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식당 1 심야식당
아베 야로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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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윌리엄 바이넘의 <창의적인 삶을 위한 과학의 역사>를 살펴 보려고 중고서점에 들렀다가 앉은 자리에서 <심야식당> 첫 번째 권을 다 읽었다. 왜 이걸 보면서 어제 봤던 먹텐 생각이 나는 거지.

 

<심야식당>은 마스터가 밤 12시부터 아침 7시까지 운영하는 식당이다. 아무래도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밤손님들이 많이 찾는다. 그리고 그들 모두 한자락씩 이야기 보따리를 품고 있다. 마스터는 별 거 아닌 요리로 손님을 맞이한다. 물론 터무니없는 요리를 요구하는 진상들도 있지만, 점잖게 그들을 내쫓는다. 모름지기 그런 품과 재료가 많이 소모되는 요리라면 값비싼 레스토랑에 가야할 것이다. 허름한 <심야식당>에서 그런 요리를 요구하지 말지니.

 

나폴리 출신 후리오(?)인가 하는 친구는 심야식당에서 처음으로 나폴리탄 파스타를 먹어 봤단다. 그도 그럴 것이 나폴리탄 파스타의 원조는 이탈리아 나폴 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긴 캘리포니아 롤의 원산지가 일본이 아닌 것처럼 말이지. 심야식당에서 스승을 만난 후리오는 고향에서 출동한 식구들에 강제 연행되어 끌려 갔다지. 이런 소소한 이야기들이 수를 놓는다.

 

자식 자랑을 늘어지게 하던 야마모토인가 하는 손님은 십대 소녀 딸의 갑작스런 임신 소식에 기겁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마 마스터에게 자신의 딸에게 줄 도시락을 주문했지. 딸이 사는 곳에 가서 조용히 문고리에 도시락을 걸어 두고 발걸음을 돌리는 아버지의 마음이란. 그리고 다음해 봄에 딸을 꼭 닮은 손주 자랑에 나선다.

 

열 몇 가지 에피소드들에서 아베 야로 작가는 짧게 끊어치기 기법을 선보인다. 조폭 출신의 켄자키 류 씨나 게이맨 코스즈 같은 경우에는 심야식당의 단골로 계속해서 등장하지만 1회성 단발로 출연했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다양한 삶의 군상을 이어주는 공간으로 심야식당이 작동하고, 그 중심에는 묵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 많은 마스터가 자리하고 있다. 이거야말로 탁월한 밸런스가 아닌가.

 

하루 지난 카레를 고객들에게 무한대(?)로 공급하기도 하고, 멋쟁이 의사 선생에게 빠져 다이어트를 하면서 동시에 요요현상에 시달리는 고객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는 마스터. 아마 성시경이 요리를 할 줄 안다면 이런 마스터에 적합한 캐릭터가 아닐지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사는 집 근처에 이런 마스터가 운영하는 술집이 있다면 나도 단골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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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너튜브를 통해서 한국어 자막이 달린 <심야식당> 두어편을 봤다. 사실 시간이 좀 촉박해서 만화는 슬렁슬렁 봤다고 고백해야지 싶다. 일본 도라마는 훨씬 더 짜임새와 밀도가 높았다.

 

네코맘마의 주인공 엔카 가수 치도리 미유키의 경우를 보자. 어느날 6시반 정도 마스터가 신주쿠 골목의 메시야’(동네밥집)의 문을 닫으려고 하던 차에 무명의 여가수 지망생 치도리 미유키가 등장해서 네코맘마 흰쌀밥에 가다랑어포를 얹어 달라고 한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흰밥에 마스터는 바짝 말린 가다랑어포를 직접 대패에 갈아서 얹어 준다. 그리고 어찌어찌해서 메시야에서 라이브를 하던 치도리 미유키는 대스타의 반열에 올랐다가 병에 걸려 죽고 만다. 그녀가 가고 난 뒤에, 진짜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마스터. 일본 갬성이 폭발하는 순간 이 아니었나.

 

간간히 요리에 대해서도 도라마는 설명해준다. 별 것도 아닌 계란말이를 촉촉하게 만드는 방법을 게이바 사장 코스즈 상이 등장해서 소개한다. 서로의 직업(?)을 좋아하지 않지만 류 짱과 사이 좋게 계란말이와 문어모양 비엔나 소시지를 나눠 먹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에 이미 ASMR의 효과를 잘 알았는지 요리하는 소리 그리고 그렇게 마스터가 정성 들여 만든 음식을 소리 내어 먹을 적에는 정말 야심한 시간에 뭐라도 맹글어 먹어야 하나 싶더라. 그리고 보니 이십년도 전에 손예진의 드라마 데뷔작 <맛있는 청혼>을 보고 그렇게들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지 아마.

 

개인적으로 마스터의 왼쪽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궁금한데, 아마 나중에 이것도 풀어주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고 싶은데, <심야식당>도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긴 하지만 역시나 관외대출 불가라고 한다. 천상 도서관에 갈 때마다 조금씩 읽어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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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10-19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고놈의 관외대출....요건 그래픽노블도 아닌데 또 왜, 벽이 높네요. 레삭매냐님의 책사랑 방훼꾼.

