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1.  고민의 흔적


7월의 추천 페이퍼를 쓰려고 하는데 아래의 댓글이 퍼뜩 떠올랐다. 잊고 있었는데  나도 참 뒤끝 작렬이다.

아래의 댓글을 보면 내가 추천한 책이 다른 분이 추천한 책보다 수준이 낮다는 것을 뜻함을 알 수 있다. 소위말해 자신처럼 수준 높은 사람이 택하는 책과 내가 추천하는 책이 질적으로 다르다는 뜻과 같다. 지난 달 <인지 자본주의>가 버거워 걱정을 하고 있던 차에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이웃님 방에서 맞장구좀 쳤다가 (내가 생각하는)평가단 책을 추천하는 과정상의 문제점이 공론화 되면서 어떤 분이 이렇게 답을 단 것이었다.

   
 


한사람님이 선정하신 책과 내용물을 살펴본 결과, 한사람님은 그저 자기 수준보다 어려운 책이 온다고 불평하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런 엉뚱한 댓글을 달면서 '미션오류' 같은 퇴행적인 발언을 할 것이 아니라, 신간평가단을 탈퇴하시는게 맞지 않은가요? 고생하시길.                           - 예전 평가단이라는 어느 익명의 알라디너

 
   


결과적으로 나는 내가 추천한 책이 선정되지 않아 자기 논리를 만들어 투정부리는 사람이 되었는데 투정을 부린 건 사실이므로 부끄럽지 않으나 계속해서 책을 추천하는 페이퍼를 써야 하는 입장이므로 그냥 무시하자니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마음이 편치가 않다. 내가 택한 책이 곧 나의 수준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평가단이 있다는 사실이 나로선 위축되는 것이 사실이다. 소설쪽 페이퍼 쓸 땐 어떤 책이 선정되어도 상관이 없었기에 거의 다른 분들을 따라하는 쪽이었다. 마음의 부담도 없었고 또 내가 생각하지 않는 책이 선정되어도 걱정이 되거나 실망이 되지 않았다. (소설분야를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소설도 분명 어려운 소설이 있다. 그러나 소설은 다분히 취향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해 못한다고 해서 수준낮다고 비난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이번엔 내가 문제제기를 한 쪽이라 또 누군가는 나를 주목하고 있을 거라는 소심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도 일단은 남들 보기 멋있고 근사하라고(?) 위화감 조성차원에서 부러 어려워 보이는 책위주로 페이퍼를 쓸 수는 있으나 그건 옳지도 아름답지도 못한 대응일 뿐일 터이다.   

여기서 한가지 밝혀둘 것은 어려운 책을 읽어낸 것과 어려운 글을 쓰는 것과는 다른 문제임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극단적으로 말해 서평은 책을 안 읽고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평 마감 시간 때문에 책을 다 못읽고도 얼추 때려잡아 소설 완성하는 경우 단 한번도 없었다고 말할 사람 누구인가) 그건 내가 주로 긴 서평을 쓰고 있고 (기록차원에서)책의 컨텐츠를 부러 꼼꼼하게 파헤치는 쪽이라 누구보다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 속된 말로 대충 넘겨보고서도 어느 정도 필력과 기존 독서량이 있는 사람은 언뜻 보기에 잘된 글의 서평을 쓸 수가 있다는 말씀이다. 즉, 서평을 잘 썼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그 책을 꼼꼼히 읽었고, 완벽하게 이해했고, 또 감동까지 받은 것과는 별개의 문제임을 서로들 인지하자.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혹시나 나같이 남들 의식하는 평가단이 서평의 의무와는 상관없이도 (복합적인 이유로)어려워 보이는 책을 추천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읽기도 좋고 쓰기도 좋고 평가하기도 무난한 책이면 모두가 해피하겠지만 여러번 작업도 반복해보니 이젠 책받으면 절로 견적이 나온다. 이 책은 읽기는 수월하나 쓰기는 만만치 않은 책. 이건 읽기는 쉬워도 평쓰기가 난감한 책. 읽는 건 고충이었으나 보람과 감동으로 서평을 써내고 싶은 책. 뭐 이건 대략 읽기도 쓰기도 감히 토달기도 어려운 책 등등.  

위의 같은 평가단 익명자는 당연히 화제가 되는 책이 궁금하고 그 책을 읽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라 말씀 하셨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우리 모두가 신정아, 고현정 에세이를 추천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이번엔 (수준낮은)내 기준에서 여러 기준으로 범위를 확대해보기로 했다.  이른바 객관성의 확보가 중요다하는 생각이다. 물론 이것도 내 성향이 반영된 결과이며 궁극적으로는 내가 읽고 싶은 범위에 국한 되겠지만 어떻든 운영측에까지 투정을 부린 입장이므로 내 스스로 기준을 좀 엄격히 하고 싶다는 바램이다. 이 모든 건 내가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해서 벌어진 상황임을 인식하고 앞으로 나부터 추천에 신중함, 객관성, 공신력, 다양성, 형평성 등을 고려해 페이퍼를 작성하겠다.(그러자니 죽을 맛이다)  혹시라도 내 페이퍼로 마음이 상하는 평가단 분들은 없기를 바란다. 나도 남의 글을 스쳐지나가는 입장에서는 콕 집어 나라고 하진 않았지만 괜한 자격지심에 흠칫거릴 경우가 있었다. 내가 예로 든 것은 당신과 나는 아닐 수 있으나 우리 모두일 수는 있는 일 아닐까. 나는 평가단이 무슨 벼슬인 마냥 꽤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에 이런 나를 웃기다고 해도 할 수 없다.

  

#2. 고민의 결과


1.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 이택광 / 자음과 모음 ................ (사회과학>문화이론)

이 책은 보기 드문 비평 에세이다. 무엇보다 표지에 끌렸다. 이 사진(손을 수리하는 손, 샤인 윌리스)은 <인지 자본주의>에도 실린 사진으로 인지가 인간의 몸뿐만 아니라 기계와도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사진이라 하였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아도 이 사진은 기억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이 책에는 2004년 부터 2010년 까지 한국사회에 벌어진 일들을 통해 우리 사회 문화구조를 다각도로 분석하는 심도높은 문화비평이 가득하다. 이 책을 통해 벤야민과 유영철과 신세경의 관계도를 한국적으로 그려볼 수 있으리란 기대를 갖게한다. 사실 문화란 말처럼 언제 어디서나 에두를 수 있고 쉽고 편하게 통속적인 장르적 언어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일분 일초가 멀다하고 대중문화를 실시간으로 소비하고 있는 문화시민들이고 언제 어디서나 아무런 근거없이 우리끼리의 잣대로 대중문화를 비판, 추종, 수용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책은 문화현상을 어떻게 제대로 비판하는 것인지를 친절히 가르쳐주는 실용성을 미덕으로 갖춘 듯하다. 저자는 한국사회의 문화비평이 곧 정치적 사유와 연결되었음을 주장한다. 대중문화야 말로 정치를 위해 발명된 하위구조이기 때문이다. 지금 시점에서 문화와 정치의 상관관계를 분석하여 여론에 가치판단을 요구하는 것은 꽤 지적이고 흥미로운 선택이 아닐까.  

http://wallflower.egloos.com/  이택광 교수의 블로그에 가면 어제 날짜로 임재범 퍼포먼스를 비판한 진중권에 대한 평가가 있다.

"역시나 진중권이라는 '잠수함의 토끼'는 뭔가 숨이 막힌다 싶으면 경고음을 울리면서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나가수와 그에 이어지는 '폭풍감동'을 보면서 뒷맛이 떨떠름했던 이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진중권씨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준 격이니 도리어 시원했을 수도 있겠다."(2011. 6.30)

나는 이 문장을 보고 더욱 그가 궁금해졌다.     

참고로 이 책은 자음과 모음에서 발간한 하이브리드 총서의 시리즈인 책이다. 그동안 지식인들에게 주목받았던 하이브리드 시리즈에 대한 소개를 첨부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3181910515&code=900308 

 

 2. 아렌트 읽기  / 엘리자베스-영 브루엘 / 산책자.................... (인문학>현대철학)

내가 아는 한나 아렌트는 정치 철학자, 하이데거의 연인 정도에 불과하다. 한가지 더 있다면 자신은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업무를 수행했을 뿐이라는 유대인 대학살의 주범 아이히만에게 ‘무사유성’(thoughtlessness)의 혐의를 강력하게 추궁한 것인데 이는 주로 우리 사회에서도 조직과 나라를 앞세우며 민간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공직자들을 논리적, 철학적으로 비판하는 근거로 많이 인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이 책이 출간되자 마자 로쟈님, 인문 MD를 비롯해 알려진 알라디너 분들이 강력하게 추천하던 것을 기억한다. 궁금하긴 했지만 내 수준에서 그들이 공통으로 추천하지 않았다면 감히 읽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다. 하여 일찌감치 7월에 추천을 하리라 마음을 먹었던 책이기도 하다.  

일반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장점은 이 책의 저자가 (제자로서) 아렌트의 사상을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아렌트의 핵심 저서를 대표화하고 있다는 것인데 바로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정신의 삶>을  통해 그 사유의 흐름을 밀도높게 조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번에 한명의 철학자의 책을 여러 권을 읽기 힘든 현실이므로 이 책은 실속면에서도 꽤 알찬 구성인 것이다. 아마도 아렌트가 제시하는 사유의 렌즈를 통해 작금의 (상식과 정의가 사라진)시대를 바라보는 통찰력을 기르는데 유용한 팁을 제공하리라 믿는다.  

아렌트가 말하는 전체주의는 ‘이데올로기와 테러에 기초한 신종 통치 형태’이며  20세기 중반의 전체주의 유산이 살아 있는 곳, 예를 들면 일본에서는 제국주의의 역사가 아직도 잘못 가르쳐지고 있다고 말한다. 

종교적 이념의 영역 바깥에서 예를 하나 찾자면, 일본의 역사 교과서들은 한국의 잔혹한 식민화를 초래했던 일본의 1890년대 제국주의 역사를 부인한다. 동일한 역사 교과서들은 일본이 2차 세계대전 중에 중국 동북부를 점령하여 1000만 명가량으로 추정되는 민간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사실을 누락하고 있다.   -84p

그러나 추천에 비해서 네티즌들의 리뷰는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언론기사나 온라인 서점들의 소개보다는 출판사의 보도자료가 가장 잘 정리되 있었다. http://flaneurs.tistory.com/73   



 3. 우리는 왜 빠져드는가? / 폴 블룸 / 살림.............................. (인문학>심리학)

일단 이 책은 심리학의 하위분야에 속한다. 저자도 심리학자이고 부제가 '인간 행동의 숨겨진 비밀을 추적하는 쾌락의 심리학'이다. 심리학이 제목은 흥미로와도 뚜껑을 열면 난해하기로 대표적인 분야이다. 이 책도 직접적인 질문에 비해서 제시하는 답들은 상당히 본질을 추구하는 케이스라 쉽지는 않다는 견해가 주를 이룬다.  철학, 신경과학, 아동발달, 행동경제학을 동원해 사람이 몰입하는 쾌락을 분석한다고 하니 다양한 잣대가 등장할 터이다. 언제나 잣대가 중요하다.

저자는 음식, 예술, 섹스, 물건, 영화, 이야기, 과학, 종교까지  인간이 추구하고 몰입하는 쾌락에 대해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이끌고 움직이는지 풍부한 실험을 제시하였다.

와인 연구는 자주 논란을 일으킨다. 한 종류의 와인에 상표를 다르게 붙이고 와인전문가를 비롯한 사람들의 맛 평가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아볼 수 있다. 어느 연구에서는 똑같은 보르도 와인이지만 한쪽에는 최고급 와인을 의미하는 ‘그랑 크뤼 등급’을 붙이고 다른 하나에는 일반 와인을 의미하는 ‘뱅 드 따블’을 붙였다. 와인 전문가들 가운데 40명이 최고 등급이 붙은 와인을 좋은 와인이라고 평가하고 12명만 낮은 등급이 붙은 와인을 좋은 와인으로 평가했다.   _82p

'본질주의'가 모든 원인의 답은 아니겠으나  사람의 심리를 대변하는  각종 '본질'에서부터 원인을 정리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추천한 언론은 꽤 많았는데 그중에 가장 성의있는 기사를 첨부한다. 
 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6/04/2011060400227.html?b_zinefr 

 
 
4. 확신의 함정 / 금태섭 / 한겨례.................................... (사회과학>법과 생활)

이 책을 인문 MD가 자세히 소개할 때부터 눈여겨 보았다. 
http://blog.aladin.co.kr/bookeditor/4880832 

무엇보다 맘에 들었던 건 제목때문인데 성격상 하나의 정답을 고집하고 그것이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들과 많이 부딪혀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살면서 더욱 실감하는 것이지만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만이 정답인 듯하다. 그런면에서 '누구나 틀릴 수 있다'는 저자의 지적은 좀 배웠다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유효한 충고가 아닐까. 논쟁을 하다보면 어떻게든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이차, 삼차 논리를 만들어 궤변을 늘어놓고는 상대를 몰아부치는 사람들이 있다. 법조인이라면 더더욱 누구보다 논리 만드는데 전공자들이므로 확신이라는 덫에 빠질 경우가 많을 듯하다. 이 책에는 저자가 검사시절 다루었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자신이 빠질 수 있었던 딜레마를 마치 소설처럼 전개하는 문학적 구성력이 느껴진다.  

조국교수와 소설가 공지영의 추천도 구태의연해 보이지 않았다.  

금태섭 변호사는 내가 참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는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늘 겸손하다. 그러면서도 재치와 예리함을 잃지 않는다. 이 책도 그를 닮았다. 여러 입장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이 편견 없이 펼쳐진다. 그 속에서 쉽게 내린 결론이 얼마나 위험한지, 인간의 얼굴이 지워진 법과 정의란 얼마나 공허한지 흥미롭게 전한다.    - 공지영

살인·강간·강도 등 중범죄는 사형집행, 형량상승, 거세 등으로 근절될 수 있는가, 체벌은 학생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가, 성매매는 금지되어야 하는가, 혼인의 충실은 형벌권을 사용하여 지켜져야 하는가, 문학과 예술의 표현에 형벌권을 통해 개입하고 통제하는 것은 정당한가, 테러범에게 절차적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가 등의 문제는 첨예한 사회적 논쟁사안이다. 검사 출신 변호사인 저자는 국내외의 사례와 문학작품을 소개하면서 이러한 난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시한다. ‘문학청년’의 기질과 소양을 가진 저자가 쓴 책이기에 술술 읽히고 흥미만점이다.   -조국

  

 5. 책의 미래 /  로버트 단턴 / 교보문고............................. (역사>문명/문화사)

마지막으로 요즘 전자책을 사용해 보면서 더욱 궁금해진 책이다. 사람들이 영화를 집에서 볼 수 있게 되고 극장이 아닌 곳에서도 볼 수 있다면 영화관에는 오는 사람이 줄어들 것이라 말했지만 세상은 영화관을 첨단의 멀티플렉스로 발전시키면서 시스템과 음향, 화질의 기회비용으로 화제를 돌려버렸다. 나같은 사람은 스마트 폰으로 조선일보 앱을 확인하는 것과는 별개로 꼭 야들야들한 신문 종이를 손가락으로 넘겨가며 아날로그적 하루를 시작하는 쪽에 속한다.  오랜 세월 형성해온 습관의 힘을 거스르기는 늦었다고 생각된다.

전자책을 두어개 다운 받아 보면서 느낀 것은 접속하지 않으면 어디에도 내 책은 없다는 물질적 소유감의 상실이었는데 책은 읽었다는 행위도 중요하지만 가졌다는 인식도 중요한 상품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활자가 아닌 화면상의 글은 이상하게도 나중에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일회성의 속성으로 다가왔다. 이것은 화면상으로 확인한 뉴스에서도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아무래도 세대간 매체 노출빈도에 의한 감성적 격차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의 저자는 하버드대 도서관장이다. 제시하는 견해는 기술의 변화를 통한 매체의 혁명이라기 보다는 주로 책의 보존과 영구출판, 라이브러리 환경에 대해 미래비전을 언급하고 있다. 아무래도 도서관장이니 그 많은 책들의 관리와 운영 및 처리가 중요한 화두였던 것이 아닐까.  관장님이 말하는 '책 없는 도서관'이란. 그리고 그를 통한 자아 발견이란.

