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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들의 도시
김주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평점 :
밤새들의 도시
러시아 문학에서는 인물들의 이름과 성이 굉장히 길고, 이름을 애칭으로 부르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독자는 자신이 아는 인물이 이 인물이 맞나 하는 의구심을 수도 없이 겪게 된다. ‘밤새들의 도시’도 나탈리아를 ‘나타샤’라 부르고, 니쿨린을 ‘사샤’라 부르는 등 이름의 변천사를 많이 겪지만, 인물이 많이 등장하지는 않아서 큰 무리 없이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다른 러시아 문학 작품에 도전할 용기가 생겼달까.
‘밤새들의 도시’의 1장은 ‘나는 무용수가 될 운명이 아니었다.’로 시작한다. 점프를 잘하던 나탈리아는 자신의 재능을 알아본 이모의 말에 끌려, 발레를 연습하고 2명을 뽑는 발레 학교에 합격한다. 다른 이들보다 성공에 대한 열망에 굶주린 나탈리아는 피나는 노력 끝에 파리 발레단에 스카웃되어, 연인이던 사샤와 함께 파리로 간다. 나탈리아는 지젤 공연을 마친 뒤 부상으로 공연을 쉬는데, 그 즈음에 사샤가 스캔들에 휘말리고 나탈리아는 그의 비밀을 알게 된다. 나탈리아는 교통사고로 은퇴 후 재활을 힘겹게 이어간다. 러시아 마린스키에서 원수처럼 지낸 드미트리의 제안으로 다시 파리에 온 나탈리아. 과연 나탈리아는 2년 만의 복귀작으로 지젤을 무사히 공연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다 보면 나타샤의 예술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삶에 있어 시련이 닥칠지라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인생의 최정상이라 말할 수 있는 전성기에 올랐다가 추락했지만, 그럼에도 삶은 지속되기에. 전성기가 끝났더라도 삶은 계속된다는 걸 인지하고 그 삶 또한 기꺼이 살아내는 모습이 아름답다. 삶은 기쁘기만 하지 않고 오롯이 슬프기만 하지도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떤 모습의 삶이라도 끝까지 살아내야 한다.
그리고 책을 읽다 보면 주인공이 하는 고민에 동참하게 된다. 신체적으로 전성기였을 때처럼 발레를 하고 싶다는 욕망과,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듦에 따라 다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능한 부분까지만 동작을 하는 현실 사이의 고민. 이 고민을 함께 하다 보면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타샤의 교통사고는 그러한 고민 중에 연인의 비밀을 알게 되어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마지막으로 띠지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독자들은 사실 띠지의 존재가 참 난감하다. 버리기에는 아까운데, 보관은 용이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밤새들의 도시’ 띠지는 물결치는 모양이 들어가서 띠지가 존재함으로써 책 표지가 완성되는 느낌이다. 띠지의 종이도 코팅이 한 번 들어가서 쉽게 구겨지지 않아 보관도 편해, 책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느낌이 든다. ‘밤새들의 도시’는 이러한 이유로 처음으로 띠지까지 보관하는 책이라 더더욱 애착이 가는 책이다.
작가님의 섬세한 묘사를 읽으면, 마치 내가 발레 공연을 보기 위해 극장에 온 관객 같다는 착각이 든다. 발레라는 대중적이지 않은 소재로 발레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발레에 흠뻑 빠진 듯한 기분이 들도록 쓰신 작가님의 글을 읽다 보면 경탄하게 된다. 묘사가 섬세하고 세밀해서 문장을 읽었을 뿐인데 귓가에 클래식이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문장들이 모이고 모여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낸다. 책을 다 읽고 나면 한 편의 장엄한 악장 연주를 듣고 우레와 같은 박수가 들리는 듯하다. 나타샤가 발레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치유받는 그런 묘사들이 정말 아름다워서, 홀린 듯이 읽어내렸다.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이 책을 읽어봤으면 한다.
아무리 위대한 예술 작품이라도 끝이 있는 법이다. 사실, 위대하려면 반드시 끝나야 한다.
그러나 삶에는 결코 끝이 없다.
한 가닥의 실이 매듭지어지고 다른 가닥이 끊기더라도,
영원히 흐르는 음악에 맞춰
계속 엮이며, 오로지 무한대의 높이에서만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다.-p.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