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 3주간 주말에는 산문과 에세이를 읽었다. 그런데 그건 비단 지난 몇 주 만의 패턴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계기다) 아무래도 가족들과 함께 있는 주부로선 주말에 지긋이 앉아 나만의 독서 시간을 이어가기가 힘든 형편이다. 그렇다고 책을 멀리하기엔 서운하다보니 툭툭 이야기가 끊어져도 상관없는 에세이류를 집어 들게 된다. 리뷰에 부담이 없는 책을 찾게 된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에세이는 어떨 땐 다 읽는데 한 달이 걸리기도 한다. 어제 신달자 에세이 <여자를 위한 인생 10강>과 은희경 산문집 <생각의 일요일들>을 같이 덮었는데 리뷰를 따로 남기자니 작위적인 글이 될 듯하고 그냥 넘어가자니 허전하여 내 나름대로 비교형식의 페이퍼를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일었다.

   한 여름을 앞두고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비소설류이고 방식은 다르지만 내게 많은 위로가 되었던 글들이라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하고 싶다. 내겐 글을 정리하면서 마음을 정리하는 습관이 어느덧 지금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이 된 듯하다.

   편의상 <여자를 위한 인생 10강>은 ‘여자’, <생각의 일요일들>을 ‘생각’으로 불러야겠다. ‘여자’와 ‘생각’을 동시에 덮은 한 ‘여자의 생각’ 인 것이다. ‘여자’가 마흔 이상의 여성을 집중적으로 위로한다면 ‘생각’은 글 좀 쓴다는 어리지 않은 여성을 위로한다는 느낌이다. 순전 내 느낌이니 아니다, 이 책들은 나이, 성별과 상관이 없다는 분들은 아마 나보다 사고가 유연한 분들일 것이다. 경험상 마흔 이상의 글 좀 쓴다는, 글을 쓰고 싶은 여성이라면 이 두 권과 함께한 올 여름이 결코 아깝지는 않을 터이다.  

 

                                          
  


 

 

 

 

 

 

1. 고궁 VS 레스토랑

우선,

‘여자’를 덮고는 제일 먼저 고즈넉한 고궁에 가고 싶었다.
‘생각’을 덮고는 파스타와 와인이 멋스런 작은 레스토랑을 가고 싶었다.

   고궁에선 봄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개나리나 벚꽃이 피어난 상투적 장면 같은 분위기속에서 아무런 걱정없이 한나절 멍하니 벤치에 앉아만 있다가 오고 싶었다. 벤치에 앉아서 나는 어떠한 생각에 잠기고 싶을 터였다. 예를 들면 내가 어릴 때부터 집주소를 기억하던 그 모든 집, 나를 길러오고 내가 살아왔던 그 집들을 다시 찾아가 보고 싶었다. 그러면서 나는 부모님과 가장 오래 살았던 집이 생각나 잠시 사진첩을 뒤적거리기도 했는데 신기한건 부모님도 부모님이지만 그 집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집의 구조가 훤한데, 그 집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슬퍼지는 거였다.

   와인과 스파게티를 하다가 말아먹은 뼈아픈 기억이 있어 사실 언젠가부터 와인 하는 집은 가지 않아왔다. 원가를 알면 술을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을 읽는 내내 내가 좋아하는 페퍼잭 치즈와 진한 카베르네 쇼비뇽 한잔을 마시고 싶었다. 은희경 작가는 피노 누와를 좋아하시는 듯 한데 피노 누와는 여간해서 맛있는 브랜드가 드물다. 오랜만에 1865 까르미네르가 생각나는 거였다.


2. 합창 VS 가요

‘여자’를 넘길 때 남자의 자격 청춘의 합창단을 보며 뭉클했고
‘생각’을 넘길 때 불후의 명곡 재방송을 보았다.

   어르신들이 입을 벌려 노래를 하시는 모습은 왜 이리 찡하고 감동적인 것일까. 그들의 눈빛과 입모양에서 미처 못다 이룬 꿈의 계절을 엿본다. 그리곤 다시 꿈이 있었던 그 시절의 간절함을 느낀다. ‘여자’는 여자들의 못다 이룬 꿈을 들추어 낸다. 신달자님이 여성으로서 모진 풍파를 겪고 여기까지 오신 분이기에 목소리는 늘 큰 언니같고, 이모같고, 선생님 같고, 엄마같다. 그런 당신의 마음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시큰하다. 왜 참고 있다가 눈물이 한방울 나올 때 누군가가 울지 말라고 안아주면 더 크게 울음이 터져버리는 것 같은.

   <소년을 위로해줘>가 힙합 소년의 이야기인데 나는 책에서 아무리 힙합론을 주장해도 그냥 내가 그 시절 좋아했던 가요만이 생각난다. 이를 테면, ‘너를 처음 만난 날 소리 없이 밤새 눈은 내리고~’ 혹은 ‘혼자만의 사랑은 슬퍼지는 거라 말하지 말아요~’같은 가사가 입을 맴돈다. ‘생각’이 아무래도 <소년을 위로해줘>를 만나고 그에 빠졌을때를 떠올리게 하는 거였다.


3. 삼겹살 VS 아이스크림

‘여자’의 몇몇 중간에 삼겹살과 소주가 생각났고 잘 차려진 한정식의 밥상이 생각났다.
‘생각’의 몇몇 중간에 핑크빛 샴페인, 잭 다니엘(콜라탄)이 그리웠다.
달달한 아이스크림, 진한 초코렛도 먹고 싶어졌었다. 필라델피아 치즈케잌도.

   여름이라 반찬하는 것이 아주 고역이다. 불 앞에서 불쾌감은 물론이고 요리하면서 이미 식욕이 떨어지기 일쑤다. 복숭아, 포도, 수박같은 여름과일과 미숫가루, 토마토 주스로 식사를 때울 때도 있고 비빔면 같은 인스턴트 식품으로 요리시간 자체를 줄이기도 한다. 그러다 갑자기 잡채, 굴비, 불고기 같은 밥반찬이 그리워 실제로 어느 비 억수로 쏟아지는 날 나는 잘 아는 한정식 집을 부러 찾아간 적도 있다. 밥먹고 나올 때도 비는 그치지 않았고 나는 선글라스를 낀 채로 운전을 했다. 빗속, 밤속을 뚫으며 내 입에서 나지막히, 나도 모르게 터져나온 한마디. 엄마... 내가 엄마를 불러본지도 어언 삼년이 지나 4년이 되가고 있었다.

   어느 일요일 외제 식품 사이트에서 구입한 초코렛류의 과자, 쿠키, 음료수를 풀어놓고 우리끼리 초코렛 파티를 했다. 먹다가 너무 달아서 콜라를 마셨고 갑자기 매운 맛이 당겨 떡볶이를 급하게 사다 먹었다. 이 모든 것은 그녀들의 에세이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들이 나로 하여금 패배감을 안겨준 건 처절한 다이어트, 체중조절의 불가능이었다. 많은 먹을 것들이 생각나 그걸 먹고 싶게 하는 책. 그러므로 책들은 본능을 자극하는 욕망의 메시지가 숨어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밖에, 
 

‘여자’가 강연의 형식을 빌린 면담이라면
‘생각’은 독백을 가장한 편지.

‘여자’는 어머니라는 여성이
‘생각’은 여자로서 친구가 떠올랐다

‘여자’는 재래시장에 가고 싶었고
‘생각’은 대형 쇼핑몰에 가고 싶었다

‘여자’는 여성이기에 외로움을
‘생각’은 글을 쓰기에 고독함을 달래주었다.

‘여자’는 다시 일어나라 어깨를 두드려 주었고
‘생각’은 잠시 누워라 발목을 잡았다.

‘여자’는 지혜가 삶의 지구력이라 말씀하셨고
‘생각’은 지성이 개인의 우주력이 될 수 있다 말해주었다.

‘여자’는 트로트가 바뀌어진 발라드 노래, 예를 들면 백지영이 부르는 ‘무시로’를 다시 듣고 싶었고
‘생각’은 록의 재즈버전, 그러니까 박정현이 부르는 ‘그것만이 내 세상’을 자꾸 듣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여자’는 여자로 산다는 것의 고민을
‘생각’은 소설가로 산다는 것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었다.

‘여자’는 안성기
‘생각’은 박해일
둘 다 장동건, 이병헌은 생각나지 않았다.

다음은,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문장이다.

   
 
- 우리가 익혀야 할 최고의 기술은 자기를 있는 힘을 다해 살게 하는 기술일 것이다.   -<여자를 위한 인생 10강>

- 자기 자신의 문제를 소설 속에다 적나라하게 고발해놓고 현실에서는 결코 고치지 않는 사람들이 소설가가
  아닐까
.   -<생각의 일요일들>
 
   


 나를 있는 힘을 다해 살게 하는 기술이란 무엇일까. 그게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다는 것에 고개를 숙인다.
 혹시 리뷰쓰는 자는 그 책의 장단점을 리뷰에 적나라하게 고발해놓고 현실로 돌아오면 바로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아닐까.

연휴가 끝나고 있다.  예전에 소원했던 사람과 좀 오래 대화를 했다.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웃기게도 이 나라, 우리 사회, 정치인, 스티브 잡스, 우리 교육, 김연아, 이외수, 베스트셀러, 워터파크, 기후, 과일 물가, 추석, 가을까지... 그냥 대충 머리에 떠도는 잡담을 오래 나누었더니 꽤 진지한 성찬이 된 느낌이다.  

결론은 사는게 억울하다고 징징대지 말자는 말을 하고 헤어졌다. 우리 모두는 다 각자가 억울하니 그걸 내세우지 말자는 누군가 내 억울함을 특별히 달래주길 바라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실은 서로의 억울함을 달래주었던 건 아닐까..싶다만.

하루종일 매미가 울었다. 그런 소리 딱 일년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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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1-08-16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지 않아도 책의 핵심을 잘 짚어낼 수 있는 리뷰네요. ^^
스포일러가 아닌데도 왠지 이 책들을 읽는다면 데자뷰처럼 기시감이 가득 들 것 같은데요.
신선함보다는 그들의 중년이 품고 있는 모습이 번연히 리뷰에 담겨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좋은 글 많이 써 주시고 더운 여름 잘 나시길...
포도주 이름은 봐도 그게 그거 같더라구요. ㅠㅜ

한사람 2011-08-16 01:11   좋아요 0 | URL

히, 안녕하세요, 글샘님 ~
앞으로 이런 식으로 그냥 편한대로 두권을 가지고 비교를 해볼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재미나다 해주셔서 마구 용기를 얻고 있어요 ㅋㅋ

여름이 길거 같아요. 폭염은 아니더라도 끈기있게 더위와 싸워야 할거 같네요
여름엔 와인이 별로 안어울리긴 한데,
시원한 스파클링의 로제 와인 한잔에 냉동 치즈 케잌을 같이 하고 싶네요~

글샘님도 더위에 지치지 마시구요^^

2011-08-16 1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6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6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6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11-08-16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혼 여자였을 때의 전 과일을 정말 좋아했어요. 그런데 기혼 여자인 지금... 옆지기나 애들이 달라고 하지 않으면 제가 먼저 과일을 먹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특히 작은애 임신했을 때까지만 해도 환장하고 먹던 복숭아를 이제는 무척 기피하는데, 며칠전 그 이유를 깨달았어요. 분리수거하기 까다롭고 벌레가 많이 꼬이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제가 기피하고 있었던 거죠... 주부의 비애가 입맛까지 바꾸나봐요.

한사람 2011-08-16 12:5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조선인님~

저두..수박 껍질, 포도껍질 모아서 버리는게 젤루 싫어요.
조금만 지나면 날파리 꼬이고 냄새나고..나가기는 싫고 ㅠ
지난번에는 아이가 자두를 먹다가 남겨서 그걸 먹었는데
하필 그 베어문 부위에 하얀벌레가 나오는거여요 흑..

제가 어렸을때 엄마가 복숭아 깡탱이만 드셨는데
이제 저도 그러고 있더라구요...
복숭아도 얼마나 비싼지..저는 수박이랑, 포도랑 복숭아를 주식으로 먹는 이유가
그게 밥보다 비싸서 ㅋㅋ 그런 이유도 있어요

에구..벌써 또 아이 점심 줄 시간이네요 으허헉..