‘전자책’은 인쇄된 코덱스와는 달리 피라미드 모양의 여러 단계로 배열되어 있다. 독자들은 텍스트를 다운로드 받을 수 있고 가장 높은 단계를 대충 훑을 수 있고 일반 논문처럼 읽을 수 있다. 그 텍스트가 마음에 들면, 인쇄해서 책으로 제본할 수 있고제본기는 컴퓨터와 프린터에 장착될 수 있다, 사용자 정의대로 단행본 형태로 간편하게 공부할 수 있다. 특별히 관심을 끄는 텍스트를 찾게 되면 아래 단계에 있는 추가적인 에세이나 색인을 클릭할 수 있다. 독자들은 책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문서, 참고서적, 역사기록, 도해, 배경음악 등 내 주제를 완전히 이해하도록 내가 제공하는 모든 것들 속으로 샅샅이 계속 파고들 수 있다. 결국 독자들은 그 연구주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것이다. 연구주제를 통해 자신만의 길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횡적으로, 종적으로 또는 대각선으로, 전자적 링크가 연결되어 있는 곳이면 어디나 클릭해서 읽을 것이다.  -114p

 

로쟈님은 이 책을 소개하면서 http://blog.aladin.co.kr/mramor/4891190 

'독서의 역사와 함께 책의 미래에 대해서 잠시 숙고해 보는 것도 독서가의 권리이자 의무일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쩐지 이 책을 읽고 나면 더욱 종이책을 구입하게 되지 않을까.

그건 꼭 손바닥안에서 보는 동영상도 있어야 하지만 가끔 표끊어서 극장에서 보아야 할 영화가 있듯이
사람은 그때그때 다양한 욕망을 기 등장한 매체로부터 취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든 전자책의 등장으로 전체 도서 매출은 늘어났다고 하니 이는 출판계에 희소식임이 틀림없다.
미래는 그렇게 한 분야가 쇠락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공존하며 서로를 보완한 상태로 발전하는 패턴을 반복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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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02 0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2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1-07-02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즈음 소설이나 에세이쪽을 택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어요.
님 말씀처럼 두 권의 책중 하나는 그래도 대중적이고 읽힐만한 책이고,
하나는 디따 어려운 책이거나 별로 흥미롭지 않은 책이거든요.
이즈음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들고.
실제로 포기한 사람도 있는 것 같아요. 예술쪽 배송이 18명이고 보면.
쓸데없이 욕심을 냈다는 생각이 확듭니다.

지난번, 책 선정에 있어 주최측이 수위를 결정함에 있어서 거의 권한이 없는 것처럼
말해서 좀 실망했어요. 물론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그저 모든 것을 추천에 의존한다?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물론 모든 사람의 취향을 고려할 수 없다. 이것도 좀 그렇고.
그냥 대체로 모든 사람이 무난히 읽을 수 있는 책을 수위로 잡는다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걸까요?
보편적이 된다는 게 평가단에선 좀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하긴 이말처럼 애매한 말이 어딨겠습니까?
책을 많이 만지다 보면 감각이란 게 생기는 법인데 이것도 개인의 취향이라고 말해버리면
주최측으로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은 아닐텐데. 한마디로 저의 느낌은 알라딘이 이 부분에 관해서는
손을 놔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초기 때 비하면 많이 체계를 잡은 건 사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행정적인 거지 책을 보는 안목, 추천의
안목 이런 쪽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사람님 추천의 수준은 결코 퀼리티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얼마나 일목요연 하게 잘 쓰시는데요?
그런데 비하면 전 정말 대충하는 거죠.>.<;;

한사람 2011-07-02 20:21   좋아요 0 | URL

저는 그냥 보편적? 이라고 생각되는 중간수준? 의 책을 추천하는 편이어요
것도 완전 제 수준에서지만..
인문분야는 에세이와 예술분야의 책과 살짝 겹칠때가 있어요
예를들면 어려운 에세이, 그리고 예술의 인문학적 해석.

그래서 전 애매한 것 같아서 사회과학쪽으로 눈을 돌려보지만
거의 선정되고 있지 않지요 ㅠ.ㅠ
대부분 철학이나 정치쪽을 많이 추천해주시고 또 그 책들이 많이 노출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분명, 읽고 싶기도 하고 소장용으로도 근사하고, 내용도 풍부하지만
그런 책들은 서평쓰기가 쉽지가 않아요. 어짜피 처음부터 훌륭한 책들이었기에
뭐라고 할말도 별로 없어요. 서평은 그다지 중요한게 아니구나 그런 생각도 들구요

저는 좀 평가단 작업에 엄숙주의를 버리려구요..
무엇이든 너무 열심히 하는게 꼭 답은 아니라는 생각이, 오늘 들더군요 ㅠ.ㅠ

교고쿠 2011-07-02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은 8기때도 평가단 인문사회팀 안에서 약간의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특정분야 편중(사회과학 책이 주로 선정되고 자연과학은 찬밥이 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는데...(개인적으로 저는 사회과학을 훨씬! 선호합니다)

항상 가장 논란이 많은 쪽이 인문사회인거 같아서, 7,8기 인문사회팀에서 활동했던 저로서는 그런것에 염증을 느끼고 9기때는 소설이나 실용/취미 분야를 지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다시 인문사회팀에 도전해 9기로 활동하게 되었지만...(그만큼 사회과학에 대한 애정이 큽니다 ^^)

그런데 타인의 취향 or 선호에 대해 수준 낮다고 매도하는 것이 참 어이가 없는 사람이네요. 물론 어떤 책에 대한 호불호는 있을 수 있고, 선정된 책이 마음에 안 들수도 있지만 타인을 저렇게 깔아뭉개는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되는...즐겁게 책읽고 글쓰고 싶어서 신간평가단 활동을 하는 건데, 저런 사람들 보면 스트레스만 쌓여요. 흑. (그러고보니 인지자본주의, 제가 추천한거라 왠지 죄송한 마음이...)

한사람 2011-07-02 20:2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교고쿠도님
<인지 자본주의>가 쉬웠다는 분(추천하셨더라도 ㅋ)은 드물것 같아요.
제가 그 책때문에 걱정이 많아서 투정을 하는 바람에 괜히 그 책을 추천하신 분들이 맘 상하지
않으셨을까 모르겠어요. 어려운 책 읽어보겠다는 게 무슨 잘못이겠어요
그 분들에게 서운했다기 보다는
저 댓글을 쓰신분이 제 수준을 운운하는 바람에 자격지심에 괜히 저도 모르게
지난 달 미션이었던 <인지 자본주의>와 생각이 연결지어 진 것이지요 ㅠ.ㅠ

오래동안 인문분야를 하셨으니 제가 외려 조언을 받고 너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해야겠는걸요
좋은 말씀 많이 새길께요..

앞으로는 책에 대한 마음을 좀 열어 보려구요^^
(마음을 비우는게 상책인 듯해요)

암튼, 댓글로 힘 주셔서 고마워요
(이런 글에 글 달기가 쉽지 않잖아요 ㅋ)

교고쿠 2011-07-02 20:49   좋아요 0 | URL
사실은 인지자본주의, 제가 추천해놓고도 아직 리뷰를 못 썼습니다. 뭐랄까 항상 모든 글은 첫 문장이 잘 쓰여지면 그 뒤로는 편한 마음으로 쓸 수 있는데, 아직 첫 문장도 못 떼고 있어요. 그 외에 리뷰해야 할 다른 책들도 꽤 쌓여 있고...

때로는 제가 책을 읽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해서 신간평가단이나 여타의 서평 활동들을 하고 있지만 저런 논란들로 인해 때로는 마음이 상할 때도 있고 염증이 느껴져서 다 때려치우고 싶다고 생각할 때도 있고...제가 좀 예민한 성격이라 그런듯 합니다. ㅜ.ㅜ

사실 글 수준으로 보면 다른 신간평가단 분들보다 제가 좀 떨어지는데, 아직까지 글 수준낮다고 욕얻어먹은 적이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한사람 2011-07-02 22:22   좋아요 0 | URL

저는 그 책에 적응하는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다 읽고는 그냥 내가 아는 부분만 쓰자고 결심했고 책에 어떤 패배감을 처음 느껴봤어요 ㅠ.ㅠ
하지만 그렇게 쓰고나니까 뭔가 지식이? 쌓인 것 같은 ㅋ 느낌은 들었어요 참~
인문분야가 그런가봅니다..

그리고 저는 글 수준 높은 사람들이 꼭 많은 지식, 높은 인격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아요
글과 사람이 같지 않다는 것도 알구요
글은 그 사람의 생각을 가공한 것이지, 절대 그 사람 자체의 수준이 아니어요..
특히나 문장력의 구성이나, 텍스트에 현학적인 표식만으로 글쓴이의 수준을 가늠하는건
바보같은 짓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절대 글보고 그를 판단하지 않아요
(물론, 이런 저도 여기선 오로지 글을 보고서만 무언가를 판단하지만요 ㅠ.ㅠ)

만약 혹시나 상대가 쓴 글을 보고 그의 수준을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딱 그 수준인 사람인 것입니다.

cyrus 2011-07-02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교고쿠도님과 함께 활동하면서 평가단 활동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었어요,,
이제는 솔직하게 터놓을 수 있어서 만할 수 있었지만,, 나름 선정도서에 대해서 불만이 있었어요.
논란의 중심에 끼어들려고(?) 해봤지만,,^^;; 그 때는 알라딘 블로그 활동한지 얼마 안 되었고,,
평가단 활동도 처음 해 본,, 짬도 안 된 독자라서,,ㅎㅎ;; 긍정적인 마음으로(?)
읽고 빠짐없이 리뷰를 작성했어요. 읽으면서 솔직히 어렵다는 것은 솔직하게 얘기했구요,,
물론 부족한 내공으로 인해 빈약한 소개에 대해서 사과의 내용도 적었구요,,

저도 교고쿠도님 말씀처럼 타인의 취향과 선호를 가지고 그 사람의 독서 수준과 연관되어 평가하는 것은,,
아닌거 같아요.

한사람 2011-07-02 22:26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이 지난번에 인분분야셨죠^^
가끔 리뷰보고 부럽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요
우리 그때 서로의 추천책을 보고 책을 택하고 그랬던거 같은데요 ㅋㅋ

불만이라는 게 없는 사람은 없을 거 같고 문제는 드러내느냐의 여부와
드러내는 방식인것 같아요
저는 좀 솔직해보자고 마음을 열였던 것이 외려 부작용을 가져왔던거 같습니다..
저도 시루스님처럼 이번이 처음이었다면 그냥 구경만하고 있었을 거 같고
딴에는 몇번 했다고 목소리를 내고 싶었던 거 같아요..

아마도 저 글을 쓴 분은 본질적인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그냥 저의 마음을 상하게 하려는 목적이 컸던거 같습니다
원하는 바는 이루었으니 글이 효과를 본것이죠
그런데..저도 소싯적에 독설을 많이 해봐서 알지만..그게 다...
부메랑이 되어 저에게 돌아오더군요..언젠가는요..

네오 2011-07-02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칼을 가셨군요^^ 책선정이 후덜덜하네요~ 한사람님의 인문학을 보는 시선응축에 대한 감각에 진화하는 속도가 매우 빠르시네요 ㅋㅋ

한사람 2011-07-02 22:29   좋아요 0 | URL

좋아라~
네오님의 칭찬을 받으니 어깨가 으쓱하네요..
인문분야 책 좀 읽었다고 진화라는 소리를 들으니 그간의 맘고생이 확 다 날아가는걸요 ㅋㅋ

안그래도 약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수준낮다는 말 들어서
더 속상했나봅니다..
결과적으로 저 분이 저를 성장 시키셨네요 ㅋ

네오 2011-07-02 23:08   좋아요 0 | URL
지금 인문신간 페이퍼 작성중인데 한사람님 책들중에 고르고 싶은게 많네요~ 아~ 그리고 저 위에 "시선응축에 대한 감각에 진화하는 속도" 이렇게 써놓고도 이것이 문법적으로 맞는 말일까라고 한참 고민했어요 ㅋㅋ 그래서 다시 수정할려고 했는데 이미 한사람님이 저 창피한 글을 보셨으니 그냥 놔둘래요~ 얼마나 제가 부족한지를 보려고요^^

그런데 너무 마음 상하지 마세요~ 이러한 경우에는 전 그냥 쿨하게 넘어가는 편이긴한데 뭐 그때마다 다르겠죠~ 컨디션이 않좋으면 험담한 블로거하고 붙고싶고 좋으면 웃어넘기면서 주위사람에게 하소연하고 ㅋㅋ

늦었지만 문학동네 리뷰대회 수상 축하드려요~

한사람 2011-07-02 23:01   좋아요 0 | URL

잠시 다녀왔는데 다행히 저와 같은 책이 한권 있더군요 ㅋㅋ

문법에 전혀 저촉? 되지 않아욧~

저는 사실 중간의 인간관계보다는 호불호가 분명한 편에 속해요..
온라인에서도 제 문법, 제 댓글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분이 있는지
저런 테러를 가끔 당하곤 합니다..
나름 정중하게 예를 갖춘다고 생각하는데도 저런일은 운명처럼 저를 따라다녀요..ㅠ.ㅠ
그냥 넘기고 허허 웃고 그러자 하다가도 곰곰히 생각해보면 왜 그랬을까가 대충 그려지거든요..
거의 누군지 어떤 위치에 있는 분인지도 알거 같구요
(사실 그래서 한번 더 상처를 받아요)

온라인 결벽증같은게 있어서 아무와도 아무런 문제가 없이 살고 싶어요
그런데 그게 잘 안되니까.. 제가 맘 바꿔야죠

리뷰대회는 네오님도 수상하셨잖아요 ㅋ
저는 언젠가부터 아는 분이 상탔다 해도 인사도 안하고 또 축하안해 주셔도 안서운하게 되었어요
이번에 네오님 리뷰를 보았는데 저와는 완전 다르게 해석하시는 걸 보고 어떤 기준을 어떤 과정을 통해
배우셨을까 궁금했어요, 그런 글은 쓰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써지는 글이 아니죠(그저 감탄할뿐)


네오 2011-07-02 23:25   좋아요 0 | URL
지금 계속해서 페이퍼 업데이트중요ㅋㅋ 이택광 교수님 책 추가요~ (금태섭의 책 훌륭하죠? 그런데 이미 리스트에 작성해서 일부러 제외시켰어요 ㅋ)

음~ 그런 상황에 대해서 한사람님의 마음 충분히 동감합니다~ 저는 논리적으로 엉망인 사람이라 누군가가 저의 논점이 잘못됐네요 그러면 저는 아무말 못하는데요 ㅎㅎ 그리고 댓글을 길게 쓰고 싶어도 저는 무진장 오타가 속출하는데 알라딘의 댓글기능은 계속해서 스크롤을 왔다갔다해서리 불편하더라구요 그래서 짧게짧게 쓰는거라 부디 양해를 바랄께요 꾸벅꾸벅~

아~ 리뷰리뷰 진짜진짜 한사람님한테 상담받고 싶어요ㅠㅠ 그냥그냥 요새에 글이 너무 안써져어요!! 한사람님하고 해석방법이 다르긴 하더라고요 ㅋㅋ 혹시 소설평론가들 글 보세요? 저는 처음봤을땐 완전 짜증이었지만^^(완전 일반대중하고에 거리차때문에요) 자꾸자꾸보면 문학평론은 이렇게 해야하는구나라고 생각이 어떤때는 들더라구요~

한사람 2011-07-03 00:38   좋아요 0 | URL

리뷰도 자기 패턴이 생겨서 그걸 벗어나기가 힘든거 같아요
저는 최대한 제가 느낀 것들을 쪼개어서 그걸 세심하게 표현하는데 중점을 둬요
설사 제 느낌이 틀리거나 남들과 똑같거나 말도 안되고 너무나 개인적인 것일지라도 그걸 잡아내려고 노력해요
그래서 힘든건 매 리뷰마다 결론을 내고 있다는 거여요
언제나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적고 끝내려고요
물론 결론의 방향은 비슷한 쪽으로 흘러가게 되지만
저만이 내리는 결론이니 그걸로 만족해요
결론이 없으면 저는 리뷰를 쓰지 않거든요

그리고 저는 평론가의 글보다는 사설이나 소설가의 산문 같은 것이 더 좋아요
네오님의 글이 저는 문학평론가의 뉘앙스가 느껴졌었는데
거기다가 독특한 작법이 있으시잖아요

저는 완전 그런 기본같은 건 없고 그냥 보편타당한 대중의 감성에 지극히 호소하는 위주라서
절대 제가 무언가를 느끼지 않으면 글을 쓸수가 없어요..
저는 전에 네오님, 왕을 찾아서 리뷰 좋았습니다^^

루쉰P 2011-07-03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한사람님의 리뷰에 반가운 손님들이 많이 늘었네요. ㅋ 그러나 저러나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많군요. 타인에 대한 수준을 지적 하는 사람들은 무슨 신인지 아니면 '신의 리뷰'를 쓸 수 있어서 그런 건지, 그냥 주는 책이나 쓰라는 무슨 리뷰 하청 업체라고 생각지 이해를 못 하겠네요. 평가단이 무엇을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자유가 주어지지 않고 그냥 맞춰서 쓰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해요. 전 그런 거 싫어하거든요. ^^ 어디다 껴 맞추고 하는 것은 취미가 아닙니다.
그래도 한사람님은 리뷰에도 쓰셨고 댓글에도 쓰셨지만 책을 현미경으로 낱낱이 파헤쳐 조근 조근 씹어서 다 소화를 시키시고 쓰는 스타일이신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타일 ㅋ) 맞지도 않는 책을 쓰시는 것은 꽤 힘드실 것 같아요. -.-
문학동네 리뷰 상 받으신 것 축하드리요. 여기는 비 엄청 오네요. ㅋ 저 비에 모든 상처 다 씻어내시기를 ^^
전 요줌 서재를 안 들어와서 밑에 있는 한사람님 리뷰도 다 읽어 볼려구요. ㅋ

한사람 2011-07-03 10:48   좋아요 0 | URL

여기도 비가와요. 오늘은 비때문에 마음이 잠잠해 질듯해요^^

아주 오래전에 블로그 초창기 시절에 저만 아는 어떤 이웃분이 우연히 유명해지셔서
많은 이웃이 생기자 이상하게도 저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어요
저같이 그분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 게 당연한 거였는데
저는 꼭 여학교때 단짝 친구가 다른 친구를 사귀기라도 하는 것처럼
싫더라구요 ㅠ.ㅠ 유치하죠?

