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지르 지음 / 문학사상사 / 1976년 3월
평점 :
절판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책
날아가는 니스의 새들을 꿈꾸는 모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국에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결괴, 단 한 순간의 결정적인 붕괴
천국에서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솔직히 요즘 케이는 모든 것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뉴욕에 갔다 온 뒤로 시작된 증세였다. 돌아온 뒤 서울의 모든 것이 하나같이 어딘가 모르게 덜 떨어지게 느껴졌다. 특히나 사람들이 그랬다. 세련되게 젊음을 탕진하는 귀여운 백인 여자애나 3개 국어를 할 줄 아는 어딘가 천재 같은 유대인은 서울에서는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도 좋은 점은 있었다. 하지만 나쁜 점도 그만큼 있었다. 한마디로 어정쩡했다. 돌아온 뒤, 모든 게 대체로 그런 식이었다. 하나같이 어정쩡했고, 그 점이 정말이지 짜증났다."

 

- 누군가 내게 이 소설의 스토리를 얘기해달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할 것이다. 스토리상으로 이 소설은 전혀 신선하지 않다. 그저 모여서 춤추고 놀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여기저기 드나들고 이것저것 치장하는 젊은 애들('젊은이'라고 하긴 좀 그렇다. 어쨌건 '젊은이'라는 말에는 독특한 아우라가 있는 거니까)의 이야기일 뿐이다. 드라마나 영화, 또는 광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찌보면 화려하거나 발랄해보이고 어찌보면 한심하거나 허무해보이는, 소비문명사회의 외면적 화려함과 내면적 공허함에 대한 흔한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스토리상의 이야기일 뿐이다. 오늘날의 소설에서 스토리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문장과 대사이다. (물론 그것은 오늘날의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꽤 괜찮은 문장과 대사들이 나온다. 그 내용이 깊은 의미가 있다거나 깨달음을 준다는 차원에서 괜찮다는 것이 아니다. 캐릭터의 내면을 아주 실감나게 보여준다는 차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뚱맞게 깊은 의미나 깨달음을 주는 문장들보다 오히려 한 수 위인 것이다.)

  
- 등장하는 캐릭터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소진. 그 자체이다.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닌 그저 주어진 것을, 아무런 창조와 발전도 없이, 즉 다시 무엇을 만들어내는 계기조차 되지 못한 채 그저 써버리기만 하는, 그리고 따라서 조만간 그 바닥이 드러나게 될 것임이 아주 분명하다는 의미에서의 소진. 그렇게 많이 주어진 것도 아니고 또 불꽃처럼 한 순간에 다 써버리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그것은 탕진조차도 아니다. (실제로 주인공은 '탕진'의 삶을 동경하고 있다.) 그저 점진적으로 바닥에 가까워지는 소진일 뿐이다. 커피도, 만남도, 사랑도, 젊음마저도 바로 그러한 소진의 이미지일 뿐이다. 캐릭터를 둘러싼 문장과 대사들은 우리가 흔히 보는 영화나 드라마의 이미지들보다 더욱 처절하게 그러한 소진의 분위기를 실감나게 전해준다.


- 이 소설에는 별다른 사건이 없다. 하지만 확실히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우리는 받을 수 있다. 이 소설에서는 아무 것도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히 무언가 무너져있는 느낌을 우리는 받을 수 있다. 소설이란 장르는 무엇보다도 '현실'을 보여주어야 하는 장르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역설적으로 아주 훌륭하게 현실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것들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한 번씩 가지게 되는 그 어떤 느낌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 오늘날 우리의 삶에는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가장 큰 사건이다. 중세 역시 그러한 시대였다. 삶에는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오늘날과 전혀 다르다. 하나는 중세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주체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잔인한 실제 현실이야 어찌되었건간에 사람들은 그러한 사건의 부재를 곧 안정과 평화로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전혀 다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주체로 인식되고 있거나 때로는 그것을 강요당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사건을 만들 수도 없으며 우리에게 사건이 주어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저 이 소설 속의 캐릭터들처럼 그저 아주 조그만 주어진 것을 끝없이 소진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주체가 아니다. 사건을 창조하는 주체도 아니며 주어진 사건을 해결하는 주체도 아니다.


