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핫한 정보들은 모두 인그램에서 얻는 것 같다.

 

BLM으로 미국 사회가 도가니탕처럼 펄펄 끓는 마당에 이번에는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샌프란시스코 퍼시픽 하이츠에서 얼마 전에 일어났던 일이 화제다.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어떤 필리핀계 미국인 아저씨가 퍼시픽 하이츠의 어느 집 담벼락에 스텐실로 Black Lives Matter 구호를 쓰고 있었다.

 

산책을 하던 백인 커플이 이 남자에게 그 담벼락이 사유재산이라고 주의를 준다. 그네들의 말투는 아주 정중하다. 아마 자신들은 교양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BLM 구호를 쓰는 건 쓰는 이의 자유지만, 남의 사유재산은 침해하지 말라는 거다.

 

촬영하던 남자가 경찰을 부르던가 아니면 주인에게 말하라고 한다. 여기서 결정적인 여성의 패착이 등장한다. 자신이 집주인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여성은 경찰을 불렀고, 출동한 경찰은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가 버린다.

 

뭐가 잘못된 걸까? 나중에 들어난 사실은 촬영자 제임스 후아닐로 씨가 바로 샌프란시스코 고급 주택지 퍼시픽 하이츠의 문제의 집에 살던 집주인이라는 점이었다. 동영상에 등장하는 여성은 리자 알렉산더로 화장품 회사 <라페이스>의 사장이라고 한다. 곁에 있던 남성은 그녀의 남편이었고.

 

결론적으로 말해 리자 알렉산더는 진짜 집주인인 제임스 후아닐로 씨를 알지도 못했고(거짓말이었다!!!) 인종적 편견에 사로 잡혀 지난 18년 동안 그 집에 살던 집주인을 모욕했던 것이다. 참고로 후아닐로 아저씨는 독 워킹 사업(dog-walking)을 하시는 분이란다.

 

또 한 가지, 이 커플이 내내 떠들던 사유지(private property)란 말도 의미심장하다. 자본주의 천국이라는 이놈의 사유지/사유재산은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그런 것인가 보다. 공공성이나 정의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그렇다면 이 사건의 후과는 어땠을까? 자신의 인종차별 영상이 만방에 영구박제된 <라페이스>의 사장은 그야말로 밥줄이 끊기게 생겼다. 라페이스의 파트너들은 사장의 인종차별을 이유로 들어 모든 협력관계를 단호하게 끊어 버렸다. 어느 누가 인종차별을 대놓고 하는 사장이 대표로 있는 회사에서 만든 화장품을 얼굴에 바르고 다니겠는가. 후회 막급한 리자 알렉산더는 제임스 후아닐로 씨에게 뒤늦은 사과를 한다며 쑈에 나섰으나, 엎어진 물을 담을 수 없는 법. 라페이스의 파트너였던 버치박스 같은 회사가 협력관계를 끊지 않았더라면, 공개적으로 사과를 하겠다고 나섰을까? 천민자본주의를 숭상하는 이들에겐 돈줄이 막히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대놓고 악다구니를 해가며 인종차별을 하는 이들보다 리자 알렉산더처럼 평조 톤을 유지해 가면서, 교양 있는 어휘로 시전하는 연성화된 인종차별이 더 무섭다는 걸 나는 이번 사건을 통해 알게 됐다.

 

[뱀다리] 다만 그녀가 새로운 캐런이라는 표현은 좀 과도하다는 느낌이다.

미디어에서 새로운 먹잇감에 달려들어 프레이밍하는 짓거리는 어디나 다를 게 없다는 생각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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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 15개 언어를 구사하며 세계를 누빈 위대한 식량학자 바빌로프의 숭고한 이야기
게리 폴 나브한 지음, 강경이 옮김 / 아카이브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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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인스타에서 흥미로운 글을 하나 읽었다. 우리가 즐기는 청양고추를 먹을 때마다, 몬산토에 사용료를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양고추가 국산이 아니었나? 그 이유는 청양고추의 씨앗 종자를 몬산토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몬산토를 사들인 독일의 제약 기업인 바이엘로 돈이 흘러간다는 사실이었다. 글로벌 시대의 웃지 못 할 풍경이 아닌가 말이다.