그런데 그분은 자신이 유명해지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부담스러웠는지 얼마안가서 블로그를 접고 잠수를 타셨어요..
그분의 글을 볼수 없다는 슬픔이 생각보다 크더라구요
그런데 그 서운함을 잊어먹을 만한 시기에 우연히 제 블로그에 방문하시곤
그때 인사도 없이 문을 닫아서 마음에 걸렸다고 해주시더군요, 울컥 눈물이 핑돌았어요


저는 많은 분들과 많은 양의 교류를 일상에서 주고받는 것에 많은 경계를 하는 쪽에 속해요
오는 사람 안막고 가는 사람 안잡고 라고 할까..
제게 용기 주시고 관심가져주시는 이웃분들이 참 고맙고 가서 손이라도 잡고 싶지만
일부러 거리를 두고 적정선의 친분만을 유지하려고 꽤 애쓰는 편이어요 ㅋ
(그래서 오해도 많이 받지만요..)
그것이 더 진득하고 오래가는 관계임을, 살면서 깨닫는 중이어요

아마도 제 서재에 글을 남겨주시는 분들은 저를 오래동안 지켜보시던 분들이 대부분일거라고 생각해요
책을 많이 읽고 생각이 많은 분들이라 저의 이런 성향을 짐작하시고 섣불리
아는 척하기가 쉽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걸 알기 때문에 꼭 루쉰님처럼 아는 척을 해주시고 발자국 남겨주시는 분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가끔 루쉰님이 보는 그대로 마음 그대로의 글을 남겨주실때 저는

너무 좋아하지 말자, 너무 좋아하지 말자 ~~~~

그런답니다^^
그건 참 피할수 없는 행복인 것 같아요~

2011-07-05 0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5 0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5 1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사르 2011-07-05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악! 다 어려워보여요!

음..근데 한사람님의 꼼꼼하신 추천서를 읽으니 왠지 한 권 정도는 도전해보고 싶기도 합니닷!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는 좀 많이 끌립니다요. 이런 류의 페이퍼, 괜찮은데요. 앞으로 종종 이런 페이퍼, 올려주시와요~ 뒤끝작렬..ㅋㅋ 귀엽사옵니다. ^^

한사람 2011-07-05 19:43   좋아요 0 | URL

달사르님, 저는 어려워 보이는 레벨에 속하는 책은 그래도 제하고 추천한 거랍니다ㅋ
문화비평이다도 제목이 끌려서 그렇지 들여다보면 어려울거 같기도 하구요 ㅠ.ㅠ

소설은 어느 정도 책 받아 보기전에 수준? 을 예상할수 있는데
인문쪽은 제목과 저자만 보고는 알수가 없어요
심지어는 추천과도 많이 다르고
정말 뚜껑 열고 부딪혀 봐야 하더라구요

근데 이런 페이퍼는 어떤 것이옵니까?? ㅋㅋ

뒤끝 페이퍼를 말씀 하시는 겁니까??? ㅋ

달사르 2011-07-06 15:27   좋아요 0 | URL
히..둘 다?
짤막하게, 한 분야에 해당하는 여러 종류의 책에 관한 소개글, 괜찮아요.
그러니까..이게, 그 무슨 평가단의 추천책을 뽑아놓은거로군요. 근데, 평가단이 아닌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는거 같애요. ^^

한사람 2011-07-06 16:22   좋아요 0 | URL

예..이런 추천의 페이퍼는 더 신중을 기해서 작성해야 함을 절실히 느껴요..
더 완벽하게 하려면 실제 서점에 가서 책도 들추어 보고 한 다음이라야 하겠지만
여전히 책은 다 읽어보지 않고서는 알수가 없죠..

사람과 같은 거 같아요
겉으론 멀쩡해도 겪어보면 전혀 다른 사람인 경우가 많듯이요^^

윈터 2011-07-07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는 9기 인문/사회/과학 신간평가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오해'라고 합니다. 저는 평소에 출판, 유통에 관심은 많았지만, 실제로 그 과정에서 어떤 책을 추천하거나 리뷰를 쓰는 등의 활동을 직접 해보는 게 처음이다 보니 모든 게 좀 새롭네요. 실제로 어떤 책을 읽고, 그로부터 얻은 교훈도 중요하지만, 추천하기에 좋은 책, 리뷰를 쓰기에 적당한 책... 등등을 선정하면서 고민하는 것 자체가 큰 공부가 되네요. 며칠 전부터 한사람님의 고민(?)을 읽다 보니 인사드리고 싶어져서 글 남겨봅니다. ^^

한사람 2011-07-07 21:5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오해님, 닉이 흥미로와요 ㅋ
같은 분야군요, 반갑구요

고민자체가 공부가 된다는 말씀이 무척 소중하게 들리네요
가끔 원치 않았던 책으로 고생은 하지만
읽고 써내고 나면 얻는 건 있더라구요
특히 이 분야가 공부하는데는 좋은 것 같습니다

같은 고민 계속 같이 나누어요^^
 
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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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제의 비현실


  소설은 짧았고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한 번의 호흡으로 넘어가던 손놀림이 멈추었을 때 나는 잠시 엎드린 채 고개를 파묻고 더 이상 일상을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우선 나 자신을 달래고 난 뒤라야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이런 소설이 나와야 하는지 누군가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왜 이런 여자가 소설 속에서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지 길을 막고 물어보고 싶었다. 당신도 이렇게 살 수 있는지. 아니 당신이라면 이렇게 까지 하면서 살아갈 것인지. 작가도 여자이고 주인공도 여자, 나도 여자이니 꼭 여자들에게 물어야 했다.

  그러나 바보처럼 작가에게 묻고 싶진 않았다. 아니 바보처럼 보일까 봐가 정확하겠다. 서로 묻다가 답이 없으면 그냥 투덜대는 우리끼리 떠들고 소리치고 세상은 그런 거지, 인생은 그런 거야 그렇게 알은 체를 하곤 술잔이라도 부딪치고 싶었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한 병이 되고 그 병이 몇 개로 보이면 어느 쪽은 고꾸라질 것이고 그럼 다른 쪽은 그를 부축해 별 수 없다는 듯 내일의 열차에 그를 실어 보내면 될 것이었다. 한번쯤 고꾸라진 그를 위해 끊어준 티켓일랑 다음번의 누가 될지 모를 아량으로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 갈 일이었다. 세상은 우리끼리 아무리 슬퍼해도 그런 건 상관없이 돌아가는 꿋꿋한 경향이 있지 않은가. 그런 무심한 세상과 잘 어우러지기 위해선 같이 무정해지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지 몰랐다. 소설은 소설이고 나는 현실이고 당신은 세상이니까. 그래서 폭음과 폭정을 부르는 소설. 울화통이 터진 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말이겠지. 오랜만에 가슴속 쌓인 울혈들이 한데 모여 심장을 쾅쾅 두드리는 소설을 만났다. 시원하게 욕하고 소리쳐 울고 나면 그래도 용케 살아는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소설.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 아침 그래도 다시 시작한다는 질긴 마음 그 뿐이라는 걸 깨우쳐 주는 소설. 그래서 헛헛하고 쉽사리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

  솔직히 말해 이 책의 문장들을 하나도 기억하기 싫었다. 그건 예를 들면 침대 매트리스에 들러붙어 있는 몇 백만 마리의 진드기를 현미경으로 확인하는 절차만 같아 그냥 포기하고 이불을 덮는 심정이랄까. 이 소설의 주인공 이름은 두어 번 ‘윤영’이라는 입에 붙지 않는 호칭으로 낯설게 등장한다. 화자가 ‘나’이기 때문에 내가 내 이름 부를 일은 살면서 많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시종일관 익명의 여자인 것처럼 등장하다가 그녀의 어머니쯤 되는 사람이 ‘윤영’이라 불렀을 때 나는 그녀의 단어가 순간 ‘운명’으로 보였다. ‘윤영’은 과연 ‘운명’인가, 싶어서.

  엄마 살아계실 때 사주를 보면 나는 꼭 징기츠칸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난관을 극복하면 또 시련이 기다리고 어떻게든 그것을 뚫고 나면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는 이른바 시련극복의 인생. 그렇게 극복하다보면 정말 자신도 타인도 세상을 극복하고 무언가 이룰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이니 극복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속세의 내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들은 후 부터는 이상하게도 내 앞에 닥친 걱정거리가 대수롭지 않게 보이기는 했다. 극복해봐야 또 다음 과제가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서두를 것도 없고 안 된다고 발구를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회사생활 할 때도 나는 조직의 문제를 부러 해결하지 않고 일단 갖고 있는 쪽에 속했고 꼭 제거해야 할 상황이라면 넌지시 다음 문제가 대두될 시점에 임박해 현존하는 문제를 타결하곤 공백없이 다음 문제를 그 자리에 위치시키곤 했다. 늘 스스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외려 살면서 나를 가장 안전하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외적으로 큰 문제가 없어보이는(?) 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할까. 이런 내 성향은 (중이 제 머리는 못 깎지만)남들의 인생사 골치아픈 문제 거리에 곧잘 해결사 역할을 자주 수행하곤 했다. 거기엔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보지 않는 것이 핵심인데 나는 얄궂은 ‘운명’에 의해 훈련된 이차 운명을 잘 실행해 보려는 의도가 다분했다고 여겨진다.

  이런 운명개척자(?) 인 내가 보아도 이 소설은 홧병을 부르기 충분했다. 최적의 숙면을 위해선 잠들기 한 시간 전에는 책을 들지도 생각을 하지도 말라는 어느 의사의 권고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음이다. 잠들기 직전까지 나를 괴롭히던 문장은 바로 작가가 다음의 마지막 문장 때문에 이 소설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기록했기 때문인데 나는 작가의 시작에 흔쾌히 동의하기 힘들었다.


   
 


나는 누구보다 참는 건 잘했다.  누구보다도 질길 수 있었다.  다시 시작이었다. - 193p

 
   


  여기서 ‘시작’이란 말이 내가 아는 희망으로 보이지 않고 분명 반복이나 착취, 소모, 탕진, 타락, 악습, 퇴행 등의 전혀 반대의 의미로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잘 참는 사람이고 질긴 사람이니까 이를 악물고 다시 시작한다는 자기 암시가 꼭 자신을 버리는 말로 들렸기 때문에. 현실을 박차고 나올 수 없기에 다시 그 현실 속에서 희뿌연 아침을 맞이하는 자의 시작은 어제 고통의 연장이지 어디 새로운 시작이란 말인가. 무언가를 끝내고서야, 끝이 있어야 시작도 의미있는 것이지 끝도 없이 시간에 끌려 현실을 좇는 것이 어찌 시작이란 말인가. 그 여자, 윤영이 자신을 시작하지 말고 그냥 무언가를 확실히 끝내기를 바라면서 나는 잠이 들었다. 
 

#2. 오늘의 현실


  주말을 앞두고 나는 우울한 마음이 들었다. 냉정하게 현실을 생각해보면 글로 그려진 소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젯밤 꿈에 하필 살면서 되도록이면 마주하기 싫은 사람이 등장했다. 소설의 영향탓인지 꿈자리도 퍽이나 뒤숭숭했는데 그녀는 사채를 쓰는 바람에 패가망신 당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결혼을 두 번했고 첫 번째 남편이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였기에 사회보호시설인 여성의 집 같은 곳에 피신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맞아 고막이 터지고 이빨이 몇 개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사랑은 찾아와 총각인 남자와 재혼을 했고 그들 사이 어여쁜 딸 하나를 둘 수 있었다. 그녀에게 다시 찾아온 행복을 시샘하는 것들은 많았다. 전 남편의 아들은 오토바이 사고로 반신불수가 되었고 교도소에 가 있는 전 남편은 아들을 돌볼 수 없었다. 그녀는 급한 김에 사채를 쓰면서 병원비를 대기 시작했고 새로 재가한 시집과 남편의 돈을 빼돌리기 시작했다. 그 후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 때문에 그녀는 결국 쫓겨나 숙소가 달린 식당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녀는 결국 자기 뱃속으로 낳은 두 명의 자식 모두를 버릴 수 밖에 없었고 식당에서 만난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고 들었으나 그 후로 소식이 끊겼다.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는 무척 의연했는데 그녀 역시 ‘다시 시작해’야죠 하며 서로 어색하고도 구태의연한 인사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구구절절히 그녀의 불행을 서술한다면 소설속의 윤영못지 않은 캐릭터로 탄생될 만한 인물이었다. 현실은 소설보다 가까이 있었고 그것은 더 잔인한 얼굴, 더 끔찍한 상처로 전시된 상태였다.

  내가 이 소설을 덮으면서 깨달은 건 바로 글은 언제나 현실보다 못하거나 겨우 현실만하다는 것이다. 에이, 소설이니까 그럴 수 있지가 아니라 과연 이 소설이 소설일 뿐일까를 생각하자. 혹시 현실은 이 보다 더 하지 않을까를 상기하자. 누구든 글로 이어붙이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사는 이곳엔 더 얼마든지 참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 그것을 글로 적고나면 더 무섭고 고통스러워 보이는 것. 그것이 우리가 숨쉬는 현실이라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눈으로 확인하는 다큐 영상이나 그 상상을 가공하는 영화, 스틸 컷, 포스터, 실사사진들은 외려 덜 잔인할 수 있다. 똑바로 낱낱이 확인할 수 있으니까. 시각은 바로 확인이라는 절차 후에 반드시 있는 그대로의 인지적 수용을 거치게 되어있다. 그것이 충격이거나 고통이더라도 잔상은 기억속에서 사실화될 수 있다. 그러나 실체를 보지 못하는 글의 연속은 얼마나 광대하고 비현실적인가. 거기엔 물흐르듯 작가의 생각이 들어있고 문장의 의도가 촘촘히 박혀있다. 때문에 행간의 여백에서 느끼는 우리의 고통은 실제보다 배가되어 하나의 두려움으로 각인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글쓰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사실 소설은 거짓말로 된 사기극이지만 사회에서 합법화된 문서로 기능한다. 소설가는 주어진 법을 잘 이용해 최상의 거짓말을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린 거짓말을 알고서도 잘 울고 웃어주는 적법화된 위선자들이다. 이 사회에서 적극 용인된 합법과 적법의 동종 커넥션이 정작 그것의 대상이 되는 사회에 경종을 울리려면 이런 소설은 더 나와야 하고 우린 그걸 더 읽어야 하는 것이다. 불편함의 승리야 말로 이 시대 작가가 바라는 최상의 소원이 아닐까.