-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삶은 불안과 혼란이다. 그렇다면 사건의 부재란 비극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러한 불안과 혼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아무 것도 무너지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모든 것이 다 무너진 폐허이다. 너무도 분명하고 확고하게 무너진 폐허여서 다시 무엇을 세울 수도 없고 더 이상 무너질 것도 없다. 더 이상 무너질 것이 없기에 아무 것도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일 뿐이다. 소설이 사건들에 대해 얘기하던 시대가 있었다. 멀지도 않은, 바로 한 세대 전의 이야기였다. 돌연 일어난 사건들은 삶을 고통과 혼란에 빠트렸고 사람들은 참을 수 없이 비참해졌다. 하지만 사건은 사람들을 주체로 만들었다. 사건을 수습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목표와 의지를 지닌 주체로 다시 태어났다. 문제적 개인의 희생이었건 하나된 집단의 눈물이었건,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을 통해 자아와 세계는 놀랍게도 이전보다 확실히 나아졌다. 따라서 사건은 고통과 비극이었지만 동시에 희망이자 발전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그 사건들로 인해 주체가 되고 영웅이 될 수 있었다. 국가와 사회의 영웅이 못 된다면 친구와 가족의 영웅이라도 될 수 있었고 그조차 못 되어도 적어도 자기자신만의 영웅 정도는 될 수 있었다.


- 그렇다면 사건이 없는 세계, 모든 것이 너무도 확실히 무너진 이 세계에서의 우리의 삶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이 삶을 견뎌야 하는 걸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써머는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여자애였다. 왜냐하면 그녀와 함께 있으면 절대 심심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걸 케이는 원하고 있었다. 흥미진진한 뭔가를. 삶의 모든 지루함을 날려버려줄. 그런 걸 얻을 수 있다면 뭐든 하겠다. 어떤 위험이든 상관하지 않겠다. 물론 그건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였다. 케이가 원하는 건 그저 사람들이 우와, 하고 부러워 할만한 것들, 근사해 보이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보란 듯이 젊음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이 세계를 견디는 첫 번째 방법은 바로 결사적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 매일의 일상을, 마치 거대하고 중요한 것인 양 포장하는 것이다. 즉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을 거대한 사건으로 포장하고 마침내 그것을 역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저기 페이스북에서는 수많은 자아의 역사책들이 칼라풀한 화보와 함께 씌어지고 저장되어 인류가 멸망할 그날까지 영원히 전해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상과 에피소드를 조금이라도 더 세련된 것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즉 역사의 미학적 가공이다. 그럼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꾸려나가는 주체이고 또한 우리의 삶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는 환상을 가질 수 있다. 우리의 삶, 그 나만의 역사는 한없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 매년 두 배씩 늘어나는 디지틀 카메라의 화소 숫자처럼 말이다.


-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아름다운 삶,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이 말하는 천국이다. 카페에 가고 클럽에 가서 사랑을 하고 마약을 하는 것. 그것은 광고의 이미지처럼 아름답다. 하지만 스스로를 아주 적극적으로 속이지 않는 한 누구나 알고 있다. 그것이 거대한 거짓이라는 걸. 무엇보다 그것들은 모두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서만 존재하는 세계이다. 영화도 광고도, 카페도 클럽도 모두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갇혀 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네모로 가두어 그 바깥을 잘라내거나 차폐하지 않고서는 그것은 존재할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 조그만 네모 바깥에는 무한의 크기로 펼쳐진 피 흐르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사람들은 그처럼 쉽게 현실을 깨닫는 길을 택하지 않고서 이처럼 어렵게 자신을 적극적으로 속이는 방법을 택하고 만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전혀 놀랍지 않을 수도 있다. 삶의 허무를 견뎌야 하는, 그보다 만 배는 더 큰 어려움을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그리하여 역사상 유례 없는 숭고한 사명감(?)으로 인해 역사상 유례없는 인간적 연대가 이루어진 결과 인류는 마침내 극장과 티비와 인터넷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는 조그만 사각형의 공간 안에 제각기 들어앉아 조그만 사각형 프레임 속의 이미지들을 열심히 조작해냄으로써 우주 전체에 해당하는 거대한 현실을 모두 가리고도 남을 만큼의 거대한 이미지의 휘장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마치 자유의 여신을 없애버린 데이비드 카퍼필드처럼 말이다.

 

" 그래, 거기는 천국이었어. 그런데 여자는 울어. 대체 뭐가 잘못된 거야? 여기는 천국이야. 근데 왜 나는 울고 있냐고? .... 분명히 뭔가 잘못된 거야.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거라고. 그런데 여기가 천국이래. 근데 천국이 잘못되었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잘못된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너야. 행복해하지 않는 너라고. 슬퍼하고, 화가 나는, 이 천국을 부수고 싶어하는 너야. 이 천국을 의심하는 너야. 왜냐하면 여기가 천국이라니까! 너는 천국에 있는 거라고. 네가 이상한 거라고."