 

그렇게 접한 청양고추 이야기가 때마침 읽기 시작한 게리 폴 나브한의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가 다루는 주제와 일맥상통했다.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이미 식물 육종 연구에 있어 선구자였던 니콜라이 바빌로프 박사의 연구 행적과 식물다양성이 인류를 각종 자연재해가 야기하는 기아로부터 구원할 것이라는 예언을 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79년 전, 바빌로프 연구소가 있던 레닌그라드는 나치 독일군의 맹공격 앞에 거의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었다. 위대한 소련의 식물 육종 연구가 바빌로프의 노력으로 세워진 세계 각처에서 모아온 귀중한 씨앗들을 보관하던 바빌로프 연구소 역시 독일군의 포화로부터 안전하지 못했다. 1941년 겨울은 그 어느 겨울보다 추웠고, 포위당한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기아에 시달렸다. 연구소 설립자인 바빌로프 박사는 독재자의 눈 밖에 나 사라토프 감옥에 갇힌 상태였고, 그의 남은 동료들은 연구소에서 귀중한 씨앗들을 지키다 산화해 갔다. 첫 스토리부터 짜릿하지 않은가.

 

제정 러시아 시절이었던 18871125, 모스크바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니콜라이 바빌로프는 1910년 모스크바 농업대학을 졸업하고 평생의 과업이었던 식물 육종 연구에 투신한다. 그의 행적을 읽으면서 느낀 건 바빌로프가 여느 책상머리에만 앉아서 연구를 하는 과학자들과 달리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는 실천형 연구자였다는 점이었다. 그가 가진 최고의 연구장비가 바로 노새였다는 점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세계의 지붕으로 알려진 파미르 고원을 필두로 해서 전 세계가 바빌로프 박사의 연구 무대였다. 책의 후반에 나오는 대로, 볼셰비키 혁명으로 집권한 소련 공산당은 유물론적 사고와 바로 성과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다년간의 종자 개발에 걸리는 시간을 무시하고 최대한의 빠른 성과만을 바빌로프 박사에게 요구했다. 그런 조급증이야말로 1930년 초반, 소련을 휩쓴 대기근 때문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기아로 굶어 죽어간 비극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도 새로운 종자 개발을 위해서는 8~9년이 걸린다고 하는데 소련의 정치지도부들은 그런 과학적 절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당장 인민들과 서구 자본주의 라이벌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성과가 필요했던 것이다. 어쩌면 바빌로프 박사의 비극은 시작부터 이런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바빌로프의 탁월한 연구 성과는 개발과 자본주의적 성과가 판을 치고 있는 현대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가 있을 것 같다. 당장의 성과를 위해 효과적으로 보이는 단일경작이 얼마나 위험한 지에 대해 바빌로프 박사는 잘 알고 있었다. 작물 재배의 다양성이야말로 병충해나 대기근에 무엇보다 효과적이라는 점은 다시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하는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말처럼 바빌로프 박사의 식물 육종 연구에 딱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도 없을 것 같다.

 

실험실에서 다양한 연구로 새로운 씨앗을 개발하는 연구자들도 인류의 식량안보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진짜 식량안보의 전사들은 바로 농부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연구 결과라도 필드에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 아닌가 말이다. 더군다나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자본주의 3.0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최첨단 기술과 농법으로 무장한 연구자들은 종종 그런 현장의 농부들을 무시할 때가 많지만, 조상 대대로 전수되어져온 그들만의 노하우야말로 절망적인 대기근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이 세계 각처에서 입증되었다.

 

1980년대 아프리카의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를 덮친 대기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했다. 이에 세계의 내로라하는 연구소들이 병충해와 가뭄에 효과적인 종자들로 위기를 돌파해 보려고 했으나 별무소용이었다. 서구의 선진 농법에는 비용과 많은 양의 물이 필요했다. 다량의 물이 필요한 관개농법이 아프리카 같은 건조 지역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경우처럼 수로 건설이 새로운 재앙으로 이어지기도 하지 않았던가.

 

자그마치 15개의 언어를 구사하며 현지들의 문화 풍습을 습득하는데 주력했던 바빌로프 박사는 현지의 다양한 문화적 다양성이야말로 작물다양성을 풍부하게 만드는 핵심 요소라는 점도 일찍이 파악했다. 현지의 다양한 작물과의 혼종 재배, 단일경작 대신 혼작이야말로 인류의 식량안보를 승리로 이끌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점을 그는 파악했다. 보다 생산하기 쉬운 단일작품을 대량으로 재배하는 대신,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자연을 파괴해야만 했다, 친자연적인 방식의 재래식 작물재배가 훨씬 효과적이라는 점도 바빌로프는 강조한다. 아마존 정글에서 요즘처럼 대규모 개발로 경작지를 늘리는 대신 그야말로 자연에 묻어가는 자연친화적인 방식의 효율성에 주목하지 않았던가.

