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회사 송도 이사가 어제 끝났다.

이번 주 내내 이삿짐 싸고, 정리하기를 반복했는데... 가서도 걱정이다.

 

어제 첫 출근이었는데, 느즈막하게 가서 헬게이트 오픈 꼴은 보지 못했다.

다만, 사무실에 이너넷과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왓 더!!!) 일을 못한 판이었다. 세상에 만상에나.

 

그래도 아수라장 속에서 내 피씨를 찾아, 나머지 부품들과 공유기를 연결해서 상무님 방에 가서 일단 급한 불은 끌 수가 있었다.

정말 아스트랄의 연속이었다.

 

점심은 사쪼가 코스트코에 가서 사온 대형 피자와 섭 그리고 치킨 셋트로 그야말로 배가 터지게 먹었다. 피자는 너무 커서 한 조각 먹으니 이미 나가 떨어질 것 같았다.

 

어제 송금을 했어야 했는데, 환율이 오르락내리락해서 이사 가서 해야지 했다가 낭패를 봤다. 팩스도 보내고 그래야 하는데... 이너넷과 전기가 안되는 마당에 당연히 팩스복합기를 쓸 수가 없었지. 이럴 때를 대비하야 정말 오래 전에 준비해둔 웹팩스가 빛을 발했다.

 

게다가 5장의 수입면장 중에서 금액이 다른 한 건을 찾을 수가 없어서 유니패스에 들어가서 모든 서류들을 다 다운 받아서 하나하나 찾아봐다. 아놔~ 일이 끝이 없구만 그래. 그렇게 오후 3시쯤 내 일을 마치고, 본격적인 정리 작업에 돌입.

 

이 인간들이 종이와 서류로 보이는 것들을 모두 내 방에 때려 넣어서 발 디딜 틈도 없을 지경이었다. 믿을 수가 없군 그래. 일단 폐기할 것들과 책장에 넣을 것들만 대강 분류해서 넣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그래도 뷰 하나는 끝장이더라.

 

다들 좀 일찍 가긴 했는데, 가기 전에 사단이 그거 마무리하느라 거의 6시가 다돼서 사무실을 탈출할 수가 있었다. 집으로 복귀하기 전에 그래도 송도 첫날인데 싶어서 램프의 요정에 들러서 찰스 부카우스키 양반의 시집도 하나 사고... 이거 생각보다 재밌더라. 원래 노리고 있던 커트 보네거트 아재의 <타이탄의 세이렌>인가는 누가 업어 갔더라. 이 동네에도 나랑 비슷한 책 취향을 가진 닝겡이 사는 겐가.

 

송도가 물가가 비싸긴 비싼 모양이다. 푸드트럭 버거하 9,800원이라니. , 램프의 요정을 가는 길에 버거와 프렌치 프라이를 뜯으며 후안 룰포의 <뻬드로 빠라모>를 읽고 있는 독서중독자 1을 발견했다. 동족을 만나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카메라가 마려웠으나 동족인 독서중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싶어 참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을 잘 찾아 볼 수 없는 촌마을인 우리 동네와 달라, 마음이 흐뭇해졌다. 6,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술집으로 카페로 식당으로 그들의 발걸음에 보기에 참 좋았더라.

 

그리고 나서 한 618분 정도에 송도 탈출에 나섰는데 예상 그대로 도로는 헬게이트가 이미 열려 있었다. 먼저 출발한 동료들에게 도로 사정을 물으니 교통사고까지 나서 멍멍이판이었다고. 송도국제교부터 신시아까지 빡쎘다. 여길 매일 같이 다닐 생각을 하니 좀 갑갑했다. 집에 다 와서도 톨게이트에 밀린 차들을 보고 한숨이 나왔지. 난 우회전만 하면 되는데 나의 앞길을 왜 이렇게 막는 거지.

 

그동안 걸어 다니고, 버스 타고 다니고 하다가 이제 짤 없이 매일 같이 두 시간 운전을 할 판이다. 거지같다.


[뱀다리] , 시인이라기 보다 기인이라고 부르고 싶은 부카우스키 양반의 시집을 기대 이상이었다. 산문시인가? 미국 서점에서 가장 많이 털리는 작가라고. 아니 돈 주고 사가면 되지 또 털어가는 건 뭐람. 문득 원문시는 어떤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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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4-29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고생하셨네요...주말엔 편히 책 읽으시며 힐링 하세요^^
저도 그 이름 어려운 양반 시집 눈팅하고 있었는데 기대 이상이시라니...ㅎ

레삭매냐 2023-04-30 08:34   좋아요 1 | URL
어느덧 그렇게 찰스 부카우스키
의 팬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두고 읽지 못한 책이 제법
되지 싶습니다.