 

하지만 조금 더 똑똑한 척하고 싶은 부류도 있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속이는 것은, 그리고 서로가 거짓임을 아는 대화를 웃는 낯으로 계속해대는 짓은 세련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있는 것이다.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기를 쓴다고 해서 이루어질 것도 없고 기를 써서 이루어야 할 것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그저 각자에게 주어진 몫이 다할 때까지 끝없이 소진하다가 바닥에 부딪칠 뿐이라는 것을. 삶의 비극과 허무를 울부짖지 않고 담백하게 받아들이는 세련됨. 타고난 주어진 몫이 적다면 구질구질하게 아껴쓰지 말고 한꺼번에 터트려버리고 죽어버리자는, 왠지 니체를 슬쩍 샘플링한 흔적이 보이는 적극적 허무주의. 그것이 바로 오늘날 젊은이들의 신흥종교인 '쿨(COOL)교'인 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체념에서 오는 달관인 것인데 그렇다면 이것은 놀랍게도 우리 선조들이나 불교의 선사들이 지난한 고통을 겪고서야 마침내 얻어낸 그 지혜의 세계관과 닮아있는 것이 아닌가. 어찌 그리 젊은 나이에 그리 높은 경지에 이를 수가 있다는 말인가.


- 하지만 오늘날 젊은이들의 이러한 적극적 허무주의, 즉 쿨함은 한마디로 완전한 사이비이며 그 역시 하나의 허구적 이미지일 뿐이다. 그것은 그들이 아직 진정한 현실을 만난 적도 진정한 고통을 겪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선조와 선사들은 실제로 지옥에서 살았다. 지옥에서 견뎌내는 법은 둘밖에 없다. 지옥을 바꾸거나 의식을 바꾸거나. 굶으니 살 안 찌고 좋지 않느냐는 식의 피 어린 달관이 지옥을 바꿀 수 없었던 우리 선조들의 피 어린 지혜였다. 하지만 마약을 하는 아이들의 우상이 되어버린 체 게바라처럼, 오늘날 젊은이들의 허무는, 비극적이면서도 왠지 개그 같은, 착잡한 연민을 자아내는 허구적 이미지일 뿐인다.

 

"내가 요새 케이 양 나이대 애들을 보면, 시기, 질투가 아니라, 진짜 그런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아주 그냥 뭐냐, 수족관 속 물고기들 같아요. 온화한 열대 바다도 아니고 진짜 완전 수족관. 그래, 요새 수족관들 별거 별거 다 있더라. 진짜 바다 같애. 그래서 거기가 진짜 바다라고 믿어버리는 거지. 근데 그거 진짜 바다 아니다? 내가 진짜 바다에서 살아봐서 알거든?"

 