 

바빌로프 박사는 식물의 육종연구와 씨앗 확보를 위해 나선 연구여행에서 불안정한 정세와 소비에트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오해를 사고, 때로는 위험까지도 감수해야 했다. 인류를 위한 그의 연구의 진정한 방해자는 조국 소련과 독재자 스탈린이었다. 자고로 선지자는 고향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했던가. 시간 부족으로 거의 날림으로 진행된 라틴아메리카 연구여행은 그의 마지막 무대가 되었다. 집단농장 시스템으로 1932년과 1933년의 대기근에 대처하지 못한, 소련 정부와 스탈린은 희생양으로 바빌로프 박사를 삼았다.

 

스탈린의 총애를 받던 사이비 과학자 트로핌 리센코는 이론이나 연구 성과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되는 바빌로프는 거의 모든 면에서 충돌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과학적 주제에 대한 논쟁에서 리센코는 바빌로프를 압도할 수 없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바빌로프는 영국과 미국 정부를 위해 첩보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고, 비공개재판에서 총살형을 언도받았다. 그 후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사라토프 노동수용소에 수용된 바빌로프는 1943126, 만성적 기아의 부작용으로 사망했다.

 

마녀의 연쇄 독서로 만나게 된 게리 폴 나브한의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는 내가 올해 상반기에 만난 최고의 책 중의 하나로 꼽고 싶다. 개인의 유익이나 영광이 아닌 인류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니콜라이 바빌로프 박사의 일대기는 감동의 연속이었다.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식량이 부족해서 여전히 많은 이들이 굶주리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모든 인류의 건강과 생존을 위해 충분하게 공급되어야 할 자원 공급의 문제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식량민주주의와 농민의 권리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도 공감이 간다. 무엇보다 미래의 인류에게 전해 주어야 할 소중한 씨앗들을 어떻게 보존하고 유지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해 봐야할 것이다.

 


초여름 접시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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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눈썹
손석춘 지음 / 단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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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전에 이 책을 집어든 게 실수였다. 요즘 도끼 선생 챌린지에, 마의 산에 오르는 등 고전 읽기를 하던 차에 문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몰입할 수 있는 그런 책을 찾게 되더라. 지난달에 코로나 사태로 다시 도서관이 휴관하기 전에 빌려온 책이 바로 손석춘 작가의 <호랑이 눈썹>이었다. 진보 논객으로 알고 있던 저자의 무려 10번째 소설이란다.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소설의 주인공은 강연호다. 직업 군인으로 28년을 복무한 연천의 호랑이는 뼛속까지 투철한 반공투사이며, 열혈 태극기 부대원이다. 고희를 넘긴 태극기 전사가 빛고을을 찾는 장면으로 아마 소설은 시작한다. 잠들기 전에 비몽사몽간에 읽다 보니 내용이 오락가락한다. 물론 소설을 읽다 각성되어 밤잠을 설친 건 비밀이 아니다.

 

1948, 그러니까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뒤 태어난 연천의 호랑이는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공산주의자들에게 핍박을 받아 돌아가신 조상님의 자랑스러운 후손이었다. 다만, 부모님의 부재로 할머니 손에 키워져야 했다. 대학에 가서 문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강연호는 집안 사정으로 진학 대신 다른 길을 선택해야만 했다. 미국은 멀리 베트남에서 통킹만 사건으로 본격적으로 월남전에 개입하게 되었고, 군인 독재자가 집권하고 있던 한국에서도 혈맹을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에 무려 3개 부대를 파견하게 되었다.

 

아무런 배움도 가진 것도 없던 연천의 호랑이는 기회의 땅 월남으로 가, 조국에도 봉사하고 돈도 벌어 오겠다는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월남행 배에 오른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전쟁이었다. 베트남에서 청년 연호는 미친 맹호로 변신한다. 살인과 폭행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양민과 게릴라를 구분하는 건 청년 병사들에게 너무 어려운 미션이었다. 베트남은 연호에게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생존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그런 공간이었다. 그의 첫 번째 살인은 트라우마가 되어 그림자처럼 그를 쫓기 시작한다.