  이 소설은 막연한 공통의 미래를 기대하기 보다는 지금 우리 주변의 현실을 좀 더 섬세하게 자각하자는 뜻으로 들린다. 이 소설의 희생자가 여성인 것은 같은 여성으로 목이 메이는 설정이지만 분명 이 사회에 윤영같은 운명을 가진 여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이 소설에서 윤영에게 고통을 선사하는 인간은 남녀를 따 질수 없다. 누구보다 인물분석을 해온 나이지만 여기 등장하는 윤영의 가족은 뚜렷한 표상을 가진 소설 속 캐릭터가 아닌 어쩌면 늘 우리 곁에 머무는 엄마, 동생, 남편, 이웃의 속된 얼굴들을 하고 있다. 이 소설이 불편한 이유는 그야말로 그런 우리의 현실을 사진찍듯 그대로 적었기 때문인 것이다. 현실은 원래 적어놓고 나면 누구도 심각하지 않은 현실이 없다.

  다시, 이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를 생각한다. 나는 작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여성도 있으니 우린 희망을 가지고 삽시다,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남편은 평생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이시고, 아버진 그 와중에 암투병으로 세상을 하직하셨고, 엄마는 폭력적인 남자에게만 얻어 맞는 팔자이시고, 여동생은 제 잘난 맛에 가족 무시하다가 봉변을 당한 꼴이고, 남동생은 자기 재산을 빼돌려 담보로 잡히게 하고, 설상가상으로 아이는 평생 앉은뱅이로 살아갈듯 하다면, 이 모든 짐을 벗을 수 없는 나는 아이 때문이라도 몸을 팔아야 하는, 그런 뭣 같은 세상이라도 지금껏 잘 참아왔기에 여전히 참으면서 매일 아침을 똑같이 시작하겠다는 긍정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참고 살라는 뜻으로 곡해할 수 있으며 무조건 견디라는 오해로 보일수 있기 때문이다.

  이쯤해서 이 소설의 제목인 <환영>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고 싶다. 시와 도의 경계를 지나쳐 만나는 ‘안녕히 가십시오’ 혹은 ‘어서 오세요’라는 인사말의 의미를 곱씹어 본다.

  그깟 이정표 하나로 선을 그어 놓고 여기 부터가 현실이라고 하는 그 당돌함과 무례함을 똑바로 쳐다본다. 오는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반갑게 맞이하는 것은 어디의 누구란 말인가. 누가 누구의 현실을 맞이하고 또 보낼 수 있단 말인가. 환영歡迎의 인사는 어쩌면 우리가 현실이라 오해하는 표지판의 환영幻影이 아닐까. 현실은 우리를 반기지도 그렇다고 떠밀지도 않는 냉정한 무감각의 세계는 아닐까. 이 땅의 모든 것들이 흔적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유령이며 모든 전통은 유령의 역사라고 말했던 데리다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미 현실은 가장 비현실적인 무책임의 가능성을 가장 성실히 완벽하게 수행하는 세상이 아닌가 말이다. 현실은 안녕의 인사를 지속하는 친철한 세계가 아니다. 현실적인 표식 역시 우리 스스로 만들어 놓은 위선 일뿐이며 그것을 인사로 여기는 이유는 우리가 희망적일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김이설의 <환영>은 우리가 인지하는 <환영: welcome>의 인사라는 현실을 그것으로 견뎌내려는 인간들의 <환영: illusion>이라는 것을 담담히 방증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바뀌지 않은 현실의 탈출구는 발견할 수 없어 보였기에. 중요한건 환영歡迎이 환영幻影이냐 아니냐가 아니고 환영歡迎을 환영幻影으로 환영歡迎하면서 자신의 현실을 묵묵히 걸어 나가는 우리 사회 무수히 많은 윤영(倫影)의 오늘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여자 이름은 왜 윤영, 민영, 아영인 것인가? 비칠 映인가 그림자인 影인가) 누구나 각자 처한 현실은 기막히고 슬프지만 오늘도 변함없이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일 끝날지 아니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르지만 당신과 나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공평한 입장이 우리의 준엄한 현실이니 그것을 깨달은 우리는 현실이 그리 두렵지는 않겠다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 얼마나 환영받을 만한 현실적 소설인가.

  김이설의 현실로 당신을 무조건 환영歡迎하는 바이다.
  나는 당신과 나, 우리 모두가 이 소설의 비현실에서 각자의 현실을 긍정하는 참으로 벅찬 환영幻影을 떠올린다.

  소설이라는 현실을 극복하는 것. 썩 괜찮은 현실처방이 아닌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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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1-07-02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널 나와 같은 우울에 빠뜨리는게 좀 미안했지만
너라면 환영의 두가지 한자의미를 해석해 줄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역시~!!

그러고 보니 우리딸도 영이네~ 榮쓴다^^


한사람 2011-07-01 16:36   좋아요 0 | URL

소설 너무 지독했어 ㅠ.ㅠ
어떻게든 좋게 해석하지 않으면 내가 몸살이 날 것 같아서
억지를 쓰고라도 리뷰를 써내었네..

안그러면 소설이 공중에서 마구 울고 있을 거 같아서...

2011-07-01 1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2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오 2012-03-13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깐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는 말씀인가요? 이러한 상황이 누구에게나 맞딱트리는 현실은 아니지 않나요??

한사람 2012-03-14 08:52   좋아요 0 | URL

모르겠어요.
저런 글을 썼나 싶기도 한데 ㅋㅋㅋ
그땐 이 소설을 극복하자 !!! 이런 생각이 많았어요 ~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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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만난 사람

  이 책을 하필 여름이 시작되려는 찰나에 만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책 덮고 나니 새삼 지금이 가을이나 겨울이 아닌 것이 참 좋았다. 내 생각이지만 아마 작가도 여름을 좋아하지 싶은데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걸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더욱 설레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언젠가 도올 김용옥 선생이 사상의학을 설명하면서 사람도 체질에 따라 자신과 맞는 계절이 있고 반대인 계절이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봄만 오면 (남들 다 병든 닭처럼 졸고 있어도)천금을 얻은 것처럼 팔팔한데 다른 사람은 의욕도 나지 않고 기운도 없이 알려진 병든 닭 마냥 매번 같은 패턴을 산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잘 견디는 계절이 있고 맥도 못추는 계절이 있다는 건 얼추 사람마다 체질이 틀려서 그렇다는 말씀이었다. 내 경우 정신이 번쩍 들고 생기가 돌아 그래도 일의 의욕이 느껴지던 계절은 단연 여름이었다.(반대로 봄은 사망의 계절) 나는 여름에 땀도 잘 안 흘리고 불면증도 없는 편이다.(에너지 고효율 효과) 운 좋게도 에어컨, 선풍기 없이도 크게 더위를 잘 못 느낀다. (여름에도 늘 뜨거운 커피를 고집) 학교, 직장다닐 땐 우연인지 꼭 여름에 의미있는 성과를 올리곤 했다.(취직이나 대학원 졸업도 여름) 한 해중 여름을 삼, 사 개월로 보았을 때 그 시기에 그해의 성과를 몰아서 이루는 경향이 많았다. 내 기억에 덥다고 생각해 입 밖으로 ‘덥다’라고 투정을 하는 시기는 딱 한 여름 사나흘이었다. 그러니 내가 덥다고 한 날은 정말로 최악의 더운 날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돌이켜보면 사랑도 매번 여름에 했다. 정확히는 사랑의 시작을 여름과 함께 출발했다. 새로운 사람(?)을 늘 여름이 오면 만나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오월의 청명한 하늘을 너머 장마가 지고 폭염과 폭우가 교차되는 변화무쌍한 날씨는 꼭 천둥과 번개가 치는 청춘의 가슴과 잘 어우러졌던 듯하다. 누구나 여름에 비교적 추억을 다작할 수 있어서 그런 걸까 갸우뚱해 보았지만 별스런 추억없이도 내 사랑은 모두 여름의 품안에서 싹트고 키워가고 성장, 발전했던 것이다. 대체로 여름에 이별을 겪었던 기억은 전무하고 그들 모두는 여름과 함께 아직도 뜨거운 채로 인 듯하다. 그래서 나는 여름만 오면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生의 관용된 습관에 의해서 두근두근 거리는 인생을 살아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여름은 색(色)이 많아 좋은 계절이었다. 여름은 통(通)하라고 있는 계절이었다.    -336p
여름은 색이 발(發)해 힘센 계절이었다.    -342p


  바야흐로 내 인생의 색(色), 통(通), 발(發)의 시간이 바로 지금의 계절이었다. 이 책은 여름과 내 인생의 역학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달까. 그러나 굳이 이런 내 체질과 성향을 말하지 않아도 이 책은 처음부터 초여름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구석이 많았다. 이미 단편으로 많은 문학상을 수상한 문단의 기대주, 김애란의 첫 장편이라는 건 소설좋아하는 독자에게 충분히 두근두근할 만한 뉴스였다. 요즘 주변을 둘러봐도 한국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드문 편이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한국소설, 특히 순수문학은 어렵고 지루하고 우울하기까지 하다는 게 총평이다. 그중에서도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선 염세적인 분위기에 해체적 기운까지 느껴져 페이지 넘기기가 무섭다는 말도 들린다. 시도 마찬가지이다. 무슨 말인지, (이런 말하면 돌 맞겠지만)이것이 시라는 것인지 도통 모르기만 하라는 요즘 시집들을 (자발적으로)집어 들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서점가면 (시집으로선)왜 이해인 님의 시집이 늘 십년 째 베스트 셀러인가. 보편타당한 감성으로 위로해주시니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시인의 한줄 눈물이 우리가 다 헤아릴 수는 없어도 이해하기 어려워도 그 느낌만은 공감하고 싶어야 하는데 우리 세대 대부분은 요즘 작가들에게서 그런 기운을 느끼지 못하는 바이다. 그런 와중에 ‘그나마’ 김애란은 꽤 재미나면서 가볍지 않은 소설을 쓰는 (젊은)작가로 자리매김한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김애란 단편의 짜릿함, 만족감은 마치 가창력 좋은 어느 아이돌 가수에게 거는 대중의 기대처럼 그 공감의 폭이 넓어진 것이다.

  그런 김애란이 ‘초록 한가운데서’라는 싸인과 함께 나를 찾아온 것이다. 유월의 장마가 시작되는 어느날 오후, 반짝반짝 경고음만 같던 총총 빗소리와 함께. (이런 말 어떻게 들릴까. 사인본에 쓴 글씨가 확실히 젊었다. 세월의 피로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소설을 나는 작년 여름 <창비> 계간지를 통해 처음 만났다. 물론 그땐 나중에 단행본으로 출간되면 한 번에 읽을 생각으로 대충대충 페이지를 넘겨갔다. 그런데 총 4번의 계절을 통해 연재된 소설의 맨 처음, 그러니까 <두근두근 내 인생>의 첫 회는 제대로 읽은 기억이 난다. 첫 회에 아름이는 벌써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고 2/3 이상 완성한 상태였다. 부모님 이야기는 첫 회 이후 세 계절에 걸쳐 중간에 삽입되는 식이었다. 그때 내가 느낀 건 아름이가 그 소설을 다 완성하지 못하고 죽겠구나...하는 불길한 예감이었다. 그런데 출간 된 책에는 아름이의 소설은 맨 뒤로 위치가 이동한 상태였고 어엿하게 소설속의 또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탄생되어 있었다.(연재 때는 아름이가 죽으면서 끝이 난다) 완성도면에서 후자가 더 아름다워 보인 건 사실이다. 다만 연재할 때와 수정할 때 그 사이 변한 작가의 마음이 궁금했다. 아름이가 고민하던 시간과 작업과정을 중간에 나누어 배치하다가 돌연 그 완성된 결과를 마지막에 선물처럼 안겨준 것에.(소설 구조상의 큰 변화가 아닐까?) 책을 덮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어떻든 아름이가 죽는 이유보다는 태어난 이유에 더 힘을 실으려 했던 게 아닐까 싶다. 우리 모두 어짜피 죽는 존재지만 그건 태어났기 때문에 발생하는 차후의 문제라는 듯. 중요한 건 우리가 태어났다는 걸, 누구나 한번은 축복 속에서 태어난 적이 있었다는 걸 잊지 말자는.... 아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십 칠년 동안 살았던 이유는 십 칠년간 자신이 느낀 세상 경험으로 부모의 이야기를 만들어 놓고 가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그건 결국 자신이 세상에 탄생한 과정을 말하는 일인데 아름인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누구보다 소중하고 아름답게 함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가치있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기에.

  그렇게 이 소설은 자식이 쓰는 자신의 자전 소설에서 자식이 쓰는 부모의 연애소설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우리들 존재의 뿌리를 여름처럼 일깨워 주려 이렇게 여름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늘 여름이 좋아 죽겠는 나 같은 독자앞에.


여름을 만드는 사람

  열일곱의 나이에 부모가 된 사람들과 그들의 자식으로서 열일곱의 나이에 죽어야 했던 사람의 이야기는 소설로선 그리 충격적인 설정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드라마 미니시리즈에 등장할 법한 상투적, 작위적인 배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훌륭한 감독은 불륜도 독창적인 예술로 승화시키지 않는가. 가장 흥미로왔던 건 자식이 죽어야 하는 병이 ‘조로증’이었다는 것인데 어느 순간 자식이 부모의 노화를 앞지르고 마침내 부모같은 자식이 된 채로 막을 내리는 서사구조가 모든 비극과 희극의 원천이었다. 여기서 사람의 마음이 몸의 성장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즉 신체의 노화에 발맞추어 마음이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이라 생각했다. 마음은 계속하여 성장하고 발전하여 성숙하는 것이지 한번 늙어졌다고 성장을 멈추고 병약해지는 건 아니었다. 반대로 얼굴이 아무리 늙어도 소년은 소년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그건 우리 몸이 아무리 남들보다 빠른 시간을 살아도 마음은 자신이 겪은 철(계절) 만큼만 철이 든다는 말이기도 했다. 사람은 자신이 체험한 계절의 횟수만큼 그 계절을 잘 알게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니까. 계절의 나이테만큼 어른이 되는 것이니까. 그래서인지 이 소설은 여지껏 작가 김애란이 알고 배워온 여름이라는 계절이 모두 녹아있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무엇보다 나이와 탄생, 죽음을 말하는 이 소설에 있어 중요한 사실이었다. 김애란은 꼭 나보다 십년이 젊은 소설가였다. 나보다 어리고 혹은 나이든 작가보다 경험이 적다고 덜 성장했다는 것이 아니라 (원래 조로하는 직업인 작가로서) 꼭 그 나이의 정점에서 가장 완성된 감성을 완벽하게 토해내었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김범수라는 가수가 지금 막 신인이 된 백청강이라는 청년의 노래를 듣고는 저 목소리는 딱 저 나이 때 밖에 나오지 않는 맑고 귀한 소리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그건 노래 실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의 그만이 낼 수 있는 유일성, 희소성, 순수성을 말한 것이었다. 김애란은 더 나이 들어서 혹은 더 어려서는 볼 수 없는, 느낄 수 없는 만큼의 모든 여름을 자기 소설로 노래했다. 그건 젊음을 한숨 넘긴 내가 오랜만에 체감하는 더없이 순수한 여름이었고 그래서 더 시리고 아픈 여름이었다. 어떻게 그런 여름일 수 있는가. 어떻게 여름을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내게도 그런 여름은 있었는데. 그녀가 다른 무엇이 아니고 작가인 것이 얼마나 고마운 여름인가 말이다.

