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름이 모일 때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베시 헤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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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번에도 역시 인스타 피드를 통해 남아프리카/보츠와나 출신 작가 베시 헤드를 알게 됐다. 국내에는 오늘 소개할 <비구름이 모일 때>, <마루> 그리고 <권력의 문제> 이렇게 세 권이 소개가 되었는제 앞선 두 책들은 절판이 되어 도서관을 이용해서 읽을 수가 있었다. 괜찮은 책들은 항상 구할 수가 없는 법이지.

 

남아프리카 저널리스트 출신으로 보츠와나로 거의 강제추방하다시피 쫓겨난 베시 헤드의 데뷔작으로 자신과 비슷한 삶의 경로를 보여주는 마카야() 마세코를 작가는 주인공으로 삼았다. 소설은 1968년에 발표되었고, 시대적 배경은 1964년 정도라고 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악명높은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피해, 마카야는 보츠와나 국경을 넘는다. 이미 그전에 투옥생활을 한바 있는 마카야는 절대 국경순찰대에게 잡히면 안되는 그런 상황이다.

 

보츠와나로 일종의 정치적 망명을 시도한 마카야는 이미 경찰의 정보망에 걸려 있는 상태다. 그리고 외국인 신분으로 골레마음미디 마을에 정착하게 된 마카야는 마을의 디노레고 노인을 만나 적극적인 지원을 받게 된다. 한편, 골레마음미디에는 영국 출신 농업전문가 백인 길버트 밸푸어가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서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하기 위해 노력 중에 있다. 하지만, 전통과 부족주의에 물든 골레마음미디 사람들과 새로운 협동조합 활동을 시작하려는 길버트의 노력은 3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보츠와나 골레마음미디 마을의 남자들을 소를 치는 유목활동을 중시한다. 나머지 노동은 모두 여자들에게 맡겨졌다. 길버트와 마카야는 그들의 처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소들을 정리하고 터키 담배 같이 수익이 많이 나는 상품 작물을 재배해서 부를 축적하고, 축적한 부를 이용해서 마을을 발전시켜야 한다는데 의기투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건 왠지 오래전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새마을운동을 연상시키는 그런 게 아닌가 말이다.

 

사실 영국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을 앞두고 있던 보츠와나에는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식민 당국자들은 곧 자신의 손에서 벗어날 신생국가의 미래에 대해 무관심했다. 대추장 세코토는 여전히 기존의 권력자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의 동생이자 소설에서 빌런 역할을 충실히 하게 될 캐릭터이자 부족주의의 화신인 부추장 마텐지는 골레마음미디 마을의 모든 변화를 정면에서 거부한다. 기득권층에게 외지인에 불과한 길버트와 마카야가 시도하는 모든 일들은 부정적으로 보일 뿐이고, 자신의 권력을 붕괴시킬 위험 요소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사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길버트와 마카야의 노력에 의해 계몽된 골레마음미디 마을의 여성들은 실제로 행동에 나섰으니까 말이다.

 

이런 사회경제적 변화와 더불어, 디노레고 노인의 딸인 마리아와 과부 폴리나 세베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 역시 소설의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폴리나는 마카야를 보는 순간, 반해 버렸다고 해야 할까. 그에게 마리아는 강력한 적수로 부상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마리아를 사랑해온 길버트가 마리아에게 청혼하고 결혼에 골인하면서, 폴리나가 빚어내던 긴장감을 자연스레 해소되어 버린다. 나고 자란 사랑하는 남아프리카를 떠나 이국땅에 정착하게 된 마카야에게 여인이나 가정은 당장의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부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가진 청년이자 미래의 아프리카를 이끌어갈 그런 리더의 상징이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고 부추장 마켄지나 조아스 체페 같이 음험한 정치인의 생각은 달랐다.

 

대추장 세코토의 절친한 지기인 영국 출신 경찰 조지 애플비스미스는 마카야가 위험한 인물이라는 무고를 받지만, 그에게 기회를 주기로 결정한다. 마카야가 영주권을 받고 그의 골레마음미디 마을 거주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면서, 길버트-마카야의 터키 담배 농장 프로젝트는 속도를 올리기 시작한다. 폴리나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대부분의 마을 여성들이 상품성 작물 재배를 위한 공동노동에 나서게 된다. 이런 작지만 유의미한 사람들의 인식 변화가 결국 국가적 차원의 발전과 계몽을 이루게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베시 헤드 작가는.

