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만 되면 한국을 떠나던 이모가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을 이기고 꽃이 피는 게 그렇게 싫더랍니다. 만물이 소생하는데 자신만 그대로인 것 같다구요. 이모는 봄만 되면 엄마에게 통장을 맡기고 만약 내가 비행기 타고 가다 사고가 나서 죽게 되면 이 통장은 언니가 다 가져라, 하며 훌훌 떠나곤 했습니다. 별소릴 다한다, 니 죽고 나면 내도 살 수 있을 거 같나, 저는 옆에서 어렴풋이 그렇게 들었습니다. 엄마는 유난히도 형제들 중 그 이모에게 각별했습니다. 이모는 남편따라 미국에서 삼십여년 외롭게 사셨어요. 이모부는 한국에 돌아와 승승장구했습니다. 아주 높은 고위직까지 승진하며 신문에도 자주 나더군요. 이모는 엄마에게 많이 의지했던거 같아요. 이모는 돈이 많았습니다. 내 어머닌 그렇지 않았구요.

   언젠가 이모는 자기가 어렸을 때 엄마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이야기해 주셨어요. 엄마는 그 시절 양재학원의 원장이었는데 학생들이 수강비라고 돈을 서랍에 놔두고 가면 자신에게 마음껏 쓰라고 하셨대요. 기쁜 마음에 서랍을 열어보면 지폐가 수두룩했고 엄마는 얼마를 빼내가도 뭐라고 하지 않으셨다나요. 아예, 돈이 얼마나 있는지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대요. 이모는 그 돈을 가져가면서 훗날 자신이 돈을 벌면 언니에게 꼭 갚을거라고 다짐했대요. 그렇게 수차례 빼내간 돈을 갚으려면 아직도 멀었다 하셨죠.

   이모는 마음이 많이 아픈 분이었는데 소위말하는 정신과 병동에서 주기적으로 치료를 받던 분이었어요. 일종의 피해망상증, 우울증이 깊어 주변 누구와도 대화를 이어가기 힘든 분이었습니다. 이모는 명절이면 자신의 집에 배달되어온 고가의 선물을 모조리 엄마에게 가져다 주셨어요. 어떤 상자는 명함이 떼어지지 않은 채로 우리집으로 배달된 것도 있었죠. 항상 가락동 시장 단골집에서 최상품의 과일만 사다가 직접 가져다 주셨어요. 형부와 저 말고 언니 꼭 먹으라구요. 엄마는 그걸 아꼈다가 저와 손자 주신다며 챙겨주셨지만요.

  아이는 그 이모를 '과일할머니'라 불렀어요. 정말로 맛난 과일만 사다 주셨으니까요.
  오늘아침, 아이가 뜬금없이 과일할머니 보고 싶다, 하는 것이었어요. 추석이 낼모레이고 마트에 가면 과일들이 많으니까 아마 과일 생각이 났나봐요. 그런데 아이는 말했어요.

  " 엄마, 나는 태어나서 과일할머니가 사준 과일만큼 맛있는 걸 먹어본 적이 없는 거 같아. 요즘 과일은 왜 맛이 없어? "

  그러게요. 과일이 정말 맛이 없어졌습니다. 우리 땐 한여름 은쟁반에 큼지막하게 잘라먹던 수박도 참 맛있었고 복숭아도 향이 그득했고 배도 참 달콤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비싸기만 하고 그때만큼 맛나고 싱싱한 과일을 만나기 참 힘들죠. 우리가 입맛 수준이 높아진 건지 과일이 맛이 없어진 건지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과일을 건네던 서로의 정이 사라져서 그런건 아닐까 싶기도 해요. 이모를 생각하면 맛난 과일에 이모의 사랑까지 곁들여 입으로 들어간 것이니까요.

   그런데 저는 아이가 사라지자 눈물이 나네요.

   엄마는 이모와 같은 날 돌아가셨습니다. 사람들은 운전자였던 이모를 따라서 차에서 내리지 않은 거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모를 많이도 원망했어요. 사고를 낸 운전자보다 운전을 한 이모를 더 미워했습니다. 엄마는 의심없이 저를 버리고 이모를 따라간거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이제 좀 알 것도 같습니다. 만약 이모 혼자서 가는 길이었다면 얼마나 외로왔을까 하구요.  하루에 사십명 넘어 자살을 하고 칠백명 넘게 사망한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런 기사를 보면 내 차례는 언제일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는 죽는게 무섭다기 보다는 죽을때 혼자 있을까봐 두려워요. 엄마는 참 멋진 분이셨죠. 저는 그런 언니가 없지만요. 오늘은 그런 언니를 가진 이모가 참 보고 싶습니다. 추석이 되면 맛난 과일과 선물 꾸러미를 가득 가져다 주시던 과일할머니, 그 모습 그대로요. 웃기죠? 과일이 보고 싶은 건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부모님이 없는 추석이 벌써 다섯 번째네요.
   그땐 몰랐는데 명절이라는 것이 결국 부모님과 한 가족임을 나는 그 속에서 안온한 존재임을 재차 확인하는 인증식 같은 거 라는 생각입니다. 차례상 차리는게 귀찮고 찾아 뵙고 돌아오는 것이 고단하고 친척들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시간들이지만 돌아보니 나는 그 속에서 그들속에서 어제도 추억하고 내일도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올해는 산소에 가지 못할 듯 하네요. 너무 먼 곳이라 일년에 한번 가기가 힘듭니다. 실은 지금 제 꼴이 형편없어서 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좀 쓸쓸합니다. 추석이 외로운 분들은 그 외로움을 벗삼아 추석을 견디지요. 어느 통계조사에 보니 며느리들이 보기 싫은 사람은 시부모가 아니고 시누이 부부와 형님과 동서네라고 해요. 시부모야 어짜피 감당해야 할 몫으로 여기지만 옵션으로(?) 붙어오는 시누이네와 형님, 동서네는 경쟁구도속에서 삶 자체가 비교화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남자들은 밥상만 받으면 되기 때문에 언제나 우아하게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데 여자들은 부엌에서 꼭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요. 그러면서 웃고 떠들다가도 집에 돌아갈 때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오르죠, 하하. 갑자기 효녀 시누이와 엄청 바쁜 동서도 생각이 나네요.

   사는게 참 여러 과일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떨 땐 겉은 빨갛지만 속은 하얀 사과같기도 하고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수박같기도 하고 조그만 알알이 모여 한 송이 기쁨이 생기는 포도 같기도 하고.

   아주 예쁘고 토실토실한 복숭아를 가져와 접시에 단정하게 껍질을 벗기고 한입 크기로 잘라 입에 넣어주시던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앞치마에 사과를 쓱쓱 닦아서 윤이나는 껍질채로 한입 베어 물고는 아 맛있다며 먹어보라던 이모를 생각해요. 홍시를 좋아라 하시던 할머니도 생각납니다. 단감을 좋아하던 아버지, 그렇게 대추만 골라먹던 사촌동생도 기억나요.

   예, 저는 딸기를 좋아했는데 항상 명절땐 딸기철이 아니어서 별로 과일에 관심이 없었죠. 아주 어렸을때 그땐 제철이 아니면 과일을 먹지 못할 때, 한 겨울이었는데 리어카에서 딸기를 파는 겁니다. 엄마에게 떼를 쓰며 사달라고 울면서 버텼더니 오백원인가 주고 사주셨어요. 집에가서 먹어보고 다 뱉어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옆에 있던 바나나를 사달라할 걸 그러면서요.

   얼굴도 이름도 사는 곳도 하는 일도 모르지만
   저를 알고 제 글을 알고 계신 모든 분들에게 이 물컹한 과일같은 마음을 전합니다. 혹시나 서재일로 저때문에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면 그 분들에게도 사과의 말씀 전합니다. 글을 쓸 때는 억하심정이 있어 그러는게 아니지만 읽다보면 꼭 내 이야기를 하는구나 싶을 때가 많습니다. 바람같은 면도날이 스치우죠. 하지만 제가 그랬듯 일시적인 서운함이 다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단지 이곳은 얼굴보고 털어버릴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에 마음이 그대로 굳어버리는 것이 안따까울 뿐이죠. 예전에 돈 좀 있을 땐 겉치례로 과일이고 굴비고 김이고 멸치고 한과같은 선물도 많이 보내드렸는데 지금은 그저 마음뿐입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 알게 모르게 마음으로 힘이 되던 분들이 생각나서요. 그래도 마음 하나라는 거 그게 이렇게 울컥하고 소중한 건지 몰랐습니다.

   추석 연휴 예쁘게들 지내시라구요. 혹시 저처럼 부모님 안계시거나 누구 그리운 사람이 간절한 분들에게 용기와 위로도 전합니다. 달보고 소원 비실 거 같으면 소원 생각하다가 갑자기 옛날 생각나서 훌쩍거리지 않기로 해요. 달려가 손수건이라도 드리지 못하니 그저 남몰래 숨어서 구경하기로 합시다.  

  이번 달은 아주 커다랗고 깊은 호수였으면 좋겠어요. 보고 싶은 얼굴들이 거울처럼 비추어 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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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9-10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이모저모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래 아이리시스님과의 댓글 읽었고, 아마 심정적으로 저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도 허탈합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 결론을 맺으려고 하는 것은, 저와 친한 다른 알라디너에 대한 걱정 때문입니다.
또한 알라딘 서재에는 다른 의견도 존재하기 때문이고 평지풍파없이 조용한 것을 선호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지쳤지만, 친한 분들 중 이번 일로 굉장히 힘들어하시면서 도와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는 그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서재 폐쇄를 먼저 고려한 점이 너무 큰 파장을 불러왔을지 모른다는 점에서 저 역시 반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다른 문제 해결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로 인해 한사람님과의 대화 즐거웠습니다. 제 과일같은 마음도 전합니다.

즐거운 추석 되시기 바랍니다. 종종 뵐게요.

한사람 2011-09-10 00:40   좋아요 0 | URL

어휴..제가 좀 오늘 잔일이 많았는데(하는 것도 없으면서 괜히 바쁘네요 ㅋ) 답이 늦었죠.
벌써 하루가 흘렀네요. 모든 건 지나간다고 시간이 약입니다. 모두들 법적이고 냉철하고 온라인에서 공개글 쓸때 어느 정도 비난이나 혹은 예상치 못한 앞일까지 고려해야 한다는거..왜 모르겠어요. 커뮤니티 일이년 한분들도 아니고. 블로그 한두번 접어봤나요 ㅋ. 이번 일같은 경우 대개 운영측보다는 이용자쪽의 관리문제로 귀결될거 뻔하죠.

예, 저는 원칙이나 관례, 그런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일이 일어났을때 사소하더라도 피해본 사람이 있다면 다같이 위로해주고 이해해주고 한번쯤 피해본 당사자(설령 그 피해가 웃겨보여도) 입장에서 토닥여주는 분위기가 아쉬워요. 남들에겐 먼지같은 상처도 내게는 우주 같은거 잖아요. 저도 그리 살갑게 선뜻 위로하는 편은 못되지만 ..가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특히 필요 이상으로 이성적인 분들 자주 보는거 같습니다. 9시 뉴스 피해자 명단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지만.. 그게 아니더라구요. 저는 쿨하지 못해서 그런지..마고님이 받아본 댓글 같은거 억울하고 분해서 그냥 아무말 안하고 자폭했을 겁니다. ㅋ

그리고 이곳에선 말 한마디가 거의 모든 표시니까 서로 배려하는 분위기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 맞고, 다 이해합니다..

그치만 마음은 쓸쓸합니다..

마녀고양이님도 추석때 가족들과 많은 정 나누어요^^

2011-09-10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9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0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June* 2011-09-09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리 추석 ,되어요. 히히.
 

한사람 2011-09-10 00:46   좋아요 0 | URL

앗, 준님!
중요한 순간에 짠~ 정말 고마워요^^ 하하. (따라해 본거여요 ㅋ)

라주미힌 2011-09-09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절 잘 보네세요 ㅎ.
뭉클하네요 .

한사람 2011-09-10 00:47   좋아요 0 | URL

어멋, 라주미힌님.
오년전에 뵈었으면 제가 좀 발랄했을텐데요 ㅠ
맘 편한 추석 되시길요, 고맙습니다!

조선인 2011-09-09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난주 미리 어머니 납골당 다녀왔어요. 벌써 7년인데, 아직도 눈물이 쏟아져요...
한가위 잘 보내시길...

한사람 2011-09-10 00:49   좋아요 0 | URL

저는 엄마가 2007년에 떠났어요. 그래도 다녀오셨네요. 아직도라뇨..
세월이 가면 더하는거 같은걸요..
사무친다는게..그런 그리움이라는게 어떤 건지 말로 다 못하는 보고픔이 어떤건지
차마, 입으로도 못 꺼내요 ㅠ

조선인님도 건강하고 가족들과 훈훈한 명절 보내세요!, 고마워요~

2011-09-09 15: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0 0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0 0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0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0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9 15: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0 0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1-09-09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석 잘 보내요.^^

한사람 2011-09-10 01:14   좋아요 0 | URL

예, 스텔라님도요. 100일 프로젝트 끝나고 좀 여유로와 지셨나요?
제 기억으론 이 맘때가 생일이셔야 하는거 같은데..

또 맘 뿐이네요.. 명절과 생일 모두 훈훈하고 또 풍성한 연휴 되길 바랍니다^^

oren 2011-09-09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이 짜안~ 하네요.

추석때 마다 '부모님' 모두 살아 계셨던 그 시간들이 얼마만큼 소중했고, 다시는 되돌릴 수 없기에 얼마만큼 안타까운 시간들이었는지 그 누군가는 알테고, 또 그 누군가는 아직도 잘 모를 테지요. 저도 올해 추석부터는 '아버님'을 뵐 수가 없답니다. 물론 성묘를 가면 고향의 산자락에 고요히 잠들어 계신 아버님을 뵐 순 있겠지만 말입니다.

올해 추석엔, 둥근 보름달을 올려다 보며 '어느 사이에' 우리 곁을 훌쩍 떠나가신 소중했던 많은 분들을 다시금 떠올려 보고, 그 분들께 마음 속 깊이 감사하는 시간들을 가져보고 싶네요. 눈물 흘리지 않고 말입니다.


한사람 2011-09-10 01:19   좋아요 0 | URL

예..저는 조금 알고 있는 그 누군가에 속하네요..
아버님이 올해 돌아가셨으면 올 추석때 너무나 많이 그리우실 듯 합니다.
저는 아버지 돌아가시고 첫 추석때 친척들이 우르르 집에 왔을때 저도 모르게 그 속에 아버지가 없다는 현실감에 눈물이 주르륵 흐르더라구요. 사람들 앞에서요.. 명절땐 더 집에서 아버지 존재에 대한 상실감이 큰 거 같아요. TV를 봐도 어르신만 나오면 눈물이 나던걸요 ㅠ

아버님 편안히..그곳에서 영면하셨으면 합니다. 또 oren님도 그 슬픔을 더 굳건한 에너지로 빚게할
따스한 시간들 가지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11-09-09 2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0 0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1-09-09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애잔한 추억과 더불어 뭉클하고 울컥하네요.
중년이 되면 부모님과 함께 할 시간이 줄어든다는 자각도 해야 되나 봐요.
부모님은 안 계셔도 정다운 얼굴들 만나는 즐거운 명절 지내시기를...

한사람 2011-09-10 01:45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제가 자주 못가지만
언제나 반가워요 ㅋ

추석도 어느덧 인생의 추억으로 말할 나이가 되었네요..
저는 지난 여름 끝내 친구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원피스는 아직 걸려있어요.
연락을 안하고 다시 떠난 거 같습니다.

