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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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어느날, 라디오에서 신간 소설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장류진 작가의 <연수>에 대한 소개였다. 마침 도서관에 가는 길이어서 빌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과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지려나 싶었지만, 책이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대출 중이었다. 쉬이 나까지 차례가 오지 않더라. 그러다가 시간이 많이 흘러 해가 바뀌고 나서야 <연수>와 만날 수가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연수>가 소설집인지도 몰랐다. 연수는 심지어 사람 이름인가 싶기도 했고. <연수>에는 모두 6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었고, 표제작 <연수>는 자동차 연수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제 제법 운전을 하다 보니 실력이 늘었지만, 나도 도로 위의 올챙이였던 시절이 있었지. 앞만 보고 달린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그 때 실감했다. 일산의 코스트코 가는 길에 마구잡이로 끼어 들었다가 뒤차 운전자에게 욕을 들어 먹기도 했다. 뭐 그 땐 그랬지. 초보의 설움이라고나 할까. 개구리가 된 지금, 올챙이들을 봐주어야 하는데 그런 여유는 아직 생기지 않고 있나 보다.

 

초보 운전자를 위한 베테랑 연수 전문가와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다. 차를 몰 수 있는 자격증인 운전면허와 실전은 전혀 다른 문제다. 운전면허가 있다고 해서 누구나 능숙하게 도로 위에서 차를 모는 건 아니니까. 장류진 작가는 주인공의 시선에서 올챙이 드라이버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해준다. 그래 맞아, 그 땐 그랬지. 그리고 보니 운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익숙함과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 지금도 밤에 낯선 길을 갈 때면 바짝 긴장하게 된다. 그래 어떤 건 시간이 해결해 주는 법이지.

 

두 번째 에피소드인 <펀펀 페스티벌>은 시대의 과제가 되어 버린 취뽀에 대한 서사다. 좋은 급여와 복리후생이 보장되는 일자리는 AI 시대에 점점 줄어 들고 있다. 우리는 워라밸을 절실하게 원하지만, 대부분의 직장에서는 개인의 자유시간 보장 보다는 회사의 이익추구를 우선하지 않던가.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좋은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하고, 그런 일자리를 원하는 이들은 차고 넘친다. 이런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젊은 청춘들을 무한 일자리 경쟁으로 내몰고 있는 현실을 날카롭게 저격한다. 서양의 잘난 유투바 양반이 일찍이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로 묘사하면서, 유교와 자본주의의 단점들만 부각시키고 있다고 냉철하게 지적했다. 그의 정확한 분석에 할 말이 없다. 다 같이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대동세상의 도래는 과연 한낱 꿈이란 말인가.

 

<공모>의 밑바닥에는 다같이 모여 삼겹살을 굽고 쏘주를 들이키는 방식으로 으쌰으쌰 해야 무언가 조직의 단합이 이루어진다는 고루하고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으로 무장한 기존 회식 문화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내재되어 있다. 사실 회사에서의 관계는 철저하게 금전적 관계로 이루어진 그 무엇이다. 회사를 다니기 때문에 같이 어울리고 우르르 몰려 나가 점심 메뉴를 고르고 또 커피도 마시고 그러는 거다. 지긋지긋한 밥벌이하는 회사라는 공간이라는 공통점이 사라지는 순간, 그 안에서 형성된 인간관계 역시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법이다. 아무리 회사라는 조직에 충성하라고 외쳐대지만, 회사는 조직원들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역으로 왜 우리가 회사에 충성해야 하냐고 물어 보고 싶어졌다. 그러는 순간, 철없는 불순분자로 몰리게 되지 않을까. 지난주 월요일 밤에 내쳐 세 개의 에피소드를 읽다가, 잠깐 여러 생각이 들어서 보류해 두었다가 다시 독서의 수레바퀴를 돌리게 되었다. 다시 펴드는데 일주일이 걸릴 정도로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이야기였다.

 

여섯 개의 작품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바로 네 번째에 버티고 있는 <라이딩 크루>였다. 취미 활동과 연애 두 가지 토끼를 다 잡기 위해 자전거 동호회를 직접 만든 어느 사나이의 야심찬 도전기를 소설은 추적한다. 저자는 굳이 화자가 노련한 사냥꾼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자신을 포함한 다섯 명의 코어 동호회원을 바탕으로 해서, 네 명을 더 추가하려는 야심찬 계획 끝에 포섭한 새로운 동호회원이 남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마구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그렇지, 바로 이거지.