보물선 2011-08-16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나두 저 두권이 침대 머리맡에 있군.
근데 난,마흔은 넘었는데 글좀 쓰는 여자는 아니야.
나는 그냥 글 좀 읽기만 하는 여자로 해줘~ㅋㅋ

한사람 2011-08-16 17:06   좋아요 0 | URL

그렇지, 글좀 엄청 읽지 ㅋㅋㅋㅋ
에세이, 산문은 이상하게 쉬워도 진도가 안나가~~

그 두권을 덮은게 이렇게 속 시원할줄 몰랐어!

cyrus 2011-08-16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남격합창단은 재방용으로 보는 편이에요. 남격이랑 나가수랑 편성시간대가 같더군요 ^^;;

한사람 2011-08-16 22:50   좋아요 0 | URL

아~
저는 사실 런닝맨을 봐요 ㅋㅋ
남격은 저도 재방송으로 자주 보고요

불후의 명곡도 뒷부분에서 무도로 턴하다 보니..
재방송으로 보네요, 결론은 거의 주말을 예능으로 사네요 ㅋㅋㅋ

마녀고양이 2011-08-17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비판하고 고치지 않는.... 음, 찔리는군요. ^^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행동과 이상을 일치시키기 어려워 혼란스럽습니다. 강남좌파처럼요.

그나저나... 곧 추석이군요. 아이고, 돈 없는뎅. 아하하.

한사람 2011-08-17 09:1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이번 산문집이 소설을 쓰는 동안 같이 이루어진 작업이라 그런지
유난히 소설쓰는 작가의 이기심, 불안감, 고독함 같은 정서가 가득하더라구요

강남좌파의 교훈이 행동과 이상의 불일치군요 ㅋㅋ
저도 그 책이 궁금한데 평가단으로 선정될 확률이 있어서..잠시 미루어 두었거든요
요즘 참 정치인 책이 봇물터지듯 쏟아지는 것 같아요


오늘 아침은 어제아침보다 서늘하네요..
추석이 지나면 금새 연말이 되던데.. 올 추석상에는 과일하나, 생선 한마리가 엄청 부담이네요
예전에 엄마가 제사지낼때 평소에 보지 못하던 아주 좋은 품종의 과일만 사오셨어요
그런데 이제 그런 식으로 차례지내려면 거덜나게 생겼습니다

모두가 추석을 앞두고 우울해지지 말아야 하는데..

힘냅시다!!!
 

 


#1. 물타기이즘


   나이가 드니까 자꾸 어떤 사안에 협상을 하려드는 성향이 짙어진다.

   좋게 말하면 양쪽 모두 이해하려는 심정이 많아지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 속내를 감추는 것이다. 속으로는 이미 내부 판단을 마쳤으면서 바깥으로는 남들이 원하는 말을 하거나 그들사이 중간 어딘가에 맞추어 적당히 넘어가려는 것이다. 상대가 틀렸다고 지적하는 것이 부담스러우므로 나를 틀렸다 지적하는 사람들도 잘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어떤 논란이 일게 되면 뒷짐지고 돌아가는 추이를 살펴보고 평화로운 결론을 내비친다든가 아니면 아예 침묵하는 것으로 외면한다. 나이가 들면 더 이상 솔직한 것이 자신의 경쟁력이 되지 않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감추고 돌리고 넘어가는 것이 가시적인 평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물론, 나라고 아니라 말 못할 것 같다. 그러다가 주기적으로 한번씩 옷을 벗을 때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벗은 나를 그다지 반기는 것 같지는 않다. 남들이 판단하는 내 가치는 남들의 것이라 늘 책에서 확인해왔으면서 나는 그렇다고 내가 말하는 내가 전부인 것은 아니라고 아무도 그렇게 믿지는 않을 거라고 우겨댄다. 어렸을때부터 나는 입바른 소리를 하는 쪽에 속했는데 이것도 마흔 넘으니 슬슬 물타기를 하고 싶다. 그런 팔자가 정말 삶의 행복에 도움을 주는 것인지 경험상 피곤하다 쪽에 무게를 두면서 생긴 현상이다.  


#2. 공정하니즘

   모 출판사는 최근 리뷰대회 공정성의 문제가 화두가 된 적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당해 수상을 많이 한 자는 리뷰대회에 수상토록 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들의 초안이다. 신규 참가자에 더욱 수상기회를 부여하겠다는 전략이다. 여기서 리뷰대회의 본질은 리뷰쓰기 장려가 아니라 출판 장려라는 마케팅 행사임을 파악할 수 있다. 상타는 놈이 그놈이 그놈이니 출판사로서는 메리트가 없는 장사인 것이다. 리뷰대회가 소위 일부 글좀 쓴다하는 서평자들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긴 하다. 그동안 주로 상타는 놈쪽에 속했던 나로선 썩 기분이 좋은 건 아니지만 불공정한 처사라 대놓고 말하긴 거시기한 사안이다. 아마 나처럼 그동안 리뷰대회를 습관적으로 혹은 목적적으로 참여해온 분들이라면(더군다나 수상도 여러번 한 경험이 있다하면) 마치 덜 익은 단감을 한입 베어문 기분일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나는 공정성의 문제가 제기 되었을 당시 이미 그 출판사의 리뷰대회는 참여하지 않기로 작정을 하긴 했었다. 가진 건 없어도 자존심 하나로 살아온 인생이므로, 그동안 많이 해먹었으므로, 또 하필 그때 (재수없게)수상까지 한 죄인인지라 더 이상 뭐라도 써내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앞으로 황석영, 김훈 작가같이 대회와 상관없어도 내가 읽고 싶고, 이미 읽었고 또 기록으로라도 리뷰를 남기고 싶은 작품이라면 리뷰대회 기간이 지나고 난후 아니면 대회규정과 다르게 올려놓자, 이런 생각까지 했었다. 물론 그렇게 까지 내 자신을 정당화하고 나서도 기분은 드러웠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내 돈 내고 책 사서 내가 읽었다고 내 마음으로 남겨놓는 리뷰까지 리뷰대회 눈치를 보며 숨어서 글을 올려야 하나, 내가 죄인도 아닌데 이게 뭔 짓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까놓고 얘기해 대회와 상관없이도 진심으로 적어놓은 내 몇 줄의 글을 읽고 내 이웃님들이 그 책을 여러 권 샀다고 하면 그 출판사는 누구 덕을 본 것인가. 이런 치졸한 보상심리까지 생겼지만 나는 안그런 척 했다. 나는 마이너고 그쪽은 메이저 니까. 혹시 내가 같은 메이저가 되는 불상사가 일어났을때를 위해 아니 그냥 더 이상 마이너로서 자존심 세우는게 쪽팔려 왼쪽 가슴에 묻어버렸다.(우연의 일치인지 그동안 빈번한 수상자로서 활동해온 사람들은 (앞에선)모조리 침묵했다)

   그런데 글 좀 쓰고 늘 책 좀 읽고 또 매번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공정성을 위해 수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면 그런게 공정성이라면 적어도 이곳 알라딘은 엄청나게 불공정한 방식이 된다. 알라딘이 선정하는 이달의 당선작, 내가 보기에 선정되는 사람들은 늘 되는 사람쪽에 속한다고 믿기에. 우선 나만해도 그러니까. 다시 말해 되는 사람은 누구의 범주인가. 인기서재라 검증된 자, 서재 메인에 자주 노출되는 자, 리뷰대회에 빈번하게 수상되는 자. 꼭 알라딘은 아니더라도 어느 한 곳의 파워블로거 혹은 파워북로거로 활동하는 자, 쌩쓰투를 많이 받는 자, 서재질을 꾸준히 성실하게(?) 하는 자. (물론 이들이 서재질을 대충하는 사람들보다 글을 잘쓰고 더 유익한 글을 쓸 확률은 높다) 즉 자주 보아온 사람들이 자주 타는 것 아닌가 말이다. 충성고객을 우대한다는 측면도 있고 지난 한달간의 활발한 활동을 위로한다는 의미도 있다. (그 적립금으로 뭘 하겠나. 다시 이곳에서 책을 사보지 않겠나) 또, 특별히 당선작의 리뷰가 안당선작의 리뷰보다 월등하게 잘썼다고 여기지 않는 바이다. 그렇다면 이 기준은 앞서 말한 출판사로 보면 불공정한 처사가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나같이 (1년 이상 활동하고)이달의 당선작에 늘 선정되는 자에겐 공정하고 (초보 활동자로서)힘들여 썼지만 그냥 거시한 이유로 선정되지 않은 자에겐 불공정한 방식이다. 옆동네 서점은 알라딘과 달리 매주 신규 회원 위주로 당선작을 선정하고 심지어 기존에 한번 수상한 사람은 육개월내 같은 상을 주지 않는다는 규정도 있다고 들었다.(물론 충성회원들은 다른 자체 대회에서 골고루 상을 나눠주기는 한다만) 신규 회원확보 차원에서 미끼를 던지는 것이 사내 방향이니 뭐라 할 수는 없다. (그런면에서 알라딘은 그나마 덜 상업적인 것인가)

 

#3. 알라디니즘


   누가 옳고 그른가를 따지자는 건 아니다.
   어떤 공정성이 적절한지 묻고 싶지 않다.

   다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정성은 철저하게 공정을 운영하는 쪽의 몫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우리가 배워온 기회의 분배, 심사의 공정, 능력위주의 평가 이런 것들은 우선되는 가치는 아니라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회사의 운영방향 아래에 놓이는 부수적인 것들이라는 것.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 불공정하다. 누구나 불공정하다는 것만이 유일한 공정함이다.

   나이들면 이 만연한 불공정한 세상사와 매사 부딪혀가며 내가 맞네 우기고 싶지가 않다. (나만 해도 저기서의 공정성에 피해를 봤지만 여기서의 공정성에 혜택을 입지 않는가)

   알라딘이 그나마 마음에 드는 건 아직은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의도적이건 계략적이건 아니면 습관적이건 어떠한 문제를 자기 시각으로 통찰하여 의견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어제 트윗에서 어떤 모르는 분이 남들이 지지하는 사람과 그 지지자는 잘도 비난하면서 왜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은 숨기고 밝히지 않는지 그것이 비겁하다는 글을 보았다. 뜨끔했다. 내가 숨기고 말하지 않아 와서 잘 아는데 다 나이들고 솔직하기 싫어서 그런 것이다.

   오늘은 내가 그동안 그렇게 줄기차게 부르짖어온 위선과 속물정신이 내 경쟁력이 된 것에 욕하지 않고 위로를 하고 싶다. 늘 착한척 위하는 척 좋은 척 하다보면 혹시 누가 아나. 정말 착해지고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될지. 웃을 일이 있어서 웃는 게 아니고 웃으면 웃을 일이 생긴다고 하니 그냥 난 계속 위선하련다. 자기 학대나 파괴로 윤리성을 회복하려는 글 쓰는 자들을 종종 보는데 그러고 싶지 않다. 일단 내 위선을 인정해야 상대의 위선을 인정해줄 수 있다. 상대가 위선인지 알아볼 수 있는 건 자기 역시 위선적이기 때문임을 명심하자.




 

배명훈. 개인적으로 작년에 읽은 단편집 중에 기억나는 <안녕, 인공존재>의 작가. 문학적인 스킬 보다는 일단 이야기의 소재면에서 타의 추종 불허. 상상력이 우주적이라는 것에 절대공감하는 작가이다. 씹기에도 딱 좋은 소설을 쓴다. <육식이야기>의 베르나르 키리니라는 벨기에 작가와 견줄 수 있는 유일한 기대주다.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인생>이 논란속에서도 어찌 됬건 7만부를 넘었다고 들었다. 엊그제 조선일보 명사 칼럼에서도 이 책을 휴가지에서 읽었다고 젊은 사람들과 대화하려면 이런 소설을 읽으라는 글을 보았다. 화제성과 파워면에선 김애란 보다 떨어지지만 출판사로선 선방할 수 있는 작품인 듯하다.

   그리고 참고로, 이런게 위선이라는 말씀이다. 한번은 비판하고 또 한번은 띄워주고. 니고시에이터, 파워브로커로서 위의 글하고 이 책하고 끼워맞추듯 작위적으로 글을 편집하는 행위. 페이퍼의 제목을 보시라. (문장이라도 두어줄 옮겨다 놓고 싶었는데 아직 밑줄긋기 문장도 소개안된 어제부로 넘어온 소식이란다. 그런 면에서 나는 얼마나 출판사에 도움이 되는 위선자란 말인가 ㅠ)

   첨부터 계획한건 아니었지만 쓰다보니 이리되었다. 하도 적립금 행사를 홍보하길래 어쩔 수 없었다. (여기저기 둘러보아도 예판 적립금은 알라딘이 제일 많다. 이유가 뭘까 ㅠ) 그리고 주말이 되면 신간에 괜히 기웃거리게 되는데 내 생각에... 이것도 영화처럼 개봉날짜를 조율하는 건가, 뭐 이런 앞서가는 생각도 든다. 암튼, 알라딘에서 먼저 홍보하길래 카페에 왜 소식이 늦는거냐 질타를 한 쪽이라 오후에 전 온라인이 <신의 궤도>인 것이 괜히 찔렸다. 말만해놓고 책은 안사보는 웃긴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 정도?(당연히 이달의 당선작 알사탕으로 ㅋ)  그것이 내 위선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이 되겠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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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8-12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하나는 내가 했어요.ㅋ
솔직히 알라딘도 집계를 어떻게 내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물론 열심인 서재인이 당선작을 내는 것 같긴한데
나는 당선작과 그다지 많이 인연이 없는 것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아닌 것 같고.
추천 많이 받았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많이 못 받았다고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나의 경우는 그나마 추천을 많이 받아야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별것도 아닌 페이퍼에 추천도 받고 당선작도 되고 하는 것 보면 확실히 제 기준은 아닌 것 같긴해요.