2023-04-29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3-04-30 08:35   좋아요 0 | URL
그랬군요 -

일찍 출발하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늦게 가거나 나오거나
그게 답이지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겨울호랑이 2023-04-29 12: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사무실 이전 하셨군요... 좋은 터에서 멋진 출발하시길 빕니다. 혹 다니다 보면 도로사정이 나은 곳도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분 전환하는 연휴 되세요!

레삭매냐 2023-04-30 08:3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그나마 노동절 연휴가 끼어
있어서 한 숨 돌렸습니다.

다른 방향으로 다리라도
하나 생기면 좋겠습니다.
공항과 남동공단으로 가는
화물차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stella.K 2023-04-29 1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송도가 물가가 비싸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은데 과연 그렇군요.
보거가 그렇게 비싼 줄 몰랐습니다.ㅠ
그런 와중에도 책을...!
저도 부코스키 책 함 읽어봐야겠군요.
수고 많으셨네요.

레삭매냐 2023-04-30 08:36   좋아요 1 | URL
책쟁이의 숙명이지효 ㅋㅋㅋ

다른 건 몰라도 책은 사들인다.

사람들의 물결을 보니 촌사람
기분이 그만 좋아졌답니다 헷.

고양이라디오 2023-04-30 0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님 저 송도 살아요. 웰컴두송도!!!!!!!!!!

레삭매냐 2023-05-01 09:29   좋아요 1 | URL
오오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괭이라죠님!

페넬로페 2023-04-30 09: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 인천공항 다녀올 일이 있어 송도쪽 지나왔는데 완전 고층 아파트촌이더만요.
송도 기운받아 대박 나시기 기원합니다.
송도는 제가 좋아하는 성동일, 김광규 배우가 사는 곳이기도 합니다 ㅎㅎ
제가 아저씨타입 좋아하나봐요~~
그 와중에 책방 들리시는 레삭매냐님은 진정한 독서가이십니다^^

레삭매냐 2023-05-01 09:30   좋아요 1 | URL
광규행임도 송도 사시나 보네요 :>
문득 궁금해서 나무위키를 검색해
보니 육군 중사 출신이라고 하네요.

책쟁이는 책방을 걸를 수가 없지요 헷.

새파랑 2023-04-30 09: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송도로 이사 하셨군요 이사하는게 정말 일인데 고생하섰습니다. 알라딘 우주점 송도점 가보셔야 겠습니다~!!

레삭매냐 2023-05-01 09:31   좋아요 1 | URL
제가 이사한 것은 아니구요,
회사가 송도로 이사갔답니다.

책방도 이미 들러서 찰스 부
카우스키 아재의 책도 샀습죠.

coolcat329 2023-05-01 1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고 앞으로 출퇴근 힘드시겠어요. 근처에 책방 있는 걸로 위로가 되실까요?😥
올해는 저도 찰스 부카우스키 책 꼭 읽어보렵니다.
힘내세요!

레삭매냐 2023-05-05 08:37   좋아요 1 | URL
요 며칠 해 보니 출퇴근길이 너무
빡십니다.

그래서 탄력근무제를 적용해서
저는 7시에 출근하고 있답니다.
문제는 퇴근이 4시에 되지 않는
다는 치명적 결함이 크허 -

빡쳐서 며칠 전에 중고서점에
달려가 책을 세 권이나 업어
왔답니다.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3-05-05 17: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회사가 송도로 이전하시면 출퇴근 하시나요. 그쪽으로 갈 일이 있으면 조금 일찍 출발하는 게 마음이 편해요. 가끔 차가 막히는 구간이 생길 때도 있어서요. 자주 가는 편은 아닌데, 프랜차이즈 등 많은 편이라서 생각만큼 비싸지 않은 곳도 찾아보시면 있을거예요.알라딘 송도점은 나중에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레삭매냐님, 편안한 휴일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3-05-06 09:50   좋아요 1 | URL
말씀해 주신 대로 매일 같이
송도로 출퇴근하고 있답니다.

도로는 그야말로 헬이구요.
그래서 저희는 탄력근무제를
적용해서 7시 퇴근으로...

문제는 정시 퇴근이 쉽지 않
다는 거죠 ㅠㅠ 일을 더 하게
되는 치명적이 크헉

감사합니다.
 
