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버드 - 그 사람의 1%가 숨겨진 99%의 진심을 폭로한다면
피에르 아술린 지음, 이효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저명한 전기 작가 피에르 아술린이 쓴 7명의 인물들에 대한 찰나의 미학을 다룬 <로즈버드>를 읽었다. 읽기 전에,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에 나오는 그 ‘로즈버드’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밝혀 주었다. 그리고 후기에서는 다시 한 번 ‘멀티바이오그래피’(multi-biography)라고 이 책의 성격에 대해 정확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우리는 보통 전기(바이오그래피)를 읽을 때, 한 사람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보통 평전 스타일의 책을 접하게 된다. 하지만 피에르 아술린은 특이하게도 모두 해서 7명의 저명한 예술가, 작가, 저항운동가, 명사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그가 말하는 대로,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은 어쩌면 그런 찰나적인 순간포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들과는 상이하게 다른.

첫 번째 이야기는 20세기 초반 영국의 문호라는 호칭을 받던 러디어드 키플링과 그의 외아들 존 키플링과의 애증의 관계로 시작된다. 어려서부터 하나 밖에 없는 아들에게 조국에 대한 의무와 남자로서의 명예를 가르쳐온 키플링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애국주의에 호소하며 참전을 요구하는 글들을 잇달아 발표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아들은 지독한 근시로 인해 징병관에게 퇴짜를 맞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위대한 아버지와 평범하기 그지없는 아들의 관계 가운데, 필연적으로 벌어지게 되는 피할 수 없는 운명과의 조우가 기다린다.

세기의 시선으로, 외눈박이 렌즈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의 지평을 열어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과 저자와의 관계는 좀 더 친밀하게 다가온다. 아무래도 실제적 체험만큼 책을 읽는 이들에게 호소력 깊게 다가오는 부분도 없을 것 같다. 부다페스트의 미술관에 홀로 앉아, 고야의 그림을 바라보며 마음의 데생을 하고 있는 사진의 대가는 과연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었을까. 보고서도 보지 못하고, 사진을 찍고서도 사진을 보지 못하는 운명의 장난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는 이야기는 역시 1981년 세기의 결혼식이라는 이름으로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바로 레이디 다이애나의 에피소드다. 프랑스 특파원 자격으로 현장에서 이 결혼식을 직접 목격한 생생한 현장담을 피에르 아술린은 솔직담백하게 그려내고 있다. 천년왕실의 황태자비로 세상 부러울 것 없는 결혼식을 치렀지만, 과연 그녀는 살아생전에 그 결혼식에서 기대했던 것만큼의 행복을 누렸을까?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이 책 <로즈버드>에서 가장 읽고 싶었던 <장 물랭의 스카프>야말로 백미(白眉)였다. 프랑스 공화국의 나치 독일의 탱크 아래 허무하게 무너지고 있던, 1940년 6월 최연소 도지사로써 저항의 시작이자 그 상징이 된 장 물랭. 국가수반들도 모두가 항복하고 점령군에게 협력하는 마당에, 그는 일개 도지사로 분연히 나치 독일군에게 협력을 거부하고 스스로 명예를 지키기 위해 감금 상태에서 극한의 저항방법을 선택한다.

적군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난 그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신화가 된다. “그는 레지스탕스 그 자체”였다는 작가의 선언만큼 더 적절한 표현도 없을 것 같다. 비록 고뇌 끝에 어쩔 수 없이, 일정 부분 나치의 요구들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에 대한 근거 없는 모함만큼이나 오히려 그의 신화를 전설로 만들어 주었다. 장 물랭은 이 시대의 진정 행동하는 양심이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전형이다.