 

화자는 새롭게 등장한 신입 회원에 대한 경계심을 최고조로 끌어 올린다. 자신보다 더 어리고 잘생긴 청년 목수 아니 CEO의 등장으로 자신이 공고하게 쌓아 올린 크루장으로서의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질 판이다. 자신이 쌓아 올린 무언가를 뿌리채 뒤흔드는 존재의 출현이 화자에게는 위협으로 간주된다. 로드바이크가 아닌 전동 모터를 사용하는 게 무슨 문제냐고 당당하게 따지는 최도헌에게 크루장은 할 말이 없다. 화자인 크루장은 페어플레이 타령을 하지만, 모터 달고 달리는 최도헌의 자전거 뒷바퀴살에 돌멩이를 집어 던진 게 자신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런 그가 과연 페어플레이 타령을 할 자격이 있던가.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들은 코미디의 연속이었다. 자기 고유의 영역에 침범한 젊은 수컷에게 무리의 리더가 짖어대는 그런 모습이랄까. 기득권을 지닌 자에게, 젊은 도전자는 조금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맹렬하게 도전한다. 간만에 이런 날것들의 대결을 지면 중계로 해서 보는 그런 느낌이랄까. 과연 장류진 작가가 구사하는 서사의 가독성은 탁월했고, 소재들이 가지고 있는 현재성에 대한 타격도 만만치 않았다. 말미에 펼쳐지는 두 수컷들의 어처구니없는 쌈박질에 웃은이 빵빵 터졌다.

 

<라이딩 크루>의 미친 폭발력 때문에 다음의 두 이야기들은 뭐랄까 조금 쉬어 가는 그런 느낌이 들었달까. 글쓰기에 대한 재능은 없지만, 풍부한 재력과 인생의 노련함으로 무장하고 작가 라라가 되고 싶어하던 미라 언니에 대한 단상이 심상치 않게 다가온다. 과연 글쟁이들에게 글쓰기란 무엇일까? 조지 오웰이나 제임스 설터 선생이 말했듯이 우리 모두는 세상으로부터 영광과 찬사를 얻기 위해 글을 쓰는 게 아닌가. 그에 더해 덤으로 돈까지 벌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

 

하지만 미라 언니는 이미 스타트업의 대성공으로 돈이 아쉬운 그런 문청이 아니었다. 글을 쓰기 위해 그리스 여행도 갈 수 있는 그런 재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런 결핍의 부존재가 역설적으로 글쓰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게 아니었을까. 문학에서 필요한 건, 풍요함이 아닌 어떤 종류의 결핍과 부족함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워렌 버핏이나 빌 게이츠 같이 돈이 하나도 아쉽지 않은 이들이 구사하는 문장과 서사가 누구를 설득시킬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자기 계발이나 돈 버는 방법으로는 그들의 언행이 유효할지 몰라도, 문학 아니 누군가를 감동의 도가니탕에 몰아넣을 수 있는 글쓰기는 또 다른 이야기다.

 

결국 미라 언니의 삐뚤어진 글쓰기에 대한 처절한 욕망은 기묘한 방식의 표절을 낳게 된다. 내가 창작한 것이 아닌 것을 내가 썼다고 믿게 되는 자신 확신의 과정이 너무 안쓰러웠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얼마나 절박했으면 내가 쓴 게 아닌 타인의 작품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라는 동정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리고 보니 오래전, 어느 나라에서는 타인의 작품을 필사하다 보니 몸(팔이?)이 문장을 기억해서 그대로 베꼈다는 희대의 괴설이 등장하기도 했더랬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장류진 작가의 소설들은 철저하게 현재성에 기반한 서사를 구사한다. 아니 어쩌면 이 시대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소구력을 갖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동시대의 어느 곳에서나 벌어질 법한 그런 소재를 가지고 만든 맛깔스러운 여섯 접시의 요리들에 반해 폭식한 느낌이다. 그전 작품에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거북알" 만큼이나 로드바이크 크루장의 무쌍한 활약상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다시 생각해도 웃기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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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02-03 08: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자목련님 리뷰읽고 살짝 찜해 둔 책인데 매냐님도 🌟 다섯을 주셨네요. 이름만 들어본 작가인데 저도 기회되면 읽어보고 싶네요.
연수 재밌을 거 같아요.
저는 초보때 물도 못 마셨다는...ㅎ

레삭매냐 2024-02-03 12:04   좋아요 2 | URL
아~ 그러셨군요.
저는 오직 직진만 했답니다 :>

간만에 만난 아주 즐거운 책이
었네요. 시간 되시면 읽어 보셔
도 좋을 듯 합니다.

새파랑 2024-02-04 2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연수가 그 연수 였군요 ㅋ 저는 김연수 작가님 생각을 했는데... 레삭매냐님의 독서 범위는 대단한거 같습니다. 이번에는 한국문학 이군요~!!!

