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논하는 사람이 아니며,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그는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 10p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400번, 김수영의 시론을 엮은 책이다. 평소 시에 대한 동경을 갖고있는 터라 제목을 봤을 때부터 기대하고 기다렸다.

1. 시, 새로움으로 추구하는 자유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말은 아마도 시의 형식이니 내용이니 논하는 것 부질없으니, 그 모든 것에 모욕을 주듯 오직 새로움을 추구하라는 일갈로 들렸다. 시어에 입혀진 수사적이고 정형화된 이미지들을 걷어내라는 뜻이었을까.

금지된 것이 많은 시대에 포로생활까지 했던 사람으로서 금기를 깨라는 그의 외침은 어떤 힘을 지니고 있다.
˝정치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다.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형식‘도 인정하지 않는다.˝ 14p

새로움을 강조한 것은 습관처럼 써오던 언어 사용에는 질문없이 받아들인 구습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언어가 없는 사회는 단순한 전달과 노예의 언어밖에는 갖고 있지 않다.˝ 52p

다소간은 자유가 이뤄졌고, 어느 부분은 시간이 흘렀나 싶게 여전한 것 같은 이 시대를, 시인 김수영이 보면 무어라 말하려나.

2. 예술과 정치
21세기 오늘날, 검열이 있는 것도 군부독재가 서슬퍼런 것도 아니지만, 어쩐지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일은 예술가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닐테다. 상대를 향한 공격이 무자비하다고 느끼는 일반인도 쉽지 않다. 훨씬 엄중한 시대였을텐데 김수영은 말한다.

˝이번 4.26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통찰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시인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데...그런 시인이나 이런 교감은 모두 다 모름지기 이승만의 뒤나 따라가 살든지 죽든지 양자택일하여라.˝122p
˝시대의 윤리의 명령은 시 이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거센 혁명의 마멸 속에서 나는 나의 시를 다시 한번 책형대 위에 걸어 놓았다.˝ 123p
˝그러나 진정한 문학의 본질은 결코 한시에만 받아들일 수 있는 애완의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오늘날과 같은 개혁의 시기에 처해 있을수록 그 가치가 더한층 발효되는 것이라는...˝ 125p

3. 인간 김수영
이외에도 파스테르나크니 레이몽 크노니 보들레르니 해외 문학을 두고 끊임 없이 공부한 것, 시로 돈 버는 일, 술집을 전전하는 일 등 재밌는 문장이 많았다. 역시 시인의 산문, 좋다.

아는 것이 워낙 미천해 제대로 이해한다 말한 순 없어도 지경을 넓힌 느낌이다. 이제 그의 시 전집을 집으러 얼른 일어나야겠다.

다만 하나, (시론이야 어려워서 이해가 어렵다지만) 정말 미스테리가 있다. 이 부분 이해가는 분 계신가요?🤔
˝...일본 번역책으로 읽었는데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읽고 나자마자 즉시 팔아 버렸다. 너무 좋은 책은 집에 두고 싶지 않다. 집의 서가에는 고본옥(헌책방)에서도 사지 않는 책만 꽂아 두면 된다.˝ 185p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침을뱉는 일이다.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자아 보아라, 당신도, 당신도, 당신도, 나도 새로운 문학에의 용기가 없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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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2022-03-28 14:3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제 경우에, 너무 좋은 책은 집에 두지 않고 중고서점에 판매합니다. 다른 누군가도 그 책을 읽어주었으면 좋겠거든요. 집의 서가에는 중고서점에서도 사지 않는 제 전공분야의 책들을 정리해둡니다. 그러한 책들은 가지고 있지 않으면, 정작 필요할 때 구하기도 어려운 경우가 많아서요 🙂

호두파이 2022-03-28 18:09   좋아요 3 | URL
아하! 그런 마음이 있군요. 욕심이 많은 터라 그렇게 생각 못했어요😆 설명 감사해요~
 

내 책장을 돌아보게 하는 구절, 내 책장은 무슨 인상을 남기려나.

