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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은 시집을 읽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덮어요. 내가 찾는 건 시였을까요?

 


#1. 젖은


오늘 아침에 젖은 시집이 한 권 도착했습니다.
누런 서류 봉투는 축축히도 짓물러 있었어요. 안되는데...
겉봉에 택배비 2,500 원이 선불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숫자가 무어라고...
그게 눈물이 났습니다. 돌려보니,
시집은 7,000 원이라고 찍혀 있었습니다.

합이 만 원이 안 되는 봉지 하나가 내 가슴에 도착하는 동안
그들은 우산도 없이 비를 흠뻑 맞아 버린 상태였던 겁니다.

우린 그렇게 젖은 채로 만났습니다.



#2. 굳은


어제는 팥빙수를 먹었습니다.
떡이 굳어 있었어요. 우유가 많아 얼음이 금새 녹아버렸습니다.

예전에 2,000 원 할 때 아버지에게 자주 사다가 드렸어요.
그때 생크림 도넛이 1,200원 이었는데 도넛을 두 개 사고 남은 동전을 저금통에 넣었습니다.

이상하죠. 분명 저금한 건 기억이 나는데 그 돈을 어디다 썼는지,
그 돈이 얼마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요.

사람은,
돈 쓸 때보다 돈 모을 때가 더 행복한 모양입니다.



#3. 마른


두어 번 뵈었지만 여러 번 뵌 것 같은 분이
남도 어느 섬마을에 작은 주막을 짓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어떤 이유로 그곳으로 가길 결심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소식은 저를 울적하게 했습니다. 

새출발하는 사람두고 박수는 쳐주지 못할 망정 뒤돌아 청승입니다.

그냥,

무언가로부터, 누군가로부터,
뒤돌아섰을 그 순간의 그분이 슬펐습니다.

언젠가 이곳으로부터 뒤돌아 설 때 아무도 나를 잡지 않았어요.
실은 누구에게라도 잡힐까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건, 나를 마르게 하는 시간입니다.
마른 가슴에 풀을 메기는 기억입니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이 보기보다 원래 본질을 미화하는 단어라는 생각을 해요.
그에 비해 ‘이별’은 원래 속성보다 구슬프게 보이네요.

이번 주말은 마음에 비가 내리는 시간이 될 것 같아요.
얼마간 부여잡고 있던 일상의 유기체들을 잃어버린 탓이겠죠.
누군가는 떠나갔고,
무언가는 끝이 났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아직도 돈 계산을 못합니다.
그동안 그렇게 계산을 해왔으면서도 숫자가 어리둥절해요.
유일하게 남은 계산이라곤 주말에 주말을 견디게 해줄 고운 님들입니다.



이 책이 나온지는 알았지만 <은교> 이후 약간의 <비즈니스>에 대한 실망때문이었는지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트윗을 통해 작가님이 이 소설은 재미있다고 쓰는 동안 손에 정말로 말발굽이 생겨버렸다고 어리광(?)을 부리셨어요. 기자간담회 하고 온 날, 어쩐지 뻥치고 온 것 같다고, 소설 쓸 땐 거짓말 하는 것 같지 않았는데...하셨어요. 다음날, 기사를 보니 특이할 건 없었고, 작가의 말이나 그동안 인터뷰로 알 수 있었던 내용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같은 말 반복하고 오면 가슴에 허전함이 남잖아요. 정년퇴직도 하셨고 슬하에 자식도 결혼보냈고 지금 누구보다 허전한 시간들을 보내고 계실 것 같아 이 소설을 택했습니다. 독자로서 해드릴 수 있는 건 없지만, 이렇게 주말을 같이 보내드릴 순 있잖아요. 
 

 

 


그리곤 간간히 이 시집을 넘기며 가슴에 내리는 비를 달래 볼래구요.
(오늘 아침에 빗물과 한께 도착한 시집입니다)

이 서른 넘은 시인이 말하는 오늘, 금요일을 적어봅니다. 
 

 

 



   
 

금요일


  검은 옷의 사람들 밀려 나온다. 볼펜을 쥔 손으로
나는 무력하다. 순간들 박히는 이 거룩함. 점점 어두 
워지는 손끝으로 더듬는 글자들, 날아오르네. 어둠은
깊어가고 우리가 밤이라고 읽는 것들이 빛나갈 때.
어디로 갔는지. 그러므로 이제 누구도 믿지 않는다.


  거기 가장 불행한 표정이여. 여기는 네가 실패한
것들로 가득하구나. 나는 구겨진 종이처럼 점점 더
비좁아지고. 책상 위로 몰려나온 그들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 그러니 불운은 얼마나 가볍고 단단한지.
지금은 내가 나를 우는 시간. 손이 손을 만지고 눈이
눈을 만지고, 가슴과 등이 스스로 안아버리려는 그때. 

 

- 오늘 아침 단어 中 , 28 p

 
   





글쎄, 어떤 금요일이었을지 모르지만 모르긴 해도
다가오는 주말이 그다지 기다려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뭐, 장마같은 사람들, 비에 젖은 소식들이 슬프긴 해도 저는 주말을 기다립니다.
견디게 해줄 님들이 있어 그럭저럭, 아직은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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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6-24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지니스가 별로 였나요?
하긴 저도 딱히 끌리지는 않던데...
박범신 작가의 저 책은 저도 언젠가 꼭 한번 읽어보고 싶긴해요.
저도 3주전에 팥빙수 먹었는데 또 언제 먹어 볼까 싶어요.ㅋ

한사람 2011-06-24 16:13   좋아요 0 | URL

ㅋ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급한 기운이 느껴졌어요

파리바게트 울 동네 팥빙수는 6500원이나 하더군요 ㅠ.ㅠ
둘이 먹기에도 많고 완전 냉면 먹는 기분..
그냥 옛날에 분식집에서 얼음 갈고 팥하고 미숫가루 넣고
먹던 팥빙수가 그립더라는 ..

stella.K 2011-06-24 18:11   좋아요 0 | URL
그래도 카페 베네보다 싸네요.
거긴 9천원인가? 9천5백 하던데요?
물론 양도 많고 맛있긴 한데,
그냥 카페는 그보다 싸요. 4천5백원인가 하니...

저는 작년에 출판사하고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래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어요.ㅋ

한사람 2011-06-25 10:51   좋아요 0 | URL

카페베네가 그렇게 비싸요?
허긴 웬만한 음료는 6000원이 넘더라구요 ㅠ.ㅠ
시집은 7.8천원인데..

글구, 출판사라 하심은 혹시 <비지니스> 의 자음과 모음? 말씀 하시는 건가요?

2011-06-25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5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5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5 1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사르 2011-06-25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마에 태풍에..주구장창 비오는 주말입니다. 이런 날엔 점심으론 짬뽕이 제격이고, 저녁엔 찬 소주를 한 잔 들이켜야 맛이고, 그리고 한 손엔 시집을 끼고 있어야지요.ㅎ
저도 시집 한 권 끼고 울고불고 하고 있슴돠~

한사람님의 시집은 첫 만남부터 그렇게 멋있으면서 애잔하군요. 내용도 분명 주말을 견딜만할 듯합니다. ^^

한사람 2011-06-25 16:40   좋아요 0 | URL

아..저는 점심으로 고열량의 피자를 먹었어요..
짬뽕에 쏘주...김치전이라도 해 먹어야 하는데
그러다가 손에 든 시집을 그만 라면 받침으로 쓰는 일은 없어야 하는데 ㅋㅋ

예, 전 인문서적 보다가 텍스트의 근엄함에 짓눌릴때
시집으로 뇌를 정화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요즘 시집들이 서정적이지 않아서...
옛날이 그리워요 흑.

2011-06-27 1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8 1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차가운 라인


요 며칠 저는 다시 온라인이 무서워졌습니다.

책 읽는 사람, 글 쓰는 사람이야 말로 자신의 말과 글로 누구보다 더한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에 이제는 확신을 너머 신앙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는 게 많고 생각한 시간이 많으면 아무래도 자신이 옳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요. 책은 읽을수록 더 부족한 것 같고 글은 쓸수록 더 어렵던데 저는 가끔 그런 분들이 자기사유에의 우월감에 듬뿍 빠져 그만 자기 자만이 세상의 기준이 되어버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보아왔습니다. 그럴 때 저는 책 많이 읽는 것에 급작스런 회의를 느끼며 비록 동네 서평자이지만 제 수준에서 절필을 하고 싶다는 울분에 헐떡이곤 그만 심장을 다칩니다. 책에는 길이 없다는 김훈 작가의 말씀과 책만 보는 얼간이, 글만 쓰는 장애자,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오로지 생각만 할 줄 아는 바보, 이런 자학에 시달립니다.