순오기님도 명절 연휴에 바쁘실텐데,
건강하고 또 맘편하고, 풍성한 시간 되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cyrus 2011-09-09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휴 때 비 온다던데 안 왔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비가 와도 보름달이 또렷하게 뜨면 괜찮을지 모르겠지만요.
아무래도 비구름 때문에 올해 추석에는 달을 못 볼거 같아요.. -_-;;
그래도 연휴이니만큼 즐겁게 보내야겠죠 ㅎㅎ 한사람님도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

한사람 2011-09-10 01:4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비 소식을 들었는데..
일년에 달 보는 날이 얼마나 된다고 꼭 그날 비가 와야 하는지 하늘에 묻고 싶네요 ㅠ

아마 비구름 사이로 슬며시 흐릿하게나마 간절히 보고픈 사람들에게만 보여주지 싶은데요
시루스님은 어떤 소원을 빌지 궁금하네요

명절때 맛난 음식 먹고 책도 짬짬이 읽고 또 뒹굴기도 하고(무도 팬이라 했죠?)
영화도 보고, 그렇게 맘 편하고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래요^^

(여자친구 없어요? ㅋ)

2011-09-10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1 0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風流男兒 2011-09-10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지막이 알게된 요즘의 일에, 그냥 궁금하여 돌다돌다 왔습니다.
평소같으면 조용히 읽고 갈텐데, 오늘은 그래도 추석이니까 인사는 하고 가고싶네요.

추석 잘 보내세요 ^^

한사람 2011-09-11 07:2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저 이 닉네임이 어디서 한번 본것 같아...
제 기억을 더듬어 보았더니
<분노하라> 댓글의 주인공 이셨어요 ㅋㅋ

인사해주셔서, 아는 척 해주셔서 제가 고마워요
남자들도 명절이 마냥 편한것만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이번엔 어떤 갈등이 생길까..
나중에 뭔소리를 들을까.. 후유증이 꼭 다음 명절인 설때까지 ㅋㅋ 가기 때문에
그저 이쪽 저쪽 아무 일 없기를, 달보고 빈다고 하던걸요ㅠ.ㅠ

이번 추석엔 부모님하고 눈 한번 맞추어 보는 어색한(?) 사랑교환 한번 해보세요.

건강 가득 하시길요^^

2011-09-11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4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추천의 의미


   어쩔 수가 없나봅니다. 저는 이 곳에 당분간 적을 둘 생각이기에 평소 생각하던 문제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네요.

   오늘 제가 이야기 나누고픈 주제는 ‘추천’입니다. 바로 이곳 알라딘에서 추천을 받는다는 의미와 추천을 한다는 의미에 대해 주제넘지만 의견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저는 어제 ‘알라딘의 정체성 탐구하기’라는 페이퍼에 알라딘에서의 추천이 가지는 의미를 적었습니다.

   
 
당신 글에 감동했다는 ‘공감’도 되고 당신 의견에 ‘동의’한다는 뜻도 되고 이 글을 다른 사람도 읽었으면 좋겠다는 진정한 ‘추천’의 의미도 되지만 알라딘에서의 추천은 다른 곳에 비해 ‘동의’라는 의사표현일 경우가 많다는 것. 추천이라는 기표가 동의라는 기의를 가진다는 것은 여론형성에 있어 중요한 잣대입니다. 저는 그래서 알라딘이 치밀하고 정치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페이퍼를 쓴 직후 ‘추천’이라는 기표가 마치 (서재 내에서 일어나는)찬반토론의 의견을 수렴, 반영하고 급기야 여론의 역할을 수행하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2, 추천의 문제

   지금부터,

   마녀고양이님과 하이드님에게 먼저 죄송하다는 공개사과를 드리고 이 글을 적어보려 합니다. 두 분은 제가 알라딘 운영과 관련한 개인적 의견을 제시하는 페이퍼에 두 분의 닉네임이 거론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실 수 있으나 이 건은 A와 B분이라고 언급하는 것이 더 웃길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두 분께서 페이퍼를 올린 것에 어떠한 오류를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알라딘의 운영상 보완점을 제시하려는 것이니까요.(너그러이 이해해주세요^^)  


 


    

    여기서 마녀고양이님의 페이퍼에 추천한 숫자(위)와 하이드님의 페이퍼에 추천한 숫자(아래)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마녀고양이님의 글엔 덧글이 많은데 그보다 많은 추천수를 기록한 하이드님의 글엔 덧글이 적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마녀고양이님의 글엔 위로의 덧글이 많을 수 있는 시점이었고 하이드님의 글엔 별도로 굳이 덧글로 의사를 부연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린 혹시 하이드님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것에 덧글은 부러 남기기 걸끄러운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추천으로 동감의 의사를 표시한 것이 되겠지요. 대놓고, 글을 공개하는 입장에서 관리는 알라디너의 몫이다, 하기는 껄끄럽지만 그래도 의사표시는 하고 싶은 것이니까요. 즉, 추천이 숨은 댓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물론, 52도 많고 78도 많습니다. 제 생각엔 52에도 포함되고 78에도 포함되는 분도 있을 거라는 예감입니다. 저만 해도 두분의 말씀엔 모두 공감하는 입장이었으니까요. 또 둘다 맞아도 굳이 추천을 안 누르신 분도 계시겠죠. 이 숫자가 바뀌어질 수도 있구요.  하지만 숫자상으로 어제 시점의 결론은 하이드님의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이 더 많구나, 가 결론이 되었어요. 오로지 숫자만으로요.

   저는 추천이라는 '숫자'가 은연중에 대립되는 의견을 가진 알라디너에게 (어느쪽이든)일방적인 폭력이 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추천하시는 분들은 누가 이겨라, 당신이 틀렸다, 해서 추천을 하고 안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추천 대상에 놓인 당사자는 추천의 주체와 동일하게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지 않을까요.

   
 
알라딘이 옳더라도 피해라 느끼는 당사자가 있으니 문제제기 한번쯤 할 수 있는 사안이었고 그런 점에서 알라딘 답변은 아쉬워요. 서재레터가 얼마되지 않았다면 어찌보면 앞으로 더 커질 수 있는 문제를 마고님이 제시한 걸 수도 있잖아요. 사안은 좀 다르지만 글을 배포할 때 본인동의 직접 받는 곳도 꽤 있어요. 법적으로 거리낌 있어 그런 게 아니라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그런 거겠죠. '예의'와 '배려'가 사라진 글쓰기 공간에 소통이 있을 리 없어요. 그래도 위 하이드님(언급해도 되나요)은 본인을 걸고 확실히 본인생각을 밝혔지만 거기 익명으로 추천만 누른 분들은 너무 아쉬워요.(저는 하이드님 의견이 틀렸다거나 추천 누르신 분들 비하하는 거 아닙니다. 익명에 기대 입장의 당당함을 내세우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거란 생각이 들어서요) -- 아이리시스님
 
   

   마녀고양이님의 서재에 오늘 아이리시스님이 남겨주신 덧글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흠칫했습니다. 익명으로 추천만 누른 분들이 아쉽다는 말씀, 뼈아프지만 저라고 다를 바 없는 그 익명에 기대어 내 입장을 표명하는 행위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더군요. 앞으로도 누가 어떤 문제를 제기했고 또 그에 반대하는 분이 글을 올리면 상황은 이와 비슷해 질 거라는 조심스런 예견이 가능하다 싶습니다. 추천의 수가 (알라딘과 상관없이)마치 의제의 결론을 내버린 듯한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저는 이러한 추천제도가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상하게도 유독 알라딘에서는 이 추천의 의미가 서재내 여론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에 문제제기를 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알라딘은 제가 아는 다른 서점보다 무엇이든 찬반의견의 제시가 활발한 곳이고 또 언제나 이처럼 의견대립도 발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추천의 방향

  온라인 서점에는 포스트 하단에 추천을 할 수 있는 항목이 있습니다. 모두 방식이 틀리더라구요. 



 1. 인터파크 & 리브로 - 추천을 어디서 하나요?






 인터파크(위)와 리브로(아래)
는 자신의 포스트엔 추천이 표시되지 않습니다. 책 이미지를 누르면 책정보와 관련 리뷰가 종합적으로 뜨는 창이 나옵니다. 추천의 표시와 행위를 그 페이지에서 할수 있더라구요. (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추천이 거의 없기는 하더군요.  
 

2. 반디앤루니스 - 공감하셨나요?



 

 반디앤루니스는 추천이 아니라 '공감'이더라구요.  익명이고 공감이 세개 넘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3. 교보문고 - 추천의 숫자가 대박이네요 !

 

 

  

  교보문고는 포스트 맨 아래 하단 중앙에 추천을 삽입해 놓았는데 둘러보면 세개 이상 받기가 어렵더군요.  추천으로 나타나는 숫자가 부담스럽게 크더군요. 

 

4. 예스24 - 무엇을 추천하는 것이죠?

 

 

  예스는 특이하게 추천 앞에 '이 리뷰를' 이라는 문구가 추가되어 있어요. 리뷰가 아니고 일반 페이퍼의 경우 '이 포스트를'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스는 블로그 메인화면에서도 리뷰와 포스트를 구분, 분류해서 많이 읽은 순서대로 노출을 시킵니다. 포스트보다 리뷰를 우선시하고 있어요. 추천수보다는 조횟수를 우선시하여 노출시키구요. 물론 이주의 최다 추천은 따로 리뷰 메인 화면에 노출시켜주더군요.   

  

5. 그 밖에 - 공감과 미투는 내가 했다.


 

 

 

 

  미투데이가 공감이라는 뜻으로 '미투'라는 항목이 있어요. 이건 공감하고는 약간 다른 뉘앙스인데 나도 그랬다, 나도 너와 같아, 하는 그 말 한마디에 부연설명 없는 공감의 표시이죠.  

 

 

  왜 다르냐면요. 블로그에서의 공감과 비교해보면 될 듯해요. 블로그에서의 공감은 알라딘에서의 추천과 다른 것이 일단 공감하는 닉네임을 알수가 있어요. 즉, 이웃간에 서로 방문은 했는데 덧글을 남기기 바쁘다던가 인사는 하고 싶은데 할말은 없다거나 할 때 성의 표시로 공감을 누를수 있다는 것이죠. 포스트에 대한 공감과 상관없이요. 그리고 익명의 의사표시가 아니라는 겁니다.  미투나 블로그 공감이나 모두 익명이 아닌 친구, 이웃인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아는 범위내 에서 추천을 의미하는 기표들을 비교해보았어요.  

   알라딘처럼 추천이 활성화 된 곳이 드물고 하더라도 추천의 의미가 그보다 추천을 받지 못한 회원에게 (공개적인)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추천이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진 것일까, 생각할수도 있지만 저는 다른 생각을 해보았어요. 추천이 좀더 세분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구요. 만약 의견을 제시하는 페이퍼엔 '동의, 중립, 반대' 이런 의사표시도 가능하겠지만 저는 그 이전에 추천을 꼭 익명으로 해야 할지를 묻고 싶습니다. 추천의 의미가 어짜피 긍정의 의미인데 익명일 필요는 없지 않나 싶어서요. 제가 확인해보니 알라딘은 로그인 안해도 추천이 가능하더라구요.

   제가 예전부터 분석은 꽤 하는데 결론을 도출못하는 기획형이라..다른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또 혹시나 제가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이 있다면 지적해주셔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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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9-07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한사람님 :)

저는 알라딘에 둥지를 튼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이 글 보니까 또 다시 알라딘 시스템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네요. 저는 '추천'이 지니고 있는 공개적인 영향은 두 가지라고 생각해요. 첫째는 추천 수가 많은 글이 메인 화면에 노출되듯이, 더 많은 사람에게 글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두번째는 알라디너 분들이 직접 좋은 글을 선발하는 것. 추천을 얼마나 받느냐에 따라 해당 글이 가지는 공개성 여부가 크게 달라지는 것 같아요. 이 점은 자연스러운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저 같은 경우에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글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으로 추천을 한답니다. 무슨 그럴 듯한 원칙은 아니구요. 그저 마음에 드는 글이다 싶으면 다른 사람도 읽으면 좋겠다 싶고, 내가 마음에 들었어요, 라고 표현하고 싶어서 추천을 눌러요. 그런데 추천 수와 댓글 수가 맞지 않으면 (익명의 추천자가 있으면) 내 의도가 잘 전해지는 걸까 싶은 생각도 들더라구요. 한사람님 말씀처럼, 추천한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비밀 투표의 원칙이 적용 되는 공간은 아니니까요.

저는 그저 다른 분들 글이 좋아서 여기저기 추천 누르고 다니는 사람인데, 여기에도 알고 보면 다양한 의미가 있을수 있겠네요. 그래도 '추천'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저 글이 좋아서, 라는 한 문장으로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 '추천' 아닐까 싶어요.

소중한 글, 잘 읽고 갑니다 ㅎㅎ

한사람 2011-09-08 08:4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소중한 글이라 해주셔서 기쁩니다^^
(이렇게 덧글도 없는데 그나마 정성스레 남겨주셔서 더욱 감사하구요 ㅋ)

예, 제 경우도 이런 좋은 글은 여러사람이 읽어야 해, 하는 심정으로 추천을 누르곤 했어요
(대부분의 이웃분들이 그렇게 하시겠죠)

저는 오늘 추천과 관련된 익명성에 대해 알라딘이 운영하는 방침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결론은,
알라딘측은 익명의 추천, 익명성의 즐겨찾기를 더 존중하는 곳이라는 생각입니다.
확인해보니 로그인 하지 않아도 IP주소만 다르면 여러번 추천을 할 수 있고
회원이 아니어도 지나가다 추천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타 서점과 비교해 개방성을 더 지향한다고 봅니다.
벌써 포스트 하단에 (댓글보다)'추천'메뉴가 가장 먼저 나와있는 것도 타 서점과는 다른 케이스이죠..

그래서..제가 내린 결론은
이곳 알라디너들은 그러한 익명성을 더 선호, 존중하는구나.. 익명성을 버릴 의향이 없구나 입니다..
제가 어제 확인한 바로는 그러한 추천에 의해 '화제의 서재 글'과 '알라디너의 선택'에 노출되는 것이 알라딘 서재의 원칙이라고 들었어요. 이는 곧 화제가 되는 기준은 추천에 있다는 뜻이지요. 익명으로 하는 것이니 바꾸어 말하면 추천하는 사람은 꼭 알라디너가 아니어도 된다는 뜻이구요.

누가 추천하는지 알게되면 아무래도 추천이 줄어들테니까요..
말씀하신 비밀투표의 기능은 실행할수가 없는 것이죠.

하지만 추천하는 것에 책임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추천의 의미가 선의로만 수행되었을때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 선의가 의심없이 진정성을 발휘하려면 추천하는 과정이 투명해야 하지 않을까요?

제 짧은 소견으론 투명성과 익명성은 상반되는 개념이라는 생각이어요

암튼, 의견 남겨주셔서 고마워요^^



교고쿠 2011-09-08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를 제외한, 리뷰에 대한 추천만 보면 타 인터넷 서점 y**24에서의 추천은...물론 마음에 드는 리뷰에 추천을 날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블로거들 사이의 친목으로 추천을 날리는 경향이 있는 듯 합니다. 그래서 이웃 블로거가 많거나 블로그 활동을 활발히 하는 사람의 리뷰가 추천이 높은 경향이 있어요...그러므로, 진짜 엄청나게 잘 쓰는 것이 아닌 이상, 친목활동을 하지 않는 리뷰어의 글은 금방 쉽게 묻혀 버립니다.