 

마음에 증오와 분노를 품고 고향 남아프리카를 탈출한 마카야는 보츠와나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간다. 그리고 사람에게 상처 받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람으로 치유 받을 수밖에 없다는 이른자 '인간 종교(people religion)'라는 베시 헤드가 구사하는 방식을 전면에 내세운다. 자신의 주변을 맴돌던 폴리나를 받아들이고, 가뭄이라는 자연 재앙과 더불어 갑자기 들이닥친 아이작의 죽음이라는 위기 상황을 돌파해 나가면서 유토피아 건설의 희망을 제시한다.

 

사사건건 길버트-마카야들을 괴롭히던 마켄지 부추장은 폴리나를 재판에 소환하면서 새로운 갈등을 촉발한다. 하지만, 결국 자각한 골레마음미디 주민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황망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권선징악적 결말이 이어진다.

 

처음에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금방 다 읽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진도가 더디게 나갔다. 작가가 구사하는 1960년대 남아프리카/보츠와나의 사회경제적 요소들이 빚는 갈등들이 일단 소화하기에 좀 낯설었다. 무언가 새로운 것들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적당량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다음에, 계속해서 내부적으로 갈등하고 번뇌하는 영혼 마카야의 내면 세계 수용도 쉽지 않은 미션이었다. 너무 여러 가지 형태로 벌어지는 복잡한 상황들이 독서의 진도를 수월하지 않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일체의 변화를 거부하고 전통을 고수하겠다는 마텐지로 대변되는 고집불통 부족주의자들은 변화와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한다. 구질서가 붕괴되고, 부족을 대신할 국가라는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라는 이름의 아프리카 민족주의가 도래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존의 세코토와 마텐지 같은 전통/부족주의자들은 그런 이상에 동참할 의향이 전혀 없었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지금 이대로가 가장 좋은데 왜 굳이 삐걱대는 새로운 무언가를 추구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갈등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화두가 아닌가 싶다.

 

국가 발전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우리끼리' 부족주의를 대신하기 위해 베시 헤드 작가는 아예 부족을 넘어 타국 출신 망명객인 마카야 마세코를 주인공으로 기용한다. 그리고 마카야에 앞서, 백인 이상주의자 길버트를 미리 배치하는 더블캐스팅으로 유토피아 건설의 현현이라는 작가의 의중을 드러내 보인다. 과연 그런 유토피아가 현실에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생각 같아서는 <마루><권력의 문제>도 내친 김에 읽어 보고 싶지만, 다 읽고 나서 그전에 읽던 다른 책들부터 마무리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가오는 명절 전에 베시 헤드 작가의 다른 책들을 수배하게 되면 또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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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볼트 이야기 쏜살 문고
로베르트 발저 지음, 최가람 옮김 / 민음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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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발저는 여전히 내가 어려운 작가로 인식되어 있다. 그의 이런저런 책들을 수집해 놓았지만, 정작 읽은 책은 <벤야멘타 하인학교>가 유일하다. 읽은 내용은, 언제나처럼 기억 속에서 휘발해 버렸다. 그래도 꾸역꾸역 도전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어제 오후 느즈막하게 도서관으로 <토볼트 이야기>를 빌리기 위해 길을 나섰다. 날이 선선해져서 걷기에 너무 좋았다. 문득, 내 그런 모습이 단거리 산책에 특화된 "토볼트"와 유사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난 세기 초, 발저 작가에 의해 창조한 토볼트라는 문제적 인간에 대한 탐구를 시작해 본다. 우리는 왜 타인에게 먼저 다가서기 보다 그가 나에게 다가 오기를 기대하는가. 어쩌면 거절당하고 싶지 않다는 본능적 무언가에서 비롯된 심리가 아닐까. 청년 토볼트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었나 추정해 본다.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나의 적극적인 시도가 없다면 그 누구와의 관계도 진전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상대방의 어느 정도의 호응도 필요하겠지만.

 

짧은 다섯 편의 이야기를 통해 토볼트 청년에 대한 가늠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물론 실제적인 발저 작가의 체험에 의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실제로 상부 슐레지엔의 담브라우 성에서 190510월부터 12월까지 시종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실패한 시인이었던 유사 지식인 토볼트는 11월 사냥철을 맞아 30년 전쟁 당시 지어진 K백작의 성을 방문하는 귀족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고용된 임시 하인 신분으로 등장한다.