처음부터 저는 문학하는 사람들이 그다지 근사해보이지 않았거든요. 세상과 사람에 패했지만 자신은 이 방법으로 이겼노라 말하기 위해 문학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렇게 살았는지 왜 그때 울었는지 일평생 변명하려고 작가가 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심지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작가는 모조리 위선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평일 내내 남들 욕하고 주일에 하루 예배가서 나머지 날의 죄를 용서받으려 하는 교인과 다를 바 없다고 믿었습니다. 주제넘지만 시인, 소설가, 평론가, 편집자 순으로 위선은 비례한다고 생각했죠. 그렇지만 그래도 제가 소중하게 여긴 건 그들은 책 안 읽고 글 안 쓰면서 위선자인 사람들 보다는 좀 낫다, 하는 생각이었어요. 정의는 누구에게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사람이라도 이루려고 하는 과정이잖아요. 온갖 욕망과 시기, 타락과 배신 속에서도 그렇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그 과정을 글로써 토해내는 것이니 그것마저 안하는 자들보다는 낫겠지, 싶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제 속에 ‘책 좀 읽고 글 좀 쓰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살면서 ‘책’이나 ‘글’ 때문에 혼나면서 학교를 다닌 것 같지는 않은데 저는 유독 사회에 나와서 위의 사람들과 많이 부딪히며 세상을 배워왔어요. 사람은 제 속에 들어있는 속내를 타자에게서 발견할 때 가장 그 상대를 싫어하고 거부한다고 하는데 심리적으로 외려 저한테 그들의 속성을 감추려고 하는 무의식이 내재되 있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잘난 척 하는 거 재수없어 하는 사람들이 대게 잘난 척을 하는 사람일 경우가 많아요 ㅋ, 왜 일까요? 그거 사실은 자기가 잘하는 것이기에 금방 알아보거든요) 어떤 사람의 속성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몸서리치게 증오했다면 그건 바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향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저는 겉으로는 안 그런척 겸손한 척 해놓고 속으로는 그들과 같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혹시라도 그들을 비난했다면 그건 제 얼굴에 침뱉기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전엔 오프라인에서 얼굴보고 남는 시간에 온라인에서도 대화를 했죠. 그러나 지금은 그 비율이 완전 바뀌어 버렸습니다. 온라인에서 우선 정들고 정말 괜찮은 것 같으면 오프라인에도 얼굴을 비치게 되는 것이죠. 이제 온라인은 더 이상 사이버 세상이 아니고 완전하고도 구체적인 실질적인, 실물의 세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외려 오프라인이 더 어색하고 비현실적일 경우가 많아졌어요. 이 이야기는 우리가 일상에서 온라인을 붙들고 있는 시간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본격적인 우리네 온라인의 인생도 그럭저럭 십여 년이 넘었고 예전에 PC통신의 시절까지 합치면 거진 이십년입니다. 역삼동에 위치한 아이네트라는 회사(당시 허진호 사장)에서 넷스케이프라는 브라우저를 띄워놓고 직장동료와 졸면서 인터넷 교육을 듣던 게 1995년입니다. 딴에는 후져빠진 교육계에 기여하겠다고 멀티미디어를 배운다는 학과에 들어가 대충 졸업과제물로 CD-ROM을 만들었던 게 어쩐지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만 같습니다. 예전에 나이드신 이모님이 사람들만 모이면 그렇게 옛날 이야기를 끊이지 않고 하시더니 제가 꼭 그꼴입니다. 이렇게 변한 세상이 가끔은 신기합니다. 네비게이션과 화상대화, 스마트폰으로 이루어진 21세기 등등의 주제로 시나리오를 써놓고 이것이 미래의 한국이라고 아름다운 한국에 놀러오라고 그런 홍보영상을 만들었던 게 불과 십년 전이었습니다. 대부분 우리 손안에서 그걸 당연하게 하고들 있지 않습니까. 저는 잘나가다가도 한번씩 그 당연함에 스스로 한랭전선을 형성할 때가 있습니다.



#2. 따스한 라인  


그래서일까요,

이런 세상이 참 편하고 놀랍고 재미나다가도 저는 가끔 숨이 찹니다. 벅찰 정도로 숨이 막힙니다. 손과 발이 시리듯 가슴이 시큰합니다. 처음엔 모든 것이 낯설었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것들에 익숙해지는 제 자신이 징그러울 때가 있어요. 나라고 별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울컥 눈물이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뭐야... 너도 하고 싶었던 거니? 너도 좋았던 거니?, 하면서요. 바로 그럴 때, 또 저는 습관적으로 책을 집어 듭니다. 무슨 용서를 구하듯이, 반성이라도 하듯이, 웃기지만 다른 방법을 아직 못찾았어요. 그러곤 엊저녁에 황석영의 <낯익은 세상>을 덮었습니다. 컴과 폰과 TV, 모든 전자적 세상을 끄고 조용히...그랬어요. 그렇게 있는 것이 요즘은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그걸 자각하고 견디는 게 더 낯설지 않습니까?


느낌은 그전 <강남몽>보다 한결 편안했습니다. 슬펐지만 견딜만 했습니다. 심지어는 (외람되게도)쉽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쉬워선 안 되는데 어, 왜 이렇게 느껴지지, 뭐 이런. 두어군데 훌쩍거리다가 내 그럴 줄 알았어, 하며 원 쓰레기 같은 세상같으니, 혼자서 욕을 퍼부었습니다. 시원하더군요. 그렇게 욕이라도 하고나니 세상에 내 할 짓은 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비록 아무도 몰라줄 지언정. 이 작품, 가슴속에 찌꺼기 처럼 남겨져 있던 무언가를 확 불사르는 느낌이 드는 책입니다.

본인 스스로 이 맘 때의 문학은 ‘모든 것을 쓸어버린 뒤의 폐허에 남아있는 연민을 위한 것’이라 했듯이 모든 욕망이 다 타버리고 남은 현장에서 담배 한 대 길게 물고 한숨 한 번 짓는, 그리곤 다시 당신의 일상으로 천천히 복귀하시는 느낌이 들었달까요. 저는 그 고독한 뒷모습을 오래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번쯤 뒤돌아 보아주셔도 될텐데 그러곤 묵묵히 걸어가시더군요. 그게 꼭 서로를 우리 사는 세상을 위한 일이라 여기시는 듯. 결국, 돌아가게 하는 발걸음은 두말없이 위로였어요.  

 

그래, 저도 세상을 향했던 일말의 분노를 내려놓는 느낌으로 곤히 잠이 들었습니다. 다른 어떤 전자적 세상의 도움없이 말입니다.

그래, 난 오늘 아침도 여전히 책 좀 읽고 글 좀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감히 추천하건대, 무언가를 태워버려야 할 것이 남아있는 분들은 저처럼 이 책을 덮고 허공에 욕 한번 하고 나면 다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성란 작가는 작품 시작하기 전에 빈 문서로 실컷 할 욕 안할 욕을 다 토해놓고 그것을 사정없이 삭제한 다음 후련한 마음으로 새롭게 글을 쓴다고 한 적 있습니다.  이번 독서가 제게는 하성란 작가의 빈문서였습니다.

작가가 말하는 도깨비, 훈장 선생님 같은 그 도깨비 할아버지가 네 이놈들아 하고 훈계하시는 말씀을 적어 봅니다.  쓰레기 없던 세상은 거기 쓰레기 천지인 세상과 이렇게 다르다고, 이쪽이 원래 낯익고 그쪽이 낯설은 거였다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제 생각에 이런 비슷한 호령은 조정래, 박범신 작가등의 연배에서 꼭 하고 싶은 말씀인 듯합니다.

그런데 정신차려보면 내가 싸우던 건 결국 세상도 타인도 아닌 나라는 우주였다는 생각입니다. 산다는 건 그렇게 매번 익숙할 줄 알았던 내 안의 다른 나, 또 다른 세상과 끊임없이 싸우며 그럭저럭 낯설었던 세상이 슬슬 낯익은 세상으로 변하는 과정이 아닐까요. 


거긴 여기와 다른가요? 암, 다르구 말구. 우리 동네는 언제나 너희 곁에 함께 있는 곳이다. 너희들이 있어서 우리가 있게 되고 너희가 없어지면 우리도 없어지는 거야.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오리 한마리, 산과 강에 이르기까지 함께 살고 너와 똑같단다. 여기서는 모든 물건이 장애물이고 싸워서 없애야 할 괴물에 둘러싸인 너 혼자뿐이로구나. 이쪽 길은 너를 끝없이 쫒아내려 하고 성취에 길들이려고 하지 않니? 그냥, 출발하지 말고 나가버리면 될텐데.....   207p

 

안 보이는 온라인도 좀 따스한 溫라인, 어느 세상보다 온기 넘치는 진짜 세상이 되는 날을 기다립니다.

얼마나 낯설었습니까,그땐. 지금 이렇게 우리가 낯익듯이

그 얼음같이 낯설은 차가움도 언젠가는 동네이웃처럼 살갑게 낯익은 우리 삶의 터전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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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06-18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얼음같이 낯설은 차가움도 언젠가는 동네이웃처럼 살갑게 낯익은 우리 삶의 터전이 되기를.] 저도 꼭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사람님 마음도 따뜻하게 풀어지기를, 그래서 더 좋은 글 오랫동안 볼 수 있기를. 그런데 저, [오래된 정원] 때는 황석영님을 엄청 좋아했는데(제가 대학생 저학년일때요) 이제는 그다지 흥미가 없어져요. [낯익은 세상]은 어떨까 싶었는데 막상 그다지 땡기지 않구요. 저도 요즘 엄청 바라고 또 원하는 거니까요. 따뜻한 세상. 그러니까 한사람님. 우리가 절대 포기하지 말아요. 포기하지 말고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요.^^

한사람 2011-06-18 22:40   좋아요 0 | URL

예, 저는 마음이 많이 풀어졌습니다. 글로 상처 받은건 글로 푸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ㅋ

개인적으로 <강남몽>보다 진일보한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강남몽>이 압축의 스펙트럼이 얼마간 부담스러운 경향이 있었다면, 이 책은 한가지 현상을 파고드는데
집중하셨어요. 문득, 김훈 작가의 <내 젊은 날의 숲>도 떠올려지더군요.