그런데 알라딘은 그보다도 뭐랄까, 리뷰 자체의 퀄리티(?)에 대한 추천이 주를 이루는 것 같아서 그 점은 이쪽이 더 나아 보입니다. ^^뭐랄까, 리뷰가 주가 되어야지 친목행위(?)가 주가 되는 것은 주객전도 같아서요.
(두 공간의 비교는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

익명성에 대한 문제는 으음...물론 익명으로 욕을 한다던지 이런건 확실히 문제가 있겠지만, 추천 같은건 굳이 누가 했는지 알지 못해도 상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당신 글 잘 읽었어!'라는 뜻으로 하는 추천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거기에 모종의 '정치적 의도'가 숨겨져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물론, 제게 있어서는 y**24와 알라딘서재 모두 본진이 아니기 때문에(본진은 네이버 블로그에 있고, 방문수도 많지 않은 지극히 개인적인 블로그입니다) 인터넷 서점의 추천수 같은 것에 그다지 제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한사람 2011-09-08 08:41   좋아요 0 | URL

우선, 교고쿠도님의 생각 많이도 고마워요^^, 그리고 공감해요

저는 요즘 딜레마에 빠져있어요..그런거죠,
왜 어떤 사람의 어떤 매력때문에 그 사람을 좋아했는데 바로 그점 때문에 나중에 염증을 느끼게 되는 경우 ㅋ

저도 사실은 옆동네의 친목위주의 블로그 분위기가 저와 맞지가 않아서 이곳에 둥지를 튼 경우라 할수 있어요. 리뷰의 퀄리티와 상관없이 친한 이웃이면 무조건 추천을 날려주고 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이웃에게 추천으로 인사하는 것들이 리뷰의 질적 저하를 가져 온다고 보았습니다. 간혹가다 이웃없고 교류 없어도 정말 글이 좋아서 추천도 조횟수도 많은 분들이 있었지만 그런 분들은 친목위주의 조직에서 대개 왕따가 될 확률이 많아요.(제 경우도 비슷했던거 같구요 ㅋ) 교류를 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조직에 성의없는 사람으로 되어버리니까요. 운영측도 파워블로거의 요건 중 하나를 바로 친목, 이웃간 교류행위로 설정했고 본인이 추천하고 또 추천받는 것을 점수화하여 파워지수에 반영하므로 사실상 책 많이 읽고 글 잘쓰는 것보다는 책 좋아하고 이웃많은 사람이 살아가기 좋은 환경을 마련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웃추가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수 있는 것과 방문흔적이 남는다는 환경과 맥을 같이 합니다. 나를 이웃추가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 상대에게 방문하게 되고 또 내가 추천했다는 것을 암시할수 있으니까요.(물론, 추천은 익명으로 표시되지만 바보아닌 이상 알게 됩니다, 역으로 누가 안했을지도 예상하게 되구요 ㅋ)

그런데 이곳은 나를 즐겨찾는 서재로 등록한 분들이 공개, 비공개를 선택할수 있고 방문흔적도 남지않고 당연히 추천도 알수 없으니 어찌보면 추천이 더 공정하고 진정성을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어요. 저는 사실 그부분이 제일 맘에 들어 남들 신경안쓰고 글을 올리게 되었으니까요. 예, 확실히 저는 그 익명성에 수긍하고 그것이 저와 맞다고 생각했던 거 같습니다..

하하, 그런데. 그 익명성이라는 것이 그 익명성때문에 약간의 무책임을 허용하는 경우를 목격했고 ㅋ
익명주체의 의도와 별도로 추천대상에 피해가 되는 상황이 야기 될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죠.
가장 모순이라 여겼던건 (신간의 경우)추천이라는 기준으로 '화제의 글', '알라디너의 선택'에 노출된다는 원칙을 보았을때 결국 그 익명성에 기대어 화제도 선택도 결정된다는 측면이 어떤 알라딘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염려하는 여성편향, 이념편향, 정치편향의 분위기가 정말 알라딘이 원하는 것일까,(아니 알라디너가 원하는 것일까) 저는 그 부분에 의문을 가진 것이고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지요.

예를들어 검색어가 일등이 되니까 비로소 검색을 해보는 것인지, 많이한 검색이 일등이 되는지, 검색을 원하는 사실이 혹은 검색을 할 만한 사실이 일등이 되는지는 검색주체외에 반드시 검색운영측의 몫이 있다고 여깁니다.
.
.
그리고, 저는 그 중심에 익명성이라는 개방성이 결국 핵심이라 보았습니다.
익명성으로 돌려버리면 운영측은 많은 부분 책임에서 자유롭습니다.
(표면상으로는 알라딘의 운영 불만에 관한 페이퍼가 가장 화제의 글이 될 확률이 많고 노출횟수도 빈번하지만 사실상 해결은 별로 없어 보이지 않나요? 관심만 끌 뿐이지 변화와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그러나 관람주체는 이 곳이 꽤 진보적이다 생각할수 있고 열려있다 생각할수 있어요. 저도 그랬구요)

여기까지가 제 생각이구요. 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작정했으면서도..제 스스로 이곳이 나에게 어떤 곳인지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었던 시점이라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고맙습니다!







하이드 2011-09-08 11:16   좋아요 0 | URL
교고쿠도님의 댓글 추천! 그러니깐, 공감의 추천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2011-09-08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8 10: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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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8 10: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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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8 10: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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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8 10: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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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8 10: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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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8 11: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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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8 1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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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8 11: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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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1-09-08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나도 등장했다~~!ㅋㅋ
영광스럽구만^^

한사람 2011-09-08 16:56   좋아요 0 | URL

헐...허락없이 가져왔어 ㅋㅋ
용서행 !!!!

보물선 2011-09-08 17:39   좋아요 0 | URL
용서해줄께^^ㅎㅎ

아이리시스 2011-09-08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너무 일목요연 해요. 어느 블로그가 좋은가 하고 막 봤어요.ㅋㅋㅋ 저야말로 저 댓글 쓸 때 뭐 그렇게 추천에 큰 의미를 부여하겠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마고님이 추천수를 보면 본인 의견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위축될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근데 생각해 봐요.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에요. 뭣 모르는 사람들이 의견을 일목요연히(행여 그 주장이 엇갈리고 두서없다 하더라도 본인 주장을 펼치는 것이 제일 좋겠죠. 그래야 대화를 하고 풀거나 싸우거나 하죠!) 쓰기 힘들 때, 타인의 눈으로 멀찌감치에서 끼어들 수 있는 제일 좋고 편리한 방법이라고 봤어요. 엄청 이기적이라고 생각됐어요. 저야말로 하이드님에게도 마고님에게도 추천을 눌렀을지 몰라요.(계속 언급 진심 죄송) 제가 제일 나쁜 사람 -_-; 의견만 놓고 보면 둘 다 옳죠.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대처방법이 변할 수 있는 사안이죠.

추천수는 많을 때 본인 기분 좋은 건 맞지만 그게 꼭 좋은 리뷰라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어요. 베스트셀러는 뭐 다 좋은 책인가요? 하지만 그걸 보면서 마고님이 자신의 의견보다 하이드님 의견에 사람들이 더 많이 동의하는 구나, 그러니 내가 그냥 떠나야겠다 하실까봐 두려웠던 거죠. 제가 보기에 이건 우리끼리 논쟁할 일도 아니고 버럭할 일도 아니고 누가 옳고 그른 것도 아니었거든요.

추천의 익명성을 없애면 더 편리하고 좋아지긴 할거예요. 그렇지만 거기에 불만 같은 건 없어요. 여기는 방명록에 비밀글 기능이나 쪽지 기능은 없던데요. 그치만 뭐, 저는 적응하는 사람이고 큰 불만 없이 또는 문제제기 없이 계속 잘 살겁니다. 절이 싫어지면 중이 떠나는 거고 뭐 그런 거니까요.

한사람님 리뷰 얼마나 오래 전부터 제가 몰래 읽어왔는지 아시면 놀랄걸요?ㅋㅋㅋ

한사람 2011-09-08 21:43   좋아요 0 | URL

흑. 아이리시스님..
오늘 쫌 제가 생각을 정리하느라 아직도 컴퓨터 앞에 있어요. 거의 정리하고 돌아서려던 참이었어요

아까 마고님 서재에 서재지기님의 답변을 보았습니다. 허탈하더라구요 ㅠ
이건으로 알라딘의 정체성을 탐구한다면서 진보성과 익명성의 문제제기를 화두로 꺼낸 제가 좀 작아지는 느낌이었어요.. 어느 오랜 전통을 가진 집안에 갑자기 젠체하는 며느리가 시집와서, 이것이 문제네요 하는 꼴이 아니었나 되돌아 보았어요.

가장 크게 받아들인건 아마도 마고님이 서재를 문닫는다고 하는 소식이었던 거 같아요..그 시점부터
피해의식이 커졌던거 같아요. 물밀듯이 후회가 밀려오는 시점에 딱 아이리시스님이 위로같은 글을 남겨주시네요. 저는 일단 손 댄 사안에 대해선 어떤 식으로든 제 스스로 결론을 내지 못하면 다음 사안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집요하고도 좋지 않은 성격이 있어서.. 이 건을 '후회' 그리고 약간의 '오만'이렇게 결론내리며
술이나 한잔 하려고 했어요.

어떠한 논쟁에 휘말릴때는 반대쪽 때문이 아니고..아마도 거기에 쏟은 자신의 에너지 때문에 상처를 받는 거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을 채워주는 글)고마워요^^

어딜봐도 추천이 먼저 맨 앞에 나와 있는 블로그는 없어요. 이곳은 어쩌면 댓글보다 추천이 더 활성화 된 곳이고 추천이 댓글의 다른 표현이라는 걸 저는 좀 나중에 알았거든요..
저도 몰래 추천하고 오면서 이런게 추천이야, 이러기도 했구요 ㅋ
편하고 의식안하고 좋더라구요

그런데 그게 나 한 사람이 아니고 모아지고 쌓여지면 어느새 권력이 될수 있구나, 심지어는 폭력도 될수 있구나,,저는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분명 알라딘은 익명을 택한 이유가 있을 거여요.
더 많은 장점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방명록은 비밀로 남길수 있더라구요)
저 역시도 그게 좋아서 왔으니..초심으로 돌아가 좋은점만 기억하고 또 선의로 추천을 행하는 알라디너가 될수 밖에요.

하지만 제가 쓴 페이퍼로 인해 추천의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면 저는 그걸로 만족합니다..
이틀동안 이웃만 열명 늘었어요..
그걸로도 감사한 마음이어요

그런데..좀 쓸쓸한 건 왜 일까요 ㅠ
(참, 제 리뷰를 언제부터 읽어오셨단 말씀입니까.. 그 길고 지루하고..또 작위적인 글들을요 ㅠ)

2011-09-09 0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9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9 08: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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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9 09: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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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9 11: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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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왜


   최근 한 달 동안 이곳에 글을 올리면서 나는 왜 알라딘 서재를 운영하나, 이런 생각을 여러번 했습니다. 나는 왜 리뷰를 이곳에 올리고 안 쓰던 페이퍼도 작성하고 다소 화제가 된 페이퍼에 덧글도 남기는가. 저는 리뷰를 올리는 곳이 한군데 더 있긴 하지만 그곳은 거의 DB 저장 창고로서 활용하고 있거든요. 비슷한 온라인 서점인 예스, 인터파크, 교보, 리브로등의 아이디가 있지만 실질적인 운영은 안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 질문은 나는 왜 온라인 서점들중 (서재로서)특히 알라딘만 이용하나, 와 맥을 같이 한다고 할까요.

1. 알라딘이 가장 진보적(?)이어서
2. 알라디너의 생각이 가장 나와 비슷해서
3. 알라딘이 가장 떡밥을 많이 주니까
4. 알라딘에서 가장 나를 알아봐(?)주니까
5. 알라딘이 가장 이웃이 많으니까(나를 이웃으로 해주는 분들이 많으니까)
6. 알라디너의 수준(?)이 가장 높아서  
7. 알라딘이 그나마 속물들이 덜해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봤는데 답이 한가지인 것 같지는 않고 또 한 번에 이루어진 일같지도 않고 천천히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저는 다른 서점보다는 알라딘쪽으로 사후(?) 결정을 한 것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아무에게도 그러한 내재적인 변화를 말한 적도 없고 특별히 그 전과 비교해 글쓰기에 노력을 기울인 건 아니었는데 한군데로 서재를 통합하다보니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더군요. 글을 쓰고 올리고 하는 일들이 내면적이고 일방적인 일에서 개방, 소통, 외재적인 방향성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내 글을 읽는 불특정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을수 없게 된 것이죠. 남들을 의식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이 궁극에는 내가 아닌 나를 지켜보는 남들을 위한 글이 될 확률이 많기 때문에 글쓰는 입장에선 마냥 좋은 현상은 아닙니다. 원래 의도하고자 했던 글을 쓰지 못하게 될 배경이 되지요. 이웃이 많아지고 소통이 많아져서 알려진 블로거들이 결국 그를 견디지 못해 서재를 폐쇄한다거나 최초의도와는 다르게 상처를 받거나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새로운 인연을 발견하게 되거나 출판사의 눈에 띄어 책 한권이라도 받게 되는 행운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현상이 일어나면 절대 그 일이 일어나기 전과는 똑같을 수가 없는 게 세상 이치입니다. 여지껏 온라인 세상을 살면서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또 의미없는 잿더미가 되어 사라지거나 개인 홈피, 블로그등의 자기방을 폐쇄하게된 이력들을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어요.

   그러다가 생활은 습관을 이기지 못해 금방 트위터, 페이스북, 카페등을 기웃거리고 수많은 블로그들중 내게 맞다고 생각되는 내가 피해를 덜보고 그나마 우아하게(?) 내 생각을 그런대로 적어볼수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 또 둥지를 틀게 됩니다. 제 경우도 이곳 알라딘이 여차여차해서 현재까지 남게된 별채같은 곳이 되었네요. 스스로 알라딘 서재를 운영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 지난 6월달인데 원래 연애도 3,4개월까지가 가장 열정적이고 성과(?)가 많듯이 저는 최근 삼개월을 참 재미나게 보낸것 같습니다. 이곳, 알라딘에서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다른 이웃 분들의 글을 읽어보고 이곳 알라딘의 정체성도 눈치채게 되었는데 최근 삼개월간 급격하게 제가 모르고 있던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할까요. 엊그제 신문에서 구글은 사람마다 다른 검색결과를 보여준다는 기사를 보았어요. 제가 사용하는 컴퓨터가 고급인지 싸구려인지 정치뉴스를 보는지 경제 뉴스를 보는지 아니면 어떤 연예인을 주로 검색하는지 모든 것을 기록해놓았다가 저한테 맞는 검색결과를 보여준다구요.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9/02/2011090202428.html)

   그러니까 평소 책관련 정보를 검색해온 A주부와 아이 학원광고를 클릭해왔던 B주부가 동시에 ‘영어’라는 검색을 했을 경우 그 결과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제 경우 평소 보수적인 뉴스를 많이 보았는데 이제 생각이 바뀌어서 진보적인 글을 보고 싶다고 ‘곽노현’을 검색했다고 치면 구글은 보수적인 시각에서 진보를 비판한 기사를 맨 위에 올려놓는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저는 다시 진보적이기 힘든 사고를 할 확률이 많아지는 것이구요. 결정적으로 검색엔진은 자신들이 재단한 고객에게 고객 입맛에 맛는 검색결과만을 보여주므로 고객은 세상의 여론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늘 오판에서 자유롭지가 못하게 됩니다. 결국 내가 찾는 소식은 내게 필요한 소식이 아니라 내가 보아왔고, 계속해서 보고 싶은 소식인 것입니다.