레삭매냐 2024-02-05 13:31   좋아요 0 | URL
저는 연수를 사람으로 처음에
생각했었답니다 :> 작가 분도
있으셨네요 ~~~

한국 문학도 닐거야 하는데...
그동안 사서 쟁여둔 책들이
원체 많다 보니 ㅠ

자목련 2024-02-05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만큼이나 술술 잘 읽히는 리뷰입니다. 장류진 작가가 좋아할 것 같습니다. ㅎㅎ

레삭매냐 2024-02-05 13:3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자목련님,
살짜쿵, 자랑을 해보자면...

제 인스타에도 연수 타령을
했는데 작가 분이 오셔서
살포시 좋아요 누르시고 가
셨더라구요.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작가
이래 두 번째라는 ㅋㅋㅋ

그레이스 2024-02-05 1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봐야겠네요

레삭매냐 2024-02-05 13:33   좋아요 1 | URL
아주 재미지답니다 -
감히 일독을 권하는 바입니다.

즐거웠습니다 막 웃기구요.
얼마 만에 책을 읽다가 이렇게
빵~하고 터졌느지요.
 
커피 한 잔 더 1 커피 한 잔 더
야마카와 나오토 지음, 오지은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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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매일 같이 커피 한 잔을 마신다. 회사에서 동료들과 점심 먹고 나서 커피 한 잔 마시는 재미가 일상이 되었다. 이건 마치 하나의 신성한 의식 같다고나 할까. 주식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세상만사를 다 섭렵하다. 하루 중 가장 기다리는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삼총사 중의 한 명은 커피 마시며 수다떠는 재미에 회사 다닌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커피는 이런 즐거움을 전달해 주는 하나의 매개체가 되었다.

 

우리 동네 도서관에서는 관외 대출불가 만화 섹션이 있다. 몰랐었는데 4층에 아주 많은 만화들이 있었다. 시간 여유만 된다면 여기 가서 아주 하루 종일 만화를 보고 싶기도 하다. 어제도 무려 16년 전에 나온 야마카와 나오토 작가의 <커피 한 잔>이라는 만화를 찾았다. 순전히 분량이 적어서 금방 읽을 수 있겠다는 나의 얄팍한 노림수였다고 고백하는 바이다.

 

짧은 연작들이 몇 개 담긴 소설들이다. 불과 24시간 전에 본 만화인데 이미 기억이 많이 휘발되어 버렸다. 그 중에서 기억나는 이야기들 몇 개를 되짚어 본다. 우선 거리의 악사 양반이 들려주는 이야기. 거리에서 요즘 말로 하면 버스킹하는 청년이 있었다. 그런데 고급 세단을 타고 온 아가씨의 집사가 음악을 듣고 나서 만엔씩 청년에게 주었다. 어찌 보면 큰 돈이 아니었지만, 거리에서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버스킹 청년에는 가뭄에 단비 같은 그런 비용이었다. 그 돈으로 저녁을 사 먹고, 따뜻한 커피도 한 잔 사 마신다. 그리고 더 돈을 모아서는 좋아하는 밥 딜런의 CD도 샀지 아마. 나중에는 아가씨 집에까지 가서 공연을 하고 10만엔을 받는다. 그러다가 아가씨의 발길이 끊어졌다. 집사에 말에 의하면 병약했던 아가씨가 돌아 가셨단다. 그리고 죽은 아가씨는 아예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그랬던 거다.

 

이웃에 사는 이혼녀를 사랑한 평소에 그냥 저냥 살던 청년의 이야기도 가슴을 타격한다. 홀로 아이를 키우는 이웃집 여자를 눈여겨 보게 된 청년. 혼자 마시는 커피를 계단에 앉은 그녀에게 나누어 주면서 사랑을 키워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도 충실하는 청년. 하지만 재결합을 요구하는 남편의 등장으로 둘의 관계는 무너진다. 그렇게 이웃 여자는 떠나가고, 그런 후에도 청년은 계단에 앉아서 자신이 직접 내린 커피를 마신다. 그리고 또다른 이웃이 등장한다.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는 법인가 보다.

 

엄마와 별거 중인 아버지를 따라 나선 소년의 이야기도 마음에 든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이들 가고 싶은 데려 가주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아들은 평소에 아버지가 가던 곳에 가보고 싶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간다진보초의 세계에서 가장 큰 헌책방 거리라는 곳을 방문한다. , 그리고 보니 나도 오래 전에 아버지와 함께 청계천 헌책방에 가서 한국일보에서 나온 <타임 라이프> 2차세계대전 시리즈를 10권 사서 전철을 타고 집까지 낑낑대면서 온 적이 있었지. 누구나 다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나 싶다.