열외인종 잔혹사 -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주원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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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다. 한겨레문학상 14회 수상작이라고 하는데, 14년 만에 다시 책이 나왔다. 보통 책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읽곤 하는데, 문득 재밌는 책이 읽고 싶어졌다. 호모 부커스의 직감으로 이 책이 재밌을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이럴 때, 책쟁이는 즐겁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작과는 세 번째 만남이었다. <열외인종 잔혹사>라는 다소 알쏭달쏭한 제목의 이 책의 저자는 주원규 씨라고 한다. 그의 이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신학을 전공한 목사님이라는 점이었다. 과연 소설 쓰는 목사님이 문학이라는 가상의 시공간 속에서 어떤 스토리텔링을 펼쳐 보여 줄지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기대에 부풀었다.

 

<열외인종 잔혹사>1124일이라는 특정한 날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는다. 그리고 네 명의 주요 인물들을 시간의 흐름의 구성에 내맡긴다. 월남 파병군 출신으로 연금생활자이자 극우 보수논객을 자처하는 장영달 옹이 첫번째 타자로 등장을 한다. 일흔 살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소위 좌빨척결을 지상과제로 삼는 범상치 않은 캐릭터다. 요즘 말하는 태극기 부대의 원형 같은 인물이라고나 할까. 평상복처럼 걸치는 군복이 그렇게 잘 어울린다고. 두 번째 주인공의 이름은 윤마리아. ‘이태백세대의 전형으로 외국계 제약회사에 3개월째 식대와 교통비조차 지급받지 못한 채 인턴에서 정규직 채용이 되기 위해 착취당하고 있다.

 

세 번째 인물은 노숙생활 5년차의 김중혁이다. 서울이라는 공간 속에 하루하루의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물로, 동료 광록과 함께 무료급식소 그리고 쓰레기통 사냥에 나선다. 마지막으로 가장 어린 캐릭터인 기무. 노랑머리(이제 노랑머리는 좀 진부하지 않은가)17살 청소년으로 장영달 옹의 말을 빌리자면 싸가지는 애시당초에 발톱의 때처럼 생각하지도 않는 무적(無籍) 청소년의 표상이다. 우연한 기회에 피씨방에서 보게 된 온라인 게임 이벤트에 뛰어 들었다가 본의 아니게 대한민국 자본주의 심장 코엑스몰에서 펼쳐지는 상상을 초월한 카니발의 세계로 초대받게 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이들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철저하게 주류사회에서 소외된 아웃사이더들만을 골라서 주인공으로 삼았는지 작가의 픽업에 탄복할 정도였다. 하지만 어디 삶과 행동들이 궁상맞다고 해서, 그들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욕망들도 저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로 그 시점에 주원규 작가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오래 전 유행하던 주술적 리얼리즘을 연상시키는 공간이동을 시도한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 마콘도가 있었다면, <열외인종 잔혹사>에는 서울 그 중에서도 자본주의 심장이자 타지마할(나름 참신한 표현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메카라는 표현만 할까 과연?) 코엑스몰로 이 화려한 캐릭터들을 긁어모은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각 캐릭터들을 등장시키고, 친절한 분석에 그럴싸한 개연성마저 확보하는데 성공한 작가는 이제 본격적인 무대인 코엑스몰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전반부가 21세기 대한민국의 리얼리즘을 돌이켜 보는 시간이 중심이었다면, 코엑스몰로 대변되는 후반부는 십헤드 카니발(sheep head carnival) 다시 말해 양머리들이 총을 들고 다수의 인질들을 잡고, 총기난사가 벌어지는 공간이 중심이 된다. 그나마 전반부를 지탱해오던 사실주의 블랙유머와 냉소들은 공간이동을 하면서 혼돈 그 자체로 진화한다. 도대체 양머리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왜 그런 난장판을 벌이는지 판단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어쩌면 그것조차도 작가의 철저한 계산 아래 준비된 것일까?

 

각각 1부와 2부로 나뉜 <열외인종 잔혹사>의 서사구조는 참 경이롭다. 우선 책의 절반가량에 해당하는 1부에서는 코엑스몰로 주인공들이 모이기까지 5분이나 10분 단위의 시간의 흐름의 서술구조를 선보인다. 딱 두 번 5분과 10분이 아닌 시간이 등장하는데, 한 번 찾아보시라 나름 재미가 있다. 물론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휘리릭 다 읽은 책의 책장 넘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2부에서는 작가 시점의 서사에 중점을 둔다. 이런 구조는 마치 다른 두 권의 책을 읽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작가가 의도한 대로 혼란스럽다면 그 또한 글쓴이의 트릭에 빠진 것이겠지만.

 

작가가 구사하는 냉소적이면서도 설명조의 작법은 예전에 다시 읽었던 천명관 작가의 <고래>가 연상이 되었다. 마치 무성영화의 변사가 신파조의 설명을 곁들이는 그런 개입이 느껴졌다고 해야할까? 물론 거북살스럽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오히려 지독한재미가 느껴졌다. 어쩌면 하급문화에 대한 로망이라고 해야할까? 작가의 대리인들인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상스러운 육두문자들이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졌다.