#2.  나는 어떻게


   그런데 저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독자는 아니지만 이것이 비단 검색엔진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바로, 여기 알라딘도 고객을 자기들 판단대로 재단, 구분하여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목적에 맞게)서점을 운영한다는 것이죠. (물론 이는 어느 인터넷 업체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알라딘은 눈에 띄는 특정 성향이 있다는 것이죠) 저는 옆동네 블로그를 접으면서 몇 개월간 그 서점에서 책을 구입한 일이 없습니다. 물론 블로거 활동으로 보이는 트래픽도 전무했겠지요. 그와 동시에 그 서점에서 제게 보내던 소식도 뚝 끊겼습니다. 반대로 제가 알라딘에서 서재활동을 하기 시작하자 서서히 메일이 증가하고 각종 소소한 이벤트에서 시작해 예판소식, 음반소식, 서재뉴스등등의 메일이 급증했습니다. 마치 제가 구입하려고 했던 책을 미리 알고나 있었던 것처럼 시시각각 정보를 전달해주던 민첩함이 예사롭지가 않았습니다.

   문득, 어제 마녀고양이님이 제기하신 서재뉴스레터 건을 보면서

   우리는 관리당하고 있었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꽤 진지하게 내가 알라딘 서재를 운영한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쪼개어서 해보았어요. 평소대로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해봅니다.


1. 알라딘 서재를 ‘운영’한다는 의미

   여러 블로그 중에서 책과 관련된, 글과 관련된 나를 말하고 나를 정리하고 그럼으로써 나를 돌아보는 곳. 이런 내 생각과 비슷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알라딘 서재를 운영한다는 건 현재 제 자신을 운영하는 것과 같은 의미일 수 있겠네요. 현재 제 생활의 중심은 여전히 책이고 글이고, 하니까요.

2. 알라딘 서재에서 ‘메인’에 게재된다는 의미

   현재 알라딘 서재의 메인 리스트(HOT)에 노출되는 글은 15개입니다. '알라디너의 선택'은 여섯개(스마트폰으로는 다섯개 ㅋ). 재미난건 메인 리스트와 '알라디너의 선택'이 꼭 동일하지는(동시적이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아 ~ 이것이 운영측의 꼼수(?) 라고 판단됩니다만 ㅋ. 페이퍼와 리뷰의 비율은 약 5:1인 듯해요. 이중에서 신간이 30%, 구간이 10%, 그리고 책과 상관이 없는 정치적인 정보에 관한 글이 꼭 두어 개 노출됩니다.(그때그때 이슈가 되는 사안과 관련해) 그 외 개인일상에 관련된 글, 알라딘의 운영에 관한 글, 시사적이진 않지만 꾸준히 철학, 교육, 문학과 관련된 성찰적인 페이퍼도 포함됩니다. 같은 화면에 NEW로 노출되는 글도 거의 HOT에 노출되는 글을 작성하신 알라디너의 비율이 높다고 판단됩니다.

   저는 예전에 제가 알라딘 서재를 리뷰창고로 활용할땐 이 서재화면도 보지 않았습니다. 지나쳤다고 해야 맞을 듯하네요. 즉,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제 그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알라딘 서재의 메인화면에 리스트로 노출된 글들은 곧 알라딘의 독특한 헤게모니를 만들어가는 일종의 헤드라인이라는 생각이어요. 물론 이를 만들어가는 것은 알라디너가 아니고 알라딘이겠죠. 알라딘이 선택한 글은 알라디너의 선택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을 마치 메인 중앙의 ‘알라디너의 선택’과 같은 메뉴와 연결지으면서 일반 고객들에겐 알라디너들이 요즘은 이런 책들을 많이 읽구나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죠. 헤게모니의 주체가 알라디너로 생각할수 있는 의도적 마케팅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왜 추천도 받지 않고 진보성향의 글도 아니고 개인일상을 말한 것도 아닌 제 글이 메인 리스트에 선택되고 ‘알라디너의 선택’에 노출이 되는 걸까, 를 생각하게 됩니다. 오히려 제 개인적으로 보자면 혼자서 글쓰고 아무와도 소통하지 않던 지난 시절에 쓴 글들이 문학적으로는 더 의미있었다고 보는데 말이죠. 저는 자연스레 제가 쓴 글들중에 메인에 노출되는 글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불어 그렇게 메인에 자주 노출되는 분들의 공통점도 눈치채게 됩니다. 더 자세히 말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 같아 저어하게 되지만 말을 꺼내었으니 간단한 결론만 짓겠습니다.

   바로, 관리되었고 그 검증, 관리된 대상으로서 알라딘의 정책과 서재운영 방향성에 부합한 알라디너로서 리스트에 올라간 것. 그러니까 저도 그 리스트에 업된 운좋은(?) 알라디너가 된 것이겠죠. 이 사실이 서재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 자극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내 글의 영향력을 인지한 채로 글을 쓰게 되므로 책임감도 있고 또 혼자만 보고 말 글 보다는 더 성의를 발휘할 수도 있고 아무래도 고민을 많이 하게 되니까요. 그런데 어제 마녀고양이님처럼 화제가 많이 되었다고 해서 불특정 다수에게 보내지는 메일에도 리스트업되어 역으로 원치 않은 덧글을 받거나 비난의 대상이 된다면 노출이 많이 되는 것이 꼭 득이 된다고만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서재뉴스레터를 알라디너 모두에게 보내는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알라딘 서재 메인에 노출된건 알라디너 모두가 보아도 좋다는 것과 같은 뜻이라는 운영측의 해석이라면 논리상으로 많은 것에 동의한 알라디너가 불리해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추천받고 칭찬받을때는 좋았다가 반대 의견으로 비난받는 건 싫다는 뜻과도 다르지 않으니까요.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 알라딘 서재를 폐쇄할 생각이 없고 계속 이곳에서 책 좋아하는 이웃들과 소통하고 싶고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최소한의 방어책을 스스로 마련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운영측도 피해가 가지 않는 방안을 마련해 주어야겟지만요. 글 올릴 때 서재뉴스 레터에는 등록되길 원하지 않음이란 체크란 하나만 만들어주어도 되지 않나요? 마지막에 나의 서재 & 즐겨찾는 서재에만 노출되기 란이 있듯이요.)


3. 알라딘 서재에서 ‘추천’을 받는다는 의미

   몰랐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추천의 의미가 다른 곳에서의 추천과 의미가 다르다는 걸요. 제가 보았을 때 알라딘은 이웃이 많다고 추천을 품앗이 하듯 해주는 곳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저만해도 작년에 이웃도 변변찮을 때 어떤 리뷰에 추천이 몇 십개가 되었던 적이 있거든요. (그땐 다른 서점에 더 많은 글을 올릴 때였는데 그쪽의 추천은 이곳의 삼분의 일도 되지 않더라구요. 의아했죠) 

   알라딘에서의 추천은 곧 알라딘 서재의 방향성과 상관이 있다고 봅니다.

   이 글을 추천한다는 것은 꼭 당신이 글 잘 썼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 의견에 동감한다는 동의표시의 효과라는 것입니다. 추천이 많으면 그 의견에 같은 의견이라는 ‘동감’이라는 표시. 이건 공감하고는 약간 다른데, 그 글에 '공감'할 경우는 내 마음을 움직인 글이고, 그 글에 '동감'이라는 건 내 이성에 소구한 글이라는 것이죠. 예를 들어 어떤 분이 알라딘의 공정성 문제를 제기하고 결론적으로는 공정하지 않다라는 글을 올렸는데 그 글에 추천을 해주신 거라면 알라딘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에 나도 동의한다는 뜻이라는 것이죠.

   곧 추천은 리뷰와 페이퍼의 내용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진다고 봅니다.

   당신 글에 감동했다는 ‘공감’도 되고 당신 의견에 ‘동의’한다는 뜻도 되고 이 글을 다른 사람도 읽었으면 좋겠다는 진정한 ‘추천’의 의미도 되지만 알라딘에서의 추천은 다른 곳에 비해 ‘동의’라는 의사표현일 경우가 많다는 것. 추천이라는 기표가 동의라는 기의를 가진다는 것은 여론형성에 있어 중요한 잣대입니다. 저는 그래서 알라딘이 치밀하고 정치적이라고 생각해요.

   대부분 리뷰보다는 페이퍼가 추천이 많고 또 대회나 이벤트에 접수한 글이나 접수했던 글보다는 그와 상관없이 쓴 리뷰가 추천이 많은 것도 한가지 특징입니다. 또하나 책에 관해 신랄한 비판을 많이 할 경우 추천이 높아지는 것도 하나의 현상이죠 ㅋ

4. 알라딘 서재에서 ‘평가단’의 의미

   제가 평가단을 세 번째 하고 있어서 감히 타 서점과 비교해보자면 이곳에서 평가단 활동을 하는 것은 어떤 표본의 역할을 하게 되는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평가단 분들이 의도한 것은 아닙니다만 소설과 에세이, 인문분야 평가단분들은 소위 글빨이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어떻게 아냐구요? 척하면 알죠 ㅋ)  또 다른 서점에서도 파워블로거이거나 한 두개 이상 본인의 리뷰를 올리는 곳이 더 있는 경우도 있구요. 즉 이곳에서 책을 받아 리뷰를 올리고 그것을 다른 곳에도 올릴 경우의 영향력을 말씀 드리는 겁니다.

   제가 요즘 고민하고 있는 것은 이곳 평가단 활동으로 읽고 쓴 리뷰로 다른 서점에서도 떡밥을 받게 될 경우입니다. 언젠가 중복게재의 문제를 한번 생각해보고 페이퍼를 작성해볼까 싶었는데 혹시나 의도치 않게 상처를 받는 분들이 생길까봐 두어번 마음을 접은 적이 있습니다. (저 역시 평가단 책으로 쓴 리뷰를 타 서점에 올려서 포인트, 적립금을 챙긴 적이 두어번 있거든요.)

   암튼 알라딘에서의 평가단은 해볼만 하다, 가 지금까지 경험자로서의 제 의견입니다. 현재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추천하고 많이 추천된 책들중에서 한달에 두권을 받아 보게 되는 시스템인데 아무래도 추천하는데 신중을 기하게 되고 추천하면서 여러책들을 살펴보게 되므로 시야가 넓어진다는 생각입니다.

5. 알라딘 서재에서 나를 ‘즐겨찾는 서재’로 등록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의미

   글쎄, 저는 사실 저를 즐겨찾는 분들 중에 약 15% 정도만이 자신을 노출시킨 분들이라 어떤 분이 제 이웃인지는 모릅니다. 처음엔 제가 흔적을 남길 수 없고 또 이웃분이 오신 것을 제가 알 수 없으니 서로 편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방문에 자유로울 수 있으므로) 점점 이웃이 늘어감에 따라 이 생각이 바뀌어지더군요. 방문흔적은 없더라도 그냥 제 이웃 분들이 누구신지는 알 수 있었다면 좋겠다는 욕심이 들었습니다.

   이는 사실 방문대상보다는 방문자를 배려하는 시스템인데 이웃이 추가될 때 자동으로 누가 추가했는지 알게 되는 시스템일 때(옆동네) 그냥 마음으로 고맙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나더라구요. 그런데 만약 내가 이웃을 추가한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공개되는 쪽이라면 굳이 또 이웃을 추가안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합니다. ㅋ 하지만 이웃추가하는 것이 뭔 자존심 상하는 문제는 아니잖아요? ㅋ

   그리고,

   나를 즐겨찾는 분이 많아지는 것과 쌩쓰투 적립금이 쌓이는 것이 비례하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이게 숫자의 법칙이기도 한데 자주 쓰고 많이 쓰면 많이 노출되고 그러다보면 이웃이 늘고 결국 그 정보 때문에 책을 사는 사람이 많아지고.

   암튼 저에게 (공개안하신)이웃의 숫자가 늘어난다는 의미는 이래저래 저를 지켜보고 있는 분들이 많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썩 마음이 편치를 않네요 ㅠ 좋은 쪽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의 충고가 필요합니다.



#3. 나도 이렇게


이 책은 제가 지난 주말에 확인한 책인데 원제는 <생각 조종자들>이 아니라 ‘필터 버블’이더군요. 알라딘과 함께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게했어요.

인터넷 업체들이 무섭도록 정보를 필터링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페이스북,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 인터넷 거인들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치적 취향, 관심사, 취미, 성격 등에 관한 개인정보를 필사적으로 추적하고 분석하여 개인의 흥미를 끌만한 맞춤 정보를 제공’하는 현상.


필터 버블의 세상에서 우리는 친근한 정보와 듣기 좋은 뉴스만을 편식한다. 문제는 이 필터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기준으로 우리를 분석하는지 그 기준이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제공되는 정보를 믿을 수 없다. 혹 광고주나 특정한 정치세력이 필터버블에 개입할 경우 우리의 생각과 의견이 그들의 입맛대로 조종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그렇다면 제3자에 의해 내 생각이 조종되는 필터 버블의 세상에서 온전히 내 생각을 지켜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구체적으로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먼저 새로운 방향으로 관심사를 넓히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인터넷을 사용하며 규칙적으로 쿠키를 삭제하는 것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더 나은 방법은 필터가 어떻게 작동하고 개인 정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사이트를 선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은 필터링의 기준이 모호하지만 트위터는 간단하고 명확한 편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필터 버블의 존재를 명확히 인식하는 일이다.



   관리당하는 입장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부지런히 검색을 하고 정보를 얻는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자기가 원하고 보고싶은 내용만 매일 확인하고 사는 것이지 않나요. 끔찍합니다. 그렇다면 알라딘은 현재 이렇게 부지런히 필터링 한 정보들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을까요. 당연히 책파는 것에 집중적으로 사용하고 있을테죠. 그런데 만약, 책 파는 것 외에 다른 곳이 있다면? 예를들어 정보를 제휴하거나 거래(?) 할 수 있다면?

   글쎄 뭐좀 진보, 좌파적인 알라딘이 좌회전 깜박이 켜고 우회전 하지는 않기를 바래어 봅니다만. 생각을 정리해보았는데 당분간은 알라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생활을 지속할 것 같다는 예감입니다. 연애의 최초단계인 3개월이 지나면 이제 슬슬 목적성, 효율성, 유용성을 따지게 되죠. 그러다가 그 기간이 지나면 습관에 지배당하고 그마저도 지나면 반드시 권태가 찾아옵니다.  

   아직은 연애를 즐기고 싶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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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개되는 글에 대해서.
    from 마지막 키스 2011-09-06 14:35 
    안녕하세요, 한사람님.이 긴 글을 읽기 위해 저는 출력을 했습니다. 하하. 어떤 말씀을 하실지 궁금해서요. 예전에도 파워블로거나 그 외의 다른 사안들에 대한 글들을 적어주셨을때도 꼬박 꼬박 읽었었거든요. 아마 댓글을 남기는 건 처음이지 싶습니다. 그런데요 한사람님.일단 알라디너의 선택은요, 한사람님이 적어주신(혹은 생각하신)것처럼 '알라딘의 정책과 서재운영 방향성에 부합한 알라디너'로서 메인에 노출되지는 않습니다. 어떤 글을 적든지 신간 서적(이게 3개
 
 
라주미힌 2011-09-06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시스템의 알고리즘이 정확하다고 보진 않는데요. 페이퍼나 리뷰가 알고리즘에 의해 노출되게끔 하는 요소들이 어떤 성격의 것들인가 살펴보면, 친근하고 익숙한 것들이 대세다 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것들이 너무 식상하면 튀거나 파격적인 것이 더 좋아보일 때도 있구요. 어딜가나 다 그런거 같은데용. 관리의 대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익명의 숲에서 나오질 않는 것이구요. 연관지어서 생각해보면 정보 검색에 있어 가장 재미있는 것은 포털사이트 옆구리에 달려있는 실시간 검색어라고 생각합니다.
들여다 볼수록 대중의 속살은 훤히 드러나는 구조.. ㅎㅎ
글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ㅎ 대략 5년 이전의 알라딘이 훨씬 재미있었는데.. 좀 일찍 오시지. ^^;
알라디너의 선택에 떠있길레 들어와봤습니다...