 

하루에 2명씩 전사자가 나왔다는 죽음의 땅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귀국선에 탄 연호를 기다리고 있던 운명은 가혹했다. 유일한 혈육인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자신이 애써 번 돈은 대처에 사는 고모가 모두 가로채 버렸다. 월남에서 리설 웨폰이 되어 돌아온 그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직업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연호는 구로공단에서 일하던 정희를 만나 행복한 삶을 사는가 싶었으나 그것 또한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의 떳떳하지 못한 과거를 아내에게 살짝 드러냈지만, 정희는 전쟁터에서 다 그럴 수 있지 않았냐며 적당하게 봉합한다. 연호의 자기기만적 삶이 시작되는 게 바로 이 순간이었던가. 그러면서 아내의 과거를 알게 된 연호는 두 번째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

 

가정을 멀리하고 자신을 혹독하게 만들기 위해 특전사에 자원해서 11공수의 유능한 부사관이 되었다. 삼십대 초반의 강연호가 치른 두 번째 전쟁은 19805월의 빛고을이었다. 손석춘 작가는 그동안 이러저러한 채널로 널리 알려진 사실들을 바탕으로 뜨거웠던 그해 5월의 광주를 가해자의 시선에서 재구성한다. 첫 번째 전쟁에서도 그렇지만 두 번째 전쟁 역시 연천의 호랑이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겨 주었다. 그나마 월남에서는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과의 전쟁이었다면, 이번에는 자기와 같은 말을 쓰는 동족을 상대로 한 그런 전쟁이었다.

 

한국 현대사의 증인처럼 연호는 역사의 현장에 머물렀다. 연호가 가해자의 입장이었다면, 그의 아내 정희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공고해 보이던 유신정권이 무너지자, 누구나 민주주의의 봄이 올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전두환과 노태우로 대변되는 신군부 세력을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하고, 저항에 나선 빛고을 시민들을 무차별 진압에 나선다. 그리고 그 때 동원된 사람이 바로 연천의 호랑이였다. 그나마 양심을 가지고 있던 연호는 개인적 복수와 무고한 양민들을 조준 사격했다는 죄책감 사이에서 고민한다.

 

자신이 모시던 대대장들이 연달아 감옥으로 가는 모습을 보고 좋았던 시절이 끝났음을 깨달은 연호는 28년 동안의 기나긴 군복무를 마치고 고향 한탄강으로 가 작은 식당을 운영하기 시작한다. 연천의 호랑이가 전쟁터에서 치른 업보의 대가는 혹독했다. 우선 포천 부잣집으로 시집간 지혜가 IMF의 여파로 집안이 거덜 난 신랑 신증산의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등졌다.

 

서울에 나가 성공한 아들 지만은 광화문에 있는 어느 신문사에 취직해 시골의 가족을 등진다. 딸 지혜가 남긴 손주들인 강산과 슬기 키우던 중 비보가 날아들고, 생모가 남긴 자기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연천의 호랑이는 그야말로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 속에 휩싸이게 된다. 그가 마지막으로 참전하게 된 세 번째 전쟁은 오래되었지만 새로운 그런 전쟁이었다.

 

더 상세한 디테일도 많지만, 조국 근대화에 있어 그 누구보다 희생한 세대이지만 정당한 대접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게 강연호로 대변되는 세대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싶다. 그의 말대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베트남의 밀림에서 소총을 들고 적군과 싸우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군문에 투신했지만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역사의 혹독한 재평가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방에서 편안하게 있던 이들이 조국 근대화의 과실을 독점했다는 울분이 치솟아 오른다. 서북청년단이었던 자기 아버지에 대한 삶이 가짜 뉴스 생산에 부역한 아들 지만의 그것과 묘하게 공명을 이룬다는 지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나마 강연호 할아버지는 생떼 같은 손자가 산업 현장에서 사고로 죽게 되자 비로소 각성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자아 철민과 유일하게 남은 혈육 슬기의 도움으로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극복에 나서는 장면으로 소설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소설 <호랑이 눈썹>은 역사적 사실을 질료로 삼아 잘 만든 소설이 틀림없다. 하지만 강연호라는 주인공이 감당해야 하는 역사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집안의 사람들도 이렇게 화합하지 못하는 마당에, 서로 다른 삶의 배경을 지닌 이들이 화합을 이루며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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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하나 읽었다.