어쩐지 본인 자신을 위한 글이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른 때와 달리 사회적 시선, 선굵은 서사에 대한 부담(?)은 덜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절대 포기하지 말아요. 포기하지 말고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요' 이 말씀이
뭉클한 밤이네요^^, 고맙습니다 ~

2011-06-19 14: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9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9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9 16: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9 1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9 2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0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0 1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0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0 16: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0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1-06-22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한사람님을 글로 상처주는 작자들이 누군지 궁금하네요! 절대로 상처 받지 마시고 계속 쓰셨으면 해요. 흠..이해를 못 하겠네요. 저도 황석영의 작품은 읽다가 말아버린 독자라서요. 전 왜이리 한국 문학이 무거운지 모르겠어요. 읽으면 숨 쉬기 힘들만큼 무겁다고 할까요...뭐랄까 가슴에도 안 들어오고 말이죠. 좋아하는 작가가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구요.
한사람님의 글을 읽으면 딱 한 호흡에 쫙 읽혀집니다. 멈추지 않구요. 전 그게 좋은 글이거든요. ^^ 평탄한 도로를 미끄러지는 자동차처럼 쫙~하고 글이 흘러가요. 힘 내세요! 온라인도 반드시 통합니다.

한사람 2011-06-23 00:25   좋아요 0 | URL

우연이 겹치다 보니..
제가 좀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늘 그렇게 생각해왔어요
누구나 다 자신이 상처받았다고 생각한다잖아요 ㅋ

한국소설, 우울하죠..
그래도 전 저분들 글이 울림이 있어서 좋아요
관념적인 세계를 좋아해서 그런가봐요

제글이 한 호흡에 간다는 말씀이 힘이 되네요
호흡이 길다는 말은 많이 들었었는데..
저는 글만쓰려고 하면 마음이 울컥해지는 경향이 많아요
그래서 글쓰고 나서 풀어지면 그때서야 헤헤 거리죠 ㅋ

 



#1. 가진 건 마음 하나뿐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 중에 ‘나는 가진 게 마음뿐이니 마음 하나는 제대로 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즉, (다른 건 모르겠고)마음만 주겠다는 것이다. 이 말은 대부분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지식도 없으니 그저 정성스런 마음 하나로 때우겠다는 미봉책의 답변일 경우가 많다. 혹은 예전엔 뭐라도 하나 해줄 수 있었거나 앞으로 잘되면 반드시 뭐라도 해주겠다는 말을 대신할 경우도 있다.(지금은 마음밖에 못주니까) 나름 미안해서 하는 말일 수도 있으나 내가 생각하기에 안 하니만 못한 말이 되기 쉬운 속성을 가진 말이다. 듣는 입장에선 결국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는 뜻으로 들리기가 쉽기 때문이다. 또 정말로 (주고 싶은데)아무 것도 줄 것이 없어 마음만 애타는 사람은 그 미안함이 저런 식의 말을 전하게 놔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것을 주지 못해 마음만 가득인 사람은 말 안해도 그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인격에 서슴없이 마음을 파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마음만 받겠다는 말은 주는 쪽이 아닌 받는 쪽이 해야 할 말인 것이다.

  또 하나, 나는 오래 전에 마음이라는 게 인간에게 있다고 치자면 그것의 위치는 인간의 가슴쪽이 아닌 뇌쪽이라는 생각을 굳혔다. 이것이 헤깔릴 때가 아마도 대략 이십년 전 쯤 마음이 아프다고 느껴질 때 정말로 왼쪽 가슴께가 뻐근하게 아파오는 것을 확인하던 시절이었던 듯하다. 가슴이 아프다는 말은 추상적 관념어가 아닌 처절하게 육화된 육체적 고통에서 비롯된 경험어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사람에게 마음이 있다면 그곳은 실제적 고통이 느껴지는 부위인 심장쪽 근처 어딘가에 자리할 것이다, 이런 믿음을 처음에 가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믿음을 무참하게 짓밟는 학자들은 학교 도처 어디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붙었는지 그것은 어떻게 변하는 것인지 연구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았다. 이 사람들의 이론은 대체적으로 마음의 변화는 뇌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인지적 접근에 의해 충분히 마음을 바꿀 수 있다는 식이다. 그러니까 바꿔 말하면 머리가 아프다는 말도 곧 마음이 아프다는 말과 같은 뜻이라는 말씀이다. 마음 바꾸는 건 마음대로 안되는 일이라는 말은 틀렸다는 뜻이렸다. 마음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어디있다고 (항변하고)싶었지만 나는 결국 그들의 이론을 믿어보기로 했다. 마음을 돌리기 싫은 마음 역시 머리가 시키는 일임을...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라 할까.


 #2. 상처난 마음, 깨어진 마음

박숙희 <아직 집에 가고 싶지 않다, 화남>

  마음이 많이 어지럽던 지난 주말 이외수 작가는 뜬금없이 이런 책을 추천한다고 하셨다. 추천 이유도 없었고, 그 이후로도 언급하신 바가 없다. ‘반값 등록금 투쟁’으로 광화문 집회소식이 탑 뉴스일 때 였다. 그 즈음 누군가의 자살 소식도 들려왔다. 요즘은 유명인사의 자살소식 같은 건 (운대가 안맞으면? 채동하를 보라~)탑 뉴스에 끼지도 못하는 것 같다. 자살이 기사화 될 때 우리는 어느덧, 그것이 특정 사건종결의 의미이냐, 개인사 동정의 시작이냐, 새로운 사건 제보의 의미이냐, 여론 반성의 기회이냐를 발빠르게 구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뇌에서 이루어지는 작업과정은 자살자에 대한 애도와는 별개의 문제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별개의 문제일까? 부고 소식은 마음이 아프지만 어쩐지 불쾌하고 진부하기 까지 한 것은 무엇일까. 이제 누군가의 자살 이후 대한민국의 언론대응 시스템은 세목화된 매뉴얼을 연상시킨다. 아직 가슴에 남아있는 애도의 불씨를 진정시킬 시간적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스마트폰의 등장이후로 실시간의 뉴스를 언제 어디서나 확인할 수 있는 덕에 지나간 뉴스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른바 소셜 학습효과가 아니고 무엇인가. 마음도 학습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나 같은 반아나, 반디지 세대는 정말 혼란 스럽다. 마음 하나만 믿고 버텨온 세월(?)이 풍화작용에 의해 지지층이 약해지는 순간, 말 그대로 마음을 종잡을 수 없는 순간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박숙희의 <아직 집에 가고 싶지 않다, 화남>는 진지한 마음탐구의 시간을 열어주었다. 이 책은 따끈따끈한 신간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온라인 서점에서도 홍보되지 않은 어느 중견작가의 장편소설이며 특이하게도 노숙자의 심리상태를 그리고 있다. 딴에는 새로운 책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가 이 책을 추천받았을 때에 나는 몇 년 지난 소설쯤으로 생각했다. 생소한 제목, 전혀 기억나지 않는 작가, 들어보지 못한 출판사. 속된 말로 대형출판사와 유명작가에 밀린 작품이었다. 내용마저 노숙자로 시작하는 터라 이 책은 안밖으로 소외감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이 책을 덮고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어떻게든 글로써 예의를 표하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였달까.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쓰고도 이러저러한 속세의 법칙에 의해 독자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 현실이 야속하다는 생각을 했다. 출판사와 작가에겐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 책이야 말로 문단의 노숙자 격인 소설이 아닐까 싶었다.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노숙자를 말하고 있지만 그를 통해 들여다 본 인간 마음의 상처와 그 변화 심리 상태를 정교하게 포착하고 있다. 총 3장으로 구성된 소설은 노숙자인 화자 ‘나’의 일상과 그가 동경하던 노숙자 범생이의 자서전, 그리고 범생이가 시신으로 발견 된 후 경찰서에서의 조사과정으로 나누어져 있다. 어쩌다가 노숙자가 된 ‘나’는 S역 대합실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신세인데 고상하게 생긴 범생이가 남긴 자서전을 읽게 되고 사망자의 유품인 노트를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나’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주인공 화자는 소설의 리더이지만 시점은 노숙자인 '나'의 시점, 범생이의 시점, 그리고 마지막 여러 노숙자의 시점으로 이동하며 상황은 흥미를 더하고 시공간은 입체적으로 확대된다. 노숙자의 생각과 그들 친구의 생각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생각의 깊이는 곧 작가의 깊이인지라 서울역 대합실에서 펼쳐지는 그 사유의 바다가 꽤 관념적이다.(이 책에선 노숙자가 곧 철학자다) 작가가 전하는 노숙자의 하루는 우리가 생각하는 노숙자와는 전혀 다르다. 아니 다르게 전한다. 어떤 부분에서는 이외수 초기 소설에 등장하는 대칭적 수사, 반복 만연체식 문장도 오버랩되었다. (말잘하는)누군가 내 귀에 들려주는 소설같은 느낌이었달까.

떠나던 날 우리는 서로의 손을 오래 부여잡은 채 놓지 않았다. 아무리 노숙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이별은 슬픈 것이었다. 아니, 우리가 노숙자이기 때문에 이별이 더 슬펐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날 이후 우리가 다시 만날 기약은 정녕 없는 것이므로. 26 p

  화자가 말하는 노숙자는 ‘버려본 자 만이 알 수 있는 철학’ 을 지닌 사람들이다. 노숙자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슬픔’이며 노숙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제일먼저 ‘슬픔의 습기’부터 제거해야 한다고 경험자는 말한다. 건조해진 상태에서 노숙을 하지 않으면 한없이 위태로와 진다는 것이다. 즉 마음이 촉촉한 사람은 노숙자의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마음이 촉촉하다는 것은 생각이 많고 그 깊이가 깊어 결국 우울해지고 그러다 보면 극단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노숙자는 과거를 기억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않아야 하기 때문에) ‘기억의 사진첩 대부분을 찢어 버림으로써’ 자신을 버린다. 그런데 모든 걸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지킬 것도 빼앗길 것도 없는' 자의 여유로움마저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화자가 노숙자가 된 이유는 자존심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장의 제목은 ‘나는 나를 버림으로써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인 것이다. 내 마음 하나 버리니 세상을 비추는 마음이 되었다니 참으로 철학적인 그들이 아닌가. 아니 노숙자와 도인과의 차이는 종교의 유무밖에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가장 마음을 울리는 건 범생이라는 김형훈이 노트에 기록한 자서전이었다.