한사람 2011-09-06 15:2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라주미힌님.
다른 것보다도 '대략 5년 이전의 알라딘이 훨씬 재미있었는데.. 좀 일찍 오시지'하는 말씀이 눈에 번쩍 띄이네요 ㅋㅋ
저는 그때 이러한 서재가 있는지도 몰랐을 때이네요

실시간 검색어도 사람들이 검색을 많이 하니까 순위가 올라가는 것인지
검색어로 뜨니까 검색을 많이 하게되는 것인지..헤깔립니다.
제 주변사람들은 검색어가 대부분 조작이 아닐까..생각하던데
대부분의 사실 플러스 몇개의 거짓 혹은 과장이 포함되어 진실로 포장되는 일이 많아서 그런가봐요

덧글 감사합니다~

하이드 2011-09-06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체적으로 공감합니다만,

'메인 리스트와 '알라디너의 선택'이 꼭 동일하지는(동시적이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아 ~ 이것이 운영측의 꼼수(?) 라고 판단됩니다만 ㅋ. 페이퍼와 리뷰의 비율은 약 5:1인 듯해요. 이중에서 신간이 30%, 구간이 10%, 그리고 책과 상관이 없는 정치적인 정보에 관한 글이 꼭 두어 개 노출됩니다...' 라는 부분이요.

저는 이렇게 사실관계 흐트리며 욕하는 것이( 꼼수.라는게 좋은 뜻은 아니지요?) 좀 갑갑합니다.
잘 쓰신 글에 잘 모르는 사람이 함께 욕할테니깐요.

메인은 추천 다섯개 이상, 알라디너의 선택은 신간 두 달인가 한 달이내의 책이 페이퍼에 포함된 경우, 뉴는 추천이나 댓글이 한 개 이상 (비밀 댓글, 본인 댓글 제외) 인 경우에 뜹니다.

잘못된 전제로 '알라딘에 관리 당하고, 검증당한다'는 결론까지 가신걸 어떻게 봐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한사람 2011-09-06 15:5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하이드님^^
꼼수라는 말이 좀 경박하죠..ㅠ
(하지만 좋은 뜻이 아니라고 모두 욕한다는 건 아니구요)

음..어쩌다 보니 다락방님 글 보다 하이드님 글에 먼저 답글을 남기게 되는데요~
'알라디너의 선택'으로 노출되는 글에 대해서 말씀하신 추천과 댓글에 대한 원칙이 있다는 걸
들은 적 있어요. 저도 그냥 그런가보다 했었구요. 아마 대부분 그 원칙에 준해서 선택된 글들이 노출된다고
저도 생각한답니다.

제가 언급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원칙과 상관없이 노출되는 글들도 있더라는 것이죠.
제가 일일이 기억은 하지 못하지만 제 경우 추천과 댓글에 상관없이 화재의 글에 노출되거나
쓴지 얼마안되서 바로 알라디너의 선택에 게시되는 걸 몇번 겪었거든요.
(그래서 황급히 돌아와 수정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화재의 서재글'에 노출이 된 다음 추천이 폭증했다고 보구요.

예전에 신간평가단 책이 홈피 메인에 뜰때 가장 최근에 작성한 리뷰가 맨 상단에 노출되는 걸 본적이 있어요. 리뷰를 다 읽어보고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최신 데이터가 가장 위에 노출되는 시스템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지금은 추천수로 바뀌어서 평가단 리뷰중에 추천이 가장 많은 글이 맨 상단에 가는 것으로 되었어요.

이처럼 '화재의 서재글'도 동일한 시스템에 의해 많이 추천받고 많은 댓글을 받은 글이 시간순에 의해 노출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저도 했습니다. 남들의 글이 올라갈땐요.
그런데 제가 그 속에 포함될때 저는 당황했어요. 물론 화재의 글에 올라가기 싫으면 이웃들만 보는 글에 선택을 하면 된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것도 제가 궁금해했을때 한참 지나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이웃분들이 누구신지 거의 모르는 상태에서 내 이웃들만 읽어주세요, 하는 것이 좀 웃기더라구요. 꼭 그분들에게 보내는 글 같기도 하고.

암튼, 제 생각엔 화재의 서재글은 (한번 리스트업되면)계속 노출되는 분들 위주로 리스트업된다는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동일한 원칙하에서 최종 선택을 하는 부분이 있다고 본 것이죠.
그리고 그 방향성을 감지하게 된 것이구요.
이건 제가 집중적으로 지난 삼개월만 보고느낀 것이니까 아무래도 더 활동을 많이 하신 다락방님이나
하이드님의 의견이 맞다고는 생각합니다 ㅋ

그런데 저 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그걸 확대해석해서 알라딘에 관리, 검증당한다고 결론내고 싶어서 이 글을 쓴 것은 아니구요..
음..또 함께 알라딘의 꼼수나 이런 것들을 욕하고 싶어서도 아니고..
정확히는 지금까지의 제 생각은 이런데 하이드님이나 다락방님같은 다른 의견을 알고 싶어서도 있었던 거 같네요. 제가 너무 정치적으로 받아들였다면 아마도 제가 정치적인 사람이어서 그런 걸까..그런 생각도 하게 되네요.

암튼, 염려의 덧글 저로선 감사합니다~

하이드 2011-09-06 16:14   좋아요 0 | URL
알라디너들이 대체로 알라딘에 대한 기대치가 높습니다. ^^ 저는 뭐랄까, 현실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저만큼 높은 사람도 없을테고. 시스템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시스템의 에러가 아닌 이상, 시스템이 맞을꺼에요. 굳이 제가 서재활동을 오래 해서가 아니라, 제가 좀 집요하게 서재활동을 했거든요. 알라딘측에 에러고 뭐고 지적질 도사랍니다. 그러니, 제가 한사람님 경우를 찬찬히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시스템에 따라 자동으로 (그리고 그 시스템을 움직이는건 알라디너들이구요)되는게 맞을 꺼에요.

정치적인 인간이라 상황을 정치적으로 해석한다. 그럴 수도 있군요. 저는 어떤 인간인걸까 문득 궁금하네요. 대..대답하지 마세요. 그냥 모를래요 -_-;

oren 2011-09-06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보고, 기록하고, 구축한 모든 것들은 모든 지식의 틀이 뒤틀리는 것처럼 왜곡되곤 한다. 첫째는 우리 시대와 종족의 집단적 압력과 시대적 흐름 때문이고, 둘째는 우리들 각자가 가진 개별적 성향 때문이다."
- 존 스타인벡 & 에드워드 리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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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지배당한다'는 생각]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인 것 같습니다.

한사람 님의 글을 읽으니 문득 몇 년 전에 읽었던《생각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발견했던 '생각'에 관한 흥미로운 대목이 떠올라 그 부분부터 먼저 인용해 봤습니다만, 사실 '상업적 목적'을 가진 웹사이트들이 '그들'의 본연의 목적에 맞게 밤낮없이 애쓰는 일이 어디에까지 미칠지는 '노력은 항상 필요성에 비례한다'는 일반적 원칙에 비춰봐서도 쉽게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인 것 같습니다(특히 대표적 SNS인 facebook의 교묘한 진화를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다만 그런 문제들을 얼마만큼 가감해서 인식하느냐 하는 문제는 이용자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판단해야 할 문제이겠지요.

그리고 알라딘에서 '알라딘 서재 사용기'에 관한 글을 가끔씩 접할 때면 누구라도 '잠시나마'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떠올려 보지 않을 수 없는데, 제가 알라딘을 이용하면서 그동안 느꼈던 점들 가운데 (제게 흥미로운) 몇 가지에 대해서만 '국한'해서 말씀드려 보자면 ① (알라딘 서재 사용자의 경우) 다른 블로그에 비해 유달리 여성분들이 많다는 점(과거에 비해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② 다양한 분야들 가운데 특히 국내정치 분야(그것도 특히 '이념적 계급적 갈등'과 연관된 문제)에 대한 글들이 갈수록 비중이 더해 간다는 점 ③ 그 반대급부로 역사, 과학, 경제, 문화/예술, 기타(취미,오락,여행,스포츠 등) 분야에 대한 비중이 갈수록 낮아져 자꾸만 '뒷전'으로 밀려나는 점 등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디론가 한 쪽으로 자꾸만 치우쳐 가는 경향에 대해서는 왠지 불편한 느낌이 들고 또 한편으로는 제 스스로 경계하고 싶은 일종의 강박관념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알라딘을 조금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기도 합니다. 알라딘이 갈수록 '여성 편향적'이 되거나 '이념 편향적'이 될 경우(혹은 그런 경향을 더욱 부추기는 방향으로 '의지'가 작용할 경우) 혹시나 그게 익숙하게 보아 왔던 '자멸하는 경향'을 닮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거든요.

최근에 특히 알라딘으로부터 너무 많은 분량의 이메일이 쏟아져 들어오는 현상도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어려운 입장에 처한 사람이 보내는 다급한 신호가 '가끔씩' 연상되기도 하거든요.

어쨌든 한사람님께서 알라딘 서재 이용을 '연애'에 비유해서 아직은 즐기고 싶은 단계로 표현해 주셨는데, 저는 알라딘과는 '한 번도 제대로 즐겨본 적'도 없는데도 어느덧 권태기를 한참이나 더 지나서 '무덤덤한' 단계까지 온 것도 같습니다. '연애'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눈이 멀었다'는 표현이나 '콩깍지가 씌었다'는 표현만큼 '연애의 특징'을 드러내는 것도 없을 것 같은데, '눈이 먼'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들은 색맹, 얼굴맹, 입체맹, 심리맹 등등 꽤나 많은 것 같고 이들의 공통분모는 남들은 쉽게 분간하는 대상조차도 제대로 '구분할 줄 모른다'는 것이겠지요.

알라딘에서든 어디서든 '생각'이 '생각'을 호출할 수도 있다는 걸 이미 삼백여 년 전에 어느 프랑스의 철학자가 깨달은 데 비하면, 우리가 '시대와 종족의 집단적 압력'으로부터 나의 '생각'을 온전하게 지켜내는 일도 쉬운 일만은 아닐 것 같군요.

* * *

진동하는 현

삼백여 년 전에 프랑스의 철학자 디드로는 인간의 감각 소질을 '진동하는 민감한 현'에 비유했다. 그리고 진동하는 현은 다른 현을 진동시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도 두 번째 생각을 호출할 수 있으며, 둘이 모여 세 번째 생각을 불러내고, 이 셋이 네 번째를 다시 끌어내는 등 계속 이어지게 된다'라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생각의 범위나 수에는 어떤 제한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마음의 악기는 놀라운 도약을 가능하게 하며, 불려나온 하나의 생각은 때때로 불가해한 간격으로 '배음'을 시작한다"라고 말했다.

-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미셸 루트번스타인,『생각의 탄생』 中에서

* * * * *

단단한 토대

나는 저울대에 매달려 자신의 무게를 달면서 균형을 잡다가 나를 가장 강하게 그리고 가장 정당하게 끌어당기는 것에게 인력에 의해 끌려가고 싶다. 저울대에 매달려 몸무게가 적게 나가려고 발버둥치고 싶지 않다. 어떤 사정을 지레짐작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사정만을 받아들이고 싶다. 나는 내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 그 위에서는 그 어떤 권력도 나를 막을 수 없는 길을 가고 싶다. 단단한 토대를 쌓기도 전에 아치를 세우는 따위의 짓은 나에게는 아무런 기쁨을 주지 못한다. 살얼음판에서 벌이는 아이들 장난은 그만두도록 하자. 어느 곳이든지 단단한 밑바닥은 있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월든』中에서

한사람 2011-09-07 01:43   좋아요 0 | URL

<생각의 탄생>은 저도 읽었는데..업무에 방법적으로 활용하느라 그런 부분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네요 ㅋ

① 다른 블로그에 비해 유달리 여성분들이 많다는 점-저는 이것이 다른 서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어요.
여성회원분들이 남성 회원분들보다 덧글로 교류를 많이 하고 친분관계를 맺고 그것을 지속시키고 오프라인까지 영역이 넓어지는 경우를 자주 보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만해도 글로써 남성이시면 덧글 남기기가 쉽지가 않더라구요. 제 경우도 글로만 보았을때 남자이냐는 말을 많이 듣는편인데 다른 개인 블로그도 아니고 책과 관련된 곳은 더욱 남성, 여성의 사용성향이 달라서 그런게 아닐까 싶습니다.

② 다양한 분야들 가운데 특히 국내정치 분야(그것도 특히 '이념적 계급적 갈등'과 연관된 문제)에 대한 글들이 갈수록 비중이 더해 간다는 점과 ③ 그 반대급부로 역사, 과학, 경제, 문화/예술, 기타(취미,오락,여행,스포츠 등) 분야에 대한 비중이 갈수록 낮아져 자꾸만 '뒷전'으로 밀려나는 점 - 저는 이것이 실제로 사용자들이 정치관련글을 많이 올리고 문화글을 적게 올려서 그런 것인지 노출과 화제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정치관련 글이 화제가 많이 되니까 이곳에 (다른 곳보다)자연스레 정치관련 글들이 많이 올라오는 것이라고 보왔거든요. 그러다보니 제 경우도 페이퍼 쓸때 어제, 오늘 있었던 일중 투표나 대가성, 후보에 관한 개인적 소견이 삽입될때가 많더군요. 이념편항적인 곳이 되어간다는 우려는 그것이 알라딘의 색깔이라 생각했는데(그렇기 때문에 이곳에 글을 올리는 분들도 있을 테구요) 그 정체성이 어떤 안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인지는 문학과 연관지어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지적해주신 말씀이 타분야의 글들, 사고, 의견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는다면 그건 알라딘 측에서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해요. 확실히 옆동네 서점은 블로그에 문화, 여행, 영화나 예술분야의 글들을 많이 노출시키고 그것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느낌은 받았기에.

그리고..연애는 돌아보면 일상에서 느끼는 약간의 설레임이었던거 같아요. 제가 아직은 기간상으로 무감할 시기는 아닌 것 같아 될 수 있으면 좋게 생각하려고 하는 마음을 비유한 것이고요. 저는 사실 무덤덤한 상태로 가는 것이 두렵긴 합니다. 아미 이곳이 권태기를 넘어 무감해진다면 저는 다른 곳에서 다른 걸 찾고 있지 않을가 싶어서요 ㅋ

마지막에 언급해주신 진동하는 현, 단단한 토대를 읽으니 나의 생각을 어떠한 지배없이 온전히 지켜나가는 것, 삶의 압박없이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생각을 보존시키는 것에 대해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네요.
온라인에서의 교류라는 것도 실은 더 넓어지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원하는 사람과의 원하는 내용만 좇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제가 온라인에서 매번 당황하고 소심해지는 것은 제가 쓴 글이 제 의도와는 다르게 어떤 영향을 줄때여요. 무슨 제안서쓰듯 매번 이 글의 목적을 표시할수도 없고 한다해도 큰 의미는 없다고 봅니다. 대부분 민감하다 판단되는 내용이 그러한 결과를 도출하는데 민감하다는 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하고 있던 부분이었다는 뜻도 되죠. 많은 사람이 생각했다는 건 다른 많은 의견이 생길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의견이 다르면 온라인은 단절이 된다는 것이죠.