찰나의 미학의 구현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상당히 평가받을만하다. 하지만 너무나 그 찰나에 집착한 나머지 부분들은 모두 독자들 스스로 찾아야하는 불편함이 배어 있다. 장 물랭의 경우에도 그의 장렬한 최후에 대해서 언급이 될 줄 알았지만, 1940년 6월의 사건들에만 치중할 뿐이었다. 그리고 프랑스 작가들의 글에서 보이는 현학적인 표현들은, 책을 읽는 이로 하여금 체화를 어렵게 한다. 지나치게 개인적인 관계들의 나열도, 우리가 아닌 객체로 부유하게 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타인의 전기를 읽는 것은 어쩌면 모르고 있는 사실들을 알기 위해 떠나는 여로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피에르 아술린의 <로즈버드>는 예의 찰나적인 아름다운 아우라를 유감없이 발산하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환상의 괴수 무벰베를 찾아라 - 와세다 대학 탐험부 특명 프로젝트
다카노 히데유키 지음, 강병혁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기대해 마지않던 다카노 히데유키의 작가 데뷔작이라는 <환상의 괴수 무벰베를 찾아서>를 읽었다. 이미 읽고 있던 책들이 있었지만, 그런걸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살다 보면 스케줄 변경은 다반사이지 않은가 말이다. 알라딘에서 받은 적립금으로 출간이 되기도 전에 주문을 날렸다. 그리고 책을 받자마자 그야말로 익지도 않은 생쌀을 씹듯 그렇게 허겁지겁 다카노가 풀어내는 환상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어쩌면 황당무계하기 그지없는 이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인 일본 와세다 대학교의 탐험동아리에서 시작된다. 동아리 모임에서 충동적으로 읊어낸 콩고 드래곤 프로젝트(Congo Dragon Project:CDP)가 다카노 히데유키의 노력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한다. 다양한 군상의 캐릭터들이 탐험대에 모여 들면서, 모양새가 갖추어지자 탐험에 필요한 기자재 등을 협찬(?) 받으면서, 콩코 텔레호(Lake Tele)에 출몰한다는 괴수 모켈레 무벰베를 찾기 위한 괴짜들의 모험담이 펼쳐진다.

당시 일본과 국교가 없던 콩고에 들어가는데 어찌 아무런 에피소드가 없겠는가. 콩고 정부에 공식적으로 탐험을 요청하는 편지를 쓰고, 관련된 자료들을 모으는 과정 가운데 그들의 뜨거운 열정들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아, 역시 젊음이란 이래서 좋은 걸까. 이십대 초반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신들이 세운 계획들을 밀어붙이는 그들의 모습과, 취업이라는 지상명제와 싸우고 있는 우리네 대학생들의 그것이 씁쓰름하게 교차되고 있었다.

모두 해서 9명의 동아리 CDP 멤버에 두 명의 사회인 멤버들까지 총 11명(피그미족 사진을 찍으러 간 스즈키 씨 제외)은 마침내 콩고 정부의 공식 허가를 받아 목적지 콩고의 텔레호를 향해 출발한다. 물론 목적지까지 가는 데만도 숱한 어려움과 험난한 일정들이 기다리고 있는걸 불문가지다. 어렵사리 배운 링갈라어와 프랑스어는 탐험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는 히데유키의 다른 책 <별난 친구들의 도쿄 표류기>에도 자세히 나와 있으니 참조하시도록.

수생생물 무멤베를 찾기 위해 최심첨단 장비들로 무장한 일단의 일본인 그룹은 마침내 역경 끝에 텔레호에 도착을 해서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무벰베를 찾기 위한 24시간 감시체제를 돌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40여일이 지나도록 무벰베의 모습을 볼 수가 없고 식량이 떨어져서, 야생동물 동물들을 사냥해서 먹고 사는 본말전도의 서바이벌 게임에 돌입하게 된다. 게다가 말라리아에 걸린 멤버들이 속출하고, 가이드들은 반항하고 식량을 삥땅치고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

이 책의 상당부분은 사실에 기반을 둔 이야기지만, 탐험대의 리더 다카노의 개인적인 생각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탐험대원들 하나하나를 생각해야 하는 리더로서의 고독한 위치에서, 얼토당토않게 콩고의 정글 속에서 원시시대로 돌아가 원숭이와 호수의 물고기들 심지어는 고릴라까지 잡아먹게 되는 그런 상황 가운데 그의 고뇌가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위기들은 히데유키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 뭐 어떻게든 되겠지~로 극복해낸다.

