 오며 무척 신선하다. 농부들은 중간 마진을 떼지 않은 채 농산물을 판매할 수 있어서 좋고, 구매자들은 원산지가 정확하고 건강한 채소나 과일을 눈으로 보고 사 갈 수 있으니 모두가 윈윈이다. 게다가 이동 거리를 제한함으로써 자연스레 탄소 배출도 줄일 수 있으니 이곳을 주로 찾는, 오가닉한 삶을 추구하며 자연 보호에 앞장서는 사람들에게도 뜻이 맞는 곳인 셈이다. [pp. 247~249]



‘4장 맛, 마음까지 열고 닫는 음식의 힘’에서는 네덜란드 사람들의 거주지 ‘뉴암스테르담’에서 출발한 뉴욕의 다양한 맛을 보여준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탈리아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밥보(Babbo)’,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굴[Oyster]의 도시였던 뉴욕의 흔적이 담긴 그랜드 센트럴 역의 ‘오이스터 바(Grand Central Oyster Bar)’, 샤오롱바오[小籠包]로 유명한 홍콩요리 전문점 ‘조스 상하이(Joe’s shanghai)’, 클래식한 스테이크의 정수를 보여주는 ‘피터 루거(Peter Luger Steak House)’, ‘뉴욕의 디저트’하면 떠오르는 치즈케이크를 파는 대표적인 가게인 ‘주니어스(Junior’s Restaurant & Bakery)’, 이탈리아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분위기의 이탈리아 식재료와 음식을 함께 파는 오픈 마켓인 ‘이틀리(Eataly NYC Flatiron)’ 등을 소개하고 있다.



 

1) 서현,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개정판), (효형출판, 2004), p. 248


2) 빈 분리파(Wiener Secession)로도 불린다. 1897년 빈(Wien)의 전시관인 퀸스틀러하우스(Kunstlerhaus)의 보수주의 성향에 불만을 가진 예술가들이 탈퇴하여 결성했다. 분리파의 주요인물로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 오스카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 등이 있다.


3) 제프 마노, <도둑의 도시 가이드>, 김주양 옮김, (열림원, 2018), p.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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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이주혜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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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석구에게 들었다. 석구는 식탁 건너편에 나를 앉혀놓고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거기 석구가 활동하는 정당의 당원 게시판에 장문의 글이 떠 있었다. 고발글이었고 고발 대상은 석구였다. 성폭력 가해자이자 스토커 현석구 당원을 고발합니다. 고발자는 석구와 같은 위원회에서 활동하는 여성이었다. 석구를 통해 이런저런 인상을 전해 들은 사람이었고 실제로 몇 번 스치듯 만난 적도 있었다. 고발글에 의하면 석구는 지난 1년간 그 여성을 스토킹했다. 늦은 밤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불쑥 튀어나와 사랑을 고백했으며 거절하는 여성의 몸을 강제로 끌어안았다. 이런 행위가 여러 차례 반복되었고 참다 못한 여성이 경찰에 신고했지만 별 소용은 없다. 같은 신념을 품고 활동하는 당원끼리의 우정으로 1년간 석구의 행위를 참아줬지만 이제 더는 그럴 수 없다는 판단이 들어 폭로와 고발이라는 방편을 선택했다. 여성은 형사처벌 대신 석구의 접근금지와 당원 제명을 요구했다. [pp. 63~64]


오십 대의 ‘나’는 이십 년을 부부로 살아왔던 남편 ‘석구’가 지난 1년간, 함께 정당 활동을 하던 여성을 스토킹했을 뿐 아니라 성추행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스토킹했다는 것도 범죄인데, 더 최악인 것은 석구가 자신의 행동이 진심이었기에 부끄럽지 않다고 말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그런 행동을 하고도 아내를 사랑하지 않아서 미안하지 않는다고 뻔뻔하게 대꾸한다.

자신의 욕망을, 아니 동물적인 욕정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고, 이십 년간 부부로 살아왔던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것도 황당하다.  


석구가 떠나는 날, 나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느라 허리를 숙인 석구의 뒷모습을 향해 소심하게 물었다.

너는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니?

석구는 굽혔던 허리를 천천히 펴고 내 쪽을 물끄러미 보았다.

