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휴버트 셀비 주니어 지음, 황소연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오래 전에 영화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를 봤다. 하도 오래 전이라 영화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한 때 끗발 날리던 제니퍼 제이슨 리가 여주인공 트랄랄라 역을 맡았다는 것 정도. 그리고 또 한참 시간이 지나, 한 겨울에 매서운 찬바람을 맞으며 브루클린 다리를 콧물을 줄줄 흘리면서 건넌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또 십 수 년이지나 영화의 원작을 소설로 다시 만나게 됐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그 당시에 내가 왜 브루클린 다리를 기를 쓰고 건넜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시간이 또 지나고 나니 다 추억이지 싶다.

 

원작소설은 모두 6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초반에는 브루클린에 사는 하층민들의 이야기가 낯설었지만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여왕들의 파티 이야기(사실 조금 지루하다)를 거쳐 영화의 모태가 된 트랄랄라 이야기 그리고 선반공으로서는 최악이지만 파업 영웅 해리 블랙 이야기가 소설의 압권이었다. 이어지는 랜드샌드도 현실감 면에서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컬트 고전이라는 말이 있던데 컬트소설이라는 표현보다 사회소설이 더 맞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1950년대 미국 하층민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낸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지금은 윌리엄스버그를 중심으로 브루클린이 다시 뉴욕에서 뜨는 핫플레이스라고 하지만, 그 시절만 하더라도 맨해튼에서 밀려난 갈 곳 없는 따라지들의 집합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후진 동네였던 모양이다. 술집 그릭스를 중심으로 모인 동네 건달들이 시도 때도 없이 패싸움을 밥먹듯 벌이고, 마누라에게 손찌검을 해대는 가정폭력은 일상이며, 여왕들(드랙 퀸?)이 하루저녁 즐기기 위해 갖은 유혹을 벌이는 그야말로 욕망의 소용돌이 같은 곳이 소설에서 마지막 비상구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브루클린이다. 개인적으로 놀란 것은 놀랄 정도로 지금의 화폐가치와는 다른 그 시절의 물가였다. 단돈 1달러로 한 가족이 아침에 먹을 장을 보고 담배까지 살 수 있었다니. 물론 지금의 가치와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남자들이 실직해서 놀고먹으면서 마누라보고 돈을 벌어 오라고 하질 않나, 주택단지 여자들은 허구한 날 모여서 험담으로 날 세우며, 건달들은 뜨거운 밤을 보내기 위해 괜찮은 술집에서 여자들을 사냥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그런 퇴폐적인 분위기마저 자욱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기른다는 게 가당키나 했을까? 하긴 아빠 엄마가 상스러운 욕지거리를 해대며 죽어라고 싸우는 장면만 없다고 해도 지금보다 훨씬 나아 보일 것 같다. 어쩌면 소설의 저자인 허버트 셀비 주니어가 어떤 부분에서는 과장했을 진 모르겠지만, 상당 부분 당대의 시대상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의 주인공으로 나온 트랄랄라 역시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거리에서 방탕하게 소진하면서 세월을 보낸 그런 아가씨다. 알다시피 영화에서의 결말처럼 소설의 엔딩 역시 비극이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땅개와 뱃놈들을 상대로 화려한 미모로 즐기고 한몫 잡아보겠다던 트랄랄라는 거리의 갱들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신세다. 도저히 교훈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라고나 할까.

 

소설의 핵심은 역시 <파업>이 아닐까. 해리 블랙은 노조의 핵심 행동대원으로 고용주 측에선 일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선동을 도맡아서 하는 해리를 자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임금인상과 복지 프로그램 협상결렬로 시작된 파업이 해리에게는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는 하나의 화려한 무대였다. 파업사무실을 차리고 파업에 관련된 일에 열중하기 보다는 술마시고 두통을 달래면서 양성애의 세계에 빠져드는 타락한 모습을 작가는 정말 하나의 르포르타주처럼 현실감 넘치게 그려냈다. 어떻게 보면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모두 50년대 마초의 대표선수처럼 보인다. 사실은 그렇지 않으면서 자기야말로 제일 잘난 남자라는 듯이 으스대며 시시껄렁한 남성성을 과시하기 위해 몸이 달아 있는 그런 모습 말이다.