˝심야˝라는 시간이 주는 매력이 있겠어요? 그시간대 손님에는 어린이는 아예 없겠네요?^^

레삭매냐 2023-10-19 12:50   좋아요 1 | URL
아 맞습니다.

심야라는 시간이 아예 아해들을
배제하는 그런 요소가 있었네요.
예리하십네다 고저.

밤에는 좀 더 센치해지는 그런
갬성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대화의 밀도도 깊어지구요 ^^

서니데이 2023-10-19 12: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심야식당 오랜만이네요. 전에 드라마도 조금 본 적이 있는데, 지금은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많지는 않은 것 같아요. 드라마에서도 아마 가수 지망생 편은 있었던 것 같아요. 성공하는 순간에 찾아오는 불운이 아쉽게 느껴졌던 것 같네요.
심야식당이 집 근처에 있다면 가끔 가볼 것 같아요. 특별한 요리가 아니어도 신기할 것 같아서요.
잘읽었습니다. 레삭매냐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3-10-19 12:51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어렵게 성공한 엔카 가수
가 결국 사망하는 에피가 참... 그렇
더라구요.

저도 고런 심야식당이 있다면 들러
보고 싶어지지 않나 싶습니다.

유부만두 2023-10-20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심야식당은 한국판 중국판도 드라마로 만들어졌어요. 중국판은 사람들 사연도 다채롭지만 (액션이 더 나옴) 음식 영상이 꽤 자극적이에요. 공복에 보면 위험할 정도에요.

레삭매냐 2023-10-24 08:37   좋아요 0 | URL
크하,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 그리고
중국판까지 있군요 기래.

중국 버전이 왠지 궁금하네요. 허풍
이 쎈 나라니 액션과 음식 모두 자극
적이지 않을까 싶네요 ^^

유부만두 2023-11-09 08:44   좋아요 1 | URL
맞아요. 자극이 강합니다. 조폭들이 우루루 나와요. ㅋ
 
어느 싱글과 시니어의 크루즈 여행기
루시 나이즐리 지음, 조고은 옮김 / 에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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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도서관 방문은 주간행사다. 지난주에도 도서관에 갔고, 짧은 체류 기간 때문에 보통는 그래픽노블을 주로 본다. 우리동네 도서관에서는 대부분의 그래픽노블은 대출이 되지 않고 관내열람만 허용이 된다. 그러니 빠른 시간에 후딱 읽어야 한다. 그날의 픽은 루시 나이슬리라는 작가의 <어느 싱글과 시니어의 크루즈 여행기>였다.

 

1985년 생 루시 나이슬리는 본토박이 뉴요커인 모양이다. 2015년에 나온 이 책의 바탕이 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나선 카리브해 크루즈 여행 당시 그는 프리랜서였던 모양이다. 거의 아흔 줄의 할아버지는 2차대전 참전용사로 관측기(?) 조종사셨고, 할머니는 평생 교사로 일하셨다. 다른 가족들은 너무 바쁘다는 이유로 노인들을 모시지 못하고 그나마 시간적 여유가 있던 저자가 크루즈 여행이라는 십자가를 지게 됐다.

 

치매에 시달리시는 저자의 조부모들을 모시기는 처음부터 쉽지 않은 미션이었다. 할아버지는 바지에 실례를 하셨고... 그런 할아버지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과 루시 나이슬리는 배틀도 마다하지 않을 기세다. 그렇다, 상대적으로 젊은 우리들은 우리도 언젠가 그들처럼 되고 또 죽는다는 사실을 시시각각 망각하면서 살고 있다. 아니 그 사실 자체를 외면하면서 살고 싶은 게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점은 루시 나이슬리는 그 어느 때보다 죽음이 자신의 근처에 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 자신도 따뜻한 카리브 바다를 즐기고 싶지만, 항상 앞서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챙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그러다 잠을 설치기 일쑤다. 동시에 1년 전, 자유로운 여행을 하면서 만난 스웨덴 청년과의 썸의 추억도 등장한다. 그 땐 그랬지 하면서. 롱디 관계는 어렵고, 또 그런 저런 이유로 멋쟁이와의 만남은 지속될 수 없었다.

 

크루즈 정원이 4,700명이라고 했던가? 정말 많은 인원들이 승선해야 하는 이유로 배에 타는 데만 세 시간이 걸렸다고. 크루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현재진행형이라면, 각 에피소드 말미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할아버지가 유럽 전선에 파견되었을 때 경험한 것들의 기록이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예비군에 들어오라는 어느 모병관(?)의 의견을 단호하게 할아버지는 거절했다고 한다. 이미 조국에 대한 의무는 그 정도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어디에 하소연할 데가 없어서 하버드에서 문학교수로 일하는 아버지에게 분당 4.5달러를 내고 10분 통화를 하기도 하는 루시 나이슬리. 자신도 대학을 나오기는 했지만, 노마드 같은 삶을 살기에 인생에서 학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조부모님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내가 보기에 씨잘데기 없는 걱정을 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런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부제인 트래블로그를 무사히 마친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무지 힘들었겠지만, 이런 경험이 <어느 싱글과 시니어의 크루즈 여행기>의 바탕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작가들에게 남이 하지 않은 경험이야말로 좋은 글감이 되기 마련이니까.