널 사랑하지 않아서 미안해, 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아. [p. 65]


부부가 운영하던 학원은 부원장이던 석구의 성추행 사실이 알려지면서 끝내 문을 닫아야 했고, 석구가 떠나가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석구와 각별했던 딸 ‘해준’과도 멀어졌다. 가장 가깝고 믿을 수 있어야 할 사람들이 등을 돌리면서 그녀는 점차 폐인이 되어갔다. 피폐해진 삶을 추스르고 한숨을 돌리기 위해 방문한 정신과에서 그녀는 일기 쓰기를 비롯한 다양한 치료법을 들었다.


약물치료는 급한 불을 꺼주겠지만, 약이 환자분의 불안과 공포를 깨끗이 몰아내지는 않아요. 첫 진료일에 의사는 말했다. 상담치료나 행동치료를 병행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고, 지금처럼 걷기나 운동에 몰두하는 것도 좋아요. 또 일기를 쓰는 방법도 있습니다.

~ 중략 ~

일기를 쓴다는 것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자신의 삶을 보는 방법입니다. 자신과의 거리가 0일 때 우리는 그것을 문제적이라고 합니다. 의사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자신과의 거리가 0을 지나 음수에 수렴하는 중이었다.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서 외부의 모든 자극을 차단하고 내면의 동굴로 걸어 들어간 패배자였다. [p. 15]


이십 대부터 삼십 대에 걸쳐 쓴 수십 권의 일기를 마흔이 되던 해 파쇄했던 기억 때문일까? 의사의 말에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며 인터넷에 ‘일기 쓰기’를 검색하다가 나는 연희 방글 스튜디오에서 운영하는 ‘일기쓰기교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교실을 홍보하는


당신의 삶을 써보세요. 쓰면 만나고 만나면 비로소 헤어질 수 있습니다.” [p. 16]


라는 말에 끌렸다. 막상 ‘일기쓰기교실’에 등록해서 일기를 쓰려고 하니,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어쩌면 아직 나는 ‘나’를 직면할 용기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시옷’이라는 이름의 화자(話者)를 대신 내세웠다. 1인칭을 3인칭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나’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었다.


짧은 머리에 티셔츠와 바지 차림만 고집하며 ‘남자애’인 척하던 시옷은 열 살이 되던 해 그녀의 가장(假裝)이 들통나면서 난감한 처지에 빠진다.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고, 여기에 아빠가 부도를 내고 사라져 갑자기 가난을 체험하게 되었다. 일기를 쓰며 나는 고단하고 슬프고 외로웠던 1980년의 ‘나’를 떠올린다.

물론 일기에는 ‘나’의 이야기만 담긴 것이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일기를 쓰면서 까맣게 잊고 지냈던 이들의 이야기도 떠올랐다. 늘 ‘공주’처럼 빼 입고 다녀 시옷을 동경과 질투로 뒤척이게 했던 옆집 친구 ‘민애니’, 슬픔과 두려움을 함께 나누는 법을 알려준 소중한 친구 ‘정윤수’와 그의 누나 ‘윤심 언니’ 등. 어느새 일기는 시옷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때 시옷에게 짙은 흔적을 남기고 스쳐간 그들과 함께 쓰는 이야기가 되었다.


당신의 삶을 써보세요. 쓰면 만나고 만나면 비로소 헤어질 수 있습니다.

홈페이지에서 본 강의 소개 문구였다.

무엇과 헤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요?

도치가 물었다.

내가 기록한 나와. 내가 기록 속에 가두어놓은 나와. 여전히 과거의 기억 속에서 헤매는 나와.

림자는 신들린 듯 대답을 쏟아내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왠지 양팔에 소름이 돋았다.

헤어지고 싶은 기억이 있다면 기록하세요. 어떤 수치심도 글로 옮기면 견딜 만해집니다. [pp. 22~23]