더구나 동시다발 당선작. 난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이해가 잘 안되고 있어요.
이게 장려금이 낮았을 땐 그냥 진짜 장려금이려니 하고 알라딘 나름 인정있어 좋다. 했는데
당선작을 줄이면서 장려금을 높여 글의 퀄리티를 높이겠다 이러고 나오니 나 같은 경우 상대적으로
열등감이 화악 느껴지더군요. 특히 영화 리뷰에서 당선작을 못내고 있어요.
그럼 그전까지 썼던 건 뭐지? 그나마 바뀌기 전엔 한달이면 당선작은 20편 정도 뽑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바뀌고나서 10편만 뽑잖아요.
써 봤자 되지도 않는 거 써서 뭐하나 싶다가도, 어떤 영화는 정말 너무 괜찮아서 알리고픈 마음에 열심히 쓰긴 씁니다만, 쓰고나서도 기분이 참 찝찝하더군요.
장려금은 그냥 장려금일뿐이예요. 다음에도 좋은 글 쓰라는 뜻의.
그런데 알라딘 그렇게 퀄리티 따져 뭐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무슨 리뷰집내서 책 팔아 먹을 일 있습니까? 잘 쓰는 리뷰어들 영화 평론가 만들어 줄 일있습니까?
정책 바뀔 때 당선작만 줄였다뿐 총 금액은 똑같다고 하는데 그게 더 우습다는 거 지금쯤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하는 건, 오히려 축하금이 낮고 당선편수가 많았을 땐 나름 알라디너들끼리도 분위기는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책이 바뀌고 나서 알라딘도 분위기가 예전 같지가 않다는 겁니다. 그것도 알라딘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솔직히 저만해도 알라딘에 글을 남기는 건 습관일뿐 어떤 애정이 있어 남기는 건 아닙니다. 물론 권태로울 때도 되긴했죠. 하지만 꼭 저의 권태로만 미루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아요.ㅠ

stella.K 2011-08-12 19:15   좋아요 0 | URL
저도 그동안 입바른 소리해서 소원해진 알라디너들이 몇있습니다. 제가 뭐 그들을 향해 돌을 던진 것도 아닌데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더군요.ㅠ

한사람 2011-08-13 12:18   좋아요 0 | URL

으앙~ 덧글을 길게 쓰다가 날렸어요 흑흑.

제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사실 알라딘의 공정성을 화두로 걸고 공론화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잘 받아 먹으면서 공정한가, 이러면 웃기잖아요 ㅋ)공정성이라는 게 자본을 가지고 공정을 운영하는 측이 정하는 문제라 거기에 상처받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난 나름의 방어기제로 위선하겠다..뭐 이런 글이었는데 ㅠ.ㅠ

그래도 이렇게 솔직하게 의사를 내비치는 분은 스텔라님이 거의 유일하신거 같습니다^^

일단, 제 생각에 옆동네처럼 이 주가 아닌 이 달이다보니 아무래도 한 번에 눈에 더 띄게 되고
안 되었을때 상실감이 클 거 같습니다. 혹자들은 그까짓거 알사탕 받아도 그만, 안받아도 그만..
상주면 받고 안주면 안받으면 되는건데 뭘 목을 메나..하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매번 받는 제 입장에서도)이곳에서 열심히 활동을 한다고 스스로 생각해온 분들이라면
그것 또한 위선이라 생각합니다.

열심히 글써오지 않았더라도 우연이라도 한번 받아본 다음엔 조금 생각이 달라지게 되있지요.
평소에 그런거 신경안쓴다 하면서 이곳의 이주에 볼만한 영화? 에 지원해놓고 떨어지니까 지우는 사람도 봤습니다.

그리고 저는 영화리뷰는 잘 안써봐서(두어편?) 그쪽은 잘 신경을 안써왔는데
그러고보니 스텔라님은 영화리뷰도 책 리뷰 못지 않게 써오셨던거 같습니다. ㅋ
간혹가다가 좀 지났지만 많이 알리려고 싶은 마음이었단 뜻을 내비친 기억이 나네요ㅠ 이제야 속상한 맘을 알거 같아요..

또, 저는 스텔라님만큼 활동을 오래 안해서 그런지 당선편수와 알라디너끼리의 분위기같은건
생각도 못한 회원이네요 ㅋ 저는 부러 찾아가서 축하인사하는게 쑥쓰럽더라구요. 아시다시피 제가 글 남기는 이웃은 거의 정해져 있어서 ㅋㅋ 그분들이 상타면 그냥 덩달아 좋은 정도라 생각했습니다..




한사람 2011-08-13 12:50   좋아요 0 | URL

그리고..입바른 소리해서 사이가 멀어지는건..온라인의 한계인거 같습니다

민감한 사안에 관한 글을 쓸땐, 특정인이 아닌 불특정 다수를 예로 들때도 있고..
또 스쳐지나가다 보아온 사람의 예를 들때도 있는데
(그 사람과 안좋은 사이라서 그런게 아니었지만)

그러다보면 그 글을 읽는 사람은 마치 자신을 지적하는 것 같고
나를 비난의 소재로 썼다는 느낌을 받고..
그런걸 일일이 확인하는 건 유치하므로 그냥 쌓아두게만 되는거 같습니다
(저도 양쪽의 일에 다 걸쳐본 사람이라..ㅠ.ㅠ)

얼굴보고 차한잔하면 금방 오해가 풀릴 일 일인데
여기선 오로지 글로만 만나니..
이해와 오해. 실망과 감사를 늘 넘나들며 사는거 같네요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를 존중해주는 문화가 되도록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수밖에 없는듯 합니다
(어떨땐 가해자도 반대로 피해자도 될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죠..)

cyrus 2011-08-12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스텔라님 말씀처럼 선정 부분에 대해서 궁금하기도 합니다. 한사람님이 언급하신 모 출판사 이벤트 사건이
단순 특정 출판사에만 국한되는 사건만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결국 선정 과정에 대한 궁금중이
계속 축적하게 되면 선정의 공정성에 대해서 운운할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그만큼 잠잠하던 문제가 갑작스레
터진다면 알라딘 회사뿐만 아니라 괜히 선정되신 분들에게도 피해를 면치 못하게 될 겁니다. 한사람님이
제기하신 부분은 한번쯤은 공론화해보는 것도 좋을듯해요 ^^

한사람 2011-08-13 12:33   좋아요 0 | URL

제가 볼때 알라딘의 이달의 당선작에는 (타사와 비교해)적어도 글을 못쓰는 분들은 당선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분량이나 밀도, 문장력, 시의성, 화제성, 신간과 구간의 비율등등 여러가지를 고려해봐도
안될 사람이 되는 시스템은 아니라 믿습니다.

만약, 문제 제기를 할수 있다면 스텔라님이 언급하셨던 것 처럼,

안그래도 적어진 당월 당선작 편 수에 분야별로 중복수상하는 것(이부분은 또 제가 괜히 이번에 중복수상하신 시루스님이나 기존에 중복수상 한적있는 분들에게 불쾌감을 드릴까봐 염려스럽습니다. 사실은 저도 중복수상한 적이 있어서..할말은 없습니다. 그냥 주시니까 계탔다는 심정이었죠 ㅋ 제가 여러개 탔으니까 다른 열심히 한분이 못탔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ㅠ.ㅠ 또, 나누어 주기 식이 아니라 잘쓰는 사람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는 시스템이라면 이것이 더 공정한 것이다..그런 생각도 하거든요)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수상의 선정기준은 밝혀봤자 서로에게 크게 도움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짜피 이곳의 공정시스템은 무슨 문학상처럼 순수 글쓰기 능력을 장려하는 차원이 아니고
상업적인 출판 문화를 내세우는 곳이니..까요..그리고 우리는 그걸 수용한 입장이니까. ㅠ


가연 2011-08-13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딱히 못느꼈는데... 저같은 사람도 당선되는 걸로 봐서는 상당히 공정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ㅎ;; 다른 곳에서 리뷰를 본격적으로 쓴 적도 없고 서재활동도 거의 못하고 서재 시작한지 세 달 정도에 이번에 뽑힌 글은 이 책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라는 내용의 글이라서 당선이고 뭐고 아무런 기대도 안하고 있었는데... 사실 어떻게 선정이 이루어지는 것인지 참 궁금하기는 하지만... 굳이 알고 싶지는 않네요; 만약에 기준을 알게 되면 앞으로 쓰는 글들이 겉으로는 안그렇다고 해도 속으로는 내심 기준맞추어 쓰려고 할 것 같아서... 처음에 뽑혔을때는 솔직히 고백하건데 조금 으쓱했지만 지금은 되면 되는 거구... 안되도 내가 열심히 썼으면 내 글에 자추한번 날려주고 씩 웃으면 되는 거니까

한사람 2011-08-13 12:59   좋아요 0 | URL

가연님같은 숨은 실력자가 당선작을 내는 건 정말 공정한 일입니다 !
주례사 비평만 선정한다면 그건 알라딘 스럽지 못하구요 ㅋ

주제넘지만..제가 볼때 가연님은 인문분야 서평을 자신만의 시각, 색깔로 독특한 문체를 유지하면서도
책에 대한 장단점을 아주 쉽게 써주시는 분입니다. 인문쪽 서평을 어렵게 쓰는건 외려 더 쉽다고 봅니다. 많이 알아야 쉽게 표현할수 있죠. 저 역시 제가 쓰기 전에 혹시 가연님이 먼저 쓰셨다면
꼭 읽어보는 정말 드문(?) 분입니다.

저도 옛날에 당선작을 고르는 일을 한적이 있는데..
그때 배운건 일등은 절대성, 완성도의 문제가 아니라 참가한 작품 중에서의 일등할만한 이유에 적합한
작을 선정하는 일이라는 것이었어요.
또 심사기준 같은게 미리 정해져도 늘 예외는 있습니다.
일부러 예외작품이나 기존법칙에 해당되는 작품을 조율하기도 하구요..
순전 공정의 법칙과 시스템을 운영하는 쪽의 몫이죠.

그런 모든걸 저 역시 세세히 알고 싶지도 않고..아는게 큰 도움이 안된다는 것에 동감은 합니다..
지금은 어쨌든 제쪽이 무언가 내는 쪽이니까요
제가 파악한 것은 알라딘은 신규회원보다는 기존 충성회원을 더 존중해주는 편이다, 입니다.
(저는 사실 그게 맘에 들어서 이곳에 있는 것일지 모르구요)

사실 출판사들은 거의 전적으로 기존회원보다 신규회원에 열렬한 환영을 표시하고
기존회원은 특별히 신경 안쓰는 쪽이라 할수 있죠 ㅠ
출판사나 온라인 서점이나 그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활동을 꾸준히 해온 사람들,
즉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들이 언제나 문제를 제기하고 그로써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또 제가 말하고 싶었던건 각기 다른 공정성으로 인해 어떨땐 피해를, 어떨땐 혜택을 받는 것이
세상이니 그것에 연연해하지 말고..나대로 살겠다..뭐 이런 이야기 였습니다 ㅋ

가연 2011-08-16 20:49   좋아요 0 | URL
으아..ㅠㅠ 너무 부끄럽네요ㅠㅠㅠ 고맙습니다

쓰시고자 한 내용은 저 댓글 달고 잠깐 생각해보다가 알게 되었는데 그때 한사람님께서 덧글을 남기고 계시는 것 같아서 썼다가 지우는 것도 이상해서 그냥 두었답니다 ㅎㅎ 나대로, 가 가장 좋은 거겠죠? 요즘은 저는 저대로 살기가 어려워서 에휴..

2011-08-15 2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5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사르 2011-08-16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예스와 알라딘이 그런 차이가 있군요. 저는 최근에 이달의 당선작을 조금씩 읽고 있는데요. 당선되실 분들이 다 당선되셨던데요! 글 잘 쓰면 다달이라도 계속 주는게 맞지요. ㅎ 저는 제가 좋아하는 분이나, 제가 찍었던 리뷰, 포스팅 등이 이달의 당선작에 뽑히니까 괜히 덩달아 으쓱~해지던데요. 그리고 제가 모르는 분들도 당선작 글 읽으면서 한 분씩 알게 되기도 해서 좋았구요.

입바른 소리는..하는 사람이 힘들어질 때도 종종 있지만, 그래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한사람 2011-08-16 22:05   좋아요 0 | URL

당선작과 상관없이도 잘쓰시는 분들이 많은 곳이 이곳, 알라딘인거 같아요
무엇보다 숨은 실력자들을 찾아내어 달사르님처럼 몰랐지만 많은 분들의 글을 알게 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인 것 같고요.