회사생활 할때 저는 한번 걸끄러워진 상사, 직원들과는 다시 일로서도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는 여직원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오늘 대판 싸우더라도 내일 다시 직장에서 아무일없었다는 듯 수직관계를 잘 유지하고 일은 일로써 처리하는 남자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성향과 의견이 다르다는 문제를 가지고 안고 가기 보다는 단절쪽을 지향하는 것이 여성이라는 것. 여성이 인간관계에서 더 포용을 잘 하고 공감을 잘하는 능력이 분명 있지만 이것은 타자의 아픔에 대해서 그런 것인지 자신이 상처받을땐 여전히 그러한 자신을 공감해줄 다른 무엇을 찾는 것이 가장 큰 한계라고 봅니다.(저도 그 영역에 속해 있구요 ㅋ)

암튼, oren님의 덧글은 제 생각을 정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감사드립니다^^




마녀고양이 2011-09-06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께서 방명록에 올려주신 글을 읽고 신경이 쓰여서 댓글을 답니다.
일단, 저는 알라딘 회사 측에서 동의없이 메일을 보내는 문제에 대해서 수긍할 수 없을 뿐더러, 이즈음에서 항의를 하고 정책에 대한 보완을 하지 않으면 더욱 조심성없이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라딘은 기업이므로 한명의 개인이 링크를 거는 것과는 또다른 문제라 보는 것이 제 시각입니다.

하지만 하이드님과 다락방님께서는 '공개'된 글이니 어떤 식으로 다수의 사람들에게 공개되더라도 그것은 글쓴이의 책임으로 감수해야 하고, 그것을 감수할 수 없다면 '비공개'로 하는게 맞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추천수가 많은 것으로 보아 많은 분들이 공감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의견이 일부분 일리는 있으나 수긍하기는 어렵고, 앞으로도 뉴스레터 공개와 같은 것을 감수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모든 글을 '비공개'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누구의 탓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문제해결 방식이 다른 것 뿐이라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한사람님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염려 감사드리며, 환절기 건강 조심하세요.

한사람 2011-09-07 01:53   좋아요 0 | URL

예, 모두 이해합니다.

저는 마녀고양이님 말씀도 하이드님, 다락방님 의견도 모두 공감합니다.
다만, 제가 이 글을 쓰지 않았다면 좋았겠다..는 후회는 합니다 ㅠ

온라인에선 의도를 갖지 않은 결과까지 받아들일 자세가 필수항목이구나 뼈저리게 느낍니다.
마음이라는게 이성과 달라서 다시 움직이는데 계기도 있어야 하고 시간도 필요한 것 같아요.
처음에 마녀고양이님 방에 포스트가 없어져서 많이 놀랐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큰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도 그런 적 있었고
또 그러다가 다시 문 연 적도 있었고.

마녀고양이님의 판단을 존중합니다. 그저 찬바람이 불면 마음이 더 시린 것이 아니라
머리가 더 개운해져 예전에 정 나누었던 분들이 다시 그리워지길,
예전에 써대었던 글들을 다시 올리고 싶어지길,
개인적 욕심에 기대어 바래봅니다.

다행히 곧 추석이고 주부들은 몸과 마음이 바쁜터라 더 잘되었다고 봅니다

마녀고양이님, 기다릴께요^^

카스피 2011-09-07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한사람 2011-09-07 22:53   좋아요 0 | URL

예, 카스피님
반갑고 감사해요^^
 
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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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보다 욕망

   이 소설을 비가 많았던 지난 여름에 읽었다. 서울이 침수되고 산이 무너지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생명이 물에 잠긴다는 것의 의미를 한참 생각할 때였다. 그래서인지 책을 덮고 나서도 어떤 심연의 바다에 침수된 채 좀처럼 빠져 나오지 못했던 것 같다. 천천히 그리고 서늘하게 내 가슴속 물컹한 덩어리들이 그 바다와 하나가 되는 느낌이었다. 마치 침몰하는 배에 함께 탄 승객이라도 되는 듯 나는 비극에 동참할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 나를 시험하려 수문을 열어 엄청난 양의 물을 방류시킨 것이라면 그날 밤 나는 분명 고립된 채로였다. 호수 한가운데 나무에 묶여 목까지 물에 잠긴 채 몇 시간을 버텨낸 소년처럼 많이도 고독했다. 내가 내 자신을 구원하기 어려울 것 같은 두려움, 하지만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다는 절망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 나가고픈 간절함, 그 모든 생생한 욕망이 나를 휘감았다. 이런 기분은 태어나 처음이었는데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도 없고 한다 해도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조금이라도 공감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소설은 읽는 내내 나를 끌어내리려 집요하게도 잡아당겼고 끝내 항복하라는 요구에 설득당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런 복잡한 감정,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 오랜만에 책 한권으로 바닥까지 무너지는 내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발견한 것은 괴물같은 소설속에서 건져 올린 내 안의 괴물은 아니었을까. 그 괴물들이 나를 고통이라는 우물 속에서 울게 했다. 막다른 순간 숨을 토하듯 터져 나오던 것, 나는 눈물이 자유와 해방을 의미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책을 덮고 나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나는 과연 내 인생에서 ‘무엇’을 지키려 하는 걸까, 내가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그것은 분명해 보이는 질문처럼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그렇다면 나는 내가 지키려 한 것이 있기는 했을까, 에서 시작해 혹 내가 지킨다고 생각해 온 건 결국 나를 지켜주던 욕망에 불과한 것들은 아니었을까,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의심없이 내 자신을 의지대로 살아간다고 여기지만 실은 내 자신의 욕망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욕망하는 것들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나는 내가 이룬 것들을 지키려 살아온 것이 아니고 이루지 못한 것들을 좇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결국 내가 지켜온 것은 나를 말해주는 것들이 아니고 내가 닮고 싶은 나 아닌 것들은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욕망하는 것은 나의 것인가. 인생은 내가 ‘무엇’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그 ‘무엇’이 나를 지켜주는 것이 아닐까. 목숨을 건다는 건 그 ‘무엇’과 내 삶을 바꾼다는 뜻인데 우리는 왜 내 자신의 목숨도 내 자신과 바꿀 수가 없는 것일까. 우리는 혹시 그 ‘무엇’이 온전한 나로부터 비롯된 내 것, 내가 바라는 나만의 가치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목숨을 걸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욕망보다 죽음

   작품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기 생의 소중한 가치들을 생의 전사들처럼 굳건히 수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가치가 마침 남이 목숨 걸고 빼앗으려 하는 가치라면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할까. 기꺼이 내 가치를 위해 타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희생을 강요하지 않을까. 내 목숨을 건다는 것. 나는 그 신성함에 폭력을 연상한다. 우리가 육화된 존재인 한 ‘폭력은 우리의 운명’이라고 한 철학자 메를로 퐁띠의 주장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생명체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폭력을 행사하는 일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에 표출된 모든 폭력은 곧 그 사람의 운명으로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특히 인물의 운명을 심층적으로 투시하는 시력이 탁월했다. 나는 이 소설을 한국사의 가부장적 남성들이 자기 운명을 의지대로 실현치 못하는 비극의 알레고리로 보았다. 자기 존재의 징표를 다시 자기복제의 욕망으로 환원하여 끝내 자기를 파멸하고 마는 불행의 서사로 보았다. 어떤 면에서 작가는 비극의 운명들을 날카롭게 선발해 폭발적으로 휘몰아 연주하는 지휘자로 느껴질 정도였다.

   작품에서 대립하는 최현수와 오영제는 모두 아버지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아들로 등장한다. 대지주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세령 마을의 도련님으로 태어난 오영제는 부유한 환경에서도 폭력으로 권위를 행사하는 아버지, 매맞고 순종하는 어머니의 기억을 내재화하며 성인이 된다. 자신이 생각한 가치가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 놓여있지 않은 삶과 존재의 불일치는 오영제라는 인간의 정체성이 된다. 통제력만이 그가 바라는 능력인 것이다. 이는 훗날 전자제품 수리공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한 후 치과의사가 되어 주변 인물들을 하나씩 교정하는 삶을 지향하는 배경으로 보였다. 3대독자로서 오영제는 딸이 아닌 아들을 강렬히 욕망하는 부성이었는데 이는 내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그래서 내 아들에게 내 아버지처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최현수의 욕망과 동일했다. 아버지로서의 욕망은 같았으나 한 명은 딸을, 한 명은 아들을 본 것이었다. 최현수 역시 월남 상이군인 출신으로 주정뱅이가 된 아버지와 함바집을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스스로를 못견뎌 가정에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를 가장 증오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현수의 아들 서원이 자신의 어머니를 닮아 다행이라는 것은 소설속에서 마지막 생존자가 되기 위한 복선으로 느껴졌다. 각자 딸과 아들의 아버지가 된 오영제와 최현수는 자신들의 아버지를 치열하게 부정하며 자기안의 부성을 지독하게 극복하려한다. 하지만 아버지를 극복하는 것이 자신을 극복하는 일이 된 아들은 자기 아들에게 다른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아버지, 아버지...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하며 투항하던 이들도 결국 ‘새벽에 나가 꿈속에 돌아오던 아버지’와 정면에서 조우하며 스스로 아버지의 무덤속을 동행하게 된다. 자식을 아버지에 대한 복수기제로 기대한 이들에게 아버지를 이기는 것은 곧 자신들을 죽게 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들 두 사람의 중간에서 목격자, 관찰자로 존재하던 승환도 직업잠수부의 아들로 태어나 열두 살 때부터 잠수를 배우게 된 인물이었다.(열두 살은 이 작품에서 부모의 영향으로 제 2의 인생을 시작(마감)하게 되는 중요한 시점이다) 하지만 한강에서 시체를 찾거나 목숨을 구해주던 아버지는 오영제, 최현수의 아버지와 달리 아들에게 비폭력성, 구원성을 전수하였기에 승환은 막다른 길, 벼랑 끝에 내몰린 서원을 조력하는 최고의 은인이 된다. 표면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오영제의 아내 문하영에 비해 자주 서사의 긴장을 유발하던 현수의 아내 강은주도 봉천동 달동네 출신으로 왕대폿집을 하는 싱글맘의 장녀였다. 이들 남녀는 빈부와 상관없이 모두 한 집안의 기대주였고 그러기 위해선 그들 부모를 극복해야하는 공통의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나와 같은 세대로 등장하던 오영제, 최현수 내외는 지금 꼭 우리 사회 허리층이다. 부모보다 더 잘될 수 있었던 마지막 세대라는 말도 들려온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일제시대, 한국전쟁, 군사독재의 파란만장한 한국 근현대사를 몸 뚱아리 하나로 헤쳐 나오면서 만신창이가 된 분들이다. 나 역시 부모님처럼 살지는 않을 거라고 내 자식한테 내 부모님처럼 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밥먹듯이 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서글프게도 나이들어 가면서 점점 어머니의 판박이가 되어간다는 생각에 놀랄 때가 많다. 내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지만 내 안에서 더욱 생생히 나를 조력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하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머니가 업그레이드된 인간형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분명 내 아이가 나보다 진보된 새로운 모델이길 기대한다. 별스럽지 않게 순리처럼 받아 들여온 이 사실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얼마나 무섭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가족의 죽음을 껴안고 그 죽음에 기대어 내가 살아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죽음’을 지키기 위해 삶을 이어가는 존재는 아니었을까. 작가는 부모의 죽음도 내 삶의 완성을 이루는 한 요소임을 그리하여 나의 죽음도 내 아이의 삶을 결정지을 것이라는 예언을 해주는 사람같았다. 우린 어쩌면 삶이 아닌 죽음으로 더욱 서로에게 연결되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까.


죽음보다 본성

   이렇듯 이 작품은 무엇보다 인물의 캐릭터가 영화를 보듯 생생하고 장단점이 분명하다는 서사적 미덕을 지녔다. 인상깊었던 건 오영제, 최현수, 승환의 직업이 곧 자신들의 정체성을 또렷이 구분짓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남이 던지는 공을 받아내고 댐을 지켜야 하는 차단, 방어형의 현수와 남이 가진 무기(치아)를 갈고 뽑아내는 약탈, 공격형의 영제, 남의 이야기로 내 존재를 말하는 중재, 위로, 타협형의 승환이 자기직업에서 성공하는 것은 곧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는 것이고 그것은 상처받은 부성을 회복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그토록 증오하던 아버지보다 더 잘되지 않았을까. 아니 왜 아버지보다 못한 자식이 되어야 했을까.

   이들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만큼이나 아버지가 가졌던 한계도 고스란히 물려받은 자식이었다. 외부에 보여지는 선망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했던 오영제의 아버지는 가식적, 인공적인 가정의 가장이었다. 이는 따스한 가정을 운영하지 못하고 나뭇개비로 동화속 성채를 정교하게 축조하던 오영제의 무의식을 조종하던 한 마리의 나비와도 같았다. 수목원 나무에 폭력을 가해 그 결과로 축소화된 인공세계에서 평화와 행복을 느끼던 오영제는 자신이 만든 행복의 신세계에 (교정되지 않은)아내와 딸을 들여 놓을 수 없었다. 핏빛 수수벌판 속 오래된 우물에 빠진 현수의 아버지는 한쪽 팔을 잃은 불구였고 아버지의 장애는 현수에게 용팔이라는 증상으로 유전된다. 이들은 다시 나뭇가지 성채와 마비 및 제어불능에 갇히면서 자기 삶을 자기 존재와 일치시킬 수 없다는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가만 보면 우리들 모두는 좋든 싫든 우리가 그토록 혐오했던 부모의 장애를 필연적으로 타고나는 존재들이 아니던가. 하지만 부모의 장애가 늘 불운으로만 성장한다면 누구도 부모이상의 존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건 우리들 자식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인생의 짐인 것이다. 나는 여기서 현수가 덩치 큰 타고난 ‘미숙아’라고 했던 작가의 평가가 의미심장하다는 생각이다.

   현수는 거구의 운동선수로서 마스크에 공을 맞아도 눈을 깜박이면 안되는 포수였다. 어떤 공이라도 피해서는 안되며 전체 경기의 판세를 읽고 자기편 홈을 목숨걸고 사수해야 하는 수비수였다. 변화구 한방에 수비가 무너지지 않도록 공격을 오로지 손으로 붙잡아야(捕) 하는 운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체부위중 손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포수가 될 자격을 잃었음을 의미한다. 손의 신경증은 무능한 아버지와 아버지와의 갈등을 황급히 우물에 묻어버린 비겁함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을까. 결정적 순간에 나오는 수비실수는 아버지와 결정적인 순간을 대치한 적이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용팔이는 우물속에서 현수를 부르던 아버지의 부활은 아니었을까. 죽이려던 것이 아니고 단지 아이의 입을 막으려했던 현수의 왼손은 결정적인 순간에 마비가 풀리는 마법으로 세령의 ‘아빠’를 단숨에 덮어 버린다. 보통 자기 가정에 세령과 같은 또래의 자식을 둔 아버지라면 ‘아빠’라는 목소리를 듣고 자기자식이 생각나서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다. 현수는 왜 세령이 ‘아빠’라고 한 순간을 못 견딘 것일까. 무엇이 현수를 ‘아빠’로부터 멀어지게 한 것인가.