 

책을 읽다 보니 문득 그가 "빛의 마법사"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성의 곳곳에 비치된 램프를 도맡아서 관리했다. 심지어 그 일을 좋아했다. 노동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아무리 힘든 일이라고 하더라도 노동의 고단함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어쩌면 토볼트/발저는 스스로에게 그런 주문을 걸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건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고 말이다.

 

다음으로 그가 좋아하던 일은 난로 관리였다. 오래된 성의 난방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게 난로였으리라. 누군가에게 온기를 전달하기 위해 벽난로 관리는 시종으로서 꼭 해야만 하는 그런 일이었다. 빛과 열을 전달하는 일종의 마법사 같은 일에 토볼트는 특별히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이 맡은 임무에 충실했다. 이런 걸 이른바 "하인 정신"이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누군가에는 주인에게 충성하는 모습이 굴욕적이거나 혹은 아부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토볼트의 정신세계는 보통 사람의 그것과 많이 달랐던 게 아닌가 싶다.

 

토볼트는 방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거친 행동을 일삼는 폴란드 출신 청지기와 거칠게 충돌한다. 그리고 곧바로 시종장에게 가서 자신이 우락부락한 청지기에게 뺨을 맞을 뻔한 사건을 고자질한다. 백작의 시종장은 백작의 식사 시중을 들며 거의 곡예에 가까운 실력을 보이는 토볼트에게 '품위'를 지키라고 비난에 가까운 경고를 날린다. 성에서 토볼트에 대한 처우는 상당히 좋았지만, 시종장을 비롯한 고인물 인사들은 귀족이 지켜야 하는 품위에 좀 더 많은 방점을 찍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귀족들은 특권 계급으로서 보통 사람들이 지키기 어려운 예절과 관습 그리고 품위와 변별력을 강조했다.

 

한편 토볼트는 관찰을 통해, 귀족들의 세계를 <귀족에 대한 연구>라는 글에 담아냈다. 백작은 무엇을 먹고, 듣고 하는 지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다. 토볼트의 관찰에 따르면 백작은 달걀을 곁들인 베이컨을 즐기며 다양한 종류의 잼들을 먹는다. 바그너를 들으며, 여가시간에 사냥을 한다. 정말 유한 계급의 전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연 중에 독서를 즐기는 자신이야말로 귀족들보다 더 나은 지식인이라는 자부심이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했다.

 

비서의 요청으로 미모의 남작 부인에게 레모네이드를 전달하면서는 무슨 일장 연설에 가까운 흠모의 언사를 자랑하기도 한다. 이게 근원을 알 수 없는 찬사인지 너무 처절한 아부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귀족들의 식사를 관찰하는 도중에 스스로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물론 토볼트도 초보 하인이기 때문에 귀부인의 드레스에게 겨자 소스를 흘리거나 오래된 찻잔을 박살내는 실수도 저질렀다. 하지만, 자신의 상급자에게 신속한 보고를 통해, 관대한 조치를 받기도 했다.

 

청년 토볼트는 짧은 하인 생활은 마치고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타인을 위한 인내와 복종의 시간들이라는 역경을 극복한 토볼트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그런 점에서 끝없이 변화하는 자신의 정체성의 변화를 담보로 한 성장소설의 성격도 <토볼트 이야기>는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지만 강렬했던 로베르트 발저의 <토볼트 이야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던 귀족 계급 사회의 잔영들과 그에 매료된 어느 젊은이의 삶의 그림자를 엿볼 수가 있었다. 다음에는 로베르트 무질의 <세 여인>을 읽을 계획이다.

 

[뱀다리] 어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동네 새로 생긴 공원에 가서 <토볼트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해질 무렵,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와 이제 자신들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고라도 하듯 풀숲에서 울고 있는 풀벌레 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을 수가 없었다. 책 읽기 좋은 계절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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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9-30 0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저! 좋아하는데 읽기 쉬운 작가는 아닌듯요. 그러고 보니 저도 읽어야겠네요 ^^

레삭매냐 2025-09-30 07:05   좋아요 1 | URL
어쩌면 이렇게 공감이 가는 말씀
을 해주셨는지요.

어렵지만 꾸역꾸역 읽어 보려고
하고 있답니다. 빠이팅.

자목련 2025-09-30 1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발저의 책을 읽고 있는데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멈출 것 같은 예감이 ㅎㅎ

레삭매냐 2025-09-30 11:04   좋아요 0 | URL
저도 발저의 <산책자>와 <장미> 쟁여
두었는데, 선뜻 손이 가지 않고 있답니
다. 그래도 용기 내서 읽어봐야겠죠.
 