 

어느 이야기에서 나이가 드니 점점 시간 때우기가 힘들어진다고 하던데... 무슨 소리냐 그래. 책읽기에 너튜브 감상에 그리고 화초 재배에 이르기까지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지. 역시 시간 때우기는 자기하기 나름이다. 시간을 보내는데(혹은 때우면서) 있어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가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 게 아닐까 싶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뱀다리] 서문부터 오류가 있었구나. 문득 생각이 나서 밥 딜런의 <커피 한 잔 더(One More Cup of Coffee (Valley Below))>가 수록된 앨범 <Desire>를 검색해 봤다. 그 앨범은 1967년이 아니라 1976년에 발매됐다. 아주 간단한 사실인데, 역자가 확인을 하지 않았나?

 

너튜브에서 노래를 찾아 들어 보니 왜 이리 애절한지 모르겠다. 예전 같으면 아예 듣지도 않았을 텐데 그냥 BGM으로 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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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4-02-01 0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밥 딜런 노래 가사가...정말 아름다운 ‘시‘네요

레삭매냐 2024-02-01 13:05   좋아요 1 | URL
어쩌면 밥 딜런에게 노벨문학상
을 준 이유가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황야(2024) / 허명행


*** 다수의 스포가 들어 있으니, 참조해 주시길.

 

인스타 광고로 처음 접한 허명행 감독의 <황야>를 봤다. 어포칼립스 시절 사랑꾼, 아니 사냥꾼으로 나선 마블리의 액션은 여전했다. 하지만 서사의 힘이 턱없이 부족했고, 어디선가 본 장면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기시감 때문에 후반으로 갈수록 동력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더라.

 

스토리라인은 간단한다. 어느날 갑자기 벌어진 대지진으로 대한민국은 혹성탈출의 어느나라처럼 붕괴해 버렸다. 물도 식량도 없는 그런 어포칼립스 시절이 도래했다. , 그전에 죽어가는 자신의 딸을 살리겠다는 양기수 박사(이희준 분, 이후 닥터 크레이지로 부르겠다) 역시 자신의 연구실에서 불법 생체실험을 하다가 당국에 의해 저지될 그 순간에 어포칼립스를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추락(?)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사냥꾼 최지완(이준영 분)이 서울 한복판에 등장한 좀비스러워 보이는 악어를 사냥한다. 불화살이 멕이는데, 악어가 쉽게 죽지 않고 지완에게 덤벼든다. 그리고 우리의 마블리 남산(마동석 분)이 등장해서 한 칼에 악어의 머리를 잘라 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사냥에 성공한 이들은 푸짐한 악어 고기를 버스동 사람들에게 판다. 이른바 약육강식의 세계가 그렇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리고 18세 소녀 한수나(노정의 분)가 등장해서 유명한 사냥꾼 남산과 지완의 그림을 그린다. 남산과 지완이 열심히 악어 고기 장사를 하던 중에 등장한 일단의 양아치 그룹, 조악하게 그린 현상수배범 전단을 들고 사람들을 잡아가던 중에 눈에 띈 수나를 잡아가려고 하자 과거에 자신의 딸을 지키지 못한 남산이 등장해서 이들을 제압한다. 그리고 보니 닥터 크레이지도 자신의 딸을 지키지 못하지 않았나.

 

버스동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아파트에 사는 선생님(장영남 분)이 일단의 무리들과 등장해서 수나에게 좋은 삶의 환경과 교육을 제공하겠다며 보호자인 할머니를 설득해서 데려간다. 말로는 새로운 인류를 위한 투자라고 하는데 어째 수상하지. 이런 어포칼립스 영화에서 이런 미래를 위한 투자는 가만 보면 결국 악랄한 착취로 귀결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아니 영화의 내용을 하나하나 다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닥터 크레이지가 살아남은 십대 소년 소녀들을 생체 실험 재료로 이용해서 자신의 딸을 부활시키겠다는 망상을 우리의 마블리가 뽀갠다는 내용이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다.