 

동시에 어쩌면 곧 돌아가실 지도 모를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일종의 부채의식을 갚았다는 차원에서 뿌듯한 감정도 들지 않았을까. 바쁘다는 이유로 자식도 마다하는 동반여행이라고 적고 실제로는 고생길을 감당한 자랑스러운 손녀의 위업을. 게다가 이런 멋진 작품까지 썼다면 더 바랄 게 없지 않나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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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3-10-17 21: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픽노블 대출이 안 되는 도서관이 있다니, 믿을 수 없어요. 사전 수준의 참고도서가 아닌데 왜 빌려주지 않은 걸까요? ^^;;

얄라알라 2023-10-18 02:20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그래픽 노블은 구입 신청하는 족족 반려 당해 본 경험은 있지만
관내열람만 허용하는 경우는 첨 들어봤어요^^;;;

레삭매냐 2023-10-18 09:53   좋아요 0 | URL
모든 그래픽노블이 그런 건 아니구요...

어떤 그래픽노블들은 관외대출을 해주지
않더라구요. 아베 야로의 <심야식당>
도 마찬가지구요... 흠 -

레삭매냐 2023-10-18 09:54   좋아요 0 | URL
[얄라얄라님] 저도 하도 뻰찌를 먹어서
이젠 아예 그래픽노블은 희망도서 신청
을 하지 않는답니다 ㅠㅠ

얄라알라 2023-10-18 09: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너무 뻰지?를 많이 줘요.....그래도 [조지오웰] 그래픽노블은 읽었네요. 먼 도서관에서 구해서

레삭매냐 2023-10-18 11:10   좋아요 1 | URL
아 그러시군요.

전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그래픽노블을 만나 보고 싶은데
제 순서가 도통 오질 않네요 -

얄라알라 2023-10-18 1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Dune 그래픽노블도.뺀지.맞아서 못봤어요.영화는.2024년.개봉^^;;;

레삭매냐 2023-10-18 19:26   좋아요 1 | URL
아, 저희 동네 도서관에는 다행히도
듄 2탄이 있어서 빌려 보았답니다.

올해 11월 개봉 예정이라고 했는데
작가조합 파업 이슈로 아마 개봉이
연기된 모양이네요. 내년을 기대해
봅니다 고저.

얄라알라 2023-10-18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샥매냐님 동네로 책.원정을 가볼까요?^^ㅋ

레삭매냐 2023-10-19 12:49   좋아요 0 | URL
원정 고고씽~이옵니다 !

그레이스 2023-10-22 2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정말 쉽지 않은 여행을 했군요.
그러나 그것이 글감이 되었다는...!
레삭메냐님에게 독자에게 메멘토 모리를 전하는....!
가끔은 진부하지만 칼날 같은 진실이 있죠!

레삭매냐 2023-10-24 08:38   좋아요 1 | URL
정확한 판단이십니다 -
칼날 같은 진실, 결국 우리 모두
는 언젠고 소멸할 존재라는.

다만 그 사실을 망각하면서 살
고 있을 뿐.
 
남쪽으로 튀어! 1 오늘의 일본문학 3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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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인데 아프다. 4일 중에 3일을 앓고 있다. 그래도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구나. 책쟁이의 숙명이라고나 할까. 인천에 갔다가, 무언가 재미난 책이 없나 두리번거리다가 언제 샀는지도 모르는 그런 책을 두 권 만났다. <남쪽으로 튀어!> 오쿠다 히데오의 책이다. 그리고 내가 한동안 괴짜 의사 이라부가 등장하는 <공중그네> 시리즈를 열심히 읽지 않았던가. 명절에 제격인 책을 만났다. 그리고 700쪽 짜리 책을 단박에 읽어 버렸다.

 

시간적 배경은 2005년 봄의 어느 때쯤 그리고 공간은 도쿄도 나카노 어디라고. 내가 일본 지명에 대해 좀 더 안다면 지리적 인과관계를 알겠지만, 그런 건 모르고 그렇다고 해서 예전처럼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보지도 않는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읽는다.

 

소설 <남쪽으로 튀어>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건들은 11살 짜리 초등학교 6학년 우에하라 지로의 시선으로 처리된다. 과거 혁공동 출신의 전설적 투사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지닌 아버지 이치로, 동네에서 자그마한 찻집 <아르가타>를 운영하는 어머니 사쿠라, 9살 터울의 누나 교코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등학교 4학년 모모코가 우에하라 집안의 구성원들이다.

 

아버지는 말은 프리라이터라고 하지만, 거의 백수에 가까운 존재다. 딱히 하는 일은 없다. 대신 반국가주의 아나키스트답게 국민연금과 세금 따위는 낼 수 없다면 공무원들과 그야말로 전쟁을 치른다. 아마 한국의 사회복지 담당자들이 이런 사상인간을 만나게 된다면 정말 어떨지 사실 좀 궁금하긴 했다. 이치로 아저씨는 그냥 돈이 아까워서 못내겠다는 게 아니라, 국가가 왜 필요한가 그리고 내 자유의지로 살겠다는데 왜 자신의 삶에 간섭하겠냐는 아니키스트인 동시에 어느 지도자를 떠올리게 하는 절대 자유주의자이기도 하다.

