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2024) / 허명행
*** 다수의 스포가 들어 있으니, 참조해 주시길.
인스타 광고로 처음 접한 허명행 감독의 <황야>를 봤다. 어포칼립스 시절 사랑꾼, 아니 사냥꾼으로 나선 마블리의 액션은 여전했다. 하지만 서사의 힘이 턱없이 부족했고, 어디선가 본 장면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기시감 때문에 후반으로 갈수록 동력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더라.
스토리라인은 간단한다. 어느날 갑자기 벌어진 대지진으로 대한민국은 ‘혹성탈출’의 어느나라처럼 붕괴해 버렸다. 물도 식량도 없는 그런 어포칼립스 시절이 도래했다. 아, 그전에 죽어가는 자신의 딸을 살리겠다는 양기수 박사(이희준 분, 이후 닥터 크레이지로 부르겠다) 역시 자신의 연구실에서 불법 생체실험을 하다가 당국에 의해 저지될 그 순간에 어포칼립스를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추락(?)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사냥꾼 최지완(이준영 분)이 서울 한복판에 등장한 좀비스러워 보이는 악어를 사냥한다. 불화살이 멕이는데, 악어가 쉽게 죽지 않고 지완에게 덤벼든다. 그리고 우리의 마블리 남산(마동석 분)이 등장해서 한 칼에 악어의 머리를 잘라 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사냥에 성공한 이들은 푸짐한 악어 고기를 버스동 사람들에게 판다. 이른바 약육강식의 세계가 그렇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리고 18세 소녀 한수나(노정의 분)가 등장해서 유명한 사냥꾼 남산과 지완의 그림을 그린다. 남산과 지완이 열심히 악어 고기 장사를 하던 중에 등장한 일단의 양아치 그룹, 조악하게 그린 현상수배범 전단을 들고 사람들을 잡아가던 중에 눈에 띈 수나를 잡아가려고 하자 과거에 자신의 딸을 지키지 못한 남산이 등장해서 이들을 제압한다. 그리고 보니 닥터 크레이지도 자신의 딸을 지키지 못하지 않았나.
버스동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아파트’에 사는 선생님(장영남 분)이 일단의 무리들과 등장해서 수나에게 좋은 삶의 환경과 교육을 제공하겠다며 보호자인 할머니를 설득해서 데려간다. 말로는 새로운 인류를 위한 투자라고 하는데 어째 수상하지. 이런 어포칼립스 영화에서 이런 미래를 위한 투자는 가만 보면 결국 악랄한 착취로 귀결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아니 영화의 내용을 하나하나 다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닥터 크레이지가 살아남은 십대 소년 소녀들을 생체 실험 재료로 이용해서 자신의 딸을 부활시키겠다는 망상을 우리의 마블리가 뽀갠다는 내용이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다.
사냥꾼 마블리는 기묘하게도 영화 초반에 딱 한 번 악어사냥에서 자신의 실력을 보여준다. 좀 더 다른 사냥을 기대했던 관객들은 그가 무슨 직업을 가졌었는지 잃어버릴 판이다. 아니면, 악어 고기 파는 정육점 주인 같기도 하고. 다른 사냥은 몰라도 빌런 사냥에는 참으로 유능한 남산이다. 자신의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트라우마 덕분에 딸 같은 수나를 구출해내기 위해 목숨을 건다는 설정도 어포칼립스 시절에 좀 낯설게 다가온다. 남산이 자신의 딸을 왜 지키지 못했나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서 그런 탓일 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딸을 다시 살리겠다는 닥터 크레이지와 계속해서 살기 위해 닥터 크레이지가 공급하는 약물이 필요한 유사 K-좀비 권상사의 망상이 결합해서, 생체실험에 필요한 아이들을 계속해서 수급하고 어포칼립스 시절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깨끗한 물과 식량으로 사람들을 착취하는 설정이 영화 <황야>의 근간을 이룬다.
모든 시스템이 붕괴해 버린 가운데,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신인류를 창조해내겠다는 하지만 그 이면에는 죽은 딸을 살리겠다는 닥터 크레이지의 신념 아니 망상은 어쩔 수 없이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시킨다. 원작 소설에서도 닥터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괴물이 모든 걸 파멸시키지 않았던가.
수나와 그의 새로운 친구가 된 수예가 들어간 반에서 우수한 성적을 낸 이들이 생체실험에 선발되는 시퀀스는 영화 <아일랜드>를 떠올리게 한다. 아일랜드에서도 필요에 의해 선발된 클론들이 특별 여행에 당첨됐다고 하면서 ‘번식장’을 떠나지 않았던가.
점점 K-좀비가 되어 가는 권상사가 닥터 크레이지의 실험실에서 기르던 생쥐를 맛깔스럽게 집어 삼키는 장면은 80년대 최고의 드라마 중의 하나인 <V>에서 외계인 사령관 다이애나가 쥐를 꿀꺽하는 장면을 그대로 따오지 않았나 싶다.
수나와 주예 가족에서 분리시킨 수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쓸모가 없다며 처리하는 K-좀비 최중사와 오하사의 역할은 작년 대유행했던 <무빙>의 안기부 부장과 너무 닮았다. 치열한 삶의 경쟁에서 도태된 인간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냉혹한 자본주의 논리를 그대로 이식한 교주 닥터 크레이지와 선생님의 지독한 가스라이팅은 어쩔 것인가.
아, 이전에 마블리와 합을 맞췄넌 버거형의 등장도 반가웠다. 이전과 비슷한 결을 따라 이번에도 호기롭게 마블리 형에게 도전장을 들이밀었다가 바로 꼬리를 내리고 깨갱하고 만다. 극 중에서는 타이거라고 불리는데, 사나운 호랑이라기 보다 귀여운 고양이 정도의 역할로 만족한다. 아파트까지 안내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는 도중 하차.
영화가 엔딩으로 달려가면서 지하에서부터 좀비로 변한 이은호 중사의 부하들과 싸우면서 닥터 크레이지의 핵심 실험실이 있는 8층까지 가는 과정은 마치 게임을 클리어하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 준비한 무기와 총탄이 떨어지가 자신들을 공격하는 아파트 군단을 처치하고 무기를 챙기라는 마블리의 말에서 역시 사냥꾼답구나 싶더라. 상당히 폭력적인 어포칼립스 시절을 지배하기 위해 물과 식량만큼 중요한 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총 같은 도구라는 점이 시사하는 바도 크다고 생각한다. 깨끗한 물과 식량이 대변하는 가스라이팅이 당근이라면, 바로 물리력을 행사하는 총이 채찍이겠지.
어쨌든 어포칼립스와 좀비라는 소재 때문인지 무언가 강렬한 서사의 부족 때문인지, 결론은 밋밋한 맛이 되어 버렸다.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8층까지 수없이 달려드는 빌런들을 제압하면서 끝판왕 “군인” 권상사와 사랑꾼의 입대결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고나 할까.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재밌었다구. 신인류 창조에 매진하는 계급 간의 투쟁이나 영화에서 살짝 비추는 착취 시스템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지만, 이미 많이 썼고 나의 에너지가 고갈된 모양이다. 이상이다.
[뱀다리] 네이버 블록에도 올렸더니만, 쿠팡 광고로 바로 "악어 고기"가 뜨는 건 뭔데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