입바른 소리는, 아무래도 공개적인 곳이다 보니
필연적으로 상호 상처가 동반된다는 것이 문제인데
무엇을 위한 소리인가, 누구를 위한 소리인가가 정의롭다면
또 누군가는 늘 하게 되어있는거 같아요. 윗글에 언급했지만
그나마 여기는 간간이 그런 분들의 솔직함, 쓴소리 같은 것들이
보이는 것 같아 다행이구요.. 그것도 비판을 위한 비판이나 비판의 재미같은 것에서 자유로와야 하는데..
그것의 균형은 운영측의 몫이라고 봅니다 ^^

마녀고양이 2011-08-17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겠지만,
하나의 현상을 보는 관점은 긍정이냐 부정이냐로 갈라질 수 있겠죠.
저는 가끔 입바른 소리라는게 부정적 관점과 너무 연계되어있지 않나 하는 안타까움이 듭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절대 진리가 있는 상황도 아닐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냥 알사탕 주면 감사하게 넙죽받고, 당선되는 친한 알라디너가 있다면 가뿐하게 칭찬해주고
이렇게 살고 싶어집니다. 그래도 머리 아픈 세상 아니겠습니까. 한사람님, 멋진 글들이었습니다. 축하드려요~

한사람 2011-08-17 09:03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반가워요 ~
휴가는 잘 다녀오셨죠?

좋은 말씀입니다. 어떤 좋은 해결안이라도 모든이를 만족시킬 안은 없죠.. 괜히 드러내고 시끄러워지고
공론화했다가 의도와 다르게 흘러가는 경우를 많이 봐왔죠, 아마 그런 경험들때문에 나이들면 주어진 상황에
어느 편에 서기보다 중간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 같아요..입장이라는 것이 양쪽 다 들어보면 다 옳고 모두 그럴만한 사정이 있더라구요 ㅠ

히, 그런데 저는 다른 곳보다는 이곳에서 사고의 전환, 자극을 많이 받아요 ㅋ
입바른 소리는 아주 조금이라도 좋은 소리들보다 눈에 띄잖아요
하나의 사실을 두고 이렇게 생각할수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있구나를 보면서
그동안 제가 무심했던 문제들, 겉보기에 별 문제라 생각하지 않았던 사안들을 근본부터 생각하게 되는
기회가 되는 것 같더라구요

그런데 가만보면... 입바른 소리도 성향이라 꼭 안하고 못베기는 사람들이 있죠.
그분들도 마음이 그리 편한건 아닐테고..저도 예전에 한독설을 하던 사람이라
그 꼭 자기가 하고픈 말을 (어떻게든)하게 되는 어찌보면 성격적인 부분과 밀착되는거 같습니다..
저는 가끔이지만 익명이나 아이디를 바꾸어 마치 공정치 못한 세상에 독립운동한다는 듯
제도와 시스템을 비판하는 분들을 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익명일 경우 더 그 사람의 속내가 보이더라구요 ㅋ

모든 건 지나가지만, 그 지나가는 과정에서 우린 모든걸 이해하지는 못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인가봐요

고마워요~ 예쁜 칭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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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 읽기 - 전체주의의 탐험가, 삶의 정치학을 말하다 산책자 에쎄 시리즈 8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지음, 서유경 옮김 / 산책자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독서의 순간

   이 책의 원제는 『Why Arendt matters』, ‘왜 아렌트는 중요한가’ 이다. 즉, 그녀가 떠난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시기에 아렌트를 다시 읽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말하는 책이다. 바꿔 말하면 지금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뜻도 된다. 저자에게 아렌트는 지도교수였고 어찌 보면 아렌트 학파의 마지막 제자로서 스승의 업적을 계승, 완성할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아렌트 탄생 백주년(2005)을 기념해 이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스승인 아렌트를 말하는 책이기도 하지만 아렌트를 말함으로써 제자였던 자신의 의견과 판단을 사회적으로 전달하는 임무도 훌륭히 완수했다. 저자가 아렌트를 가이드하는 여행길은 곧 우리가 오늘을 반추하는 길이었던 것. 그러므로 (아렌트는 내가 잘 아는 바)아렌트를 이렇게 읽어야 한다고 주입하는 책으로서 무엇보다 ‘이렇게’의 논리를 세심하게 펼친 작품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성과는 바로 ‘이렇게’가 아렌트의 사상적 발전인 것으로 자가 안착시켰다는 것이다.

   나로선 아렌트의 책을 한 권도 안 읽고서 이 책 한권으로 아렌트는 물론이고 아렌트의 스승과 또 그녀를 스승으로 둔 현역 학자의 통찰까지 학습할 수 있었으므로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특이했던 건, 사실 다분히 (정치를 말하는 것이므로)정치적인 논조를 예상하고 책을 펼쳤는데 저자가 철학, 정신분석학의 저서를 많이 출간했기 때문인지 이 책은 고스란히 철학과 정신분석학의 밀도높은 문체를 드러낸다는 것이었다. 외국의 어떤 철학자를 말하는 사람이 또 다른 철학자일 경우 독자는 필연적으로 이중철학의 고(苦)에 부딪힐 때가 있다. 몇 부분 이해가 안가는 문장들의 향연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지난번 『데리다 평전』때도 겪은 일이지만 이것이 아렌트의 뜻인지 저자의 해석이 가미된 의견인지(아니면 한국의 번역자의 의역인지) 독자로선 주어진 문장만으로는 전혀 판단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맥락에 묻어갈 수 밖에 없는 순간들이 사유의 기쁨을 선사할 수 있겠으나 공교롭게도 문장 내에서 빈번히 접하게 된 이중, 삼중의 부정형 그리고 수동태의 번역문은 이 원망이 누구를 향해야 할지 모를 일로 남겨져 ‘어렵고 짜증난다’는 식의 평가를 부를 확률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일괄적 평가로만은 부족하다. 이 책은 내용상 어려운 컨텐츠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고 번역상으로 저자, 그리고 옮긴이 만의 독특한 문체가 매우 강렬해 중독성이 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그들 사유를 좇아가지 못하는 특성도 있다.(혹자들은 그런 게임식의 재미 때문에 철학을 좋아하는 것 아닐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이 경향은 두드러져 결국 저자의 특기(?)인 듯 해 보이는 개념의 사유와 표현방식의 인문학적 체계에 항복당하는 순간이 오게 되는데 막상 책을 덮고 나니 그러한 저자의 내재적 에너지에 압도당한 느낌이 싫지 않았달까. 결론적으로 뻐근한 사유의 재미에 흠뻑 빠져들던 시간이었다. 한마디로 정치와 철학이라는 재료가 정신분석학의 레시피로 요리된 듯한 흔치않은 느낌으로 충만한 순간. 저자는 자주 ‘아렌트적 순간’이라는 역사적, 상징적 순간을 언급했는데 내게 이 책은 한 여름 치열하게 기억할만한 ‘독서적 순간’으로 남을 듯하다.


운명의 순간

   저자는 아렌트의 주요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1951), 『인간의 조건』(1958), 『정신의 삶』(1978)을 큰 축으로 구분해 놓고 그녀와 자신의 사유를 정리한다. 흡사 아렌트 대리인으로서 정당 대표의 대변인처럼 느껴지던 목소리는 깊고 심층적이면서도 생생하다. 마치 아렌트가 아직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저자는 아렌트를 75년 이후 계속 생존하도록 생명성을 유지시키는데 공헌을 한 것 같다. 저자는 아렌트 삼부작을 언급하면서 아렌트가 바란 것, 바라지 않은 것, 이룬 것, 이루지 못한 것을 피하지 않고 나열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정치상황을 말할 땐 만약 ‘그녀가 아직 살아있다면 뭐라고 말했을까?’와 같은 자문으로 그녀와 나누는 대화를 연상토록 한다. 그리고 이미 죽은 아렌트의 대답을 당당하게 호출하여 우리 앞에 정렬하는 자신감은 곧 그만큼 아렌트를 많이 아는 증인으로 인식되게 한다. 아렌트를 (제대로)읽으려면 나를(나부터) 읽어라, 그것이 저자의 할 말로 보였다.

   아렌트 삼부작을 지나쳐온 뒤 떠오르는 질문은 ‘개인과 국가와의 관계’였다. (생각 ‘없는’)개인의 악이 국가의 악으로 발전할 수 있듯이 (생각 ‘깊은’)개인의 선 역시 국가의 선으로 확대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희망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암울하게 와 닿았던 건 그렇기에 개인의 행복은 절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깨우침 때문이었다. 소개된 아렌트의 책을 연작으로 이어보면 결국 ‘인간으로서 인간적인 삶을 인간답게 살아가기’에 대한 평생의 고찰이라고 할 수 있다.

   아렌트는 공영역을 (사적 영역, 사회적 영역과 달리)정치영역으로 보았고 공영역의 역할과 비중이 현대인의 삶속에서 몹시 위축되어 있는 것을 지독히도 관찰했다.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만연적인 피로감을 호소하고 애정을 못느끼는 정치적 상황을 정치하지 않는 일반인과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인 몸으로 이해했다. 이에 아렌트는 무엇보다 정치적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보았다. 문장으로만은 당연해 보이는 이 결론이 철학으로 정치를 하는 정치철학자, 그렇기 때문에 정치 사상가로 알려진 학자의 주장으로 인식, 수용될 때 정치를 외면해온 나같은 독자에겐 상당히 충격적인 결론이라 할수 있다. 정치적이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 로 들리기 때문이다. (물론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는 우리가 당하는 통치개념의 정치는 아니라 말하는 듯 하지만 나는 같은 개념이라고 본다) 그동안 더 행복해지기 위해 정치적이지 않으려 한 것이 아렌트가 비판했던 하이데거의 모범적이지 못한 위선으로 간주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칸트의 고장,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독일 철학의 심장부 하이데거, 후설, 야스퍼스에게서 교육받았다. 그러한 독일철학의 전통을 계승한 저자가 “해체할 것이 없을 때까지 해체하라”던 데리다의 주장 뒤에 남은 것이 무엇인지 정곡을 찌르듯 질문하던 것은 철학이 공허한 결론이 되지 않기 위한 자세로서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지난달 내가 『데리다 평전』을 읽었을 때 철학은 정치적이지 않을 때 인간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리뷰를 정리하는 오늘의 시점에도 북한은 연평도에 포격을 하였고 일본의 잇따른 독도도발로 양국관계는 다시 냉기가 흐르고 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입으로는 정치에 관심없다는 냉소를 지어보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는 안 될 시점이고 또 외면하기도 힘든 상황에 국면해있다. 내 생각에 한반도에 아렌트가 소환된 이 시점은 어느때 보다도 중요한 시기인 듯하다. 우리는 식민지국가였고 전쟁국가였으며 지금은 분단국가이기도 하다. 그것은 아무리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G20 정상회의를 개최하고 유럽에 K-pop이 유행이라고 해도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아렌트의 대표작 세권은 모두 유대인-나치-아이히만이라는 뼛속 공통분모를 함의한다. 전체주의로서의 반유대주의, 나치의 대리 수행인으로서의 만행, 악의 본질을 탐구케 한 인간의 본성, 이 세가지 연쇄사건은 결국 민족, 체제, 인간에 대한 탐구결과를 이룩했다. 다시 말해 한 인간이 어떠한 민족으로 태어나 어떠한 체제속에서 살아갔는지에 대한 시대적 회고성을 내재한다. 이 회고록을 그대로 한반도 남쪽에 살고 있는 남한의 독자인 내게로 비추어보면 결과적으로 아주 행복하지 못한 인간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판단을 할 수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폭우로 물가가 오르고 잘못된 부동산 정책 때문에 전세가 동나고 비싼 등록금을 내고서 아무리 학위를 따도 취직할 곳이 없다는 실질적인 행복지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는 지리적 특수성과 국제관계의 역학적 구조상 긴장상태를 벗어날 확률이 거의 없는 나라에 속한다. 즉, 정치적으로 평안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아렌트의 결론은 우리에겐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들린다. 어짜피 지구상에서 가장 정치적인 긴장을 안고 살아가는 구성원들이기에 우리에게 있어 행복은 곧 정치와 동일하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가장 정치적인 인간이 가장 행복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 상태론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는 말인 것이다. 그렇담 이제라도 행복해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책을 읽고 머리 맞대어 묘안을 짜내어야 할 질문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사유의 순간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정치를 파괴하는 통치형태로 보았다. 전체주의 속에서 인륜에 반하는 범죄는 인간 공동체에 속할 권리를 공격하는 것으로 여겼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통해 1920년대 무솔리니가 처음 만든 신조어 '전체주의totalitarianism' 를 새롭게 규정했는데 인상깊었던 건 9.11 이후의 미국과 미국이 전쟁상대로 삼은 테러주의는 모두 전체주의를 기반으로 한다는 시각이었다. 전체주의가 ‘이데올로기와 테러에 기초한 신종 정치 형태’라는 아렌트의 분석에 따라 결국 미국과 오사마 빈 라덴은 전체주의식 싸움을 이어온 것이다. 역자는 미국이 80년대 소련에 저항하는 아프간 세력, 빈 라덴 네트워크에 조력한 것이 결국 9.11 테러로 되돌아왔다고 말한다. “전체주의를 물리치기 위해 전체주의적 방법”인 테러를 사용한 것에 대한 인과응보라는 것이다. 특히, 빈 라덴의 국가 행정부를 상정하지 않는 테러주의는 반정치적인 초국가 목적으로 한데 뭉친 네트워크이므로 그가 죽었다고 해서 전쟁이 종결되었다거나 테러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확신은 아렌트의 목소리를 빌린 저자의 유럽식 경고로 느껴졌다.

