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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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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걷다가 문득 나는 걸음을 멈춘다. 무엇인가로 가득이 차오르면서 한없이 넓어져가는 가슴이 있다.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눈빛이지만, 그 시선을 따라가보면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때로는 뜻모르게 웃기까지 하는 것인데, 말하자면 나는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렇게 어느 날의 나는, 종일을 허삼관이란 사내의 선한 웃음을 생각하며 걷고 있었다.


여화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는 <인생은 아름다워>의 중국어역이다. 배운 것, 가진 것 없는 촌사내 허삼관이 있다. 그리고 그가 서 있는 곳은 우리의 그것처럼 신산스러웠던 중국 근대사의 한복판이다. 허삼관은 말하자면 성직에 몸담고 있는 사제라 할 수 있는데, 그가 모시는 신의 이름은 바로 '가족'이고 서품된 직함은 바로 '가장'이다. 공산화, 문화대혁명, 천안문 사태와 같은 동란들이 날선 갈퀴손으로 그의 등을 훑고 지나간다. 그리고 그 강퍅한 역사 속에서 그는, 아홉 번에 걸친 목숨을 건 매혈로 가정을 이루고 또 그 가정을 지켜낸다.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면 역사는 결국 운명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그가 운명을 이겨내는 방법은 바로 주어진 것에 대한 완벽한 관용이다. 접신, 혹은 도통의 경지에 이른 이 무조건적인 관용 앞에서 비극은 한없이 가벼워지다가 끝내는 꼬리를 감추고 만다. 그렇다. 정말 한없이 가벼운 비극이요, 한없이 즐거운 슬픔이다. 그는 피를 흘리는 장면마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내 입에서는 미소가 흘렀다. 눈물과 웃음이 어찌 이처럼 행복하게 만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를 만나고 나서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싱글싱글 웃고 다녔다, 웃을 때마다 그가 그리웠고 그가 그리울 때마다 나는 웃었다. 그의 슬픔은 왜 이다지도 즐거운가. 그건 그가 결코 그 슬픔에 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슈퍼맨에게 아무리 위험이 닥쳐도 우리가 조금도 떨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여화는 중국의 제3세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이 소설로 그는 일약 중국의 대표적인 반체제 작가의 반열에 오르고 말았다는데, 아, 나는 이렇게 즐거운 반란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나중에 나는 다른 경로로 그가 바로 장예모 감독의 걸작 <인생>의 원작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바로 그때 나는 거의 숭모에 가까운 감정을 그에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천재를 보면 시기심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나는 천재를 보면 한없이 즐겁다. 요컨대 천재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괴로움에서 구하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다. 내가 어찌 그의 붓을 씻어주는 노릇을 마다하겠는가. 당신도 어서 빨리 그를 만나보고 나와 함께 그의 붓을 씻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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