 

참 왜 작가는 2부의 주무대를 최악의 도시서울의 그 많은 장소 중에서 유독 코엑스몰로 정했을까? 그건 아마도 그 공간이야말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심장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가 아닐까? 아니면 소설의 어느 부분에선가 나온 것처럼, 모든 이들이 차 없이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 수단으로 액세스가 가능하다는 이동을 위한 편리의 발현이었을까? 어쨌건 실제로 그렇게 많은 인파들이 몰리는 코엑스몰에서 상상을 초월한 양머리 카니발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확실히 <열외인종 잔혹사>는 지독하게 재밌다. 동시에 민주주의가 역주행을 감행하고, 빈부의 격차해소는 요원해 보이기만 하고, 변변한 일자리를 찾는 건 정말 백사장에서 바늘찾기 보다 점점 더 어려워져 가는 현실 속의 처절한 리얼리즘에 대한 작가의 냉소적인 패러디가 여기저기 아주 절절하게 배어 있다. (발표 당시) 신예작가라 그런지 결말 부분이 좀 아쉽긴 했지만, 기발한 상상력의 현현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아직 읽어 보시지 않았다면 말을 말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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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4-21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잘 읽다가 결말 부분이 아쉬울 때 진짜 아쉽죠.^^

레삭매냐 2023-04-29 09:51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렇죠 !!!

마무리를 잘 짓는 것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과연 넷플릭스가 다 해먹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초창기 시절의 넷플릭스는 온라인으로 DVD를 빌려 보는 그런 플랫폼이었다. 그리고 보너스도 영화 보면서 먹으라고 아마 전자렌지에 돌려 먹는 팝콘도 한 봉지 보내줬었자. 비디오나 DVD로 영화 보던 시절은 이제 지나가고 모든 게 스트리밍이 잡아먹었다. 모든 콘텐츠는 이제 소장보다 정말 시청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보고 잊어 버리게 되는. 물론 나처럼 여전히 소장에 목 매다는 이들도 있겠지만.

 

지난 주말에 본 넷플릭스 <길복순>은 클리셰이의 향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혹평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전도연이 맡은 전설의 킬러 길복순은 너무나도 뻔하게 쿠엔틴 타란티노의 걸작 <킬 빌>의 브라이드가 연상됐다. 특히 엔딩에서 엠케이엔터의 대표 차민규(설경구 분)와 싸우기 위해 일본도를 들고 엠케이 본진을 찾아가는 장면에서는. 공통점은 아주 현란하게 펼쳐지는 폭력과 유혈이고.

 

어디선가 보니 액션 영화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또 액션을 뺄 수 없는 그런 장르영화가 아닐까 싶다. 일단 오프닝부터 화려하지 않은가. 일본 야쿠자 출신의 오다 신이치로(황정민 분)가 길바닥에서 깨어난다. 간사이의 호랑이(토라)라고 했던가. 열도 출신의 토라와 반도 출신의 여성 킬러 사이에 일합이 이루어진다. 간사이 호랑이는 살벌한 일본도로 그리고 우리의 킬복순 씨는 이마트에서 산 3만원짜리 도끼로 맞선다. 이것도 PPL로 봐야 하나. 참 마트 문닫을 시간이라 오다 씨에게 총알을 선사하고 깔끔하게 현장을 떠나는 복순 씨.

 

그리고 보니 넷플릭스는 국내 공중파 방송들의 막무가내식 PPL 대신 요소요소에 세련된 방식의 광고를 들이민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하이네켄을 마시는 장면에서는 나도 당장 뛰쳐나가 하이네켄을 사와야 하나 1분 정도 고민을 했다. 물론 나의 게으름은 그걸 용서하지 않았지만 말이지.

 

엠케이 엔터 소속 전설적 킬러 복순 씨의 문제는 살벌한 킬러들과의 대결이 아니다. 아니 그녀는 절대 자신은 죽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무장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 않고서는 마트 문닫을 시간이나 딸 길재영의 사교육에 신경쓸 시간이 없을 테니 말이다. 킬러 세계가 <길복순> 서사의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은 킬러 비즈니스 못지않게 빡센 육아 혹은 자녀 교육의 세계라는 게 아닐지.

 

아이돌들이 7년 계약이라는 마의 벽을 넘지 못하는 것처럼 복순 역시 재계약 시즌에 돌입했다. 그리고 은퇴를 생각 중이다. 아마 그동안의 업보로 자신들이 구원받을 일이 없으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걸까? 엠케이 엔터의 또다른 실력자 차민규 대표의 동생 차민희는 철저한 비즈니스 우먼이다. 자기 회사의 에이스 복순 대신 새로운 인물들로 세대교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뚝심으로 밀어 붙인다. 그렇다면, <길복순>에서 빌런은 차민규라기 보다 배후조정세력인 차민희가 아닐까.