  속된 말로 아름인 하마타면 이 세상에 나오지 못할 존재였다. 나란히 열일곱 살인 태권도 특기생 한대수와 노래가 꿈이었던 최미라가 저지른 하룻밤 불장난으로 아름인 그들 인생의 최대 실수이거나 치명적인 추억이 될 뻔 했다. 모든 생명은 그렇게 모두 사라질뻔 한 사건속에서 극적으로 피어나는 존재가 아닐까. 자꾸 혼란스러웠던 건 아름이의 이름이 여자같았다는 것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내 사촌 여동생 중에 꼭 ‘한아름’ 이라는 녀석이 있다. 80년대 초에 한글 이름 짓기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여자 이름 짓기 참 좋은 韓氏(한혜숙, 한고은, 한예슬, 한은정, 한가인, 한지혜, 한채영, 한지민, 한효주, 한혜진을 보라) 성에 무수히 많은 아름이가 탄생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들의 아들을 남성으로 생각하기 정말 어려웠다. 작가가 굳이 여자이름의 뉘앙스를 가졌으면서도 아름이를 남자로 한 이유를 이해하고 싶었다. 본 서사에서도 글쓰는 사람으로서 자주 작가 자신의 대리인처럼 느껴지던 아름이를 왜 남자로 운명지었는지. 아니 왜 여자로 하지 않았는지. 솔직히 남자로 할 거면 이름만이라도 한대수의 확실한 아들처럼 지었으면 바랐다. 이름의 표면적 의미만으로는 병을 ‘앓고’ 있는 ‘아름’, 혹은 세상을 일찍 ‘알아’버린 ‘아름’, 삶과 죽음 모두를 두 팔 벌려 안고 있는 ‘아름’이로 상징할 수 있었지만 줄거리상 아름이가 남자이어야 하는 개연성은 작품 전체로 보았을 때 드러나는 이유로 보이진 않았다. 어떤 작가의 오래되고 내밀한 바람같은 것이었을까. 작가의 전작들에서 아버지는 아이를 버리고 집을 나가는 대개 철부지 아버지로서 좀 대책없고 우스운 인물들일 경우가 많았다. 이른바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는 부성은 아니었다. 이번 작품에서도 한대수는 태권도를 잘하는 학생이었지만 아름이를 보고 난 후로는 뭣 하나 제대로 이겨본 적이 없는 이 시대의 전형적인 패배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대수가 사회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한 인물일 수 있지만 가정적으로는 누구보다 자신이 뿌린 생명을 소중하게 책임지는 진솔하고 따스한 인간성을 보여주었다. 아름이는 다시 태어난다면 그런 아버지로 태어나 자신을 낳은 뒤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다고 말한다. 아름이 입장에선, (남자로서)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누군가를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엄마이고 여성인 내 입장에서도 감동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순간, 왜 이 노래가 생각났을까.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에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은 내가 부모되어서 알아보리라 -  <부모> 가사 中


  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궁금하다면 그건 내가 부모가 되어 나같은 생명을 만들어 보는 수 밖에 없다는 노랫말. 내가 생겨난 이유, 생물학적 나의 시초를 따져 묻고 그 답을 알아보기엔 어쩐지 생겨난 후 나를 낳은 어머니 보다는 생기기 전 아버지가 제격이라는 생각이다. 내가 태어난 이유야 말로 아버지가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그 이유를 공감하기엔 같은 남자인 것이 더 낫겠다 싶어진다. 그래야 좀 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겪지 못한 과거’와 앞으로 ‘오지 않은 미래’를 모두 체험해 볼 수 있으니까. 가만 생각해보니 그것은 참 스마트한 발상으로서 완전히 자신이 되어보지 못한 아름이가 마지막으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소망은 아니었을까 싶다.


아버지는 사내가 되고 싶은 사내, 여름이 되고 싶은 여름      -329p
어머니는 자기가 되고 싶은 자기, 여름을 간섭하는 여름      -330p


  아름이의 유언과도 같은 <두근두근 내 여름>엔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렇게 표현한다. 자신의 여름을 여름처럼 창조하고 싶은 아버지는 사내로서 뿌리가 되고자 했고 그 여름 속에 들어가 주인공이 되고 싶은 어머니는 열매가 되고 싶어 한 것이다. 모두 여름을 자신처럼 자신을 여름처럼 만들고 싶은 청춘들이 아닌가. 또 아름인 구십의 치매 아버지를 둔 육십대 동네 장씨 할아버지와도 농담 따먹기를 하는 친구사이로 지내게 되는데 장씨 할아버지 역시 아버지가 늙어서 이루게 될 철없는 할아버지의 표상으로 보였기에 이번 이야기는 각 세대를 상징-손자(아름)-아들(한대수)-아버지(장씨)-할아버지(장씨 아버지)-하는 남자 인물들이 여름안에서 소박한 인연을 이어나가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오랫동안 여름을 만들어온 사람들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누구보다도 생명의 시작, 인간의 성장, 죽음의 마지막을 성찰하기 위해 아름이는 남자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아름이는 아버지와 장씨 할아버지를 보고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하는 질문에서부터 ‘부모는 왜 아무리 어려도 부모의 얼굴을 가질까’, 혹은 ‘자식은 왜 아무리 늙어도 자식의 얼굴을 가질까’하는 질문들을 같은 남자 소년의 시각에서 제기하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아름이는 세상에서 가장 빨리 늙는 슬픔(恨)을 가졌기로 가장 크게(한) ‘아름’다운 ‘한아름’이 합당해 보인다. 아름이야 말로 한여름의 아름다움을 만들었기 때문에.



여름을 시작하는 사람

  또 인상깊었던 사실 중 아름이는 죽음을 앞두고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을 수 없다. 이 작품에서 아름이는 부모님의 연애담을 완성하기 위해 자주 글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 작가로서 고충어린 목소리가 겹쳐지는 기분이 들었고 어쩐지 작가의 실제 고민이 그대로 노출된 듯한 생각에 친근함을 많이 느꼈던 이유이다. 아름이는 말한다. ‘글쓰기는 매 순간이 결정과 선택의 연속’이라고. 기부 프로그램에 출연한 후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을 보고 ‘어쩌자고 인간은 이렇게 이해를 바라는 존재로 태어나버리게 된 걸까?’ 자문한다. 그리고 왜 자신처럼 사람들은 ‘그토록 자기가 느낀 무언가를 전하려 애쓰는 걸까?’ 알고 싶어 한다. 이는 그대로 작가 김애란을 움직이는 실시간 화두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인간은 타자에게 이해를 바라기 때문에 자신이 느낀 것을 무던히도 전하려 한다는 뜻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이는 병들어 부모님에게 우등생도 학사모도 드릴 수 없으므로 그들의 추억을 잘 다듬어 선물해 드리는 일로 글쓰기를 택한 것이었다. 이것은 몸이 빨리 늙어 감에 따라 그 성장속도를 따라가기 위해 마음을 책으로 채운다는 아름이의 생존전략으로 생겨난 고유의 능력이었다. 결국 아름이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의미있게 살기 위해 글을 썼다는 것과 같은데 이는 꼭 조로한 정신이 자기도 모르게 경쟁력이 된 이 시대의 모든 작가들의 항변만 같았다. 자꾸 이 시간에도 골방 어느 구석에 앉아 밤을 새며 홀로 글과 싸우고 있을 수많은 청춘들을 생각나게 했다. 작가를 꿈으로 가진 나보다도 더 절실할지 모를 그들 젊음이 안타까워 보였던 건 아름이에게 가공의 편지를 보낸 시나리오 작가 이서하의 공도 컸음이다. 이 책 후반부에 아름이와 이서하가 주고 받은 서신은 감수성의 극치라 할만큼 이 작품의 백미로 기능했다. 아름이는 이서하의 편지를 보고 ‘한 줄의 문장으로 하루를 버틸 수 있고, 한 번의 호흡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하루’라며 그 행복을 어쩔 줄 몰라하지 않았던가. 꿈이 무엇이냐는 아름이의 질문에 ‘사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어서’라는 이서하의 답신은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머무른 구절이기도 했다. 그 구절이 왜 그렇게 울컥하며 눈물이 나던지 나조차도 의아했다. 어쩐지 나는 아름이가 불치병에 걸린 소년 소녀의 시나리오 때문에 거짓 편지를 보낸 또 다른 젊은 작가를 십분 이해할 것 같았고 가공이라도 자신의 심장을 설레게 해준 그에게 고마워 할 것 같았다. 그건 지난날 우리가 거짓사랑에 눈물 짓다가도 먼 훗날 사랑의 기억으로 감사해하던 용서의 느낌과도 비슷했다. 무엇보다 아름인 이서하로부터 첫사랑의 ‘큰’ 실망을 얻었지만 그가 보낸 글 때문에 ‘잘’ 실망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 않는가. 


어른이 되는 시간이라는 게 결국 실망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글이란 게 그걸 꼭 안아주는 것은 아닐지라도 보다 ‘잘’ 실망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무엇인지도 모르겠어. 언젠가 나도 네 글을 보고 싶어. -260p


  상처를 준 상대에게 그래도 진정한 ‘네 글’을 보고 싶다고 말하는 아름이는 어쩐지 조로한 작가 김애란이 아직 철 안든 내게 말해주는 격려처럼 느껴졌다. 아주 오래전에 꼭 부모님의 연애이야기를 한번 소설로 써볼까도 싶었던 나였기에 그녀와 한아름은 내 여름의 심장을 노크하는 반가운 손님이 되고도 남았다. 여름 내내 ‘언젠가 나도 네 글을 보고 싶어’ 이 말이 귓가에 울리는 시간이 될 듯하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물리적으로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매력에 대해 말하고 싶다. 아름이는 태어나 ‘엄마 가슴에 안겨 처음으로 엄마의 심장소리를 듣는 순간 내가 아는 소리라는 안도감’에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죽기 직전 아버지가 자신을 안아줄 때 아버지의 심장과 자신의 심장이 포개어지며 같은 소리를 듣게 되어 그 파동안에서 사랑의 힘을 오롯이 체험한다. 사람의 심장이 하나 뿐인 것은 그 심장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나는 심장의 소리가 같은 사람은 누구나 사랑할 수 있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심장의 소리를 포갤 수 있다면 그들은 심장보다 더 뜨거운 추억들을 공유한 사람들 일테니까. 아름이가 언젠가 병원을 다녀오며 아버지와 둘이서 찾아갔던 놀이공간, 둘이서 하늘높이 점프하며 심장을 뛰게 하던 그 축복된 순간을 이렇게 말한다. 같은 심장이 뛰는 사람들이 서로의 심장 때문에 행복해 하는 그 순간, 가슴이 터질 것 같아도 멈추고 싶지 않은 그 순간을.   


만일 인생의 가장 환한 장면이란 게 따로 있다면, 바로 그런 순간이지 않을까? 시원하고 개운한 바람. 펄떡이는 심장. 발밑의 탄력. 넘어지며 웃고, 웃으면서 자빠지던 우리의 활력. -145p

 

  나이들면서 내 심장이 뛰는 순간을 자각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건 일상이 아니라 생각하고 일상이 아닌 것은 대개 일탈이라 치부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특별한 걸 원하는 것 같아도 실은 매일 매일 보통의 순간을 살고자 심장을 움직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애써 가라앉혀 놓고 뛰지 않는다 불평하는 사람들이 우리들인 것이다. 허나 내가 생각하기에 ‘보통의 삶을 살다 보통의 나이에 죽는 것’은 살아보니 점점 기적이 맞다는 생각을 한다. 보통의 삶이라는 건 남들이 하나씩 가지고 있는 평범함 여러 개를 모두 모아 이루어진 아주 특별한 인생이 아닐까 싶어서다. 끊임없이 우발적인 만남으로 사랑과 이별이 반복되는 인생에 있어서 보통이 되기는 여간 보통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모두는 각자가 특별할 수 밖에 없고 그 특별함이 결국 자신의 매력이 될 수 밖에 없고 그것은 자신의 심장은 물론 상대의 심장도 뛰게 할 수 밖에 없는 소중한 본성이라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심장을 뛰게 하는 특별한 재주를 가졌고 재주가 많을수록 상대도 특별하게 하는 능력을 가진 게 틀림없다고 믿게된다. 

  바로 김애란은 고통과 슬픔, 기쁨과 환희에 대한 감수성을 보다 정확하고 풍부하게 전달하는 육감적 능력을 가졌다. 남의 심장을 두드리고 끝내 벅차올라 터지도록 하는 특별한 재주말이다. 그녀의 육감은 다섯 가지 이외의 감각이 아니고 다섯 가지를 모두 합한 것 이상의 감각일 터이다. 나는 육감이 탁월하게 발달된 작가의 작품으로 이 여름을 반갑게 맞이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이 여름의 色을 나의 色으로 하고 싶고 이 여름을 통과한 것들과 제대로 소通하고 싶고 이 여름으로부터 發한 것들을 모두 놓치지 않고 싶다. 또 다시 내가 도망치려 했던 ‘시작’이 다시 내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설렘과 두려움을 느꼈다는 아름이에게서 내 모습을 부끄럽게 확인한다. 내가 두려웠던 건 사실 여름이 무섭게 닥쳐 온다는 사실이었는데 그것은 여름에 시작을 하고(해야 하는) 싶은 마음일 것이었고, 그 시작은 언제나 고통일 것이 자명했기 때문에. 여름을 사랑하는 건 고통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그건 내 심장이 아직은 뛰고 있다는 증거이고 그러므로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 내가 여름이고 싶은 이유일 것이다. 이로써 여름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으로 여름을 시작하는 사람이고 싶다.

두근두근 내 인생, 그건 이 설레는 여름과 함께, 지금부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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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1-07-02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 여름이 있었구나.
난 여름체질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여름을 거의 눈여겨보지 못했던 것 같아.
콕찝어주니 끄덕거려진다~

이책이 좋았던건, 가독성이 훌륭해서 내게 간만에 한쾌에 끝내는 기쁨을 줬었던 것과
죽음이 전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우울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닌가 싶어.

저 말 딱 맞다. 백청강의 노래를 듣고 평한 김범수의 말.
적절한 비유를 콕찝어내는 것도 너의 탁월한 능력이야. 문단의 아이유라니^^

2011-07-03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3 0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3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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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든, 젊다는 것은 에너지에 관한 문제이다. 젊은 작가 - ‘누가 누구를 누구 마음대로 젊고 늙은 작가로 규정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젊음의 기준을 생산의 힘으로 본다면 수긍할 만하다’는 성석제 작가의 말처럼-의 소설은 비극이든 희극이든 인상적인 에너지를 생산한다. 작년에 ‘제 1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덮고는 분명 일상에서 강렬하고도 자극적인 생의 투사적 기운을 얻었던 기억이 있다. 인간의 상상력이 미치는 스펙트럼이 무한대로 확장되었다는 놀라움과 우리가 공감하는 고민의 종류가 그토록 다양하다는 것에 박수를 보내었다. 젊다는 것은, 젊은 소설, 젊은 작가라는 것은 그 상상력의 에너지가 들끓는 젊음처럼 폭발적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대개 문학외의 장르에서도 마찬가지인 젊음의 보편적 기대가치일 것이다. 그런데 올해는 같은 작가들의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가 공중에서 한차례 폭발을 일으킨 후 제각각 예기치 못한 임의의 장소에 떨어져 입체적인 파편으로 흩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들을 한데 모아 그러잡기엔 어쩐지 두려웠다. 대기는 무참히 침몰했고 계절은 희미하게 사라졌고 공간은 사방에서 분열했고 시간은 예고없이 소멸했으며, 그 속에 위치한 나와 타자들은 모두 불구인 상태로 존재했다.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그날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었다.