 

지로는 여느 십대 초반의 아이들처럼 준과 무카이 그리고 구로키 같은 친구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낸다. , 이치로 아저씨는 학교에도 꼭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특이한 인물이다. 그리고 어린 지로의 삶을 대혼란과 고통으로 몰아넣은 빌런으로 중학생 가쓰가 등장한다.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악직 학폭 주동자이자 아이들을 돈을 뜯는 최악의 악당이다. 어른들은 이런 악당의 존재를 어른들에게 알리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제재는 일시적인 것일 뿐 그들의 보복은 예상보다 집요하고 악랄하다.

 

아들 지로의 이런 고민을 주워들은 아버지 이치로는 혁공동 전사답게 당당하게 빌런에게 맞서 싸우라고 주문한다. 자신이 나서서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그리고 쇠파이프를 이용하라는 혁공동 투사다운 팁을 알려준다. 세상에나, 이게 아버지가 할 말인가. 어쨌든 가쓰 문제는 어느새 아버지의 식객으로 우에하라 가문에 침투한 나카무라 아라키 씨가 말끔하게 해결해 준다. 문제아 구로키와 동반으로 가출을 감행하기도 하지만, 큰 일탈은 아니고 작은 해프닝 정도로 끝난다. 어쨌든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세상의 간단한 이치리를 아버지 이치로는 아들 지로에게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남쪽으로 튀어>는 성장소설의 전범을 보여주기도 한다.

 

세상 친근하던 아라키 아저씨의 테러가 공론화되면서, 우에하라 집안은 결국 조용하게 살던 나카노에서 쫓겨날 처지에 처한다. , 지로는 가쓰와의 대결에서 세상 조용해 보이는 엄마 사쿠라가 오래 전 누군가를 칼로 찌르고 형무소 생활을 했다는 충격적인 사건을 전해 듣기도 한다. 아버지 이치로는 후텐마 투쟁에서 팬텀기를 불사른 사건의 주모자였다는 말도 들었던가. 분가해서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나는 누나 교코는 지로가 12살이 되는 날, 집안의 비밀에 대해 알려 주겠다는 말도 한다. 아니 이 집구석 잘 돌아가는구나.

 

지로는 엄마 사쿠라가 알고 보니, 잘나가는 전통의상집의 부유한 딸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리고 엄마도 아빠처럼 젊은 시절 잔다르크 뺨치는 활동가였다는 점도. 아니 오쿠다 히데오 작가는 이야기를 도대체 어디로 인도하려고 이렇게 방대한 설정을 짰단 말인가. 어찌어찌해서 근 20년간 의절하고 살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그리고 외삼촌 가족을 만나게 되는 지로와 모모코. 하지만, 몇 번의 방문을 통해 자신의 사촌들이 자신들과 다른 세계에 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라키 사건을 거치고 전광석화처럼 오키나와 이리오모테 아이주가 결정되면서, 외할머니 집과의 인연은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다. 개인적으로 이 집안과의 인연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오키나와에 정착한 우에하라 집안이 개발 저지 투쟁을 위한 총력전에 투입되면서 휘발해 버렸다.

 

오키나와에 가서는 상라 어르신과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우에하라 가족들은 큰 위기 없이 정착할 것처럼 보였다. 대도시 도쿄에서는 천지분간하지 못하고 날뛰던 아버지 이치로 역시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외딴 섬의 오지에서는 자급자족을 모토로 삼아, 가족을 위한 치열한 보급투쟁에 나선다. 2005년에 푸세식 화장실을 사용해야 하는 지로와 모모코의 의향 따위는 가뿐하게 무시하고 완벽하게 현지에 적응한다.

 

지로의 증조부 간진 어른이 오키나와 현지에 남긴 전설의 광휘는 대단했다. 선대의 조상들이 남긴 후광을 후손들이 받는다고 해야 할까. 마을 사람들이 들려주는 아카하치 집안의 전설에 대해 굳이 반론을 제기하지 않으면서, 아버지 이치로는 지로에게 인간은 모두가 전설을 원하는 법이라고 말한다.

 

과연 우에하라 이치로는 모든 불의에 대항해서 맞서 싸운 반골 조상들의 후예다웠다. 도쿄에서 긴급하게 최소한의 짐만으로 오키나와로 튀었지만, 현지 사람들은 간진 어른의 손자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마치 자기 집안일을 하듯, 음식을 마련해서 대접하고 각종 생필품을 물론이고 먹거리들을 하루가 멀다하고 제공한다. 그리고 폐허가 된 집을 수리해서, 자기네 집 드나들 듯 방문해서 소주를 마시고 사는 이야기들을 나눈다.

 

인스타에서 보니 우리네도 언젠가 그런 적이 있다고 하던데, 과연 이리오모테 섬이야말로 우에하라들이 꿈꾸던 그런 낙원이자 이상향이 아니었을까. 가족들이 느낀 행복한 순간들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리조트 개발 문제가 등장하면서, 애써 터를 일군 우에하라들의 거처가 도쿄의 개발사의 사주를 받은 현지 하청업자들의 불도저에 파괴될 위기에 처한다. , 우에하라들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우리 사회에 과연 변혁이 가능한가라는 거창한 담론을 오쿠다 히데오 작가는 철지난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전설적 투사 우에하라 이치로 가족의 좌충우돌 소동극에 녹여냈다. 국가란 무엇인가? 왜 국가라는 이름의 권력이 무슨 권리로 나의 자유를 통제하고 억압한단 말인가? 우에하라 이치로는 전통 사회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로 그리고 다시 자유주의자로 계속해서 변신을 거듭한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에 근거한 삶을 산다. 어떤 점에서 이치로는 극단적 자유주의자처럼 보인다. 그냥 자신을 자유롭게 살게 놔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개인이 생존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의식주까지 책임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미래의 사회보장제도라는 미명 아래, 세금과 세금에 준하는 국민연금을 뜯어가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이치로 아저씨의 투쟁이 일견 수긍이 갔다. 국가가 개인의 안전과 생명을 책임지지 못한다면 왜 존재해야 하는지 나는 묻고 싶다.

