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품성 - 우리는 얼마나 선량한가?
크리스찬 B. 밀러 지음, 김태훈 옮김 / 글로벌콘텐츠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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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태어나면 일단은 살아가야 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가치는 내 삶의 온전한 지속일 수 밖에 없다. 굳이 품성을 논할 일이 아니다. 내가 온전히 살아가기에 선한 품성이 필요하다면 선해질 것이고, 악한 품성이 이익이 된다면 그리할 것이다. 선하게 태어나는 이도, 반대로 태어나는 이도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모든 것은 상황이 그리 만들 뿐. 물질적, 정신적 풍요는 확률적으로 인간을 선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물질적 가난과, 정신의 학대는 반대로 인간을 악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사회화’라고 부를 수 있는 교육을 통해, 일정 수준 품성을 선의 방향으로 기울게 할 수는 있겠으나 그 한계는 명확하다. 요점은 내게(정신적, 물질적으로) 어떤 형태로든 이익이 되는지 여부다.

 

《인간의 품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인간의 복잡한 품성을 다룬다. (상대적으로) 선해 보이는 인간도 악한 행동을 하며, (상대적으로) 악한 인간도 어떤 경우는 선한 행동을 한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않지만) 양 극단, 즉 극선과 극악에 위치한 몇 명을 제외한다면 인류 대다수는 선악 정규분포의 가운데에 위치하며, 필요와 상황에 따라 선과 악을, 선한 품성과 악한 품성을 부지런히 들락날락할 뿐이다. 어찌 보면 자명한 사실인데, 저자는 이를 객관적으로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다양한 사례와 실험 결과를 책 속에 담아낸다. 종류는 다양하나 패턴은 단순하다. 선한이가 하는 의외의 악한 행동, 악한이가 보여주는 놀라운 선행, 두가지다. 그리고 이 둘은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자아가 평생 동안 계속 저지르는 일관된 행동일 뿐이다.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언제든 착한 행동을 할 수 있고, 나쁜 행동도 할 수 있다. 오늘은 진실을 이야기하고 내일은 거짓을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상황에서도 오전엔 참을, 오후엔 거짓을 이야기할 수 있다. 합리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고, 나를 희생해 남을 도우며, 남을 희생해 나를 돕기도 한다. 참이 늘 옳고, 거짓이 나쁘기만한 것도 아니다. 참이 사람을 다치게 하고, 거짓이 사람을 살리는 상황, 우리 꽤 많이 알고 있지 않나. 때론 자존감이 팽창하고, 때론 죄책감에 잠 못 이루기도 한다. 감정이라는 것, 품성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다만, (참, 거짓의 문제를 떠나) 가급적이면 남을 해하지 않고, 날 상처주지 않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인간이라는 개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모순을 좀 더 깊게 바라보고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 《인간의 품성》을 읽어보길 바란다. 저자가 기독교인이라, 어쩔 수 없이 강조하는 기독교적 선한 품성 강화 부분은 비기독교인이나 무신론자들이 받아들이기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지만, 이를 제외한 책의 전반적 내용은 한 번쯤 곱씹어볼만하다. 대단한 해결책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본디 그리 태어난 것이니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 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품성의 줏대없음에 대해, 모순에 대해 저자가 남긴 글을 마지막으로 서평을 마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될 수 있었던 품성보다는 훨씬 더 나은 품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품성보다는 훨씬 더 나쁜 품성을 지니고 있다.”

 