적극적 오인과 허구적 체념 사이를 오고 가며 인공낙원에서의 피폐한 삶을 이어가던 케이는 현실을 아는 어른이자 연민을 지닌 아버지처럼 느껴지는 아저씨를 찾아간다. 그것은 그녀가 어느 정도는 성장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리고 그 아저씨는 케이에게 바로 위의 대사와 같은 어른스럽고 따뜻한 얘기를 해준다. 하지만 그 아저씨의 손은 점점 울고 있는 케이의 가슴께를 향한다.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현실인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아저씨는 사실 케이 같은 또래의 여자들의 생각처럼 그렇게 대단히 짐승같은 사람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았고 어쩌면 케이에게 자신의 사랑이 필요하다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케이가 정말로 인공낙원을 벗어나 진흙탕의 현실을 자신의 두 다리로 단단히 버티고 설 수 있을 만큼 성장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역설적으로 바로 이 아저씨다. 즉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인 피 흐르는 현실인 것이다. 적을 알지 못하고서 적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결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결괴 1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히라노 게이치로는 '일식'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다. 작가적 출발기의 이러한 경험은 아무래도 작가에게 (개인적으로 느끼기엔 부정적인 차원의) 그 어떤 경향성을 내면화시켜버린 것 같다. '일식'은 관념적 요설로 뒤덮힌 작품이다. 감성과 내면에만 파묻힌 사소설과 신비주의와 낭만주의로만 질주하는 환상소설, 아니라면 이념과 규범의 화신들이 난무하는 역사소설이 주류를 이루는 일본 순수문학계의 풍토에서, 어느 정도의 수준을 지닌 인문학적 담론을 뿜어대는 이 젊은 소설가가 심사위원들에게는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아쿠타가와가 주어진 것은 아무래도 작품의 성취 자체보다는 뉴 웨이브를 지향하는 그 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미시마 유키오의 재림'이라는 이러한 평단의 호들갑에 대한 대중의 열광적 반응 역시 진지한 차원의 공감이라기보다는 얕은 지적 수준에 비해 터무니없이 세련된 지적 포즈를 지닌 사이비 지식인들의 부화뇌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일식'에서 내가 건진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 아쿠다카와상은 순수문학, 정통문학에 주어지는 것이지만 신인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따라서 똑같이 신인에게 주어지는 상이지만 대중문학에 주어지는 나오키상에 비해 의외로 오류를 범할 확률이 높다. 대중문학의 경우 재미와 구성 면에서 어느 정도의 보편적 공감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신인상을 받기 힘들다. 따라서 나오키상 수상작을 택할 경우 대부분 탁월하지는 않더라도 평타 이상은 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순수문학의 경우 신인상은 전술한 바와 같이 작품의 수준 자체보다는 그 패기와 숨은 자질을 보는 경우가 더 많다. 죽어가는 순수문학을 부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평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일식'은 가끔씩 번뜩이는 사유를 보여주기는 한다. 그리고 강렬한 이미지의 결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한두 줄의 번뜩이는 사유를 만나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양의 무가치한 현학적 잡설들을 거쳐가야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잡설들은 대부분 자신이 위치한 서사의 흐름에 거의 녹아들지 못한 채 물에 뜬 기름처럼 뜬금없고 황당한 모습으로 서있다. 물론 관념적 잡설로만 소설을 쓰는 파스칼 키냐르도 있다. 하지만 키냐르는 좀 다르다. 그의 관념적 서술들은 수준이 높고 맥락이 있다. 그리고 서사와 이미지 자체는 맥락이 없지만 그것들은 관념적 서술들의 맥락에 어느 정도 조응한다. 또한 '일식'은 자동적으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떠올리게 하는데 사실 '장미의 이름'과 '일식'을 비교하는 것은 전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장미의 이름'은 서사 자체로도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며 관념적 서술과 서사의 흐름이 완벽하게 혼연일체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많은 신학적 교리와 철학적 개념들을 생전 처음 만나는 사람조차도 단숨에 깊이 있는 이해가 가능할 정도의 파격적인 수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이 작가가 계속 비슷한 수준의 작품을 쓰면서도 계속 어느 정도의 평가와 판매량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다. 물론 역시 비슷한 코드를 수십년 째 답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에 거론될 만큼의 문학적 성취와 신드롬이라 불릴 만큼의 대중적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하루키도 있다. 하지만 하루키의 경우, 그것을 명확한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사람조차도 그러한 반응의 이유를 정서적으로는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히라노의 경우는 왜 그런 현상이 가능한 것인지 거의 이해하기 어렵다. 내 생각에는 작가나 독자나 타성인 것 같다. 그냥 자민당을 찍는 현상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작가는 그것이 계속 지지를 받으니까 잘하고 있는 줄 알고 계속 하는 것이고 독자 역시 다들 그것이 괜찮다고 하니까 그렇게 큰 자신은 없지만 그냥 괜찮다고 말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혹은 관념적 수사로만 가득찬 글을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읽는 자신에 대해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고 싶은 관념적 허세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 히라노는 창조적인 작가가 아니다. 그의 소설은 거의가 기존의 소설이나 영화들에서 그 모티브를 빌려오고 있으며 스무 페이지도 안 될 빈약한 모티브를 현란한 요설로 가득 채워 1000페이지의 분량으로 늘린 것이다. 물론 문제는 늘려놓은 양이 아니라 그 내용이다. 한 줄이면 끝날 묘사를 열 줄로 늘린다거나 거의 무의미한 배경설명을 덧붙이는 것은 하나의 습관인 것 같다. 그리고 정말로 난데없이 나타나서 기어이 갈데까지 가보고야 마는 철학적, 미학적, 정치적, 사회적 발언들은 신문이나 인문학 서적을 전혀 읽지 않는 독자들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주어진 서사나 장면과의 조화를 생각한다면 가끔은 습작을 읽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발언 자체가 어느 정도의 수준을 지녔다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대부분 의미와 논리의 맥락이 다섯 줄 이상 이어지지 못한다. 서른 줄의 말을 하는데 적어도 일곱 번 이상의 논리적 분절이 있다는 말이다. 물론 얼핏 보면 연속성을 지닌 것 같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짧고 강렬한 아포리즘인 것인가. 하지만 전혀 강렬하지도 함축적이지도 시적이지도 않다. 그냥 다시 추리고 정리하게 위해 일단 마구 써보는 리포트의 초고 같다. 히라노는 자신의 글들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것 같다. 즉 머리 속에서 나온 말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이다. 하지만 끝까지 의무적으로 무슨 말이든 들어주어야 하는 절친이 아니라면 우리가 왜 한 사람의 머리 속에서 의식의 흐름처럼 이어지는 모든 말들을 다 들어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은 무엇을 깨달아서 나를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지 작가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아닌 것이다.