자, 이쯤에서 그들의 목표에 대해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겠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그들이 정말 콩고에 가서 찾고자 했던 “모켈레 무벰베”였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사실 괴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아니었을까? 이십대 초반의 젊은이들은 앞으로 그들이 속해 살아가게 될 정형화된 사회에서 평생에 다시없을 기회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고, 자신의 한계를 알아보기 위해 이역만리 콩고에까지 갔었던 게 아닐까 하고 내 멋대로 추측해 본다.

자신들의 목표가 무산되자 그들은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텔레호 주변의 자연을 촬영하고 기록한다. 그리고 다시 보아 마을로 돌아와, 장로 보베와의 모켈레 무벰베를 찾지 위한 마지막 노력은 그야말로 두 사람의 선문답처럼 들린다.

보통 사람이라면 무모하다고 웃으면서 넘길만한 주제를 가지고 이토록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추진했던 팀의 리더 다카노 히데유키에게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다카노 히데유키의 “모켈레 무벰베”(콩고 말로 무지개라고 했던가)를 찾는 탐험이 계속되길 기원해 본다.


※ 내가 찾은 오탈자
1. 게속 → 계속 (129페이지)
2. 전염 → 전념 (257페이지)
3. 맥시코 → 멕시코 (257페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헬로우, 순자 - 쓰면 뱉고, 달면 삼켜라
류예 지음, 양성희 옮김 / 미래사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 어려서부터 다양한 중국 고전을 읽으면서 중국 역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열국지로 시작을 해서, 초한지 그리고 모든 이가 읽는 삼국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고전들은 어린 나에게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과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중에서도 중국 역대 왕조의 기본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은 유가사상은 공자와 맹자를 거쳐 순자에 이르면서 그 완성을 이뤘다고 한다. 이 책 <헬로우, 순자>에서는 순자가 살던 전국시대 말엽 그야말로 갖가지 사상들이 난립하던 백가쟁명의 시기에 다양한 군상들의 생존에 대한 처세술을 모두 40가지 에피소드들을 통해 담고 있다.

책 표지에 나오는 대로 “쓰면 삼키고, 달면 뱉어라”는 말처럼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순자의 사상을 대변해 주는 말이 없을 것 같다. 이 책에서 순자는 궁극적으로 그가 이상적인 인격의 완성체로 생각하고 있는 군자(君子)로서의 삶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배움에 있어서 끊임없이 정진할 것을, 사치하지 말고 검소해야 할 것을, 모든 사람들을 대하는데 있는 외모가 아닌 인격으로 판단할 것을 주문하며 그야말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소소한 일들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순자하면 떠올리게 되는 것이 바로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비교되는 성악설(性惡說)이다. 인간은 모름지기 태어나면서 선한 품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하다는 것이 이 설의 핵심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하지만 <헬로우, 순자>에서는 어쩌면 조금은 왜곡되어 전해지고 있는 순자의 사상에 대해서 날카로운 메스를 가한다. 순자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악하다는 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순자의 성악(性惡)은 인간의 생리적이면서도 심리적인 욕망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말하는 것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달아 악에서 벗어나 선으로 돌아올 것을 훈계하고 있는 것이다. 성선설과의 대비에 있어서도, 상대적인 개념이 아닌 서로 상호보완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 외에도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다는 권학(勸學) 편에 나오는 “언유소화야(言有召禍也)”는 어제 영역회의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느낀 점이기도 하다. 영업특판팀의 부장이 어찌나 말을 많이 하던지(그것도 거의 불필요한 이야기로) 동석한 내내 힘이 들었다. 그리고 주의 깊게 들어 보니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실수하기 쉽고,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많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성악설에 대한 깨달음과 더불어 수신(修身) 편에 나오는 마음의 움직임이 몸의 움직임만 못하다는 행동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배울 수가 있었다. 듣는 것이 보는 것만 못하고, 보는 것이 배움만 못하며, 배우는 것이 실천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만 못하다는 것은 자명한 진리가 아니겠는가. 책을 통해서 배우고 깨달았다면, 우리의 실생활에 적용을 하는 과정 또한 배움의 과정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배우게 됐다.