*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은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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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웨이즈 데이 원 - 2030년을 제패할 기업의 승자 코드, 언제나 첫날
알렉스 칸트로위츠 지음, 박세연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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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한국은 쿠팡), 페이스북, 구글(한국은 네이버, 카카오), 애플(한국은 삼성????), 마이크로소프트, 5개 기업의 서비스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질문이 잘못된 것 같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 대체 뭘까. 우리는 2,000만 가지가 넘는 물건을 클릭 한 번으로 살 수 있고(아마존), 내게 필요한 세상의 (거의) 모든 정보를 얻거나, 인간관계를 확장하거나, 어떤 분야든 가리지 않고 지식을 쌓아가며 공부를 할 수 있다.(페이스북, 구글). 이 모든 서비스는 스마트폰 한 대만 있으면 언제라도 실행 가능하고(애플), 학교나 회사에서는 액셀, 파워포인트, 워드, 클라우드 등의 프로그램으로 업무 시간을 단축하고 정확성을 확대할 수 있다.(마이크로소프트). 실체가 있는 유형의 물건은 거의 만들지 않지만(, 음식, , 집 등), 이 다섯 개 기업은 우리와 일상을 늘 함께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각 분야의 정점에 선 기업이고, 전 세계에 시장가치로만 환산할 수 없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하는 환상의 직장이고, 누구나 사용하길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들도 위기를 느낀다. 기업가치가 1,000조원을 넘는 기업이면서도 언제든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 속에서 경영을 하고 있다. 올웨이즈 데이 원, Always Day One은 공룡과 같은 덩치와 영향력으로 세상을 움직여가는 이 다섯 기업의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책이다. 5개 초거대기업 내부의 구조적 문제,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문, 의문에 꼬리처럼 붙어 있는 위기, 그리고 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개선하거나 혁신중인 업무 프로세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준다. 저자 알렉스 칸트로위츠는 IT분야 전문 기자답게 해박한 전문지식과 동종 업계에서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생생하고 흥미진진한 사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너무 거대해진 기업은 내부 프로세스 혁신이 어렵다. 여지껏 누려온 (그러나 유효기간이 다 되어버린) 성공의 법칙을 뒤로하고 낯선 (그러나 큰 기회를 만들어줄) 새 오아시스를 찾아 모험을 떠나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으면 결국 소멸할 수 밖에 없다. 기업은 진입시장의 위험 요소와 위기를 파악하지 못해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위험과 위기를 알면서도 지금까지 누려온 달콤한 성공의 열매의 맛을 잊지 못해 변화하지 않고 주춤하다 소멸하는 것이다.

 

다행히, 이 책에서 다루는 5개의 초거대기업은 언제나 본인들이 위기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계속 살아남기 위해, 지금과 같은(점점 더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업무 진행 및 처리 방식, 내부 직원 간의 소통 방식 개선을 위해 엄청난 에너지와 비용을 쏟는다. 이 기업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제품)의 특성 상 사용자들은 언제든 서비스를 대체할 수 있고, 실제 대체재로 활용할 수 있는 업체는 너무 많기 때문에, 안일한 방식의 경영으로는 내일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업무에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한다. 아이디어 업무와 실행업무이다. 아이디어 업무는 새로운 것을 꿈꾸고, 상상하는 창조적인 업무다. 기업의 생존과 성장을 담당한다. 실행업무는 문서를 정리하고, 자료를 입력하고, 제품을 주문하는 등의 업무다. 기업의 일상적 유지를 담당한다. 새로운 아이디어, 번쩍이는 창조력이야말로 기업의 존망을 좌우하는 필수 요소이다. 하지만 업무 시간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실행업무일 수밖에 없기에, 5개 기업은 그 대안으로 자동화 프로세스를 도입(하거나 하려)한다. 창조적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현실화하는데 최대한의 역량을 쏟기 위해 실행업무 대부분은 AI를 활용해 자동화시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은 업무 자동화를 위한 AI 활용에 대한 책이라고 볼 수도 있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혼재된,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고, 일부는 새 일자리를 발견해낼 수 있는 활용 말이다.

 

또한 이 기업들이 중요시하는 것은 내부 직원간의 피드백 문화다. 아이디어는 보다 많이 공유할수록, 한 사람의 천재보다 다수의 전문가들이 같은 고민에 빠져들수록 실현 가능성이 현저히 높아진다. 그걸 잘 아는 5대 기업은 직원들이 함께 아이디어를 보완하고 개선해갈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을 고안하려 애쓴다. (솔직히 5대 기업이라 쓰기 곤란한 부분이 있다. 애플사는 직원간 피드백 문화를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하기 때문이다. ‘다르게 생각하라 Think different’ 말고 자나깨나 보안 조심이 기업 슬로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직원간 소통을 막고 있다. 위기가 찾아온다면, 그 첫 비는 애플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

 

Always Day One, 언제나 첫날이어야 한다. 늘 첫 날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면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 둘째 날에 머물거나, 셋째 날에 머물면 나머지 작은 승리라도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나머지 날은 결국 기업의 소멸을 가져올 것이다.