  이 책을 덮은 지도 꽤 시간이 흘렀지만 이번에 나는 막연한 슬픔에 잠긴 채 함부로 젊음을 입에 담기는 어려웠다. 그건 젊은 사람이 암에 걸리면 더 빨리 죽는 이치와도 비슷했는데 나는 최대한 슬픔의 세포가 진행, 확산되는 시간을 늦추고 싶었다. 그러곤 왜 내가 하필 암에 걸렸을까, 하는 심정으로 왜 이들은 이럴 수 밖에 없었을까를 여러 번 질문했다. 단편이라는 것이 어느 계간지, 어느 소설집에 같이 엮이느냐에 따라 사뭇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 수상집은 꼭 이 시대 젊음의 대재앙 특집으로 부러 모아 구성한 단행본마냥 뚜렷한 색깔과 동일한 방향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젊음은 어디로 튈지 모르고 일정한 방향성이 없다는 것이 그 매력이자 특징일 것인데 이번엔 달랐다. 그런데 나는 그 이유도 알 수 있을 것 같아 어쩐지 그들의 젊음과 나의 젊음,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젊음이 많이도 눈물겨웠다. 젊음의 양이 곧 슬픔의 양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번엔 젊음이 슬픔으로 귀결되던 시간들이 결국 슬퍼지는 독서였다. 나는 그 이유를 찬찬히 따져 묻고 싶었다. 슬픔 끝에 괴로운 심정에 대한 보상이라도 바라듯 이 슬픔을 꼭 치유의 에너지로 바꿔놓기라도 하겠다는 듯. 다행히 기쁨과 슬픔이란 감정을 기초로 인간의 내면을 성찰한 철학자가 있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치욕과 복수심, 두려움과 유사희망, 공황과 불안 등의 모든 감정들은 슬픔의 감정들이라 말한다. (『에티카』, 2007, 서광사) 감정을 예민하게 구분짓고 싶은 내게 그것은 모두 슬픔의 종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번 독서에서 각자의 소설 끝에 희미하게 감지된 어렴풋한 희망의 끈마저도 하나같이 슬픔으로 다가왔다. 외려 모두 불타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으면 다시 태어나 새롭게 시작할 수라도 있을 것 같아 이 슬픈 감정을 무르고 잊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들을 모두 몰랐던 것으로 하고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로 덮어버리고 싶었다. 그것은 오지에서 탈출해 힘겹게 목숨을 건진 생존자가 느끼는 두려움만은 아니었다.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벽돌을 쌓는 일꾼의 심정도 아니었다.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허기를 느끼는 비루함이나 사라진 것을 보고 과거를 그리워하는 부질없음도 아니었다. 내가 느낀 슬픔은 아직은 살아있기로 그럴 수밖에 없는 일종의 ‘가능성’이었다. ‘가능성’은 아직 희망이라 말하기엔 불안한 생 날것이었고 긍정일 수도 부정일 수도 있었다. 이렇게 기다리면 누군가는 올 지 모르고, 다시 꽃은 필지도 모르고, 언젠가 글은 써질지 모르고, 마음은 서서히 누그러질 지 모른다는, 비록 지금은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지옥과도 같은 세상이지만 이것을 통과하고 나면 지금보다는 나을지 모른다는 아니 적어도 지금처럼은 아닐 것이라는 일말의 희박한 ‘가능성’이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젊고 어쩌면 세상은 우리 때문에 아름다울지 모르니까. 아니 우리 때문에 아름다워야 하니까. 아니 우리 때문에 아름다웠으면 싶으니까. 사실 젊다는 것은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도전을 의미하고 이것 말고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기회를 상징한다. 미래는 그 가능성의 결과이며 그것의 실현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아무런 가능성이 없으면 사실 슬플 일도 없는 것이다. 가능성이 풍부하기 때문에 욕망도 소망도 많아지는 것이고 그것이 좌절될지 모를 확률도 커지는 것이다. 완전무결한 절망은 차라리 안전하다. 그래서 비겁한 사람들은 보다 쉽게 포기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가능성은 얼마든지 무한대로 슬픔을 제공할 수 있으며 그것은 곧 젊음의 속성과도 꼭 일치 하는 것이었다. 이번 수상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저마다 최악의 고통 속에서도 아직 절망할 수 없는 젊음이라는 가능성을 최후의 카드로 숨겨놓은 증거들의 집합이었다. 나는 그들의 카드를 확인하는 고통을 슬픔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말한다. ‘두려움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큰 악을 더 작은 악으로 피하려는 욕망을 갖도록 자극되는 슬픔이다. 유사희망은, 자신이 그 결과에 대하여 의심하는 미래 또는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기쁨을 가장함으로써 현재의 슬픔을 위안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안은, 자신의 욕망이 침해당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정할 때 비롯되는 슬픔이다. 공황은, 작은 악을 통해 큰 악을 피하려고 하는 욕망조차 방해당하는 일반화되고 대규모화된 두려움이다.’ 그렇다면 가장 많은 양의 감정을 외부로 표출하는 시기가 젊음의 시간이라고 보았을 때 그들은 젊기 때문에 가장 많이 슬펐을 것이 틀림없다. 더 많이 젊은 작가가 더 많이 슬펐을 것이고 그것은 곧 더 많은 가능성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처음으로 많은 가능성이 사라진 지금의 내가 위안이 되었다고 말하면 바보같은 것일까. 우리는 아플 것을 알면서도 사랑을 멈추지 않는 인간이라는 존재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가능성을 바라고 원하였던 젊음을 원한다. 젊어지고 싶다는 건 미처 정해지지 않은 나의 미래, 지금보다 더 많았던 그 가능성이 그립다는 뜻일 터이다. 나는 그들의 슬픔을 보며 그 슬픔에 동참하는 것으로 젊음에 참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슬픔도 전염되는 성질을 가졌다는데 혹 이 소설을 집어든 독자들은 나처럼 젊음의 슬픔에 빠져들곤 도리어 이율배반적인 회복의 에너지를 건질 수도 있겠다. 그럴 수도 있겠다. 일곱 가지 애끓는 에너지들은 흡사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빛깔의 슬픈 애상곡(哀傷曲)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누가 더 슬프고 그리하여 나를 슬프게 하였던가. 나는 그 애닯은 일곱 곡조에 몸과 마음을 맡겨본다.


#1. 나뭇잎 배, 그 구원의 가능성.............................................................................물속 골리앗 / 김애란

  이 소설을 덮는 다는 건 참 어려웠다. 공교롭게도 이 소설의 마지막은 지난 3.11 일본 대지진 참사시 바다로 흘러간 지붕 위에서 홀로 버티며 3주 후에 구조된 강아지를 떠올리게 했다. 참았던 눈물이 베어 나오던 건 이미 아버지가 실족사 하였고 어머니가 급류에 휩쓸려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비로소 깨닫게 된 완전한 고립감보다 그래서 생겨난 인간의 본능이 더 목메였다. 어떻게든 물 밖으로 나와 떨리는 파란 입술로 “누군가 올 거”라고 중얼거리는 소년의 목소리가 먹먹해진다. 나는 소설의 끝무렵에 가서야 화자가 소년인지 알았고 그래서 더 소름이 끼쳤던 것 같다. 열네 살 소년이었기에, 설령 아무도 오지 않을 가능성보다 터무니없게 낮을지 모르지만 누군가 올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더 온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는 소년을 가만히 안아주고 싶었다.

  이 작품은 점점 싱거워지는 여름날 수박처럼 ‘세계가 점점 싱거워 지던 날’의 이야기라 하기엔 속절없이 야속하다. 그건 세상을 잘 모르고 속단한 젊음의 오해가 아니었을까. 상중인 이들 모자에게 닥친 어둠은 물리적, 정신적, 영적인 어둠으로서 마치 눈을 감고 독서를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언제 그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빗소리와 바람에 흔들려 물이 우는 소리, ‘내장 깊숙한 곳에서 흐느끼는 바람을 타고 새벽 내내 들려‘오는 개가 죽어가는 신음소리는 점진적으로 인간 내면의 공포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종반부에 이를수록 작가가 연출한 배경음이 장중한 진혼곡의 멜로디로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나, 지금 작가가 슬퍼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작품에서 소년과 어머니는 풍수해라는 재난을 맞아 힘겹게 사투를 벌인 끝에 어머니는 실종되고 소년만 살아남는다. 그 소년의 앞날도 불투명하다. 그곳은 어디인가. 내가 아는 김애란은 도시의 변두리 밀폐된 고시원 방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20대 여성들의 현실을 당당하게 노래하는 작가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녀의 밀폐된 공간도 균열이 시작된 듯하다. 바깥에 시선을 돌려보니 이 세계는 여전히 공사중인 것이다. 도시는 끊임없이 리모델링되고 ’마치 지구상에 살아남은 유일한 생물처럼‘ 거리엔 타워크레인이 점령한다. 거대 자본주의의 초대형 공장인 메트로폴리스에서 주거, 교통, 환경, 교육, 예술, 이 모든 분야는 중산층 이상의 삶에 적합하도록 설계되며 타워크레인의 기계적 작업에 의해 소수자는 도시를 떠받치는 희생자로 전락한다. 재개발지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떠나야 하고 그들이 물러선 자리엔 고층의 첨단빌딩과 그에 걸맞는 사람들이 들어 설 터이다. 서울의 한 재개발지대에 사는 신혼부부에게도 A구역은 철거중 이었다.(『벌레들』, 2010)


장미빌라 앞 건물 철거가 시작된 건, 산달이 가까워졌을 즈음에서였다
.

-『벌레들』, 김애란,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 92p

  출산을 앞둔 이들에게 ‘굴삭기는 다음 차례인 집을 향해 천천히 전진’했으며 ‘동이 트면 굴삭기가 저 아래를 다시 뒤집어엎고 갈고 망가뜨려 놓을’ 까봐 고민에 빠진다. 이들에게 철거가 예정된 자신의 주거지, ‘A 구역은 세상만사를 삼킨 심연처럼 시커먼 아가리를 벌린 채 시치미를 떼고 있’을 뿐이었다. 이 모습은 치명적인 홍수로 마을이 사라져 자신이 살던 주거지의 형상을 기억하지 못하는 소년의 시선과 겹쳐진다. ‘기역자 모양의 4층 건물로 총 열여섯 가구가 들어갈 수 있었’던 강산아파트 역시 재개발 아파트에 떠밀려 붕괴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평생 용접기술로 생계를 꾸려온 아버지가 이십년 동안 아파트 대출금을 다 갚았을 무렵 철거명령이 떨어졌고 공교롭게도 아버지는 신도시 아파트 건설현장 타워크레인에서 실족사한 상태이다. 이번 작품이 더 잔인하고 치명적인 것은 안그래도 철거명령을 받은 터에 아버지 사망과 장마라는 설상가상의 악재가 이중, 삼중으로 겹쳤다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화자가 애어른 같은 열네 살 소년으로서 자연재해와 가족상실, 사회문제까지 떠안은 우리 사회 최약자 층의 비루한 생존현장을, 필사의 탈출모습을 취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화자는 빗소리 때문인지 ‘잠을 청할 즈음엔 자꾸만 집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때 나는 비로소 전 국토가 공사중이었음을 깨달았다. - 34p

  소년이 붕괴된 침몰현장에서 기를 쓰고 이어붙인 ‘나무문짝 배’는 곧 자기살 같은 자기 집의 파편들로 주형한 최후의 생존도구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유일한 취미생활이었던 베드민턴 채를 노삼아 급류를 헤쳐 가는 길목엔 무수한 ‘골리앗 크레인‘이 버티고 있고 그때 떠오르는 아버지의 얼굴은 ’물대포‘를 한방 맞은 축축한 사체였다면. 혹 ’물대포‘는 우리 사회 공권력을 암시하며 ’골리앗 크레인‘은 재개발로 상징되는 폭력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가온 ’장마‘는 왜 만성질병인 어머니, 아버지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무방비상태로 노출된 빈민가정만 찾아가는 것인가. 최소한의 사회 안전장치가 배제된 그들에게 ’장마‘는 우리사회가 방치하고 공동 외면한 예정된 폭력에 다름 아니었다. 분명 약속된 타워크레인으로 밀어버리고 예기치 않은 홍수로 쓸어버리는 그곳에 누군가 있었다. 이 작품은 가진 거 하나 없이 오로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기술력(용접), 유산(베드민턴채), 추억(수영)등의 무형의 가치로만 타워 크레인으로 무장된 골리앗 도시에서 살아남은 소년 다윗이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 어디서 살아야 할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정말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나타날지 몰랐다. - 39p

  가만 생각해본다. 소년이 기다리던 마을은 어떤 곳이었을까. 나는 이 작품의 마지막을 덮으며 문득 어린 시절 엄마의 무릎에 누워 낮잠이 든 어느 꿈속같은 오후가 떠올랐다. 엄마는 내 기억에 자주 이런 노래를 나즈막히 읊어주셨다.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 둥근 달과 흰 구름 둥실 떠가는 연못에서 살살 떠다니겠지’ .... 나는 소년의 ‘나무문짝 배’가 어느 평화롭고 따사로운 봄 날 연못에 놀다 두고 온 초록빛 ‘나뭇잎 배’가 아닐까 착각이 들었다. 그렇게 착각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된 소년을 위해, 그 소년의 ‘나뭇잎 배’를 위해 그가 그랬던 것처럼 조금만 더 가면 다른 마을이 나타날지 모르는 가능성에 조용히 박수를 보낸다. 그건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선정하고 떠나신 故 박완서 작가의 마음도 헤아려 보고 싶은 내 눈물이기도 하다. 조금만 더 살면 더 나은 세상을 보겠지, 하는 그 애절한 가능성을.


#2. 체리 빛 소나타, 그 감각의 가능성...............................................................................여름 / 김유진

  시종일관 이 소설을 긴장하며 읽었다. ‘바닥에 온전히 맨발을 내려놓는 법이 없는’ Y처럼 마음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지만 끝내 대단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소설은 페이지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린 듯했다. 소설이 끝까지 밀고 가던 것은 독자와의 거리감에 대한 작가의 의지가 아니었을까. 마치 어느 미술 전시장에 걸린 화가의 작품처럼 일정한 관람거리를 확보한 후 그 너머에서만 그림을 구경하라는 듯. 실로 회화적 표현을 한다는 작가의 이름답게 이 작품은 글로 쓰여진 그림의 느낌이 충분했다. 소설은 동거 커플로 보이는 Y와 B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그들을 온전히 대결시키지도 서로 공감하게도 만들지 않았다. 심지어는 왜 같은 공간에 있는지 조차 의문이 가도록 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단절된 과거,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막막함만을 질료로 하지는 않았다. 그저 몇 개의 주어진 지금 상황과 회상의 파편, 주변 서술로 관계를 예측하고 갈등을 감지할 뿐이었다. 너는 너이고 나는 나, 이유같은 건 묻지 않는다, 는 식이었달까.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남 이야기 하듯 담담히 읊조리는 그들의 이야기. 이 작가의 고백하는 방식이 건조했기 때문인지 소설은 사막같이 쓸쓸했음이다. 김유진의 다른 작품을 만나본 적이 없었기에 그 첫인상이 더 조심스러웠다.