 

한편, 재계약을 앞두고 차민규는 자사의 최고 에이스 복순에게 두 건의 의뢰 중 하나를 고르라고 말한다. 서울과 블라디보스톡. 아마 후자를 선택했다면, 안온한(?) 복순의 일상이 유지될 수 있지 않았을까? 고의로 의뢰를 실패한 킬러는 업계에서 세운 규칙에 따라 처리한다는 전례를 따라야 한다는 건 안비밀이다. 사실 이 또한 엠케이 엔터가 군웅할거하고 무적자 킬러들의 난립을 막고 독과점하겠다는 선언의 다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모두가 알고 있다. 아 그렇구나, 독과점은 모든 사업가들이 꿈꾸는 일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심지어 살입청부업계에서도.

 

데뷔를 앞둔 엠케이 인턴 김영지와 사건 처리에 나선 복순은 의도적으로 실패하고 그녀의 위기가 비로소 시작된다. 아니 이미 위기는 그전부터 시작되었는 지도 모르겠다. 싱글맘인 복순은 딸 길재영과 사사건건 부딪힌다. 그녀에게는 킬러 사업보다도 더 어려운 게 아마 아이 키우기가 아닐까 싶다. 이 또한 하나의 유머 코드로 읽어야 할까? 그만큼 아이 키우기가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영화는 말하고 싶은 게 아닌지.

 

길재영이가 학교에서 벌이는 사건 사고는 복순이 마주하게 된 위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길재영의 세계에서는 또 다를 지도 모르겠다. 엠케이 차민희 이사는 의뢰에 실패한 복순을 제거하라는 오더를 날린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희희낙락하던 킬라 동료들은 엠케이의 공식 오더를 받는 순간 바로 돌변해서 복순을 죽이려고 달려든다. 아니 인생사란 이렇게 비정하단 말인가. 특히나 킬러들의 세계에서는 더더욱. 다구리를 당할 판이었던 복순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편으로 돌아선 인턴 김영지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한다. 개인적으로 <길복순>에서 가장 마음에 든 액션 시퀀스였다. 그리고 피할 수 없었던 차민규 대표와의 일전에 나선다.

 

영화의 오리지널리티는 어디에서 오는가. 아까 동료들과 이야기하면서 물어 보니 혹평이 많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킬 빌>을 떠올리게 한다는 말도 나왔다. 그러니까, 어쩌면 뛰어난 여성 킬러가 등장하는 <길복순>은 출발부터 타란티노의 <킬 빌>의 여전사 우마 서먼과 싸워야 하는 숙명이었다. 그리고 그 한계를 뛰어 넘지 못하고 아류작이 되었다. 그 외의 숱한 클리셰이에 대해서는 이미 다 알고 있으니 굳이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너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담으려다 그만 이도저도 아닌 잡탕밥이 된 건 아닌지 좀 아쉽다.

 

[뱀다리] 영어 제목 Kill Boksoon이 지닌 의미도 아주 간단한다. 복순을 죽여라. 길복순의 언어유희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영화가 어떻게 흘러갈 지에 대해 암시하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해서 복순이 천하무적이라는 설정이 아니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처음부터 오다 신이치로와의 대결에서도 그리고 엔딩의 차민규 대표와의 대결에서도 언제든 상대방에게 당할 수 있다는 암울한 미래상 역시 어디 다른 영화에서 차용한 거라고 하던데, 귀찮아서 찾아보지는 못했다. 영화에 대한 나의 열정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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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3-04-19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것 봤어요!! 전 전도연 팬이지만 솔직히
그녀의 이미지가 <일타강사>에서 본 것과 그닥
변함이 없어서 실망했어요...
더구나 언급하신 모든 것들에
동의하고...
그리도 <킬 빌>을 넘어설 순 없겠죠,,,
하지만 이 영화에서 제가 높이 사는 것은
전도연 딸아이의 평범하지 않은
커밍아웃(?)이에요.
한국의 사고방식이 많이 변했다는 것이
느껴지면서 괜히 좋더라구요.^^;;

레삭매냐 2023-04-19 15:24   좋아요 0 | URL
전도연 배우의 연기 변신 도전
한 부분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
해주고 싶지만, 아쉬운 부분은
있는 것 같습니다.

<킬 빌>을 넘어서기란 진차 -

언급해 주신 부분에 대해서는
사고가 유연해지지 않았나
추정해 봅니다.