 

코로나 광풍이 전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가운데, 멕시코에서 벌어진 맥주 사재기 풍경은 또 색달랐다. 세계인들의 삶의 모습은 그만큼이나 다양하다는 방증이겠지 싶다.

 

건강한 거리두기에는 예외가 없다. 우리만 하더라도 5월 연휴를 앞두고 수그러들던 코로나가 재유행하면서 2020년은 물 건너갔다는 말이 나올 정도가 아닌가 말이다. 내수진작 소비촉진을 위해 건국 이래 처음으로 국가 재난지원금까지 등장했다.

 

인스타에 보면 자가격리 혹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각종 짤들이 넘쳐흐른다. 나도 해보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지만, 그냥 귀찮더라. 아이디어 도출, 세팅 그리고 촬영에 이르기까지 그런 짤들을 생산해낸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들이 그렇게 열심을 다해 촬영에 임하는 동안 나는 책을 읽었다. 읽어야 하는 책들이 넘쳐 나다 보니 책을 따로 살 걱정조차 할 필요가 없었다. 그동안 샀지만 읽지는 않고 째려 보곤만 있던 녀석들을 책장에서 소환해냈다. 그리고 벽돌책들을 하나씩 깨고 있는 중이다.

 

멕시코 맥주 사재기 열풍을 이야기하다 또 삼천포로 새 버렸다. 내가 그렇지 뭘. 그동안 멕시코가 전세계 맥주 생산의 27%나 차지한다는 사실을 미처 모르고 있었다. 이웃 동네에서 금주령 타령을 할 때마다 남쪽 이웃들은 엄청난 생산력으로 북쪽의 양키들에게 젖과 꿀을 공급해 주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맥주 생산마저 멈추면서 메히코 사람들이 대환장 파티가 시작됐다. 모두가 집안에 갇혀 있게 되면서 맥주 소비가 그야말로 스카이로켓처럼 치솟기 시작한 것이다. 부르는 게 값이었다나. 우리에게 마스크가 그랬던 것처럼.

 

시장에서 수요가 달리면 항상 등장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짭이었다. 식용 대체할 수 있는 에탄올 대신 공업용 메탄올을 사용한 밀주가 등장하면서 그동안 밀주 스캔들로 사망한 사람이 자그마치 189명이나 된다고 한다. 죽음이라는 존재의 소멸 앞에서 실명이나 식물인간 같은 부작용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세상에 이게 21세기 대명천지에 가능한 이야기란 말인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난 61일부터 맥주 생산 금지가 풀리고, 코로나 맥주를 필두로 한 맥주생산이 재개되면서 밀주 스캔들 때문에 발생하는 사망자수도 없어져 버렸다. 그동안 멕시코의 확진자수는 14만 명, 사망자는 17천명 정도로 추산된다.

 

불과 두 달 만에 189명이나 밀주를 마시고 죽었다고 하니, 코로나 시대의 또 다른 비극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나, 왜 시아시된 맥주가 마시고 싶은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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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6-16 1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술을 그다지 즐겨하지는 않는데 맥주 거품을 보면
그게 참 맛있어 보이더라구요. 막상 먹으면 별론데...
맥주는 역시 거품이죠!!^^

레삭매냐 2020-06-17 10:45   좋아요 1 | URL
어제 기사를 보고 나니 왤케
션한 맥쥬 생각이 나던지요.

살얼음맥주는 역전 할머니
맥주가 가히 최고라고 하는군요 ㅋㅋ
 

 


6월의 어느 날, 나는 토마스 만이 만든 마의 산에 오르기로 결정했다.

도대체 언제 샀는지도 모를 그런 책이었다.

그리고 어디에 있는 지도 몰라서 책으로 가득한 책방을 뒤졌다. 그리고 의외로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마의 산>1924년 토마스 만이 세 번째로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그는 평생 모두 6편의 장편소설을 썼다. 이 작품을 쓰는데 무려 12년이나 걸렸다고.

 

을유문화사 세계문학 1번을 장식한 토마스 만 샘의 책은 1편만 653쪽이다.

내가 과연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 카라마조프는 읽었는데 하는 만용으로 나는 마의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어제 읽기 전에 대략적인 워밍업을 시작했고, 자기 전에 독서에 돌입했다.