9시에서 9시 사이
레오 페루츠 지음, 신동화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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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은 레오 페루츠 작가의 달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이제 한 권(아니 두 권인가?) 더 읽으면 국내에 나온 페루츠 작가의 책은 다 읽게 된다.

 

<스웨덴 기사>로 출발한 나의 페루츠 읽기는 <심판의 날의 거장>을 거쳐 <9시에서 9시 사이>에 도달했다. 세 작품 모두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또 확실하게 다른 서사와 결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이 된다.

 

소설 <9시에서 9시 사이>의 문제적 주인공은 가난한 대학생 슈타니슬라우스 뎀바다. 역시 키워드는 뎀바의 가난이다. 그는 가난 때문에 자신이 애인이라고 생각했던 조냐 하르트만이 게오르크 바이너와 바람이 났다고 생각한다. 슈타니는 조냐가 바이너와 베네치아로 여행가는 걸 저지하기 위해 목돈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까 하룻밤 동안에 장기간 베네치아 여행을 위한 자금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다. 대개의 경우, 이런 미션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배가 고픈 그는 가게에서 먹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어처구니없는 행동들을 하다가 가게 주인에게 도둑으로 몰리기도 한다. 공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두 손이 없다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농락한다. 슈타니의 서사를 따라가는 동안, 그가 충분한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훔친 책을 골동품상에게 넘기려다가 경찰에게 잡혀 두 손에 수갑을 찬 채 도주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니까 슈타니에게 수갑은 무언가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구할 수 없게 만드는 핸디캡이자, 그를 자꾸만 곤경에 빠뜨리는 하나의 장치인 셈이다.

 

수갑 찬 손을 내밀어서 돈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슈타니가 하는 시도마다 족족 실패한다. 우체부가 가져온 자신이 정당하게 번 우편환부터 시작해서, 어쩌면 그렇게 운수가 없는지 모르겠다. 빈의 마리아힐퍼 슈트라세를 비롯한 방방곳곳을 누비며 자신이야말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에서 가장 운이 없는 사나이라고 떠들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슈타니는 거들떠도 보지 않지만, 그런 그를 물심양면으로 돕는 슈테피라는 조력자가 있다.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가 떠나기 위해, 돈을 마련하다가 그야말로 은팔찌를 찬 셈인데 그런 남자의 은팔찌를 풀어 주겠다고 나섰다. 그녀의 시도는 참 좋았으나, 정말 운이 없는 사나이인 슈타니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돈이 주머니에 거의 들어올 것 같으면서도 또 마지막 순간에 손바닥 위의 모래처럼 스르르 사라지게 구성한 레오 페루츠 작가의 기법도 참 대단하다. 선의를 가지고 슈타니를 돕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도움이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과외비를 가불 받으려고 화상을 입었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그집 바깥어른이 치료해 주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슈타니는 어쩔 수 없이 줄행랑을 치고 만다. 그는 참 운도 지지리도 없는 남자다.

 

가장 안타까운 장면 중의 하나는 슈타니가 30크로네 빚을 받으러 도박판에 있던 친구를 찾아가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그는 초심자의 놀라운 운빨로 무려 270크로네나 되는 판돈을 따게 되는 행운을 거머쥘 뻔했다. 도박판에 있던 이가 자신의 시계를 분실했다며, 예의 시계를 찾기 위해 같이 도박을 하던 사람들의 몸수색을 하겠다며 나서면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이 수갑을 찬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었던 슈타니는 결국 자신이 정당하게 딴 돈을 포기하고 그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기가 찰 노릇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 점에서 슈타니에게 아주 운이 없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엔딩은 예상대로 비극이었다. 이렇게 내내 운이 없다가 또 막판에 가서 인생한방 역전을 얻게 되는 설정도 어쩌면 그간의 서사에 대한 배신이라는 이유에서 처음부터 배제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1918년에 발표된 <9시에서 9시 사이>는 원래 프라하와 빈 그리고 베를린의 다양한 신문들에 연재되던 작품이었다. 당대에 이미 인기를 끌었고, 1922년에 MGM사에 영화화 판권이 팔렸지만 영화로 제작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책의 표지에 등장한 망토를 두른 슈타니슬라우스 뎀바의 이미지와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두 개의 수갑이 그가 처한 모든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상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웨덴 기사>처럼 이번에도 역시나 페루츠 작가는 소설의 첫 부분부터 주인공의 기이한 행적을 설명하는 결정적 단서를 심어 놓았다. 그랬었군, 왠지 작가의 스타일을 좀 더 알 수 있게 된 것 같다. 마지막 남은 책 <밤에 돌다리 밑에서>에서도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지 한 번 테스트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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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9-25 2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갑을 차고 애인과의 여행비를 벌기위해 12시간의 제한된 시간속에서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아이리쉬의 스릴러소설을 읽는 느낌을 주고있네요.히치콕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책소개가 맞단 생각이 드네요.그런데 책분류가 오스트리아문학인데 왜 동유럽소설인지 살짝 이해가 안가네요.