 

파업 와중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조의 최고 전술무기 해리를 잘라야 한다는 사명감에 젖은 사장과 이만하면 충분히 자신들의 실력을 보여 주었으니 협상을 마무리 짓고 일터로 복귀할 명분을 찾는 노조지도부 간의 샅바 싸움은 선수 끼리 왜 이래의 전형이다. 결국 파업이 끝나자, 그동안 자기 돈도 아니면서 흥청망청 맘대로 돈을 쓰며 게이 레지나를 유혹하던 해리는 끈 떨어진 갓신세마냥 바로 용도폐기된다. 그럴 줄 몰랐나. 그 정도면 다행이게, 동네꼬마에게 추잡한 짓을 하다가 그릭스 패거리에게 치도곤을 당해 곤죽이 될 정도로 얻어맞는다. 원래 자신의 것도 아닌 권력을 행사하다가 비참하게 추락하는 해리의 모습은 정말 일그러진 그네들의 초상이었다.

 

파업 도중에 무기력하게 피켓 시위를 하던 남자들과 그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던 경찰 간의 대결 장면도 자못 흥미진진하다. 작가는 대치되어 있는 두 세력 간의 갈등의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분석하고, 일촉즉발의 위기를 실시간으로 리얼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노조의 파업을 무력화시키고 분쇄하기 위해 경영진 측에서 동원한 하청의 전국화 수법도 선진적이었다. 자본가들의 음모에 맞서 그릭스 갱들을 동원해서 트럭을 폭파시키는 무지막지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 노조 측도 마찬가지였지만,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무력화시키는 자본가들에 대항하기 위한 유일한 무기는 바로 전국적 연대라는 걸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까. 신자유주의 각자도생의 시대에는 모두 무의미해져 버린 일이지만 말이다.

 

휴버트 셀비 주니어는 다시 현실세계로 모든 캐릭터들을 소환해서 우리에게 비상구가 존재하는지 묻는 것으로 소설을 끝낸다. 어쩌면 그들에게 여기(브루클린)은 비상구가 아니라 해방구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해도 모든 것이 허용되는. 다양한 군상들이 빚어내는 1950년대 미국의 초상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위력적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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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유 - <미 비포 유> 두 번째 이야기 미 비포 유
조조 모예스 지음, 이나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5월
평점 :
품절


  

두툼한 분량이다. 500쪽이 훌쩍 넘어가는 분량에 조금 놀랐지만, 막상 읽기 시작하고 보니 전혀 분량이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전 세계적으로 대히트를 친 전작 <미 비포 유>를 읽지 않았다는 점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주인공 루이자 클라크의 18개월 전 삶이 너무 궁금해서 전작의 플롯 부분은 우리의 친절한 위키피디아 플롯 서머리를 통해 해결했다. 하지만 루의 비극은 현재진행형이었다.

 

제목이 뜻하는 것처럼 주인공 루가 간호를 맡았던 윌은 자신의 바람대로 스위스의 디그니타스 시설에서 죽음을 맞았다. 문제는 루와 윌이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홀로 남은 루는 아직 윌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어찌 보면 현대판 신데렐라 스토리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신데렐라를 든든하게 후원할 왕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남긴 유산으로 루가 정든 고향을 떠나 대도시 런던에서 지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점 정도. 뭐 그 정도만 해도 소설의 전개상 충분조건은 갖춰진 셈이다.

 

윌을 존엄사로 잃은 상실감과 공항의 아이리시 테마 펍에서 짧은 루렉스 스커트를 입고 밥벌이의 지겨움을 감당하던 루는 어느날 사고로 옥상에서 추락하게 된다. 그녀의 사연을 아는 모든 이들은 그것을 사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지만. 부모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몸을 추슬러 직장에 컴백하지만 싸이코 같은 직상상사 리처드의 갈굼이 도를 더해가던 차, 느닷없이 나타난 한 명의 등장으로 루의 평온해 보이는 일상에 다시 격랑이 일기 시작한다. 그녀의 이름은 릴리, 죽은 윌 트레이너의 딸이란다. 소설의 전개상 릴리가 모범생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 골초에 술이며 이름 모를 마약 그리고 나이트클럽에 밥 먹듯 드나다는 그런 문제아 중의 탑클래스 문제아다.