 

사냥꾼 마블리는 기묘하게도 영화 초반에 딱 한 번 악어사냥에서 자신의 실력을 보여준다. 좀 더 다른 사냥을 기대했던 관객들은 그가 무슨 직업을 가졌었는지 잃어버릴 판이다. 아니면, 악어 고기 파는 정육점 주인 같기도 하고. 다른 사냥은 몰라도 빌런 사냥에는 참으로 유능한 남산이다. 자신의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트라우마 덕분에 딸 같은 수나를 구출해내기 위해 목숨을 건다는 설정도 어포칼립스 시절에 좀 낯설게 다가온다. 남산이 자신의 딸을 왜 지키지 못했나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서 그런 탓일 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딸을 다시 살리겠다는 닥터 크레이지와 계속해서 살기 위해 닥터 크레이지가 공급하는 약물이 필요한 유사 K-좀비 권상사의 망상이 결합해서, 생체실험에 필요한 아이들을 계속해서 수급하고 어포칼립스 시절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깨끗한 물과 식량으로 사람들을 착취하는 설정이 영화 <황야>의 근간을 이룬다.

 

모든 시스템이 붕괴해 버린 가운데,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신인류를 창조해내겠다는 하지만 그 이면에는 죽은 딸을 살리겠다는 닥터 크레이지의 신념 아니 망상은 어쩔 수 없이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시킨다. 원작 소설에서도 닥터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괴물이 모든 걸 파멸시키지 않았던가.

 

수나와 그의 새로운 친구가 된 수예가 들어간 반에서 우수한 성적을 낸 이들이 생체실험에 선발되는 시퀀스는 영화 <아일랜드>를 떠올리게 한다. 아일랜드에서도 필요에 의해 선발된 클론들이 특별 여행에 당첨됐다고 하면서 번식장을 떠나지 않았던가.

 

점점 K-좀비가 되어 가는 권상사가 닥터 크레이지의 실험실에서 기르던 생쥐를 맛깔스럽게 집어 삼키는 장면은 80년대 최고의 드라마 중의 하나인 <V>에서 외계인 사령관 다이애나가 쥐를 꿀꺽하는 장면을 그대로 따오지 않았나 싶다.

 

수나와 주예 가족에서 분리시킨 수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쓸모가 없다며 처리하는 K-좀비 최중사와 오하사의 역할은 작년 대유행했던 <무빙>의 안기부 부장과 너무 닮았다. 치열한 삶의 경쟁에서 도태된 인간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냉혹한 자본주의 논리를 그대로 이식한 교주 닥터 크레이지와 선생님의 지독한 가스라이팅은 어쩔 것인가.

 

, 이전에 마블리와 합을 맞췄넌 버거형의 등장도 반가웠다. 이전과 비슷한 결을 따라 이번에도 호기롭게 마블리 형에게 도전장을 들이밀었다가 바로 꼬리를 내리고 깨갱하고 만다. 극 중에서는 타이거라고 불리는데, 사나운 호랑이라기 보다 귀여운 고양이 정도의 역할로 만족한다. 아파트까지 안내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는 도중 하차.

 

영화가 엔딩으로 달려가면서 지하에서부터 좀비로 변한 이은호 중사의 부하들과 싸우면서 닥터 크레이지의 핵심 실험실이 있는 8층까지 가는 과정은 마치 게임을 클리어하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 준비한 무기와 총탄이 떨어지가 자신들을 공격하는 아파트 군단을 처치하고 무기를 챙기라는 마블리의 말에서 역시 사냥꾼답구나 싶더라. 상당히 폭력적인 어포칼립스 시절을 지배하기 위해 물과 식량만큼 중요한 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총 같은 도구라는 점이 시사하는 바도 크다고 생각한다. 깨끗한 물과 식량이 대변하는 가스라이팅이 당근이라면, 바로 물리력을 행사하는 총이 채찍이겠지.

 

어쨌든 어포칼립스와 좀비라는 소재 때문인지 무언가 강렬한 서사의 부족 때문인지, 결론은 밋밋한 맛이 되어 버렸다.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8층까지 수없이 달려드는 빌런들을 제압하면서 끝판왕 군인권상사와 사랑꾼의 입대결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고나 할까.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재밌었다구. 신인류 창조에 매진하는 계급 간의 투쟁이나 영화에서 살짝 비추는 착취 시스템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지만, 이미 많이 썼고 나의 에너지가 고갈된 모양이다. 이상이다.


[뱀다리] 네이버 블록에도 올렸더니만, 쿠팡 광고로 바로 "악어 고기"가 뜨는 건 뭔데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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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4-01-31 1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또 좀비 서사로군요. 뻔한 전개가 연상된다는. 그나저나 주먹질이 아닌 마동석은 그림이 영 아닌데요ㅋㅋㅋ 부산행에서도 주먹으로 상대하던 캐릭터였는데.

레삭매냐 2024-01-31 13:44   좋아요 1 | URL
마블리의 주먹 액션은 이번에도
여전하지 싶습니다.