   세령이 죽기직전 불러본 ‘아빠’는 이 작품에서 모든 아버지와 아들을 상징한다고 받아들였다. 세령의 한마디 유언은 아빠라는 딜레마를 상징한다. 세령은 열두 살이었고 현수는 열두 살에 아버지를 잃었고 서원은 열두 살에 생존자가 되었다. 우선 아버지가 된 현수에게 열두 살 현수의 목소리는 영원히 지우고 싶었던 기억이 아닐까. 그건 곧 우물속에 빠진 아버지가 자신을 부르던 ‘현수야’와 대치하는 목소리였다. 아버지의 구두와 랜턴을 쥐고 수수밭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애타게 외치던 ‘아빠’였다. 서로를 불렀지만 서로 대답을 하지 못한 불통의 시간. 그러나 현수는 세령의 검은 눈동자에서 (아버지를 찾았던)자신처럼 자신을 찾고 있는 서원의 간절함을 본다. 세령의 텅빈 눈은 아버지와 자신의 아들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매개체로서의 거울이었다. 죽음을 이어 삶을 자각하는 무정한 현실이었다. 현수는 결정적일 때 매번 지고 마는 용팔이를 이기고 싶어(서원에게 보여주고 싶어) 피투성이가 된 세령이 ‘아빠’라고 부르던 목소리를 마비가 된 왼손으로 덮고 비틀어야 했다. 현수는 서원이 자신처럼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기안의 아버지는 물론 그 아버지가 부르던 자신마저 제거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아버지를 이김으로써 아들에게 떳떳하고자 했던 현수는 결국 아버지로서의 자신을 잃게 되어 아버지로서 살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리라. 안타깝고도 슬픈, 너무나 이해하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은 운명의 장난이 아니던가. 현수가 그 순간 자기 가정의 조력자인 아내의 전화를 받지 않고 자기 본성의 조력자의 목소리만 들었던 건 인간은 절대 자기 내적인간과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사람은 자신만이 자신을 통제할 수 있지만 인간은 자기 안의 본성을 매번 이길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 삶은 우리 존재와 절대 동일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한다.

   내가 내 안의 자아와 같지 않고 나라는 존재도 내가 꾸려가는 삶과 반대일 수 있다는 사실은 교훈이라기 보다는 슬퍼하기엔 억울한 슬픔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동물같이 포악한 본능이 존재하며 자신을 파멸시킬만한 위험도 보유하고 있다. 인간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요소가 인간적인 것은 아니며 삶이라고 모두 삶을 지향하진 않는다. 이 작품은 인간이 지닌 본성의 원심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사실 본성으로 드러난 폭력이나 죽음의 현상보다는 그것을 작동케 하는 인간의 능력이 더 공포스러웠다고 할 수 있다. 에피소드가 많은 편이었고 화면모두 디테일했지만 더 치밀하게 보인 건 언제나 사람의 마음, 욕심의 방향, 행위의 의도에 있었다. 모두 사람이 투시할 수 있는 밑바닥까지 파고 들어가는 작가의 집요함이 놀랍고 소름끼쳤다. 작가가 소설을 전개하는 과정이 꼭 수심 몇 백 미터를 잠수하는 모습과도 비슷해 어쩌면 잠수부이면서 작가였던 승환이 작가의 대리인이라는 생각도 하게 만들었음이다.


본성보다 희망

   그런가하면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세령호와 세령마을은 어쩐지 영화속 배경처럼 실존하는 구체성을 가졌으면서도 안개 낀 신비의 공간, 무의식과 영적인 장소로 이해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영제의 딸 세령의 이름이 곧 마을의 이름이요 세령의 의미가 영혼을 씻겨준다는 무당의 춤 세령(洗靈)무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세령은 아버지가 영제(靈際)를 지내주는 사람이므로 (어짜피 죽음이 예견된 아이로서)더욱 이 세상의 존재로 느껴지지 않았달까. 수몰된 옛 세령마을에서 태어나 열두 살 되던 해 생일날에 죽은 세령은 혹 세령마을 이라는 사회공통의 희생양은 아니었을까. 꼭 마을이 수몰되고 십이 년 정도가 흘러야지만 상처는 회복될 수 있다는 말로도 들렸다. 아니 십이 년이 되면 수몰된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누군가를 영제의 제물로 바쳐야 했던 건 아닐까. 인간이 영악한 건 진정 수몰된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안온과 평화를 위한 이기심에서 희생양을 찾는다는데 있다. 희생양은 고대 때부터 실제 비난 받아야 할 잘못 때문이 아니라 희생물로서의 징후, 즉 집단의 위기와 관련된 혐의가 발견되어 선택된 약자일 뿐이다. 희생양은 대개 저항할 수 없는 존재들에 속해있다. 행여나 복수를 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세령이 현수의 차에 치였을 당시 엄마의 흰 블라우스를 입고 화장을 한 채로 긴 머리칼의 흰 얼굴과 가느다란 종아리, 맨발이었다는 것이 흥미로운데 이는 성스러워야 할 영혼에 더러운 욕망의 가면을 덫 씌워 죽음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평소 오영제에게 늘 억압받고 폭력에 희생되던 세령이었지만 그날만은 오영제의 알리바이를 보존키 위해 세령의 성인분장은 꼭 필요한 장치였을 것이다. 세령은 야밤에 성인분장을 하고 뛰쳐나가 고양이와 밀어를 나누었으며 이미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었기에 희생양으로 충분한 조건을 지녔다. 한 집단은 위기의 책임을 그 희생양에 씌워 희생양을 처형함으로써 자신들을 정화하고 평화를 정당화한다. 세령은 사회공동의 금지된 욕망을 상징하므로 이를 수몰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도덕성까지 회복할 수 있는 희생양이 된다.

   작품 전반에서 세령의 죽음을 (성인으로서)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은 없어보였다. 폭력의 진실을 알고 있었던 승환과 또래로서 연민을 느낀 서원 정도만 안타까와 했을뿐 세령은 가장 확실하고도 잔인한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이 없는 캐릭터로 보였다. 중요한 건 세령의 죽음이 아니고 세령의 죽음 이후, 세령의 죽음을 통해 달라진 마을의 풍경,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세령은 희생양이었는데 왜 마을은 평화를 지키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향했을까. 작가는 작품 전반부에 ‘물속 마을에 외지인이 침범하면 잠든 용신이 깨어나 재앙이 일어난’다는 힌트를 예언처럼 흘려놓았다. 세령이 희생양으로서 완벽한 조건을 갖춘 대상인 건 맞았으나 세령을 죽게 한 건 마을 사람이 아닌 외지인이면서 살해동기도 지극히 개인적, 우발적이었다는 사실이 마을신을 분노케 한 것은 아닐까. 현수는 댐을 지키는 보안팀장으로 은주는 사택 경비로 형식적으로는 댐과 마을을 지키는 역할이었지만 그들은 모두 마을을 위해 댐과 사택을 지키는 건 아니었다. 그들이 지킨 건 철저하게 자신들의 욕망이었고 욕망을 이루기 위해 욕망을 견디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금지된 것을 더 많이 욕망하는 존재이고 금지의 대부분은 부모와 사회로부터 박탈당한 쾌락에 속한다. 그렇다면 현재 작동하는 인간의 욕망은 과거 금지의 흔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오영제와 최현수의 욕망이 아버지로부터 금지된 흔적이라 본다면 그들이 세령을 견디지 못한 심정이 십분 이해가 된다. 세령을 통해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본 현수는 금지된 욕망과 충돌하였기 때문에 끝내 분열된 주체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령은 마을에 존재하지만 실재하지는 않은 무의식의 거울, 자기 반영의 호수였던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자세히 보고 싶어 거울을 바라보지만 막상 그 거울과 조우했을 때 감당하기 힘든 진실을 확인하고 싶지 않아 거울을 깨버리는 존재인 것이다. 희생양을 원했으면서 희생양과 정면 대결하지는 못하는 거울 반대편의 주인공들인 것이다.

   이제야 인간은 자기 삶을 지키기 위해 자기 욕망을 사수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겠다. 그런데 그 욕망이라는 것도 실은 내 삶에 개입된 아니 죽음으로 이어진 내 부모, 내 자식, 내 친구, 내 연인의 욕망일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지킨 것이 실은 타자의 욕망이었고 그럼으로써 나를 지키지 못하는 삶이 된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인가. 희생양으로부터 희생이 되는 어이없는 순간인 것이다. 애초부터 나는 나를 범하는 나와 운명적인 공범자임을 인정하자. 무엇이 악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악성은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 깊숙한 곳에 자신만이 숨겨둔 우물이 있다. 그 우물을 박차고 나와 넓고 자유로운 바다를 온몸으로 만끽하고 싶은 욕망도 있다. 그러나 깊고 넓은 해저에 나 혼자 서 있다는 공포 때문에 더 이상 바다를 돌파하지 못하고 다시 익숙했던 우물 속에 갇힌 적도 있다.

   다시, ‘7년의 밤’을 생각한다. ‘7년의 밤’은 현수가 사건 당일부터 수없이 그날을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오영제가 숨어서 유령인간으로 지낸 시간이었다. 문하영이 세령을 그리며 서원에 조력하는 시간이었다. 승환이 어렵게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시간이었다. 서원이 아버지의 진실을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이렇듯 ‘7년의 밤’은 모두 사건으로 헤어진 후 각자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에 해당하므로 소설적 진실성을 확보하는 기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 시간은 누구나 상처받은 후 각자의 입장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다시 미래의 승부수를 계획하는 시간인 것이다. 그 시간은 세령호에 수몰된 마을처럼 묻어둔 진실이 진실을 기다리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겐 기꺼이 ‘7년의 밤‘을 보낸 후라면 새로운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는 희망의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한 편의 소설로 희망을 건져내기 힘겨운 세상을 살고 있다. 나는 이 책 한 권으로 인간 본성을 밑바닥까지 확인하였기에 처절한 패배감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 서글픔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계속 살아가야 하는지, 아니 왜 벼랑 끝에서도 죽음이 아닌 삶을 택해야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운명은 희망을 놓지 않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마지막 남은 공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공을 쳐내든지 잡아 내든지는 모두 공평한 우리 자신의 몫인 것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공은 무엇일까. 내가 인생에서 지켜야 할 ‘무엇’을 생각한다. 그 ‘무엇’을 위해 죽어도 좋을 것 같은 나를 떠올려 본다. 내 속에 여전한 두려움, 시기심, 분노, 원망, 자만심, 패배감, 이 모든 것들이 ‘7년의 밤’ 동안 다시 조율되어 마지막 승부수를 띠울 그날을 기다린다. 마지막에 웃는 자는 그 직전까지 울었던 자임을 잊지 않으련다. 중요한 건 ‘7년의 밤’, 그 이전도 그 동안도 아닌 그 이후이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를 살게 할 나만의 희망의 밤을 위해 나는 오늘도 7년 중인 밤을 기쁘게 맞이한다. 깊고 아득해도 벅찬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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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이다. 9기 인문평가단으로서 추천 페이퍼를 쓰는 것이.

   지금까지 열 권의 인문서를 받아서 9권을 읽고 글을 썼다. 이번 달 도서인 <사르트르와 까뮈>를 읽기 전에 예전에 뒤적이다 만 까뮈의 <이방인>을 넘기고 있다. 한 달에 두 권 씩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소설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렸던 듯하다. 덕분에 소설이 시들해지긴 했지만 적지 않은 것들을 얻었다. 관심도서 분야의 폭이 나도 모르게 넓어졌다는 것. 소설 때보다 세상사에 관심이 많아졌다는 것. 그러다 보니 이곳에서의 소통의 기회도 비례했다는 것. 그리고 맘에 안들거나 내 수준보다 어려웠던 책들도 나중에 피가 되고 살이 되더라는 것.(소설은 맘에 안들면 나중에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음 ㅋ) 그런데 벌써 반년의 시간이 지났다니 새삼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건 지나간다는 것이구나 싶다.

   아직 날씨상으론 늦여름이지만 가을은 워낙 짧으니 10월에 리뷰를 마무리 할 때 즘이면 분명 겨울이 다가오네, 연말을 준비하자 하면서 계절을 앞서가고 있을 터이다. 이번엔 가을에 읽기에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책을 골랐다. 가을을 기다리는 심정이 꼭 책을 기다리는 마음이 될 듯하다. 이번엔 양질의 인문서적들이 대거 쏟아져 나오고 있어서 다섯권에 들지 않는 책들 중에서도 마음가는 책이 많았다. (내가 택하지 않은 책들도 다른 분들이 많이 추천해주시면 좋겠다) 

   9월 말이면 그래도 찬바람은 불어 오겠지. 추석이 지나고 나면 남은 몇 개월은 이전 몇 개월보다 훨씬 빠르게 느껴진다. 보름달에 소원을 빌었기 때문일까?  점점 소원스러운 소원도 생각해 내기가 쉽지가 않다. 까짓거 어짜피 이루어 지지 않을거 소원이라도 크게 잡을 수 있을텐데...이제 나는 지극히도 현실적인 중년이 되어간다.



1. 뇌를 훔친 소설가 ( 석영중, 예담 ).........................................인문학>교양인문학


이 책을 서점에서 슬몃 구경하고 일찌감치 찜을 해두었다. 인간의 뇌에서 벌어지는 신경과학의 메커니즘이 문학작품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알려주는 책이다. 뇌를 훔친 소설가로는 도스토예프스키, 푸슈킨, 톨스토이, 프루스트, 괴테, 체호프등이 등장한다. 저자는 흉내, 몰입, 기억과 망각, 변화라는 소주제를 가지고 소설 속의 캐릭터를 진단한다.

예를 들어, 푸슈킨의 작품 속 여주인공 타티야나는 감정이입에 관여하는 ‘거울뉴런’의 작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며(1부 ‘흉내’) 닥터 지바고는 자신의 온 삶을 통틀어 ‘시 쓰기’에 몰입한 인물로 분석한다(2부 ‘몰입’). 극도의 몰입 상태에서 도파민이 주는 행복감을 강조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들렌은 감각과 회상의 연결고리를 푸는 실마리가 된다.(3부 ‘기억과 망각’) 4부 ‘변화’에서는 신경가소성을 평생학습으로 몸소 보여준 톨스토이와 고골의 삶을 들여다보고, 체호프가 진부한 삶에 대해 얼마나 역설적으로 비판했는지 보여준다.

지금 내가 <문학과 철학의 향연>(양윤덕, 문학과 지성사)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생각보다 어렵다. 이 책에선 문학을 읽는 방법으로서의 철학을 제시하고 있는데 시도한 작품(포의 <도난당한 편지>, 카프카의 <법 앞에서>, 플라톤의 <향연> 등)과 철학자가(라캉, 데리다, 하이데거, 푸코) 워낙 만만치 않은 탓이다. 문학작품에 시도된 철학적 사유는 흥미로운 주제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작품과 철학자를 알고 있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다. 작품과 철학자를 몰라도 잘 알려주는 책이 더러 있긴 한데 이 책은 <문학과 철학의 향연>보다는 눈높이가 편안해 보였다. 또 서구 고전문학과 현대 최첨단 과학이 만나는 지점이 상당히 매력적이다. 문학탐구와 인간탐구를 동시에 시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문학과 과학의 소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기 충분해 보인다.