어쩌면 일기 쓰기는 잊고 싶은 과거의 기억을 기록함으로써 봉인(封印)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이 눈앞에 닥친 상황을 헤쳐가기 위해 했던 수많은 선택들을 복기(復棋)하며,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내가 한 걸음 나아갔음을 깨닫는 행위가 아닐까? 그래서 강사인 림자가 그들의 일기를 활자화한, 과거를 향한 복수(復讐)이자 여럿의 목소리가 겹겹이 이어졌다는 의미의 복수(複數)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 <복수의 자서전>이라는 책자를 수강생에게 나눠줌으로써 일기쓰기 강좌를 마무리한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그때의 엄마보다 더 나이가 들어보니 알겠다. 처음부터 완성된 사람은 없다고. 할머니도 엄마도 아빠도 갈팡질팡 우왕좌왕하다가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했을 뿐이라고. 겉보기와 달리 속은 무척 시끄러웠을 거라고. 여러 번 무너지고 또 무너졌을 거라고. 그래도 매 순간 끊임없이 선택하면서 그렇게 한발 한발 앞으로 걸어갔을 거라고. 사는 게 원래 그렇다고. 이제야 겨우 알겠다. [p.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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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그린 일본 지도 조선의 사대부 26
이근우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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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 장의 지도에 담긴 정보량이나 지리적인 인식, 관심사, 제작 방식 등을 통해서 그 사회의 수준과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사회의 지도와 서로 비교함으로써 각 사회의 지향점도 파악할 수 있다. 지도 한 장이 갖는 의의는 대단히 크다.

그런데 지도는 사실대로가 아닌,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대로 그려진다. [p. 5]


조선 시대 일본 지도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이하 ‘혼일도’)>다. 이 지도는 당시 알려진 구대륙 전체를 아우르지만, 원도(原圖)는 전해지지 않고 1470년에 수정된 지도의 사본이 남아 있다. 주목할 것은 이 지도를 만들 때, 박돈지(朴敦之, 1342~1422)가 회례사(回禮使)로 일본에 갔다가 비주수(備州守) 미나모토노 쇼스케[源詳助]로부터 입수한 상세한 일본 전도를 참고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어쨌든 이 <혼일도>에 포함된 일본 지도에는 지명과 해안선 외에 다른 정보가 거의 없으며, 나찰국(羅刹國)나 영주(瀛州)와 같은 가상의 공간도 포함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는 조선 전기 조선의 일본에 대한 인식을 대표하는,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주도로 편찬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다. 여기에는 그가 세종 때 다녀온 쓰시마섬[對馬島], 이키섬[壹岐島], 류쿠[琉球] 왕국 등의 사회, 풍속, 문화, 지리, 생활상, 정치·외교관계 등이 총체적으로 분류, 정리되어 있다. 나아가 이 책에 수록된 방대한 지명은 일본의 지명 연구나 중세 언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해동제국총도(海東諸國總圖)’, ‘일본본국지도(日本本國之圖)’, ‘일본국서해도규슈지도(日本國西海道九州之圖)’, ‘일본국이키섬지도(日本國壹岐島之圖)’, ‘일본국쓰시마섬지도(日本國對馬島之圖)’, ‘유구국지도(琉球國之圖)’ 등 모두 6개 일본 지도가 실려 있다.

이렇게 <해동제국기>가 편찬된 것은 어쩌면 유학자답지 않게 민간 상업의 진흥을 지지하고, 실무를 중시하는 신숙주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조선시대 통틀어 최고의 일본통이었을지도 모를 신숙주가 죽은 후 일본은 전국시대에 돌입했고, 한일간의 연락은 끊어지게 된다. 게다가 신숙주와 맥을 같이 하는 훈구파가 몰락하고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상황은 바뀌게 된다. 널리 알려진 대로 조광조로 대표되는 사림파는 민생과 현실보다 의리와 명분을 중시했다. 이는 조선 백성을 납치하고 재물을 약탈하고 달아난 여진족 추장 속고내(束古乃)가 압록강을 넘어 사냥하러 들어오자 이를 기습, 체포하자는 의견에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게다가 사림파가 집권을 한 이후에는 붕당(朋黨)으로 대표되는 신하들의 정국 주도권 다툼과 탕평(蕩平)으로 대표되는 왕권 강화 노력, 그리고 세도 정치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조선의 사대부는 외부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다.