하도 여기저기서 좀비 이야기를
팔아 대서 식상한 느낌이더라구요.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잘 사용하지 않는 카드회사에서 만원 이상 돈을 쓰면 만원 청구할인해 준다는 문자를 받았다. 당연 나의 픽은 책이었다.

 

그렇다면 무슨 책을 살까 하고 책이 수북하게 담긴 장바구니를 뒤적인다.

그러다 오래 전에 나와서 사서 읽다만,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 생각이 났다. 바로 이거지.

 

마침 근처에 케이문고가 있었지. 바로드림으로 해서 이런저런 쿠폰들을 쟁여서 단돈 천얼마에 데려왔다. 이것이야말로 책쟁이의 행복이 아닐까나.

 

그전에 읽던 책이라 그런지 낯설지가 않다. 그리고 많은 이웃님들이 말해 준대로 정말 재밌구나 그래. 근데 왜 처음에 다 읽지 않았을까. 무슨 이유가 있겠지.

 

역사상 최고의 평전 작가라는 호칭이 무색하지 않게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백수십년 전의 일들을 마치 옆자리에서 보고 쓴 것처럼 그렇게 생생한 중계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과연 츠바이크로구나.

 

수백 년 동안 유럽의 각지에서 앙칼지게 싸워온 맞수이자 숙적 부르봉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이 혼인으로 그동안의 갈등을 봉합하고 새롭게 등장한 호적수들인 섬나라 영국과 프로이센 그리고 러시아를 견제하기로 결정했다. 미래의 루이 16세가 될 프랑스의 왕세자의 색시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식 15세 소녀 마리 앙투아네트가 픽업됐다.

 

합스부르크 궁정에서 자라나긴 했지만, 엄숙하고 복잡한 의식 타령을 하는 프랑스 궁정에 맞지 않는 재기발랄함을 과시하는 왕세자빈의 등장. 츠바이크는 이미 혼인예식에서부터 불길한 징조들이 세 가지나 보였다고 보고한다.

 

정말 시기적절한 때에 맞춤 독서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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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마트에 갔다가 우리 시민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쏘주 가격이 궁금하길래 한 번 가격표를 유심히 봤다. 1,420원이더라.

그런데 주점에서 사먹는 쏘주는 가뿐하게 오천원이 되어 버렸다. 서민술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말이지. 그러니까 최소한 세 배 이상이란 말이지.

 


물론 업소용과 일반 소매용의 가격이 다르다고 식당하던 친구가 말해 주더라.

출고가 오른다고 하면서 술집에서 먹는 쏘주의 가격은 천원씩 올리더니, 물가폭등에 놀란 정부가 출고가를 낮추라고 해서 내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술집의 주인장들은 입 싹 닫고 여전히 오천원 가격을 고수한다.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메뉴판을 바꾸고 그러는데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나 뭐라나. 아니 가격 올리던 시절에는 종이로라도 써 붙이고, 안되면 매직으로 거침없이 오른 가격을 왕희지 글쓰듯 휘갈기던 양반들이 아니던가.

 

그나저나 명절 전에 시간 내서 삼겹살에 쏘주 한 잔 마셔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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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4-01-25 00: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싶어 도서관에 상호대차 신청하고 기다리고 있답니다. 츠바이크가 썼으니 뭔들 재미가 없을까요. 기대중입니다^^
전 술이 안받는 체질이라... 쏘주의 진정한 맛을 즐길줄 아는 분들이 넘 부럽네요. 가격 상관 없이요^^

레삭매냐 2024-01-25 10:38   좋아요 1 | URL
그렇지요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무려 츠바이크가 쓴 작품이니깐요.

저도 아주 어려서는 쏘주 맛을 몰랐었
는데... 지금도 사실 잘 모른답니다 ^^
유퀴즈에선가 보니 쏘주는 술이 아니
라 화학물질이라고 -

transient-guest 2024-01-25 0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격이 올라갈 수는 있어도 내려오는 경우는 거의 없더라구요. 미국선 마트에서 3불 정도 음식점에서는 10-11불 정도 받고 거기에 세금도 따로 나옵니다. 서민의 술이 아니죠ㅎㅎ 여기선 차라리 맥주나 와인 혹은 위스키가 저가형이 좋은 것이 많습니다. 위 사진은 마트가 아니라 님 냉장고모습인줄 알고 잠깐 깜놀했네요 ㅎㅎ

레삭매냐 2024-01-25 10:41   좋아요 1 | URL
오래 전에 동부에서는 리쿼스토어
에서는 6불, 식당에서는 13불 정도
했었는데... 오히려 술값이 내려갔
나 보네요.

맞습니다, 일단 올라간 가격은 원
부자재 가격이 내려 간다고 해서
동반해서 내리거나 그러진 않지
요. 올라간 가격을 그대로 쭈욱~!