 

오키나와 리조트 개발저지 투쟁 과정에서 등장하는 매스 미디어의 과다경쟁에 대해서도 오쿠다 히데오 작가는 일침을 놓는다. 과거 전설적 투사가 등장해서, 오키나와에서 새로운 투쟁을 시작했다. 자극적 기사를 원하는 언론들의 특종 경쟁이 시작됐다. 그들은 균형 잡힌 보도나 양측의 주장을 공정하게 다루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무대와 판에 전설적 영웅이 등장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지 않았을까. 전설과 유대인 뜨내기 여행자가 불도저 군단을 함정에 빠트리고, 체포되었다가 도주한 용의자들이 다이너마이트로 현지개발사의 자재창고를 폭파하는 서사를 도대체 어디서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소설 제목에 등장하는 남쪽은 어쩌면 우리 도시인들이 이제는 영원히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방향이 아닐까 싶다. 기억이 쇠락한 자리에 채색된 전설이 채워지면서 갈 수 없게 된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은 짚어낸다. 나도 파이파티로마에 가보고 싶어졌다.


[뱀다리] 아마 이 책은 십년도 전에 사둔 책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 포인트 하나, 언제고 산 책은 반드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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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3-10-01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고, 지금은 괜찮으신지. 김윤석이 주인공이었던 영화 재밌게 본 기억이 있어요.

레삭매냐 2023-10-01 21:02   좋아요 0 | URL
그래도 조금 쉬어서 많이 나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자목련님.

김윤석 배우가 나오는 한국영화가 있네요.
전 당연히 일본 영화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페넬로페 2023-10-01 1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빨리 쾌차히세요^^

레삭매냐 2023-10-01 21:0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페넬로페님.

아직 명절이 이틀 남았으니
그 안에 낫겠지요. 캄솨 ~~~

자성지 2023-10-01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픈 중에도 책을 놓지 않는 레삭매냐 님 쾌차를 바랍니다.

레삭매냐 2023-10-01 21:04   좋아요 0 | URL
배우자들이 상대방의 취미생활로
가장 좋아하는 게 독서와 영화감상이
라고 하더군요 ^^

아파도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책 읽는
게 아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자성지님.

cyrus 2023-10-01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파도 손에 책을 놓지 않으려는 정신. 아주 좋아요. 연휴 아직 남았으니 끝나기 전에 푹 쉬시면서 몸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오길 바랍니다. ^^

레삭매냐 2023-10-01 21:05   좋아요 0 | URL
평소에 게을러졌던 독서 욕망이
아프면서 부스트업~ 된 게 아닌가.

빨랑 나서서 주말 달궁 모임에 출격
해야 하는데 걱정입니다요.
 
본격 한중일 세계사 16 - 삼국간섭과 갑오개혁 본격 한중일 세계사 16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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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가 좀 뒤바뀌긴 했지만, 도서관 열람 차례가 되지 않아 부득이하게 먼저 볼 수 있는 책부터 읽다 보니 동학운동과 청일전쟁 나머지 그리고 갑오개혁 편이 뒤로 밀리게 되었다. 이런 것 또한 책읽기의 즐거움 중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복습한다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한중일 삼국의 근대사를 다루는 방대한 작업에 도전한 작가와 그리고 그 작가를 꾸준하게 후원하는 출판사의 역량에 대해 칭찬과 격려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쨕쨕쨕.

 

전편에서 1차 동학농민운동의 전개와 청일전쟁의 발발 과정을 살펴봤다. 일본군의 주력 부대가 전쟁의 페이즈 2를 전개하기 위해 만주로 몰려갔다. 일본군과 경군이 부재한 사이, 호남 일대는 동학군이 휩쓸어 버렸다. 집강소를 중심으로 해서 폐정개혁안이 실시됐다. 특히 남원의 접주 김개남은 래디컬리스트답게 개혁안 중에서 최고봉인 신분제 철폐에 주력했던 모양이다. 조선 오백년 반상질서를 무너뜨리는 그의 기백에 그저 놀랄 뿐이었다.