남겨진 책을 보면서 죽은 이에 대해 생각한다. 서가에 꽂힌 압도적인 양의 책, 지독하게 읽으면서 이 생을 건너간 사람이다. - P87

서가는 어쩌면 그 주인의 십자가 같은 것은 아닌지. 빈 책장을 바라보자면 일생 동안 그가 짊어졌던 것이떠오른다. 수많은 생각과 믿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인생의 목표와 그것을 관철하고자 했던 의지, 이끌어야 했던 가족의 생계, 사적인 욕망과 겸한 취향, 기꺼이 짊어진 것과살아 있는 자라면 어쩔 도리 없이 져야만 했을 세월.
그는 이제 십자가 같은 서가만 남기고 홀홀 가버렸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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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라캉은 말했다. 내가 봄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게 된 것도 책에서 만난 문장 때문이었다.

겨울에는 봄의 길들을 떠올릴 수 없었고, 봄에는 겨울의 길들이 믿어지지 않는다. (김훈, <자전거여행>중에서)

당시 이 구절을 두고 이야기 나누던 산 길의 정경과 봄 냄새와 당신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봄기운 실린 비가 조용히 내리는 오늘, 문득 떠오른 문장이 봄을 알리고 있다.

1. 봄, 화려한 수런거림 -녹색이 얼마나 다양한지, 꽃잎부터 터트리는 나무들은 어찌나 화려한 색을 지니고 있는지. 숲 속에는 조용한 흥분이 흐른다. 글자로만으로도 화려한 색들이 보일 듯 하다.

˝눈 녹은 해토에/마늘 싹과 쑥잎이 돋아나면/그때부터 꽃들은 시작이다 // 2월과 3월 사이/ 복수초 생강나무 산수유 진달래 산매화가 피어나고/ 들바람 씀바귀 제비꽃 할미꽃 살구꽃이 피고나면˝ (박노해,<꽃은 달려가지 않는다>중에서)

죽은 것 같은 마른 가지를 뚫고 올라오는 것은 단단한 강철이 아니라 연약한 잎새다. 새싹을 보며, 희망을 놓고싶지 않은 사람들은 봄을 사랑하고야 만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안간힘을 본다. 악력을 다하는 생의 의지를 본다. 이제 막 움트고 있는 생명, 서서히 활착하며 약동을 준비하는 씨앗, 그러나 울음도 노래도 아닌 무엇, 그것은 들리지 않는 가장 큰 소리다.˝ (안리타,<쓸 수 없는 문장들>, 25p)

2. 봄의 흥취 -다음 봄은 백수가 되어 철처하게 봄을 즐길 은밀한 계획을 품고 있는 사람으로서, 봄소풍은 필수의례라 주장해 본다. 꽃그늘 아래에서 도시락 먹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선뜻 동의해 줄 것이라 생각하며.

˝봄이 되자 세상은 꽃 피었다. 이렇게 꽃이 많았나 싶어 매일같이 꽃을 보러 산보를 다녔다. 도시락을 싸서 들판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한참 책을 읽었다.˝(양다솔,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18p)

꽃놀이가 얼마나 필수냐하면, 여기엔 고금이 따로 없다는 증거도 있는 것이다. 규약집까지 지어가며 봄놀이에 진지했던 선조의 지혜를 받잡고 싶어진다.

˝부슬비나 짙은 안개, 사나운 바람도 가리지 않는다. 일년 중 봄놀이에서 비가 오고 안개가 끼고 바람 부는 날을 빼면 놀에 좋은 날이 대단히 적기 때문이다.˝ (<팔도유람기>, 봄나들이 규약, 47p)

물론 규약집 없이도 좋아하는 사람과 봄 길을 걷는 것만도 충분하다.
˝귤꽃이 피거나 무화과가 여무는 밤, 국수 한 그릇에 막걸리 한 병 마시고 딸과 조잘조잘 돌아오는 길을 좋아한다. 은근한 취기가 은은한 달빛에 섞이고 봄밤의 수더분한 공기 속에 달콤한 귤꽃 향기가 번지면 ‘지금 어째 좀 행복한 것 같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인데, 그런 순간의 그 머쓱한 행복감을 사랑한다.˝ (영롱보다 몽롱, 38p)

3. 봄의 슬픔 -아름답고 경이로운 봄, 봄에는 슬픔이 아른거린다.