재작년에 놀러 갔던 친구네 집
에 가보니 술장고가 다 있더라
구요 세상에나. 더부럽 -

예전에 저희 독서 모임 두목님
신랑께서 위스키를 좋아한다고
해서 덥썩 덤볐다가 그만 장렬
하게 전사했던 기억이 나네요.

transient-guest 2024-01-25 11:07   좋아요 1 | URL
한국제품이 많이 들어오면서 더 싸진 건 맞아요 스위스 어딘가에서 100유로 내고 소주 마셨다는 얘길 들은 적도 있거든요 ㅎㅎ 저도 더 어릴 땐 한국술 더 비싸게
먹긴 했습니다

Falstaff 2024-01-25 06: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업소용 입고 가격은 1,700원 정도입니다. 업소에서 3배 받습니다. 예전엔 두 배 받았습니다만 세상에 안 오르는 게 있어야지요. 제가 마시는 쐬주는 마트에서 1,750원~1,900원 합니다. 진로 골드.

레삭매냐 2024-01-25 10:46   좋아요 1 | URL
진로 골드가 씨뻘건 오리지날인가요 ㅋ

그럼 일반 소매용 입고 가격은 더 싼가
보네요.

어제 마트에서 사과 한 봉지 샀는데,
15,000원이라고 하더라구요. 달랑 네
알 들었는데... 맛은 없었습니다, 에잉.

북깨비 2024-01-25 08: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효리가 광고할때부터 처음처럼를 주로 마셨는데 최근에 화요를 마셔본 후로 다른 소주 못마시겠어요. 소주인데 소주같지 않은 아주 깨끗한 맛. 그래도 제 최애는 위스키입니다만.. 🥃😌

레삭매냐 2024-01-25 13:35   좋아요 2 | URL
아우 화요 쏘주~~~
주점에서 파는 건 너무 비싼 느낌
이랄까요. 사악한 가격 !

위스키 진차 좋아하시는 분들은
오크향 냄새에 반하신다고 하던데...
전 만날 싸구리 제이앤비안 버번 정도
만 마셔서 그런지 맛을 잘 모르는 -

호시우행 2024-01-26 0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게에서 음주하지 않아야 가격이 내릴까요,ㅠㅠ 음식보다 술팔아 돈버는 구조가 식당일수도ㅠㅠ

레삭매냐 2024-01-29 20:18   좋아요 0 | URL
쏘주가 너무 올랐어요. 두 병만 마셔도
만원이니...
식당하던 친구가 다른 건 모두 서비스
로 줘도 술만은 절대 안된다고 하더라
구요.

다독다독 2024-01-27 2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주 좋아하는데, 이렇게 차이가 큰 줄 몰랐네요...;

레삭매냐 2024-01-29 20:18   좋아요 1 | URL
저는 집에서는 쏘주를 마시지 않아
항상 식당이나 주점에서 먹게 되는
데, 소매 가격을 보고 놀랐네요.
 
김치바게트
실키 지음 / 현암사 / 2023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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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같이 어울리던 동네 친구가 있었다. 그는 만화를 그렸다. 나중에 연락이 끊긴 다음에, 앙굴렘 만화축제에도 참가하고 그랬다고 했던가. 그는 교육 만화 그리기를 정말 싫어했었는데, 먹고사니즘을 해결하기 위해 교육만화를 그려야 했다고. 지금은 뭘하고 사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의 자취를 쫓아 보니 작년 11월에 새로운 작품을 발표했구나. 실키 작가의 <김치바게트>라는 책이 기억의 저장고에서 불러낸 친구의 추억이었다네.

 

주간행사로 일요일마다 도서관에 간다. 그전에 빌린 책들을 반납하기도 하고, 또 새로운 책들을 빌리기도 한다. 다음달 마지막 주에 예정된 달궁 책인 <사악한 목소리>도 빌리고, 바로 읽을 수 있는 그래픽노블도 한 번 찾아 본다. 그러다 만나게 된 책이 실키 작가의 <김치바게트>.

 

처음에 제목만 보고서는 음식 만드는 법을 소개하는 책일 줄 알았다. 바게트에 김치를 끼워 먹는 이야기인가? 나의 오바였다. 프랑스의 웹진에 소개된 프랑스에 사는 실키 작가의 체험담을 소재로 삼은 그래픽노블이었다.

