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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ㅣ 하다 앤솔러지 1
김유담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9월
평점 :
걷다
책 표지가 트레이싱지로 싸여 있고 파스텔 톤의 초록색 무늬가 있어서 무척 아름다운 책이다. 아름답지만 트레이싱지가 구겨질까 걱정되어 다른 책들보다 조심히 다루게 되어서, 좀 더 신경이 쓰였다. 트레이싱지는 일반 책표지보다 잘 구겨지고 공정이 까다로운 걸 알기에, 책 표지를 왜 굳이 트레이싱지로 만들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이 의문은 책을 읽으면서 점차 풀려갔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어쩌면 책 표지가 이 책의 제목과 의미를 관통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걷는다는 건 뛰는 것보다 느리고, 이동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차를 타는 것보다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비효율적이고 느린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걷는 걸 택할 때가 종종 있다. 느리지만 주변을 둘러보면서 천천히, 그리고 함께 걸어가며 아날로그한 매력을 즐기는 사람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모든 단편에는 ‘걷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김유담 작가의 ‘없는 셈 치고’에서 맨발걷기를 하는 고모, 성해나 작가의 ‘후보’에서 관절염 때문에 뒤로 걷는 근성, 이주혜 작가의 ‘유월이니까’에는 무덤만 찾아 걷는 아내, 임선우 작가의 ‘유령 개 산책하기’에는 죽은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영하, 임 현 작가의 ‘느리게 흩어지기’에는 산책을 하는 명길. 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걸으면서 회복해간다. 몸이 회복하기도 하고, 마음을 회복시키기도 한다.
앤솔로지에서 모든 단편이 좋다고 느끼는 건 꽤나 어렵다. 사람의 취향은 다양하고 그 취향의 가짓수만큼 취향인 글도 많기에 모든 단편을 재밌게 읽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인데, ‘걷다’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일상적인 소재를 작가님들만의 문체로 담담하게 풀어가면서 독자들이 등장인물들과 함께 애도를 하기도, 회복하기도, 어떤 추억을 그리워하기도 하게끔 만든다. 이번 가을에는 담담한 문체에서 쓸쓸하기도 슬프기도 한 가을만의 감성을 아프지 않게 풀어내는, 감성 있는 단편 소설집인 ‘걷다’를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없는 셈 치고- 아빠가 돌아가신 뒤 고모에게 키워진 ‘나’가 암에 걸린 고모를 돌보는 이야기.
후보- 뒤로 걷기를 시작한 근성이 기억하는 ‘상수시’와 세실의 이야기.
유월이니까- 무덤만 찾아 다니며 사진을 찍는 애인을 떠난 남자 이야기.
유령 개 산책하기-언니가 멋대로 맡긴 강아지 ‘하지’가 죽은 뒤 돌아와서 함께 산책하는 이야기.
느리게 흩어지기- 글쓰기 모임에서 글쓰기 숙제를 하지 않지만, 항상 모임에 나가는 명길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