 

* 직접 구매한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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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경제 - 과거 위기와 저항을 통해 바라본 미래 경제 혁명
제이슨 솅커 지음, 최진선 옮김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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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하지만, 나는 이 책 《반란의 경제》를 제대로 읽어보려 수 차례 노력했다. 최대한 이해하려 했고, 저자의 선한 의도를 파악하려 애썼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럴 수 없었다. 이 책은 코로나19로 전 세계적인 위험이 닥친 작금의 사회, 경제적 위험을 어떻게 슬기롭게 헤쳐나가야 할지 과거의 사례를 통해 배워보고, 그것으로 현재를 진단해 예측 가능한 미래를 몇 가지 시나리오로 예견해보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배울 수 있는 것은 과거밖에 없으니 과거 사례를 나열하는데 (무려) 19개나 된다. 코로나19로 세계적으로 혁명의 위험이 높아졌으니 배우는 과거 사례도 혁명(의 성공과 실패) 사례에 한정한다. 놀라운 건 19개나 되는 세계 주요 혁명사를 이야기하는데 고작 50페이지 정도 밖에 할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 사례를 최대한 성실히 겉만 핥아서 보여준다. 제대로 된 설명도, 분석도 없다보니 겉핥기임에도 내용이 쉽게 읽히지 않는다는 것은 반전이다.

 

책이 나온 시점에 대한 애매함도 있다. 책 초반을 읽어보면 《반란의 경제》 원서는 코로나 유행 초·중기 정도에 쓰여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 때문에 가게를 약탈하고, 일자리를 읽고, 배고파진 민중이 혁명 봉기를 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런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사례를 배워 대비해야 한다고 저자가 주장한 것이다.) 지금, 2021년 5월은 (모자라지만) 전세계적으로 백신을 맞고 있고, 코로나는 (지역별로는 달라도) 어느 정도 통제 가능한 수준의 전염병이 되어가고 있는데 지금 혁명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늦은감이 있다. 2020년 여름에 책이 발간됐다면 좀 더 유용할 순 있었을지 모르겠다.

 

펜데믹 이후의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하지만, 저자가 생각하는 미래는 하나가 아니다. 평화가 올 수도 있고, 지엽적 분쟁이 생길 수도 있고, 전면적인 전쟁상황이 올 수도 있고, 현재 상황에 머무를 수도 있다는 식이다. 고장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데, 어떤 미래가 펼쳐져도 다 저자가 예견한 것일테다. 매끄럽지 못한 번역까지 합쳐져(“민족주의에 대한 관심은 여기에 부채질했다”가 무슨 말인지 아시는 분?) 아쉬움이 가득한 책이다.

*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은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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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테러
브래디 미카코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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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테러》는 인간이 삶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태도에 대해, 개인 고유의 신념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이 책은 100여년 전, 개인의 온전한 자유를 위해,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를 갖기 위해, 그리고 내 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투쟁한 여성 3인의 투쟁기다. 허무주의자이자 무정부주의자인 ‘가네코 후미코’(영화 ‘박열’에서 박열 상대역으로 나온 여성), 여성 참정권 쟁취를 위해 무력 투쟁한 ‘에밀리 데이비슨’, 조국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저격수가 된 투사 ‘마거릿 스키니더’가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굳은 믿음으로 기울어진 세상을 바꿔보려 한다. 갖고 있지만 더 갖기 위해, 누리고 있지만 더 누리기 위해 탐욕을 부리는 게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평등하게 누려야 할 권리를 달라고 주장하고 행동할 뿐이다. 주인공들이 내세우는 주장과, 외치는 요구는 참 쉽고 단순하다. 수학이 아니라 산수같은 것.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는데 왜 당하는 사람은 계속 당하며 살아야 하나, 왜 사람이 사람을 멸시하고, 부리고, 모욕을 주나(후미코), 여자라서 투표권을 행사 못하고, 여자라서 동일 노동에 동일한 임금을 못받고, 여자라서 고용에 차별받는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인가(에밀리), 아일랜드는 어떤 국가의 부속 토지가 아니라 고유의 아일랜드인데, 독립한 아일랜드에서 아일랜드인으로 살게 해달라는 것이 왜 범죄인가(마거릿)