 

여전히 윌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는 루는 아버지의 권유대로 새 출발 서클에도 나가 보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낯선 이들과의 대화가 영 탐탁지 않다. 그 모임을 계기로 해서 만나게 된 샘 필딩과 썸을 타기도 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해 뉴욕에 있는 네이선의 조력으로 병간호 일자리에 지원하기도 한다. 수십 년을 함께 산 부모님의 갈등도 루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문제 중의 하나다. 이렇게 스스로의 앞감당도 못하는 이십대 아가씨가 열여섯 살짜리 릴리를 감당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조조 모예스는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꼬인 인간관계를 통해 상대방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쉽지 않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주지시킨다.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새출발한다는 게 상상 이상으로 어렵노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에도 굵직하게 방점을 찍는다. 사랑을 사랑으로 극복하라는 말처럼 그렇게 만나게 된 루와 샘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어디 사랑이라는 녀석이 순탄하기만 하던가. 오해와 불신으로 위기를 만나기도 하고, 발목 잡는 과거 때문에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청춘들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단순하게 그런 로맨스의 감정 뿐만 아니라 자신의 미래까지 걸린 일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어떤 선택이 자신에게 최선의 것인가 끊임없이 되묻고 고민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란 말인가. 루에게는 윌과 함께 한 6개월이라는 시간이야말로 자아성찰의 계기이자, 진정한 자아에 대해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면 런던에서 샘과 릴리를 통해 얻은 건 또다른 레벨의 자아로 나아가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사실 위키피디아의 플롯 서머리만으로는 전작에 흐르는 전반적인 아우라를 잡아낼 수 없었다고 고백해야겠다. 하지만 윌과의 관계를 차치하고서라도, 별개의 이야기로 읽어도 조조 모예스의 <애프터 유>는 충분히 핍진성 넘치는 다양한 스토리라인을 구사하고 있다. 결말까지 도대체 이야기를 어떻게 이끌어 가려고 이런 구성으로 내달리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이야기의 힘이라고나 할까. 지나친 스포일은 하고 싶지 않지만, 전작이 비극적 결말로 마무리되었다면 이번 <애프터 유>는 상대적으로 희망찬 해피엔딩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나 행복해라며 릴리에게 루가 보낸 문자야말로 루의 앞날을 예고하는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여주인공 루에게 보통 사람들이라면 평생에 한 번 오기 힘든 기회들이 우수수 떨어진다는 설정과 윌의 딸로 등장한 릴리에 관한 부분이 너무 자극적이라는 점 그리고 샘과의 재결합을 위해-어쩌면 나중에 영화화를 위해 준비되었을 지도 모르는- 충격적인 총격장면이 개인적으로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애프터 유>가 넌픽션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않은가.

 

어쨌든 간만에 긴장감 넘치는 로맨스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 원작자인 조조 모예스가 각색을 맡고 다음 주에 개봉 예정인 <미 비포 유>의 영화 트레일러를 봤는데, 에밀리아 클라크가 맡은 루 역은 정말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트레일러 중에서 루가 윌의 휠체어에 타서 360도 회전하며 대화하는 장면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윌이 루에게 그런 멋진 삶을 살도록 선물해 줬다면 <애프터 유>에서 자신의 많은 부분을 희생하며 윌의 딸인 릴리를 위해 헌신하는 루의 진심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하는 그런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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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디파지토리에서 설문조사하고 10% 쿠폰이 적용되나 안되나 테스트 해보다가 얼떨결에 그만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영문판을 사게 됐다. 맨부커상 받았다고 하니 궁금하기도 해서 누가 사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해서 하나 사야지 싶긴 했는데 이렇게 사게 될 줄이야. 맨부커상 수상소식을 들은 날 바로 주문을 했는데 이제야 도착했네 그래. 어쨌든 맨부커상 수상으로 한국 문학이 잘 팔린다고 하니 좋은 소식이긴 하다. 그것도 이즘에 새로 책을 낸 작가들의 타이밍 문제기도 하겠지만. 그런 점에서 <종의 기원>을 발표한 정유정 작가가 최대 수혜자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블로그 이웃님의 서평을 보면, 전작보다 실력이 일취월장했다는 평도 있으니 한 번 읽어 보고 싶기는 하다.