 

어딜 가나 그놈의 지긋지긋한 칭챙총 스토리는 빠지질 않는구나. 요즘 독일에서 한창이라는 AfD 반대시위의 거대한 물결 생각이 났다. 그동안 침묵하던 다수가 나서서 점점 더 오른쪽으로 향하는 극우정당의 인종차별에 대한 시민적 저항을 인스타 중계로 보고 있다. SNS의 긍정적 영향이 아닐 수 없다. 나와 다른 것이 나쁜 게 아닐진대, 끝없는 혐오로 치닫는 시대에 깨어 있는 시민 의식 교육에 대한 효과가 유럽의 중앙부인 독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도 못지 않은 똘레랑스의 나라라고 들었는데, 아직도 먼 모양이다.

 

얼마 전에 회사 중국인 동료의 비자 발급을 받으면서, 다른 나라에 취업을 하고 사는 일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가 있었다. 최종에 가서는 대표이사가 보증을 서고서야 법무부 장관이 발급하는 취업비자를 받았다. 그전에 서류 작업을 하면서 행정사 아저씨의 도움을 받은 건 말할 것도 없고. 실키 작가 역시 코로나 시절에 경찰(?)이 발급하는 체류허가증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모습을 보면서 절절한 느낌을 공감했다. 남의 나라에서 사는 건 쉬운 문제가 아니구나 역시.

 

외국 생활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알 수 있는 각종 민원서류 발급의 난이도에 대한 에피소드는 또 어떤가. 오늘도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받아서 알지만, 모바일로도 각종 민원서류들을 처리할 수 있는 디지털 정부의 위력을 새삼 체감한다. 바로 이웃 일본만 하더라도 무조건 서류와 팩스 타령을 해대는 건 기본이 아닌가. 관공서에 가서 무슨 일을 처리하려면 한나절은 기본이 아닌가. 물론 그 이면에는 모든 시민들을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는 주민등록번호라는 개인에 대한 고유 식별이 가능한 '빅 브러더'를 연상시키는 제도가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그렇지만 무언가를 쉽게 얻기 위해서는 또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니까.

 

그 다음에 또 무슨 이야기가 있더라. 이틀 전에 읽은 그래픽노블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며 리뷰를 쓰는 게 쉽지 않네. 이래서 보통 리뷰는 책을 읽자 마자 바로 써야 하는데 말이지. 아 친구들하고 같이 어울려서 김치 만드는 프로젝트가 있지 않았나. 오늘 점심에도 김치찌개를 먹었는데, 김치야말로 한국인의 소울푸드라는 점에 대해 이견이 없을 것 같다. 흔하게 먹을 수 있을 적에는 굳이 찾지 않지만, 또 막상 먹기 쉽지 않을 적에는 생각나는 게 김치라고 생각한다. 오래 전 자취생활을 해봐서 김치만 있으면 또 해먹을 수 있는 게 많으니깐. 요리 재료로서도 만능 치트키라고나 할까.

 

실키 작가가 코로나 록다운 시절에 대해 말하는 것을 읽다 보니, 그런 시절이 언제였나 싶다. 우리나라는 그렇게 전면적인 록다운을 실시하지는 않지 않았나. 그러면서 얼마나 의료시설이나 사회 시스템이 그런 팬데믹에 대처할 수 없었으면, 록다운을 실시했나 싶다. 그 시절에도 우리는 마스크를 뒤집어 쓰고 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벌기 위해 회사로 출근하지 않았나. 언제 그랬나 싶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평소에 있지도 않은 국뽕이 차오르는구나 그래.

 

내친 김에 도서관에서 실키 작가의 다른 책도 빌렸는데 그 책은 <김치바게트>만 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랄까, 지금의 어떤 스타일에 도달하기 위한 습작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간단하게 코로나 시절, 프랑스에 사는 엑스페이트리어트의 삶에 대한 스케치를 살펴봤다. 아주 오래 전, 파리에 도착해서 뤽상부르 공원에서 뜯어 먹던 바게트 생각이 났다. 그냥 뭐 그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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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4-01-24 1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순간 ‘김치바게트라니 맛있겠다‘ 생각했는데 아니군요?
정말 김치 만한 치트키가 없죠.
우동 좋아하는데 계란을 곱게 풀어넣고 묵은지나 새로 담근 김치를 넣어도 참 훌륭합니다.^^

파리에 갔을때 아끼려고 바게트랑 빵 위주로 줄곧 사먹던 기억이 납니다.ㅎㅎ

레삭매냐 2024-01-24 15:55   좋아요 1 | URL
저는 파리 민박집에서 아침 저녁으로
밥을 너무 잘해 주셔서 만날 민박집
밥을 먹느라 그만 ㅋㅋ

그래도 푸와그라 샌드위치 먹은 기억
은 나네요.

김치 우동 크하~~ 배 고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