23세의 한스 카스토르프가 스위스 다보스 베르크호프 결핵요양원에 입원한 사촌 요아힘 침센을 방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만 샘은 시간에 대한 오묘한 설파를 서문에 공개했더랬지. 시간소설이라는 표현이 있던데...

어쨌든 나의 2020년은 고전의 해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구나.

 

그나저나 도끼 샘의 <죄와 벌> 재독은 아직 끝내지 못했다는 건 안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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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죄와 벌>을 다 읽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어제 시작한 토마스 만의 <마의 산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싶다인스타인지 어느 SNS에서 빡센 등정이라는 <마의 산>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는 그렇다면 나도하는 마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과연 내가 1,300쪽이 훨씬 넘어가는 대작을 다 읽을 수 있을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이미 한 번 읽겠다고 마음 먹었다가 망했다지자그마치 을유문화사 세계문학 1권의 당당한 타이틀이라는 점에서도 이 책은 꼭 한 번 읽어볼 가치가 있는 그런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독서는 모름지기 자족적인 취미가 아닐 수 없다게다가 다른 취미활동에 비해 돈도 적게 든다가성비는 훨씬 더 좋다그렇다고 돈만 있다고 되는 건 아니다독서를 위한 근육이 필요하다어떤 지루함도 이겨낼 수 있는 강단과 쌩가는 기술도 필요하다내 경험에 유추해 보면 책에 나오는 모든 걸 이해하는 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토마스 만 같은 대가가 100년도 더 전에 살면서 피부로 느끼고 또 당대의 모든 것에 대해 능통하지 못하면서 그의 저술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다는 건 불가능 그 자체일 것이다... 라고 변명하면서 나는 쌩가기 기술로 고전 독파에 나섰다.

 

이번에 <마의 산>도 훌륭하게 등반에 성공하게 된다면 읽다 만 <모비 딕>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2020년은 나에게 고전의 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그런 해로 만들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있다내친 김에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그리고 에릭 홉스봄의 시대 3부작도 읽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독서기록장] 토마스 만의 <마의 산> 1권 등반 2일차 오전 11:54 현재 47쪽까지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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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읽는다.

 

주인공은 23세 한스 카스토르프다사촌 형제 요아힘 침센을 만나러 스위스 다보스 산중에 있는 베르크호프라는 결핵요양소를 3주간 방문할 계획으로 찾는다.

 

청년은 어려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차례로 잃었다그리고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어려서부터 그에게 죽음은 멀리 있는 그 무엇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상회를 정리한 돈 40만 마르크는 종조부였던 영사님이 관리해주신다연수익의 2%의 이자를 띠면서 말이다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지재산 관리자는 그에게 평생 유복하게 살려면 200만 마르크는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독일이 제국이던 시절그 돈이 얼마나 큰 돈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기차와 마차를 번갈아 타고 베르크호프에 도착한 한스는 사관후보생 요아힘 침센과 만난다건강 이상으로 이미 반년을 요양원에서 보낸 요하임나이든 이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청춘들에게 6개월이 갖는 의미는 더 크지 않았을까.

 

한스의 성장과정에 대한 이야기 다음으로는 한스가 요양원에서 만나게 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옆방의 러시아 부부가 방에서 벌이는 상스러운(?) 행동에 청년은 뭐라고 했던가.

 

배에 대한 스케치에 재주를 보였던 한스는 조선기사 시험을 패스하고 엔지니어로 함부르크의 어느 회사에 취업했다지뭐 이 정도가 내가 만난 마의 산의 초반 이야기들이다.


기억들이 사라지기 전에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적어 놓아야지.


핑계같지만 어젯밤에는 바빌로프의 위대한 유산에 대한 기록을 읽다 보니 <마의 산>에 조금 소홀했다일단 바빌로프와 그가 인류의 생존을 위해 지키려고 했던 종자들에 대한 이야기부터 먼저 읽고 나서 <마의 산>에 다시 오를까 어쩔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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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6-13 0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2년 걸려서 완성한 작품이라면 읽어봐야 할텐데, 제목에서부터 힘겨운 여정을 예고하네요. 마의 산~~~~~

레삭매냐 2020-06-13 09:55   좋아요 0 | URL
상하권해서 1,300쪽이 넘는 지라
읽다가 엎어지지나 않을까 걱정
부터 됩니다...