- 지금까지 비판적으로만 말했지만 물론 히라노가 형편없는 작가는 아니다. 단지 그가 지향하는 문학적 가치를 실현하기에는 수준이 낮다는 것이고 그에게 주어진 명성에 비해서는 내공이 부족하다는 것일 뿐이다. 이 작품을 읽는 것은 모두에게 시간낭비는 아니며 다음과 같은 의의 정도는 있다.


- 우선 인간과 삶의 부조리성에 대한 가감없는 진실이 드러나있다는 것이다. 입밖으로 꺼내놓기조차 망설여지는 인간의 원초적 내면. 즉 친구나 가족에게조차도 우리는 그 말과 행동과 삶의 방식에 대해 이유없이 얼마나 많이 짜증이 나며, 또한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가끔은 왜 그렇게 도에 지나친 격렬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일까, 유적 차원의 문제일까. 그리고 바로 그러한 불합리한 것 때문에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은 그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가. 무엇 때문에 자살을 하거나 살인을 했다는 신문의 그 논리적 배경설명들은 정말로 다 믿을 만한 것일까.


- 다음으로 앞서도 말했듯이 인문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예술과 과학에까지 걸친 다양한 영역의 지적 언술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설이 단순한 감정의 배출이거나 추상적 교화 아니면 흥미의 추구라는 선입관, 또는 그러한 것들이 무가치하다는 선입관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오랜만에 지적 정보로 가득찬 소설을 만나는 행운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적 언술들은 역시 전술한 바와 같이 서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폭포처럼 쏟아지기 때문에 적어도 양적 차원에서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 다음으로는 논리를 지니고 엽기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미래파 살인자들의 내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범죄는 사적인 원한이나 동기를 지닌 단순한 일탈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철저히 사회적인 것이거나 나아가서는 문명적인 것이며 때에 따라서는 아주 진지한 내면적 가치의 발현이다. 물론 이러한 살인자상은 바그너를 들으며 시체를 토막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영상물들로 인해 정서적으로는 이미 일반인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이제 그러한 정서적 차원의 이미지를 넘어서 지적 차원의 논리적 언술로 그러한 살인자들의 내면과 철학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행복'이라는 주인에게 목줄이 묶인 노예야! '행복'을 위해서라면 인간은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 .... 그것은 퍼내틱하고 에로틱하며, 열렬하기 그지없는, 가장 세련되고 첨예한 현대의 파시즘이야."

스스로 전면에 나서지 않고 타자의 의식을 조종하여 제노사이드를 기획하는 유지나 무비판적인 행복의 추구를 자아 없는 노예적 굴종으로 보아 료스케를 살해하고 스스로에게는 그러한 살인의 충동마저도 자아의 실현으로 합리화하는 도모야는 대중성명문을 발표할 만큼 자신의 범죄에 대한 아주 분명한 철학을 지니고 있다. 엽기적 범죄 따위가 이처럼 논리적 언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물론 옴진리교 사건 같은 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본사회의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결괴'는 '방죽이나 둑 따위가 아슬아슬하게 버티다 물에 밀려 한꺼번에 터져 무너지다.'라는 뜻이다. 쉽게 말해 '결정적 붕괴'라는 뜻이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일본인들이 참으로 다양한 어휘를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자주 감탄한다. (일본어에는 없는 말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의식의 폭이나 깊이보다는 사실 필요한 말이 있으면 얼른 만들어내고 좋은 말이 있으면 얼른 베껴내는 기술적 차원의 것이라는 생각이다.) '결괴'는 현대문명의 외면적 평화와 내면적 불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단어라고 생각한다. 파멸은 점진적 악화를 통해 서서히 다가오지 않는다. 파멸은 표면적으로는 전혀 변화가 없는 지면 아래 에서 은밀히 진행되다가 표면의 내력이 임계치에 달하는 순간 찰나적이고 전면적으로 온다. 즉 파멸은 '단 한 순간의 결정적인 파국'의 모습으로 오는 것이다. 비행기 프라모델을 만들어본 사람은 안다. 여러 번 부딪치고 떨어져도 그것은 신기하게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의 내성에 놀라며 조금씩 처음의 조심스러움을 잃고 이제 그것을 함부로 다루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조금씩 금이 가고 나사가 한두 개씩 빠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내성의 임계치에 이르는 그 어느 순간 아주 약한 단 한 번의 부딪침만으로 그것은 허무하게 박살이 나고 만다.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우리의 문명은 우리의 생각처럼 그렇게 튼튼하지 않다. 그것은 은밀하게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그것은 한순간의 결정적 파국을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웃는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보여서라는 한 가지 이유로 아무 상관없는 지나가는 여학생을 충동적으로 살해하고 말았다는 어느 고교생의 기사를 읽는 순간 나는 결괴의 징후를 느낀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느꼈을까.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천국에서 - 자아만 있고 주체는 없는 젊음의 비극
    from 새벽님의 서재 2013-12-02 02:42 
    "솔직히 요즘 케이는 모든 것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뉴욕에 갔다 온 뒤로 시작된 증세였다. 돌아온 뒤 서울의 모든 것이 하나같이 어딘가 모르게 덜 떨어지게 느껴졌다. 특히나 사람들이 그랬다. 세련되게 젊음을 탕진하는 귀여운 백인 여자애나 3개 국어를 할 줄 아는 어딘가 천재 같은 유대인은 서울에서는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도 좋은 점은 있었다. 하지만 나쁜 점도 그만큼 있었다. 한마디로 어정쩡했다. 돌아온 뒤, 모든
 