떨쳐 버리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도저히 버려지지 않는 어떤 마음, 아니 끝까지 간직하고 싶었는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깨어져 버린 어떤 마음, 그리고 깨어진 그 마음이 딱딱한 물질이 되어 급기야 병이 되고 만, 바로 그것들에 대한 기록이 될 것입니다. 57p

  그러니까 이미 마음은 깨어졌는데 어떻게 해서 깨어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지금의 마음 모양은 어떤 것인지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글이었다. 한 사람의 마음에 균열이 가고 깨어지는 과정은 회화도 영상도 아닌 오로지 글로써였다. 나는 이 책에서 시각이 문자화된 범생이의 마음 기록이 가장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이 사람이 마음의 작동기능을 정지해야 하는 이유는 외려 정지 했을 때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는 고백이었다. 마음이 산산조각 나면 그것의 기능은 멈추어 버리는 것이므로 일단정지는 생존을 위한 방어본능이라는 것이다. 마음이 깨어지면 그 기능이 정지되며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도 들렸다. 자서전을 쓰느라 노트에 연신 무언가를 적던 노숙자, 범생이는 글을 쓰기 전에 소설을 읽는 사람이었고 소설은 위안도 상처도 동시에 제공하는 것이었지만 아픔이 있는 사람이 소설을 읽는다는 말은 어쩐지 작가의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 말은 소설을 읽고 소설을 쓰고 싶은 내가 열렬하게 동의하고 싶은 말씀이기도 했다. 책을 넘길수록 이 책은 서울역 어느 노숙자 이야기가 아니고 소설가로서 노숙자가 되어본 작가의 이야기라는 믿음이 생기는 건 왜 였을까. (노숙자의 경험이 있으셨던지.. 남자 노숙자의 심리를 완벽하게 표현하신 점이 놀라웠다)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그동안 살면서 아프게 여겼던 삶의 상처들이 나만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나보다 훨씬 더 아픔이 많은 상처투성이의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더러 위안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깊이 빠져들면 들수록 상처가 오히려 부추겨지면서 세상이 더 싫어지기도 했습니다. 소설은 아픈 사람을 더 심각한 환자로 만드는 그런 측면도 있었던 거지요. 책을 좋아하는 B 역시 어쩌면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아픔이 많은 친구일지도 몰랐습니다. 103 p

  범생이의 자서전을 통해 작가는 소설이 가지는 기능적 속성은 물론 예술로서 문학으로서의 소설의 치명적 단점도 언급하시는 듯 했다. 소설속에서 범생이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는 훗날 소설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보다 그녀는 소설쓰기와 같은 예술행위가 안고 있는 딜레마를 너무 잘 알고 있어 섣불리 그런 일에 뛰어들지 않을 거라 생각되었습니다. 예술은 태생적으로 결코 완전할 수 없는, 그리고 도저히 완전에 도달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존재할 뿐인 완전을 뒤늦게 표현한다는 것은 아무리 해도 완전과는 어긋나거나 미끄러워질 뿐인 그런 것이니까요. 그런 어긋남과 미끄러짐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 같던 그녀가 소설가가 되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아무래도 낯설었습니다. 138p

   이 말은 만약 내가 소설가가 된다면 내가 아는 지인들이 꼭 내게 퍼부을 말 같기도 했다. 나조차도 의심스러운 나일테니까.

  그런데 범생이 노숙자의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학창생활, 교우관계, 연애와 결혼 등의 이야기를 넘기고 나면 이 사람은 그 어디도 노숙자가 될 만한 사유를 가지고 있지는 않아 보였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순결한 마음을 가지려 노력했고 그것이 완벽한 자신의 조건이라 생각한 사람이었다.(물론 노숙자가 마음이 더럽다는 뜻은 아니다) 살면서 마음이 깨어져 그것을 버린 사람을 노숙자라고 볼 때 범생이는 절대 마음을 버리려고 했던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화자인 ‘나’ 역시 범생이의 매력은 마음을 느끼게 하는 사람, 마음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좋았다고 고백한다.(범생이는 주로 들어주는 쪽이었다) 그 마음 하나때문에 범생이가 좋았고 그곳의 가장 깊은 곳에 빠져 도저히 나오려 하지 않았던 그 마음 때문에 범생이가 싫어졌다고 말한다. 모든 건 마음 탓이다. 하지만 세월속에서 현실이 주는 상처에 굴복당한 범생이의 마지막 거처가 노숙자 현장이었던 것은 슬프기도 했지만 어쩐지 아프기만 한 소식은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마음을 다치면 육체도 훼손되듯이 마음을 둘 곳이 없다면 그곳은 훌륭한 고택이나 서울역 대합실이나 매 한가지 아닌가 묻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마음 하나만 바꾸면 다시 육체도 회복되고 정상적인 생활을 다시 시작 할 수 있다는 말 아닐까. 그렇다면 범생이는 왜 그 마음하나 바꿀 기회가 없었던 것일까. 마음만 바뀌면 다시 얼마든지 집에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 노숙자가 아닌가. 이 때 나는 (공부한 것을 버리고)그 마음이라는 게 자기 마음대로 안된다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그러나 작가는 말한다. 손바닥 뒤집듯이 쉽지 않은 것이 마음 바꾸기라지만, 그것은 가슴이 시키는 일이 아니고 머리가 명령하는 일일 것이므로, 그렇담 그 일은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싶다고. 아직은 집에 가고 싶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늘 그렇게 바뀌기 마련이라고.  

  그렇게 본다면 마음을 잡는 다는 것은 외려 도망가던 생각을 붙잡아 그 속에 고집스럽게 빠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선회하는 일이 아닐까. 마음을 잡아야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 터이니.


#3. 마음을 바꾼다는 것


    그런데 왜 어떤 이는 마음을 바꾸지 못해 죽음을 택하는 것일까.         

    마음을 좀 뜻대로 바꿀 수는 없는 걸까.                                

허전한 마음에 소설을 덮고 나는 다중지능으로 잘 알려져 있는 하워드 가드너의 <체인징 마인드>라는 책을 다시 뒤적여 본다. 몇년 전 그는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변하는가?”에 대한 친절한 답변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요인으로 일곱 가지 지렛대를 말하고 있는데 어려운 것 같아도 따져 넘겨보면 하나같이 우리 마음이 바뀌는 이유가 되는 것들 임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마음을 바꿀 때, 마음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정확하게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있다.  

하워드 가드너에 따르면 사람의 마음은 결코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변하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겉보기에는 매우 갑작스럽고 직관적인 변화라 할지라도 그 배경에는 오랜 시간에 걸친 점진적이고도 능동적인 변화 과정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 과정에는 그가 ‘일곱 가지 지렛대’라고 부르는 다양한 요소들이 작용을 하는데, 그 일곱 가지 지렛대는 우연히도 모두 영어의 알파벳 Re로 시작한다. 이성(Reason), 연구조사(Research), 동조(Resonance), 표상의 재구성(Representational Redescriptions), 자원과 보상(Resources and Rewards), 실제 사건들(Real World Events), 그리고 저항(Resistances) 이 그것이다.

    

  좀 더 통찰력을 높여 보려면 질문을 ‘성공적인 미래를 위해서 우리는 어떤 마음의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가?’로 확장할 수가 있다. '체인징 마인드' 이후에 소개된 『미래 마인드』는 미래에 요구되는 마음의 능력을 연구한 책이다. 이 책에 소개된 마음, 21세기를 성공적으로 살아 나가기 위한 미래 마인드 다섯 가지는 훈련된 마음, 종합하는 마음, 창조하는 마음, 존중하는 마음, 윤리적인 마음이다. 역시 교육적인 결론이다. 하워드 가드너 교수는 출간하는 책마다 교육및 심리, 사회학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분이다. 이분의 신간 소식을 기다린다.


 

 

  

   나는 소설 읽고 미치도록 즐거웠다는 사람보다는 더할 수 없이 쓸쓸했다는 사람을 많이 만난다. 일차적으로 결말이 유쾌한 소설보다는 우울한 소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왜 우울하고 슬픈가. 왜 그렇다고 느끼는가. 그런데 왜 그것에 위로를 받는가. 혹, 슬픈 마음을 받아 들이는 뇌의 문제는 아닐까?

   소설이 허탈할 때 그것을 덮고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나는 인문학이 유용하다는 생각이다. 소설이 상처난 마음을 위로해준다면 인문학은 그 상처의 원인을 이해하게 하고 얼마간 논리적인 시간을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둘다 균열된 마음, 깨어지려고 하는 마음을 다잡아 주는 치유효과는 확실하다.  그런데 소설을 자주 읽는 사람은 바로 인문학 서적을 집어 들기가 쉽지 않다. 내 생각에 위로의 방식도 습관화 되는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 그 슬픔을 더 오래 유지하고 싶은 욕망도 잔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좀 생각이 달라졌다. 마음을 바꾸는 것은 소설의 문제라기 보다는 인문학의 문제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더불어 나는 이외수 작가가 왜 박숙희님의 소설을 권했는지 다시 생각해본다. 모든건 이렇듯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청춘을 향한 희망의 메시지는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마음을 바꾸지 못하고 끝내 자살을 택하는 청춘에게 글로 이루어진 자화상을 통해 자신을 비추어보라는 말씀 같기도 하다. 어떻든 청춘이 아니더라도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 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 피할 수 없는 마음관리 행위에 속한다 할 것이다. 마음이 어지럽거나 종잡을 수 없는 분들에게 이 책들을 꼭 권하고 싶다. 특히, 박숙희님의 소설은 글을 쓰려는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흔드는 매력을 지녔다. 왜 주목받지 못했는지 그것이 통한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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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4 2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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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4 2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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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4 22: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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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4 23: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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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6-14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희숙님의 소설이 굉장히 읽고 싶어지네요. ^^ 이런게 진짜 리뷰이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구요. 감탄해요.