 

요즘 읽어야 하는 책들이 부쩍 늘어났다. 욕심에 이책저책 서평 신청을 하다 보니 책들이 우수수 떨어지는구나 그래. 오늘도 조조 모예스의 <애프터 유>가 도착했다. 월요일에도 두 권이나 왔는데 <금연학교>는 이미 다 읽었고,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도 열심히 읽고 있다. 밸런스를 맞춰야 하는데 한 번 또 진도가 나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쉭쉭 나가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한창 잘 나갈 적에는 정말 마구잡이로 서평도서를 마구 신청했었는데 이젠 짬밥이 늘어서 그런지 선별해서 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욕심이 날 때도 있지만 스케줄을 보고 신청하게 됐다.

 

그 외에도 다음달 달궁 독서모임 책인 샐린저의 <아홉가지 이야기>도 발표가 나고 나서 냉큼 알라딘 헌책방에 가서 업어왔다. 오늘도 가서 절판된 로저 크롤리의 지중해 시리즈 사와야 하는데. 어제 보고서도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

 

 

살바도르 아옌데의 평전도 오늘 새벽까지 해서 40% 정도 읽었다. 모바일 독서기록장을 이용하니 아주 관리가 편하다. 이 평전의 저자 말대로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기저기서 들은 대로 알고 있었지만, 삼대를 내려오는 칠레 명문가 금수저 집안의 자제로 의사이면서 뛰어난 사회주의자(아니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정치가로 조국 칠레를 이상국가로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로 노력하다가 결국 사악한 기득권층과 결탁한 군부독재자들의 반란으로 사회주의 혁명의 이상을 접어야 하는 아옌데의 일대기를 읽으면서 최근에 7주기를 맞이한 비슷한 운명을 겪은 비운의 정치가의 환영을 보는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선거로도 얼마든지 정권교체가 가능하다는, 기존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을 역사상 최초로 보여준 위대한 정치가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애프터 유>도 분량이 상당한지라 밀릴 까봐 받아 들자 마자 몇 쪽을 읽었다. 나의 독서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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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연학교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55
박현숙 지음 / 자음과모음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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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청소년문학을 읽었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담배 피우는 사람들의 심리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흡연에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그런데 흡연자가 미성년자라면? 그건 또 다른 이야기가 아닐까.

 

<금연학교>의 주인공 감성돈(감성돔이 아니다)은 올해 열여섯 살 먹은 방년의 청춘이다. 준영이라는 좋은 친구를 둔 덕분에 녀석은 흡연의 세계에 입문하게 됐다. 무언가 자신에게 금지된 일을 할 때, 멋져 보이는 허상에 대한 신기루라고 해야 할까. 우리의 주인공 성돈이는 그 나이 또래의 청소년들처럼 담배 맛도 모르면서 담배 피는 스타일과 폼에 현혹되어 주식투자하다가 그 좋은 직장도 그만 두고, 집까지 날려 먹어 월세방에 살며 택시운전과 대리운전으로 생계를 잇게 된 아빠의 담배를 몰래 훔쳐 피운다. 이 시대 무능력한 가정의 표상처럼 보이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손찌검도 마다하지 않는 폭력적인 독재자의 모습으로 군림한다. 그 또한 오래 가지 못하겠지만.

 

뭐 이 정도까지는 순탄한 진행이다. 문제는 성돈이가 어느 비오는 날, 암만동 놀이터에 쓰러져 있던 아저씨의 품에서 담배를 슬쩍하는 장면에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살인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이거 놀라운데, 도대체 타이틀인 금연학교 이슈와 느닷없는 살인사건을 어떻게 반죽하겠다는 거지?

 

박현숙 작가는 흔히 청소년소설에 등장하는 빤한 교훈을 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사실 그거야말로 꼰대들의 전매특허가 아닌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척하다가 뒤통수치는. 대신 작가는 요즘 십대 아이들이 느끼는 욕망의 저변을 가감 없이 훑는 방식으로 접근을 시도한다. 욕이 빠지면 문장구성이 되지 않는 듯 육두문자를 남발하는 그네들의 언어생활로부터 시작해서, 이미 구름과자(담배)맛을 알아 버린 아이들의 심리상태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우리 어른들도 문제가 풀리지 않거나, 속 답답할 때 그리고 스트레스가 쌓일 때 맛있는 담배를 찾지 않는가. 물론 습관적으로 필 때도 많지만. 바로 그 지점에 소설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어른이나 아이나 고민의 차이와 정도가 있을 뿐, 다를 게 없노라고.