 
 
[개의 심장]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개의 심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13
미하일 불가꼬프 지음, 정연호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의사 필리뽀비치는 떠돌이 개 샤릭에게 인간의 뇌하수체와 생식기를 이식하여 인간으로 변형시킨다. 샤락을 제대로 된 교양있는 인간으로 만들려는 의사의 노력과는 달리 샤릭은 거칠고 야만스런 본성을 버리지 못한 채 사람으로서의 권리만 주장한다. 결국 의사는 샤릭을 다시 개롤 되돌려놓는다. 이 정도가 '개의 심장'의 간략한 줄거리이다. 이 작품이 걸작이 된 것은 우선 시의적절한 사회비판정신 때문이다. 즉 이 작품은 당대 사회를 떠돌던 급진적인 과학과 정치, 다시 말해 급진적인 인간개조를 주장하는 우생학과 볼세비키 혁명에 대한 비판으로 씌어졌다. 물론 문학이 주제만으로 걸작이 되진 않는다. 그러한 주제는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스토리와 문체로 맛깔나게 형상화되었다. 과연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작가다운 솜씨이다.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의 이러한 역사적 가치와 문학적 가치에 대해 재론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알려지지 않은 명작이라면 그러한 소개의 글이 발굴의 의미를 지니겠지만 이 작품은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진 명작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주제에 관한 소회를 간단히 피력해보고자 한다.
과학적 우생학은 근본적으로 정치적 파시즘과 쌍생아이다. (이때의 파시즘은 나치나 무쏠리니, 프랑코나 일본 군국주의 같은 우파 전체주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탈리니즘 같은 좌파 전체주의까지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다) 역사적으로도 우생학과 나치즘과 결합하여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비극을 낳았다.  둘의 공통점은 전술한 바와 같이 급진적인 인간 개조 이데올로기이다. 인간 개조 자체가 그렇게 비난받을 사고는 아니다. 인간은 정말로 문제가 많은 족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개조가 당위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는 당연히, 그것이 철저히 '선의'의 지배 하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행위에는 반드시, 이윤과 권력의 추구라는 인간의 천형과도 같은 어둠의 그림자가 끼어들게 마련이다. 이윤과 권력이라는 동기 없이 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이윤과 권력 때문에 제대로 되는 일 역시 없다는 것이 바로 인간의 비극인 것이다. 이윤과 권력의 동기가 인간 개조를 지배하게 되면 그것은 언제나 홀로코스트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개조에는 선의에 의한 이윤과 권력의 견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둘째는 그것이 반드시, 필히, 꼭,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윤과 권력이 모든 일의 동기와 추진력이라면 과학은 모든 일의 구체적 방법론이 될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같은 말이 가능하다. 과학 없이 되는 일은 없다. 하지만 과학 때문에 제대로 되는 일 역시 없다. 과학에는 치명적인 맹점이 있다. 시간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것이다. A와 B가 결합하면 C가 된다는 것을 알아내는 것이 바로 과학이다. 하지만 그것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A와 B가 결합하면 C가 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다. 즉 A와 B의 결합에 시간의 흐름이 더해져야만이 제대로 된 C가 나오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없다면 그것은 C가 아니라 C의 모습을 지닌 사이비 또는 괴물인 것이다. 과학은 시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며 시간을 없애는 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그래서 과학에는 인문학이 필요한 것이다. 역사와 문학은 모두 인간의 삶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인문학을 통해 인간의 삶을 직접 만나본 사람이라면 모두 안다. 인간의 삶이란 결국 시간의 흐름이 만들어주는 것이며 자신의 삶에서 시간의 흐름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성숙이라는 것을. 그래서 굴곡의 긴 시간을 살아온 촌부는 이미 살아온 삶 그 하나로 이미 하나의 훌륭한 인문학자라는 것을. 과학은 보여주는 것은 시간을 거세한, 진리이면서도 진리가 아닌 사이비일 뿐인 것이다. 모든 것은 오직 시간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과]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파과'는 상처와 치유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든 문학은 상처에 대해 이야기한다. 