페넬로페 2023-04-19 1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혹평이 많아 보지 않기로 했는데 레삭매냐님의 리뷰로 보고 싶은데요 ㅎㅎ

레삭매냐 2023-04-19 15:26   좋아요 2 | URL
저도 혹평 때문에 걱정을 하긴
했는데, 나름 갠춘하지 않았나
싶더라구요 ^^

coolcat329 2023-04-19 14: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길복순 봤어요. ㅎㅎ
제가 타란티노의 팬인데 여기서 너무 많이 보이더라구요.
시덥잖은 대화 나누다 갑지기 폭발하는 장면이나, 설정은 킬 빌이랑 참 비슷하죠.
후배 킬러 상대로 매직팬 가지고 싸울 때는 본 시리즈 맷 데이먼 싸움하고 비슷했구요.
근데 무엇보다 왜 이리 촌스럽게 보이는지요.
저는 많이 실망했답니다.

레삭매냐 2023-04-19 16:38   좋아요 1 | URL
앗 그리고 보니 인턴 킬러
와의 대결에 매직펜 뚜껑샷이
제이슨 본을 모방했나 보네요.
어쩐지 어디선가 본 듯하다
싶었는데 말이죠.

어느 장면에서 참 시덥지 않
다해서 빵 터졌었는데... 기억
이 나질 않네요.

고양이라디오 2023-04-20 1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샥매냐님이 나쁘지 않았다, 괜찮았다고 하시니 궁금하네요ㅎ

레삭매냐 2023-04-29 09:51   좋아요 1 | URL
호평 대신 혹평이 더 많은 느낌
이지만, 전 그런 대로 만족하는
것으로 :>
 
세상 끝의 세상 - ‘세상 끝’으로 내몰리는 고래와 그 고래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ink books 8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써네스트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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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반세기도 전에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자기 인생의 텍스트로 삼은 십대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삼촌의 도움으로 지구의 끝으로 가서 포경선에 올랐다. 짧지만 강렬했던 추억을 소년은 중년의 작가가 되어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그는 2020416일 하늘의 별이 되었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이야기다.

 

출근 길 버스에서 <세상 끝의 세상>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소년 세풀베다처럼 지구의 끝, 파타고니아에 가볼 수 있을까라고. 이제 그러기엔 나이도 많이 들고 꿈도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지만 그냥 그래도 언젠가 한 번 가보고 싶다고.

 

문학적 경험이 실질적 체험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살면서 얼마나 될까. 소년 세풀베다는 <모비 딕>을 읽은 다음, 벅찬 가슴을 안고 친구들처럼 여름방학을 대충 보내지 않고 스스로 고생길을 자처한다. 지구 끝으로 달려가는 마음이 그랬을까. 화물선 에스트레야 델 수르호에서 주방 보조로 일하면서 선장에게 성실함을 인정받기도 한다. 감자 깎는데 이골이 난 소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구시대의 낡은 포경선에 올라 고래잡이를 체험한다. , 멋지다. 어린 시절에 그런 체험을 했다면 나도 그처럼 글쓰기로 승화시킬 수 있었을까.

 

30년이란 시간이 흘러 독일 함부르크에 사는 망명자 세풀베다는 불법 고래 포획에 나선 일본 국적의 니신마루 호 사건 취재에 나서게 된다. 왜 우리는 고래를 잡아선 안 되는가. 그것이 일단 불법이라는 걸 떠나, 고작 식도락이나 미용을 위해 자유롭게 바다에서 살고 번식하는 고래를 잡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오로지 돈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시장의 요구에 따라 오늘도 포경선들이 고래를 잡으러 나선다.

 

또 한편에는 첨단 시설을 갖추고 현장에서 잡은 고래를 가공까지 할 수 있는 니신마루 호에 저항을 불사하는 피니스테레(라틴어로 땅 끝이라는 의미의 합성어라고 한다) 호의 선장 호르헤 닐센 같은 이도 있다. 산 채로 잡혀 가죽이 찢기고 살이 갈리는 비극의 현장을 목도한 닐센 선장과 동료들은 범선에 폭탄을 붙들어 매고 현대문명의 잔혹한 이기인 니신마루 호와 동귀어진하려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로 프랑스 정보당국이 설계한 국가 테러로 무지개 선단의 운동가는 죽기도 했다지.

 

이 모든 사실을 글로 체화시킨 세풀베다의 진술은 독자의 가슴을 때린다. 토착 군부 세력에 의해 추방당한 저자는 수십 년 만에 환경을 보존하고 남태평양의 바다에서 자유롭게 사는 인간보다 더 나은 감수성을 지닌 ()고래들을 지키기 위한 연대를 위해 조국을 찾는다. 그리고 유랑 지식인은 끝없이 자신에게 묻는다. 대의를 위해 싸우는 자신들의 행동이 어쩌면 이기적인 것이 아니었느냐고 말이다. 군사독재에서 벗어난 조국에 이미 준비된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우는 대신 의도적인 유랑을 계속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과 사유가 이렇게 와 닿을 수가 없더라.