 『인간의 조건』은 최근 일어난 노르웨이 테러를 떠올리게 했다. 아렌트가 말하는 인간의 조건은 정치행위를 공적으로 수행하는 시민으로서의 기본 조건을 뜻하는 것 같다. 정치를 개인 권력에의 투쟁으로 보지 않고 다수 행복을 향유하기 위한 소통의 과정으로 본 것이 그 핵심이다. 의견을 한데 묶어 약속하고 결합하는 비폭력적 언어로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공적인 행복을 도출한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개념으로 인식된 건 ‘용서’라는 조건이었다. 이것은 어떤 일을 저지른 자의 행위를 용서할 것인가, 그 행위를 저지른 사람을 용서할 것인가의 문제와도 같았다. 이는 필히 ‘용서할 만한 자’와 ‘용서할 수 없는 자’를 구분케 하고 법적인 처벌이 가능한지의 여부와 결부된다. 그리고 후차적으로 행위를 한 사람이 반성하였는가, 후회하고 있는가, 아무런 생각이 없는가를 검증하는 단계로부터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용서와 처벌, 반성이 만족할만한 성과를 도출했을 때 저자는 평화와 화해를 지향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렌트의 논리에 배경이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민적 우정이나 종교적 관용은 썩 신선한 재료는 아니었지만 용서의 일반화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수긍할만 했고 악의 평범성, 인간의 무사유성이 인류의 질서를 파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칭적 수사를 이루는 논리라 생각되었다. 무엇보다 용서를 정치의 ‘필수조건’으로 보고 하나의 근본적인 ‘정치적 경험’으로 성찰하는 체계는 인상깊었다. 용서가 화해를 전제로 하며 가해자나 희생자 역할보다는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는 패러다임으로 규정한 것이 노르웨이를 연상시켰다. 76명의 무고한 시민을 살해한 테러범을 대하는 노르웨이는 적어도 우리와는 달라 보였다. 주한 노르웨이 대사는 “브레이빅이 이번 테러보다 더 끔찍한 짓을 저지른다 해도 노르웨이는 지금까지 지켜온 가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 바 있다. 노르웨이가 주장하는 가치는 ‘관용과 사랑’이다. 테러범에 대한 극형이나 경찰의 늑장 대응을 질타하는 대신 극단주의자 한 명으로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똘레랑스를 내세웠다. 이는 ‘범죄자의 처형이 그 범죄자나 희생자 모두에게 용서로부터 나오는 방면의 혜택을 볼 수 없게’ 한다는 저자의 논리와도 일치한다. 안타까운건 아직 ‘용서함과 약속함의 힘’이 불행히도 우리사회를 말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정치는 정치인의 것이지 시민의 것은 아닌 것이다.

  『정신의 삶』은 제목 그대로 가장 철학적, 정신분석학적으로 다가왔다. 저자는 아렌트의 사유함과 의지함에 이어지는 판단함의 개념을 완성하기 위해 열정을 쏟는 것으로 보였다. 구성상 책의 마지막 단락인 이 부분은 아렌트가 하이데거, 야스퍼스와 대화하는 방식과 유사하게 스승과 대화를 진행하는 것으로도 보여 저자에겐 하이라이트라 할수 있었다. 아렌트가 강조하는 '판단'은 반성적 판단을 기초로 한 칸트의 (사적인 영역이 아닌)'공통감각'과 유사하다. 저자는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이라는 능력은 ‘자신의 상상력을 사용해 타인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라 해석한다. 판단의 반대가 바로 무사유라는 점에서 칸트가 언급한 “어리석음에는 치료약도 없는 법”이라는 비유는 한 사람의 어리석은 판단이 실은 가장 무서운 흉기가 될 수 있음을 상징하는 유머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처럼 생각이 없고 판단하지 않는 관료들, 사유하지 않고 계산만 하는 조직원, 이론에만 의존하고 거짓을 만들어 내는 전문가들의 무사유성은 자기 내부의 대화가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형사고가 터질 때마다 공무원의 안이한 대처가 늘 도마에 오르지만 그런 무사유의 습관은 관행처럼 반복된다. 이러한 무사유적인 공무원은 자신에 대한 폭군이자, 세계 내에서의 폭군이 된다고 말한다. 이는 판단함이 일종의 공적 행복의 형태라면 판단하지 못함이 공적 불행의 지름길이라는 뜻과 같다.  이 사유가 중요한 것은 대통령, 시장같은 지도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도 생각없는 판단을 하면 모두가 불행해질 수 있다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기만을 거부하는 정직한 인간’이 ‘좋은 판단자’라는 몽테뉴의 정의는 자기기만을 일삼는 위선적 인간이 곧 나쁜 정치인이라는 뜻이면서 그 정치인은 곧 한명의 시민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행복의 순간

   저자에 의하면 『정신의 삶』은 우리 시대 정신적 딜레마와 마주치게 한다는 주장이다. 저자가 현대에 가능한 질문으로 치환한 것은 다음과 같다.


- 다양한 도덕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동의할 정도로 설득력을 지닌 어떤 도덕철학이 존재 하는가?
- 의지를 조화시키는 사랑은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 우리가 어떻게 코즈모폴리탄 적 비판가와 관찰자로 이루어진 공영역을 상상할 수 있는가?          -268p


   저자가 해석해준 도덕철학은 예를 들어 내가 연쇄 강간살인범이라고 할 때 나는 연쇄살인을 한 나 자신과 앞으로도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질문과 연결된다. 악행을 예방하는 길은 이 질문에 자신을 제대로 판단하는 일인 것이다. 이 올바른 판단의 과정이 곧 무사유를 차단하는 순간인 것이다. 나는 아렌트의 자기검열에 해당하는 이 질문이 이 책에서 가장 내 자신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도덕이란 남들이 말하는 기준이 아니라 나와 같이 살아갈 나를 위해 가장 절실하다는 걸 새삼 깨우쳤기 때문에.


   
 
“나는 내가 그것들을 한다면 더 이상 나 자신과 함께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특정의 것들을 할 수가 없다.” 도덕은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진실했던 것에-잊지말고-충실하는 것이다.       - 270p
 
   


    노르웨이 테러범은 노르웨이로부터 얻을 것은 모두 취하면서 많은 독서를 해온 인물이었다. 특히 경영, 역사등의 인문학적 독서를 즐겨온 그가 다문화주의, 세계시민으로서 공통되기를 거부한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이히만은 상명하복에 충실한 사람이었지만 누구보다 근면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비정치적 사유로 가장 정치적인 인물로 남았다. 나는 이들을 보면서 인간은 원래 정치적 동물이었다는 오래된 명제를 떠올렸다. 서평가 故 최성일은 한나 아렌트를 두고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었다는 점을 새삼 일깨운 정치철학자라 말했다. 아렌트 자신도 나치정권의 등장과 그에 조력한 하이데거로 인해 정통철학에서 정치철학에 눈을 뜨게 된 것처럼 인간은 정치를 분리시켜 그 본성을 관찰, 설명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이제는 망각해버렸다고 생각되는 인간이라는 정치적 동물을 증명하는 시간, 아렌트의 시간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적 순간을 제공하고 있는가. 이미 정치적 인간인 우리가 새삼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정치를 위한 길의 모두인 걸까.

    사실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과 ‘무사유‘, 그리고 그 대응기제로서 ’용서‘와 ’판단‘은 굉장히 먼 미래로 느껴진다. 아니 너무 오래된 과거로 느껴진다. 사유를 멈추는 것이 악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아무리 각성한다고 해도 사유한다고 해결될 문제로는 보이지 않는 구석이 있다. 악을 저지르는 건 평범해 보이고 용서를 행하는 것은 특별해 보이는 단순 이분법의 느낌도 든다. ‘용서함’이 ‘상호방면’하는 행위로서 지속적인 인간연계망을 수립하고 ‘판단력’은 세계시민이 되도록 준비시키는 능력이라는 최후통첩과 같은 메시지는 도처에 약속을 어기고 진실을 은폐하는 정치인이 난무하는 작금의 시대에 무기력한 결론으로 박제될 진부함을 인정하자. 이 책은 전체주의 비극을 조장, 관망하는 사회구조 및 체제의 변혁을 간과하고 모든 것을 행위 주체의 본성으로 돌림으로써 전체주의를 막는 유일한 방법이 주체의 변화인 것으로 오인될 소지도 있다. 그러나 아렌트는 말한다. "조직되지 않고 구조화되지 않은 대중, 절망적이고 증오로 가득 찬 대중은 지도자들에게서 구원을 기대한다."고. 그녀는 전체주의 기원을 대중에서 찾았다. 이명박 반대는 더 강력한 이명박에 대한 열망이라는 분석을 접한 적 있다. 더 완벽해보이는 미래를 제시해달라는 간절한 요청은 어쩌면 집단 무의식, 집단 기만의 무사유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지구촌 시대와 다문화주의의 맥락에서 아렌트가 제시한 조건들은 정치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 이라고 보았을 때 가장 우선적인 가치로 자리하기 충분하지 않을까. 이 책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반성과 회고를 통해 우리 스스로 판단의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사유하게 한다. 앞으로 우린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판단을 해야 할 순간과 집단적으로 조우하게 된다. 우리가 무엇을 용서하고 약속할 것이며 그로인해 어떤 판단을 하는 것이 사유하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정치적 행동을 실천하는 일인지 생각한다. 우린 적어도 우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기회를 놓치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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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8-11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옷! 리뷰 쓰셨군요! 한사람님 리뷰 기다리고 있었어요~ 한사람님 리뷰는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서 좀 어려운 책 읽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어요. ^^ 그러니까 리뷰 보고 퍼뜩 질렀다는 이야기 ^^

가연 2011-08-16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부족한건지 자꾸 턱턱 막혀서... 번역문제인가?? 한참 고심했더랬죠... 역자분께는 죄송하지만 별 네 개!ㅠ

비로그인 2011-09-06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렌트는 늘 무심한 언어 속에 절대관념을 넣는 사람 같아요. 가장 평범한 언어로 가장 쉽게, 가장 날카로운 뜻을 전달한달까요. 나무에서 물방울이 똑, 하고 떨어져서 화들짝 놀라듯이, 6년 전에 읽었던 진주조개잡이 생각이 났더랬습니다.
 
전을 범하다 - 서늘하고 매혹적인 우리 고전 다시 읽기
이정원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고전을 범하다 (짓밟다)

    ‘범하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가 기억난다. 어렴풋하게 드라마를 보고 전개가 이해되지 않던 장면이었는데 어른들은 남자가 여자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대화를 주고받았다. 남자가 여자를 범한다는 의미를 몰랐던 나는 막연히 여자 주인공이 피해자로 보여 남자측에서 속임수나 배신을 저질렀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한참 뒤 성인이 되고나서야 정확한 뜻을 알게 된 나는 범한다는 단어에 늘 그 시절 영상이 겹쳐져 무의식중에 폭력을 행사하는 의미로 저장된 듯하다. 이 책의 제목을 접하고 처음 감지되던 기운도 전(傳)을 범하는 주체쪽이 아닌 누군가로부터 범해지는 전(傳)의 편에서 방어적인 자세였던 걸 보면. 사람은 어떤 단어를 어떠한 상황에서 처음 배우게 되었는지에 따라 그 단어와의 개인적 인연을 시작하게 된다. 내게 ‘범하다’는 분명 한쪽에 피해가 발생하는 공격적 의미였다. 그것은 한쪽이 이기고 다른 쪽이 질 수 밖에 없는 정복의 가치였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발산하는 에너지가 남달랐다고 할까.