만약 여력이 있더라도 조선 사대부가 일본에 대해 가지고 있던 선입견은 또 다른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소중화(小中華)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있어서 임진왜란(壬辰倭亂)은 루쉰[魯迅]<아Q정전(阿Q正傳)>에서 ‘아Q(阿Q)’가 멸시하던 왕(王)털보에게 사소한 시비 끝에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것과 마찬가지로 어이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을 일본에 대한 무시라는 형태로 도치, 발현시킴으로써 ‘아Q(阿Q)’처럼 자위한 것이 아닐까? 이는 18세기 조선 사대부가 임진왜란을 떠올리며 일본을 야만적인 나라라고 얕보고 제대로 알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는 선조 40년(1607)부터 순조 11년(1811)까지 12차례의 통신사(通信使)가 일본을 방문하여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해사록(海?錄)>,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와 쌍벽을 이루는 기행문학이라는 신유한(申維翰, 1681~1752) <해사동유록(海槎東遊錄), 이하 해유록(海遊錄)’>, 조엄(趙曮) <해사일기(海槎日記)> 등 다양한 기록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의 신숙주처럼 제대로 된 일본 지도를 만들거나 일본에 대한 지리 정보를 갱신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심지어 이 시기 일본에서는 조선과 달리 정부가 지도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에 풀려있어 입수가 용이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 결과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지도급일본유구중원(朝鮮地圖及日本琉球中原)> 등에 수록된 일본 지도가 아예 조선 초기인 무로마치 막부[室町 幕府; 1392~1467] 시기의 일본정보에 기초하게 된다. 그러니 지명의 오류, 지리적인 오류, 사실의 오류가 나타날 수밖에.


그나마 조엄과 함께 통신사 서기(書記)로 갔던 원중거(元重擧, 1719~1790)가 쓴 백과사전식 견문록인 <화국지(和國志)>에 실린 12장의 일본 지도는 결을 달리한다. 적(赤), 청(靑), 흑(黑) 3색으로 그려진 이 지도들은 주(州)별 경계 및 도시명, 육로와 수로 등 교통로, 산과 대천(大川) 등 자연 지리 등이 비교적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다고 한다. 나아가 원중거와 교분이 있던 북학파 실학자들의 일본 인식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다만 북학파가 현실에 미쳤던 영향력을 감안하면, 조선 사대부의 일본인식을 변경하지는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이는 <동람보첩(東覽寶帖)>의 ‘천하도(天下圖)’처럼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의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논리와 전설적이거나 공상적인 지명으로 지도의 외곽을 채우는 방식의 지도가 17세기부터 19세기 후반까지 나온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반면,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德川 幕府; 1603~1868] 시기에 들어서면서 막부의 전국에 대한 통제력이 확립되자 각 지역 봉건 영주로부터 지도를 받아 일본 전체 지도를 제작했다. 또한 유럽 등에서 제작된 세계지도의 전래되고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등의 지리학이 수용되어 일본의 지도 제작에 큰 영향을 주었다. 덕분에 다양하고 자세한 지도가 만들어졌다.

그 중 이시카와 류센[石川 流宣]이 그린 <본조도감강목(本朝圖鑑綱目)>(1676)을 입수한 윤두서(尹斗緖, 1668~1715)가 <일본여도(日本輿圖)>를 제작했으나 이것도 원중거의 <화국지>나 이를 간략한 형태로 보이는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청령국지(蜻蛉國志)>와 비슷한 운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임진왜란 이후 일본 지도 제작에서 보이는 한국과 일본의 차이는 세계사의 흐름에 편승하느냐 아니면 거슬러 역행하느냐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실제 역사에서 두 나라의 운명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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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마쓰를 만나러 갑니다 - 나를 위로하는 일본 소도시 일본에서 한 달 살기 시리즈 1
이예은 지음 / 세나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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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살기, 생활인의 삶인가 여행객의 관광인가


‘한달 살기’라는 키워드는 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 이후 천편일률적인 여행에 지친 이들에게 하나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다만 ‘한달 살기’는 비교적 기간이 짧은 패키지 여행이나 자유 여행과는 달리, 현지를 ‘관광’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에서 ‘생활’하는 것이기에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다. 게다가 물가도 고려해야 하기에 ‘동남아시아’를 해외에서 한달 살기의 대상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물론 기왕 해외로 나가는 김에 유럽이나 미국, 캐나다의 비교적 잘 알려진 뉴욕, 런던, 파리, 밴쿠버 등 대도시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출장이나 파견이 아니고서야 보통 사람이 이런 대도시의 물가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래서 뭔가 고즈넉한 정취 가득할 것 같고, 어느 정도 편의시설도 갖춘 소도시에 눈이 가게 된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귀농을 선택했다가 실망하고 도시로 돌아가는 것처럼, 외국의 소도시에서 한달 사는 것조차도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실물을 보는 것처럼 ‘속았다’라는 느낌을 받고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도시에서의 한달 간의 삶을 그리는, 이런 글을 읽는 것은 삶이란 또 다른 형태의 여행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정된 기간 동안 낯선 곳에서 살아 보는 여행은 늘 탐스럽게 반짝이는 인생의 리미티드 에디션과도 같다. 어차피 번외 편이니 평소와는 다른 일에 도전해 보거나, 어떤 역할에도 얽매이지 않은 온전한 나를 여과 없이 드러낼 수도 있다. 아무리 찰나에 불과해도 그런 순간에 대한 기대감이 있다면,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지루한 본 편 같은 일상도 조금은 버텨 볼 힘이 나지 않을까. [pp. 213~214]