소설이 허탈할 대 인문학이 유용하다는 것, 그것은 저에게도 쓰일 수 있는 치유책이라고 생각이 드네요. 저 역시 소설로 무언가 부족하고 실체를 잡고 싶을 때 인문학 서적을 보는 편이니 말이에요. 아주 꼼꼼히 자세하게 잘 읽었습니다. 전 한국 문학은 거의 안 읽는 독자이다 보니..왜 그런지를 모르는데 한국 소설은 잘 읽지를 않아요. 별로 안 좋은 습관인 것은 알지만, 고쳐지지 못 하는 습관 중에 하나인 것 같습니다. ^^ 여기 와서 그 습관 좀 고치고 가야할 듯 합니다.ㅋ

한사람 2011-06-15 08:54   좋아요 0 | URL

겁없이 이소설을 추천합니다 가독력도있고 문체도 남성적이고ㅡ갠적으로 여성취향의 문체를 싫어해서ㅋㅡ읽는동안 노숙자의 시선으로 살았습니다

...........

어제 머리가 좀 아파서 덧글을 폰으로 작성했어요
오늘 다시 읽어보니 글이 엉성하고 급하게 쓴티가 나서 좀 고쳤습니다..
진짜 리뷰라고 하셔서 자극+용기+위로+감사+책임...이런 것들이 지나갑니다 ㅋ

정말 괜찮은 소설입니다^^

굿바이 2011-06-15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숙희씨의 책을 선물받고 겁이 나서 아직 펼쳐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친구는 책을 선물하고, 한사람님은 이렇게 울림이 있는 리뷰를 쓰시고, 이 책은 피해갈 수 없는 책인가 봅니다.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한사람 2011-06-15 11:12   좋아요 0 | URL

맞아요..슬쩍 외면하려던 책이 끝까지 발목을 붙잡는 인연이 될 때가 있어요 ㅋㅋ
이 책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 있었다니..저는 그게 더 반갑네요^^
아마 읽어보시면 굿바이님은 제 글 보다 더 깊은 울림을 느끼실 겁니다~


2011-06-16 11: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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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6 13: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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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6 14: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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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6 14: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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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주말이 다가 옵니다. 남부지방엔 비가 내린다죠. 비가 오려는지 어깨가 쑤신다던 어머니가 생각나요. 저는 벌써부터 비소식에 마음이 다 쑤십니다. 일기예보가 이쑤시개처럼 그곳만을 쿡쿡 찌르고 가는 것 같아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이제부터 금요일에 아예 대놓고 청승을 떨어 볼까 생각중입니다.

저는 며칠 전 어느 지인으로부터 ‘진정성이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이 처음엔 농담처럼 웃어 넘길 수 있었는데 글쎄 진.정.성.이라는 세 글자가 자고나도 영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 것입니다. 사연인즉슨, 저는 최근에 자주 방문하던 카페에 제가 올린 글들을 모조리 삭제를 한 적이 있는데 바로 그 삭제이유와 관련이 있습니다.  


#1. 진.정.성.

유일하게 온라인상에서 (그래도 활발하게)활동하던 카페였습니다. 오프라인 모임에도 나갔었고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도 몇 명 사귀었죠. 그곳에서 저는 리뷰는 물론, 제 개인사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풀어 놓았고 저는 그것에 별다른 특별함을 느끼지 않아왔습니다. 사적으로 써내려간 제 글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연민의 감정을 불러 일으켰는지(얼굴보고 만나면 안그런데 글로만 만나면 울컥증이 도져서요) 알게 모르게 일 년 사이 제 글을 좋아라 해주시는 분들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저는 누군가가 저의 리뷰를, 저의 일상과 생각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다고 느껴졌어요. 물론, 부정적인 의미로요. 지금도 누구신지는 물증은 없습니다. (모르긴 해도 이글도 그 범위에 포함될 성 싶지만요) 가만 생각해보니 운좋게도 리뷰대회에 잇달아 선정되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 시점이후 부터였던 것 같아요. 카페를 방문하는 분들은 대부분 온라인 서점에서 서재활동을 하거나 문학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었어요. 늘 하는 이야기지만 ‘책 좀 읽고 글 좀 쓰는’. 우연히 카페에서 제 글을 보고 온라인 서점에서 그들끼리 대화가 오가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누구라고 콕 집지는 않았지만 저는 (앞뒤 정황상) 자격지심에 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든 적도 있구요. 사람의 심리가 간사한 것이 좋은 이야기는 당연해 보이고 나쁜 이야기는 가슴에 박히더군요. 그 중에서도 ‘기를 쓰고 리뷰대회 일등을 하려고 악착같이 구는 사람’, ‘겉과 속이 다른 사람’, ‘혼자 잘나서 다른 사람의 글을 무시하는 사람’, ‘출판사에서 편애하는 사람’, ‘표절했다고 신고하는 사람’등의 이야기를 듣거나 보았을 땐 제 스스로 어떻게 해야할 지 방향을 정해야 했습니다. 암튼, 여러 가지 생각 끝에 저는 최초에 제가 뭐라고 떠든 말과 글이 어떻든 원인이 되어 흘러 흘러 각색되고 재구성된다는 결론을 얻었고 (이상하게도 옛날에 올린 글들이 조회수가 늘어난) 1년간 카페에 올린 글들을 눈물을 머금고 사정없이 지워버렸어요. 가슴에 축구공만한 무언가가 휙 하고 지나가더군요..그러나, 포스트를 삭제했다고 제가 그 카페를 탈퇴할 생각은 없었기에 저는 닉네임을 바꾸고 그냥 참여없이 한달 동안 짝사랑만 했습니다. (아무런 글도 올리지 않았더니 저를 공격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바뀐 닉네임으로 두어 개 덧글을 달았는데....저를 알고 있던 카페분이 그 닉으로 단 덧글에선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빨리 예전으로 돌아오라고 충고와 위로를 해주셨어요. 그말을 듣자 바보처럼 눈물이 나더군요. 그분은 제가 닉네임을 바꾸고 조용히 지내던 이유를 조금은 짐작하고 계시던 분이었어요. 그런데도 저는 고마운 마음에 서운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더라구요.

진정성. 진정성. 며칠째 입안에서 맴돌던 단어를 읊어 봅니다.

저는 궁극에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스스로 글을 잘 쓴다는 생각때문은 아닙니다. 책 많이 읽는 분에 비하면 저는 독서량도 많지가 않습니다. 일차적인 건 세상에 내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본능이구요. 세상이 그런 나를 좀 알아주었으면 싶어서입니다. 리뷰를 쓰기 시작한 것도 기왕 읽은 책 리뷰쓰면서 글공부나 해보자는 속셈이 반 이상이었어요. 만약 리뷰써야 하는 책이 ‘담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면 그래, 이번엔 ‘담배’에 대해 공부해보고 ‘담배’에 대해 내가 아는 건 다 써보자, 뭐 이런 식이었어요. 그렇게 써낸 리뷰니 비록 수상은 못하더라도 나중엔 (따로 하기 힘든)담배공부는 했다는 소중한 기록이 되더군요. 그런데 그 방법이 떡밥에 걸리는 확률이 많아지자 저 친구는 무슨 각종 리뷰대회만 좇아 다니는가보다, 싶었나 봐요. 어떤 분은 저에게 이제 제발 리뷰 그만 쓰고 당신의 글을 쓰라고, 손잡고 충고하신 분도 있어요. 눈물이 핑 돌 정도로요. 할 수 있다고요.


#2. 복.수.심

리뷰대회 참가를 의식적으로 줄이고 소설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 나이에 그걸 어딜 가서 합니까. 소설이 쓰고 싶다고 앉은 자리에서 술술 나오는 것도 아니구요. 막상 무언가 해보려 하니 덜컥 두려워지더군요. 작법이나 테크닉보다는 마음가짐을 다지고 싶었는데 그런 제 맘을 알았는지 좋은 책을 알게 되었어요. 이 책은 소설 창작기술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 소설을 쓰고자 하는 사람의 태도를 말하는 책입니다. 총 분량도 175p이기에 저는 숨가쁘게 갈증을 풀듯 앉은 자리에서 벌컥 벌컥 페이지를 덮었습니다. 그냥 좀 서러운 마음에 그 마음 잘 안다는 선생님이 호호 해주시는 것 같은 책입니다. 내용도 쉽고 예로 들어주신 문장들도 하나같이 뇌리에 쏙쏙 박히는 매력적인 책입니다. 이승우 작가는 <깊은 밤, 기린의 말>을 통해 사실 가장 어렵고 지루한(?) 소설을 쓰시는 분이라 생각했는데 가르치시는 건 달랐어요.

글의 요지는 작가라는 사람들이 타고난 유전자로 천재처럼 어느 날 갑자기 신들린 듯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끊임없이 읽고 쓰고 고쳤기 때문에 소설을 잘 쓸 수 있게 된 것이라는 말씀이었어요.  재능 이전에 소설을 쓰고 싶고 쓸 수 밖에 없는 글감, 사연과 꺼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가 더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저는 원래 문학에는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쪽에 속했고, 개인적으로 사연이 많다(?)고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니 저에겐 천금같은 소식이었죠.