 

잘 나가던 성돈이의 아버지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원래부터 담배를 즐기는 골초였지만, 남부러운 대기업에 다니다 일확천금의 유혹에 빠져 직업을 잃고 가산마저 탕진한 뒤에 택시 및 대리운전으로 생업을 유지하지만 모양 빠진다고 절대 택시 유니폼을 입지 않는다고 했던가. 자신의 주변 돌아가는 꼴을 보면 절로 담배 생각이 날 것 같다. 물론 원인제공자는 본인이어서 더 답답하겠지만. 성돈이의 담임선생님도 마찬가지다. 그라도 어디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성돈이와 준영이 같이 매일 같이 문제를 하나씩 펑펑 터뜨리는 아이들을 상대하다 보면 가장 쉬운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해결할 수 있는 게 바로 담배가 아닐까. 성돈이와 준영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암만동 놀이터 사건에 본의 아니게(?) 연루된 주인공 성돈이와 서라 그리고 애연가 담임선생님까지 싸잡아서 금연학교로 전학 보낸다. 그 와중에 성돈이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 준영이(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연초 경력이 자그마치 5년이나 된다)가 급성폐렴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현실을 보고, 아버지마저 컬럭컬럭하는 해소 기침을 달고 사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슬슬 자신의 폐가 걱정되기 시작한다. 이 설정 정말 쎄다. 하긴 이 정도로 상황을 몰고 가지 않으면, 당장 미래가 보이지 않는 친구들에게 씨가 먹힐 리도 없겠지만. 그 와중에 잠재워둔 미래에 대한 꿈을 슬쩍 비치는 건 역시 청소년소설다운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친구 준영이와 눈물겨운 우정을 쌓아 가고 주인공 성돈이가 어떻게 해서 담배를 피우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그리는 분량에 비해 후반부 설정이 좀 아쉬웠다. 제목이 금연학교라면 무언가 금연학교에서 벌어지는 다량의 에피소드를 기대했는데 신나게 막 롤러코스터를 즐기려고 하는 차에 그만 ‘하차’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왜 금연을 해야 하느냐는 소설적 당위성을 위한 다양하면서도 재밌는 여러 장치에 비해 뒷심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도 21세기 한국 청소년들이 느끼는 생각을 조금 엿볼 수 있었다는 점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모두가 행복한 해피엔딩이니 더 즐겁지 아니한가. 그래도 백해무익한 담배는 피지 말자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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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늑대의 시간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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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올 예정이라고 했을 때부터 기대한 책이었다. 어제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갔다가 신간 코너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는 냉큼 빌려왔다. 이미 누가 봤는지 책 접힌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 당장 읽어야 할 책이 없어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김경욱 작가는 1982년 4월 26일 경상남도 의령군 궁류면에서 벌어진 이른바 우순경(우범곤) 사건을 모티프로 삼았다. 소설을 읽으면서, 인터넷에 나와 있는 우순경 사건과 비교해 보니 주인공의 이름과 실제 지명들을 픽션화했다. 소설의 특이한 점은 가해자의 목소리 대신, 차례대로 등장하는 피해자들의 입장이라는 다양한 차원에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 굴곡진 한국사의 이모저모를 대입시켰다는 점도 눈여겨 볼 만하다.

 

기이하게도 소설은 1938년 미래 미군 제식소총 M1 카빈을 개발하게 되는 밀주업자 제이슨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김경욱 작가는 미국 체류 하던 중에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총기사건을 계기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했던가. 기존의 윈체스터 라이플에서 가스압력으로 발사속도를 개량한 신형 총기 개발에 얽힌 스토리가 44년 뒤 동방의 어느 나라에서 벌어진 무시무시한 총기난사사건의 원형을 제공했다는 가정이라고 해야 할까.

 

실제 지명을 바꾼 궁지면 총기사건은 어려서부터 열패감에 사로잡힌 한 순경의 치정으로부터 시작됐다. 자칭 해병대 특등사수이자 빛나는 청와대 근무 이력을 가진 황 순경이 촌마을의 순경으로 발령이 나면서부터 비극은 잉태되었다. 혼례도 올리지 않은 채, 마을처녀와 살림을 차린 것부터 마을의 여론을 이끄는 오피니언 리더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술만 마시면 ‘미친 호랑이’가 되는 성정도 한몫 거들었다. 박봉의 월급에 촌구석에서 자신을 업신여긴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우 순경, 아니 황 순경은 상급자가 마을을 비운 틈을 타서 지서 무기고에서 탈취한 카빈 소총과 수류탄 그리고 다량의 실탄으로 무장하고 끔찍한 사람사냥에 나선다.