레삭매냐 2025-09-27 19:26   좋아요 0 | URL
유럽에서는 독일의 동쪽에 있는
나라들부터 동유럽으로 생각하
는 것 같습니다. 아마 그래서 동
유럽 소설로 분류가 된 게 아닌
가 추론해 봅니다.

아이리쉬 스릴러 소설 같다는
말씀에 적극 동의하는 바입니다.
 
스웨덴 기사 열린책들 세계문학 264
레오 페루츠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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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 친구의 피드를 보고 레오 페루츠 작가의 <스웨덴 기사>를 읽게 됐다. 물론 그전에도 이 책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잘 모르는 작가라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고나 할까. 이틀 전에 도서관에 가서 <스웨덴 기사><심판의 날의 거장>까지 빌려왔다. <스웨덴 기사>는 너무 재밌어서 순식간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마리아 크리스티네 폰 블로메라는 귀족 부인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러시아 황제를 상대로 한 스웨덴 기사로 국왕과 함께 전쟁에 나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아버지 크리스티안 폰 토르네펠트가 마리아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이야기는 1701년 초의 중부 유럽 슐레지엔의 어딘가로 독자를 인도한다.

 

두 명의 청년이 주위의 시선을 피해 도주 중이었다. 한 명은 <닭 도둑>으로 교수형을 피해 도망 중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크리스티안 폰 토르네펠트로 탈영병 신세였다. 두 사람 모두 잡히면 사형을 피할 수 없는 그런 신세였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도둑은 그나마 절망적 상황에 나름 적응을 했지만, 전쟁 영웅을 꿈꾸는 부잣집 도련님은 그러지 못했다. 두 사람이 잠시 몸을 피하고, 끼니를 해결한 방앗간에서 죽은 방앗간 지기가 등장한다. 레오 페루츠 특유의 환상문학의 성격을 지닌다고 해야 할까.

 

기진한 토르네펠트는 스웨덴군에 종군하기 위해 필요한 물품들을 도둑에게 알려 주면서 인근 장원의 주인은 사촌에게 도움을 요청해 달라고 부탁한다. 도둑은 토르네펠트가 건네준 반지와 정보들을 가지고, 예의 장원으로 향한다. 그리고 가는 도중에 장원의 관리가 엉망이고 또 하인들과 고리대금업자가 장원의 부를 약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부모를 여의고 장원의 주인이 된 아리따운 십대소녀 마리아 아그네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그녀가 토르네펠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 이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 가게 될지 대충 예상이 되지 않는가. 그렇다 도둑은 토르네펠트를 이른바 <주교의 지옥>으로 인도해서 세상과 격리시키고 자신이 그의 자리를 차지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전에 자신을 평생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게 될 "잔혹한 남작"을 만나 죽을 뻔하기도 하지만, 마리아 아그네타의 후의로 매질을 당하고 풀려난다.

 

도둑은 잔혹한 남작이 추적 중이던 도적단의 수괴 검은 이비츠를 대신해서 그의 부하들을 수하에 넣고, 잔혹한 남작에게 반격을 개시해서 그의 용기병대를 패퇴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개미잡이, 바일란트, 브라반터 그리고 빨강 머리 리스 등으로 성물도적단을 구성해서 인근 교회의 성물들을 털면서 악명을 떨치기 시작한다.