    이 책이 흥미로왔던 건 낡아만 보이던 옛것에서 새로운 진실을 찾아내는 저자의 의지였다. 시종일관 매의 눈으로 탐구자의 태도를 유지하던 그 긴장감이었다. 이 책은 고전의 법칙에 당당히 침범해 고전의 질서를 발본, 사유하여 당시 사회구조를 밝혀내는 기특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고전이라는 문학이 당시 지배담론을 반영한 문화였으며 오랜 세월 현대인의 필요에 따라 계획적으로 호출된 유용한 이데올로기였음을 알려준다. 무엇이든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는 과정은 혁명의 기록이다. 역사적으로 텍스트를 해석하는 일은 정치적인 과업이었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그 혁명성을 향해 멀리서 불구경하듯 재미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같이 고민하고 문제가 있다면 더우기 같이 해결하고자 하는 참여의지를 드높이는 선동성이 아닐까. 정치인에게 나라를 잘 다스리는 행위가 정치라면 독서하는 입장에서의 정치는 드러난 진실로 마음을 수행하고 진리를 실천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하여 고전 다시 읽기를 통해 지금의 우리 사회, 그곳에 위치한 나를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고전에 은폐된 진실을 캐내는 것은 곧 우리 뇌에 저장된 지식을 교정하는 일에 다름아니다. 그건 결코 쉽거나 작은 일이 아니다. 모르긴 해도 참다운 인문정신이란 이렇듯 예리하고도 불편한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가슴으로 수용하는 일일 것이고 그것은 기존의 부조리, 불합리를 범하는 사회기능을 담당해 왔을 터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최근에 읽은 책 중에 가장 의미있는 정치성을 가장 지적으로 함의, 표현한 책이었다. 이 책을 덮은 지금 우리가 범하고 싶은 것이 과연 누가 지은, 무엇을 위한, 어떠한 이야기의 傳이었는지, 그것만이 우리 몫이 되었다.

    한때 고전 붐이 일어난 적이 있다. 알려졌듯이 노무현 정부에서 부각된 논술강화정책에 따라 고전을 읽는 것이 논술을 훈련하는 방법론으로 인식된 시절이 있었다. 이는 곧 고전부흥, 고전출판, 고전강의의 붐으로 이어지면서 일반대중의 고전 읽기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논술학원이 증가하면서 입시학원의 주력사업으로 떠오르기도 했고 홈쇼핑에선 학부모들의 수요를 의식해 고전 시리즈를 새로운 트렌드로 주입하곤 했다. 물론 우리가 충동구매하듯 서둘러 서재에 꽂아둔 고전들은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을 진리의 정수처럼 여전히 그 자리에 버티고 있다. 고전이 엘리트 국가주의를 심어준다는 회의적 시선도 있지만 그들은 문학의 법전처럼 우리 사회 불변하는 도덕교육의 판타지로 기능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일반대중이면서 학부모에 속하는 나는 여기서 고전을 누가 해석하고 어떤 방식으로 유통시키는지 궁금해오지 않은 쪽에 속한다. 아니 고전을 해석한다는 문제를 크게 신경쓰지 않으며 살아왔다. 고전은 전승되거나 보존, 습득하는 것이지 누군가의 통역이 필요한 분야라는 생각에 미치지 못했다. 해석이 필요하다면 그건 지금은 사장된 고어의 직역과 의역정도라 여겨왔다. 저자는 고전은 전승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고 발명되는 것이라 주장한다. 고전을 다시 읽고 거꾸로 읽는 것이 다른 역사관과 세계관을 깨우치는 기회라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미래전망까지 이끌어내야 하지 않느냐 반문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 진보주의자들은 인문고전을 대부분 관념론의 전통적 산물로 규정하며 과거 부르조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표현물이라 간주하는 경향이 많았다. 서구에서도 고전작가들은 지배계급의 위치에 속하거나 그 후원을 받는 지식인, 예술인이 많았다고 하지 않는가. 다중지성가로 불리는 정치철학자 조정환은 최근 저서 <인지자본주의>를 통해 고전세계의 재발견, 새로운 고전상의 재발명이야 말로 ‘역사적 투쟁’이요 ‘새로운 인류의 발명’이라 정의한 바 있다.

   
 
20세기 사회주의가 고전에 대해 취했던 거부와 전복의 태도를 넘어서면서, 그리고 신보수주의적 방식의 고전 전유 작업을 무력화하면서 공통적 유산으로서의 고전을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류를 구축할 새로운 공통되기의 잠재력으로 전환시키는 것, 이것이 오늘날 다중의 지적 인문적 실천이 달성해야 할 중요한 과제들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411p

- 조정환 <인지자본주의>
 
   


    자본주의는 대중의 인지능력을 집중시켜서 사용하기 때문에 고전을 전복하는 것을 새로운 인류가 탄생할 가능성으로 보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저자도 고전을 ‘저지른’ 잘못이 아니라 ‘발견된’ 잘못이라 말한다. 고전의 문제는 선천적이 아닌 후천적 본성을 지녔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혹시라도 고전상의 과거 발견이 작위적이고 허술했다면 그 허위의 과학적 발본을 통해 지금이라도 새로운 발견을 하자는 것이므로 과거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과정은 필수불가결하다. 이 책에서 발본된 고전은 약 열 스무 편이다. 본문에 집중적으로 파헤쳐진 것은 열 세편. 그중에 내가 들었거나 알고 있는 이야기는 반에 불과했다. 그것도 누가 죽었고 그 결과 무엇을 얻어내었고 누가 나쁜 사람이고 누가 귀감이 되었는지 그야말로 영구 박제된 지식의 퍼즐 몇 조각에 다름없었다. 저자는 이렇듯 고전속에서  우리가 선명하게 기억하는 죽어간 사람, 살아남은 사람, 그들이 원하여 얻었던 것, 그럼에도 얻지 못한 것, 사람들이 지켜내고 버려온 것들을 관통하며 심층을 파고든다. 우리가 기억하는 심청이, 춘향이를 다시 똑바로 관찰하자 부추긴다. 우리에게 익숙하던 우리가 만들어온 심청이, 춘향이를 짓밟고 원래 그들과 가장 가까운 정체성을 찾아주자 설득한다.


죽음을 범하다 (침범하다)

    저자가 제일먼저 변론한 인물들은 죽음을 만들거나 죽음을 실행함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규정지은 비극의 주인공들이었다. <장화홍련전>의 계모와 <심청전>의 효녀, <적벽가>의 병사들, 이들은 죽음의 시나리오에 적극적으로 동원된 침묵의 증언자였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죽였고 오늘날 우리는 그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고찰이었다. 저자는 주로 추녀와 악녀로 개성강한 조연을 맡아왔던 고전 속 계모들에 주목한다. 공인된 씨받이와 평생 가족봉양이라는 짐을 메고 재취로 들어가 자신을 제대로 변호할 수 없는 약자로 위치한 계모를 사회적 편견의 대상으로 객체화한다. 자식의 불행을 방관하는 은폐된 공범자로서 아버지는 자신의 도덕적 면죄부를 위해 전처 자식 편을 들고 사건이 종결된 후 다시 재혼하면 되었던 시대적 배경을 고발한다. 귀신으로 부활한 장화, 홍련은 자신들의 사연을 공론화 할수 없었던 억압된 주체시민들의 대항담론이 형상화된 것이며 배후에서 음모를 꾸미는 계모는 당시 아녀자들에게 각인된 결핍과 불안에 저항하는 부정적 아바타라는 말씀이다. 계모를 희생양으로 삼아 드라마틱한 시나리오에 재미를 부여하던 것은 이미 현대식 미니시리즈에서도 진부한 공식에 해당된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오늘날의 계모는 추녀가 아니라 육감적인 미녀로 등장해 물질욕의 화신으로 상징한다. 이 오래된 공식은 스테레오 타입의 고전적 가치를 창출했고 이혼과 재혼이 만연화 된 오늘날에도 계모는 의붓아버지보다 사악하고 부도덕한 캐릭터로 자리매김하였다. 의붓아버지도 성폭력등의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지만 외려 계모는 가정의 외피적인 평화를 위해 이마저 은폐하는 공범자가 되거나 살해자로 추락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계모와 의붓아버지의 고정화된 캐릭터에 우리는 전혀 싫증을 느끼지 않은 채로 뉴스를 청취하고 사연을 관람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들이 나쁜 사람인 것이 아주 편한 이웃들로 살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사회 어디에서도 계모의 논리적 변론이 드러난 적은 없었고 설사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해도 그 사실은 이슈화되지 못한다. 혹시 이 증상은 본질적으로 계모의 문제가 아니라 계모를 붙박이처럼 고정된 자리에 묶어 놓은 우리들의 문제는 아닐까.

    필히 훌륭하고 모범이 되는 계모의 본보기도 있을테지만 이들은 단지 예외의 인물일뿐 그 진정성을 주목받지는 못하는 경우에 속한다. 아니 오히려 드러나는 것이 타자에 의해 가식이나 위선으로 비쳐질 위험마저 있다. 어쩌면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박제된 캐릭터 때문에 새로운 역할을 하지 못하는 배우처럼 이 시대 계모들은 장화, 홍련이후 한번도 그 오해를 풀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계모에 대한 오해가 풀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혹시 그것은 계모에 올가미를 씌운 사람들은 아닐까. 나는 계모가 악녀이고 추녀이어야 아버지와 자식들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변명할 수 있으며 자신들이야 말로 상처받은 피해자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새롭게 재편되는 가정의 질서를 위해 계모 하나 나쁜 사람이면 모든 것이 일사천리다. 이것은 요즘 시대 아내가, 엄마가 행복해야 가정이 행복하다는 논리와 맥을 같이 하는 역설이다. 계모는 가정에서 가장 불안한 지위에 놓여있지만 신구 가족 구성원간 가장 정신적 피로도가 높은 역할이므로 계모가 시기하고 욕심이 많다면 모두는 불행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가 아닐까. 바꿔 말하면 아무리 남편이 야속하고 전처 소생이 밉고 이웃의 시선이 서운해도 계모하나 꾹꾹 참으면 만사가 문제없다는 것과 같다. 가정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이루어지는 완벽한 지배계급의 착취 이데올로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장화와 홍련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계모만을 모든 파탄의 원흉으로 미워했던가. 사뭇 그 에너지가 민망하다.

    아비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 심청이는 공동체의 계략적, 필연적 공모에 의해 희생된 제의장치였다 말한다. 오늘 날 심청처럼 희생하는 여식은 찾아보기 힘들다. 자기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아버지의 광명을 찾아주겠다는 끔찍한 효심은 불효하지 않은 자식에게도 오래된 부채감으로 남아있다. 저자는 냉소한다. 심청이의 타의적 자살이 의미하는 것은 효를 앞세운 공동체의 연대보호였다고. 누구도 아버지를 위해 심청이가 죽어야 한다고 한 사람은 없지만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그건 심청이어도 괜찮다는 말과 같다. 아니 무엇으로보나 심청인 게 모양새가 낫다는 공동체의 표현의지였다. 심청이의 살인사건에 무언으로 동조한 죄책감은 효라는 가치로 개인의식에 자동 내면화된다. 그렇다면 공동체가 믿은 것은 무엇일까. 이들 공동체가 특별히 잔인하거나 폭력적인 성향을 가져서인 걸까.

    예나 지금이나 심청의 인당수 투신과 같은 희생적 뉴스는 심청이나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미담을 듣고 그것이 우리사회를 아름답게 하는 진정한 가치라 믿는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소식이 아닐까. 심청이나 아버지는 극장에서 상영되는 극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일뿐 우리는 그들로부터 발생한 ‘선’이나 ‘효’, ‘충’ 같은 도덕적 가치들을 나누어 공유하면 되는 것이다. 영상이 스펙타클하고 자극적, 폭력적일수록 흥행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우리가 유영철이나 강호순같은 연쇄살인범을 맹렬히 비난하고 그 잔인성을 적극적으로 회자하는 심리와 유사하다고 여겨진다. 이는 천인공노할 희대의 살인마를 처단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분이라기 보다는 이미 갖고 있던 살인의 추억에 부합하는 새로운 인물을 발견하여 이번기회에 한껏 오래된 사연을 확인하는 것이라는 문화비평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이택광,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자음과 모음) 그렇게 본다면 심청이가 인당수에 투신하는 장면은 피할수 없는 슬픔이 아니라 예정된 위로였다. 
 

                        공동체라는 확장된 자아의 생존을 위해 우리는 거듭 살해를 저질러왔다.  - 203p   

 

    심청의 죽음이 사회공동체가 공모한 살인사건이었다면 <적벽가>에서 죽어간 병사들은 한명의 거대 영웅을 위한 준비된 알레고리라 말한다. 출장입상이라는 유교적 가치를 구호삼아 우화스럽게 쓰러져간 군인들은 자기 몸을 냉소, 조롱하며 희극배우로 출연함으로써 당시 봉건가치에 저항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저자는 인간의 사물화에 기반을 둔 이러한 서사가 영웅의 등극을 정당화하는 장치라며 ‘람보’식의 영웅주의 영화를 같은 계보로 위치시켰다. 희생양으로 택해진 전처 소생, 봉사의 외동딸, 졸병의 집단들은 권력과 제도권에서 멀어 보인다. 이들의 죽음은 기득권층, 문화 향유층에게는 자신들의 권위체계를 유지하는 문학적 소재이자 합리적 장치였다. 오늘날의 문화비평적 시각에서 본다면 일반 서민들에겐 은폐된 진실을 시시때때로 공유하면서 죄책감과 책임의식을 적절히 배분하면서 현실에 순응하고자 하는 도덕적 판타지는 아니었을까.