 

아무리 100년 전 세상이라 해도, 권력자들은 이들의 외침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권력자들에게(지금의 권력자에게도) 권리는 유한한 자원이었다. 여자와 나누고, 가난한 자(나라)와 나누다 보면 내 몫이 점점 줄어드는, 매장량이 정해진 광산 같은 것이었다. 계속 나누면 언젠가 저들이 내 몫의 권리마저 뺐어갈거라는 두려움도 한 몫 했다. 그리고 편견이 있었다. 열등한 자, 열등한 인종, 열등한 나라는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니 우등한 이들이 관리 - 라고 적고 착취, 탄압으로 읽는다 - 하는 것은 오히려 현명하고 옳은 결정이라 믿었다. 그들은 권리를 평등하게 나눌수록 새로운 광산이 끝없이 생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눌수록 내 몫의 권리 역시 더 단단하고 강해진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여자들의 테러》 주인공들의 바라는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세계는 여전히 편견으로 가득하고, 차별과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다. 나눌 수 있는 권리는 계속 줄어가고 가진 자들은 더 갖지 못해 안달하고 있다. 주인공들이 목숨을 내놓고 싸운 낡은 주의(남성우월주의, 차별주의, 인종주의 등)는 여전히 큰 힘을 갖고 있다. 그럼, 주인공들은 결국 실패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들이 있었고, 그들을 따르는 다음 사람, 그 다음 사람이 있었기에 (나쁘지만) 이 정도의 세상이라도 만들 수 있었다. 오늘도 우리는 인간의 당연한 권리를 말한다. 성별에 따라, 나이에 따라, 장애 유무에 따라, 피부 색깔에 따라 줄어들고 늘어날 수 있는 권리에 문제를 제기한다. 100년 전 주인공들의 후손들이 지금도 여전한 차별을 무너뜨리기 위해 싸우고 있다. 그들은 실패하지 않았다.

 

*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은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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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없는 삶 - 나와 다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바스티안 베르브너 지음, 이승희 옮김 / 판미동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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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산에서 태어나 자랐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녔고, (내가 진학하던 당시) 부산에서 2번째로 수준(?) 높은 대학을 나왔다. 직장생활은 정부 산하 공공기관에서 하고 있고, 꽤 넓은 집 한 채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래서, 소도시에서 나고 자랐거나, 실업계 학교를 다녔거나, 알려지지 않은 지역 대학을 나왔거나,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작은 회사를 다니고 집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 무지하다. 이 나라에서 통용되는 규격화된 잣대를 들이대자면, 그 무지는 나보다 (교육, 경제수준, 직업 등에서) 못하고 뒤쳐진다 판단한 이들에게 드러내는 날카로운 이빨 같은 것이다. 그 무지는 내게 다양한 편견의 씨앗을 심었고 종종 혐오감을 갖게 했다. 그렇다면 같은 이유로 나에게 편견을 가진 이들은 없을까. 셀 수 없을 것이다.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태어나 자라고, 특목고를 다녔고, IN서울 대학을 나와 유명한 대기업이나 굴지의 공기업을 직장으로 삼고 수도권에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나를 동일한 잣대로 재고 평가하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끝도 없다. 인간은 자신이 속하지 않은 곳의 낯선 존재에게는 누구나 편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편견은 종종 마음속에 독버섯처럼 혐오를 길러낸다.

 

《혐오 없는 삶》은 낯선 이와 내가 친구가 될 수 있을지, 인간이 낯선 것에 대한 공포, 편견, 불안으로 야기된 혐오를 몰아내고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묻는 책이다.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대단히 자유롭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끊임없는 반복에 배치되어 있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 비슷한 장소를 오가고, 만나는 사람만 만나며, 늘 듣는 이야기와 정보만 받아들인다. 현대 사회는 사람들이 낯선 것을 쉽게 마주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익숙함의 우물에서만 살다 보니 우물 밖 이야기에 대해서는 좀체 관심이 없다. 편견을 줄이기 위해서는 잦은 접촉과 대화가 필수적이지만, 접촉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삶에서는 그마저도 쉽지 않다.