책의 편집에 있어서는, 우선 원문과 그에 대한 간단한 설명으로 시작을 하고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첫 부분에서는 자세한 설명을 곁들이고 두 번째 부분에서는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을 다룸으로써 균형 잡힌 구성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겉표지의 순자와 진짜 책 표지의 순자와는 다른 일러스트를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딱딱한 모습이 아닌 좀 더 친근한 접근을 시도하는 모습이 참신하게 느껴졌다.

2,000년 전의 순자의 사상들과 처세에 대한 가르침들이 어쩌면 그렇게 예전의 난세에 비유할 만큼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오늘날에도 그렇게 꼭 들어맞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 내가 찾은 오탈자
1. 기원전 -> 기원후 (103페이지)
2. 韋 -> 衛 (119페이지)
3. 침작 -> 침착 (162페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이 짝퉁 라이프 - 2008 제32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고예나 지음 / 민음사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책 <마이 짝퉁 라이프>를 펴들었다. 내가 그전에 마지막으로 읽었던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이 뭐였지? 이만교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이었나? 그게 벌써 8년 전의 일인가 보다. 그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이 공감했었는데……. 근데, 이 책 <마이 짝퉁 라이프>의 작가 고예나 씨는 올해 방년 25세의 나이라고 한다. 그리고 표지의 일러스트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책의 표지는 어쩌면, 그 책의 내용의 반절 정도는 벌써 이미지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주인공 나(극중 인물 이진이)는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는 작가의 분신에 다름이 아니다. 으레 소설들이 그렇듯이 주인공 나와 관계를 엮어 나갈 사이드킥이 필요하다. 그래서 작가는 자유연애주의자인 B와 연애박사라고 할 수 있는 R을 등장시킨다. 그런데, 나중에 그 B와 R을 등장시키는 것으로 보아 실제 인물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소설적 재미가 덧붙여지지 않았더라도 실제로 그런 캐릭터들이라고 한다면, 작가의 실제 삶이 참 재밌을 것 같았다.

이 책을 펴는 순간, 너무 배가 고파서 밥알도 제대로 씹지 않고 마구 삼키는 그런 느낌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만큼 <마이 짝퉁 라이프>는 집중력 강했고, 흥미진진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제목 또한 일품이다. 두 개의 영어 단어 사이에 끼어 버린 “짝퉁”이라니.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첫(?)사랑에도 실패해서 새로운 사랑을 두려워하는 주인공의 자조적인 모습이 “짝퉁”이라는 단어를 통해 책 언저리에 비춰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주인공은 편의점에서 알바로 돈을 벌고, 폐기기간이 아슬아슬하게 지난 편의점 음식들 친구 B와 아주 사이좋게 나눠 먹고, 문자를 주고받으며, 영화를 보러 다니며 동대문시장으로 옷을 사러 다닌다. 이런 행위들에서 무언가 공통점이 느껴지지 않은가? 바로 ‘소비’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그녀가 일하는 편의점은 전형적인 소비를 위한 공간이고, 음식을 먹는 것도 그리고 서로 소통하는 것도 모두 일련의 소비행위들이다. 어쩌면 우리의 사랑, 실연, 질투, 분노와 같은 원초적인 감정들도 이 소비라는 말에 종속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상대방에 대한 감정의 한 오라기까지 소진시켜 버린 주인공은 그 저점에서 반등해서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래서 이 소설은 해피엔딩인가? 그건 모르겠다. 어쨌든 작가가 태어나던 해에 출간된 정비석 선생의 손자병법을 애지중지하던 주인공은 현실세계에 무사히 ‘연착륙’하게 된다. 작가가 삼국지에 나오는 적토마를 언급했을 적에는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했지만, 초패왕 항우의 애마 오추를 연달아 썼을 적에는 정말 경탄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주인공 이진이와 친구 B가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들을 나눠먹고 있는 장면에서,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의 그것이 연상됐다. 이별에는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에는 유통기한이 없는 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디더블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6-4 리졸리 & 아일스 시리즈 4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스릴러 소설에 대한 서평을 쓸 적의 고민 하나. 어떻게 하면 최대한 원작을 스포일링시키지 않으면서 좋은 서평을 쓸 것인가! 보통의 일반소설의 경우에는 살짝살짝 맛보기 식으로 내용을 소개할 수가 있지만 끝까지 내용을 알면 절.대. 안 되는 스릴러 소설에서는 그게 불가능하지 않은가 말이다. 자, 그렇다면 방법은 몇 가지로 축약이 될 수가 있겠다.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등장인물들에 대한 치밀한 분석일 것이다. 그렇다면, 의사 출신의 작가 테스 게리첸이 빚어내는 현란한 스릴러 <바디더블>의 두 주인공인 마우라 아일스와 제인 리졸리의 캐릭터 분석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어느 희대의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바디더블>의 시작은 훗날에 벌어질 끔찍한 사건들에 대한 불길한 암시와 전조로 시작된다. 그리고 유능한 시체부검 의사이자 병리학자로 스탠포드 대학 출신(아마 테스 게리첸 자신의 ‘페르소나’인 듯) 냉철한 지성의 소유자 마우라 아일스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리비어(Revere) 출신의 보스턴 경찰(Boston Police Department) 소속의 여성 민완형사 제인 리졸 리가 만삭의 몸으로 차례로 출현한다.