욕망을 범하다 (위반하다)

    그런가하면 인정하기 싫지만 인간본성으로서의 욕망을 다양하게 분석한 고전들에선 엿보는 재미보다는 지적당하는 불쾌감이 더 많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무능한 가장을 등장시킨 <장끼전>의 해석은 그러한 가장을 빈번하게 배출하던 당시 사회의 탓으로 돌리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은밀한 욕망을 놓치지 않은 시선 역시 사생활의 주체로서 어머니를 이해한다는 평가가 기분 좋지는 않았다. (다분히 남성적인 시각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한번쯤 스쳐간 여인의 농담조는 개인의 욕망이 되버리고 빈번히 제기 되는 가장의 한탄은 사회적 책임으로 돌려지는 것 같았달까.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강자의 희생요구를 ‘충’으로 포장하는‘ 복잡한 작품으로 규정한 <토끼전>은 어느덧 타인의 고통을 대의 명분으로 덮어 버리는 정치적 행위에 익숙해져 버린 나 자신에게 흠칫하던 기분이었다. 비천한 지귀가 선덕여왕을 사모하다 불귀신이 된 이야기 <지귀설화>는 우리 사회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을 다시 공동의 침묵으로 매장하는 대중적 습관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린 이루어 질 수 없는 것, 다가갈 수 없는 곳, 만날 수 없는 것들에 미학적 의미를 부여하며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패배적 시간들을 부인하지 못한다. 하나같이 불편한 목소리는 ‘진실이 우리의 감성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구조를 재생산’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라 주장했다. 나의 성공을 위해 목숨을 거래하고 내가 살기 위해 사랑을 버리고 나의 품위를 위해 위선과 타협하는 모든 인간사는 마치 고전을 충실하게 전승시켜온 학습결과로 느껴질 정도였다. 

    저자는 외려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을 ‘욕정에 못이긴 사내와 물주를 만난 기생의 거래’로 보는 방자의 솔직한 시선에 한 표를 던지는 듯 보였다. 열녀 만들기에 대한 독자들의 열망이 반영된 결과 <춘향전>은 고전이 선사하는 진정한 사랑의 판타지로 인식되어왔다. 변학도에 항거하며 이도령에 대한 절개를 지키는 춘향으로부터 불순한 의도같은 건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암행어사가 되어 변학도를 응징하던 이도령은 오랜 세월 백마타고 온 왕자로 군림하던 문학적 남성상이었다. 저자는 시대와 민중이 다같이 공들여 스스로의 염원과 연민을 춘향과 이도령에게 투사했다고 말한다. 춘향전의 로맨스를 통해 우리가 얻은 것은 지고지순한 사랑에 대한 가치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위선에 대한 연민의 연대였다고. 그들의 비현실적이고 의심없는 사랑으로 채울 수 없는 자기 위로를 일삼은 것이라고. <전우치전> 역시 대단한 민중 영웅소설이 아니라 봉건적 지배에 대한 저항을 도술로서 조롱한 나르시시즘의 도착적 서사였다고. 전우치의 발랄함과 유치함은 바로 우리들 자신의 이기적인 페르소나와 다름없었다고. 은밀한 욕망을 위반하는 방법으로서 그들 모두는 욕망의 대리자, 가면쓴 주인공이었다고.


    아름답고 대단한 반전이었다. 이 책을 덮고 나니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알릴 것인가의 중요성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동안 우리가 고민한 것이 ‘고전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였다면 이 책은 ‘고전을 해석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였다고 본다. 저자는 해석의 기만은 곧 정신적 폭력이라 말한다. 저자가 행한 전복적 기획이 인문학이 위기라는 작금의 시기에 신선한 활력제가 되었음 좋겠다. 이 책에는 비판을 위한 비판, 뒤집는 재미를 위한 반론이 아니라 실제 고전의 중요 부분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와 대중문화 같은 현실과 연계된 저자의 통찰, 그리고 미래의 문제제기까지 함께 구성되어있다. 고전의 영역을 해치고 침범하는 일은 고전이라는 문학을 통해 당시 사회구조를 밝혀내는 작업이었다. 전을 범하여 얻어진 결과를 통해 우리가 사유해야 할 것은 참다운 인문정신일 것이다. 국가나 기업, 혹은 특정 개인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인문학의 독립일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배워왔고 편안하게 알고 있던 지식들을 누군가 틀렸다고 지적하며 이렇게 바꾸라고 설득하는 일이 인문학의 기본 자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바로 오래 저장된 내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 순간, 새로와져야 겠다고 마음먹은 그 시간들이 어느 때보다 고독하다는 것을.

    이 책에서 해석된 <춘향전>, <홍길동전>, <양반전>, <전우치전>등은 청소년들의 인문고전 필독서이기도 하다. 저자의 해석에 따르면 우리는 그동안 고전을 통해 자기발전을 이룬 것이 아니라 자기최면이나 위로를 자행해온 것과 같다. 이 책은 뼈아픈 지적으로 솔직한 고통을 선사한다. 돌이켜보면 지난 시절 고전을 찾고 그것에 의지했던 이유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한 순간이었던 것 같다. 선인들의 고민과 해결과정을 엿봄으로써 비로소 세상사 범속한 내 고민이 별다르지 않았음을 깨우치는 성찰의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고전을 그렇게 읽었다고 당장 내 고민이 해결되고 눈앞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내 근심의 출처를 바로보고 같은 우를 범하지 않도록 자세를 다지게 하는 오래된 반가움으로 기능했다. 우리가 이 책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고전은 더이상 쓸모가 없으니 읽을 가치가 없다는 주장이다. 고전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 아니고 고전을 일방적, 정치적, 획일적으로 해석당해온 세월을 잊지말자는 것이다. 그리곤 앞으로 올바른 해석을 통해 오늘을 반성하자는 것이다.  이 책은 기존 보수적 세계관과 치열하게 전戰하며 법전같던 진리를 과감하게 전복하는 과업을 달성했다. 전(傳)을 범하여 우리가 얻은 것이 전(典)같은 현실을 견디는 에너지(電)로서 전승되길 기원한다. 미래는 이렇듯 체제를 범하는 사람들이 곧 절망을 범하는 희망이 되기를 소원한다. 그것이 새로운 인류의 진실이 되는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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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8-09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는데.. 그런데 <춘향전>이랑 <지귀설화><홍길동전>을 소개한 부분만 봤어요,
나머지 고전들은 아직 안 읽어본 것도 있고 처음 들어본 생소한 내용도 있어서
저자의 해석을 무조건 옳다고 할 수도 없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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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4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현빈은 떠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현빈을 잊지 못했다. 그는 누구를 향한 슬픔인지 모를 눈물을 몇 방울 흘리고 군대로 떠나갔다. 현빈이 떠나간 지 반년이 다 되가지만 아직도 내 책꽂이에는 그가 넘겨보던 책들이 얌전히 꽂혀져있다. TV 에선 아직도 그 반년이 다 지나가지 않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적잖은 현빈이 광고로 등장한다. 듣자하니 현빈을 앞세운 해병이야기를 담은 책도 곧 출간을 앞두고 있다한다. 이 책을 빌미로 새삼스럽게 현빈의 브랜드 파워를 논하고 싶진 않다. 현빈은 떠났지만 다시 올 날을 기다리는 아줌마들의 심리를 고백하고 싶어서다. 아니 현빈 입대 후 그 상실감을 견딜 수 있는 그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어서다. 현빈은 갔지만 김주원 사장은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다.

   재벌회장의 아들과 그 회사 말단 여직원의 로맨스는 미니시리즈의 진부한 흥행공식이다. 현빈은 여기서 배출된 수많은 실장과 본부장의 2010년 계보에 위치한다. 실장의 마음을 뺏은 여주인공이 고졸이건, 시한부 인생이건, 스턴트맨이건 그따윈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현빈이 떠나도 실장은 무한히도 계속된다는 것이다. 유학파와 스포츠카, 호텔 바와 사교파티로 설명되는 그들 모든 실장은 바로 저자가 지적하는 ‘도시 중간계급 여성’의 판타지를 상징하는 욕망의 로맨티스트다. 이 직장 내의 변함없는 수사학이 연예계로 변형, 이식된 드라마가 ‘최고의 사랑’이었다. 현빈 떠나간 가슴을 독고진으로 달래면 그만인 사안이었다. 엊그제 ‘여인의 향기’라는 드라마를 보니 이 공식은 그대로 복제되었고 우리는 다시 독고진 떠나간 서운함을 조금 더 젊은 실장의 눈망울로 채우면 되는 것이었다. 저자가 자주 언급하는 도시 중간계급의 여성으로서 이런 이야기는 내게 상당히 흥미롭다. 솔직히 말해 이 책을 읽는 것은 임성한식의 연속극을 넘겨보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는데(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보다 확실한 타겟은 남성은 아니지 싶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지만 컨텐츠를 주도하는 형식의 통속성에 굴복당하는 느낌. 그러나 그러한 불쾌를 알면서도 멈추고 싶지 않은 쾌락의 범주에 속하였다. 우리가 김수현 드라마를 통해 ‘불륜이라는 금지의 명령 뒤에 숨어 있는 자신의 쾌락을 재발견하고 싶었’던 것이라면 이택광의 문화비평을 통해 ‘우월이라는 불편한 비평 뒤에 숨어 있는 독자의 자존심에 상처를 환기’하는 시간이었다고 할까. 재미나면서도 불쾌했던 건 반복되는 (재계몽의 대상으로서) 우월감에 대한 저항이었고 그럼에도 지속시키고 싶은 호기심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 책은 정확하게 저자가 말하는 주이상스의 영역에 편입된다. 피할 수 없는 가독성의 주이상스, 물론 그 이면을 파헤치는 것이 바로 저자가 할 일이겠지만(중이 제 머리 깎기는 힘들겠지만) 나는 능력부족으로 그냥 그 앞면에 대에서만 말하겠다. 간만에 글을 좀 끄적여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과연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 잉여(?) 재미를 설명하고 싶게 하는지.



문화비평은 미완성이다

   평가단의 지위(?)와 역할을 이용해 나쁜 점부터 말하겠다. 이 책은 크게 ‘철학과 비평사이’, ‘사회와 정치 사이’, ‘문화와 인물 사이’라는 대 구분으로 나뉘어 약 구십여 개의 꼭지가 기사모음처럼 구성되어 있다. 저자의 블로그에 이와 비슷한 글들을 읽은 것 까지 합치면 백 여 개 이상은 될 듯하다. 문제는 바로 백번이나 같은 방식의 글을 읽었다는 것인데 이 반복성이 주입하는 효과가 딱 반반이다. 저자가 분석하는 해석툴이 어느 순간 단순하게 느껴져 지겹다는 생각이 드는 지점이 생긴다는 것이다. 정치와 사회현상, 이슈가 된 사건, 방송 이야기등 저자가 해부하는 매스와 칼질의 방향은 언제나 똑같다. 저자가 주로 사용하는 용어가 이상하게도 고급한 문장으로 느껴지지 않은 이유가 그 반복과 방식의 강요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이 반복효과로 그가 말하는 문화비평의 방법론을 하나 학습한 것 같다는 보람은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확실히 배운게 있다면 그 부분이다.