문학은 삶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삶이란 바로 상처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훌륭한 문학이라면, 치유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하여 모든 훌륭한 문학은, 상처에 대한 아프고도 깊은 응시를 생명처럼 지니고 있다. 상처를 똑바로 들여다보고 그 근원을 찾아나서는 작업 없이, 치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독자로 하여금 상처에 대한 깊은 사유의 계기 하나를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파과'는 이미 어느 정도의 문학적 성과를 지닌 셈이다. '파과'가 이야기하는 상처는 관계의 상처, 그리고 소멸의 상처이다. 타자의 내면을 온전히 알 수 없다는 근원적 차원의 소통 불가능성과 타자의 소유는 나의 소유를 제약한다는 현실적 차원의 공유 불가능성으로 인해, 인간의 삶은 끝없는 오해와 갈등, 즉 관계의 상처로 점철된다. 또한 인간의 삶은 끝없는 상실과 소멸의 삶이다. 손에 쥐었던 재화를 잃고 옆에 섰던 사람을 잃고 싱싱하던 육체를 잃고 영민했던 지력을 잃고 뜨겁거나 아렸던 감정을 잃고 마침내는 생명을 잃는다. 관계의 상처와 소멸의 상처는 인간 존재의 숙명적 비극인 것이다.
'파과'는 가장 쓰린 상처의 한가운데로 내몰린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추적하고 있다. 주인공 조각은 결손가정에서 태어나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오해로 인해 생존의 위기에까지 내몰린 끝에 결국은 무감각하게 사람의 목숨을 빼았는 킬러가 된다. 단 한 번의 따뜻한 추억조차 없이 오로지 상처뿐인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온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노년이 온다. 육체는 둔해지고 의식은 꺼져간다. 자신이 손에 쥔 모든 것을 상실하고 이제 자신마저 상실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가 이러한 상처를 견뎌내고 마침내 이겨내는 과정이다. 우선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그녀의 내면에 존재하는 모순이다. 그녀는 고립을 안락으로 여기고 모든 관계를 철저히 거부한다. 첫 남자에 대한 사랑마저도 가당치 않다고 여기고 자신의 아이마저도 외국으로 입양시킨다. 그것은 그녀가 다시는 관계로부터 상처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녀의 의식일 뿐이다. 그녀의 무의식에는 관계에 대한 간절한 희구가 있다. 관계에 대한 그녀의 완강한 거부는 사실 상처받지 않겠다는 측면보다는 오히려 상처주지 않겠다는 측면이 더 강하다. 첫 남자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유부남이었던 그의 아내가 받게 될 상처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으며 아이를 입양시킨 것은 킬러의 아이가 겪게 될 위험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그녀의 관계 거부는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이타적인 것이다.
노화와 소멸에 대한 그녀의 대응 역시 동일한 모순을 지니고 있다. 그녀는 소멸과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있으며 늘 죽음을 준비해둔다. 더 나아가 사실 그녀는 미필적 고의의 형식으로 죽음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있다. 킬러라는 고위험 작업을 예순이 넘은 나이까지 지속하는 것은 사실 죽음의 확률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녀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삶을 사랑하지 않기 떄문이다. 상처만 주는 삶을 사랑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녀의 삶은 타성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그녀의 의식일 뿐이다. 그녀의 무의식에는 삶에 대한 애착이 있다. '방역작업(청부살인)' 외에 그녀가 유일하게 신경을 쓰는 행위는 외출할 때 늘 창문을 열어두고 가는 행위이다. 돌연한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키우던 개가 집 안에서 굶어죽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인 것이다. 그녀의 무의식은 그 버려진 늙은 개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개를 살려주고 싶어하는 것은 결국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무의식적 애착인 것이다. 그녀는 사랑할 수 없는 삶을 그래도 사랑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그녀는 스스로의 이런 무의식을 자각하지 못한다.