 

자신들의 동료들에게 총탄을 쏟아 부은 니신마루 호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드는 범고래들에 대해 닐센 선장이 들려주는 말은 그야말로 전설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 싸운 닐센 선장과 그의 동료 페드로 치코를 보호해주는 장면에서는 짠한 연대가 떠올랐다.

 

어쩌면 지난 며칠 동안 내가 읽은 세풀베다의 책들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한 사전 준비운동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칠레 앞바다에서 군인들의 묵인 아래 벌어지는 무분별한 고래 사냥, 어쩌면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책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남벌되는 아메리카의 아름다운 나무들... 아무리 개인적으로 윤리적 소비를 강조해도,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경제 활성화를 위한 환경파괴에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지 묻게 된다. 세풀베다 작가가 행동하는 지식인이라면, 나는 어떤 존재일까.

 

그러니까 다 필요 없고, 초록빛 지구별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연대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진심으로 ‘세상의 끝에 가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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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4-17 20: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풀베다 책은 딱 한 권 읽었지만 정말 존경할 만한 분이네요.
세풀베다가 환경보호를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것은 알았지만 이런 책이 있는지 몰랐어요.
지금이라도 인간이 정신을 차린다해도 이미 늦었다는 말 들은 적 있는데 그 때 참 슬펐습니다. ㅠ

레삭매냐 2023-04-18 20:22   좋아요 1 | URL
지구별을 위해 싸우던 전사
가 코로나로 영면했다는
소식을 멍했던 게 어느덧 3년
전이네요.

우리 뿐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해서라도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당장의 편리함 때문에
그러지 못함을 한탄할 따름입
니다.

얄라알라 2023-04-18 00: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께서 권해주시는 책은 미지영역, 단번에 확 호기심 솟구치게하는 힘이 있는데 이런 일을 해낸 사람이 실존인물이라니 더더욱 놀랍습니다. 생뚱맞지만 아바타도 생각났어요...연대의.장면을.자꾸.상상하게 됩니다

레삭매냐 2023-04-18 20:24   좋아요 2 | URL
지구별을 지키기 위해 연대하는
삶...

지난 일요일날 족구장에 가서
꼬맹이와 함께 야구를 하다가
이곳저곳에 널부러져 있는 쓰
레기들을 주워다가 재활용 봉
투에 담았습니다. 왜 그냥 쓰레
기들을 마구 버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더라구요.

미지의 영역에 대한 도전, 멈추
지 않아 볼랍니다.

젤소민아 2023-05-04 20: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풀베다...코로나로 세상을 뜨신 것 같더군요. ‘연애소설 읽는 노인‘도 그렇고 이분은 ‘세상‘의 본연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이 소설도 그렇고요. 소설에서 ‘환경‘에 천착한 그에게 경의를...그리고 명복을...ㅠㅠ

레삭매냐 2023-05-05 08:39   좋아요 0 | URL
말씀해 주신 대로 세풀베다 작가는
3년 전에 코로나에 걸려서 하늘의 별
이 되셨답니다.

좀 더 좋은 글을 더 써주셨어야 했는데...

세상의 본연 그리고 환경 이슈에 누구
보다 진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반 고흐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바바라 스톡 지음, 이예원 옮김 / 미메시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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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주차를 할 수가 없어 이리저리 떠돌다 결국 아무 데나 차를 대고 램프의 요정을 찾았다. 그냥 아무 책이나 좀 읽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그리고 한 시간 정도 되는 시간 동안 읽을 그래픽노블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해서 바바라 스톡 작가의 <반 고흐>를 만나게 됐다. 후딱 읽고 나서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67쪽까지 읽가 호출이 와서 잽싸게 램프의 요정을 벗어났다. 그냥 나오기가 그래서 이탈로 칼비노의 책 한 권도 샀구나.

 

예전에 고호라고 불렀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고흐가 되었다. 어쨌든, 그래픽노블 <반 고흐>는 훗날 가장 비싼 그림을 그린 화가가 되는 네덜란드 출신 화가 빈센트(뱅상?) 반 고흐의 말년을 다루고 있다. 화상을 하는 동생 테오에 빌붙어 살던 반 고흐는 새로운 작품활동을 위한 공간을 위한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의 아를로 향한다.