2. 번역의 미로 (김욱동, 글 항아리) ..............................................인문학 > 언어학


가끔 번역된 인문서적, 소설을 읽을 때 해석이 안되더라도 원문을 확인하고 싶을 때가 있다. 어색한 문장은 둘째치고서라도 문장 자체가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될 때, 그러나 비슷한 패턴의 번역이 반복될 때 책 내용과는 별도로 독서를 이어가기 정말 힘이 든다. 작년에 헤르타 뮐러의 <저지대>를 읽을 땐 내가 독어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번역문으로도 충분히 문학적이었지만 원문으로 읽는다면 더 완벽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로 한국소설을 읽을 때면 이 책을 번역하게 되면 과연 의도가 제대로 전달될까 하는 작품들도 더러 있었다. 영미, 유럽권의 문학에서 벗어난 우리 문학의 한계는 바로 번역을 거쳐야 한다는 장애물때문은 아닐까. 이 책을 통해 번역의 철학적, 기술적 문제들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외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의 특수성을 체계적으로 사유해 이론화하였다고 하니 의미있는 토픽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조지 오웰의 에세이 가운데 “Why I Write?”라는 유명한 글이 있다. 그런데 한국 번역가들은 이 글을 번역하면서 하나같이 “왜 나는 쓰는가?”로 번역했다. 그러나 영어 동사 ‘write’는 목적어를 생략하고 자동사로 ‘(책 ·시·기사를) 쓰다, 집필하다, 저술하다’의 뜻으로 자주 사용한다. 그러니 한국어 동사 ‘쓰다’는 반드시 목적어를 사용하여 ‘시를 쓰다’ ‘책을 쓰다’ ‘기사를 쓰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웰의 그 에세이도 그냥 “나는 왜 쓰는가?”가 아닌 목적어를 넣어 “나는 왜 글을 쓰는가?”로 번역해야 한다.


 “나는 왜 쓰는가?”의 경우는 "글을"의 목적어를 빼는 것이 더 공감가는 문장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가끔 원제목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제목으로 둔갑한 소설, 원제는 부제로 밀려나고 우리네 트렌드에 맞추어 타이틀을 변형하는 행위들을 인문서에서 확인할 때도 있다. 번역하면서 책의 방향성을 바꾸어 버리는 권력행사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에서는 적어도 그러한 사태에 대한 이유있는 변명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3. 직설 - 한국 사회의 위선을 향해 씹고, 뱉고, 쏘다!
   (고경태, 서해성, 한홍구 / 한겨례출판)....................... 사회과학>한국사회비평/칼럼


‘지난 10년간 한국 사회, 진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냐, 이명박 시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에 대해 터놓고 말해보자는 것’이 이 책의 의도란다. 목차를 보니 약 마흔 명의 유명인사들이 그 목록이다. 故 리영희, 백기완, 고은 선생을 비롯해 박지원, 정동영, 강기갑, 문재인, 김두관등의 정치인, 유홍준, 김제동, 김영희, 안철수, 류승완등 각계 분야의 전문가들로 풍성하다. 얼마나 직설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가려운데는 긁어주지 않을까 싶다.


김영희: 지난해 책임 PD로 있으면서 후배들 연출하는 걸 본 게 오히려 굉장한 도움이 됐어요. 그들의 생각과 트렌드가 읽히는 거예요. 한마디로 TV는 진짜 올드 매체가 됐어요. 젊은 사람들은 TV 안 보고 다른 데로 떠났어요. 스태프들에게 “'나가수'의 타깃은 마흔두 살 아줌마”라고 공언했어요. 그냥 ‘사십대 아줌마’면 임팩트가 없어요. ‘마흔두 살 아줌마’라고 정하면 ‘그들이 뭘 하지?’ 생각하게 돼요. 1980~1990년대 문화에 향수를 가진 사람, 지금 애들이 중학생 정도 되는 부모, 하고 여러 의미를 발견하게 되죠.
서해성: 오늘날 대중은 텔레비전을 어떻게 소비하는 것 같나요?
김영희: 가치 없는 것으로.(웃음) 도움이 되거나 최소한 재미라도 있어야 보죠. 그런 걸 주지 않으면 시청자를 끌어들일 수 없어요. 이번에는 ‘노래를 통한 감동’을 끌어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진짜 노래’를 들려주겠다고 했는데 그게 생각대로 된 거예요. 기분 좋더라고요.
서해성: 여느 쇼에 가도 노래 잘하는 가수를 한 무대에서 만나기는 힘들죠. '나가수'는 보여주는 가수가 아니라 부르는 가수들 중 진짜 꾼들이 모인 거고. 그런 점에서 퀄리티로 승부를 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음향도 그렇고.
김영희: 가수들 섭외할 때 최고의 무대를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가수에 맞춰 음향감독만 다섯을 붙여줬어요. 음향에 쓴 돈만 보통 음악 프로의 다섯 배라는 거죠. 출연진들은 다른 음악 프로에 다 나가본 사람들인데, 한결같이 정말 고맙다고 하고 무대를 내려갔죠.        - p90~91


나가수의 타깃은 마흔 두 살 아줌마라는 김영희 PD의 발언이 눈에 띄어 이 책을 훑어 보고 싶다. 원래 이런 인터뷰 모음집은 각개별로 읽으면 재미난데 다 모아놓고 덮으면 남는 게 별로 없는 경우가 있다. 책 넘길 땐 좋으나 다 덮고 나면, 그래서 할 말은 별로 없다, 인 경우가 될 수 있다. 필요에 따라 하게 되더라도 또 좋은 말은 잘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저들이 ‘한국 사회의 위선과 부당함을 향해’ 얼마나한 ‘직설을 쏘’아 대었는지는 부러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다. 오늘날 지식인층에서 누가 누구를 향해 위선적이다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본다. 문제는 정도인데 만약 직설이 아니라면 한마디 붙여주기 더없이 좋을 것 아닌가.



4. 변방의 사색 - 시골교사 이계삼의 교실과 세상이야기
   (이계삼, 꾸리에) .............................................................사회과학>교육비평


이 책은 맑은 영혼의 소유자라는 이계삼 선생의 눈에 비친 ‘한국 사회와 교육 현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곽노현 교육감을 보면서 그가 정치는 하되 교육자는 아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교육은 도덕이 아니지만 교육자는 도덕적이어야 한다. 교육은 어떤 하찮은 나라에서도 미래를 출산하기 때문이다. 교육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자는 일반사람보다 더 냉혹한 도덕적 수위가 요구된다. 출판사의 소개를 보니 이 책이 시적이며 문학적 울림이 깊다고 한다. 다가오는 계절, 영혼의 아름다움위에 세워진 인문학적 깊이를 통해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듯하다. 다음의 문장을 보시라. 이분은 시인을 하시는게 더 낫지 않았을지.


“우리는 한때 저 강물이었고, 강변을 스치는 바람이었고, 꼬리 치는 한 마리 어린 송사리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한때의 우리들 몸이었던 강이 사라져가고 있다. …… 축구장 대여섯 개는 됨직한 말쑥한 호수. 바람이 부니 연둣빛의 물결이 일렁인다. 물풀 하나 없고 송사리, 소금쟁이, 벌레 한 마리 없는, 생명이 완벽히 사라진 곳. 물이 가두어져 일렁이면 그것으로 충만한가? 그 속에 아무것도 살지 않는데도? …… 공허하다. 헛것을 보는 듯 허망하다. 이 헛것의 물길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자전거를 탈 것이다. 헛것의 물길 위로 요트가 지나다닐 것이고, 유람선이 다닐 것이고, 좀 이어 화물선도 다닐 것이다. 실버타운이 들어서서 죽음을 앞둔 노인들이 이 헛것의 일렁임을 바라보며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볼 것이다. 헛것이다. 헛것으로 구축된 헛것들의 파노라마이다. 오직 헛것의 풍경을 위해, 지금 온 지축을 울리며, 강바닥을 탕탕 때리며 뒤집어엎고 파헤치는 이 참혹한 파괴와 죽음의 드라마가 이어지고 있다.”





5. 방황의 기술 - 불확실한 삶이 두려운 이들을 위한 철학 연습
   (레베카 라인하르트, 웅진 지식하우스) .....................................인문학 > 교양철학


인문 에세이, 교양 인문학, 치유철학의 장르에 속한다는 이 책은 ‘철학 상담(Philosophical Counseling)’소를 운영한다는 레베카 라인하르트의 저작이다. 삶의 치유와 철학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저자는 이미 <마음이 아픈데 왜 철학자를 만날까>(예문, 2011)를 통해 국내 독자와 교류를 한 바 있다. 철학이 상담이 될 수 있는 장르일까?


철학 상담은 심리치료가 아니다. 이는 창조적인 형태의 자기성찰이자 상호적이고 협력적인 교류이다. 정신과 의사나 심리치료사와는 달리, 철학 상담가는 스스로를 아헨바흐가 말하는 “보편적 교양인(General Dilettant)”이라고 생각한다. 철학 상담가는 규정적인 이론을 제쳐두고 되도록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마음가짐으로 상담 의뢰인(Client)을 대한다. 또한 상담 의뢰인의 애로 사항이나 문제를 신속히 제거되어야 하는 부정적인 것으로만 간주하지 않는다. 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특수한 문제들은 그 사람만의 유일성과 특수성을 탐색하는 데 항상 도움이 된다.

-<마음이 아픈데 왜 철학자를 만날까>


심리치료건 철학상담이건 독서하는 입장에선 마음을 다스리는 기술을 배운다고 생각하면 될듯하다. 강신주 교수는 방황이 자발적 여행이며 방황을 잘 하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기술이라 말하는데 결국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이 부정이 아닌 긍정의 효과로 인식되는 개념들을 알려줄 것 같다. 이 책이 다가오는 가을과 가장 잘 어울릴거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인문 MD의 소개 http://blog.aladin.co.kr/bookeditor/5027357)



요즘 선거철이 다가옴에 따라 정치인의 서적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는 듯하다.
아무래도 당분간 반짝 인기를 누릴 조짐이 보인다. 나는 인문쪽 평가단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소설에 마음이 쓰인다.
상반기는 정유정, 하반기는 김애란이라고 하는데 더이상 대박형 소설이 나오지 않고 있다. 아니 독자들이 소설을 집어들지 않고 있다. 올해 한국 소설은 최인호 작가외엔 이렇다할 베스트셀러가 눈에 띄지 않는다. 선거기획용 정치서적들이 소설과 인문서에 적잖이 영향을 미칠 것 같아 걱정이다.(근데 내가 왜 걱정을 하는거지? 아무래도 출판계 트친이 많아서 인듯 ㅠ) 

가을엔 더 성찰하고 그러기 위해 더 많이 방황할 것이다.
책을 많이 읽으면 세상을 더 많이 알 것 같아도 그 속에서 더 많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계절이여, 방황하라.
가을이여, 발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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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9-03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잘 지내시죠 ^^ 방황의 시간을 벗어나 모처럼 이렇게 놀러왔습니다. 여전히 좋은 글들을 빽빽하게 쓰고 계시네요. 휴, 신간도서단으로 활동하시는 것은 여러모로 힘드실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차곡차곡 읽고 계시니 대단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가 않아요.
제가 이 리뷰를 보면서 아차 싶었던 것이 한달에 한 번 큰 맘 먹고 책을 사거든요. 근데 맨 처음에 장바구니에 '뇌를 훔친 소설가'를 넣는데 주문 오류가 있아 취소하고 다시 시켰는데 거기서 이 책이 빠진거 있죠. ^^;;
괴롭네요. ㅋㅋ
대박형 소설은 저도 기다려 지네요. 암튼 자주 와서 리뷰 좀 꼼꼼히 볼께요. ^^

한사람 2011-09-03 01:45   좋아요 0 | URL

어머, 루쉰님! 문닫고 자러 가려하다가 다시 왔어요 ㅋ
이제 좀 적응하려는데 벌써 끝나려고 하네요..사는게 다 그렇죠
'뇌를 훔친 소설가'가 목차도 괜찮고 내용도 아주 어렵진 않더라구요
저도 서점에서 확인하고 사올까 하다가 날짜가 8월달이라 혹시 선정될지 몰라서 ㅋ
꾹 참고 왔어요 ㅋㅋ

제 리뷰가 좀 길고 지루한 편인데 말씀만으로도 고마워요~

주말에도 편안한 맘으로 가을맞이 하시기 바래요^^

가연 2011-09-03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마지막인가요? 전 이 다음이 마지막인줄 알았는데ㅋ 첫번째 책은 저도 눈여겨보았던 책이지요.. 그런데 다른 추천할 책들이 너무 많아서ㅎㅎ

한사람 2011-09-04 00:10   좋아요 0 | URL

이번에 읽고 싶은 책이 많았죠..?
저는 다른분들이 좋은 책을 알아서 택해주실 거 같아 마음을 비웠습니다.
어떤 책이 되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까지 꼭 반년이 걸렸네요 ㅋ


stella.K 2011-09-03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간 평가단 못해 먹겠다고 툴툴거렸는데
벌써 마지막 추천 페이퍼를 쓰게 됐어요.
근데 생각해 보면 예술분야의 책이 어렵기도 하고,
나 역시 따라 가기도 좀 어려운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인문분야가 예술 보다 낫지 싶어요.
이것도 남의 떡이 큰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전 다음 기에도 신간 평가단이 된다면 에세이 분야가
좋을 것 같아요. 전에도 말했지만, 나이가 드니 에세이가 좋아지고,
읽는데 부담도 없고.
나이들수록 어려운 것에 도전해야하는데...
글구 아직 정해진 건 아무 것도 없는데
앞으로 조금은 바빠질 것도 같아요. 제 페이스를 유지하려면
이제 책에 대한 욕심도 좀 내려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추천한 책 다 마음에 드는군요.^^

한사람 2011-09-04 00:13   좋아요 0 | URL

예술분야가 아무래도 전문성이 더 깊어서 그런 것 같아요.
인문쪽은 아주 어려울 때도 있고 또 생각보다 쉬울 때도 있고 편차가 크더군요

나이드니 에세이 좋아진다는 말씀 공감합니다. 위로나 치유의 에너지가 필요한가봐요 ㅠ

책에 대한 욕심 내려놓겠다는 생각은 저도 하고 있었는데
서재활동을 하다보면 그게 잘 안되는 것 같아요.
책은 현재 나의 중심이다, 가 맞는거 같아요
내가 책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ㅋㅋ

cyrus 2011-09-03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이번 페이퍼가 마지막이군요. 마지막인만큼 한사람님이 원하신 책이 선정되면 좋겠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단 한권도 제가 원했던 책이 선정되지 않더군요 ^^;;
개인적으로 석영중 교수의 책이 끌립니다.

한사람 2011-09-04 00:19   좋아요 0 | URL

그래요?
시루스님의 안목이 평균수준보다 더 높았던게 아닐까요?
사실 제가 추천하는 책들은 일단 비싸거나 어렵다는 책은 제외합니다.
정치관련 서적을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이번 평가단하면서 싫은 책들 꽤 읽었어요 ㅋ
철학은 너무 기본이 안되있어서 관심은 많이 가지만 저 자체가 책의 수준을 가늠하기 어려워서
다른 분들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요.

저도 석영중 교수의 책이 되면 좋겠어요. 뭐 안되도 구입은 할거 같습니다만 ㅋ

cyrus 2011-09-06 00:20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저는 수준이 부족한 편이라 제가 독서하는데 편한 취향과 관심 있는
취미의 책을 고르는 편이에요. 물론 단편적으로나마 책소개 페이퍼를 작성하다보니
속은 수준이 높은 책인데도 쉽다고 착각할 때가 많아요 ^^;;

한사람 2011-09-06 09:43   좋아요 0 | URL

맞아요..수준은 높은데 쉽다고 착각할때..
그 반대도 있구요

안 읽어본 책의 수준을 가늠할수 있다는 자체가 전문가의 수준인듯해요
글구 ~
시루스님 수준 높아요 ㅋㅋ

비의딸 2011-09-05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계삼 선생님의 책, 응원합니다.

한사람 2011-09-05 21:41   좋아요 0 | URL

예, 저도 응원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