그 많은 조언중에서도 제 심장을 강타한 문장은 ‘지상에 견고한 집이 있는 사람은 상상속에 허구의 집을 지을 필요가 없’고 ‘불만과 의혹, 욕망과 의도가 말을 만들고 소설을 쓰게’ 하는 것이라며 이청준 작가는 그것을 ‘복수심’이라고 칭했다는 말씀이었어요. 언젠가 박완서 작가가 세상에 복수하려고 글을 썼다는 인터뷰가 퍼뜩 기억이 났습니다.


“ 현실의 질서에는 자신이 굴복하고 실패 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번에는 그 세계가 거꾸로 자신에게 굴복해올 수 밖에 없도록, 그 세계 자체를 아예 자기식으로 뒤바꿔 놓을 수 있을 어떤 새로운 질서를 음모하기 시작한단 말입니다. 좀 더 문학적인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자기 삶의 근거를 마련하려는 일종의 복수심이지요.”

이청준, 「지배와 해방-언어 사회학 서설3」, 『자서전들 쓰십시다』, 2000, 열림원
-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中에서 , 이승우 38 p


맞습니다. 복수심. 복수심. 복수심. 진정성처럼 눈물이 핑 돌았지요.



 

그리고 저는 소설의 종착지로 어울리는 책, 2011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집어 들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공지영작가의 글을 꾹꾹 눌러서 읽어 보려구요. 작년에 박민규 작가가 수상할땐 벌써 1월달 부터 읽어 놓고선 이번엔 좀 늦었어요. 잘은 모르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이상문학상은 여느 문학상보다 형식이나 기법이 독특한 작품들이 대상으로 수상되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문학적 사건, 실험적 도전에 더 의미를 두는 상인 듯해요. 이번 작품도 기법이 독특했거든요

청승맞지만 저는 공지영의 <맨발로 글목을 돌다>와 작가의 자선작인 <진지한 남자> 를 지나 ‘나를 울게 만든 수많은 독자들과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다’는 수상소감을 읽고는 결국 울어버렸습니다. ‘나를 울게 만든 수많은 독자’ 그 부분에서 눈물이 터져 나오더군요. 공지영 그녀야말로 지난 시절 숱하게 저를 울게 한 작가였습니다. 저도 그 중 한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틀림없이 저도 그중 한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니 마치 수상을 제가 한 것처럼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특이한 건 이 작품의 화자는 바로 공지영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소설을 보지 못했어요. 이런 소설을 자전소설이 아니라 사소설이라고 하더군요. 수상작들 중에서 대놓고 자기 이야기인 소설은 기억 나지 않아요. 소설 내용에 자기 작품과 실제 경험이 버젓이 등장하는 소설을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왔습니다. 화자와 주인공, 작가가 일체하는 소설. 제가 느끼기에 문단을 향한 일종의 자존심의 표현이라고 생각을 했어요.(누가 뭐래도 난 내 방식대로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 뭐 이런식의) 공지영 작가는 대중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그동안 사실 문단에서 (비슷한 연배인 신경숙, 은희경 작가보다)그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잖아요. 속된 말로 문단이 원하는 바 대로 가지 않았지요. 그런대 이번에 오히려 그 독자적인 길의 끄트머리에, 맨발로 글목을 돌게 된 그 막바지에 그간의 성취를 인정해주는 것이니 본인은 얼마나 기쁘면서 또 서러웠을까...싶었습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 공지영은 친구에게 “어쨌든 한 인간이 성장해 가는 것은 운명이다”라는 문장을 문자 메시지로 보냅니다. 마치 제가 문자를 띵똥하고 받은 것 처럼 심장이 저릿했습니다. 작가 친구가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그래, 그런 친구가 없다면 내가 되어줄까, 뭐 이런 기특한 생각도 해보구요. 대충 제목도 글목을 도는 것이 아니라 길목을 도는 것이라 보았었건만, ‘글목’은 ‘글이 모퉁이를 도는 길목’이라는 뜻으로 작가가 만든 언어입니다. (완전, 맨발로 돌았다는 거 아닙니까.) 저도 언젠가 이렇게 맨발로 나신인 채로 내가 쓴 글이 모퉁이를 돌아 가는 길목에서 웃을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이 세상에 태어나는 한 편의 소설은, 그 소설이 탄생하는 순간까지의 그 작가의 삶의 총체다’라는 이승우 작가의 말을 그대로 실현한 작품입니다.



초심을 알려주는 책과 그것의 완성도 높은 결정판을 확인하는 책을 가만히 껴안습니다. 어쩐지 그 중간은 제몫일 듯하네요. 그 중간을 열심히 채워 나가는 것 만이 진정성과 복수심을 해결하는 길인 것 같아요.  

 

이번 주말은 진정성과 복수심 사이에서 고민하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것도, '사랑해'말하고 나면 더욱 사랑하게 되듯이 이렇게 적고나니,

진정으로 복수하고 싶습니다...언젠가는 말입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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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1-06-10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복수에 성공하는 날, 그 소설을 읽어보고 싶네요. 좋은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한사람 2011-06-11 08:12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언젠가 제가 소설쓰면 읽겠다고 하신 분들 다 기억하고 있을 께요 ㅋ

달사르 2011-06-10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감동이에요.. 중간 정도 읽다가 감동, 이라는 말을 먼저 뱉고 싶어서 댓글 달아놓고! 다시 읽어갑니다. ^^

한사람 2011-06-11 08:01   좋아요 0 | URL

부끄~

달사르 2011-06-10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요..한참..나중에 시간이 흘렀을때요. 그때, 지금의 아픔이 오히려 한사람님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매개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아픔은, 그런게 아닐까..생각이 들어요. 그런 일들이 없었으면 '복수'는 지금보다는 더 늦게 시작되기도 할테니까요. 그런 일들 덕분(!)에 한사람님이 '복수'를 더욱 간절히 원하고 꿈꾸며, 또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거니까요.
소설같은 리뷰라고 했던 제 말이 한사람님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

참, 이 포스팅을 읽자마자 거짓말처럼 비가 내립니다..ㅠ.ㅠ 저녁 모임 있는뎅..ㅎㅎ (참, 여기는, 남부 지방..)

한사람 2011-06-11 08:10   좋아요 0 | URL

모두 잘 쌓아 놓았다가 넘쳐서 감당할수 없을때 저절로 써졌으면 좋겠다는
무지막지한 바램을 갖고 있어요 ㅋ

이제 소설같은 리뷰가 아니라 그냥 소설을 써야 할텐데...ㅠ.ㅠ

참 여긴, 오늘도 비가 안올거 같아요...소식만 요란했던거 같아요 ㅋ

루쉰P 2011-06-10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한사람님을 공격한 사람들은 더럽고 비열한 인간들이라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질투심이라고 할까요? 전 인간들의 그런 습성들이 참으로 더럽다라고 많이 느끼고 제일 싫어하는 인간들입니다. 쳇! 결국에는 한사람님의 리뷰를 부러워하고 질투하니까 자신들의 이유로 합리화를 시키는 것이 아닐가요! 리뷰대회에 당선되기 위해 글을 쓴다고요. 자신들은 그렇게 리뷰대회에 한 번도 당선을 하지 못하니까 그런 말들을 늘어 놓는 것이 아닐까요? 자신이 진심으로 쓴 글이 그런 저급하고 더러운 무리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는다 하더라도 절대 신경 안 쓰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정말 존경하는 루쉰 선생도 글만 쓰면 한사람님을 괴롭힌 그런 무리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루쉰 선생은 절대 지지 않고 그들이 만든 세상이 절대 평온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더 이를 악물고 쓰셨죠. 개인적으로 한사람님의 글을 보며 많은 것을 느끼는 저로서는 그런 저급한 인간들이 한사람님을 괴롭혔다는 사실이 기가 막히네요.
그리고 한사람님의 말씀처럼 결국 리뷰도 자신이 쓰시고 싶어하는 소설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것도 쓰지 않고 소설만 딱 쓴다. 전 그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리뷰로 쓰고 또 쓰고 하시면서 소설을 쓸 수 있는 징검다리를 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라 생각을 해요. 절대 힘 빠지지 마시고 더 많이 많이 써 주세요. ^^ 화이팅!!!

아 한사람님 리뷰를 읽다가 혈압이 올라가 버린 것 같아요. -.-

아 그리고 이달의 당선작에 마리리뷰랑 마이페이퍼가 선정 되셨더라구요. 2관왕 완전 축하 축하드려요. ㅋ

한사람 2011-06-11 09:25   좋아요 0 | URL

이 글을 읽고 ..어쩐지 바로 덧글을 달수가 없었어요.
누군가가 제 아픔에 공감하고 같이 혈압 올라갈수 있다는 사실이
눈물겹게 고맙고 또 한편, 제가 속으로는 이런 답글과 격려를 바라고 속내를 풀어 놓은 것이 아닐까..
실은 저도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가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고는 그들 몰래 상처를 받은 것이 었거든요..(그럼 저 역시 그들과 다를건 없는 뻔한 인간이기에 ㅠ.ㅠ)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는 고마와 하지 않지만, 가지지 못한 것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속으로 부럽고 그것으로 잘되는 사람이 샘나고 ..혹시라도 내가 비슷한 재능이 있다면
더욱 속상하게 생겨먹은 거 같아요

그런데 언젠가 부터 쌓고 혼자서 감당하고, 일절 무응답하고..
시간이 지나면 진실?이 밝혀지겠지 하는 태도가 그리 좋은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 밝힌 진실은 안 밝혀진다...이것이 요즘 깨달은 진리입니다

루쉰님의 말씀이 얼마나한 위로가 되었는지..설명할 길이 없네요..감사합니다..
(참, 이달의 당선작이요, 제 생각엔 그거 타는 분들이 거의 정해져 있다는 생각 ㅋ 당선작이 아니고 보상금 같다는 ..암튼, 루쉰님도 축하드려요 ! )




루쉰P 2011-06-12 09:51   좋아요 0 | URL
흠..그래도 그들과 우리는 다릅니다. 루쉰 선생 왈 '악에 대한 분노는 신성한 분노'라고 하셨거든요.