 

이곳에서 고흐는 자그마치 200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놀랍지 않은가. 그리고 그의 정신건강은 그림에 몰두하는 만큼 소진되어 가기 시작한 모양이다. 문득 어떤 예술가가 지닌 천재성 혹은 마스터피스를 만들기 위한 무언가는 계속해서 생성되는 게 아니라, 퍼내고 나면 소진되어 버리고 마는 게 아닐까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전에 물감 살 돈이 없어 구질구질하게 살았던 고흐와 달리, 피카소는 평생 동안 돈 걱정 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하면서 잘 먹고 잘 살지 않았던가. 그런 걸 보면 참, 인생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다. 죽은 다음에 명예와 부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고흐는 성질머리도 고약했던 모양이다. 아를에서 머물던 호텔 직원과 싸우는 건 다반사였다. 자신의 모든 걸(영혼마저도!) 그림에 갈아 넣어야 했던 고흐는 얼치기 예술가들이 희희낙락하며 작품 활동을 하는 걸 참아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엄청난 속도로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시간에 따라 풍경과 색감이 바뀌는 걸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빛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은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력도 엿볼 수가 있다.

 

고흐는 평소에 독주인 압생트를 즐겨 마셨다고 하던데, 이 그래픽노블에서는 그런 점이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다른 화가들이 유곽을 찾아 허송세월하는 동안에도 그는 그림 그리기에 매진했다. 그도 물론 유곽의 고객이긴 했지만 말이다. 뭐랄까 일반인들과 다른 의미에서의 수도자라고나 할까.

 

고흐 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 밖에 팔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런 그의 작품 활동에 가장 결정적 기여를 한 사람은 바로 동생인 테오였다. 아마 테오가 없었다면 우리는 고흐의 그 많은 작품들을 만날 수가 없지 않았을까.

 

한편, 고흐는 아를의 새로운 거처에서 화가들을 위한 일종의 공동체를 꿈꿨다. 자기가 아는 많은 화가들을 그곳으로 초청했지만 그의 초청에 응한 사람은 유일하게 그가 존경하는 화가였던 폴 고갱 한 명이었다. 고갱에게 많은 걸 배우기도 했지만, 성정이 달랐던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고흐가 남프랑스의 아를에서 만족했다면, 열정의 사나이 고갱은 열대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색채를 구하기 위해 마르티니크 행을 꿈꾸었다. 이런 둘의 결정적 차이는 결국 파국으로 이어졌고, 고갱은 아를을 떠나기에 이른다.

 

그리고 모두가 아는 고흐의 종말로 가는 뇌전증에 의한 정신병이 발발하게 된다. 고갱이 떠난 뒤, 자신의 귀를 자해한 고흐의 소식을 들은 동생 테오는 파리에서 바로 형님을 찾아온다. 고흐는 환각에 시달리는 자신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깨닫고 자발적으로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물론 그림에 미친 사내는 그곳에서도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이런 그의 정신 상태에 대한 부분들을 읽으면서 아니 그렇다면 나는 그동안 정신이 온전치 않은 작가가 그린 그림에 대해 그렇게 열광했단 말인가. 내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해바라기>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말이다.

 

그래픽노블 <반 고흐>는 그의 비극적 최후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고 건너뛴다. 오로지 그림에 전념했던 화가로서의 모습에 치중하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고흐는 대중에 영합하는 그림을 그릴 생각은 1도 없었다. 그의 이런 비타협적인 태도 때문에 생전에 그는 자신의 그림을 팔지 못했다. 자신의 영혼을 갈아 넣어 창조한 그림이 타인에게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해 괴로웠을까? 현대의 피카소 혹은 고갱처럼 그림을 팔아 제법 돈을 만졌더라면, 고흐의 영혼은 과연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을까?

 

너튜브에서 보니 고흐의 그림에서 은 영원을 상징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의 그림들에서 별이 등장하면서부터 이미 고흐는 이생에 대한 미련을 포기한 게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조금 들었다. 상당 부분 압축되고, 생략된 그래픽노블의 이미지만으로는 위대한 예술가가 구상한 생각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나 싶다.

 

오래 전에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 이미지에 도취되어, A4에 꽉 차게 그의 이미지를 인쇄해서 모으던 시절 생각이 떠올랐다. 고흐가 광인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나는 여전히 그가 그린 <해바라기>를 좋아한다. 지난주에 마지막 남은 해바라기 씨 다섯 개를 화분에 심었다. 어떤 녀석이 고개를 들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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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4-17 0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을 생략한 작가의 의도가 마음을 울리네요.

레삭매냐 2023-04-17 11:01   좋아요 1 | URL
너튜브에서 우연히 고흐의 그림
을 3D로 처리한 영상들을 보았
는데 레알 퐌타스틱~했습니다.

엔딩은 여백의 미라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