 

당시 사건을 다룬 기사를 비교해 보면 김경욱 작가는 사실에 충실히 기반한 서사를 이끌어 나간다. 황 순경은 술 마시고 홧김에 저질렀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한 계획으로 범행을 주도한다. 우선 마을과 외부를 연결하는 우체국에 난입해서 직원들에게 총을 난사하고, 문제의 발단이었던 아내 손미자와 처식구들을 몰살시킨다. 그 뒤로도 황 순경은 불이 켜진 집들을 찾아다니며 범행을 계속한다. 김경욱 작가가 후기에서 썼듯이 빛이 어둠을 불러들인 격이라고 해야 할까. 주민의 치안을 담당해야 하는 경찰관이 어둠을 쫓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어둠 그 자체였다는 사실은 당시 지배권력이었던 신군부의 모습과 자웅동체로 다가왔다.

 

사건이 발생했다는 보고를 접수하고 나서도 초동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해 피해자수를 늘린 치안 및 행정라인의 무능은 32년 뒤에도 그대로 반복됐다.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탈취한 정권은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어불성설의 정치적 구호인 정의구현을 외쳤지만, 실제 이런 희대의 사건이 발생하자 사실을 감추기에 급급했고 언론통제와 지역개발에 따른 물질적 보상이라는 당근으로 비극을 덮어 버렸다. 김경욱 작가는 그에 앞서 날벼락이 떨어진 궁지면에 조용하게 살던 이들이 안고 있는 우리사회 제반에 걸친 이슈들에 착점을 맞춘다.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시골전설을 믿고 삼대독자 아들을 법대생으로 만들었지만, 신학을 공부해서 신부가 되길 원하는 아들은 황 순경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고 만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의 아들을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초신 전투(장진호 전투)에서 잃은 수잔 여사와 펜팔을 우정을 쌓아 가던 전화교환원 손영희 역시 비명에 스러진다. 마구잡이로 벼락같은 불을 내뿜던 해병대 특등사수의 카빈 소총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열패감에 젖은 이십대 청년의 분노는 그렇게 조용한 시골마을을 집어삼켜 버린 것이다.

 

작가는 <개와 늑대의 시간>을 단지 일개 싸이코패스의 일탈적인 행동으로 분석하지 않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던 모든 문제들을 되돌아보게 하는 구조로 독자를 인도한다. 궁지면은 어쩌면 압축 고도성장으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가 안은 부조리의 축소판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한국전쟁 이후 남도를 휘젓던 마지막 빨치산 부대원 56명 전원 사살로 끝난 비극의 현장이기도 했고, 제로센 전투기를 몰던 가미카제 특공대원에서 중국인민해방군의 일원으로 변신해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토굴생활을 하던 전직 빨치산도 등장하고, 보도연맹원으로 무고하게 전쟁 중에 학살당한 후예로 숨죽이며 살던 이들의 한 맺힌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조국근대화라는 미명으로 월남전에 용병으로 참전했다가 ‘에이전트 오렌지’의 후유증으로 다리를 잃은 ‘두팔로걸어’ 베테랑의 전설도 씁쓸하기만 하다. 비극의 현장과 역사적 담론을 오가며 종횡무진 달리던 작가는 강호의 초절정 고수 파천황을 창조한 무협지 대가 계룡생을 숭배하던 고교생의 이야기로 큰 웃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신군부의 3S 정책의 일환으로 한창 인기몰이를 하던 프로야구계에 진출하려던 초등학생 고동배의 이야기로 비극의 서사는 마무리가 된다.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김경욱 작가 특유의 눙치는 유머감각을 엿볼 수 있는 <개와 늑대의 시간>은 질곡으로 가득한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는 의식을 선사한다. 작가는 건국 이래 최악의 총기난사 사건이라는 심각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이야기를 나락으로 떨어뜨리지 않는 절묘한 균형감각을 보여준다. 오히려 다양한 개성을 가지고 차례로 나오는 등장인물들에게 소설적 핍진성을 부여해서 우리 사회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한 계기를 제공해준 점을 무엇보다 높게 평가하고 싶다. 모쪼록 어둠 속에서 빛을 구도하는 그의 소설적 여로가 계속해서 빛을 발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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