 

서울의 흥선대원군은 친일 갑오파정권에 대항해서 동학군에게 밀지를 보내 내응하는 전략을 세운다. 과연 노회한 정치인이 아닐 수 없다. 자신에게 번번히 대항하는 아들 대신, 손자인 이준용을 군주로 삼아 다시 한 번 화려하게 권력의 중심에 서겠다는 권력의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보니 민씨 척족만큼이나 흥선대원군 역시 조선 국가 몰락에 책임이 있는 인사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녹두장군 전봉준은 그동안 미적대전 북접의 승인을 받아 다시 한 번 두 번째 동학농민운동을 개시하기에 이른다. 삼례에 집결해서 위력을 과시한 동학군은 자신들을 토벌하러 나선 경군과 일본군과 대항하기 위해 공주 진격에 나선다. 스스로 십만 군세라고 했지만 아마 그 정도는 아닌 것 같고, 어쨌든 경군보다는 인적으로 우세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일본은 주력 부대가 모두 만주로 진공한 상태에서, 본국에 있던 예비대대를 동원해서 조선 경군 지원에 나선다.

 

그리고 189412월 공주 우금치에서 맞붙은 동학군과 토벌군의 전투에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경군/일본군에게 동학군 주력부대가 갈려 나가면서 전국을 호령하던 녹두장군의 기세가 꺾여 버렸다. 그리고 관군에게 추격당하던 동학당의 전봉준 위하 접주들이 포로로 잡혀 처형당했다. 김개남은 잡힌 뒤 바로 사형당했고, 나머지 동학당의 리더들은 형식적 재판과정을 거친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근왕척왜 슬로건을 걸고 사회개혁에 나선 동학혁명의 시작은 창대했으나, 엔딩은 초라했다. 여러 요건의 미비로 처음부터 봉건질서 타파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지 않았나 싶다.

 

조정에서 이후 거의 평정된 동학운동에 대한 관대한 처우를 약속했지만, 동학운동이 보여준 기존 사회 질서 유린에 기겁한 민보군을 필두로 한 기득권층은 동학이라면 아주 치를 떨면서 잔혹한 사적 제재를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화형이 있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다음 이야기는 청일전쟁의 남은 이야기다. 이미 조선에서 청군에게 대승한 일본군은 천년에 한 번 올까말까한 기세로 압록강을 넘어 만주까지 진출하기에 이른다. 청나라는 조속한 전쟁의 종결을 바라지만, 일본의 생각은 달랐다. 어떻게든 전선을 넓혀 이후의 종전/평화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게 일본 전쟁지도부의 목적이었다.

 

다된 밥에 숟가락을 얹기 위해 등장한 제1군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삽질로 동계작전에서 전사자의 열배에 달하는 병사자가 등장한 건 10년 뒤에 벌어질 러일전쟁의 전초전이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일본군은 요동의 요충지 하이청과 요동반도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진저우-다롄 그리고 뤼순항을 잇달아 함락시킨다. 이런 기세라면 텐진과 베이징까지도 도달할 기세였다. 하지만 훗날 일본군의 잔악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뤼순 대학살로 상승군의 이미지가 나락으로 가버렸다. 웨이하이웨이에서 일본 해군이 이홍장이 애써 기른 북양함대를 박살낸 건 천운이기도 했다.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던 청나라는 결국 러시아를 동원해서(비밀협약을 맺은 뒤) 종전협상을 개시한다. 일본은 전쟁의 목적이었던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 지위에서 해방시켜 자신의 보호국으로 삼아 버리고, 2억냥에 달하는 막대한 전비 그리고 요동반도와 대만 할양이라는 두둑한 보상을 얻는다. 그나마 종전협상을 위해 시모노세키를 방문한 전권대신 이홍장의 암살 시도가 없었다면 그 이상을 얻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굽시니스트 작가가 이 지점에서 지적해 주는 사실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우선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래, 부국강병을 국가의 모토로 삼아 시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 교육에 나섰다. 현대식 학제 개편과 교육 제도 도입으로 농민들을 미래의 병사들로 양성하는데 성공했고, 청일전쟁으로 그 덕을 톡톡히 볼 수가 있었다. 일본 국왕에 충성하고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이른바 황군은 일본 제국주의의 선봉으로 조선과 중국 더 나아가 남방전선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막대한 전쟁 특수는 애초 전쟁에 부정적이었던 자유당과 번벌 메이지 정부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시민들까지 정부 편을 들게 만들었다. 아니 전쟁이 이렇게 이윤이 많이 남는 장사였단 말인가? 원래 전쟁 목표였던 조선에서의 우월한 지위의 확보는 물론이고 새로운 광활한 영토와 일본 국가 재정의 몇 년 치에 해당하는 전쟁배상금으로 열도는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탕이었다. 일본은 청나라에게 뜯어낸 전쟁배상금을 종자돈 삼아 러일전쟁에서의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고, 헤어 나올 수 없는 군국주의의 길을 걷게 됐다.

 

다음 단계는 저자가 트리플 겐세이라고 명명한 삼국간섭이다. 노회한 정객 이홍장은 일본과 굴욕적인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기에 앞서 러시아와 비밀협약을 맺었다. 아마 요동 반도 할양을 대비한 것이었을까. 서구 열강이 노리고 있던 중국에서의 이권을 매개로 삼아, 극동에 부쩍 관심을 보이고 있던 러시아를 추동해서 독일과 프랑스까지 파트너 삼아 일본으로 여금 요동 반도를 토해 내게 만든 것이다.

 

서구 열강 입장에서도 중국에서 일본의 부상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일본이 중국이라는 파이를 많이 먹을수록 자신들이 먹을 게 줄어드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 아니었던가. 훗날 태평양전쟁의 서전이 되는 중일전쟁에서도 미국을 필두로 한 서구 열강은 일관되게 중국 편을 들었다. 내가 먹지 못할 바에야, 다른 놈들도 안된다는 생각의 발로가 아니었나 싶다.