다카마쓰[高松]라는 도시는 사실 우리에게는 낯선 도시다. 일본의 수도 ‘도쿄[東京]’, 1859년 개항한 이후 일본 최대의 무역항으로 성장한 ‘요코하마[橫浜]’, ‘눈의 도시’로 유명한 ‘삿포르[札幌]’, 지금은 사슴으로 유명한 옛 수도 헤이조쿄[平城京]였던 ‘나라[奈良]’, ‘천하의 부엌’이라는 별명을 가진 ‘오사카[大阪]’, 도시의 상공업자인 조닌[町人]들의 조직인 에고슈[會合衆]에 의한 자치가 이루어져 ‘동양의 베니치아’라고 불리던 ‘사카이[堺]’, ‘동양의 스위스’라고 불리는 ‘스와[諏訪]’, 천년고도(千年古都)인 ‘교토[京都]’, 외국인 거류지에 건설된 이진칸[異人館]으로 대표되는 이국적 낭만이 깃든 국제도시 ‘고베[神戶]’, 원폭투하로 기억되는 ‘히로시마[廣島]’, 한반도 및 대륙과 가까워 1세기 무렵부터 교역의 창구가 되었던 ‘후쿠오카[福岡]’, 서양문화 수입의 창구가 된 ‘나가사키[長崎]’ 등 일본에는 다양한 매력을 뽐내고 있는 크고 작은 도시들이 많다.

그런데 저자는 굳이 가가와[香川]현의 현청(縣廳) 소재지인 다카마쓰를 골랐다.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기에 그런 것일까?


산과 바다 사이에 자리한 지리적 조건과 일 년 내내 화창한 날씨 덕분에 해산물은 물론 과일과 채소도 풍부하고, 다른 지역에 비해 개발이 늦어진 탓에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다. ‘우동현’이라고 불릴 만큼 수두룩한 우동집과 기업가 후쿠타케 소이치로를 필두로 한 아트 프로젝트도 가가와현만의 독특한 매력이다. 그러니까 천혜의 자연과 특색 있는 미식, 예술이 조화롭게 생동하는 작지만 옹골진 지역인 셈이다.

나는 다카마쓰에 작은 원룸을 구하고, 오랫동안 꿈꾸던 소도시의 로망을 실천에 옮겼다. 낮에는 바닷가와 산골 마을을 유유자적 산책하며 그림 같은 풍경과 그 속에 있는 예술 작품을 실컷 감상했다. 오후에는 커피 향 진하게 풍기는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배가 고프면 어디에나 있는 셀프 우동집에서 우동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저녁에는 여유로운 해변 공원에서 하염없이 노을을 보고, 해가 지면 왁자지껄한 선술집 혹은 숙소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돌아보니 그곳에서 먹고, 보고, 걸었던 행위 하나하나가 내게는 최고의 치유였다. [p. 8]



몸과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다카마쓰의 ‘푸드 테라피’


저자는 이 책, <다카마쓰를 만나러 갑니다>를 통해 소도시 여행의 매력과 함께 다카마쓰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가가와현의 특별함을 얘기하고 있다.


가장 먼저 내세우는 것은 미식(美食), 그 중에서도 이 지역을 대표하는 ‘우동’이다.


우동의 본고장인 가가와현에는 약 500개의 우동 집이 있는데, 이 숫자는 가가와현에 있는 편의점 수보다 많다. 그뿐이 아니다. 면 반죽하는 법을 가르치는 우동 학교와 우동집을 탐방하는 우동 버스는 기본이고, 우동 국물이 나오는 수도꼭지, 애완견도 먹을 수 있는 우동, 뇌가 우동으로 된 캐릭터 등 때로는 기발하고 때로는 기괴한 우동에 대한 모든 것이 있다. ‘우동현’이라는 애칭이 무색하지 않다.