여기서 재밌는 사실 하나는, 여성 작가가 두 명의 여성 메인 캐릭터들을 장기판의 말들처럼 심사숙고해서 이동시키면서 여성 희생자들만 살해하는 범인을 뒤쫓는다는 점이다. 사실 이 소설 <바디더블>에서 남자들의 역할은 대개의 경우 사건을 은폐하려거나 혹은 사건현장에서 삽질을 하는 등의 보조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바디더블>은 미스터리에서 시작해서, 스릴러로 진화해 가는 과정을 독자들에게 시전해 주고 있다. 자신과 외모나 성격 그리고 모든 면에서 일치하는 애너의 살인에서 비롯된 이야기는 들 줄과 씨줄처럼 얽히고설키는 이합집산의 묘미를 더해주고 있다. 다양한 사건들이 등장인물의 교묘하게 짜인 심리묘사를 통해, 결말로 나아간다.

어떻게 보면 평면적 대입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기 위해 뛰는 마우라 박사의 심리적 불안정은 필연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녀는 만나는 남자들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만, 과거의 실패한 결혼으로부터 오는 트라우마는 그녀의 방어기제만을 작동시킬 뿐이다. 아쉬운 점 중의 하나가, 극 초반에 그녀가 의지하는 남성으로 나오던 대니얼 브로피 신부의 존재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다는 점이었다.

다음으로 영화 <에일리언>의 열혈 여전사 리플리를 떠오르게 하는 여경 제인 리졸리(이름도 비슷하지 않은가). 소설에서도 우스갯소리로 언급이 되지만, 코엔 형제의 영화 <파고>에서 역시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만삭의 민완형사 캐릭터가 그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 두 주인공은 공통의 과제인 사건해결을 위해 뛰면서, 같은 동지애를 느끼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갈등하기도 한다. 아마 작가 테스 게리첸이 여자가 아니었으면 간과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마우라의 사십 여년 인생만큼이나 긴 세월 가운데 벌어지는 연쇄살인의 끈을 추적하는 재미가 이 소설 <바디더블>의 묘미였다. 개인적으로는 소설의 무대로 등장하는 자마이카 플레인, 네이틱, 브라이튼, 브루크라인 등의 익숙한 지명들이 한결 더 친근함을 형성시켜 주었다. 초복을 맞이하는 이 여름, 서늘한 서스펜스와 숨 막히는 스릴러를 원한다면 테스 게리첸의 <바디더블>이 제격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