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라캉은 말했다. 내가 봄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게 된 것도 책에서 만난 문장 때문이었다.
겨울에는 봄의 길들을 떠올릴 수 없었고, 봄에는 겨울의 길들이 믿어지지 않는다. (김훈, <자전거여행>중에서)
당시 이 구절을 두고 이야기 나누던 산 길의 정경과 봄 냄새와 당신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봄기운 실린 비가 조용히 내리는 오늘, 문득 떠오른 문장이 봄을 알리고 있다.
1. 봄, 화려한 수런거림 -녹색이 얼마나 다양한지, 꽃잎부터 터트리는 나무들은 어찌나 화려한 색을 지니고 있는지. 숲 속에는 조용한 흥분이 흐른다. 글자로만으로도 화려한 색들이 보일 듯 하다.
˝눈 녹은 해토에/마늘 싹과 쑥잎이 돋아나면/그때부터 꽃들은 시작이다 // 2월과 3월 사이/ 복수초 생강나무 산수유 진달래 산매화가 피어나고/ 들바람 씀바귀 제비꽃 할미꽃 살구꽃이 피고나면˝ (박노해,<꽃은 달려가지 않는다>중에서)
죽은 것 같은 마른 가지를 뚫고 올라오는 것은 단단한 강철이 아니라 연약한 잎새다. 새싹을 보며, 희망을 놓고싶지 않은 사람들은 봄을 사랑하고야 만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안간힘을 본다. 악력을 다하는 생의 의지를 본다. 이제 막 움트고 있는 생명, 서서히 활착하며 약동을 준비하는 씨앗, 그러나 울음도 노래도 아닌 무엇, 그것은 들리지 않는 가장 큰 소리다.˝ (안리타,<쓸 수 없는 문장들>, 25p)
2. 봄의 흥취 -다음 봄은 백수가 되어 철처하게 봄을 즐길 은밀한 계획을 품고 있는 사람으로서, 봄소풍은 필수의례라 주장해 본다. 꽃그늘 아래에서 도시락 먹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선뜻 동의해 줄 것이라 생각하며.
˝봄이 되자 세상은 꽃 피었다. 이렇게 꽃이 많았나 싶어 매일같이 꽃을 보러 산보를 다녔다. 도시락을 싸서 들판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한참 책을 읽었다.˝(양다솔,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18p)
꽃놀이가 얼마나 필수냐하면, 여기엔 고금이 따로 없다는 증거도 있는 것이다. 규약집까지 지어가며 봄놀이에 진지했던 선조의 지혜를 받잡고 싶어진다.
˝부슬비나 짙은 안개, 사나운 바람도 가리지 않는다. 일년 중 봄놀이에서 비가 오고 안개가 끼고 바람 부는 날을 빼면 놀에 좋은 날이 대단히 적기 때문이다.˝ (<팔도유람기>, 봄나들이 규약, 47p)
물론 규약집 없이도 좋아하는 사람과 봄 길을 걷는 것만도 충분하다.
˝귤꽃이 피거나 무화과가 여무는 밤, 국수 한 그릇에 막걸리 한 병 마시고 딸과 조잘조잘 돌아오는 길을 좋아한다. 은근한 취기가 은은한 달빛에 섞이고 봄밤의 수더분한 공기 속에 달콤한 귤꽃 향기가 번지면 ‘지금 어째 좀 행복한 것 같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인데, 그런 순간의 그 머쓱한 행복감을 사랑한다.˝ (영롱보다 몽롱, 38p)
3. 봄의 슬픔 -아름답고 경이로운 봄, 봄에는 슬픔이 아른거린다.
˝그러나 그때가 바로 고독이 자라나는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고독의 성장은 소년들의 성장처럼 고통스러우며 막 시작되는 봄처럼 슬프기 때문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봄이 슬픈 이유는 봄의 생명력이 죽음과 너무 가깝기 때문일까.
˝아,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미나리아제비의 곱슬곱슬한 새싹도/겨울이 결코 죽이지 못하는 가시양귀비도/당신에게 가르쳐주지 못한단 말인가, 녹아가는 땅과 엷은 눈을 뚫고서/언덕들 사이로 안개를 내몰고 있는 사월의 태양 속으로 되돌아오는 방법을?˝(빈센트 밀레이, <정원의 봄>중에서)
아름다운 봄은 참 짧다. 아름다움은 필연적으로 짧은 것인가, 짧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인가. 선후를 명확히 가르지는 못하지만, 봄을 사랑할 때는 봄이 지는 슬픔까지 사랑하고야 만다는 점은 확실하다.
˝떨어지는 꽃들을 슬퍼할 것/실컷 슬퍼하고 실컷 그리워할 것/그러고 나서 다음 계절로 굳건히 나아갈 것˝(안리타,<쓸 수 없는 문장들>,34p)
마지막으로, 긴 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지금까지 읽어온 책들이 각각 어느 계절을 맞아 움트길 바라며.
˝책은 씨앗과 같다. 수세기 동안 싹을 틔우지 않은 채 동면하다가 어느 날 가장 척박한 토양에서도 갑자기 찬란한 꽃을 피워내는 씨앗과 같은 존재가 책인 것이다.˝(칼 세이건, <코스모스>,559p)
p.s. 봄이 오면 생각나는 문장이 있으신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