 

성물 도적질로 충분히 마리아 아그네타의 장원을 회복시키는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한 도둑은 성물도적단에게 돈을 나누어 주고 해산시킨 다음, 자신은 마리아의 장원으로 금의환향한다.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는 토르네펠트 행세를 하면서 마리아와 결혼에 골인한다. 이런 치밀한 준비를 하는데 2년이 소요됐다. 어엿한 귀족이라는 뒷배를 지닌 장원의 주인으로 변신하는데 성공한 도둑은 농사와 가축을 기르고 양모를 생산하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어려운 시절을 잊지 않고,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서는 안된다는 모토 아래 검소한 면모까지 보여준다.

 

그런 와중에 사랑하는 딸 마리아 크리스티네까지 얻게 돼서 남부러울 게 없는 그런 삶을 살게 된 도둑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이런 행복한 시간들은 오래 가지 않는 법이다. 두목이 나눠준 자금을 탕진한 개미잡이와 바일란트가 도둑의 장원을 찾아온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그들을 도둑은 처음에는 제거하려고 하지만, 생각을 바꿔 그들을 자신의 일꾼으로 받아 들인다. 더 큰 문제는 지금부터다. 개미잡이와 바일란트를 도둑의 소재를 알려준 성공한 사업가 브라반터가 어느 날 찾아와서, 빨강 머리 리스가 도둑의 정체를 잔혹한 남작에게 일러 바치고 잔혹한 남작이 도둑 추적에 나섰다는 소식을 전하고 자신은 재산을 정리하고 떠난다며 도둑에게 알린다.

 

운명의 도박사 도둑은 어쩔 수 없이 잔혹한 남작의 추적을 피해 스웨덴 기사로 변신해서 개미잡이와 바일란트를 데리고 전쟁에 나선다. 그동안 자신이 이룬 모든 것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버리고 떠나는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자신의 정체가 들어나는 건 그것보다 더 두려웠던 모양이다. 그리고 도둑은 일당과 함께 빨강 머리 리스를 찾아가 인생을 건 마지막 도박에 나서게 된다.

 

도둑과 귀족의 뒤바뀐 운명에 대한 기본 줄거리는 어쩔 수 없이 마크 트웨인이 1881년에 발표한 <왕자와 거지>를 연상하게 만든다. 레오 페루츠는 그런 큰 줄거리 위에, 자신의 장원으로부터 500KM나 떨어진 폴타바 전선에서 매일 밤 자신을 찾아오는 토르네펠트를 추억하는 마리아 크리스티네가 경험한 미스터리를 엮는다. 그러니까 폴타바 전투에서 죽은 토르네펠트와 자신을 찾아온 토르네펠트는 다른 사람이란 말인가? 엔딩에서 다시 처음의 서사로 돌아가게 만드는 레오 페루츠의 작법은 과연 대단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맹렬하게 싸운 도둑/이름 없는 남자가 보여주는 삶의 그림자는 비장하게 다가온다. 밑바닥 삶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름 없는 남자는 성물도적단의 리더로 활약하면서 평범한 가난한 이들을 약탈하기를 거부한다. 교회에 비치된 성물들을 약탈하는 그를 비난하고 저주하는 목사에게 그가 댓거리를 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기장 심는 시기와 병든 벌들을 치유하는 법 그리고 좋은 양모를 생산하는 방법들을 잘 알고 있던 도둑은 그가 일으켜 세운 장원에서 사랑하는 마리아 아그네타, 크리스티네와 더불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랬다. 하지만,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닌 토르네펠트의 것을 사악한 방법으로 빼앗은 원죄로부터 도둑은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레오 페루츠는 모두가 명예를 지키는 방식으로 소설을 마무리한다.

 

곳곳에 작가가 포진시킨 죽은 방앗간 주인이라던가 주교의 지옥 같이 환상적인 요소들은 역사 미스터리 <스웨덴 기사>와 맞물리는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낸다. <스웨덴 기사>는 엔딩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훌륭한 수미쌍관으로 마무리한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읽기 시작한 <심판의 날의 거장>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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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12 14: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단 이야기가 재밌을듯요. 찜해둡니다

레삭매냐 2025-09-13 09:24   좋아요 1 | URL
서사의 전개와 엔딩이
아주 끝내 줍니다.

<심판의 날의 거장>도
잇달아 읽고 있는데,
흥미진진하네요.

왠지 레오 페루츠의 팬
인 될 것 같습니다.
전작 읽기 도전합니다!