 

18947, 경복궁 폴런(fallen)으로 시작된 갑오경장 역시 한계가 뚜렷한 개혁 시도였다. 친일파 내각이 일본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된 개혁이 이루어질 리 만무했다. 그나마 어윤중이 탁지부에서 세금 징수를 일원화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일본의 보호국의 된 마당에, 자력으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착각이 아니었나 싶다. 그 와중에도 갑오파, 갑신파 그리고 정동파로 나뉘어 권력투쟁을 하는 모습이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 군주 고종이 조선조 내내 비장의 무기였던 환국 키워드를 사용해서, 박박 정권의 박영효를 실각시키자 일본에서는 드디어 미우라 고로 특명전권공사를 기용해서 이른바 여우사냥에 나선다.

 

역시 이번에도 격동의 구한말에 한반도를 중심으로 해서 펼쳐진 다양한 사건사고들을 접할 수가 있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좌절, 요동반도를 삼키겠다는 일본의 야욕이 꺾인 트리플 겐세이의 실상(러시아의 외교적 승전보), 청일전쟁을 통한 군국주의 국가 일본의 탄생의 과정 정도가 본격 한중일 세계사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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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골드 - 이슬람 제국의 '새하얀 금' 백인 노예들의 잊혀진 이야기 가일스 밀턴 시리즈 5
가일스 밀턴 지음, 이충섭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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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문자로 이루어진 책은 거의 유일한 정보 전달의 수단이었다. 21세기에는 인터넷과 그에 기반한 너튜브가 그동안 책이 수행해온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아니 대신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니라 거의 완벽하게 대체가 되었던가. 동영상 컨텐츠로 만나게 되는 신속한 정보는 몇 시간 아니 며칠 걸려 읽는 책과 경쟁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올드패션 스타일의 우리 책쟁이들은 책을 포기할 수가 없다. 이런 걸 더딤의 미학이라고 해야 할까. 느린 속도로 수집하는 지식과 정보들을 나는 더 좋아한다.

 

대중역사가 가일스 밀턴과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어느 날 문득 사무라이물이 읽고 싶어졌고, 중고서점에 가서 사무라이키워드로 검색해 보니 <사무라이 윌리엄>이 떴다. 그 책은 17세기 초, 일본에 상륙하게 된 영국 출신 사무라이 미우라 안진(윌리엄 애덤스)의 일대기였다. 가일스 밀턴이 저술한 책들이 궁금해져서 하나하나 컬렉션을 시작했다. <사무라이 윌리엄>을 읽고 나서 <향료전쟁> 그리고 <화이트 골드>를 읽기 시작했는데 후자를 먼저 읽었다.

 

<화이트 골드>에서 저자 가일스 밀턴은 역사의 페이지에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화이트 골드, 백인노예들의 처절한 삶의 추적에 나선다. 아니 백인노예가 있었다고? 노예하면 아프리카에서 북아메리카로 끌려간 흑인노예들 이야기가 아니었나? 수세기 동안 지중해 연안에서 맹활약한 이슬람 바르바리 해적들에게 영국과 네덜란드, 에스파냐 유럽 각지의 선박들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배에 실린 화물들 외에도 그들이 진짜 노리던 상품(?)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백인노예들이었다.

 

저자 가일스 밀턴은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도서관에서 수많은 자료들을 섭렵했다. 당시 편지들은 물론이고, <화이트 골드>의 지분을 양분한 영국 웨스트컨트리 콘월 펜린 출신의 백인노예 토머스 펠로우의 일대기의 상당 부분을 참조했다. 이렇게 멋진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료 조사를 위한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새삼 실감했다.

 

171511살 짜리 꼬마 토머스 펠로우는 집에서 얌전히 라틴어 공부나 하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원양 항해에 나섰다. 그의 꿈이 물거품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선장인 삼촌 존 펠로우의 배에 올랐타가 살레 해적에게 포로가 되어 자그마치 23년이나 되는 노예생활을 하게 됐다.

 

살레 해적들은 당시 모로코의 술탄이었던 물라이 이스마일의 사주를 받아 백인노예들을 납치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심지어 영국 본토에까지 가서 노예사냥을 벌였다. 살레의 노예시장에서 두당 35파운드에 팔린 백인노예들은 이른바 노예우리에 갇혀 상상을 초월하는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게 된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유인이었던 꼬모 토머스 펠로우의 운명을 생각해 보라.

 

토머스 펠로우의 23년 간의 노예생활이 <화이트 골드>의 한 축을 차지한다면, 그를 포로로 잡은 술탄 물라이 이스마일의 엽기적 행태도 이 책을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가 분명하다. 오스만 투르크를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렇듯 물라이 이스마일 역시 왕위계승 과정에서 골육상쟁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권력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만한 형제 친지들을 모조리 학살해 버렸다. 그가 부리던 검은 친위대는 술탄의 명령에 절대복종했다.