   또 하나, 책의 구성상 맨 앞에 제시된 ‘철학과 비평사이’의 단락이 어쩐지 앞으로 전개될 모든 비평의 배경, 혹은 기둥으로 제시했다는 느낌이 들었다.(어색했다) 특히 나같이 저자가 언급하는 철학자의 책을 접해보지 못한 독자에게는 모두 성급한 논리의 비약으로 느껴질 소지가 많다. 시대를 넘나드는 맥락의 전개가 다소 무리있어 보였다. 이러이러한 철학적 지식과 고민한 과정이 있었고 그것을 배경으로 하였다는 타당성의 논리로 보여 약간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달까. 저자는 이 책을 처음부터 서론, 본론, 결론의 방향으로 구성한 것이 아니라 모아진 글들을 대주제 하에 엮어서 편집하였을 터이다. 그래서 아쉽게도 이 책의 결론은 없다. 어찌 보면 (백여 개의 글을 덮고 난 생각인데)발전이 없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책의 제목이 ‘이것이 문화비평이다‘인데 내 생각에 이 책의 보다 정확한 제목은 ’이것은 문화비평의 한 부분이다‘, 혹은 ’단계이다‘ 정도가 맞을 듯하다. 저자의 말대로 문화비평이 사회 현상에 대한 발본과 그 사유를 통해 사회구조를 밝혀내는 것이라면 이 책에서 밝혀낸 사회구조는 아직 공동의 질문인 채 인 듯하기 때문이다. 어쩐지 다른 누군가가 이렇게 분석된 단편적인 징후들을 모아 다시 총체적으로 통합된 사회구조의 평면도를, 그 3D를 그려내어야 할 듯하다. 분석된 퍼즐들을 알아서 맞추는 것이 혹 우리들 독자의 몫이라면 그는 아직 문화비평을 완성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뚜렷한 결론이 없다하더라도 그 없는 이유라도 결론의 내용으로 제시하는 단락이 에필로그처럼 부연되었다면 자극의 쾌락을 자의적으로 중단할 동기부여는 충분했을 듯하다.(<인지자본주의>의 경우 방대한 본론에 비해 확실한 결론은 없었지만 현재 상태에서의 기대나 바람을 조심스런 결론으로 언급하였다) 지금 아직 비평을 하고 있는 단계였고 아쉽게도 우리는 그 과정을 저자와 함께 체험한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조교, 학생이 아니고 독자이므로 이 책은 강의 교재가 아니고 인문서적이므로 나는 그 부분이 아쉽고 모자랐다고 생각한다. 특히 앞부분에 철학과 비평의 관계를 서론처럼 언급했다면 더욱 사회현상과 인물을 지나쳐온 마지막 결론부는 이러한 결과를 다 같이 고민해봐야 할 문제라 에두를 방향이었어도 언급은 되었어야 한다고 본다. 향후 공통의 과제쯤은 정리해 주었어야 한다. 결론이 부재한 이 책은 자칫 허무적인 냉소의 분위기로 모든 비평이 마감될 여지가 있다. 저자의 블로그에도 이 현상은 반복된다. 이는 유치하더라도 결론을 내고 다음의 발전을 기약하는 일부 정치인의 서적만 못하다고 할수 있다. 혼자만 저 높은 혹은 저 낮은 곳에서 초탈한 시선으로 세상을 견지한 후 세상의 변혁 가능성은 전혀 인정하지 않은 채로 보수적인 세계관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것이야말로 탈정치적인 결과다. 저자는 문화비평이 정치적인 것이라 정의하였다. 내가 이 책을 통해 배운대로 그를 해석하자면 그는 ’정치주의자이면서도 선명하게 정치주의의 불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교수님이라는 생각이다. 문화비평이라는 장르가 원래 미완성을 그 완성으로 한다는 주석을 달아주셨다면 모를까.


문화비평에 문화는 없다

   이 책에서 언급된 한국 사회의 문화현상은 한국이라는 대극장에서 상영된 억압 장르의 스펙타클 영상이었고 대부분 흥행에 성공한 바 있다. 저자가 이러한 현상들을 분석하는 방법은 ‘동전 뒤집기’와 ‘뫼비우스의 띠’ 를 살펴보는 관찰기법이다. 전복과 입체화. 동전의 나머지 한 면의 실상을 뒤집어 보여줌으로써 드러난 이데올로기 이면의 은폐된 진실을 포착하는 것. 진실의 배면에 뫼비우스의 띠처럼 엮여 있는 진리를 찾아내는 것. 예를 들어 연쇄살인범 유영철을 맹렬히 비난하는 대중을 말할 땐 ‘유영철을 논하면서 유영철은 없다’하는 식이다. 사람들은 이미 갖고 있던 희대의 살인마 법칙에 부합하는 유영철을 재차 발견하여 한껏 사연을 추억하는 것이라는 분석이다. 김길태 사건 이면에는 파렴치한 악인에 가려진 재개발 지역의 피해자, 여중생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시선이다. 유영철이라는 동전 뒷면엔 ‘살인의 추억’이라는 집단 심리가 있고 김길태라는 뫼비우스의 띠에는 ‘재개발 도시정책, 한국식 자본주의’가 연결되어 있다는 논리이다. 이런 식으로 세계는 없어도 세계화는 있다, 민족은 없고 민족주의는 있다는 결론이 이어진다. 사실 동전 뒷면이 추잡하든 뜻밖이든 그것도 동전이긴 하므로 모든 것은 원점으로 비쳐지는 경향이 없지 않다. 뫼비우스의 띠는 끝이 없는 블랙홀이므로 결과가 미궁으로 빠지는 국면도 있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자칫 문화비평에 문화는 없다, 문화비평에만 모든 게 있다, 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동전의 뒷면처럼 뫼비우스의 띠처럼 결국 하나로 이어진 징후에 숨어있는 정치경제적 측면을 말한다 했지만 내가 보기에 저자가 가장 많이 주장했던 것은 그러한 증상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에 있었다. 어쩌면 이러한 가시적 효과 때문에 저자로부터 지적당한 불쾌감이 결국 이 책을 향한 불만이 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저자에 의하면 이 책에서 말하는 모든 증상의 주체는 (여성이건 남성이건)한국의 도시 중간계급이다. 부르주아도 아니고 프롤레타리아도 아닌 계급으로서 이들은 ‘쾌락의 평등주의’에 길들여져 있으며 그들에게서 한국적 자아의 도착증 상태를 발견한다 주장한다. 저자가 투시하는 렌즈는 중간계급으로 상징되는 집단이 ‘세금 올리는 건 반대하면서 복지정책 확대를 지지하는 것’과 같은 맥락의 분열 증세이다.

   
 


아무리 얻고 싶어도 얻을 수 없는 것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행위(부자나 연예인에 대한 신비화), 또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취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법에 대한 반발(인터넷 댓글에서 드러나는 우상 파괴), 그리고 절대 악이나 권력에 대해 관대하면서도 (박정희에 대한 향수와 강력한 권에 대한 갈망) 이런 악과 권력에 자신이 귀속되는 걸 원하지 않는 것(미국적 개인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 이런 모순이 바로 도착증의 구조다.       -117p

 
   

    
   이 책에서 이들 중간계급은 사회구조적으로 금지된 억압을 방어하는 기제로, 기존 질서의 붕괴를 막기 위한 대책으로 주이상스를 끊임없이 요청하는 주인공으로 근거한다. 유영철도 이순신도 박정희도 전두환도 신세경도 소녀시대도 이들에 의해 그때그때 호출된 유령이자 판타지라 말한다. 월드컵은 기적이라는 유토피아 충동을 한데 모아 논리로 끌어낸 문화형식이다. 이명박 반대는 더 강력한 이명박에 대한 열망이며 촛불은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다시 신자유주의에 더욱 충실한 논리로 해결하고자 하는 역설이라 설명한다. <쩐의 전쟁>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반응하는 한국 중간계급’의 판타지며, 반지성주의는 ‘먹고사니즘’이라는 대한민국 유일의 이데올로기와 섭동하는 판타지며, 부자 신드롬은 ‘계급적 대립의 리얼리티를 은폐’하는 판타지라 부연한다. 저자는 이들의 판타지를 다양한 종류로 구분짓고 저자의 법칙대로 뫼비우스의 프레임 속으로 도식화, 정형화한다. 문화비평은 우리 사회 각종 판타지를 발본하여 판타지의 성격을 규명하는 일은 아니었을까.

   이들은 북핵의 공포보다는 파산의 공포를 더 두려워하며, 아파트에서의 삶이 아닌 아파트 가격의 즐거움에 중독된 존재들이다. 지속적인 경쟁을 통한 즐거움을 원하며 소말리아 해적소탕 같은 군사행동은 정당화하면서 자신의 안위를 위협받는 전쟁은 거부한다. 월드컵 응원녀는 이들의 ‘즐거움을 위해 한국사회가 나눠 갖는 절대적 대상’이며 소녀시대 역시 어느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실상이 아니고 다같이 공유할 수 있는 인형으로서 비굴한 오빠들의 판타지를 의미한다. 미드는 미혼여성의 자기계발 욕망 판타지며 막장 드라마는 중산층에서 누락된 아줌마들의 판타지다. 중간계급의 불안과 분노를 섹슈얼 판타지로 극장화 한 것이 김수현 드라마이다. 소주 마시는 여성은 ‘몰락해가는 중간계급에 바쳐지는 조시’이며 그랜저는 수입세단까지는 힘들어도 한국세단까지는 가능한 중간계급의 욕망을 대리한다. 타블로 논란은 중간계급이 주체가 되어 도착적 퍼포먼스의 의미를 실행한 근대적 마녀사냥이었다. <워낭소리>를 보고 흘린 눈물은 농촌이라는 실체가 아니라 지금은 잊어버린 풍경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독설이 신해철을 진보로 보이게 했다면 그것은 폭로가 자본주의의 상품화를 작동시키는 논리와 같은 이치이다. 이러한 괴담과 소문의 출처로 기능하는 인터넷 공간은 ‘사실상 자신의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들끼리 담합하는 장소’인 것이다. 이렇듯 저자가 나열하는 문화비평의 조각들은 대부분 중간계급의 현재증상을 통한 성격규명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니 중간계급의 세분화를 통한 성격통합을 그 골자로 하고 있다. 저자의 말대로 모든 이데올로기가 ‘주입‘의 과정을 거쳐 주체로 스며드는 것이라고 할 때 중간계급의 주체에 해당되는 나는 이 책이 뜻하지 않게 모종의 패배감, 열등감, 죄의식을 안겨주었다 말하고 싶다. 문화비평에 문화는 없었지만 그 문화를 만들어온 사람은 가득했던 것. 사실 문화는 잘못이 없지만 사람은 얼마든지 잘못을 할 수 있는 존재들이니까. 그렇게 잘못해온 시간들이 문화를 창출하는 것 일테니까. 이 역시 문화비평을 낱낱이 보여주면서 우연하게 생겨버린 동전의 뒷면은 아닐까.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익숙하고 당연해 보이던 문화이해 방식을 한번 뒤집고 비틀어 새로운 층위를 발견할 수 있는 통로는 하나 발견한 것 같다. 늘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주는 대로 인식하던 습관에 경고등 하나는 달아놓은 느낌이다. 재밌고 유익했다. 한가지 분명한건 뒤집는 재미를 위해 동전의 뒷면을 애써 뒤집어 보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다. 모든 진실이 그 배후에, 그 이면에 있는 건 아닐 터이다. 그리고 뒤집어 폭로했다면 그 자체로 만족감을 느끼기 보다는 그 후의 대안이나 효과도 고려를 해야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논리가 진실을 이기고 분석이 진실을 규정지어선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끔 인터넷 공간에서 어떤 현상이나 사건의 이면을 색다르게 보았다는 주장을 하며 사실상 비밀을 폭로하는 사람들을 본다. 은폐된 진실을 나누어 구경하는 것은 저자의 말대로 쾌락 평등주의에 해당된다. 이는 다같이 공유하는 진실이라면 개인의 상처나 희생쯤은 감수해도 된다는 공동의 폭력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셈이다. 이 책이 모아지는 결론이 없었기 때문에 궁극엔 문화비평이 진실폭로나 진리발표의 방법론을 말하는 장르로 인식될 위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재미나게 넘어가는 수준인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은 언제나 설레인다. 그것이 정말로 진실이든 거짓이든 들추어보는 전 과정은 금지된 쾌락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진리를 향한 주이상스다. 독서 중간계급의 지적허영을 채워줄 문화판타지다.

 

<덧붙임> 

며칠 지나 다시 읽어보니 나는 이 책의 좋은 점은 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책의 장점은 ..... 한마디로 비웃는 재미이다. 씁쓸한 안주, 그러나 알코올을 당기는 매력.  
서두에 언급했지만
시청률 높지만 시나리오는 황당한 막장 드라마를 습관적으로 보는 이유와 같다.
그렇다고 이 책이 막장식의 비평이라는 뜻은 아니다.(신을 모두 모아 상영하니 막장드라마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계속하여 책을 넘기게 하는 그 기분도 중요하다.
학식과 교양이 뭐 별건가. 

그래서인지 많이 안다는 게 요즘은 크게 부럽지가 않다.
세상을 깨치고 통달하는 그 '앎'이 앎을 넘어 '선'이나 '행'이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암튼, 이 책을 덮고나면 나름대로 서로 다른 교훈은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인문교양서적 덮고나서 재미봤다는데 부채감을 느끼는 분만 아니라면
색다른 재미를 위해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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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8-06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한사람님의 저번 소개로 관심이 생긴 책이었는데 '여인의 향기'를 언급하시니 좀더 솔깃. ㅎㅎ 김선아 연기 볼라고 드라마 보니, 남주가 누구인지는 별 관심없긴 하지만 그래도..쩜쩜..ㅎㅎㅎ

햐아..거진 백 번이나 반복되믄 지겹지요. 반복효과의 장단점이라..와우. 한사람님 분석 짱!!
덧붙임..도 의미심장합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