˝그러나 그때가 바로 고독이 자라나는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고독의 성장은 소년들의 성장처럼 고통스러우며 막 시작되는 봄처럼 슬프기 때문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봄이 슬픈 이유는 봄의 생명력이 죽음과 너무 가깝기 때문일까.

˝아,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미나리아제비의 곱슬곱슬한 새싹도/겨울이 결코 죽이지 못하는 가시양귀비도/당신에게 가르쳐주지 못한단 말인가, 녹아가는 땅과 엷은 눈을 뚫고서/언덕들 사이로 안개를 내몰고 있는 사월의 태양 속으로 되돌아오는 방법을?˝(빈센트 밀레이, <정원의 봄>중에서)

아름다운 봄은 참 짧다. 아름다움은 필연적으로 짧은 것인가, 짧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인가. 선후를 명확히 가르지는 못하지만, 봄을 사랑할 때는 봄이 지는 슬픔까지 사랑하고야 만다는 점은 확실하다.

˝떨어지는 꽃들을 슬퍼할 것/실컷 슬퍼하고 실컷 그리워할 것/그러고 나서 다음 계절로 굳건히 나아갈 것˝(안리타,<쓸 수 없는 문장들>,34p)

마지막으로, 긴 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지금까지 읽어온 책들이 각각 어느 계절을 맞아 움트길 바라며.
˝책은 씨앗과 같다. 수세기 동안 싹을 틔우지 않은 채 동면하다가 어느 날 가장 척박한 토양에서도 갑자기 찬란한 꽃을 피워내는 씨앗과 같은 존재가 책인 것이다.˝(칼 세이건, <코스모스>,559p)



p.s. 봄이 오면 생각나는 문장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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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3-26 22: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참 봄에 대한 문장을 생각해보려고 했는데 확 안떠오르네요 😅
그래도 이렇게 봄에 대한 글을 보니까 좋네요 ^^

호두파이 2022-03-26 22:44   좋아요 2 | URL
감사해요~ 맘에 드는 문장과 함께 올 봄은 반짝이는 기억 많이 만드시길💐🌸🏵💮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박노해 시집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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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내가 쓰러질 때> 중

이제 넘어지고 실패하면
그 길로 한 방에 가는 세상
한 번 쓰러지면 끝장인 세상
실패한 자를 받쳐줄 그 무엇도 없는 벼랑 끝,
너나없이 달려와 들쳐업고 실어다 줄
친구도 이웃도 사라져버린 각자 살아남기의 시대

우리 모두는 전쟁의 세계에 개인으로 던져져
비겁하게 스스로 술잔을 세며 마신다
스스로 계산하며 사람을 만나고
스스로 머리 굴리며 올라간 만큼 떨어진다
받쳐줄 그 누구도 없는 아찔한 시장사회
차갑고 딱딱한 시멘트 바닥으로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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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겁자다. 일신의 편리와 말초감각의 만족을 너무 사랑한다. 정의와 대의보다도. 아마 여러 비겁 중에서도 나의 것이 가장 나쁠 것이다. 필요성과 타당성을 모두 이해하고도 뒤돌아서서 변명을 중얼거리며 주저한다는 점에서.

이런 종류의 죄책감은 여러 분야에서 불쑥불쑥 등장한다. 자꾸 반복된다. 기후위기, 동물복지, 노동자, 장애인, 여성, ... 전부 약하디 약한 것들이다. 이슈가 터질 때마다 이쪽저쪽 휙휙 고개를 돌리다보면 어느새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하나하나가 전부 시급하고 절박하다. 내 삶도 버거운 사람은 어찌해야 하나.

열렬히 행동하지는 못하고 간신히 한 두번 악행을 줄여본다. 충분치 않다.
불편하게 만드는 책을 자꾸 들춰본다. 충분치 않다.
조금 생긴 가욋돈을 기부해 본다. 충분치 않다.
오늘 내가 누린 것들에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나 충분치 않다.

충분치는 않아도 아주 눈 감지는 않는 것, 그럼에도 계속 지켜보는 것. 일상을 살아내는 것도 벅찬 날이 많은 비겁자는 오늘도 변명조로 웅얼거며 자꾸 감기는 눈을 비벼본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책을 또 펼친다. 충분치는 않아도, 비겁자의 최선을 다하기 위해. 외면하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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