  특이했던 건 이 소설에서 어떤 의미있는 족적을 남긴 듯한 ‘먼지’와 ‘벌레’였다. ‘먼지’는 희미한 안개처럼 이들 일상을 뒤덮고 있었으며 ‘벌레’는 이들과 같이 숨쉬고 서식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벌레와 먼지는 서로 상관은 없어 보였지만 그림같은 이 작품을 생물처럼 살아움직이게 하는 유기적인 배경으로 존재했다. Y는 인터뷰의 녹취록을 정리하는 사람이고 B는 무언가를 깍아 내고 부수는 사람이었다. 이들은 헐값에 산 곰팡내 나는 집에서 하루 종일 먼지를 통과하면서 각자의 작업에 몰두한다. B가 Y에게 말하는 집이 아름다워질 ‘가능성’이란 곧 이들의 소박한 꿈과 행복을 암시하는 듯 했다. 그런데 그 가능성이 견고하게 축조되지 못하고 서서히 무너져 가는 것처럼 보인 것은 무엇 때문인가. 중요한건 김유진을 거쳐간 이들 작업 공간의 서사적 분위기였는데 그곳에 바로 ‘먼지’와 ‘벌레’가 지속적으로 이들을 물리적, 심리적으로 지배하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여성으로 보이는 Y는 ‘생략된 말을 찾아 문맥에 맞게 끼워 넣는’ 것이 주된 작업이었고 ‘문장과 문장 사이의 공간, 대화와 대화 사이의 간극, 언어로 표현하기 전에 눈빛이나 손짓으로 대체하는 대화들’을 잘 손질해야 하는 일이었다. 즉, 주어진 문장을 말이 되도록 재정립하고 틀린 것은 법칙에 의해 교정하는 것이 자신의 업무였던 것. 이에 반해 남성으로 보인 B는 남이 버린 재료라도 자신의 필요에 맞게 조립, 가공하여 일상의 물건(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기술인 사람이었다. Y와 B는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은 미완성인 현실, 심지어는 타자가 훼손한 현실까지도 자기 생각과 몸으로 재완성해 나가는 우리 사회 재활용꾼, 리메이크 전문가들이다. 이들이 표상하는 것은 사회공동의 필요에 의해 그 나머지의 시간과 공간을 담당하는 보조적 일꾼으로서의 사회구성원, 예를 들면 배달원, 운전수, 청소부는 아니었을까. Y와 B는 어쩐지 배울 만큼 배우고 능력도 있었지만 신체적, 지적으로 가장 활력적인 청춘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이나 단순노동, 사무보조 등의 노동에 내몰린 젊은이로 생각되었다. 이들에게 닥친 재난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는 기회상실의 현실은 아니었을까. 그래서인지 ‘개수구 안에 버티고 있는 벌레’나 ‘온 집안에 살아있는 듯 태어나고 이동, 번식하는 먼지’는 익히 알고는 있지만 서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말해봤자 소용없는 이들 사이 자조적 현실로 여겨졌다. 이 소설의 제목이 불같은 청춘을 상징하는 ‘여름’이지만 그 여름의 바닷가에 이들보다 더 생생한 풍경으로 자리매김한 바다벌레는 Y와 B의 여름을 옥죄는 무시무시한 현실-병, 가난, 일자리, 아이, 집-로서 심볼화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나는 이 작가의 슬픔에 거리두기 작법이 외려 서늘하고 시리게 느껴진다. 남의 슬픔을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하게 하는 작가의 계획된 고집이 마음에 든다. 가령 체리주를 담그고 다음해 겨울에 먹고 싶다는, 아니 명절음식도 먹고 싶다는 남자가 여자의 테이프에서 흘러나온 남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피칠갑을 두른 연극을 하게 하고 남자가 쌓은 체리나무 그늘아래 작은 봉분위로 화관처럼 체리가 떨어지게는 물론이요 마침 여자는 겨울을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봉분을 밟은 채로 체리나무 가지를 꺾게 하다니. 이들의 여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녹색의 잎사귀 위로 떨어지는 검붉은 체리같이 낭만적이고 강렬하다. 꽃이란 무엇인가. 세상의 수많은 먼지와 벌레의 공격에 맞서 싸워 이긴후 마침내 터뜨려지는 꽃망울이 아니던가. 꽃이 되지 못한 청춘은 얼마나 슬픈 것인가. 꽃이 피는 것을 보지 못하는 계절은 얼마나 아픈 것인가. 그러나 이들은 말한다. 계절이 한바퀴를 돌아 설령 다시 꽃이 피는 것을 보지 못한다 해도 그때 꽃잎의 색깔만은 누구보다 화려하게 그릴 수 있다고. 그건 자신들과 같은 색이기에 분분히 기억할 수 있다고.  젊음은 바로 그런 감각에 대한 자신감이며 그것을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집이 아름다워질 ‘가능성’이라고.
  

#3. 악몽의 축배, 그 탈출의 가능성..........................................................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이장욱 

   이장욱은 이번 수상에서 김성중과 함께 두 번째 젊은 작가의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내가 느낀 이 작가의 소설은 무엇보다 재미있게 읽힌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장욱은 독자에게 질문하고 은밀하게 힌트를 제시하는데 있어 독자의 선험적 지식이나 경험, 정보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치밀한 구석이 있었다. <고백의 제왕>에서는 학창시절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그 시절 친구를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하고 <변희봉>에서는 소설 이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배우 ‘변희봉’을 서사적 미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스토리는 더욱 속도감이 붙게 되고 그 결말이 궁금해 흥미는 배가 되는 식이었다. <고백의 제왕>, <변희봉>으로 이어지는 서사적 모티브엔 언제나 진실과 거짓, 현실과 환상이라는 대립장치가 있었고 작가는 그 속에서 치열하게 진실을 파헤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래서인지 이번 작품에서 러시아 작가로 등장하는 ‘이반 니콜라예비치 멘슈코프’ 역시 실존인물이 아닌지 의심스러웠고 ‘만기’가 ‘변희봉’에 집착했듯이 작품 속 ‘나’는 ‘이반 멘슈코프’를 파헤치는 것이 소설의 핵심일 것이라 생각하였다. ‘변희봉’이 우리네 인생의 진실에 물음을 던지는 기표였듯이 그도 그러할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 작가는 실존인물은 아니었고 외려 러시아 문학도인 ‘나’는 실존인물 이장욱인 것으로 보였다. 학생시절 러시아에서 몇 개월 기거한 경험과 그곳에서 신학 전공의 룸메이트를 만나 긴 여행이라는 추억을 공유한 이장욱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공동주택에서 19세기 여행자인 자신과 재회한다. 20여 일 동안 그 도시에 머물며 기록한 작가노트에서 알 수 있듯이 소설은 불면의 밤과 악몽의 기록으로 탄생한 결과물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작가는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직후에 경험한 소비에트 연방과 십삼 년이 흘러 작가 된 후 다시 찾아간 도시 사이에서 무언가 고통스런 작가로서의 균열감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온 듯하다. 그 괴로움이 이반 멘슈코프의 방을 그토록 춤추게 만든 것이 아닐까. 그의 방을 마치 자기 몸처럼 치열하게 춤추게 함으로써 그 공간을 탈출하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탈출하지 않아도 좋으니 자기만의 묘법과 작가적 구상으로 탈출구를 만들어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여행의 목적은 흔들리는 작가적 자아의 원인을 찾고 그 자아를 미치도록 깨부순 후 또 얼마간 흔들리지 않을 튼실한 자아를 구축하고 돌아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익숙하고도 낯선 도시에서 반복되는 불면과 악몽 속에서 작가가 발견한 탈출구는 무엇이었을까.

  19세기로 표상되는 도시는 작가의 꿈을 키우고 의지를 다지게 된 희망의 원형지, 꿈의 생산지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사회주의가 몰락한 도시의 원형은 이제 자본주의의 불안을 생산하며 자신이 탈출해온 그곳과 닮아가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바실리섬. 스례드니 15번가 98번지. 5층 7호’에 살았다는 룸메이트 안드레이의 친구, 러시아 작가 이반 멘슈코프는 작가 이장욱이 재회한 자신의 이상향, 즉 또 다른 자아로서 기능했다. 그는 소비에트의 몰락 이전에 전위적인 반체제 작가였고 자본주의 물결 이후엔 공포소설로 전향해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된다. 그는 ‘잠을 잘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꿈속에 들어가게 되는 소녀’의 이야기로 소설가가 독자들의 ‘꿈’속에 들어가 그들을 ‘꿈’꿀 수 있게 하는 특별한 존재임을 역설한 작가였다. 그의 작품인 <꿈>이 공포소설이었다는 것이 인상깊었는데 공포는 작가 이장욱이 19세기의 방에 머물며 체험한 특별하고도 지배적인 정서였다. 또한 룸메이트였던 안드레이가 러시아 작가의 친구로서 그를 살해한 용의자일수 있다는 것, 안드레이도 그를 따라 공포소설을 쓰게 되었다는 서사구조를 뒷받침하는 코드이기도 했다.

  그런데 가만 보면 러시아 작가의 방이 춤을 춘 것은 결국 밤이면서 동시에 낮인 백야에 꾸는 악몽, 환각과 같은 비현실이며 안드레이는 그런 공포스런 현실에 가장 잘 적응한 친구에 불과했다. 즉, ‘자신이 살해한 작가의 방에 앉아서 아무도 읽지 않는 공포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독백은 악몽과 환각에서 깨어난 작가 자신이 바라본 꿈속의 자아는 아니었을지. 작가는 ‘이 악몽이 과연 누구의 것인지’, ‘무엇의 악몽이었는지’에 대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장편소설을 써야 할 것임을 친구의 목소리를 빌어 대답했다. 그리고 그 악몽의 결과를 이렇듯 소설로 완성했다. 작품을 썼다는 것은 이반 멘슈코프의 방에서 의미있는 탈출구를 발견했다는 뜻이 아닐까. 작가라는 존재는 그 어떤 현실에서도 글로써 탈출할 가능성을 찾아내는 가장 고통스러우면서도 또 가장 축복스런 능력을 타고난 사람들이 아닐까. 그런 작가의 젊음은 바로 탈출이라는 가능성의 여부에 달려있는 건 아닐지. 그렇다면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샌다는 말은, 꼭 이 작품에 어울릴 관용어가 아닐까.  


#4. 자기정복, 그 치유의 가능성......................................................................................................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 / 김사과


   분노의 리듬으로 작품 전체의 서사를 장악하는 능력이 무척 인상깊었다. 작년에 이 작가의 단편 중 <매장埋葬>이라는 작품을 읽은 적이 있다. 그때 어떤 평론가는 김사과의 세기말적 환유를 보고 ‘2010년 식의 분신자살’이라는 자극적인 표현(『현장비평가가 뽑은 2010 올해의 좋은 소설』, 2010)을 했다. 김사과는 괴물들이 모여 사는 도시, 이곳 서울에 사는 인간은 영혼이 없다고 말한다. 맥도날드나 커피 전문점, 대형 쇼핑몰의 매장(賣場)은 김사과의 글을 통해 매장(埋葬)되는 신세로 전락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소설은 이번 소설의 원인이 되는 배경으로서 느껴진다. ‘도대체 이 모든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하는 화자의 질문에 그 분노의 출처는 바로 이곳이오,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번에도 실패했듯이 이번에도 또 실패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파괴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들이 가난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확실한 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돈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들 누구도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상황은 점점 더 나빠 질 것이고 우리는 자식에게 부랑자라는 직업을 선사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의 자식들을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는 결국 우리의 자식들을 증오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결국 정신적/물질적 빈곤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결국 세계를 바꿀 수 없으므로(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우리는 이제 그만 세계를 끝내려 한다. 그 방법은 더 이상의 번식을 중단하고 집단학살과 자살을 병행하여 인류 전체가 멸종에 이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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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埋葬』, 김사과, 현장비평가가 뽑은 2010 올해의 좋은 소설,  83p

  스물다섯 살의 화자가 자신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 종말론적 선언은 그대로 오늘의 청춘을 대변하는 현장의 목소리만 같다. 도무지 바뀌어 질 것 같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다음 세대를 위한 역할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니 얼마나 섬뜻한 외침인가. 이번 수상작을 읽고 다시 <매장埋葬>을 들쳐보았을 때 <매장埋葬>은 이 작품의 전야제 격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처절한 외침이 세상과 길거리와 회사와 가정을 뚫고 나와 마침내 자신마저 뚫고 나온 상태로 통제불능의 상황이 전개된 것이 이번 소설이었다.

  이 작품에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보이는 화자는 회사를 나와 평소 자주 들르는 국밥집 아주머니를 우발적으로 살해 한 후 연이어 그곳을 방문한 중학생을 살해하고 집에 돌아와 사소한 시비 끝에 아버지와 어머니마저 살해한다. 마지막 장면은 무심해보였던 누나와 대치하는 설정이었다. 윗 세대와 다음 세대를 제거하고 자신처럼 희망이 전무한 같은 세대, 누나에게만 분노를 표출하지 않은 것이다. 이른바 묻지마 범죄의 단적인 케이스였지만 누나는 동세대로서 작가가 그녀 스스로 세계를 끝낼 기회를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 모든 끔찍한 일을 자행하는 화자는 특별히 범죄에 노출될 환경에 살아오지 않았고 피해자 또한 살해당할 만한 개연성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슬프고 가슴아팠던 것은 바로 분노의 주인공이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열심히 살아왔으며 ‘해롭고, 더럽고, 불길한 정적으로부터’ 철저히 보호받으며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본 적이 없는 별 문제시 할 것이 없어 보이는 젊은이였다는 것이다. 작가 김사과의 나이를 보니 내가 중학생일 때 태어났다. 그녀가 주장하는 스물다섯의 세상에서 나는 불혹의 기성세대였다. 그녀와 나 사이의 십오년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비정상으로 병드는 시간이었을까. 그(화자)가 왜 은폐된 분노를 세대 간 단절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으로 표출하였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은 화자가 자타공인 이미 미래가 없는 불안한 청춘세대임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소설가 김사과로부터 설득되는 에너지 전환에의 가능성 때문일 터이다. 김사과의 세상 종말을 위한 세대적 소설혁명은 계속 될 것이고 그것은 여전히 미래가능성으로 치환될 확률이 많다. 분노한다는 것은 젊다는 것이다.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가 출신의 93세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고 저항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창조적인 행위라 말하였다. 문제는 에너지의 향방이다. 격분하여 희망을 놓쳐버리는 것은 역사를 퇴보시키는 만행일지 모른다. 분노로 한평생을 살아온 스테판 에셀은 답한다. 비폭력이란 ‘우선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일이고 그 다음에 타인의 폭력성향을 정복하는 일’이라고. 김사과의 분노의 에너지가 창조적인 저항(문학)을 통해 반드시 자기 자신과 타인은 물론, 우리 사는 이 어지러운 세상까지도 감싸안을 치유의 에너지로 발전될 그날을 기다린다.


#5. 황금빛 야화, 그 성장의 가능성........................................................................허공의 아이들 / 김성중

  작년 수상작 <개그맨>을 생각하면 이 작품은 장르의 전환에 이어 주제마저 심화, 확장된 느낌이 들었다. 공통으로 떠오른 키워드는 여전히 ‘상실’에 대한 기억, ‘소멸’에 대한 연민이었달까. <개그맨>이 스무살의 첫사랑이 어떻게 상실되는지 그 과정을 아련하게 포착한 비극적 희극이었다면 <허공의 아이들>은 아직 여물지 않은 소년, 소녀가 다가올 자신의 성장과 미래를 어떻게 예감하는지를 그려보는 동화 환타지였다. 이번엔 상실되고 소멸되는 것이 시간과 기억뿐 아니라 공간과 육체에까지 확대되었다. 그 대상도 성인이 아닌 성장하는 미성년으로서 그것은 잔인한 설정이었다. 과거의 상실보다 미래의 소멸이 더 뼈아픈 상처가 아닐까.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이 작가가 작가노트에서 자신은 여전히 ‘꿈의 바다를 헤매는 보트피플’이며 구조가 아닌 조난자로서 계속하여 표류를 원한다는 말이었다. 그가 바다위에 서 표류하며 깨달은 것이 소설의 결과라면 이번 조난은 작가에게 어떤 고통을 선물하였을까.

  야구 후보 선수인 소년과 피아노 건반을 치는 소녀. 다세대 주택과 타운하우스로 대변되는 이들에게 닥친 재앙은 집이 허공에 떠오르고 사람은 투명해져서 결국 사라지는 세상이었다. 앞선 수상작과 비교해보면 재난의 종류 면에서 <물속 골리앗>과 같은 계보에 속하며 서사의 표현 면에서 <여름>과 유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바람이 불고 땅이 무너지고 불이 나고 길이 없어지는 것은 어느 재난과 다르지 않았지만 그 결과로 집이 허공에 떠오른다는 설정은 무엇보다 흥미로왔다. 상상만으로도 내 존재가 이곳 세상과 멀어지는 느낌이었고 이들이 소멸되어도 천사가 되어 하늘로 승천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꿈처럼 연장하고 싶었다. 소녀는 자신의 아래에 위치한 타운하우스를 ‘허공의 금빛 무덤들’이라고 불렀는데 작가노트에 보니 태국에서 세에라자드의 꿈을 꾸고 이야기에 대한 환상을 품고 돌아온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은 천일야화의 연장선상에서 피어난 슬픈 동화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저 재미난 하룻밤 이야기가 아니라 보다 냉혹한 시선으로서 작가는 ‘사라지는 세계에서 성장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즉, 부모가 사라졌고 곧 이 세상도 붕괴될 것이 뻔한 상황에서 계속하여 키가 자라고 마음도 성숙해 지는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

  작가는 재난의 동반자였던 소녀가 사라진 후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 속에서도 단연 반짝이던 ‘뼈가 자라는 소리’를 소년 자신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것은 이제 곧 내 차례가 되었지만 계속하여 성장하고 있는 자신을 자각할 수 밖에 없는 생존자의 유일한 기쁨인가, 잔인한 슬픔인가. 어쩌면 이 소년의 유일한 생존방식은 성장이 아니었을까. 성장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생존도 불가능 한 것은 아니었을까. 인간은 어짜피 모든 성장을 다 하고서도 죽음을 맞이한다. 이는 바꿔 말하면 결국 소멸하려고 성장한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다만 성장하는 동안은 소멸이 목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의 소년이 자신의 성장을 인식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바로 내일 소멸할지라도 오늘을 죽도록 열심히 살게 하는 동력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성장이 가져올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인 것이다.