루쉰 선생의 글에 힘을 받으셨다니 저도 힘이 나서 더 정확하게 써 드리자면

"그들이 아무리 유언비어를 퍼트려 중상하고 음모를 꾸며 함정에 빠뜨리려 해도 볼 줄 아는 사람이 보면 바로 한눈에 알아채 다른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의도는 빗나가고, 공연히 그들 자신의 비열함과 몰인격을 폭로할 뿐이다."
누가 뭐라고 하든 한사람님의 길을 가셨으면 합니다. 진정성은 거기에 있는 것이라고 믿어요. ^^ 저도 부끄럽게 이달의 당선작을 탔는데..완전 부끄럽기만 할 뿐이에요...

stella.K 2011-06-11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열심히 한사람님의 글을 읽어 온 것은 아닌데,
가끔은 한사람님의 글 때문에 자극 받게되는 글이 있어요.
이번에도 그러네요.
서재활동 하시면서 정말 말 못할 어려움이 많으셨군요.
그에 비하면 저는(아무 것도 아니라고는 말 못 해도) 약한 것 같구요.
재주가 많은 사람은 그만큼 시기도 많이해 공격도 많이 받고, 고난도 많은 법이죠.
그런데 제가 볼 때 한사람님은 꾹꾹 눌러 글을 쓰시는 몇 안되는 분 중 하나십니다.
저 자신도 가끔 느끼지만 장난삼아, 또는 지잘난 맛에 글을 쓰는 경우도 많거든요.
물론 그 사람에게 진정성이 없느냐면 그렇지도 않으리라 봅니다.
진정성은 항상 들어나면 진정성이 떨어져 보인다고 생각하기도 하죠.
너무 들어나지 않아도 문제고.ㅋ 암튼 진정성은 그런 습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습작을 하다 때려 치우는 것이 다반삽니다.
그건 인내심이 부족해서도 이지만, 제가 쓰는 소설 거의 대부분이 사소설(제가 생각하는)이걸랑요.ㅋ
그걸 쓰다보면 좀 복수심과 쾌감이 있으면 좋겠는데, 오히려 쓰면 쓸수록 기운이 빠져요.
상대를 너무 못되게 쓰는 건 둘째치고, 이 글이 혹여 출판됐을 때 내 이야기 썼네 하고 나중에
머리끄덩이 붙잡고 싸울 사람, 말하자면 복수를 당할까봐 못 쓰죠.ㅎㅎ
근데 더 중요한 건, 내 글을 봐주고 진정으로 평해주고 격려해 주는 사람이 필요한데
그러지 못해 이러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이건 나중에 정리해서 저도 글을 써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글은, 중년이 주말을 이기는 방법치고 너무 쌈빡하고 멋지잖아요!
나이들어도 뭔가를 끊임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확실히 축복 같아요.^^

한사람 2011-06-11 14:02   좋아요 0 | URL

덧글에 늘 솔직하고 진심어린 마음을 놓고 가셔서
저는 스텔라님과 그동안 덧글정이 쌓였나봐요 ㅠ.ㅠ

전에 제 서재가 조용하고 남들이 잘 몰라서 좋다고 하신 말씀 기억해요 ㅋ
저두 예전에 저만 아는(?) 이웃님이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유명해져서
많이 알려진 이후로는 초심을 잃고 보이기 위한 글로 바뀌어 지는 걸 본 적이 있어요
그분도 그런 자신을 몹시 자책하는 분위기 였구요, 결국
어느 시점에 다 접으시더라구요..

상처도 안받고..집착도 안하고.. 균형을 잃지 않으면서도
진정성도 잃지 않기가 쉽지가 않아요, 그죠,,,?

한겨례에 실린 스텔라님 글을 보고
저도 울컥할 만큼 좋았어요..
언젠가 제 이웃님들도 비슷한 마음으로 제 소식에 같이 기뻐해 주실 날을 기다려요^^

늘 감사해요~

2011-06-11 23: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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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2 17: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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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2 15: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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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2 17: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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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5 22: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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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5 23: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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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6 09: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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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1-06-15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두 공지영씨 작품만 딱 봤었는데~ 감동적이었어.

한사람 2011-06-15 23:31   좋아요 0 | URL

그 뒤에 <진지한 남자>도 어쩐지 자신의 이야기 같았다는 ㅋ

보물선 2011-06-16 10:17   좋아요 0 | URL
여성작가들 글은 확실히 자신을 더 많이 투영하는 것 같아.
<진지한 남자>는 예전에 어디 딴데서 읽었던 작품이야.
나두 공작가를 은근 좋아하네? ㅎㅎ
암튼...

그래서 여성작가들이 신변잡기 소설이니 머네 많이 비평의 화살을 받는데
사실 그게 또 재미있잖아. 그리고 진솔해 보이잖아~
다 그 작가만의 고유의 스타일을 인정하면 나름 독특하고 멋진거라 생각해. 난.

한사람 2011-06-16 10:19   좋아요 0 | URL

맞아~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ㅋ
쫌 좋아하는데? ㅋㅋㅋ
아니 기억하는데??

십년도 더 되었구만 ㅋ

2011-06-16 09: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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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6 1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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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6 10: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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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6 1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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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1-06-16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중년이 뭐냐? 중년이~
당신이 왜 중년이야??
애들이 보면 중늙은이 뭐 이렇게 생각들지 않겠어??
요즘의 중년은 60대야. 60대.
앞으로는 저 타이틀, 쓰지 마삼ㅎㅎㅎㅎ
혹시 쓰고 싶으면~ 꽃중년! 뭐 이정도쯤은^^ ㅋㅋㅋ

한사람 2011-06-16 10:21   좋아요 0 | URL

나도 중년은 싫어요..
그냥 그 싫어 죽겠는걸,
아무리 봐도 내 이야기 같지 않는 그 단어를
외우듯이 몸에 꾸욱 박아서
익숙해져 보려고..

그래야 정말 중년이 되었을때 덜 아플까봐 ㅠ.ㅠ
 

 

 

#1. 다양성 VS 획일성 

가만 생각해보면  땅 덩어리와 인구수, 수도권의 장악력, 대중매체의 파급효과, 단결심의 탁월한 재능등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결국)'다양성'보다는 '획일성'을 미덕의 가치로 택한 듯하다. 거슬러 올라가면 잦은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식의 애국논리일 터이고 열강의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한 자의 눈치보기'를 국가적 전략으로 삼은 史적 이력도 무시하지는 못할 성 싶다. 거기다 반 세기만에 이룩한 경제발전, 급성장의 파생효과로 빠른 속도, 빠른 수용에의 경쟁적 습관마저 生의 차별화 전략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이다. 나같은 반 아나, 반 디지털 세대에게 이 현상은 솔직히 따라가기 벅찰 정도이다. 나는 90년대 PC통신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 시대에 들들들 전화모뎀으로 밤새도록 채팅하고 학교에선 졸면서 강의듣던 세대였다. 일주일에 한 번 발행되는 학보를 우체국에 가서 몇백원 짜리 우표에 물풀로 친절히 붙여 남자친구의 학교에 곱게 보내주던 여학생이었다. 그 시절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아마도 지금 나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요 며칠 공교롭게도 휴일을 맞아 집중적으로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느낀 것인데, 기술의 발달은 한 사람의 운명을 가뿐하게 거스를 수도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2. 비주류 VS 주류

미투데이와 트위터를 사용해보니 세상 돌아가는 방향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내가 느끼기에 (미투데이는 아직인 것 같고)이들은 어엿한 여론 생산 및 확산, 나아가 조작 및 창조의 역할까지 하고 있는 듯하다. 모르긴 해도 이번 학기 논문으로 '트위터의 사용이 개인 및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택한 사람들이 부지기수 아닐까. 나는 사십대이고 드라마에 열광하는 아줌마이고 학원을 끊지 못하는 학부형이다. 내 주변에 (내 세대이거나 윗 세대로서)집에서 살림하면서 트위터로 세상을 확인하는 여인들은 거의 없다. 미투데이로 차승원이나 공효진의 한마디에 친구인척 덧글다는 주부도 없다. 기껏해야 딸의 성화로 백청강에게 (그것도 딸의 손가락으로)한 표의 문자투표 정도만 행할 뿐이다. 그들은 (스스로)새로운 매체와 기술이 가져오는 혜택을 버린 것인가 그것으로 공유하게 될 세상으로부터 밀려난 것인가. 내 생각에 자발적으로 기술을 택하지 않았다는 자의식은 그들안에서만 유효하다. 두 세계에 걸쳐있는 내가 보기에 그들은 세상의 메인에서 비껴간 비주류이다. 물론, 이때 자발적 비주류가 타의적 주류에게 어떤 열등감을 가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들은 대게 중산층 이상이고 세상돌아가는 일에 크게 관심이 없다. 세상은 이미 자기위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매체도 활용을 위해 구입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새것이고 비싸니까 교체하여 들고 다닐뿐이다. 우리 세대는 그렇게 세상 밖으로 밀려 나가고 있다.  