카스피 2025-09-12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웨덴 기사의 평이 대부분 왕자와 거지의 성인판 동화 버젼이란 이야기가 많네요.사실 이 책에서 다루는 역사적 배경은 18세기 북유럽의 복잡한 전쟁을 다루고 있습니다.소설속에 등장하는 스웨덴 기사에 나오는 스웨덴 국왕은 칼 12세로 작센서제후및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인 아우그스트 2세와의 리보니아 지역을 두고 한 전쟁을 한 인물이지요.
이 전쟁은 스웨덴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전쟁만이 아니라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도운 노르웨이-덴마크 왕국의 프레데리크 4세와 루스 차르의 표토르 1세과도 연관된 전쟁으로 18세기 초반 북유럽의 대부분이 연결된 아주 복잡미묘한 전쟁으로 십수년간 싸운 것으로 압니다.
스웨덴 기사를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소설속 배경이 되는 18세기 초반(1701년~30년)까지 북유럽 역사를 알아보시는 것도 재미있으실 거에요^^

레삭매냐 2025-09-13 09:26   좋아요 0 | URL
네 언급해 주신 대로입니다.

폴타바 전투 검색하다가 대북방전쟁
에 대해 알게 되었네요. 예전 같으면
사전에 공부를 좀 하고 독서에 들어
갔을 텐데, 게으른 독자는 일단 건너
뛰고 본문에 충실했다는...

시간 내서 알려 주신 부분에 대해
알아 보고 싶네요.

로씨야 짜르 표트르 대제가 등장한
다니 더더욱 흥미롭네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68
코맥 매카시 지음,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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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를 봤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무시무시한 킬러 안톤 시거가 산소탱크와 스턴건(혹은 캐틀건)을 들고 설치는 몇몇 장면만이 기억에 날 뿐. 그리고 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 책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공간적 배경은 텍사스의 어느 황무지. 베트남 전에서 저격수로 이름을 날린 용접공 36세의 루엘린 모스는 영양 사냥에 나섰다가 횡재를 하게 된다. 마약상들이 서로 총질을 한 끝에 모두 죽은 것이다. 아니 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외면하고 자그마치 240만 달러가 든 돈가방을 챙겼던가. 그런데 진짜 사건은 모스가 돈가방을 챙기면서부터 시작된다.

 

그전에 희대의 킬러 캐릭터로 선보인 안톤 시거는 자신을 체포한 부보안관을 죽이고 탈출에 성공한다. 시거는 전지전능한 능력을 지닌 무법자다. 돈가방에 트랜스폰더라는 추적기를 단 덕분에 시거는 모스의 소재를 어렵지 않게 파악한다. 아마 누구나 주인이 없어 보이는 그렇게 큰돈을 얻는다면 모스와 같이 행동할 것이다. 나라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그 대가가 죽음이라면 또 다른 이야기가 아닐까.

 

베트남 전에서 한 시절 전사로 보낸 모스는 사신(死神) 같은 시거의 존재와 능력을 몰랐던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19살 난 신부 칼라 진을 엘 파소로 피신시키지만, 그녀 역시 모스와 함께 얽매인 운명일 따름이었다.

 

소설에서 자신의 감정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인물로 에드 탐 벨 보안관이 등장한다. 코엔 형제가 연출한 영화에서는 타미 리 존스가 벨 보안관 역을 맡았지. 모스가 한 세대 전의 전쟁을 대표하는 선수라면, 벨은 두 세대 전의 전쟁, 2차 세계대전 전쟁 영웅 출신의 보안관이다. 그동안 유능하고 충실하게 군민들의 안전 위해 봉사해온 벨 보안관은 막판에 자그마치 9건이나 되는 미제 살인 사건을 뒤로 하고 불명예퇴진을 하게 될 운명이다. 테렐 군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보안관을 무시하며 엽기적인 살인 행각을 저지르는 시거의 준동에 늙은 보안관은 어쩌면 예이츠의 시에 나오는 대로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르겠다.

 

소설에서 그가 독백처럼 건네는 말처럼, 그의 조부모들이 온갖 피어싱과 귀걸이 장식을 한 후손을 보았다면 과연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하다. 젊은 세대는 더 이상 나이든 세대의 경험과 지식을 존중하지 않게 되었다. 세대를 거듭하며 전수되어져온 지혜의 사슬은 인터넷을 뛰어넘은 모바일 시대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꼰대들의 진부한 잔소리가 된 것이다. 어쩌면 코맥 매카시가 냉혹한 킬러가 날뛰는 이 소설을 통해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그게 아니었을까.