#6. 가질 수 없는 것들, 그 소유의 가능성 .....................................................................너의 변신 / 김이환


  이 작품은 이 책에서 가장 자극적, 충격적이었다. 처음에 말이 안 된다고 웃다가 나중에 울게 되는 이야기였다. 작가가 제시한 상황이 가장 미래적이었지만 전달하는 주제는 어느 작품보다 고전적이었달까. SF적 서사의 구조가 흡사 박민규 작가의 『더블』에 수록된 <깊>, <크로만, 운>, <굿모닝 존웨인>등의 작품을 떠올리게 했는데 절로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이 작품은 형식면에서도 단문으로 종합적인 구성을 시도하는 실험성이 돋보였다. 기억되기 쉬운 단어들이 산만해 보일 수 있는 텍스트의 요약처럼 강조되어 보였다. 소재면에서도 동성애 코드와 신체성형이라는 충분히 있을 법한 미래지향적 소재를 잘 믹스하여 인간존재의 근원적인 성찰과 사랑이라는 오래된 명제에 신선한 질문을 남겼다. 전개되는 양상은 세기말적이었지만 스토리의 신선함 때문에 가장 젊다고 느껴진 소설이었다. 그래서인지 가공된 소설의 마지막은 다른 작품들 보다 슬픔의 정도면에서 강렬하지는 않았다. 외려 기발한 아픔, 상상하는 고통, 보류된 슬픔, 불쾌한 고독과 같은 감정들이 복합되어 걱정스런 맘이 더 많아졌다고 할까. 이 작품에 등장하는 두 남자는 연인이고 한 명은 의학적 기술을 이용해 자신을 완벽하게 변신시키고자 한다. 시대적 배경은 ‘새로 개발된 이식뉴스’나 동물에 의해 ‘만들어낸 신체’, 혹은 개인의 기호대로 버려지는 신체, ‘얼굴을 바꿔 이식한 배우’등으로 이슈화 될 수 있으며 대중화된 신체 개조수술로 인간은 자신을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설계, 건축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목적이 의료이든 미용이든 결과는 환타스틱했다.

  이 소설에서 변신을 하는 남자는 결국 더 잘보이기 위한 상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독히도 사랑한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사랑(Amor)은 외부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사랑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을 계속 소유하고 유지하고자 한다. -에티카

  슬픔에 일가견이 있었던 스피노자는 나의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는 대상을 계속 소유하고 유지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기쁨이 슬픔이 되는 이유는 바로 변신을 꿈꾼 남자가 사랑한 대상이 자신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남자는 완벽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우리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형체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하나의 인격체로 기능하긴 하지만 살과 뼈와 피가 없이 오로지 오르가슴만 느끼는 인간의 새로운 버전. 그것이 전류가 흐르는 단백질 덩어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남자는 자신의 기쁨만을 유지하기 위해 사랑하는 자신을 소유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그의 변신은 긍정적인 변화인가 절망적인 변질인가. 이 작품은 물질만능, 외모중심의 한국사회가 성형천국이 되어버린 현실을 씁쓸히도 조롱하며 경고하는 준엄한 텍스트였다. 성형의 끝간데를 미련없이 보여주며 문학으로 미래도를 제시한 점은 이 작품의 가장 큰 성취이며 우리에게도 서늘한 교훈을 주기에 충분했음이다. 이 작품이 전하는 치명적인 가능성, 그것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심, 가지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쾌락, 바로 인간이 소유하는 인간에 대한 슬픔은 아니었을까.


#7. 놀이공원의 추억, 그 소통의 가능성.......................................................................정용준 / 떠떠떠, 떠


  이야기니까, 슬프고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만약 현실이라면 기구하고도 구슬픈 사연이 아닐 수 없는 소설이었다.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수록작인 <떠떠떠, 떠>가 약간의 신파성을 지닌 사랑을 지향한 것이 좋았다. 물론 에버랜드 같은 놀이공원이 그 배경인 것도 좋았다. 비록 주인공은 간질과 말더듬이라는 치명적인 장애를 가진 남녀였지만 사자와 곰의 탈을 쓴 캐릭터로서 분했던 것도 드라마틱하게 느껴졌다. 그들이 주고받던 사랑의 방식이 어쩐지 향수를 자극하는 매력을 지녔기 때문일까. 이들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각자 자신의 장애로 인해 이미 결정적인 수모와 모욕을 당한 공통의 경험을 지니고 있었고 같은 현장에 서로의 증인으로서 자리하기 까지한 운명적 인물들이었다. 장애와 상처의 공유는 이들이 이미 불완전한 공감에서 완전한 소통으로 발전될 필요조건을 함의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들 남녀의 공통점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 밖에 없었다’는데 있었다. 동물의 탈을 쓰고 잠시 인간이길 유보하는 것. 그런데 이들이 서로 사랑을 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 이전보다 많아진다. 작가는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사랑을 소통할 수 있는 상징적 장치로 서로의 ‘혀’를 주장했고 이들은 열심히 자신의 ‘혀’를 사용해 상대의 상처를 위로했다. 정확히 의사를 표현할 수 없고(말할 수 없는 입) 언제 어디서 거품을 물고 발작을 일으킬지(불치병에 걸린 입) 모르지만 이들의 ‘혀’는 각자의 한계를 뛰어 넘어 그 이상의 소통을 이루는 메신져로서 제 2의 아름다운 입이 된다. 그래서 제목으로 기재된 <떠떠떠, 떠>는 말을 더듬기 시작할 때 소리나는 표음인 ‘떠’의 분절음에서 시작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의 행복한 기분, 마치 비행기를 타듯 붕 ‘떠’ 있는 상태의 순간을 포착한 언어이면서 앞으로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소통하고자 하는 소망의 언어 모두를 담고 있는 복수의 타이틀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마치 벙어리와 장님이 소통하듯 세계를 놀라게 하는 사랑의 힘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 놀라운 힘은 결국 말더듬이의 입을 열게 하고 우리를 울게한다.

  그건 당사자는 행복해도 바라보는 자는 가슴아픈 명장면이다. 그들의 소통이 슬픈 건 아마도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노력이 담겨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을 보며 우리가 슬픈 건 혹 우리 자신의 소통방식때문은 아닐까. 예를 들면 곰의 탈을 쓴 여자가 발작을 일으켜 바닥에 누워 있을 때 사자의 탈을 쓴 남자는 사람들의 관심을 돌려보려 열심히 춤을 추는 그 애절한 마음, 그것처럼. 우린 그들의 방식이 눈물겨운 것이고 그렇지 못한 우리의 소통이 슬픈 것이리. 곰이나 사자의 탈을 쓰지 않고도, 그들보다 멀쩡한 인간이지만 곰이나 사자만큼의 노력도 아니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더 초라한 사람들 이기에.


  이제, 슬픈 노래들은 끝이 났다. 일곱 편의 이야기는 마치 애상곡의 모음집처럼 그렇게 절실하게 연주된 것이었다. 때론 진혼곡이 되어 누군가를 애도했고, 때론 소나타가 되어 계절을 연주했다. 때론 한밤의 야상곡으로 고독한 랩소디로, 보랏빛 환상곡 혹은 오렌지빛 세레나데로 그 슬픔을 처연히 축복했다. 마지막엔 무반주로 싱그러운 아카펠라음이 들려오듯 청명한 사람의 목소리도 기억에 남았다. 이들 모두가 한마음으로 노래한 건 슬프지만 그걸 알고서도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라는 누구보다 명징한 지속적 가능성이었다. 시련과 상처, 고통과 분노, 상실과 소멸을 안고서도 치유와 사랑, 성장과 소통의 가능성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은 젊음이 가진 특권이자 가장 소중한 의무일 것이다. 산다는 건 젊음으로 성장하고 그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그 어떤 가능성도 버리지 않는 눈물겨운 여정은 아닐까. 그렇다면 젊음의 완성이 곧 인생의 완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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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들은

 아침에 올 상반기 베스트 셀러 도서 목록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 참고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6/24/2011062402200.html
 ) 

아쉽게도 이곳, 알라딘의 통계는 반영되지 않은 결과였다. (4대 서점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음. 온라인으로는 들겠지만)

놀라웠다. 놀라워.  

가장 놀라웠던 건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제외하곤 올해 신간으로 50위 권에 든 한국소설은 김진명의 <고구려>와 정유정의 <7년의 밤>이 유일했다.(솔직히 김진명 작가 다시 보았다) 그외 가뭄에 콩나듯 <허수아비춤>, <덕혜옹주>등 작년에 베스트 셀러가 된 작품들이었고 100위 권에 최신작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가 의외로 느껴질 정도였다. 한국소설을 이렇게들 안읽으시다니... 대부분 소설은 일본, 미국 대중소설이었고 그 판매부수도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슬펐다.  

소설가가 되고 싶은 꿈이 참 어이없어 보였고, 새삼 고현정, 신정아, 백지연이 대단해 보였다. (정확히는 고현정의 피부, 신정아의 남자들, 백지연의 미모가 대단한 것이지만) 그렇게들 욕하더니 신정아 책의 판매부수를 보라. 우리는'정의'만큼 그녀가 궁금했던 것이다.  김제동의 책이 많이 팔린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대체로 유명해지고 볼 일이 아니던가. 그들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마케팅에 의해 한번도 화제성을 창출하지 못하고 먼지 날리고 있을 순수문학 작가들이 안스럽다는 말이다.  

어제, 문학동네 편집부장의 인터뷰를 보았는데, 김남일의 소설 <천재토끼 차상문>은 참 좋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나가지 않아 애를 태우고 있던 차에 하필 현빈이 시크릿 가든에서 한번 품에 안아주었더니 그 다음날로 하루에 이백권씩 나갔다는 말을 들었다. 김남일 작가가 위암으로 투병하고 있던 터라 그 소식이 너무 반가워 현빈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고 하셨다.  만약 현빈이 그 책 말고 다른 책을 가슴에 품었다면 그 책 또한 비슷한 운명이었으리라. 그렇다면 그건 현빈의 공이 아니고 현빈손에 그 책을 쥐어준 김은숙 작가의 공일 터인데, 앞으로 편집자들은 드라마 작가들과 연계를 하는 것이 어떠한가, 싶을 정도다.  

또 한가지, 작년에 이어 상반기 2위인 <정의를 무엇인가>는 끝까지 책을 읽는 사람이 없다고 하며, 그 책을 사는 이유는 정말 정의가 무엇인지 궁금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정의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사고보는 보상심리의 일환이며, 니가 사니 내가 산다식의 패션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1위인 <아프니까 청춘이다> 역시 저자인 김난도 교수가 다름아닌 서울대 교수인 것이 위로가 되었다고 하며, 이러저러한 분노를 치유하기 위해 스님 시리즈가 합이 십만부 이상 팔려나간 것이라고 한다. 이 틈에 한국소설이 위치할 곳은 그저 사람들이 많이 보았기에 나도 한번 보아야 할 것 같은 초대형 베스트 셀러 정도에 국한되며(3년째 엄마를 울궈먹고 있는 사람들은 독자인가, 출판사인가) 신간 같은 건 좀 두고 볼일로 미루어 지는, 확실히 괜찮다고 하는 사람이 생길 때까지 안 읽어도 큰 상관없는 책으로 전락한 듯하다.  

 

#2. 나는  

상반기에 내가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는 세어 보지 않았다. 그런 건 잘 안한다.
그런데 내 맘대로 내가 읽은 책 중에서 국내작가의 베스트를 뽑아 보고 싶었다. 
 (마치 그들의 리스트에 항거라도 하는 심정으로 ㅠ.ㅠ)


 

  

 

 

 

 

 

 

천운영의 <생강>이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주제가 너무 무겁기 때문인 것 같다. 또하나, 제목이 주제와 조금 동떨어져 보인다는
낯설음도 무시 못 할 것이다. 안타깝다. 정말 수작이었는데.
최인호의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칼날과 붓끝이 예리한 소설이다. 워낙 고정독자가 많아 초기 마케팅에 성공한 듯하다.
그러나 쉽지 않기 때문에 이도 오래 확산될 것 같지는 않다는 예감이 드는 건 뭘까. 연말까지 롱런하시길 빈다.
글쓰기 하는 분들은 꼭 최일남의 에세이를 한번씩 읽어 보셨음 싶다. 국어라는 언어의 위대함을 새삼 확인할수 있을 테니까
박숙희의 <아직 집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마치 문단에서 버려진 소설처럼 이 책을 읽었다는 분을 거의 보지 못했다. 재미도 괜찮고
문장도 매력있다. 대형출판사와 유명작가에 밀린 작품이라 안타깝다.


그밖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으로 서경식의 <언어의 감옥에서>와 시집<오늘 아침 단어>도 좋았다. 사실 시집은 올해 끝까지 독파한 적이 거의 없고 내 의지로 집어든 신간이 없지만, 만 하루 동안 정들었던 시집이라도 읽었다고 생색은 내고 싶다. 무엇보다 제목이 마음을 끌지 않는가. 물론, 오늘 아침 나의 단어는 '베스트 셀러'였음이다.   

<언어의 감옥에서>는 처음으로 논리의 아름다움이 눈물을 자아낼수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준 책이다. 이 책의 리뷰를 쓸 때 나는 살짝 설레기 까지 했고 다 쓰고 나서 무언가 내 논리의 틀을 깨부순 느낌이 들었다.

 

 

 

 

 

 

많은 책을 읽었던것 같은데,  

막상 꼽으려고 하니 기준도 애매하고, 주제넘는다는 생각도 든다. 또 내 독서의 취향이 무척 편향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걱정되는 건, 누군가는 저런 베스트 셀러의 목록을 확인하곤 그 안에 든 책을 또 의무방어전 치르듯 서점가서 집어 들 것이라는 것이다. 남들이 다 읽었다 하니 행여 뒤질세라 피곤한 심정으로. 그럼 알려진 책은 더 잘 팔리고 반대로 뜨지 못한 책은 더 묻혀지게 될 것이다.  

 

하여튼, 베스트 셀러의 소식은 언제나 우울하다.
언제쯤 베스트 소식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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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6-25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현빈이 아니라 김은숙 작가에게 고마워해야죠.
어떤 사람은 드라마에 특정 책이 클로업 되서 나오는 거 싫어하는 사람도 있던데,
난 아직 그게 나쁘게 생각되진 않아요.
그렇게해서라도 좋은 책이 알려지면 좋은 거 아닌가?
어떤 면에선 어쩔 수 없는 방법 중 하난 것 같기도 하고.

조경란 작가가 베껴쓰기 보다 좋은 책을 소리내서 읽어보라고 했는데
최일남 선생님 책 소리내서 읽어보기 하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잘 보고 갑니다.^^

한사람 2011-06-25 21:36   좋아요 0 | URL

그렇게라도 알려지면 좋죠
이번에 독고진이 뭐하나라도 터뜨려 줄줄 기대했는데..
그냥 시에 그치고 말았죠..따라하는 느낌이 들까봐 안그랬을수도 있고..
그래도 윤필주 정도는 책 한권 읽고 있어도 나쁘지 않았을텐데 ㅠ.ㅠ

베껴쓰기보다 읽어보라는 말씀이 새롭네요, 그러고보니
최일남 작가의 글을 소리내서 읽어볼 가치가 있는거 같아요
몰랐던 국어가 너무 많았어요^^

달사르 2011-06-25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생강>은 제 손에 있군요!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내용은 무언지 알기에 기대를 갖고 있는 책인데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군요. 아쉽네요..

음...저 시집이..자꾸 눈에 들어옵니다용~ ^^

한사람 2011-06-26 01:06   좋아요 0 | URL

요즘 시집들 중에는 <이별의 재구성>말고는 읽어본게 없어요
소설은 읽겠는데 저는 시가 어렵더라구요..
<오늘 아침 단어>는 제목때문에 생각을 좀 하게 되네요..
맘에 드는 시가 많습니다^^

cyrus 2011-06-26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어의 감옥에서>가 이전 책들보다는 크게 알져지지 않은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저 역시 이 책을 읽었을 때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들을 벗어날 수 있어서 좋았어요. ^^

한사람 2011-06-26 15:40   좋아요 0 | URL

앗, 시루스님 오랜만이어요^^
공부하느라 바쁘죠? 곧 방학이네요~

아마도 <언어의 감옥에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일동포에 대한 편견때문에
쉽게 집어들게 되지 않는 책인 것 같습니다..
평가단 말고는 읽어봤다는 사람 찾기가 힘든데 역시 시루스님이 안목있어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