   

#3. 이외수 VS 그외 수

피부로 느끼건대, 트위터에는 이외수 작가를 팔로잉 하는 사람과 안하는 사람 두 부류로 나뉜다. 나 역시 그의 단문이 아침에 일어나 보면 종달새처럼 날아와 하루를 기분좋게 하는 것에 묘한 매력을 느낀다. 여지껏 그의 글에 두번 답글을 남겼지만 물론 그가 보지도 않겠지만 내 트윗창에는 버젓이 남아 있다는 것이 무슨 교류의 흔적같아 기분 나쁘지 않다. 그런데 그가 한마디 남긴 글은 오분 후 바로 실시간 포털 뉴스로 대량 확대 및 재생산 된다. 예를 들어 오늘처럼 "몸은 늙었으되 마음은 젊게 살겠습니다. 요!" http://twtkr.olleh.com/oisoo 하고 재미난 사진까지 첨부하면 그 사진은 금방 네이버에 올라온다.  어떤 경우 바로 실시간 검색어에 상위권을 장식하기도 한다. 트위터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인터넷은 할테니 곧 이외수 작가가 어떤 한마디를 했는지 죄다 알게되는 건 시간문제이다. 이 사실을 인지하고 글을 작성하시는 것인지 전혀 상관없이 글을 올리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어떻게 하다보니 이렇게 되었다 정도가 맞을 것이다.  대단한 영향력이다. 연초에 그의 단문으로 이루어진 에세이를 읽고는 제발 이제는 이런 책을 내시지 말았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다행히 소설을 준비중이시란다. 내일 새벽에도 그로부터 감성적인 트윗이 날아 오기를.  

   

#4. 타인과 세상 VS 소설과 작가


토끼와 잠수함 타인의 방 굴뚝과 천장 타인의 얼굴 - 10점
최인호.박범신 외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 최인호, 한수산, 박범신을 비교할 수 있는 귀한 소설집 >

타인들에 둘러 쌓여 있을땐 그렇게도 타인이 안보이더니, 요즘 홀로 은둔하면서 타인들은 뜻밖에도 항상 나와 같이 숨을 쉰다. 어제 최인호의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덮고 많이도 쓸쓸했다. 곧 리뷰를 쓸 작정이다. 리뷰를 손대기에 참 무서운 작품이다. 잠시 쉬어가기 위해 비슷한 시기에 베스트 셀러 작가로 대중에 지지를 듬뿍 받았던 한수산의 <타인의 얼굴>을 찾아서 읽었다. 문장이 좋아서 미치는 줄 알았다. 이 소설은 약 이십 년 전에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내 좁은 식견으로 문단에서 현대문학상이 가장 보수적인 듯) 중년의 제자가 은사의 투병소식을 듣고 찾아가는 내용이 퍽이나 감각적인 회상의 고통으로 느껴지며 작가는 그 고통의 기록을 자전소설화 하였다. 비슷한 느낌으로 박범신 작가가 떠올랐다. 이제 이분들은 환갑을 지나 문단의 공로작가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들 계시다. 나는 이제 이분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또 한명의 거장, 황석영의 소설을 어쩔 수 없이 읽게 될 것 같다. (아니 읽어야 한다) 그것만이 내가 그들이 지켜온 무엇에 조금이라도 예의를 차리는 일이 아닐까. 이들의 공동된 주제는 주로 그렇게까지 죽도록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아직도 낯설은 세상, 낯설은 타인, 그보다 더 낯선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얄궂고도 애틋한 삶의 신비이다. 타인을 바라보면서 몰랐던 자신을 깨닫게 되는 무섭고도 안타까운 사연들이다. 죽는 날까지 깨달아야 하는, 아니 깨달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동물의 피곤을 연민으로 노래한다.

최인호의 <타인의 방>이 공간으로서 타인을 향한 외부세계의 조명이었다면 한수산의 <타인의 얼굴>은 자신 속에 숨어있는 타인의 내면세계, 또 다른 자아의 발견이다. 이 또 다른 나가 세계 밖으로 탈출 한 것이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이다.  오늘은 <타인의 얼굴>의 마지막을 읊조리며 내 안의 나를 위로하고 싶은 날이다.  

타인의 얼굴 - 10점
한수산 외 지음/현대문학

" 병든 자아와 정상적인 자아가 아냐. 수없이 많은 내가 내 속에 있어. 그의 죽음을 지켜보며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자아와 싸웠던가. 때로는 두려웠던 나. 때로는 슬펐던 나. 때로는 그의 병듦을 보며 살아있는 자신이 기뻤던 나도 있었어. 그의 무너져 가는 몸을 보며, 건강에 조심해야지 하고 쥐가 천장을 갉아대듯 속삭인 나도 있었어. " 

" 밖으로 나섰다. 바람이 빗발을 뿌려 그의 구두를 젖게 했다. 그는 우산을 바람쪽으로 기울이며 걸음을 빨리했다. 비는 모래알 같이 뿌려댔다. 골목에는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사막 같았다. 비를 맞고 있는 집과 나무와 아스팔트 포장이 된 골목을 바라보았다. 사막. 순간 그는 자신 속에 아무도 살아 있지 않다고 느꼈다. 어떤 모습의 그도."  

 

작가는 말한다. '삶은 모아나가는 것도 쌓아가는 것'도 아니라고. '그것은 자신의 몫으로 받아가지고 있던 것을 하나씩 써나가는 나날'이었다고. 누구나 단 한번의 평생을 살 뿐이라고. 그 한평생의 내 몫을 잘 지켜내는 것이 결국 삶이라는 뜻일까.  내 몫의 크기는 이미 주었지만 그 몫의 질만큼은 스스로 정하고 싶었는데. 어제오늘, 나는 그 몫의 질도 내 몫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내 몫은 무엇일까. 남은 생 동안 어쩌면 이것들을 깨우친 작가들처럼 매번 낯설은 것들을 겨우 낯익게 만들며, 혹은 어쩔수 없이 낯익어지며 또 낯설은 것을 준비해야 하는 건 아닐까.  

 

처음에 세상에 나올때 그토록 낯선 세상이었으니 돌아갈 그 곳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제, 나는 스마트 폰이 낯익은 세상이 되었다.  

다음엔 무엇이 낯설을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은 슬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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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6-06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점점 이런 기계에서 멀어져 가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정말 나이 들었구나 싶어요.
거의 매일 페이스북에서 친구 찾기 이메일 오는데 친한 친구도 없지만
하기도 싫고, 하면 뭐가 좋은지도 모르겠고. 이러고 살아요.
앞으로 가면 갈수록 더 하겠죠?
그래도 뭐, 폴 오스터 같은 작가는 핸드폰도 잘 안 쓴다는데
그런 거 보면 기죽을 필요 없겠죠?ㅋㅋ

한 사람님 덕분에 제가 모르는 소설 많이 얻어가요.
또 언제 저런 책이 나왔데요?^^

한사람 2011-06-06 17:03   좋아요 0 | URL

카카오톡을 보면서 느낀건 '아, 이사람도 이제 스마트폰 샀구나'
트위터 보고 느낀건 이 사람도 트위터 하는구나
미투데이 보고 느낀건 어머, 이 사람도 이런걸? 이었어요...

위에 소개한 소설집은 나온지는 5.6년 되었구요.
최인호 작가의 소설을 읽다가 70년대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감수성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결국 그 소설 읽고는 지금의 김영하, 김연수, 하성란, 신경숙, 조경란이 나온거 아닌가 싶어요..

cyrus 2011-06-06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스마트폰 구입한지 두 달 남짓 지난거 같아요, 처음에 저도 기계치라 서툴렀는데 이제는 거의
스마트폰을 통한 맞춤식(?) 생활에 적응이 되어가요. 그런데 정보통신 기술이 하루 자는 사이에 발달되고
기술 정보도 워낙에 광범위해서 아직은 스마트폰의 정체를 완벽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요..^^;;


한사람 2011-06-06 21:51   좋아요 0 | URL

아..저는 아직까지는 '맞춤식 생활'이 아니라 맞추어 가는 생활을 하고 있어요.
간단한 확인은 컴퓨터 켜고 인터넷 접속 안해도 되니까, 편하더군요 ㅋ
그런데 전화많이 하는 사람은 불편할 것 같기도 하다는..

무엇보다 세상의 끈을 잡고 있다는 생각이 그 전보다는 더 들었어요

달사르 2011-06-07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대단하세요. 트위터 하시는군요. 미투데이는 뭔지 모르겠어요.
앗. 피씨통신도 하셨더랬어요? 와우~ 전, 그것도 뭔지 모르고 살았네요. ^^

글을 읽다가 마지막에 나온 타인 시리즈, 캬..입니당. 저는 '타인'이란 단어에서 느껴지는 낯설음이 싫으면서도 또 좋아서..저 책들이 땡깁니다~욧! ^^

한사람 2011-06-07 19:36   좋아요 0 | URL

히히, 달사르님과 제가 성향이 비슷한가 봅니다.
오늘 오후에 이외수 작가님이 저를 팔로우 해주셨습니다...흑흑흑
아무나 해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눈물이 핑 돌만큼 고맙고 반갑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열심히 살아야지, 뭐 이런 초등학생 같은 생각을 다 했다는 ㅋㅋㅋ

어느 철학자가 타인은 지옥이라고 했다지만
그 지옥을 자기 속에 고스란히 담아 놓은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지옥일 겁니다..

나중에 트위터 하게되면 꼭 아뒤 주세요^^

달사르 2011-06-08 23:46   좋아요 0 | URL
ㅎ 넵! 다음에 하게 되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