 

분열된 아메리카의 실상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도 극우 청년 활동가가 유타 밸리 대학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학생들과 대담 중에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그는 총기를 규제하라는 아우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정헌법 2조를 거론하면서 총기에 의한 죽음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자신이 그렇게 지지하던 총기 때문에 생명을 잃게 됐으니 이런 역설이 또 어디에 있을까.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도 모스와 시거는 너무 쉽게 총기를 구한다. 신분증이 없어도 충분한 돈만 있다면 누구라도 총기를 구할 수 있다는 걸 소설을 통해 나는 알 수가 있었다. 지금은 좀 다른 이야기겠지만, 여권은커녕 신분증 없이도 국경수비대가 지키는 국경을 넘을 수 있다는 설정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멕시코 의사에게 이글패스에서 시거에게 맞은 총상을 치료한 모스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국경을 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240만 달러라는 충분한 자금을 지닌 모스는 총기면 총기, 자동차면 자동차 그리고 잠시 머물 숙소에 이르기까지 구하지 못하는 게 없었다. 자본주의 천국 미국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참고로 모스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힐 신분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코맥 매카시의 서사에는 잡다한 상념들이 끼어들 틈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무미건조해 보이는 서사로 힘차게 이야기들을 이끌어간다. 산소탱크와 스턴건 그리고 산탄총으로 무장한 사신에 가까운 시거는 서사의 중심에 서 있다. 동네 보안관 따위는 우습게 여기고, 간발의 차이로 자신을 사로잡을 뻔하기도 하지만 그를 해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법 집행자에 대한 하나의 모욕이 아닌가. 그리고 이것은 평범한 시민들을 폭력의 위협으로부터 지키지 못하는 무력한 공권력에 대한 작가 나름의 힐난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도대체 아홉 건이나 되는 살인 사건이 발생했건만 군 보안관은 무얼 했단 말인가. 평상시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지만, 정작 비상 상황에서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뒷북만 신나게 치고 킬러 시거의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결국 소설은 끝나 버리고 만다.

 

무엇보다 소설이 개인적으로 권선징악 부류의 결말이 아니라 마음에 들었다. 그런 결말은 너무 전형적이고 식상하지 않은가. 거악을 형성한 악당들은 여전히 세상이 제 것인 양 법을 무시하고 만인에게만 평등한 법이라며 조롱하고 있지 않은가. 그 어느 때보다 분열되고 혐오가 넘실거리는 작금의 세태에 코맥 매카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만큼 들어맞는 소설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히 명작이라 부를 만하다. 충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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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11 22: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코맥 맥카시 책 딱 한권 봤는데 진짜 뭐랄까 다시 집으려면 좀 용기를 내야하는 느낌이에요. 말씀하신대로 무미건조해보이는 서사를 너무 강하게 밀어붙여서 약간 숨이 막히는 느낌? 내 인생에 뭔가 긴장이 필요하구나 싶으면 손에 들게 될거 같습니다. ^^

레삭매냐 2025-09-12 09:53   좋아요 1 | URL
영화에서 빌런의 포스가 너무 강렬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소설에서도 못지 않더라구요.

저는 코맥 매카시의 책은 기록
을 보니 4권 읽었더라구요.

말씀해 주신 대로 읽기가 쉽지
않아서 손이 잘 가지 않는...

얄리얄리 2025-09-12 0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다시 번역되서 나왔나 보네요. 그것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이라는 막강한 뒷배경(?)을 가지고요. 제가 코맥 맥카시 작품 중 첫번째 읽은 것이었는데, 책과 영화에서 본 충격이 다시 생각납니다. 그 충격에도 계속해서 맥카시의 작품을 찾아 읽었으니, 호불호는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마지막 말씀에 동의하게 됩니다. ˝가히 명작이라 부를 만하다. 충분히.˝

레삭매냐 2025-09-12 09:56   좋아요 1 | URL
아주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
뭐랄까 거시키하면서도 자꾸만
찾게 되는 그런 맛이 있더라구요.

절판되었다가 문동세문으로
새단장해서 나왔더군요. 가격인
상은 덤이구요.
(지금 찾아 보니 아예 다른 출판
사였네요.)

그레이스 2025-09-22 2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좋다고 하는 분들이 있어서,,, 읽으려고 두고만 있습니다.
요즘 미국을 보면...;;;;

레삭매냐 2025-09-24 08:25   좋아요 1 | URL
그렇죠 아무래도.

요즘 미국이 저희가 예전에
알던 그 미국이 아니더라구요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