 

바르바리 해적들이 잡아온 여자 백인노예들은 자신의 하렘에 넣었고, 쓸만한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판단한 남자노예들은 모두 제국의 수도 메크네스의 화려하고 웅장한 성곽 건설에 동원됐다. 술탄의 비인도적 처사는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저자의 서술에 따르면 술탄의 잔혹함이야말로 어쩌면 제국의 통치하는 원동력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자식의 자식이라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건장한 흑인 노예를 동원해서 어쩌면 자신의 후계자가 될 지도 모를 아들의 목을 부러뜨리는 장면에서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영국을 필두로 한 서방국가들에게 바르바리 해적들의 존재는 눈엣가시 같은 게 아니었을까. 영국에서는 노예로 잡힌 자국의 포로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수차례 특사들을 메크네스에 파견해서 술탄의 비위를 맞추고, 해상에서의 협상협상을 진행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물라이 이스마일은 수차례 협상의 갱신과 파기를 번복했다. 듣기만 해도 짜증나는 군주가 아닌가. 게다가 무슬림 통치자들은 대다수가 기독교도들인 백인노예들의 개종을 재미삼아 시도했다. 백인노예들이 반항할수록 그들이 실시하는 족발치기같은 가혹한 고문은 지속됐다. 우리의 어린 포로 토머스 펠로우 역시 고문과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배교자가 되었다.

 

포로석방 협상에서 이런 배교자들은 제외가 되었다. 강제의 의한 배교에도 불구하고, 그런 점들은 고려의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형식주의야말로 현대 외교에도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부조리가 아닐까 싶다. 토머스 펠로우는 이십대 무렵에 강제로 결혼해서, 그곳에서 딸도 낳고 어려서부터 배운 아랍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면서 젤라바를 걸친 배교자 백인노예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술탄의 신임을 얻어 백인노예 출신 용병이 되어 술탄에게 반항하는 제국의 이곳저곳을 진압하기 위해 각지를 누비기도 했다. 그러다 부상을 당하기도 하고 고향 펜린을 잊지 못해 탈출 시도도 해봤지만, 모두 실패로 귀결됐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악랄한 독재자 물라이 이스마일의 죽음과 그에 이어진 후계자간의 내전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결국 토머스 펠로우는 영원히 살 것 같았던 물라이 이스마일의 사후, 아내와 딸이 죽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몸이 된 상태에서 결국 모로코를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영국령인 지브롤터를 걸쳐 런던 그리고 마침내 23년 만에 고향땅인 펜린을 밟는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토머스 펠로우가 포로가 된 지 근 100년 만인 18168월 펠로우의 사돈의 팔촌 조카 뻘 정도되는 에드워드 펠류가 이끄는 영국 대함대가 북아프리카 백인노예 무역의 거점도시인 알제를 공격해서 수백 년에 걸친 노예무역을 종식시키는데 성공한다. 영국인들에 이어 들어온 프랑스인들이 알제리를 식민지로 삼아 새로운 형태의 노예시스템을 가동시키는 건 그 후의 일이었다. 어쨌든 에드워드 펠류의 활약으로 트리폴리와 알제 그리고 살레 일대의 백인노예 무역을 일소할 수가 있었다. 토머스 펠로우의 후예들은 그 뒤로 노예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떨쳐 버리고 바다로 자유롭게 나갈 수가 있었다.

 

최근 소말리 해변을 중심으로 활약 중인 21세기 해적단의 모습을 보면서 권력과 행정의 공백기를 파고드는 무법자 해적들의 실체를 엿보게 됐다. 18세기 초반, 비슷한 궤적의 그리던 살레의 해적들은 아예 권력집단과 결탁해서 해상에서의 자유로운 무역을 방해하고 선박에 탑승하고 있던 백인들을 포로로 잡아다가 노예로 팔아먹었다. 이 책의 제목인 화이트 골드가 암시하듯이 해적드에게 포로로 인간들이야말로 수지가 맞는 상품이었다. 술탄 물라이 이스마일은 그들을 동원해서 정치적 경쟁자들을 제거할 수가 있었고, 그들이 보유한 무기 제작기술 혹은 건축술로 자기가 건설한 술탄 제국의 질서와 안녕을 모도했다. 또 서방 제국들이 비싼 몸값을 내고 자국 출신의 노예들을 되산다고 하면서 술탄의 비위를 맞추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지 않았을까.

 

서사의 다른 축에서 토머스 펠로우라는 기구한 운명의 사나이를 배치해서 사실감을 더하는 작법으로 가일스 밀턴은 독자들을 매혹시켰다. 과연 글 좀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아쉬운 건 토머스가 펠로우가 고향에 도착한 다음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빠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위키피디아를 검색해 보니 펜린으로 돌아온 토머스는 고향에서 돌아온 영웅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게 모든 것이 낯설 뿐이었고 부모님마저 그를 알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고향 펜린이 낯설었고, 오히려 그가 노예 생활을 했던 메크네스가 더 그에게 편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고향으로 돌아온 지 7년 뒤인 1745년에 토머스 펠로우는 죽었다. 눈물과 고통의 아라비안 나이트가 그렇게 끝났다.

 

윌리엄 애덤스/미우란 안진의 경우처럼 익숙한 고향을 떠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디아스포라 같은 삶을 산 문제적 인간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동질감을 느꼈다. 아울러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건을 무대에 올렸다는 점도 높게 평가하고 싶다. 과연 멋진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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