욕심 부리지 말고 찬찬히 읽는 것
으로. 근데 이런 책들은 사실 전력
투구해야 하는 시츄라 -

유부만두 2020-06-13 0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산의 병원으로 올라가는 데 까지만 읽다 덮어뒀어요;;;; 옛날 옛적에요. 산은 잘 있나요?

레삭매냐 2020-06-13 11:29   좋아요 0 | URL
7년 짜리 등반이니...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뿍 담겨 있다고
하니, 또 한 번 속아서 들이대는 중이
랍니다.

Falstaff 2020-06-13 11: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 전에, 고딩 2학년 여름방학 때 학교 도서실에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읽은 삼중당 문고판, 추억의 책입니다. 너무 오래라 거의 기억에 남은 게 없어서, 주인공을 ‘우리의 한스 카스토르프‘라 불렀던 건 아주 인상깊었습니다만, 다시 읽어야 하나, 시방 고민만 열라 하고 있습지요. ㅋㅋㅋ

레삭매냐 2020-06-13 11:30   좋아요 1 | URL
대단하시네요 고딩 시절에 토마스
만을 접하셨군요.

전 그 때 아마 무협지를 읽었지 싶
습니다만.

더운데 빡신 고전을 읽으려니 쉽지
가 않네요. 망하면 더위 탓을 하려
고 작정했습니다.

chika 2020-06-13 1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 오르시고난 후의 감상이 궁금해지네요. 너무 궁금하지만 차마 등정은 못하고 있는지라...^^

레삭매냐 2020-06-13 11:31   좋아요 0 | URL
인스타인지 어느 SNS에선가
등반기를 접하고 나서...

아, 나도 이제 때가 되었구나
싶어서 따라쟁이로 나섰습니다.

타인의 감상으로는 역시나
제 맛이 아니어서 말이죠.

완반에 대해서는 쿨럭.

chika 2020-06-13 11:36   좋아요 2 | URL
오옷, 역시! ^^
저는 다른분의 감상이 그 책을 접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기도해요. 도대체 어떻길래?라는 걸 획인해보고싶달까. 그러고보니 레삭매냐님처럼 제 맛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건 똑같은건지도...ㅎ

정상의 기쁨을 누리시길 응원합니다! ^^

레삭매냐 2020-06-13 21:27   좋아요 0 | URL
말씀을 듣고 보니 저도 이번에
사알짝 치트키를 쓰긴 했네요 ㅋㅋ
공감하는 바입니다.

syo 2020-06-13 11: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겁나 재미없었던 기억이....
아 이 책 자체가 마의 산이로구나 하면서 꾸역꾸역 읽었습니다만, 주인공이 한스였다는 것도 레삭매냐님 글 보고 기억이 날 정도네요.

레삭매냐 2020-06-13 21:28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군요.

전 이번에 도끼 챌린지를 하면서
<카라마조프>로 단련이 되어서
그런지 초반에는 그런저럭 넘어
가고 있답니다. 버뜨 어느 순간,
엎어져 버릴 지도 ㅠㅠ

잠자냥 2020-06-13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바로 이 책으로 1권만 두 번 읽었어요. 한 번 읽고 지루해서 멈추고... 몇 년 뒤 다시 읽자해서 또 시작. 또 1권만 읽고 멈춤.... =_= 다시 읽어야 하는데... 이러다 또1권만 세 번째로 읽는 거 아닌가 몰라요. ㅋㅋㅋㅋㅋ 암튼 그 덕분에 아직까지 1권은 생생합니다. ㅋㅋㅋㅋㅋ

레삭매냐 2020-06-14 08:43   좋아요 0 | URL
제가 지금 <그리스인 조르바>를
시도하는 것과 유사한 느낌이랄까요...

어떤 분은 인생책이라고 할 정도인데
전 그 정도는 아닌가 봅니다. 책이 나
올 때마다 사들여서 너댓권이나 되는
데 완독을 못하고 있네요.

계속 앞부분만 줄창 읽어서 읽을 때
마다 반갑고 뭐 그렇더라는.

고양이라디오 2020-06-22 1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떤 지루함도 이겨낼 수 있는 강단과 쌩가는 기술도 필요하다.˝

공감합니다. 저는 요즘 독서근육이 많이 약해진 거 같아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