~ 중략 ~

이곳 사람은 국물 있는 우동, 비빔 우동, 고기 우동, 튀김 우동, 미역 우동, 카레 우동 등 그때그때 원하는 방식으로 면을 소비하고 있었다. [pp. 22~23]


물론 옛 ‘사누키국[讚岐國]’인 가가와현에는 우동만 있는 것이 아니다. 화과자 와산본[和三盆], 찹쌀떡 된장국 안모치조니[あんもち雑煮], 뼈가 붙은 닭다리 구이 호네츠키도리[骨付鳥] 등 독특한 먹거리들이 각자의 이야기와 함께 방문객들을 반긴다.


와산본은 죽당이라는 품종의 사탕수수를 사용하며, 당분 외에도 사탕수수의 여러 영양소를 함유하여 맛이 풍부하고, 입자는 마치 밀가루처럼 곱고 부드럽다. 이 설탕을 예쁜 틀에 넣어 사탕처럼 굳힌 것도 똑같이 와산본이라고 부르는데, 우동과 함께 가가와현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다. 작고 앙증맞은 모양새를 자랑하는 와산본은 입에서 톡 깨트리면 눈처럼 녹으며 오묘한 풍미를 선사한다. 씁쓰름한 커피나 차와 함께라면 더욱 환상적이다. [p. 36]


안모치조니[あんもち雑煮]


출처: <다카마쓰를 만나러 갑니다>, p. 47


모르고 보면 그저 낯설고 기이한 음식일 수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옛사람들의 마음을 알고 나면 정감이 간다. 힘겨운 노동의 굴레 속에서도 특별한 요리 한 그릇에 살아갈 힘을 얻었던 모습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분 제도가 남아 있던 시대에 거창한 인생 역전보다는 그저 새로운 한 해도 별 탈 없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귀한 재료로 끓였을 안모치조니는 그 시절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었을 것이다. [p. 48]


일본에서는 치킨하면 ‘가라아케[唐揚け]’가 가장 일반적이다. 뼈를 발라낸 살코기를 한 입 크기로 잘라 간장으로 양념한 뒤, 반죽을 얇게 입혀 튀겨 낸다.

~ 중략 ~

일본인도 가가와현에 오면 ‘호네츠키도리[骨付鳥]’를 꼭 먹는다. ‘뼈가 붙어 있는 닭’이라는 이름 뜻 그대로 두툼한 닭 넓적다리를 오븐에 통째로 구워 손으로 들고 먹는다. [pp. 51~52]



자유로운 예술혼이 담긴 작품을 만나며 감성을 채우는 ‘아트 테라피’


여행을 가면, 남는 거는 ‘사진’뿐이라고 하던가. 아무래도 평소에 보기 어려운 것들을 찍고 SNS에 올리고 싶은 욕망은 참기 힘들다. 물론 그게 가능했다면 SNS가 다 망했겠지만…….


다카마쓰[高松]시가 소속된 가가와[香川]현에도 예술작품을 볼 수 있는 다양한 장소들이 있다.

먼저 다카마쓰[高松] 시에서는 일본계 미국인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野口 勇, 1904~1988]의 유지(遺志)를 구현화했다는 ‘이사무 노구치 정원 미술관’과 ‘다카마쓰 출신의 문호’이자 ‘문단의 오고쇼[大御所]’1)라고 할 수 있는 기쿠치 간[菊池 寬, 1888~1948]의 희극 <아버지 돌아오다>(1917)의 한 장면을 표현한 조형물과 ‘기쿠치 간 기념관’을 얘기한다.


살짝 서쪽으로 가면, 호네츠키도리[骨付鳥]가 특산인, 가가와현 제2의 도시 마루가메[丸龜]시가 있다. 이곳에서는 전후(戰後) 일본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인 이노쿠마 겐이치로[猪熊 弦一郞, 1902~1993]의 작품이 건축가 타니구치 요시오[谷口吉生, 1937~ ]가 설계한 ‘마루가메시 이노쿠마 겐이치로 현대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노쿠마 겐이치로는 노년에 모든 소장작품을 기부함으로써 동네 놀이터에 가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찾을 수 있는 역 앞 미술관을 탄생시켰다. 스승이었던 앙리 마티스나 동시대를 산 파블로 피카소의 유명세에는 미치지 못했을지 몰라도, 마루가메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이들에게는 한 단계 높은 문화를 선물하며 누구보다 고귀한 유산을 남겼다. 성공은 ‘세상을 조금은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이라고 정의 내린 랄프 월도 에머슨의 시는 화백을 위한 말이 아닐까. 그가 바란 대로 가가와현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잠재력이 현대 미술을 만나 저마다의 색으로 꽃 피리라 믿는다. [p. 104]