관계의 거부와 소멸의 수용은 그녀가 상처로 가득찬 삶을 견뎌내는 방식이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자신을 그녀 역시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으므로, 고독하든 죽어가든 그냥 내버려두어도 된다.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고독과 소멸의 수용은 역설적으로 상처를 견뎌내는 방식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무의식은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삶을 그래도 사랑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무의식을 자각하고 수용하는 데서 비로소 상처의 치유는 시작된다. 그러한 자각과 수용의 계기는 바로 사랑이다. 그녀는 원래의 자신처럼 선하고 순해서 속수무책으로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위기에 빠진 그의 딸을 목숨을 걸고 구해줌으로써 마침내 자신과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상처를 견뎌내는 방식이 역설적이었듯이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 역시 역설적이다.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이러한 역설이 가능한 것일까. '파과'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녀는 하고 싶은 것과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기게 된다. 그녀는 그와 그의 가족을 멀리서나마 지켜보고 싶고 그와 그의 가족을 위험으로부터 지켜주고 싶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건다. 속절없이 소멸해가는, 무의미한 자신의 하찮은 목숨을 버려 소중한 것을 지키려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무의미했던 자신과 자신의 삶은 소중한 것으로 변신하게 된다. 소중한 것을 지켜야 하기에 자신은 더 이상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며 마침내 그것을 지켜내었기에 자신은 더 이상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소중한 것을 계속 바라보고 또 지켜야 하기에 앞으로의 자신의 삶 역시 더 이상 무가치한 것이 아닌 것이다. 사랑을 통해 그녀는 소중한 것을 가지게 되었고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그녀의 삶 역시 소중한 것이 되었다. 이처럼, 무엇이든 소중한 것이 되려면, 소중한 것이 있어야 한다. 소중한 것이 있어야 소중한 삶이 되고 소중한 것이 있어야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소중한 것을 지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그와 그의 삶은 소중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의 구원은 그리고 삶의 구원은 결국은 사랑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또다시 우리는 사랑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관계의 상처는, 상처를 되돌려 주는 방식(투우)이나 관계를 거부하는 방식(조각)으로는 치유될 수 없다. 상처를 상처로 되돌려주는 방식은 상처의 무한증식을 낳을 뿐이다. 그리고 관계를 거부하는 방식은 소멸에 이를 뿐이다. 사람은 장애나 노화로 인한 육체적 소멸로 죽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부재에서 오는 관계의 단절이야말로 진정한 죽음이다. 내가 기억할 사람도 나를 기억할 사람도 없는 상태야말로 완벽한 존재의 무화이기 때문이다. 조각의 삶은 상처받는 삶에서 상처받지 않으려는 삶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상처주지 않으려는 삶으로 변모했고 사랑을 만나서는 마침내 소중한 것을 상처로부터 지키려는 삶으로까지 나아갔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관계의 상처를 치유하는 유일한 방식이자, 동시에 소멸에 맞서는 유일한 방식이다. 목숨을 바쳐 사랑하는 사람을 지킨 조각의 삶은 이제 물리적 소멸로도 죽지 않는 불멸의 것으로 변모했다. 그녀가 그 싸움에서 죽었다 해도 또는 앞으로 늙어서 죽는다 해도, 그녀는 자신이 지켜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은 인간이 물리적 소멸이라는 한계를 넘어서 불멸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되는 것이다. 
파과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과실의 부패를 뜻하기도 하고 여자의 성숙을 의미하는 16세 또는, 여자의 노화를 의미하는 64세를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자의 고통스런 첫경험의 출혈을 뜻하기도 한다. 조각이 부스러지고 말라버린 손톱에 아름다운 무늬를 새겨넣는 것으로 작품은 끝난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제목을 붙인 작가의 의도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사랑을 통해 그녀는 상처받고 죽어가는 삶, 속절없이 썩어가는 소멸의 삶을 아름다운 생명의 삶으로 바꾸어낸다. 사랑을 통해 64세의 그녀는 다시 16세의 소녀가 된 것이다. 사랑을 통해, 썩어가던 과일은 생명의 향기를 되찾은 것이다. 무늬는 지워지겠지만 다시 칠하면 된다. 이는 그녀가 사랑을 통해 불멸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오직 사랑만이 죽음을 생명으로 그리고 불멸로 바꾸는 연금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의 성장을 가능하게 한 근본적 동인은 바로, 역설적이게도 상처로 가득찬 그녀의 삶이다.  그녀가 사람들을 상처로부터 지키기 위해 그토록 애썼던 것은 그녀 자신이 받은 상처가 너무도 아팠기 때문인 것이다. 이처럼 상처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만 사람을 자라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상처로 성숙하고 사랑으로 불멸하는 존재인 것이다. 과연 당신은 상처로 죽는 존재가 될 것인가 상처로 다시 태어나 불멸하는 존재가 될 것인가.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