 

리처드 도킨스는 저서 《신, 만들어진 위험》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미국과 이슬람 국가들에서 무신론자들에게 겨눠지는 아주 괴상한 비난 중 하나는 무신론자들이 사탄을 숭배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무신론자는 선한 신을 믿지 않는 것만큼이나 악한 신도 믿지 않는다. 무신론자는 초자연적인 어떤 것도 믿지 않는다. 오직 종교인들만이 사탄을 믿는다.' 믿고자 하는 대로 믿고, 비난하고 욕하고자 하는 대로 무작정 해버리는 것, 편견과 혐오는 이런 것이다.

 

그럼 편견만 혐오를 낳을까. 책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지만 차별도 혐오를 낳는다. 인종을 차별하고, 성별을 차별하고, 계급을 차별할 때 혐오의 수치는 올라간다. 트레시 맥밀런 코텀은 《THICK》에서 이렇게 말했다. ‘흑인 소녀들과 흑인 여성들은 문제 그 자체다. 그것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고, 균형을 맞춰야 할 경제문제고, 극복해야 할 감정적 짐이다.’ 차별은 사람을 동등한 위치에 놓아두지 않는다. 나와 다르다는 것은, 그 다름을 나의 시야에서 치워버려야 할 사회적 수거 문제거나, 해결해야 할 숙제로 인식하게 한다.

 

그럼 편견을 줄이고, 오해보다는 이해를, 혐오보다는 사랑을 우선시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낯선 이와의 접촉을 최우선으로 꼽는다. 책 속에 다양한 사례가 나온다. 전형적인 독일 중산층 은퇴자와 이민자, 흑인과 KKK단 소속의 백인, 네오나치와 팔레스타인인, 흑인 군인과 백인 군인 등, 물과 기름이라는 비유에 최적화된 예가 수두룩하다. 《혐오 없는 삶》에서는 이들이 접촉과 대화를 통해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꾸준한 접촉과 내밀한 대화를 통해 편견이라는 알에 금을 내고 깨 나가는 모습은 보는 것은 멋진 경험이다. 개인 간 사례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접촉을 사회로, 국가로 확장했을 때의 경우도 여럿 언급된다. 접촉의 규모가 커져도 답은 결국 하나다. 자주 대면하고, 자주 이야기하고, 우정을 쌓아라. 그러면 마음이 바뀌고 편견이 깨지고 한 사람의 고결한 인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라는 것.

 

혐오를 쌓고 타인을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이는 누구일까.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더 힘있고, 더 가졌고, 더 배운 사람들이 주로 그렇다. 인간은 나보다 강한 이에 대해서는 질투하고 부러워할지언정, 편견을 가지고 혐오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혐오할 수 있는 무지하고, 거칠고, 모진 마음조차 권력에서 나온다. 그렇기에 먼저 다가가 마음을 열어야 하는 이들도 힘을 가진 자들이어야 한다. 혐오의 대상이 먼저 다가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자가 꿈꾸는 ‘혐오 없는 삶’이 가능할까. 나는 회의적이다. 편견과 혐오는 현생 인류가 나타났을 때부터 뇌에 기본적으로 탑재된 생존 유지 기능이기 때문이다. 내 편과 네 편을 구분할 줄 알고 내 편만 모아 세력을 확장하는 능력, 만들어놓은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끊없이 적을 만들고 편견을 부추기고 혐오를 조장하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원시시대부터 인간이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 개발한 필수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럼, ‘혐오 없는 삶’은 불가능한가? 나는 모른다. 개인적으로 회의적일 뿐. 하지만 타인들도 그러라는 법은 없다. 더 나은 삶, 인류의 화합이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들에게 저자의 후기 일부를 하나의 대안으로 남겨 본다. “(중략) 나는 한 문장을 떠올렸다. 이 문장은 미국 정치학자 릴리아나 메이슨이 미국을 묘사할 때 사용했던 것이다. 나는 이 문장이 독일을 비롯한 다른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확신한다. We act like we disagree more than we actually do.(우리는 실제보다 더 많이 반대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제 우리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경향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예 또는 아니오, 선과 악, 우리 아니면 그들이라는 이분법 왕국을 떠나 그 사이를 헤엄쳐야 할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여전히 타인들에게 우리가 실제로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지를 반복해서 말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그 차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을 만나야 한다. 서로를 알아 가야 한다.”

 

*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은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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