다카마스항에서 고속 패리(Ferry)로 30분 거리에 있는, ‘예술의 섬’ 나오시마[直島]에 가면,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세 개의 미술관이 반겨준다. 호텔이자 미술관인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과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 중 일부를 감상할 수 있는 ‘지추[地中] 미술관’ 그리고 ‘여백의 화가’라고 불리는 이우환(李禹煥, 1936~)의 작품이 전시된 ‘이우환 미술관’이다.


정말 삶이 한 폭의 그림이라면, 한 군데도 빠짐없이 골고루 채움만이 정답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관심 있는 부분에 조금은 치우치기 마련이고, 어떤 곳은 끝내 공백으로 남기기도 한다. 나는 인생의 모든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쉼 없이 달려가는 사람보다 조금 더뎌도 여유 있게 걸으며 주변 이들에게 곁을 주는 사람이 좋다.

~ 중략 ~

원형적인 점과 선을 단순하게 배열한 이우환 화백의 그림은 내 쪽에서 말을 걸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캔버스 밖으로 끝없이 생각을 팽창하다 보면 결국 그림보다 내 안의 세계를 탐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둡고 고요한 미술관을 나왔을 때 긴 명상에서 깬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pp. 123~125]



다카마쓰에서의 힐링, 내면의 행복을 찾는 길


한국에 사는 많은 이들이 학창시절부터 떠밀리듯 경쟁하다가 어느 순간 ‘이걸 왜 하고 있지?’, ‘뭘 위해 하는 거지?’, ‘이러려고 입사했나?’라는 생각이 드는 소위 ‘현실자각타임’을 경험한다고 한다. 이는 사회생활에서뿐 아니라 여행을 떠나서도 마찬가지다. 게임에서 포인트를 적립하거나 아이템을 획득하기 위해 마우스를 클릭하듯이, 여행지에 가서 사진을 찍고 빨리 다음 여행지로 가느라 바쁘다.


저자의 경우, 바다의 안전을 수호한다는 ‘오모노누시노미코토[大物主命]’을 섬기는 신사(神社)인 고토히라궁[金刀比羅宮]의 1,368개의 계단을 오르다가 그런 느낌을 받았다.


얼마나 높이 가느냐보다 어떤 마음으로 걷느냐가 더 중요한 길이 있다. 고토히라궁의 1,368개 계단이 그런 곳이다. 등산로로 내버려 두지 않고 일일이 돌계단을 놓은 것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나아가란 뜻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음에는 목표를 이루는 데에만 급급한 도시인의 습성을 버리고, 계단의 개수에 상관없이 누군가의 안전과 행복을 바라며 걸으리라 다짐했다. 어쩌면 혼자만의 편익이 아닌 다른 이의 치유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의 여유야말로 나와 내가 사는 도시에 꼭 필요한 ‘힐링’이 아닐까. [p. 183]


그런 느낌이 얼마나 오래 갈 지는 모르겠지만, 잠시라도 그런 느낌을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 여행은 행복하고 의미 있는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학생 시절에는 경쟁하듯 점수 올리기에 집착했고, 졸업 후에 남부럽지 않는 직장에 들어갔지만, 무력감을 이기지 못하고 퇴사했다. 도망치듯 떠난 일본에서 후회 없이 대학원 생활도 하고 관심 있는 분야에서 일도 해 보았지만, 다시 그만둔 상태였다. 적어도 박사 학위를 받았거나 이름 있는 기업에서 과장쯤 되어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서른 살, 나는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다. 그러다 돈과 시간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연과 호흡하며 사는 미요코 씨의 모습을 보니 무엇을 위해 그토록 조급하게 살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삶의 방식에는 정답이 없다. 학위도 직장도 결국 나를 과시하고자 하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정작 중요한 내면의 행복은 아무에게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p. 74]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저자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1) 오고쇼[大御所]는 섭정(攝政)이나 관백(關白)의 아버지로 실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현대에는 어떤 분야에서 노련함, 권위 또는 과거에 큰 공로를 한 사람이나 그 분야를 처음으로 개척한 사람을 칭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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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의 두 번째, 통산 네 번째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자축(自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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